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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온도 - 지극히 소소하지만 너무나도 따스한 이덕무의 위로
이덕무 지음, 한정주 엮음 / 다산초당 / 2018년 1월
평점 :
가을볕의 질감으로 다가온 문장
볕이 참으로 좋은 날이다. 이 가을 파란 하늘 아래 까실까실한 볕으로 만물이 뽀송뽀송 여물어 간다. 볕은 어느 계절에나 다 있지만 계절마다 질감이 다르다. 차가운 겨울을 무사히 건너기 위해서 따스함을 이 가을 속에서 얻고 가는 것이 순리라는 것처럼 볕이 주는 독특한 질감으로 인해 가을이 더 특별해진다.
이 독특한 볕처럼 사람의 가슴에 온기를 스미게 하는 것이 또 있다.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며 자신이 가진 온기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게 만드는 글이 그것이다. 이런 글을 만나면 일상에서 느끼는 버거운 삶이 위로 받기에 가까이 두고 자주 펼치게 된다. 나에게 있어 그런 문장을 만나게 된 계기는 옛사람들의 글을 접하면서부터다.
옛사람의 글에 매료된 계기가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있었다면 그 옛글을 본격적으로 탐독하게 된 중심에는 이덕무가 있다. 이덕무(李德懋,1741~1793)는 조선의 영 정조 시대를 살았던 문인이다. 가난한 서얼 출신으로 정조에 의해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되었고, 북학파로 불리며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유득공과 교류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의 문집으로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가 있다.
이 책 '문장의 온도'는 이덕무의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의 글을 고전연구가 한정주가 선별하여 엮고 옮겼다. "거창하고 화려하게 꾸미지 않은 소박한 문장인데도 몸과 마음이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문장"이라는 평을 받는 이덕무의 글은 가을볕처럼 사람의 마음에 온기를 불어 넣기에 충분하다.
“만약 한 사람의 지기知己를 얻을 수 있다면 나는 마땅히 십 년 동안 뽕나무를 심을 것이고, 일 년 동안 누에를 길러 손수 다섯 가지 색의 실을 염색할 것이다. 열흘에 한 가지 색의 실을 염색한다면 오십 일 만에 다섯 가지 색의 실을 염색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오색의 실을 따뜻한 봄날 햇볕에 쬐어 말리고, 아내에게 부탁해 수없이 단련한 금침으로 내 지기의 얼굴을 수놓게 해 기이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고옥古玉으로 축을 만들 것이다. 그것을 높게 치솟은 산과 한없이 흐르는 물 사이에 걸어 놓고 서로 말없이 마주하다가 해질녘에 가슴에 품고 돌아올 것이다.” (선귤당농소)
“마음에 맞는 시절에 마음에 맞는 친구를 만나고 마음에 맞는 말을 나누고 마음에 맞는 시와 글을 읽는다.이것이 최상의 즐거움이지만 지극히 드문 일이다. 이런 기회는 인생 동안 다 합해도 몇 번에 불과하다.” (선귤당농소)
이덕무의 글에 가진 독특함은 일상에서 사소하게 만나는 모든 것을 그냥 넘기지 않고 자신의 일상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는다는 것에 있어 보인다. 그러하기에 글에 담긴 사유의 깊이나 온도가 거부감 없이 읽는 이의 마음에 그대로 투영된다. 그것이 이덕무의 글을 자주 읽게 만들며 그가 이끄는 깊은 사유로 세계로 찾아들게 만드는 힘이 있다. 가을볕의 질감처럼 사람의 마음에 깊고 두터운 온기를 전하는 글과의 만남으로 나를 위안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