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단역배우 김순효 씨 - 제4회 고창신재효문학상 수상작
이수정 지음 / 다산책방 / 2025년 3월
평점 :
기억이 시작되는 곳에서 나는 엄마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자식 중에서 나만, 그것도 제일 어린애가 엄마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의아해하거나 당혹스러워하기에 앞서 우선, 슬펐다.
그건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어디쯤에서 내가 데려온 자식임을 스스로 깨우쳤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
기억이 시작되는 무렵의 나는 엄마에게 존댓말을 쓸 뿐 아니라 ‘엄마’라고 제대로 부르지도 못했다.
_16,17p
경주의 시간은 두 갈래로 나뉜다.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의 경주는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
어린 아이가 제 스스로 자신이 데려온 자식임을 눈치채야 했을 만큼, 자신의 뿌리를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경주의 아버지가 밖에서 데려온 딸, 그것도 죽은 친구의 딸이라고 속이면서 데려온 딸.
이것이 경주가 아는 전부인 자신의 뿌리이다.
기억이 시작되는 곳에서의 경주는 이렇게 자신의 시작점을 알지 못한 채 인생을 출발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솔직한 아이로 자란다.
자신의 인생 자체가 거짓이라 여겨지기에, 차라리 입을 다물어 진실조차도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그런 그녀의 성질은 그녀의 남편 인철에게 정작 중요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 불화로 이어지게 만들기도 한다.
내가 엄마에게 작은 거짓말도, 하다못해 선의의 거짓말도 하지 않으려 기를 쓰는 이유는
결코 착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었다.
나란 존재 자체가 이미 엄마에게 거짓말처럼 느껴져서였다.
아버지와 내가 공모해서 만든 하나의 큰 거짓말….
그러잖아도 이미 내 삶을 통째로 저당 잡힌 거짓말….
나는
거기에 더는, 정말 더는 한 마디의 거짓말도 보태고 싶지
않았다.
피치 못하게, 거짓말이 필요한 때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럴 때 나는 처음부터 말을 안 하는 쪽을 택했다.
어떤
일을 다르게 바꿔서 거짓말하는 대신, 그 어떤 일이 아예
없었던 것처럼….
...
내가 시작된 곳이
어딘지도 모르는 채,
내 기억이 시작되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는 채,
그 기억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채….
그런 채 무작정 아이를 가질 수는 없었다.
그런 채 나로부터
시작될 또 다른 기억을 만들 수는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_26,27P
기억이 시작되는 곳에서부터 경주의 정체성이다.
한 집에서 자신만 뿌리가 다르다는 것, 심지어 자신의 뿌리를 모른다는 것은
어디를 가더라도 끝과 시작에 다가서지 못하는 느낌일테다.
그래서 그녀는 결혼 생활 내내, 아이를 간절히 원해왔던 남편 몰래 피임약을 먹는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남편 인철은 그 길로 집을 나가게 되고,
경주는 남편과 함께 살던 뉴저지에서 한국으로 들어오게 된다.
오랜만의 전화에서 엄마는 어디 좀 가자고 했다.
지방이라 기차를 타고 가야 한다고 했다.
이틀 정도 걸릴 참인데 혹시 일에 지장은 없겠느냐는 말을 엄마는 이미 기차표를 끊었다고 한 뒤에 했다.
나는 괜찮다고는 했지만, 어딜 가냐고는 묻지 않았다.
_8p
이것이 바로 이 소설의 시작이다.
경주 인생의 비어있는 기억 속 '어디'는 이렇게 다시 시작된다.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을 오랫동안 잃은 채로 살아온 경주는 그 '어디'조차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인간의 출생, 그 뿌리는 태어나는 순간의 아기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 걸까?
나를 구성하는 세포들이 기원한 곳,
아버지와 어머니의 존재란 자식에게 있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자식과 부모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새로운 관점으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단순히 나를 낳아준 사람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존재하게 된 이유이기 때문에.
헌신적으로 양육하고, 보호하고, 세상에 길러내는 무한한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 그 자체의 성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다.
탄생의 순간을 떠올려 보면 알 수 있다.
이제 막 엄마의 뱃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온 '나'의 존재를 나는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생명은 경이롭다.
나의 몸을 구성하는 모든 세포들이 기원한 곳을 안다고 해도,
나의 정신, 영혼은 부모님이 물려준 것이 아니다.
세포가 기원한 곳에 정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의 정신적인 영역은 결국 나에게 온전히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여정 또한 철저히 나의 것이 된다.
생명의 본질적인 속성을 생각해보게 된 건,
나와 부모님의 연결고리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다.
여기에서 시작하는 것이 바로 이 소설 속 인물, '경주'의 뿌리를 찾아나가는 여정일 것이기 때문이다.
경주가 원한 건 부모의 헌신적인 사랑도, 관심도, 그 어떤 감정의 영역도 아니다.
내가 시작된 곳이 어디인지 알게 되어, 다시 나로부터 시작될 그 무엇을 알게 되는 것.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어지는 '역사'속으로 들어가는 일.
생명의 '근원'으로 들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소설 속에서 경주와 그녀의 어머니 김순효씨와 함께, 나의 여행도 이렇게 시작되었다.
엄마는 피아노를 치고 있… 아니, 치고 있지 않았다.
피아노를 치는 척만 하고 있었다.
손가락이 건반에 닿지 않고
공중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얼른 둘러보니 의자에 앉은
사람들은 저마다 휴대폰에 코를 박고 있느라
다행히 엄마를 쳐다볼 겨를이 없는 것 같았다.
제일 끝자리에 앉은 남자 노인만 지팡이에 올린 두 손에 얼굴을 고이고 피아노 쪽을 보고 있었다.
엄마의 등 쪽에서 꼬마 아이 하나가 피아노 쪽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아이는 혓바닥을 빼문 채 엄마와 피아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뒤돌아 누군가에게 빨리 오라고 손을 펄럭였다.
엄청나게 신기한 구경거리가 있다는 듯….
무리도 아니었다.
엄마는 미간이 팰 정도로 눈을 질끈 감고서 몸을 좌우로 움직이며
소리 안 나는
피아노 연주에 몰입해 있었다.
나는 얼른 백팩과 카메라 가방을 챙겨 들고 일어나 엄마에게 다가들었다.
엄마 팔을 잡으며 귀에 입을 대고 가자고 속삭였다.
놀란 엄마가 화들짝
몸서리를 치더니 눈을 뜨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엄마의 한쪽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힘주어 엄마를 일으켰다.
도망자가 된 심정으로 엄마와 자리를 뜨는데 뒤에서 지팡이 노인의 가래 낀 음성이 들렸다.
앵코올.
_33,34P
경주와 어머니의 여정이 시작되면서부터 많은 인물들이 스쳐 지나간다.
이 소설의 매력들 중에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카메라를 들고 줌인,줌아웃 하듯 가까워졌다가 멀어져가는 행인들은 소설 속 주인공들과 무관하지만 섬세하게 포착된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 사람은 이 행인들과 함께 소설 속을 여행하며, 주인공들의 여정을 적당한 거리에서 관찰하게 된다.
경주의 어머니 김순효 씨는 70세 넘어 단역배우로 활동해왔다.
딸과 함께 고창에 내려가는 길에 지하철역 대합실에서 그녀는 그랜드 피아노를 발견하고
열정적으로 연주하는 연기를 펼친다.
83세의 할머니가 피아노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고 치는 '척'하는 것을 보고
"앵코올"을 외치는 한 노인.
그 행인의 반응이 나의 반응과 일치할 때, 소설의 일부가 되는 느낌에 두근거렸다.
남자가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일반 카메라가 아님을 알아본 듯했다.
나는 멀어져 가는 남자의 등을 롱숏으로 담았다.
시골도 아니고, 그렇다고 분주한 도시라고도 할 수 없는 고창 시가지는
다분히 이국적인
데가 있었다.
위압적으로 높은 빌딩도 없어 내가 살던 뉴저지의 작은 타운과 비슷했다.
대도시에 이렇게 누군가를 향해 손 흔드는 사람이 있던가….
_51P
경주와 어머니가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고창에 도착하고, 처음으로 경주가 카메라를 꺼내어 촬영하는 장면이다.
물론, 이때는 아직 그들의 <인생 인터뷰>가 시작하지 않았을 때이다.
결혼하고 뉴저지에서 살다가 다시 한국으로 들어온 경주가 낯선 도시에 들어서는 첫 순간.
심지어 한번도 가보지 않은, 그러나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 태어난 곳이기도 한 바로 그 '고창'.
고향에 첫 발걸음을 내딘 경주에 대한 묘사가 인상 깊었다.
그 배경에는 전혀 모르는 타인에게, 푸근하고 해맑게 손을 흔드는 또 한 명의 행인이 있다.
낯선 도시에 들어설 때 가장 인상적인 풍경은 역시 '사람들'일테다.
도시의 이방인인 나에게 무해하고 순수한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
고창의 첫인상에서부터 알 수 없는 운명이 시작되는 것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경주야, 그럼 어때서 그래. 친딸이 아니면 어때서….
그때
인철이 했던 말이 바람 소리에 실려 실제로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눈을 덮은 머리칼을 떼내는데 인철의 프러포즈에 “Yes”라고 할 때처럼
내 안에서 어떤 선명한 결심
같은 게 일어섰다.
〈인생 인터뷰〉시즌 5의 여섯 번째 에피소드로 ‘단역배우 김순효 씨’ 편을 진행해 보자고….
단, 모녀지간이 아닌 구성작가와 게스트로….
한기가 드는지 일순, 부르르 떨려 양팔로 얼른 몸을 싸안았다.
_70p
경주는 휴먼 다큐 <인생 인터뷰>의 구성 작가이다.
처음에 어머니가 '어디'가자고 했을 때 대구를 가는 줄 알았던 경주는 친구이자 제작사 사장인 용석에게 이번 에피소드를 자신이 찍어오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는 바람에, 그녀는 졸지에 고창을 가서 다큐를 찍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리고 아이러니 하게도 게스트는 경주의 어머니 "김순효 씨"가 되어버린 것이다.
인터뷰어는 방송 작가인 딸이, 게스트는 그의 어머니가.
친자관계가 아니면서 공식적으로는 모녀지간인 그녀들이 평생 각자의 가슴에 묻고 살았던
인생의 진실을 바로 <인생 인터뷰> 촬영을 통해 밝히게 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머니 김순효 씨의 한이 맺힐 정도로 절절한, 가슴에 고이 간직해왔던 '진실'의 고백이다.
어머니가 경주를 데리고 고창에 간 건, 사실은 경주의 '뿌리'를 찾아주기 위해서였다.
이 사실을 알 리가 없는 경주는 어머니를 게스트로 다큐를 촬영하고,
어머니 김순효 씨는 카메라에 대고 경주에게 전하고 싶었던 진실을 전하는 동시에,
지금껏 누구에게도 꺼내지 않았던 인생 속 가슴 아픈 이야기들을 펼친다.
이 소설의 제목이 "단역배우 김순효 씨"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친딸이 아니기 때문에 망설였던 경주가 <인생 인터뷰> '단역배우 김순효 씨' 편을 촬영하겠다고 결심한 순간에는, 남편 인철의 말이 겹쳐 흐른다.
"친딸이 아니면 어때서"라며, 경주를 따뜻하게 위로했던 인철의 오래전 한 마디가 스쳐 지나가면서,
그녀는 드디어 어머니 김순효 씨를 게스트로, 촬영을 시작한다.
반갑습니다. 이렇게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청자분들께 직접 본인 소개를 해주시겠어요?
제 이름은 김순효라 카지예. 순할 순에, 효도할 효, 순효지예.
일천구백사십일 년생이고요. 올해 팔십셋 됐네예.
태어나기는,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면 장암리 삼십….
_77p
드디어 <인생 인터뷰> 촬영을 시작하며 경주가 첫 질문을 한다.
나는 소설을 다 읽은 지금도 이 장면이 애틋하게 느껴진다.
누군가의 '어머니'가 아니라, '김순효' 라는 사람으로 카메라 앞에 서게 되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인생 깊숙히 숨겨온 이야기들을 꺼내는 순간,
그녀가 진짜 '김순효'라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내가 '나'일 수 있는 순간들이 지금껏 한번이라도 있었다면
김순효 씨는 그렇게 절절하고 아픈 이야기들을 진작에 꺼낼 수 있었을 것이다.
여태껏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는 건,
진짜 '내'가 될 수 있었던 순간은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이기도 하다.
김순효 씨 인생의 피날레는 바로 <인생 인터뷰>에서 시작된다.
나의 인생을 구성하는 것들을 나 자신과, 타인과, 세상에 꺼내어 보여주는 순간
비로소 나는 내가 되기에.
혹시 조금이라도 더 일찍 배우가 됐더라면, 하고 아쉬운
생각이 들 때는 없었는지요.
어뎨예. 그런 생각은 요만큼도 안 들었어예.
내 같은 사람이 우예 일찍 배우가 되것어요.
배우라 카믄 남의 맴을
잘 알아야 하지 않것어예.
남의 맴을 잘 알아야 그 사람 맴처럼 연기를 할 것 아니것어예.
내처럼 핵교도 제대로 못
다닌 사람이 우예 다른 사람 맴을 알겠어예.
내 같은 사람은 저꺼보는 수밖에는 없는 기라요.
말씀 중에 죄송한데… 저꺼본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몸으로 직접 저꺼봐야 한다꼬예. 서울말로 뭐라카노….
아, 겪어보는 거 말씀인가 보네요. 경험해 보는 거요.
글치예! 내가 칠십에 데부했으까니, 남이 맴을 저꺼보는데, 아니, 겪어보는데 칠십 년이 걸렸네예.
그 세월이 있어
노이 내 같은 사람도 배우가 될 수 있는 기지예.
늦어서 아쉽기는예. 가당치도 않어예.
지금 내가 요래, 배우가 돼삐맀다 생각하믄 자다가도 좋아서 웃어쌓는데예.
_81,82p
비록 70세 넘어 단역 배우로 잠깐씩 출연하는 것이지만,
한 사람의 꿈이 이루어지는 장면을 보는 건, 언제나 벅차오르고 눈물겹다.
'저꺼본다', 즉 '경험'해보면서 타인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알게 되는 것이
'배우'가 되는 길이라 생각했던 김순효 씨.
감히 끌어 안을 수 없는 것들을 자기 인생에 끌어 안은 사람의 '위대함'을
그녀의 인생 인터뷰를 통해 느낄 수 있게 된다.
사랑 너머에 '포용'이 있다.
사랑보다 더 큰 것이 포용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모든 사람들을 품은 것이 아니다.
사랑으로 그 모진 인생을 품은 것이 아니다.
비극과 불행을 포용하는 힘은 사랑에 있는 게 아니라, '사람'에 있다.
그녀가 좋은 사람이기에, 성숙한 인간으로 나아가는 사람이기에 그런 일들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남편과 살림을 차리고 아이까지 낳은 여자를 품었고,
그 여자의 아이도 품었고,
그들이 살았던 집과 땅도 품었고,
시간이 흘러 그 터전에 살아가는 사람들까지 품었다.
그녀의 인생은 사람과 땅과 자연을 품는 것의 연속이었다.
포용이 가진 힘은 사랑에 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보여준 용서와 포용에서 인간이 어디까지 성숙해질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문학이 보여줄 수 있는 성숙함이 바로 여기, '김순효'라는 인물에 담겨 있다.
김순효 씨를 이해함으로써 독자인 나는 '포용'의 가치를 배우고, 성숙함에 다가간다.
내 눈에는 별 감흥 없는 것들이 엄마에게서는
“시상에!” “움무야꼬” “어쩜 좋아!” 같은 다양하고도 현란한 감탄사를 끌어냈다.
같이 구경 다니며 많은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으나 엄마의 리액션이 조금 과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엄마에게서 그런 리액션이 나올 타이밍이면 언니는 먼저 흉내를 내기도 했다.
그 과해 보이던 반응이 사실은 엄마의 진심이라는 걸 나는 고창에 와서 알게 되었다.
무언가를 보고
감탄할 때, 뷰파인더 속 얼굴을 확대해서 보면
엄마의 눈은
진짜로 처음 보는 아이의 그것처럼 반짝였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진짜 딱 그만큼 감탄스럽다고 말하는 눈이었다.
_93p
세상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순수하고 투명하게 바라보는 김순효 씨의 성질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 그녀였기에 누구도 감히 할 수 없는 '포용'으로 자신과 타인의 인생을 품을 수 있었던 것이다.
'헌신'이라는 것은 어쩌면 누구가의 인생 전부를 품는 일일지도 모른다.
친어머니가 아니었지만 어머니로서 경주를 키워 온 것은,
경주의 인생 자체를 품었기에 가능한 일 아닐까?
사랑이라는 애매모호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의 '포용'과 그것의 위대한 힘이 느껴졌다.
나는 누군가의 인생을 이렇게 한가득 품을 수 있는 사람일까?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된다.
보통 소나무에 비해 몸통이 가느다란 소나무가 대나무의
몸을 휘감은 채 하늘로 뻗어 있었다.
닮은 데라곤 전혀 없는 이질적인 두 나무의 오묘한 섞임….
묵은 감정을 풀지 못해 드잡이하는 것도 같고, 결코 이루지 못할 사랑을 애달파하는 것도 같고….
엉겨든 두 나무를 카메라에 온전히 담으려면 한참 뒷걸음질 쳐야 했다.
두 나무가 있는 곳의 지반은 경사가 있었다.
거기, 기우뚱하게 서서 만면에 미소를
띤 엄마가 나를 보고 있었다.
야야, 누가 누구 땅에 들어온 거 같노?
여그, 천지에 대나무다 보이, 소나무가 대나무 숲에 들어온 거 같제?
...
틀렸데이. 여긴 원래가 소나무 땅인기라. 소나무가 여그에 먼저 살았다 이 말이제.
이 소나무 나이가 이백년도
더 됐다 안 하나.
그라이까네, 소나무가 여기 들어온 게 아니고 같이 살자고 찾아온 대나무를 소나무가 받아줬다, 이
말이다
...
나무가
있는 쪽으로 두 사람이 걸음을 떼었다.
여자가 남자의 한쪽
겨드랑이에 손을 끼우며 엉킨 두 나무를 올려다보더니 말
했다.
대나무는 똑바로 자랐는데 소나무만 몸이 배배 꼬였네. 소나무가 고달프겠다, 그치?
남자가 팔을 풀어 여자의 어깨에 두르면서 다른 손으로
나무 꼭대기를 가리켰다.
대신 위로 길게 자랐잖아. 저렇게 키 큰 소나무 봤어?
_96~100p
저 혼자서만 뿌리가 다른 경주는 대나무일테고, 함께 살아온 나머지 가족들은 소나무일까?
대나무를 품느라 온 몸이 휘면서 자랐지만, 그 소나무는 다른 나무에 비해 갸날프지만 높게 자랐다.
직선으로 올곧게 높이 자라는 대나무의 성질은 소나무가 제 몸을 휘어가면서 품은 덕분에 자신의 성질 그대로 자랄 수 있었고, 소나무는 비록 휘고 얇아졌지만 대나무와 함께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자랐다.
낯선 땅에 찾아온 대나무에게 제 몸을 내어주며 그를 품지 않았다면, 지금 이 곳은 대나무 숲이 아니라 소나무만 가득한 곳이겠지.
어쩌면 우리 모두는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이방인일지도 모른다.
나의 세포가 기원한 곳으로부터 독립하여 정신적으로 홀로 서야만 하는 운명.
그건 인간이 죽는 순간까지 해내야 하는 숙제이며, 동시에 성숙한 인간으로 나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같은 땅 위에서 서로의 몸을 휘감고 얽히면서 이방인인 존재가 그 땅의 주인이 되기도 한다.
외로운 운명이 다른 또 하나의 운명과 얽히는 일은 이방인으로서의 존재가 부딪혀야할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부정하며 회피할지, 아니면 소나무가 그랬듯 제 몸을 내어주며 온전히 품을지
그것은 하나의 선택일 뿐이다.
모든 소나무가 대나무를 품어주지는 않듯이.
살면서 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제일 많이 한다면,
그
못지않게 많이 하는 생각이 후회되는 일에 관해서가 아닐지요.
이미 지난 일이라 후회해도 아무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
말이에요.
김순효 씨도 살아오시면서 후회되는 일이 있으셨나요?
은지예. 지난 세월 다 싸잡아 후회되는 일이라 카믄, 내한테는 일등짜리가 있지요.
일등짜리라서 맨날 생각하고
맨날 후회하는 일이 있지예.
_101,102p
의사가 서류 같은 걸 들고 오드마는 내한테 주면서 그라데예.
목이 말랐을 낍니더. 숨 넘구기 전에 얼라 목이 마이 말랐을 낍니더.
내가, 그때 울었어예. 그때부터 바닥에 퍼지고 앉아서 돌은 여자맨쿠로 울었어예.
발도 구르고 가슴을 쥐어짰다가 주먹으로 쳤다가….
내 뺨따구도 여러 번 친 것 같어예.
고마, 숨이 안 쉬어지는
기라요. 그 간호사가 오드마는 진정하라 카데요.
내가 아무
죄 없는 간호사 팔을 붙잡고 막 소리 질렀지예.
보이소, 얼라가 목이 말랐다 안 합니꺼. 죽기 전에 목이 말랐다 안 합니꺼.
바깥에 눈이 천지빼까린데, 눈이라도 먹였다믄, 눈이라도 뭉쳐서 입에 넣어줬다믄….
내는 몰랐어예. 폐렴에 걸리면 목이 마른지를 몰랐어예.
이 무식한 어메를 우얍니꺼.
저 불쌍한 얼라를 우얍니꺼.
_111p
살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였냐는 질문 뒤에는, 이렇게 가장 후회되는 순간에 대한 질문이 이어진다.
어쩌면 김순효 씨 인생에 가장 아픈 기억일지도 모른다.
다른 모든 사건들이 생에서 생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면,
이 이야기는 죽음으로 이어져,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의 자식에 관한 것일 때, 그것은 더 이상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영역에 이른다.
감히 품을 수 없는 것들을 품으며 위대한 포용의 힘을 보여준 김순효 씨의 인생은,
의도한 건 아니지만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소중한 생명을 잃어야 했던 기억까지도 품었던 것이다.
자신을 부정하며, 현실로부터 도망칠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는 삶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
여기에 남아 또 뿌리를 내리며 자신을, 타인을 품는다.
은지예. 그기… 우예 일이 그리 꼬였을까예.
칠푼이 아니면 아무도 그 땅을 안 살 끼다 했는데 알고 보이 내가 그 칠푼인 기라예.
설마, 그 땅을 산다고 하신 건가요?
_172p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 곳이 바로 고창이었고, 김순효 씨는 아주 오래전 그 고창을 찾아갔다.
아무 잘못 없는 김순효 씨가 벌벌 떨며, 죄지은 사람처럼 그 집에 몰래 들어갔을 때
남편의 여자는 그녀에게 '거시기, 땅 보러 오셨어라?'고 말을 건다.
이것이 경주의 친엄마와 키워준 엄마의 첫 만남이다.
사실 경주 아버지는 자신이 결혼한 것을 속인 채 경주 친어머니와 또 결혼을 했다.
그래서 경주의 친어머니는 또한 피해자이다.
그러니 김순효씨가 그녀를 미워할 이유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 모든 사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자신의 정체를 차마 밝힐 수 없었던 김순효 씨는 그렇게 남편의 여자와 뒷산을 오르며 땅을 보러 올라간다.
무성한 나무와 돌로 가득한, 심지어 무덤까지 있는, 땅으로서의 경제적인 가치가 한 푼도 없는 그 땅을
김순효 씨가 사겠다고 한 것이다.
그 땅은 경주 친어머니의 땅이자, 경주 외할머니가 묻혀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 땅을 김순효 씨가 사겠다고 한건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우린 가끔 어쩌면 자주,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생각들과 반대되는 행동을 한다.
답을 알면서도 바보같이 그것과 전혀 반대 방향에 있는 어리석은 답 쪽으로 가고 마는 것이다.
김순효 씨는 남편의 여자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못했다.
그 여자 또한 아무것도 모르고 결혼한 피해자인데 둘 다 동시에 불행해지게 만드는 것은 김순효 씨의 인품과는 거리가 먼 것이기도 했다.
받아들여야만 하는 진실을 눈 앞에서 확인하며, 허탈하고 무너지는 마음을 그 땅으로 채운 것 아닐까?
그렇게라도 구멍난 가슴을 메워야 했던 것 아닐까?
누군가에게 화풀이를 하거나 역정을 내는 건 그녀의 성질이 아니다.
자식의 죽음도 가슴에 묻고, 남편의 허물도 가슴에 묻듯, 이 진실 또한 묻으며
그녀는 그 땅이라도 사야 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우리의 선택은 의도하지 않게 역사를 만든다.
그게 인생과 우주가 주는 신비일 것이다.
그 신비를 포착하는 것이 문학을 읽는 즐거움이자, 현실 속을 살아가는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이 땅이 바로 경주의 '뿌리'를 찾아줄 수 있는 연결고리가 되기 때문이다.
당시에 김순효 씨가 그것을 알고 땅을 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의미를 담지 않은 선택과 행동이, 세월이 흘러 한 사람의 잃어버린 기억과 시간과 정체성을 찾게 되는 계기가 될 줄이야.
질질 울면서 걸어가는데 뒤에서 “아줌씨요”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기라요.
돌아보니까 저짝이데요. 얼라를
업고 손에 봉다리 하나를 들고 종종종 뛰어오데요.
봉다리를 내밀길래 받아 열어보이…. 감이 네 개 들은 기라요.
나무에서 금방 땄능가, 이파리가 요래 붙어 있드만요.
먼 길
가는데 손이 번잡시러 불 것 같아서 쪼매만 담았다 카데요.
다음에 볼 때 더 많이 준다 카데요.
등에 업힌 얼라가 내한
테 손을 뻗데요. 쪼매난 감을 하나 쥐었데예.
저짝이 워메
착한 거, 하니까 얼라가 말을 알아묵는지 감을 내한테로 더
내미는 기라요.
감을 받아주이, 그 조막만 한 손으로 좋다고 손뼉을 치데요.
_177p
남편의 여자, 경주의 친어머니, 그녀의 이름은 '최안순'이다.
그녀에게서 김순효씨가 땅을 넘겨받으면서 쓴 토지매매 계약서에서 경주 친어머니의 이름이 밝혀진다.
이 대목에서 경주 친어머니의 성품 또한 드러난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는 떠나는 김순효씨에게 감을 한봉다리 들려준다.
사실 그녀의 집은 동네에서 가장 큰 대봉 감나무가 있어서 '감나무 집 대봉댁'이라 불린다.
먼 길 떠난다고 무거울까봐 많이 못 담고, 다음에 더 많이 주겠다는 그녀의 말에서
경주 친어머니 또한 김순효 씨처럼 마음이 여린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침묵하고 회피하는 경주 아버지는 자신은 전혀 무관한 사람인 것처럼 내빼고,
남은 사람들이 서로를 안쓰러워하며, 쓰라린 상처를 보듬는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알게 된다.
진실로부터 도망가는 것은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님을.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이 비록 비극적이더라도, 부정하지 않고 그대로 품으며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김순효씨의 인생을 보면서 포용의 위대한 힘을 느낀다.
그리고 또 하나,
그때는 별거 아닌 사건이 훗날 거대한 인연으로 이어지는 만남 또한 있다.
등에 업힌 조그만 얼라는 김순효 씨의 자식이 되기 때문이다.
대봉감에서 대봉감으로 이어지는 인연.
손에 감을 쥐어주는 인연에서 모녀지간으로 얽히는 기묘한 인연이라니.
인생이 이러한 종류의 신비라면, 살아볼 만도 함을 느낀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내어주는 무언가가, 언제 어디에서 또 무엇으로 이어질지 지금은 모른다.
어떻게 얽히게 될지 지금은 모르지만, 끝까지 가보면 알게 되겠지.
이 소설의 아름다움은 또 여기에 있었다.
죄다 흐릿해지는 가운데 한 가지 선명한 느낌이 솟아올랐다.
그 느낌은 내게 할 말이 있다는 듯 물성을 입고 배를
지나 가슴을 통과해 목구멍으로 치받쳐 올라왔다.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어디쯤에서 내가 이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느낌….
어떤 시간이 손 내밀어 끌어당기는 듯 내 몸이 어딘가로 빨려드는 느낌….
그 강렬한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내 손이 감나무 꼭대기에 매달린 감을 향해 저절로 들어 올려졌다.
그 손에 겹쳐오는 또 다른 손은 지금의 절반도 안
되게 자그마했다.
그 또한 내 손이었다.
이명처럼 아득하게
귀를 울리는 소리도 있었다.
남자의 웃음소리… 여자의 노랫소리… 어린아이 말소리… 움마, 압빠, 움마, 압빠….
그
소리에 자석처럼 이끌려 발이 앞으로 떼어졌다.
순간, 격앙된 목소리가 파고들면서 그 모든 건 수증기처럼 삽시간에
공중으로 흩어졌다.
-197p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속의 '나'를 드디어 찾게 된 경주.
그 기억 속에는 감나무에 손이 닿지 않을 만큼 작은 아이가 있고,
그 아이를 어깨에 태운 아빠가 있고, 노래를 흥얼거리는 엄마가 있다.
그렇다. 경주에게도 아빠가 있었고, 엄마가 있었다.
그리고 함께 살았던 집과 땅이 있었다.
그 곳에 자랐던 대봉 감나무에서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실수하지 않는 인생이란 없다.
내가 한 실수 그 자체보다, 그것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이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
언제나 돌아서면 후회하고, 자신을 탓하게 될지라도
내가 만든 인연들로부터 도망가지만 않는다면,
언제든 다시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내 앞에서 문을 열어주길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경주의 아버지가 결혼생활 중에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 건 그의 실수이고 잘못이다.
그러나, 그의 딸 경주의 탄생은 잘못이 아니다.
실수로 태어난 생명이 아니다.
그러니 경주의 아버지는 경주의 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녀를 원래 자신의 가족들에게 데려왔을 때,
'죽은 친구의 딸'이 아니라, '나와 최안순씨의 딸'이라고 소개해야 했다.
비록 자신의 허물이 가족들에게 드러나 비난을 받게 될지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이 만들어 낸 인연들을 모두 품었어야 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실수로부터 도망쳤고, 가족들에게 '미안해'라는 말 밖에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만약 그가 용기를 내어 잘못을 고백하고, 모든 비난을 감수하며 가족들과 함께 나아갔다면,
그는 가족들에게 '미안해'가 아닌 '사랑해'라는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포용이 없다면 사랑은 존재할 수가 없다.
형체가 없는 사랑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형체가 있는 사람의 포용이다.
지금 이 순간은 존재하는 동시에 사라지는 시간들이다.
순간을 붙잡을 수는 없지만, 기억 속에는 남아있게 된다.
그리고 나와 우리가 동일한 역사 속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게 된다.
홀로 떠도는 사람이 아닌, 나의 '안식처'를 이 땅에 갖게 되는 것이다.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나아갈 지를 알게 되는 그 순간부터,
나의 여정은 시작되는 것이다.
나만의 안식처, 내가 돌아올 곳이 있기에 이방인으로서의 존재는 비로소 자신의 의지로 여행을 시작한다.
내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오로지 숨을 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숨 대신, 입술
사이로 비명 같은 외마디가 반복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 소리는 내 의지와 너무 상관없어서 다른 사람 입에서 나오는
듯 낯설었다.
- 엄마, 엄마, 엄마, 엄마….
_230p
시간의 갈림길 속에서 방황하던 경주는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을 돌려받았다.
자신의 뿌리, 자신을 낳아준 친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그녀는 숨이 터지며, '엄마'라는 단어를 쏟아낸다.
"스핀 숏의 피사체가 된 듯 내 몸만 빼고 세상 모든 게 빙글빙글 돌았다. 세상은 컴컴하고, 고요하고, 아득했다. 물속이 틀림없었다.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그 원류를 알 수 없는 물이 내 손을 타고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델 것처럼 뜨거워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기억을 돌려받는 것, 내가 시작된 곳을 찾게 되는 순간은
이처럼 세상으로부터 밀려난 듯 아득해지며, 마치 나를 감싸는 무엇과 분리되어
처음 세상에 태어난 아기처럼 탄생하는 것과 동일한 느낌일까.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아득하면서도 뜨거운 무언가에 몸이 휘감기는 느낌을 받았다.
중심을 잃고 쓰러질까봐 어지러우면서 정신을 붙잡아야 할만큼.
이미 세상에 태어났으면서도, 우리는 이처럼 다시 한번 '탄생'의 순간을 느껴야 하는 때가 있지 않을까?
고개를 들고 보니, 허리 숙인 나무들에 닿은 햇빛이 세 개의 고인돌을 사선으로 비추고 있었다.
세 고인돌의 그림자가 나란히 같은 방향으로 드리워지면서 하나의 그림자로 합쳐졌다.
그림자가 된 고인돌들은 원래보다 몸피가 몇 배로 커졌다.
세계 최대의 고인돌이라 해도 무색하지 않게….
_257p
첫번째 고인돌은 김순효씨가 경주의 친어머니를 위해 만든 무덤이다.
두번째 고인돌은 경주가 김순효씨를 위해 만든 무덤이고,
마지막으로 세번째 고인돌은 그 옆에 경주가 만든 작은 고인돌이다.
그것은 누구를 위한 고인돌이었을까?
독자들의 많은 해석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어머니들과 하나의 땅 위에 영원히 함께 놓여 있고 싶은 경주의 마음이,
자신의 고인돌을 옆에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생각해보고 싶다.
더 이상 시간을 함께 할 수 없는 영원한 이별은 인간들로 하여금 무덤을 만들게 하고,
이 땅에는 살아있는 사람만큼 죽은 자의 무덤이 존재한다.
고인돌 또한 수천년 전에도 이러했을 인간들의 마음을 담은 역사일 것이다.
나를 옭아맸다고 생각했던 이야기가 내가 해야 하는 이야기임을 깨달아서다.
그 이야기를 해야 하는 사람이 나이기에 그 이야기가 끈질기게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는 걸 알아서다.
엄마는 나보다 그걸 먼저 알았다.
고창에서 카메라에 대고 이야기할 때 엄마는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 자신에게 이야기했다.
당신 입으로 한 번도 말해본 적 없기에 아직 당신의 이야기가 되지 못한 이야기를 했다.
...
엄마는 그래서 내게 그리 말한 것이다.
내 이야기를 스스로 들으라고….
내가 자신에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그것이
비로소 진짜 내 이야기가 된다는 걸 엄마는 알았다.
-262p
"내가 나에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그것이 비로소 진짜 나의 이야기가 된다"
어쩌면 이 소설의 모든 여정이 바로 '이야기'를 찾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우리의 이야기를 찾는 것.
나는 알 수 없지만, 타인은 알고 있는 진실과
나는 알지만 타인은 모르고 있는 진실을
우리는 언젠가 서로에게 건네야만 할 때가 있다.
그것이 사실 유쾌한 일만은 아니다.
진실에 다가서는 일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하고, 진실을 품는 일조차도 엄청난 포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온전히 품을 줄 아는 사람의 위대함을 보여주었다.
사랑보다 더 큰 '포용'의 힘을 "김순효" 라는 인물을 통해 일깨워주었다.
어머니의 유산은 땅도, 사랑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진실과 역사를 품어 온 바로 그 '포용'에 있다.
그것은 경주의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속 자신의 뿌리를 찾게 해주었고,
다시 나로부터 시작될 '무엇'에 다가갈 수 있는 용기를 선물해주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이방인이 된다.
나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들이 기원한 곳과는 독립되어,
나의 정신과 영혼은 온전히 나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여정은, 내가 탄생한 시작점으로부터 출발하는 것과는 또 다른 것이 된다.
이것이 바로 나만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여정의 시작이다.
나를 구성하는 것들의 이야기를 언젠가 내 자신에게 꺼내고, 세상에 꺼내게 되는 순간
나는 비로소 '나'라는 사람이 되는 것 아닐까?
소설의 끝에서 나도, '나의 이야기'를 찾아 나서는 여행을 시작해보려고 한다.
한 사람이 전해준 이야기는 이렇게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어서 시작하라고.'
저마다의 이야기를 찾는 여정을 응원하며, 발걸음을 내딛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