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시스』를 읽다가 아일랜드 역사를 찾았고, 아일랜드의 역사를 찾다가 『영국사』와 『슬픈 아일랜드』를 읽고, 『영국사』를 읽다가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올리버 트위스트』와 『슬픈 아일랜드』는 아이들의 유랑 이야기가 담겨있다. 전쟁과 기아와 같은 상황은 사람들을 한 곳에 머물지 못하게 한다. 생존을 위해 길을 떠나게 한다. 『아일랜드 대기근』은 아일랜드의 19세기 역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감자 역병이 발생해서 기근이 들고, 아이들(에일리, 마이클, 페기)의 아버지는 국가 공공사업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떠난 지 1년 후, 이 어려운 시기에 태어난 막내 브리짓은 숨을 거둔다. 여기저기서 전염병이 돌고, 죽음의 소식들이 들려온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찾아가 식량을 구해오기 위해 떠난다. 집에 남은 세 아이들을 수용소(구빈원)에 데려가기 위해 집행관이 찾아오고, 아이들은 수용소를 향해 가는 무리에서 벗어나 도망한다. 아이들은 이모할머니들이 있는 도시를 향해 간다. 길에서 죽어가는 사람들과 시체를 목격하고, 부상을 입기도 하고, 열병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한다. 여행길에서 잘 가꾸어지고 열매와 꽃들이 가득한 귀족의 정원과 수용소에서 죽어가는 사람들, 영국으로 실려 가는 곡물을 보고 분노한 군중들의 소요를 목격한다. 아이들이 도착한 항구도시는 번화하고 물자가 넘쳐나고 사치스런 차림을 한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다.
작가는 어떤 비판이나 평가도 없이, 그저 아이들의 눈에 비친 광경만을 묘사하고 있다. 의심 없는 아이들의 시선에 들어오는 극단적 대비를 그냥 그리고 있다.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들이 읽어내고 비판하도록 하고 있다. 서쪽에서는 기아로 인해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고, 동부 해안에서는 물자가 넘쳐나고 곡물이 바다를 건너 수출되는 상황을 당시 아일랜드의 역사에서 인식하고 비판하도록 한다.
피터 그레이의 『아일랜드 대기근』은 1845년 ‘감자 대기근’ 전후의 역사와 기근 동안의 아일랜드인들의 고통과 영국 정부의 정책과 부패한 지주들의 착취와 농민들의 분노, 그리고 이민과 대기근이 남긴 유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845년 이전의 아일랜드 역시 가난한 사회였다. 12세기에 부분적으로 영국의 식민지가 된 아일랜드에서는 전쟁, 반란, 재산몰수가 잇따랐고. 16~17세기에 영국의 지배지역이 확대되면서 아일랜드의 발전은 중단되었다. 이때부터 아일랜드인들의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지역으로 이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번영과 빈곤의 극단을 경험하던 18세기, 1741년의 흉년은 ‘블리아드하인 안 아이르(학살의 해)’라고 불렀다. 1760년대 부유해진 영국계 아일랜드 엘리트층은 영국 지배자들에게 더욱 강경한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1794년 비밀결사인 아일랜드인 연맹은 1798년 봉기를 일으켰다. 1798년의 반란을 이용해 윌리엄 피트는 연합법안을 상정하고, 1800년 아일랜드 의회와 영국 의회가 통합되고 연합국가가 된다. 아일랜드 총독과 수상은 영국인이었고 런던에서 임명되었다.
연합 국가는 영국과 아일랜드 간의 자유무역을 시작, 경제제도를 통합했다. 경제발전이 늦었던 아일랜드가 영국에 비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18세기 부재지주들이 임대한 토지를 중간소작인이 영세소작인에게 토지를 전대하고 농업수익을 올렸는데 물가가 상승하면서 18세기 후반부터는 지주들이 직접 토지를 관리하면서 중간 소작인들이 쫓겨나게 된다. 인구증가로 극빈자들의 숫자가 증가했고, 가난의 문제를 멜서스식으로 이해했던 영국인들은 1830년대 자본투자의 부족으로 아일랜드의 문제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경제발전을 위한 공공사업보다는 영국의 새로운 구빈원 체계를 본딴 구빈법을 도입했다. 1845년 아일랜드의 수출부문은 고도로 상업화되었지만 그 한쪽에서 생계는 곤궁해져 갔다. 정부의 대책은 더뎠고, 감자 마름병 같은 사태만으로도 쓰러질 만큼 취약해져 갔다.
1828년의 구빈법에 따라 아일랜드는 130개의 구빈 연합체로 나누어졌고, 각 구빈연합체에 하나의 구빈원이 세워졌다. 1836년 빈곤상태라고 선언한 빈민수가 240만 명이었음을 볼 때 10만 명에 달하는 구빈원 전체 정원은 턱없이 모자랐다.
1845년~1846년에는 식료품 공급이 모자랐던 것은 사실이지만 대량 아사라는 최악의 사태만은 피할 수 있었다. 1845년 수확으로 영국인 125만 명을 먹일 만큼 수출했고 더 값싼 수입품이 그 부족분을 채웠다. 이 논리가 설득력이 있는 듯하지만 수출한 식량으로 수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었던 겨울 ‘기아’가 끝난 1847년 봄에 미국으로부터 곡물 수입이 시작되었다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정부는 공공공사의 체계를 개혁하고 고용을 늘림으로 구제책을 세웠지만 물가상승과 임금 동결로 빈민들의 고난은 여전했다. 공공공사는 실패했다.
기아로 인해 면역력을 상실한 사람들은 전염병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고, 이질 등의 역병으로 사람들은 죽어갔고, 노약자들이 수용된 구빈원은 전염병의 온상이 되었다. 구빈원은 ‘빈민의 바스티유 감옥’으로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1848년에 감자마름병은 다시 나타났고, 1851년까지 기근이 계속되었을 때, 새로운 구빈법은 토지를 소작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제에서 제외시켰고, 사람들이 토지로부터 축출되었다. 토지 자유거래는 파산상태인 사유지를 영국계 아일랜드 지주들에게 재분배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대기근 동안 분노한 농민들과 빈민들의 봉기가 다수 일어났다. 이후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에 불을 지피게 된다.
1846년~1855년 사이 수많은 아일랜드인들이 관선(棺船,Coffin Ship)를 타고 캐나다와 미국으로 이주했다. 대이동이 진행되었다.
“대기근은 근대 아일랜드 형성의 주요 요소로 작용했다. 물론 중요한 사회변화가 1845년 이전에도 많이 일어났지만, 대기근은 오늘날 역사를 움직이는 힘을 형성했고 또한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대기근 이후, 아일랜드는 19세기 유럽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처럼 특이한 인구통계는 다른 어느 나라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며, 그토록 끈질긴 악몽에 시달린 나라 또한 없으며, 그렇게 많은 사람을 해외로 떠나보낸 나라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피터 그레이 『아일랜드 대기근』 117p)”
아일랜드의 역사를 보면서 일제강점기를 자주 떠올리게 된다. 험난한 시절 어린 아이들의 고단하고 위험한 생존 여행을 보면서 국가가 보장해야 할 개인의 안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로완 길레스피 <기근Famine>,1997, 더블린 리피강 부둣가
죽은 자식의 주검을 둘러맨 채 휘청이며 어딘가로 떠나고 있다.(출처:오마이뉴스,2014.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