'신유소백산록新遊小白山錄 2'
이튿날, 소백산 아래서 서두를 것 없는 아침이라 느긋하게 일어나도 눈치볼 사람도 시간에 쫒기는 부담도 없다. 어제밤 막걸리 두병도 못 비우는 거한 만찬으로 아직도 꺼지지 않은 배를 다독이면서도 산행을 위해 국물이 끝내주는 간편식으로 아침을 떼우고 죽령에 올랐다. 널널한 시간으로 여유롭게 거닐며 어제봤던 처녀치마와 눈맞춤 한다. 그사이 도착한 꽃친구들을 만나 유난히 덜컹거리는 마차를 타고 소백산의 품에 들었다.

천문대 원형지붕 아래 서북사면에 보이는 눈속의 처녀치마는 부끄러운듯 살포시 얼굴만 내밀고 있다. 그러거나말거나 눈맞춤하러온 이들은 아랑곳없이 얼굴을 들이대며 보랏빛 웃음을 나눈다. 

처녀치마의 보랏빛 연서보다 더 큰 끌림은 다른 곳에 있다. 언땅을 뚫고 막 깨어나고 있는 모데미풀의 청초함에 저절로 숨은 멈춰지고 눈만 초롱초롱 반짝인다. 여기저기 터지는 감탄사에 눈을 뜬 모데미들의 놀란 표정이 귀여운지 마침 하늘에선 싸락눈이 내려 한껏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에도 여기까지 왔으니 연화봉은 올라야겠기에 식당으로 향하는 일행을 뒤로하고 베낭도 카메라도 두고서 내달려 다녀왔다. 높은 산을 오르는 이유를 확인하고서야 느긋해지는 발걸음이다.

꽃구경도 식후경이라고 맛있기로는 아는 사람만 아는 소백산천문대 식당의 육개장에 산나물, 동해바다에서 올라온 문어묵은지찜이 어우러져 밥통의 밥은 이내 동이나고 말았다.

밤에는 하늘의 별로 낮에는 땅의 별로 별세를 받아 살림을 꾸리는 천문대장의 숨겨놓은 곳이 따로 있었다. 길에서 내려다본 숲에 노랑빛이 환하다. 야생에서 처음 봤던 그 모습대로 복수초가 불을 밝혔다. 이미 씨방을 맺은 남쪽의 개복수초와는 달리 그냥 복수초다. 이에 질세라 작디작은 선괭이눈도 무리지어 노랑빛을 하늘로 쏘아 올리는 중이다. 노랑꽃술이 매력적이던 너도바람꽃은 소백의 흰빛을 닮고 싶었는지 꽃술도 햐얗다. 길가에 호랑버들과 다람쥐꼬리의 배웅으로 꽃놀이는 끝났다.

볼 꽃은 봤다는 안도감이 있었을까. 걸어서 내려가는 발걸음이 유독 가볍다. 꽃쟁이들은 안다. 방심은 금물이라고 언제 어디서 불쑥 눈맞춤하자고 나설지 모르는 꽃들이 있기에 눈길은 해찰을 부리기 마련이다. 

원래 소백산맥 중에는 '희다' '높다' '거룩하다' 는 뜻에서 유래된 백산(白山)이 여러개 있는데. 그중 작은 백산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 소백산이라고 한다. 그 소백의 품에 들었으니 가슴 속 넘치는 기운은 애써 말하지 않아도 될 듯 싶다.

높고 거룩한 뜻이라도 일상의 소소한 것을 벗어나지 못한다. 지극히 낮고 깊어서 하늘이라도 품을 것만 같은 꽃쟁이들의 눈높이는 백산의 그 뜻과 결코 어긋나지 않는다. 이제는 반백으로 여물어가는 늘그막(?)에 벗들을 얻어 산에 드니 별 생각 없이 꽃보며 살아온 세월이 그저 고맙기만 하다. 

조선 사람 성여신(1546~1632)의 글로 소백산 유람에 피치못할 사정으로 오지 못한 벗, 짠물 건너에 사는 조은鳥隱 샘의 허전한 마음에 위로를 전한다.

"나는 알지 못하겠다.
공자께서 태산과 동산에 오르셨을 때와 
정자가 남여로 3일 동안 유람했을 때와 
주자가 눈 내리는 남악을 유람했을 때도
오늘 나만큼 활달했을까?"

*사진(모데미풀)은 밤낮으로 별세 받는 천문대장 성삼여 샘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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