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렸을 때부터 '극'을 사랑했다.
이야기가 있고 사람이 있는 세상 모든 '극'이 나의 놀이터였다.
한창 밖에 나가서 뛰어놀 나이에, 나는 그것들의 무대 앞에 앉아 말없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야기 속 세상이 내가 살고 있는 세상보다 더 커 보이는 느낌에 압도되었다.
이야기 속에서 보여주는 인간의 거짓과 비현실적인 행동이 진실처럼 느껴졌고 달콤했다.
현실로 눈을 돌리자, 극과 현실 세계가 어떻게 다른지 알게 되었다.
'영화는 영화일 뿐' 이라고 어떤 영화 감독이 말했다.
그건 영화가 세상의 일부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 극은 현실보다 더 큰 '우주'.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인간의 상상과 창작의 세계의 지극히 일부라는 생각이 든다.
100년도 채 살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육체 속에 갇힌 인간이,
과연 어디까지 가볼 수 있을 것인가?
그 탐험과 여행의 종착지가 바로 예술.
인간 세상 속에 예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세상 밖으로 나를 해방시킬 때
바로 거기에 예술이 있다.
평생 극을 보아오면서, 나를 이 세상에서 해방시킬 수 있게 되었다.
'무대'는 나에게 있어 가장 환상적인 공간이다.
지방의 초라한 예술 공간에서도 무대가 있고 그 위에 사람이 올라가고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바로 그것이 '연출'의 마법이다.
한참 길을 잃고 방황했을 때, 극장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막이 오르고 배우가 등장하여 뭐라 대사를 건네는데, 굉장히 신비한 것을 느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대사들이 허공에 춤추듯 흘러 다니면서 객석 사이로 바람처럼 불어오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배우들의 움직임과 호흡을 따라가고 있었다.
현실과 무대의 경계를 넘나들게 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연극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되었고, 연극 연출을 배우고 싶어서 공부했었다.
희곡, 시나리오 쓰는 것부터 시작해서 영화, 드라마, 연극 모든 것을 보고 공부하며 그 속의 세상에 빠져 살았다.
중학생 때부터 좋아해왔던 강은경, 서숙향 각본 작가님.
이 작가님들의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극의 세계에 빠졌었고,
드라마가 사람에게 주는 '에너지'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노지마 신지 각본 작가님.
그 분의 작품 세계는 정말 환상적이다.
노지마 신지의 작품을 중학생 때 처음 접했는데, 무려 그것이 <고교교사> 였다.
표면적으로는 '교사와 학생의 사랑'을 다루었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의 약함과 두려움의 실체를 아주 섬세하게 인물들의 심리로 보여주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이 담겨있다.
무엇보다 90년대 일본의 사회 상이 배경이고, 작가가 생각하는 문제의식들이 인물들의 행동으로 하여금 강렬하게 나타나서 당시에 TV에 방영되었을 때 엄청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진실을 외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노지마 신지의 각본과 그 드라마의 연출은 너무나도 섬세하고 비극적이고 아름다웠고,
겨우 중학생이었던 나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때부터 꾸준히 노지마 신지의 작품을 보아왔고, 많은 것을 배웠다.
또 일본의 천재 작가, 연출가로 알려져 있는 미타니 코키.
연극이 외면받고 있는 현대에서 연극 무대를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대놓고 드러내는 사람이다.
심지어 영화 촬영 현장도 그에게는 연극 무대일 정도로, 연극의 요소를 생생하게 표현하며 온갖 마법을 부린다.
그의 작품 중에 '매직 아워'라는 것이 있다.
영화 속에 연극이 있고, 연극 속에 영화가 있다는 말은 그 작품을 위한 것.
난 그 영화를 볼 때마다 운다. 심지어 그 영화는 코미디인데도.
연극과 예술의 형식, 내용, 표현, 기술 등 모든 면에서 어느 것 하나 깨부순 것이 없는데도,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미타니 코키만의 무대를 보여준다.
그리고 관객을 웃게 만들고 울게 만든다.
내가 꿈꿔왔던 '무대'가 이미 그의 작품에 있었다.
거기에 나오는 '타카세 마코토'라는 원로 배우의 대사를 소개한다.
"이제 금방이군, 매직 아워. 하루 중에 최고의 순간.
그걸 놓치면 눈 깜빡하는 사이 밤이 되어버리지.
무라타군, 매직 아워를 놓쳤을 때의 대처법을 아는가?
간단하네. 내일을 기다리면 돼.
매직 아워는 반드시 다시 오네. 이 세상에 해가 뜨는 한.
호텔의 마담에게 들었네. 배우 그만하려 한다고.
여기서만 하는 얘긴데, 난 카메라가 무서워서 지금도 촬영을 알리는 소리에 다리가 후들거려.
스크린 속의 내가 당당하게 보이는 건 스탭들의 덕이네. 좋은 스탭들을 만났던 거지.
암흑가의 용심봉 라스트 씬, 자네는 내 표정을 칭찬했지.
그건 촬영지가 너무 추워서 콧물이 나오려고 해서, 그걸 감추려고 한 표정이야.
너무 이르지 않나? 포기하기에는. 자네는 아직 젊어.
거기다 비밀이지만, 나도 아직 기다리고 있다네. 다시 올 매직 아워를.
이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이대로 쓰러질 순 없지 않나!"
타카세 마코토는 젊었을 때 유명한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한 이후로 그 다음에는 흥행한 작품이 없는 배우로 설정이 되어 있다. 한마디로 한물 간 배우로 사람들에게는 각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심지어 촬영 스탭들도 그의 예전 명성을 모르는 것인지, 그의 이름을 부를 때 '할아버지' 라고 부른다.
그런데도 이 배우는 인생에 달관한 표정을 지으며 아주 유쾌하게 촬영에 임한다.
머리가 다 하얘진 나이에도, 지팡이를 짚으면서도 연기를 계속해서 한다. 배우로 살아간다.
배우를 포기하려는 한 젊은 배우에게 건네는 말이 바로 위의 대사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저 부분에서 운다.
평생 배우로 살아왔음에도 아직도 촬영할 때 다리가 후들거린다는 말이 엄청난 위로가 되었다.
두려운데도 그가 보여주는 연기는 전혀 두려움이 보이지 않는, 자연스러운 연기라서 더 그렇다.
어렸을 때는 이 대사가 그저 감동이었지만, 나이가 들어서 이 대사를 다시 접하고서 달리 보이는 것이 있다.
젊은 배우가 동경했던 노배우의 전성기 시절 카리스마 넘치는 장면은, 사실 콧물을 참기 위해 경직되었던 것이라는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우리가 타인에 대해서 동경하는 것에는 이런 웃픈 이야기들이 숨어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것을 동경할 때에는 그 안에 아픈 이야기도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지금 나를 구성하는 토대에는 이렇게 멋진 각본 작가들과 연출가들의 작품이 자리 잡고 있다.
비록 나는 연극 연출 공부를 하다가 입시도 치르기 전에 교통사고가 났고,
그로 인해 연출가의 꿈을 접고 다른 길을 가게 되었지만.
많은 작품들을 보고 배우고 공부하면서, 세상과 나에 대해 제대로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진정한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질문하고, 끊임없이 변화해나가는 과정은 어쩌면 연출의 기본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내가 변해야 세상도 변하고, 세상의 변화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연출에는 변화의 힘이 깃들어 있다는 것도 바로 이제부터 소개할 이상우 연출가의 책 <야생연극>에서 배웠다.
이상우 감독님은 극단 <차이무>를 창단하셨고, 한예종에서 오랫동안 연출을 가르치셨다.
교수님으로서의 면모보다는 철저히 연극인, 연출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이 너무 멋지다.
한예종의 어떤 학생분께서, 이상우 감독님은 나이가 들기는 커녕 점점 더 어려지시는 것 같다고 말한 영상을 보았다.
그만큼 생각이 나이 들지 않다는 뜻.
우리나라에 거장 연출가가 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 것이 속상하지만.
연극에 대해, 예술에 대해, 세상에 대해 이상우 감독님이 평생 생각하고 적어오신 창작노트에서
나 또한 많은 것을 배웠다.
이 책은 짤막한 글들이 거의 1000개쯤 되는 연극의 막 형식으로 전개 된다.
<야생연극>에서 나는 연극의 정수를 느낄 수 있었다.
'한 인간이 연극에 대해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할 수 있는가' 를 보여주는 책이다.
그저 한 사람의 생각을 끄적인 생각 노트이니, 연출 공부하는 분들이 있다면 가볍게 읽어보면 좋겠다.
사실 짧은 글들이 모여있지만, 절대 가볍지 않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엄청난 아이디어로 방대한 분량의 글을 적어야만 했다.
자신을 돌아보고,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야생연극>을 통해 많이 느껴보길 바란다.
아래 부분부터는 이 책에서 인용한 구절과 그에 대한 나의 생각들로 구성되어 있다.
야생은 자연, 생명, 힘, 신비, 발견, 경이, 길들지 않은,
아직 모르는, 두려운, 새로운, 설레는, 끔찍한, 그런 세상.
그래서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너무나 섬세해서 오염되기도 부서지기도 쉬운 그런 세상.
야생에는 까닭 없는 형태도, 까닭 없는 행동도 없습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야생'에 대한 낭만적인 정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애매몽롱한 태도로 이 시대의 연극을 만들 수 있을까?' 라는 감독님의 질문이 있다.
어느 허리케인 연구자의 말로는, '허리케인은 가장 치명적이 되는 순간 가장 아름답다'고.
그런데 그 순간, 그 허리케인 속으로 들어가면 죽는다고 한다.
'치명적인 아름다운' 연극이란, 죽음으로 치닫는 열정까지도 결국 자연의 일부인 것임을 아는
'야생 속의 생명'이 보여주는 연극인 것일까?
야생 그대로의 무대를 보고 느끼고 만들어 오셨을 감독님의 눈 앞에 수없이 펼쳐진 풍경들을 상상해본다.
그 야생 같은 무대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생각과 고민과 두려움을 가져야만 했을까.
그러나 진정 행복했으리라.
그냥 아름다움이 아닌, '치명적인 아름다움'.
야생의 것이 되었을 때 비로소 빛날 수 있는 아름다움!
바둑에서 고수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승패보다 활기가 앞서야 한다."
당연히 이기는 게 목표지만, '살아 있는 바둑'이 아니면 둘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이겨도 기분이 좋지 않은 바둑-'죽은 바둑'
내 연극은 '죽은' 연극인가? '산' 연극인가?
->내가 만든 작품에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멋졌다. 나는 진정 살아있는가?
생리적인 작용으로서의 '살아있다'가 아닌, 내 온전한 정신과 의지로 삶을 이끌어 나가고 있는가?
나의 생각과 행동에 철저하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 언제나 그럴 것.
그리고 잘못된 것과는 절대 타협하지 않을 것!
연극의 생명이란?
끊임없는 움직임, 끊임없는 관계, 끊임없는 변화.
변화는 생명의 첫 번째 증거-살아 있기 때문에 변화하는 것.
살아 있는 연극은 스스로 변화합니다.
->너무 멋지지 않은가! 연극을 살아 있는 생명체로 보다니. 나도 '무대'라는 공간을 그렇게 보아왔다.
무대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들의 향연, 축제. 살아 있는 것들의 부단한 움직임.
연극은 거대한 생명체이다. 감독님이 말했듯 '우주' 그 자체.
그러니 연극에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
연극이 우주라면, 그 속에서 빛나는 모든 존재들이 보여주는 무대, 그 자체가 정답!
연극은 구성 요소들의 '에너지'가 만들어내는 '효과'
배우와 무대와 음악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생명 효과'
그래서 연극은 '요동상태Fluctuatiion'
무언가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일본의 생물학자인, '후쿠오카 신이치'의 저서들에서 감독님이 통찰한 연극의 특성.
연극 무대를 보고 있으면,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정말 마법처럼 느껴진다.
그건 연출, 배우, 무대의 모든 요소들의 온 에너지가 결합한 화학의 세계인 것이다.
온갖 분자들이 부딪히고 결합하고 분해되는 요동상태!
무대 위의 세계도 이렇게 시시각각 사건이 벌어지고, 에너지가 부딪히고, 변화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그렇다. '변화'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숙명!
'브라운 운동'-물 위에 꽃가루를 떨어뜨리면 꽃가루들이 춤을 춥니다.
꽃가루 미립자가 주위의 물 분자에 끌려다니면서 끊임없이 요동칩니다.
무대 위에서도 '브라운 운동'이 일어난다고 생각해보길.
"생명은 멈추지 않고 요동치는 것."
->브라운 운동은 1827년 영국의 식물학자 '로버트 브라운'이 물에 떠 있는 꽃가루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면서, 꽃가루의 미세한 입자들이 수면 위를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것에서 불규칙한 입자들의 운동을 설명한 것이다.
액체 속의 물질에 액체 분자가 끊임없이 충돌하면서 불규칙하고 불균등한 충돌이 규칙과 균등을 찾아가는 여정을 떠올려보면 된다.
우리 사는 세상과 비슷하다. '충돌과 평화'.
왜 평화는 충돌 뒤에 오는 것일까? 어째서 그것이 자연의 섭리일까.
감독님은 이런 자연 현상에서 연극 무대를 발견한 것이다.
얼마나 연극을 사랑하면 세상에 보이는 모든 현상들이 다 연극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사랑만으로는 안되겠지,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하셨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것으로 만드는 작업을 할 수 없었을 테니.
나도 치열하게 고민하고 답을 찾아나갈 것이다, 끊임없이!
1995년 여름에 극단을 만들고 '차원이동무대선'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줄여서 '극단 차이무'
뜻을 설명하자면, "연극이라는 우주선을 타고 일상에서 차원이동하여 우리 세상을 새롭게 내려다보게 하는, 그런 연극을 만들자"입니다.
연극은 '차원이동', 무대는 우주선같은 '무대선Stageship'
극단 차이무의 모토는 '생각은 깊게, 표현은 경쾌하게.'
->감독님께서 창단하신 극단 '차이무'의 본래 뜻.
'무대선 Stageship'이라는 단어가 환상적이다.
우주를 떠돌아 다니는 무대, 우주를 여행하는 무대와 그 위의 연극!
연극은 호흡과도 같아서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동시에 사라져버린다.
거장의 연극도 탄생과 동시에 소멸한다. 그것 또한 '치명적인 아름다움'의 하나인 것인가?
그렇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연극은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연극판에 '이단異端'이 필요한 때.
참고로, '이단Heresy' 의 어원은 기독교 이전의 그리스어 HAIRESIS.
뜻은 '스스로 생각하다'
->그렇다. '이단'의 원래 의미는 '스스로 생각한다' 라는 아주 신성한 뜻이었다!
이보다 더 자유를 뜻하는 것이 있을까?
그러나 지금 우리 세상은 스스로 생각하려는 의지를 용인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서로의 생각들이 충돌하고 튕겨나가고 대립하면서 끝내 평화는 오지 않을 것만 같아 두렵기도 하다.
다양한 의견들이 오고가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문제는 '욕심과 이익'
나에게 돌아올 이익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싸움이 끝나지 않는 것.
때로는 손해볼 줄도 알고, 나에게 아무 이득이 없어도 타인과 세상을 위한 선택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서로 조금만 더 양보하면 좋을텐데.
모차르트도 베토벤도 셰익스피어도 브레히트도 그때는 아방가르드였습니다.
가장 파격적이었거나 가장 대중적이었거나 관습에 가장 저항적이었습니다.
그들의 태도부터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들의 작품을 신화로 만드는 데만 골몰하고 있는 건 아닌지.
->어느 분야가 되었건 성공 사례들을 '신화'로 치부하고 떠받드는 행위는 경계해야 한다.
그래서는 새로운 '창작'의 기회들은 탄생하지 못하고, 어떻게 세상에 주목을 받아도 비난만 받게 된다.
'신화'적인 작품들과 비교당하게 되니깐,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하듯, 작품도 있는 그대로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게 된다.
기준과 비교는 작품의 진정한 내면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방해한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냥 '있는 그대로' 보아야지! 사랑해야지, 내게 다가온 모든 작품들을.
독일 지식층에서 사용하는 'Brechtieren'이라는 동사가 있습니다.
뜻은 '지 맘대로 하다'입니다.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그의 시대에 '지 맘대로' 했습니다.
세상을 보는 시각도, 연극을 생각하는 관점도 '지 맘대로'였습니다. 관습에 저항했습니다.
그러데 왜 브레히트의 제자들은 '브레히트 그대로' 하려고 할까?
->위와 같은 맥락! 기준과 표준을 만들고 그에 부합하도록 하는 것은 적어도 '예술' 분야에서는 절대 해서는 안될 것.
얼마나 끔찍한가. 창작의 세계에도 법률이 존재하고, 안 지키면 '추방'.
왜 추방이냐고? 독자들에게 외면 당하게 되니깐.
그러나 이것은 예술이 '형식'을 깨뜨리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T.S 앨리엇이 말했듯이 예술이 형식을 파괴해서는 안 될 것!
형식은 예술을 담는 그릇, 예술의 일부. 예술의 육체.
창작자는 '새로운 정보를 송신하는 사람'
창작은 재방송도 반복 송신도 아닙니다.
창작자라고 하는 사람들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는 듯합니다.
하나, 늘 새로운 정보를 송신하는 자.
둘, 남의 정보를 베껴서 송신하는 자.
셋, 같은 정보를 죽을 때까지 반복 송신하는 자.
->창작을 하기 위해서는 늘 깨어있으라는 뜻.
언제 어디서나 새로운 시도를 하고 끊임없이 도전하라는 것.
맨날 똑같은 것 만드는 창작가들에 대한 경고 메세지!
아무 변화 없는 모습을 관객들이 그저 받아준다고 해서 그대로 믿지 말 것.
스스로 끊임없이 '질문' 하고 '변화' 할 것!
드라마 <질투의 화신>에서 조정석 배우가 그랬다.
'자기 인생에 물음표 던지지 말고 느낌표 던지라'고.
물론 맞는 말이다. 나도 명대사라고 생각했던 장면이었고.
자기 확신이 필요한 때에 '느낌표!' 던지라는, 확신을 가지라는 뜻.
그러나 그 외의 일상에서는 물음표, 느낌표 그냥 마구 쏟아부어야 한다.
질문을 멈추면 인생도 멈추는 것이다.
생각이 멈추는 것이기 때문에.
학문이나 예술이나, 언제나 어디서나,
높은 의자에 올라앉은 자들은 질문을 아주 싫어합니다.
안타깝게도 인류 역사 내내 "왜?"라고 질문한 사람은 늘 왕따였습니다.
그래도 그대가 창작자라면 감당할 수 밖에.
창작은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해내는 것 아닌가?
그만큼 고통스러울 수 밖에.
->EBS다큐에서 본 적이 있다. 인간이 더 위로 올라가려는 행위에는 질문에 답하기 보다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되기 위해' 라는 욕망이 숨겨져 있는 거라고.
그만큼 질문에 답하는 것이 어렵고 난감한 문제이고,
답을 하는 사람이 사회에서는 더 '낮은 사람',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더 '높은 사람' 이라는 것.
웃기지 않은가?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 얼마나 사람을 성장하게 만드는 것인데.
그래서 우리 사회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경직되고, 고정되어 있는 면모를 보이는 것이다.
'왜'라고 질문을 가지는 것에서부터 창작은 시작되고, 나만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작품은 흘러가게 된다.
그 길고 긴, 지난한 여정의 끝에 다다르면 작품은 완성되는 것.
평생 남한테 질문만 '던져내는'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 길인지 모를 것이다.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치열하게 답을 생각해보는 것은 인간이 가진 능력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이다.
사람을 진정 '사람답게' 만들어 주는 위대한 능력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과 개선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남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답을 찾아오라는 권위적인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래서 반성도, 개선도 없는 것!
학자들의 '사람' 에 대한 정의,
알버트 슈바이처: 사람은 멍청하게 행동하는 똑똑한 동물.
폴 블룸: 사람은 타바스코 소스를 좋아하는 유일한 동물.
쿠르트 괴델:
기계는 자신을 설명할 수 없다. 기계는 자신의 작동을 이해할 수 없다.
사람의 뇌가 개구리의 뇌를 해석할 수는 있지만, 사람의 뇌가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해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사람의 운명은 바로 그 자신이다. 사람은 바로 그 시대의 사회적 조건들의 총체이다.
->슈바이처의 정의에서 완벽하게 공감했다. 나는 도대체 왜 그런 멍청한 행동을 했을까? 이런 생각을 늘 달고 살기 때문에. 생각 따로 행동 따로.
마음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경지에 오른 것이라 하던데, 누구나 어려운 것인가보다.
폴 블룸의 정의에서 뿜었다. 내가 타바스코 소스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지?
쿠르트 괴델도 위 맥락과 비슷하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완벽하게 아는 것이 불가능함을.
완벽하게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알아가는 과정이 중요한 것.
연극의 언어로 말하자면, 내 안의 수많은 나를 밖으로 해방시키는 것!
연극은 '사건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 이야기'
소포클레스도 아리스토파네스도 셰익스피어도 브레히트도 그 시대의 사람을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그 시대의 사람 관계를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연극은 우리 시대의 사람 관계를 새롭게 발견해야 합니다.
현대 연극의 새로운 흐름 하나는
'사람을 다시 발견'하는 데서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 영화가 '감독의 예술'이라고 한다면, 연극은 '사람의 예술'.
막이 오르고 사람들이 등장하고, 뭐라 말하고, 부단히 움직이고, 흘러가고.
무대 위의 세상은 인간 세상의 축소판.
그러나 나에겐 무대 위의 세상이 현실보다 더 커보였다.
무대가 보여주는 세상이 '진짜'의 세상으로 보였다.
감독님이 늘 말씀하시는 매직! 이것이 연극이, 예술이 보여주는 '매직'이겠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시대와 사람 간의 관계에 대한 질문, 그에 대한 답을 보여주는 연극무대!
인간의 존재도, 사랑도, 그 무엇도 모두 '관계'속에서 보여주는 것, 이해하는 것.
과학과 예술은 '할 수 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할 수 있다'면 예술이 아니다. '할 수 없다'면 또한 예술이 아니다.
과학과 예술은 '할 수 밖에 없음'에서 나온다.
-에른스트 페터 피셔<과학을 배반하는 과학>
->머리로 재고 계산해서, 손익을 따지면서 과학과 예술을 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문학의 본질이 불온한 것이고, 꿈과 불가능을 담는 것이라고 말했던 김수영 작가의 말처럼
과학 연구도, 예술 창작도 돈키호테의 정신을 가지고 때로는 무모한 용기로 나아가야 하는 걸지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모두가 비난해도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호기심과 열정을 가지고서,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부단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
<진격의 거인>에서 '앨빈'이 인류의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것처럼.
무엇보다 나는 진격의 거인에서 '한지'라는 캐릭터를 좋아했다.
거인은 인간을 잡아먹고 인류를 파괴하는 존재이지만, 한지는 거인에 대해 증오심을 갖기 보다는
거인에 대해 알고 싶어했다.
나를 죽일 수도 있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겠지.
하지만 과학자라면 그것보다는 궁금했을 것이다.
나를 파괴하는 것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인지.
그 '순수한 호기심'이 과학자로서의 자세인 것 같다.
사람의 행동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나한테 하는 행동은 반드시 합리적이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안 그러면 분노합니다.
->슈바이처의 인간에 대한 정의와 비슷한 뜻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생각만큼은 합리적으로 하기 위해 노력한다.
어떤 문제를 제대로 볼 줄도 알고, 각자 좋은 해결 방안을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어째서 이것이 행동으로 드러나면 어긋나고 방향을 잃게 되는 것일까?
우리가 어리숙한 존재라는 걸 서로 인정한다면, 서로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관용'의 자세가 이 시대에는 많이 부족하다.
자신이 손해보는 걸 조금도 참지 못할만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탓만은 아니다.
생존에 위협을 느낄만큼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서,
두려움 때문에 서로에게 족쇄를 채우는 행동이 계속 된다면
사회 전체는 점점 병들어갈 수 밖에 없다.
미국 아이오와 주 워털루에 사는 마버 드루라는 아이 엄마 이야기:
선생이 아들한테 "1부터 100만까지 세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답니다.
선생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겠다고 결심한 이 엄마가
종이 2473장에다 1부터 100만까지, 5년 동안 타이핑했다고.
->100만까지 셀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무 이득도 안 되지만,
에른스트 페터 피셔가 말했듯, 과학과 예술은 계산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 그것을 반드시 해야겠다고 결심하는 순간부터 가능성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나도 가끔 마음 속에서 불현듯 어떤 일을 도전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들 때,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라는 의구심이 먼저 든다.
창작과 도전을 가로막는 것이 바로 이 '가능성을 점치는 행위'이다.
그러나 오늘이라는 시간도 어찌 흘러갈 지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다.
돈키호테처럼 전진하는 것, 그렇게 무모하게 내딛은 한 걸음을 믿자!
적어도 지금은 그럴 때.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공포'
항공모함 함재기 조종사들은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착륙할 때마다 공포를 느낀답니다.
사람은 결코 공포에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포 영화는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김창옥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듯, 우리가 사랑할 때 느끼는 감정도 '두려움'.
인간의 모든 감정을 압도할 만큼, 가장 강력한 것이 바로 두려움인 것 같다.
어쩌면 우리가 잘못된 선택과 행동을 하게 되는 것도 이 두려움에 기초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약한 존재가 아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 불 속으로 스스로 뛰어드는 소방관은 두려움이 없어서 뛰어들까?
아니다.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두려움 속에서도 '반드시 해야 되기 때문에' 뛰어드는 것이다.
두려움을 뛰어넘은 그 불굴의 의지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걸 '사명감'이라는 단어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사명감이라는, 직업에서의 의무를 제대로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는 사건들이 사회엔 참 많다.
물론 의무를 다하지 않는 태만한 태도는 잘못이지만, 사명감은 강요한다고 해서 그 진가가 다 발휘되지는 않는다.
스스로 자기 안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다.
강요해서 될 것도, 무리해서 행해질 것도 아니기에 사명감은 숭고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미래를 걷는 소녀>에서 1912년에 살고 있던 소설가 토키지로는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기 위해 물 속에 뛰어든다.
아이는 살았고, 자신은 죽었다.
그 때 토키지로는 이미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100년 뒤의 세상에 살고 있는 미호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이를 구하기 위해 물 속에 뛰어들었다가 죽게 된다는 예언을 미리 알고 있었는데도,
토키지로는 역시 물 속으로 뛰어든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서.
소설가였고, 직업에의 의무도 다할 필요가 없으니 그건 '사명감'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직업에 상관없이,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강력한 마음을 무엇이라 부를까?
<명탐정 코난>의 명대사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 것에 논리적인 사고 따윈 존재하지 않아'
그렇다. 생명을 구하는 데에 이유가 있을 필요가 없다. 그냥 '살리는 것'
거기에 그 어떤 이유도, 의미도 부여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은 목숨 하나 살리는데 너무 많은 돈이 든다면서 계산을 먼저 한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이국종 교수님의 말씀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돈과 생명이 같은 선에서 줄다리기 하고 있는 상황을 현장에서 지켜보는 이들의 참담함이 느껴진다.
주어진 운명의 굴레에 갇혀 체념하고 한탄하고, 또 운명을 극복하려는 내용이 문학과 예술의 끊임없는 소재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그래도 어떻게든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답이 없는 상황에서도 답을 찾아내는 사람들.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대한 의지가 아니라,
오늘 내 눈 앞에 단 한사람이라도 구하겠다는 열망이 더 위대하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노력해야지.
예술은, 연극은 질문. "내 연극은 질문하고 있나?"
그대가 질문하지 않으면 연극은 껍질만 남습니다.
체제의 도구, 독재의 도구로 애용되는 예술은 '질문하지 않는 예술'
->영화 <타인의 삶>에서 동독의 문화부 장관인 헴프는 자신의 사회주의 이념으로 연극을 조종하고 '정화'시킨다.
연극은 사회주의 이념에 철저히 부합하면서 공연되고, 헴프 장관은 그 연극 무대의 빛나는 여배우를 마음껏 유린한다.
저항에는 생업과 목숨의 위협도 따르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예술이 질문을 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내지 않는 사람도 저마다의 딜레마에 빠진다.
그래도 '질문'할 것! 저항할 것.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하면 된다. 남한테 강요하지 말고, 자신의 뜻대로 나가면 된다.
나에게 씌워진 운명의 굴레를 남에게 씌우지도 말고. 나의 신념이지, 타인의 신념이 아니지 않은가?
티베트 불교에 '모래그림' 이라는 게 있습니다.
불교 축제 여러 달 전부터 스님 여럿이 커다란 상에 둘러 앉아 색색 모래로 환상적인 만다라를 그립니다.
축제가 끝나면 모래 그림을 그 자리에서 엎어버립니다.
만다라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연극도 그러하다.
영화나 드라마처럼 영상으로 영원히 기록되는 것과는 달리,
연극은 무대 위에서 공연되고,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는다.
탄생하자마자 소멸한다.
눈 앞의 몇 안되는 관객만이 볼 뿐이고, 그마저도 기억 속에 자리하지만 곧 지워진다.
그러면 우리는 도대체 왜 연극을 보는걸까?
그건 '인간은 왜 숨을 쉬는가?'와 같은 질문일 것이다.
기껏 힘들게 들이마신 숨을 내뱉고, 다시 들이마시고, 내뱉고.
'살기 위해서' 호흡한다.
연극도 마찬가지. 감독님께서 이 책에서 자주 언급하신 것처럼,
'이 순간 이승에 살아 있음을 함께 누리려고!'
'지금 이 순간, 이승에 살아 있는 게 너무 소중하니까!'
너무 멋지지 않은가.
나는 내가 하는 일에서 이렇게 답할 수 있을까?
배우뿐 아니라 연출에게도 자신감이 중요.
자신감은 터무니없는 자만심이나 똥고집이 아닙니다.
자신감이 없으면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거짓말을 하면 배우와 배후의 신뢰를 잃게 됩니다.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나? 준비! 그리고 또 준비!
하루에도 몇 번씩 읽고 또 읽고 조사하고 의심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것밖에 없습니다.
나르시씨스트들이 흔히 저지르는 '자신감 착각'은 정말 치명적.
->어느 대기업 인사담당자께서 면접과 일하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영상을 봤다.
진짜 실력있는 사람은 실수를 하면 곧바로 인정하고 회복할 방법을 찾는다는 것.
실력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도 하지 않고 숨긴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듣지도 않는 자만한 모습을 보인다고.
실수를 인정하는 건, 본인이 그 실수를 해결할 실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아는 것에서 나오는 자신감 덕분이다.
살면서 매 순간 배우고 공부하고 준비하며 쌓아온 '내공'은 내가 무너졌을 때, 나를 지탱하고 다시 나아가게 만드는 힘이 되어준다.
내가 다 아는 거라고, 내가 다 겪어봤다고 자신만만하며 초심을 잃는 순간,
세상은 상상도 못할 난제를 폭풍처럼 날려보낸다.
언제나 '처음'의 마음을 가지고, 새롭게 시작하고 배우는 마음으로 일하기!
연기는 '나' 에게서 떠나, '다른 나' 를 찾아 떠나는,
'내 껍질' 을 버리고 '내 안의 나' 를 찾아 떠나는 여행.
'나' 라는 껍질 속에 들어 있는 배우를 '해방' 시키는 일.
->'자연스러운 연기'란 내 안의 수많은 나를 바깥으로 해방시키는 혹독한 훈련 뒤에 찾아오는 경지.
부자연스럽다는 건, 아직도 내 안의 나를 다양하게 마주하지 않았고, 꺼내지 못했다는 것.
자신에게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아프게 베어내는 훈련.
다 벗어내고 '진짜 내'가 되어가는 과정.
나를 해방시키는 경지!
배우 훈련은 일반인이 인생의 한 주체로 살아가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그만큼 나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지만 나도 모르는 나의 모습들을 꺼내는 과정은 그 무엇보다도 유쾌한 일이다.
경직된 근육과 마음을 유연하게 만들고, 어떤 상황에서도 내공을 발휘하는 것.
인생에 달관한 유쾌함이란 어떤 느낌일까?
"너 자신을 모르면 아무것도 될 수가 없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애벌레 앱솔럼이 앨리스에게 하는 말
->소크라테스 '너 자신을 알라'의 변주.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것도 다양한 상황 속에서의 '나'를 마주하기 위한 것이니깐.
참고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명대사 하나 더!
"지도만 보면 뭐해? 남이 만들어 놓은 지도에 네가 가고 싶은 곳이 있을 것 같니?"
"그럼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어디에 나와 있는데?"
"넌 너만의 지도를 만들어야지!"
'퍼스낼러티'를 '개성'이라고 번역하면 뜻이 좀 모자랍니다.
'퍼스낼러티'는 그 사람이 살아온 역사를 포함하는 '인격'.
->Personality의 의미를 제대로 번역한 문장.
그렇지! 한 사람의 개성, 독창성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 전체가 반영이 되어 있다.
일본 밴드 B'z의 <일부와 전부>라는 노래 가사 중에 이런 게 있다.
'전부도 무언가의 일부라는 것을, 우리들은 깨닫지 못해'
사랑하는 사람의 일부만 보고 실망하거나 판단하지 말고, 상대방의 모든 것에서 완벽함을 추구하지 말라는 것이 이 노래 가사의 내용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확실히 좋아한다고 느낀 것들, 오직 나와 너만이 알고 있는 서로의 매력적인 '일부'의 모습들은 '진짜'의 것들이고 바로 그것이 Personality겠지.
그것이 그 사람의 '전부'를 나타내는 것인데,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Personality가 그 사람의 일부라고 생각하면서 서로에게서 전부를 가지려고 하는 오류를 범한다.
'정말로 있는 것은 유무를 논하지 않아'
노래 가사에 철학적인 내용이 담겨있다.
'캐릭터'는 연습 과정에서 찾아내는 것이지만,
'퍼스낼러티'는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퍼스낼러티'는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고
내 안에서 찾아내야 하는 것.
->정말 중요한 것! 모든 정답은 내 안에 있다.
연기에서든, 공부에서든, 그 어디에서든.
내 안에 있는 걸 끝내 끄집어내지 못하고 죽는다면 아쉬울 정도로,
모든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독창성이 숨겨져 있다.
어째서 개성은 찾기 힘들게 깊숙히 숨겨져 있는 걸까?
눈에 딱 명확하게 보인다면 이렇게 고된 훈련은 하지 않아도 될텐데.
하지만 각자의 독창성을 꺼내는 가장 쉬운 방법이 하나 있긴 하다.
'서로의 개성을 알아보고 말해주는 것'
남이 볼 때는 더 잘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을 볼 때 그 사람만의 개성과 독창적인 부분들을 유심히 본다.
그리고 꼭 알려준다.
그것이 그 사람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어 자신의 매력을 한껏 드러내게 해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하나하나 보면 다 아름다운 사람들인 것을.
모두가 한 작가의 이야기를 제각각 전달하고 그러면서 무언가를 이루어낸다는 것, 그게 내가 연극을 사랑하는 이유에요.
오직 동료배우들에게만 모든 것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 나는 이걸 꽤 일찍, 1957년에 '올드빅Old Big'극단에서 배웠어요.
극단의 모든 사람들이 다 중요하고 저마다 기여하는 게 있다는 걸 배웠어요.
연극은 중요한 배역을 맡은 몇 사람만의 것이 아니에요.
절대적으로 단원 모두의 것이지요.
나 자신 51년 동안 연극을 하면서, 그 무엇보다 이걸 지켜내기를 바라면서 무대에 섰어요.
연기를 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에요. 하면 할수록 공포심이 커져요.
그런데 거기에 무언가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게 있어요.
두려움은 커다란 도전이에요. 그게 바로 나한테 필요한 거에요.
연극이 참 좋은 건 기회가 다시 온다는 거에요.
나는 끊임없이 배우는 기분이에요. 지난 51년 동안 쉽게 한 연극은 정말이지 단 한 편도 없어요.
그리고 51년 동안 딱 세 번 빼고는 출연하는 공연마다 무대에서 엎어졌어요.
51년 동안이나 무대에 서고도 아직 똑바로 서지도 못한다니까요.
연기라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항상 해야 할 것 중 하나는 그냥 보는 거에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지 항상 봐야 해요.
내가 출연할 장면뿐 아니라, 출연 안 하는 장면도 모두 다.
왜냐하면 보면 항상 배울 게 있으니까.
그리고 무대에 서서도 항상 관객을 바라보고 관객의 반응을 봐야 해요.
그래야 다음 장면의 페이스를 조절할 수 있지요.
-선댄스 채널, 배우 주디 덴치Judi Dench 인터뷰
->꽤 긴 글이지만 여기에 많은 감동을 받아서 일부를 인용해왔다.
주디 덴치가 말하고 있는 점들은 연극 무대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연극을 '세상'으로 바꾸어서 이 글을 다시 읽어보면 정말 눈물이 흐를 정도로 아름답다.
모든 사람들이 다 중요하고 저마다 기여하는 것이 있다는 점.
중요한 인물만 이 세계를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은 모두의 것.
두렵지만, 기회는 반드시 또 온다는 것.
끊임없이 오랫동안 배우고, 또 배워도 세상은 어렵게 느껴진다는 것.
엎어지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하고.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면서 다시 배우는 것.
그것이 삶에 대한 두려움에 도전할 수 있는 원동력!
연극은 이토록 세상과 마주하게 만드는 신비한 매력이 있다.
연극은 세상을 보게 만들고,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진짜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도록 자극한다.
억양이 좀 이상하고, 발음이 좀 부족하고, 목소리가 좀 작은 거,
키가 좀 작고, 좀 내성적인 거, 어쩌면 그런 건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건 진심. 진심이 배어나오는 'Feeling Tone'
무너질 것 같으면 차라리 움직여라.
음악이 느리더라도 비트Beat를 찾아서 'Make it Pop'해야 한다.
-<America's Best Dance Crew> 오디션 심사위원의 평
->아이유가 우울감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말했던 것이기도 하다.
'무너졌다는 생각이 들 땐 정신없이 움직이기'
실제로 일상에 적용하면 많은 도움이 된다. 나도 수많은 걱정과 고민 속에 잠식될 것 같을 때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지런히 집안일을 한다.
그렇게 땀 흘리면서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다보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 든다.
그 와중에 춤도 추고, 노래도 흥얼거리면서!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그렇게라도 해결될 수 있는 우울에 한해서겠지.
정말 심각한 절망 앞에서도 이렇게 할 수 있을까?
나의 경우엔 아니었다.
힘들 땐 그냥 온 몸으로 힘든 걸 겪어냈다.
때로는 '정면으로 돌파'하기의 정공법이 더 도움이 될 때가 있다.
선택은 알아서!
영화배우는 카메라를 보고 연기하지만, 연극배우는 관객의 눈을 보고 연기합니다.
영화배우는 자기가 한 연기를 볼 수 있지만, 연극배우는 숙명적으로 자기 연기를 볼 수 없습니다.
그것도 연극만의 재미.
->그래서 연극은 배우와 관객의 '관계'가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무대 위에서 배우가 내뱉는 모든 대사와 몸짓과 표정과 숨결은,
관객들에게 전해지는 순간 허공에서 사라지게 된다.
오로지 관객만이 그걸 느낄 수 있고, 아주 희미하게 기억에 남게 된다.
그래서 일본 배우 '사카이 마사토'는 그의 수필집에서,
연극이 끝나고 마지막에 무대에서 다같이 관객을 보면서 인사할 때, 관객들에게 '응석부리는' 감정을 느낀다고 한다.
배우가 관객에게 응석부리는 것.
그 감정은 배우만이 알겠지만, 왠지 나도 조금은 느껴지는 것 같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해야만 완성이 되는 것!
연극의 매력은 끝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감독님께서 항상 연극은 '우주'라고 말씀하시는가 보다.
우리는 착각하도록 진화했습니다.
우리가 착각하지 않기 위해, 착각을 넘어 상상하기 위해 공부하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겁니다. 세상은 우리 감각으로는 미처 알 수 없는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으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직감으로 인해 야기되는 오류를 분간하기 위해,
혹은 직감이 파악하기 어려운 현상에까지 상상력이 도달하게 하려고 공부를 해야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자유로 인도합니다.
-후쿠오카 신이치의 강연 일부
->감독님께서 이 책에 인용하신 부분들은 후쿠오카 신이치의 저서들에서 가져오신 것이 많다.
한 생물학자의 연구와 통찰이 연극 연출가에게 영감을 줄 만큼, 나도 이 학자의 글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
특히나 이 부분은 고등학교에서의 강연 일부라서 더 뜻 깊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가 '착각하지 않기 위해서', '착각을 넘어 상상하기 위해서' 라니!
우리는 감각에 속고, 그것으로부터의 감정에 수없이 휘둘리며 잘못된 판단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감각과 지각에 속지 말고, '상상'해야 한다는 것.
내가 모르는 세상이 있다고 믿고 거기까지 상상으로 도달하는 것, 바로 그것이 '공부'임을!
바둑 고수의 눈빛을 보면 참으로 참합니다.
교활한 생각으로는 좋은 바둑을 둘 수 없을 테니까.
교활함에서는 치열함이 나올 수 없을 테니까. 배우도 그래야 합니다.
흉하게 살면 눈빛이 흉해집니다.
고수는 압니다. 속임수로는 결코 강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니, 오직 공부! 정진할 뿐이라는 것을.
->끝없이 공부할 것을 감독님은 여러번 강조하신다.
교활하게 속임수 쓰고, 편법으로 이기고, 요령껏 하려는 마음으로는 '경지'에 오르는 건 불가능.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이다.
매일 꾸준히 '내공'을 쌓아가는 것! 힘들다고 투정부리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평생.
배우는 걸 멈추는 순간, 창작은 끝이다.
연습하는 동안, 자신이 발전하고 있음을, 변하고 있음을 스스로 느꼈다면 배우는 행복한 것.
다음으로 갈 준비가 된 것.
->난 왜 이 부분에서 눈물이 났을까?
지쳐 쓰러질 만큼 연습하고, 준비하고, 공부해왔는데 이제서야 내가 성장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걸 느끼는 게 너무 기뻤다.
무언가 성공해서 행복한 게 아니라, 내가 끊임없이 노력해온 것들에서 나의 '변화'를 보는 게 이렇게 행복한 것일 줄은.
이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다음으로 갈 준비가 되었다'고.
배우에게는 '재능', '자신감', 두 가지가 꼭 필요합니다.
'재능'은 갈고 닦으면 빛이 나지만, '자신감'은 경험 없이 생기지 않습니다.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지만 말고 아무리 무대가 작더라도,
재미있는 사람들과 재미있게 쉬지 말고 경험을 쌓길.
최고의 공부는 '실전'.
->한가지 희소식은, '재능'은 갈고 닦으면 키울 수 있다는 것!
정말 그렇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있다면 꼭 자신을 믿었으면 좋겠다.
재능은 갈고 닦으면 태양처럼 빛날 때가 온다.
그러니 자신의 재능이 미약하다고 포기하지 말 것.
문제는 '자신감'의 영역이다.
자신감은 연습과 노력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실전에 계속 부딪히면서, 거추장스러운 모습을 보일지라도 나를 보여주고,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경험은 정말 중요하다. 그 속에서 '나'를 마주할 수 있다.
혼자서 혼자만의 공간에 있으면 혼자만의 생각에 갇히게 된다.
진솔한 생각은 많이 할 수 있겠지만, '나'를 알아가는 건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세상을, 사람을 무서워하지 말고 밖으로 나와 다양한 경험을 해보자.
어렵게 내딛은 한 걸음에 지치지 말고 그 다음, 다음을 기대해보자.
이렇게 말하는 나도 사실은 최근에 면접을 보고 왔는데 연습했던 것 보다는 못했다.
역시 연습과 실전은 많이 다르다.
그래서 경험을 많이 쌓는 것이 중요하다.
내 머리 속에서 아무리 시뮬레이션 돌려봤자, 세상은 내가 상상했던 것 보다 더 복잡하고 알 수 없다.
용기를 가지고 홧팅!
연주는 육체 행위에요. 육체가 정신보다 신성한 데가 있어요.
혹독한 데가 있어요. 스포츠도 마찬가지에요. 일주일만 안하면 못합니다.
정진 안하면 못합니다. 연주자는 매일 연주해야 합니다.
-황병기 명인 말씀
->수험생들은 알 것이다.
하루 공부를 안 하면 내일이 힘들고, 일주일을 안 하면 복습이 힘들고, 한달을 안 하면 그동안 공부했던 것 다 까먹는다.
그래서 공부든 뭐든 '꾸준하게'가 제일 중요하다.
공부를 못 할 상황이 와도 어떻게든 자리를 지키고 앉아서 오늘 할 일 해내는 것.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사람들은 그 자신과의 약속을 잘 지켜낸다.
못 지켰을 때 나에게 닥칠 일들이 너무 무섭기 때문이다.
문서 작성하다가 저장 안 눌러서 그동안 쓴 게 다 날라가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동안 노력해온 것들이 날아가버렸을 때의 당혹감. 패배감.
연습을 게을리하면 반드시 그럴 때가 온다.
그래서 매일 하는 거다. 결코 부지런해서, 여유가 되서 매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단 하루라도 빠지면 결국 내가 고통스러워지기 때문에.
파블로 카잘스가 91세 때 한 학생이 와서 물었다.
"선생님, 아직도 연습을 계속하세요?"
"그럼, 아직도 발전하니까."
-노먼 도이지<기적을 부르는 뇌>
->거장은 91세가 되어서도 연습을 한다. 그 나이에도 노력을 한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이 부분을 읽고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오늘 얼마나 치열했는가?'
오늘 얼마나 발전했는가.
매일, 매순간 스스로에게 물으며 반성한다.
왜 그렇게 힘들게 사냐고 묻는다면,
나도 내가 생각하는 '경지'에 다다르고 싶으니깐!
나도, 당신에게도 '꿈'이 있을테니깐.
"선상님, 꽃 사진 어떻게 찍나요?"
"꽃을 찍으려구요? 그냥 꽃이 되세요.
들에서 그녀와 함께 피어나고, 그녀가 마시는 샘물을 마시고
들에서 산에서 그녀와 함께 피어나고, 그녀가 마시는 샘물을 마시고
들에서 산에서 그녀와 함께 살아야지요.
그래서 당신도 들꽃일 때 사진도 되지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인화지에 꽃들을 복제해놓으면, 옮겨다 놓으면,
그녀는 금세 시들어버리고 말지요.
우선 그녀에게 물어보세요. "당신 이름이 뭐지요?" "닻꽃"
그녀와 사랑에 빠져 마음이 통하면 이제는 카메라를 꺼내도 되겠지요.
그녀의 표정을 잘 살펴보세요. 살아 있는 사진이 될 것입니다.
시들지 않은 싱싱한 사진이, 향기 탐스런 사진이 될 것입니다."
-안승일 <우리동네 꽃동네>
->스스로 피사체가 되어 피사체와 사랑에 빠지는 것. 그때 진짜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것.
피사체를 제대로 알아야 '살아있는' 사진이 된다는 것.
알지도 못하면서 카메라 드는 것은 껍질만 보고 찍는 것.
사진만 그럴까?
사람을 이해하고, 세상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
그런데 그런 진리를 이렇게 아름답게 쓰셨다니.
사진작가 안승일 님의 다른 글도 읽어보고 싶다.
<야생연극>의 제 3막, '야생연출'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소름이 돋고, 미쳐버릴 것 같고, 숨이 턱턱 막히고,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고, 가슴이 미어지고, 소리도 안 나오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고...
나 자신이 그렇게 행복했던 순간, 그렇게 분노했던 순간, 그렇게 감동했던 순간을 기억해보길.
관객을 그런 상태로 만드는 연극을 상상하길! 그런 연극을 만들길!
객석에서 탄성이 터지는, 그런 연극을 만들길!
연극도 콘서트처럼 환호를 끌어내야-객석의 소리 없는 환호를!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그리고 그대가 만드는 연극은
더 멀리 보고 더 작은 소리를 듣고
더 넓은 세상을 읽어내는 그런 연극이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만드는 연극이
세상을 흔드는 바람이 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