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곡유거기九曲幽居記

나는 일찌기 한 가지 상상을 한 적이 있다. 깊은 산중 인적이 끊긴 골짜기가 아닌 도성 안에 외지고 조용한 한 곳을 골라 몇 칸 집을 짓는다. 방 안에는 거문고와 서책, 술동이와 바둑판을 놓아 두고, 석벽을 담으로 삼고, 약간 평의 땅을 개간하여 아름다운 나무를 심어 멋진 새른 부른다. 그 나머지는 남새밭을 가꿔 채소를 심고 그것을 캐서 술안주를 삼는다. 또 콩 시렁과 포도나무 시렁을 만들어 서늘한 바람을 쐰다. 처마 앞에는 꽃과 수석을 놓는다. 꽃은 얻기 어려운 것을 구하지 않고 사시사철 묵은 것과 새 것이 이어 피도록 할 것이며, 수석은 가져오기 어려운 것을 찾지 않고 작지만 야위어 뼈가 드러나고 괴기한 것을 고른다.

뜻이 맞는 한 사람과 이웃하되 집을 짓고 집 안을 꾸밈이 대략 비슷하다. 대나무 엮어 사립문을 만들어 그리로 오간다. 마루에 서서 이웃을 부르면 소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의 발이 벌써 토방에 올라와 있을 것이다. 아무리 심한 비바람이라도 방해받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넉넉하게 노닐며 늙어 가리라.

*혜완 이용휴李用休(1708~1782)의 구곡유거기九曲幽居記다. 선비들이 자연에서 살고 싶어했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겼다. 그림은 다산 정약용의 제자 황상의 별서인 일속산방을 그린 소치 허련의 일속산방도다.

꽃 키우고 나무 심고자 했던 옛사람들의 마음이 오늘날 산과 들을 찾아 꽃을 보고자 하는 꽃쟁이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도시에서 멀지 않은 한적한 시골 마을에 터전을 잡았다. 크지 않은 집과 집 보다는 넓은 뜰도 마련했다. 나무를 심어 새도 불러왔고 꽃도 구해서 묵은 것과 새 것이 이어서 핀다. 손바닥 만한 텃밭도 있어 푸성귀는 가꿔며 이웃과 나누기까지 할 수 있다.

책은 이미 넘칠만큼 준비했고 언제든 가깝고 먼 공연장으로 나들이 다니며 눈과 귀를 즐겁게 할 수도 있다. 가까운 곳에 이웃도 있어 뜻 맞는 날이면 마주 앉아 술도 차도 마신다.

때론, 가끔씩 멀고 가까운 산과 들로 꽃보러 다니다보니 심심할 틈이 없다. 혼자서도 잘 노니 무엇을 더 갖추자고 아둥바둥거릴 일이 없다. 이렇게 노닐며 늙어가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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