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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함께 춤을
베르트 케이제르 지음, 오혜경 옮김 / 마고북스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죽음은 삶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우리는 살면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마치 우리의 시계(視界)에 한계가 없듯이 그 한계가 없다." - 비트겐슈타인
저자 베르트 케이제르는 철학을 공부한 철학도이며, 뒤늦게 의학을 공부하여 네덜란드의 한 요양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의사이다. 이 책을 비롯해 <비트겐슈타인 철학 입문>이라는 철학서도 저술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저자는 시니컬하고 냉소적이며, 회의주의적인 태도를 종종 보인다.
본인이 의사이면서도 의학이라는 분야에 대해 냉소적,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좋아하는 것 같으면서도, 내가 보기엔 저자는 소크라테스를 더 닮았을만큼 모든 일에 있어서 질문이 많은 사람이다.
안락사를 결정하는 모든 과정에 있어서도, 동료 의사들과의 가벼운 대화에서도,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그는 진지하고 무거운 철학적 질문들을 서슴없이 계속 던진다.
그것이 안락사를 가장 많이 다루게 되는 이 곳 요양병원에서의 일을 잘 수행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짐작해본다.
안락사를 요청하는 환자들의 확고한 의지를 파악하는 일에는 끊임없는 의심과 질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본인이 직접 안락사의 의지를 보였으면서도 마지막 순간에 흔들리는 경우도 있고, 자신의 의지가 아닌 채 안락사를 요청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확고한 의지를 포착하는 일이 정말 어려운 일임을 저자의 의사로서의 고뇌와 딜레마에서 알 수 있다.
네덜란드는 안락사가 가장 먼저 법제화된 나라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요양병원과 비교해볼 때 죽음을 결정하는 안락사의 문제가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생의 마지막까지 무기력하게 기다리기만 하는 수동적인 풍경이 아니라 환자, 가족, 의료진 이 세 영역의 의견이 활발하게 오가는 적극적인 모습들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죽음을 결정하는 것이 법제화 된다는 사실이, 삶에 있어서 더 주체적이고 적극적이 될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 추측해본다.
나는 지금까지 안락사에 관한 문제를 철저히 '주체'의 측면에서만 생각해왔다. 죽음을 결정하는 데에 '나'의 의사가 중요하다고 그렇게 편협하게만 생각해왔다.
그러나 안락사를 결정하는 주체가 엄격하게 '나 자신'이어야 한다는 사실 말고도 안락사에 관한 문제는 본질적인 다양한 문제들이 얽혀 있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안락사가 가장 많이 행해지는 요양병원에서 그 현장을 세세히 기록한 의사의 책이기 때문에, 단지 법으로 명시된 것에서는 알 수 없는 '현장'의 내용들이 자세히 드러나있다.
이 책은 저자가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환자들의 죽음에 이르는 여정을 기록한 병원 일지에 가까운 글이 담겨있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게 참으로 어렵고 고통스럽기도 했다.
저자가 경험한 환자들의 죽음을 독자 또한 같이 경험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리 밝혀두자면 이 책은 의학 드라마처럼 인물들의 '감정'이라는 것이 개입되어있기보다는, 환자가 삶의 마지막을 결정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질문들과 그에 대한 솔직한 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왜 저자는 이상해보일수도 있는 철학적 질문들을 계속해서 던지는지 나는 처음에 이 책을 읽을 때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병으로 고통받고 이제는 삶의 끝에 와 있는 환자들에게, 그 마지막 순간에도 시니컬하고 냉소적인 태도로 끊임없이 질문을 제시하는 걸까? 그 의문이 결국 책에 마지막에 이르러서 풀렸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알지 못하면서 죽는다. 생각해보면 도대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 죽는 일이 가능하기나 할까? 표현이 좀 어색하긴 하지만, 우리는 태어날 때처럼 죽는다. 어떤 사람도 스스로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지 못하듯이 스스로 죽을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은 정확하게 정의하기가 어렵다."
"사람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서 죽어간다."
"그러므로 '그 여자는 죽어 간다'라는 표현은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나 분명하게 보이는 현상이며 대체로는 지난 후에 되돌아보았을 때나 분명하게 보이는 현상이다."
이 구절들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태어나는 것과 같이 죽는다고 한다.
태어나는 순간에 '내가 태어났구나'를 전혀 느낄 수 없듯이, 죽는 순간에도 '나는 죽는구나'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죽는다고 한다.
여기에서 한 사람의 죽음이 그저 그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님을 잘 알 수 있다.
하나의 생명이 탄생할 때도 산모뿐만 아니라 그 과정을 무사하게 치를 수 있도록 돕는 의료진들, 출생신고부터 생애 주기에 따른 행정적 절차들 담당하는 공무원들 등과 같이 마찬가지로, 죽음에 부수되는 절차와 사람들이 있다.
의사의 사망선고가 내려지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 벌어지는 절차들.
시신이 영안실로 이동되고, 장례식 절차가 행해지고, 남겨진 가족들이 사망신고 하는 등의 행정적 절차들과 상속에 관한 법적인 절차들이 진행된다.
죽음은 절대로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인간을 자유에서 멀어지게 한다.
이것이 안락사에 관한 문제에 있어 참 까다로운 문제들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죽음을 결정짓는 문제들에 사회적인 문제들이 맞물린다.
그러나 죽음에 부수되는 사회적인 절차들보다도, 죽음을 결정하는 주체의 '의지'에 대해서 저자는 초점을 맞춘다.
93세 왈데이크 부인은 이 병원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다. 5년 전의 어려운 수술을 거치고도 살아서 주어진 생을 어떻게든 영위하고 있는 와중에 동맥폐색으로 인한 다리 절단을 결정해야하는 순간이 왔다.
다리를 절단해야만 삶을 연장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녀의 두 아들은 5년 전부터 마치 자신의 어머니가 끈질기게 살아있다는 듯이, '이제 끝이 나야 합니다' 라고 의사에게 안락사를 요구한다.
이 아들들이 어머니를 싫어해서 이런 말과 행동을 던지느냐고? 전혀 아니다.
아들들은 어머니를 사랑한다. 어머니가 5년 전, 아니 그 전부터 겪어온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 보아온 그들이다. 어머니의 고통을 보면서, 어머니의 아름다운 시절들을 떠올리며 속절없이 망가져 가는 비참한 모습을 두 아들은 지켜보기가 괴로웠던 것이다.
그러나 의사가 이 아들들의 행태에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하다.
심지어 병든 애완동물도 안락사를 해준다는 비유를 들면서 자신의 어머니에게도 안락사를 시행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으니 말이다.
"당신 어머니는 개가 아니지 않습니까?" 의사는 화가 나서 답한다.
그러나 나는 이 다음 아들의 말에 조금은 수긍이 갔다.
"아니요, 차라리 개였더라면. 그랬더라면 어머니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안락사를 요구하는 아들의 행태가 겉에서 보기에 비정함과 잔인함만이 보인다면, 당신은 병으로 인한 끔찍한 고통을 겪어본 적이 없거나 가까이에서 그 고통을 지켜본 적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온 몸을 파괴하는 끔찍한 고통은 불굴의 의지로 가득 찬 정신마저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가족들의 정신과 의지마저 무너뜨리고야 만다.
그래서 말기에 이른 암이나 그 밖의 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부모님을 지켜보는 자식들이 부모님의 안락사를 요구하거나 연명치료 중단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환자는 괴로워하고, 가족들은 협박을 하며, 동료들은 얼굴을 찌푸리고, 죽음은 미소를 짓는데 젊은 의사는 이 난동 속에서 미친 듯이 지그 댄스(아일랜드의 추운 날씨를 견디기 위해서 추던 춤으로 탭 댄스의 원형이 되었다) 를 춘다.
한때 그 의사는 죽음과 함께 완벽하게 통제된 탱고를 추면서 무도회장을 미끄러질 수 있을 것이라고 꿈꾸었다."
죽음에 가까워지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환자 앞에서, 연명치료 중단이나 안락사를 의논하는 가족들과 난감해하는 의료진들. 이들이 다함께 병동에 있는 상황에서 이 모든 것을 결정해야만 하는 의사의 심정이 바로 이 문장에서처럼 '지그댄스'를 춘다고 비유되었다.
이 책의 제목 '죽음과 함께 춤을'은 죽음이 가까이 온 상황에서도 즐겁게 맞이하며 춤을 추라는 낭만적인 뜻을 포함한 것이 절대로 아니다.
환자, 가족, 의료진 이 모두가 원하는 방향이 서로 어긋나고 길을 잃고 헤매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 완벽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오랜 기간 공부하고 수련해왔을 한 의사의 현실 파악이라는 비극적인 뜻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리. 담당의사는 어쨌든 결정해야만 한다. 모두가 원하는 방향으로? 아니다.
이 책의 저자인 요양병원 의사는 모든 순간에 시니컬하고 냉소적인 철학적 질문을 던지며, 안락사를 원하는 환자 앞에서도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안락사를 요구하는 왈데이크 부인의 두 아들에게 저자는 말한다.
"그녀의 생명은 본인이 분명하게 요구할 때에만 끝낼 수 있다."
그에 반기를 들며, 어머니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고통을 끝내 드릴 수도 있다는 아들의 말에 저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그건 '살인'이라고.
살인과 안락사의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장기간의 고통 속에서도 안락사를 스스로 요구하지 않는 것이 분명한 환자에게, 설령 그 자식들이 부모님의 고통을 지켜보기가 괴롭다는 이유로 안락사를 행하는 것은 '살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끝내 환자 자신의 안락사를 결정할 수 없을 만큼 의식을 잃게 된 상황 속에서도, 가족들이 안락사를 결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왈데이크 부인의 사례에서 의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란 환자의 고통을 덜어드리기 위해 과량의 모르핀을 주사하는 것이고, 그것이 동맥폐색으로 인한 다리절단을 하지 않아도 될 유일한 방법이라고 두 아들에게 말한다.
끝내는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과량의 모르핀을 주사해도 생이 일주일 안에 끝날 것이라 의사는 짐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실에서 환자, 가족, 의료진이 합의볼 수 있는 현실적인 결정이다.
그러면서 의사는 두 아들에게 말한다.
"안락사를 결정하는 일이 쉽게 처리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지 마십시오. 결국 이러한 숙제는 환자의 마지막 일주일간 주사를 놓고 매일 다리를 소독해 주어야 하는 사람들의 어깨에 고스란히 지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환자와 그 가족들이 직면하는 어려운 결정의 상황이 있고, 그에 따르는 의료진들의 어려운 숙제와 무거운 짐이 있고, 그 고뇌는 모두에게 얼마나 힘겨운 것인지.
우리들은 삶의 마지막을 결정하는 상황 속에서도 이렇게 혼자만의 숙제가 아니라, 모두와 함께 숙제를 끝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이 책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사회가 안락사에 관한 법과 기준을 만드는 것에 꼭 반영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죽음에 관련된 절차들이 모든 게 무 자르듯 딱 맞추어서 진행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기로에 서 있는 사람들의 고뇌와 부담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절차가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수많은 잡음이 일어나리라 예상되기도 한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남겨진 가족들의 심정 속에는 슬픔만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 뒤의 절차들이 진행되면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을 보아온 경험이 있다.
죽음에 대한 비통함은 의료진에 대한 날선 증오와 비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것을 똑똑히 두 눈으로 보았던 적이 있다. 실제로 의료진은 할 도리를 다했을 뿐 어떠한 것을 더 하지도, 덜 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남겨진 가족들에게는 그들이 어떠한 것을 잘 못 했거나, 무기력하게 덜 했을 것이라는 의문이 가시질 않는다. 망자의 가족들을 비난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다만 이해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의료진을 향한 그들의 원망은 어쩌면 인간이기에 가지게 되는 당연한 심리적인 현상일지도 모른다.
이미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이성적인 사고가 제대로 작동되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할 수 있는 것이 과량의 모르핀만을 주입하는 것이 전부인 무기력한 상황에서, 죽음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의료진들이 무기력한 존재라고 비난하는 것이 과연 옳은 걸까?
그렇게 의료진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본다면, 그런 사회에서는 절대로 안락사가 제대로 시행될 수가 없다.
의료진과 환자, 그리고 그 가족들 간의 서로 다른 입장을 헤아리고 하나의 결정을 내리는 일은,
안락사를 법으로 결정하기에 앞서 반드시 해결되어야만 하는 선결문제라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 확실하게 깨달았다.
"인생은 한 포기 풀과 같다. 들판의 꽃처럼 핀다. 바람이 불면 사라진다. 꽃이 있던 자리는 더 이상 꽃을 알지 못한다."
성경의 한 구절이라고 한다. 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서 성경을 잘 모르지만 이 구절이 정말 와 닿았다.
냉정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살아서 있던 자리에는 또 다른 생명들이 와서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생명이 이어져 가는 자연의 섭리 속에서, 인간의 죽음을 결정짓는 문제가 자칫 허무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결국 사라져서 잊히게 되는, 언젠가는 그 누구도 존재 자체를 모르게 되는 이름 모를 들풀일테니.
그러나 죽음이 탄생과 같은 것이라면, 우리가 최초에 탄생했을 때 세상 모두가 기뻐했듯이 죽음 또한 적어도 그만큼의 관심과 존중을 받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존엄한 죽음이라는 것은 말만 그렇듯해서는 안된다.
저자는 병원의 이사진들이 안락사에 대한 조례를 제정하는 문서에서 형식적이고 관념적인 안락사에 대한 문구들을 보며 비판적인 어조로 말했다.
"실제로 죽어가는 사람을 다루어 본 경험이 전혀 없는 이사들이, 인간의 자기 결정권에 견고한 형이상학적 기초를 부여하는 당당한 머리말을 만듦으로써 그러한 경험 부족을 보상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회의 중에 그들은 모두 지나치게 윤리적으로 굴면서 언제 이 삶을 떠나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인간이 가지는 고유한 특권을 찬양하는 데 치우치느라고 실제적인 문제들, 이를테면 어떤 독극물을 사용할 것인가 같은 문제에는 별로 관심을 주지 않았다."
윤리적이고 신념적인 것보다는 실제로 죽음을 결정하는 이에게 다가오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먼저임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죽음 이후의 순간에 나의 육체에 관한 것은 철저히 남에게 맡겨진다.
매일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며 단장했던 나의 행동은 죽음의 순간 이후로는 내가 할 수 없다.
나의 시신이 곱게 단장되고, 묻히는 과정은 남겨진 가족들과 그에 관련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하게 된다.
이럴 때면 세상에 다양한 직업이 있다는 것에 참으로 안심이 된다.
말렌스타인 부인의 사례에서 우리가 한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대해야 할 지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답을 찾았다.
말렌스타인 부인은 폐 기능이 심하게 떨어져서 혼수상태로 계속 누워있었고, 그것을 지켜보는 남편은 참다 못해 의사에게 어떻게 좀 해보라고 소리 지른다. 그 '어떻게 좀 해보세요!' 라는 말에는 안락사를 시행해 줄 것을 요구하는 뜻이 담겨 있다. 그녀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이 의사에게 그것을 바란다. 그러나 저자는 거절하며 안락사를 시행하는 자신만의 철학에 대해서 제시한다.
"나의 제 1계명은 미관상의 이유로 생명을 종결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보는 사람이 고통을 지켜보는 것이 어렵다고 해서 생명을 끊지는 말자는 뜻이다."
환자 본인이 안락사를 결정할 수 없을 만큼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기 괴로운 가족들이 안락사를 요구한다고 해서 그것을 행하는 것은 어쩌면 '살인'일수도 있다.
그래서 저자는 그것을 '미관상의 이유'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지켜보기 괴롭다는 이유로 안락사를 행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환자 자신의 확고한 의지로써 죽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절대 안락사를 허용할 수 없음을 저자는 계속해서 강조한다.
결국 말레스타인 부인의 안락사가 진행되고, 저자는 약을 주입하고 시간이 지나서 다시 병실에 돌아왔을 때 그녀의 얼굴 위에 올려진 베개를 보며 경악을 한다.
아내가 힘겹게 죽어가는 과정을 며칠 동안 곁에서 지켜보며 참다 못해 남편이 그녀를 베개로 질식시킨 줄 알고 놀랐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이해가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설명을 덧붙이자면, 죽어가는 아내를 곁에서 남편이 괴로워하며 지켜볼 수 밖에 없도록 만든 상황에 저자는 죄책감을 가지면서도 안락사를 계속 미루었던 상황이었고, 안락사를 결정한 순간에도 남편은 그것을 믿지 못해 결국은 베개로 아내를 질식시켜서 고통에서 드디어 해방시킨 것 아닐까 생각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마지막 순간에는 이토록 당사자 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이들이 참혹한 상황에 갇히게 됨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한 사람의 임종을 대하는 존엄한 행동이 담겨 있다.
'아내의 얼굴에 베개를 올려놓은 행위'
그것은 안락사를 행하는 약물을 주사한 후, 죽은 아내의 입이 힘없이 벌어지는 모습을 보고 남편이 턱을 받치기 위해서 베개를 올려놓은 것이었다.
죽어가는 마당에 입이 벌려지든 말든 그 모습에 누가 과연 신경이나 쓸까.
나 자신의 마지막 모습은 내가 단장할 수 없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약물이 주입된 아내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마지막 모습을 아름답게 지켜주기 위해서 입이 벌려지지 않도록 한 것이다.
아내의 폐기능이 떨어지고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계속해서 곁에서 지켜봐 온 남편은 그녀의 '죽음의 순간' 에만 치중하지 않았다.
죽은 아내를 편안한 자세로 바꿔 놓고, 틀니를 다시 끼우고, 머리를 빗기고, 손을 가지런히 모아 놓고, 얼굴을 닦아주고, 입을 다물게 하려고 베개를 올려 놓은 행위들.
이미 죽은 아내의 몸을 그렇게 소중하게 다루는 남편은 흔하지 않다고 저자는 말했다.
안락사를 결정하고 그것을 행하는 것만이 존엄한 죽음을 대하는 의식이 아니다.
이미 죽은 모습을 아름답게 단장하며 한 사람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 있다.
죽음을 결정하는 문제에 관해 논의할 때, 죽음을 맞이한 한 인간의 마지막 모습을 아름답게 보살피는 정성 또한 함께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절차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것들' 또한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는 의식으로서 챙겨야 할 부분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년 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의 일이 생각이 났다.
그 때는 코로나가 나타나기 전이라서 병문안 가는 일이 지금보다는 엄격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께서 급성 폐렴으로 입원하시고, 폐암 초기 진단을 받았으나 결국 급작스럽게 폐 기능이 떨어지시는 그 모든 과정을 나는 어머니와 함께 지켜보았다.
이 책의 환자들의 죽음을 묘사한 설명들과 다르지 않았다.
폐 기능이 심하게 떨어져서 혼수상태에 빠지시고 가만히 누워계셨던 모습이 나에게 남아있는 생의 마지막 모습이셨다.
그러한 상태로 며칠을 계속 누워계시던 중 나는 잠시 할머니 댁에 들러 할머니께서 부탁하신 일을 처리하러 나갔고, 그 사이에 할아버지께서 임종하셨다.
한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정의내릴까?
저자는 그것이 참 어려운 일이라 말한다.
의학적으로 사망선고를 내리는 것 말고도 죽음의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볼 지점이 많은 것 같다.
하지만 나와 할머니가 느꼈던, 한 사람의 죽음을 체감했던 순간이 있었다.
화장터에서 가족들과 함께 대기실에서 기다리다가, 모든 과정이 끝나고 할아버지의 유골함을 보았는데 가루 속에 묻힌 어떤 물질이 보이는 것이었다.
가족들과 그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다가, 그것이 바로 인공 관절 금속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할아버지께서는 입원하기 몇 년 전에 다리 관절 문제로 인공 관절 수술을 받으셨다.
무릎 안에 들어있던 금속을 유골함에서 보게 되다니.
그제서야 비로소 한 사람의 죽음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생생하게 살아 움직였던, 빛나던 육체가 가루가 되어 병 속에 들어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우리들의 육체가 다른 무엇으로 변하는 것이, 어렸을 때 내 눈에 새겨진 죽음의 모습이었다.
병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은 어쩌면, 그것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 괴로워서 정신마저도 회피하게 된다.
그래서 누군가의 죽음을 체감하는 순간은 훨씬 더 이후가 되는 것 같다.
"제인구달은 새끼가 죽은 후에도 며칠 동안 새끼를 안고 다니던 어미 침팬지가 축 늘어진 새끼의 시체에 대고 자신의 젖을 헛되이 내밀고 있는 모습을 묘사했다. 어린 침팬지가 시체가 되었다는 깨달음이 그렇게 서서히 찾아오는 과정이, 우리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급작스러운 변화보다 더 이해하기 쉽다.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급작스러운 변화를 지각하지 못한다."
어미 침팬지의 행동이 정말 이해가 된다. 나도 할아버지가 병상에 계셨을 때 그 임종 순간에는 오히려 슬픔이나 상실감을 느끼지 못했다.
화장터에서 유골함에 든 인공 관절 금속을 보았을 때나, 장례식장에서 차를 타고 납골당까지 가는 길에 할아버지가 생전에 사셨던 동네를 창 밖으로 바라볼 때, 그 때 처음으로 울었던 기억이 난다.
누군가의 죽음을 체감하는 것은 죽음의 순간보다 훨씬 더 이후에 다가오게 된다는 걸 침팬지도 안다.
우리들의 지각과 감정 사이에 물리적인 거리가 존재한다는 걸.
그래서 지각과 감정 사이에 작용하는 것들은 불가사의이다. 알 수 없는 영역이다.
이것이 죽음을 결정하는 문제에서 작용하는 난제의 본질적인 것임을 꼭 다루었으면 좋겠다.
한 사람의 죽음을 다루는 문제에서 각자가 보고 느끼는 것 사이에 있는 괴리감이, 안락사를 결정하는 문제에 어설프게 개입하게 되면 안락사의 본래 취지는 실현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의료적, 행정적, 법적인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다.
죽음에 부수되는 절차들이 진행되면서 그렇게 한 사람의 죽음은 사라져간다.
"삶을 계속하시오.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무덤까지 가시오."
저자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포기하려고 했던 환자들의 안락사 요청을 거부했다.
자신의 중요한 결정들을 남에게 미루는 환자의 안락사 요청도 거부한다.
삶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열렬히 부딪혀 본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확고한 의지만을 안락사의 결정에 있어서 허락한다.
그마저도 냉소적으로 질문을 던지며,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안락사를 행하는 자신의 고뇌와 딜레마에서 고통스러워한다.
이런 의사로서의 모습이 안락사를 행하는 사람의 진정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환자가 안락사를 요청하는 것에서 그저 형식적이나 의학적인 것만 판단한다면, 죽음에 대한 확고한 의지 같은 것은 포착할 수 없을테고, 그러한 상태에서 안락사를 행하는 것은 살인 행위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순간까지 용기내서 삶에 부딪혀 본 사람과 마지막까지 환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의지에 대해 질문을 하는 의사. 이 두 영역이 맞아 떨어질 때 안락사의 진정한 취지가 실현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역시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영역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선택권의 문제라는 걸.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안락사에 관한 논의가 좀처럼 잘 진행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죽음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끝까지 싸우다 죽는 것이 '의연한' 것일까?
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죽음을 대하는 의식'에 대해 살아있을 때 진지하게 고민을 해봐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이미 예전에 절판된 책이지만, 현재의 네덜란드의 안락사 관련 법률을 첨부해서 다시 편집되어 출간되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