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역배우 김순효 씨 - 제4회 고창신재효문학상 수상작
이수정 지음 / 다산책방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억이 시작되는 곳에서 나는 엄마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자식 중에서 나만, 그것도 제일 어린애가 엄마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의아해하거나 당혹스러워하기에 앞서 우선, 슬펐다.

그건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어디쯤에서 내가 데려온 자식임을 스스로 깨우쳤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

 기억이 시작되는 무렵의 나는 엄마에게 존댓말을 쓸 뿐 아니라 ‘엄마’라고 제대로 부르지도 못했다.


_16,17p


경주의 시간은 두 갈래로 나뉜다.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의 경주는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

어린 아이가 제 스스로 자신이 데려온 자식임을 눈치채야 했을 만큼, 자신의 뿌리를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경주의 아버지가 밖에서 데려온 딸, 그것도 죽은 친구의 딸이라고 속이면서 데려온 딸.

이것이 경주가 아는 전부인 자신의 뿌리이다.

기억이 시작되는 곳에서의 경주는 이렇게 자신의 시작점을 알지 못한 채 인생을 출발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솔직한 아이로 자란다.

자신의 인생 자체가 거짓이라 여겨지기에, 차라리 입을 다물어 진실조차도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그런 그녀의 성질은 그녀의 남편 인철에게 정작 중요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 불화로 이어지게 만들기도 한다.


내가 엄마에게 작은 거짓말도, 하다못해 선의의 거짓말도 하지 않으려 기를 쓰는 이유는

결코 착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었다.

나란 존재 자체가 이미 엄마에게 거짓말처럼 느껴져서였다.

아버지와 내가 공모해서 만든 하나의 큰 거짓말….

그러잖아도 이미 내 삶을 통째로 저당 잡힌 거짓말….

나는 거기에 더는, 정말 더는 한 마디의 거짓말도 보태고 싶지 않았다.

피치 못하게, 거짓말이 필요한 때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럴 때 나는 처음부터 말을 안 하는 쪽을 택했다.

어떤 일을 다르게 바꿔서 거짓말하는 대신, 그 어떤 일이 아예 없었던 것처럼…. 

...

 내가 시작된 곳이 어딘지도 모르는 채,

내 기억이 시작되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는 채,

그 기억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채….

그런 채 무작정 아이를 가질 수는 없었다.

그런 채 나로부터 시작될 또 다른 기억을 만들 수는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_26,27P


기억이 시작되는 곳에서부터 경주의 정체성이다.

한 집에서 자신만 뿌리가 다르다는 것, 심지어 자신의 뿌리를 모른다는 것은

어디를 가더라도 끝과 시작에 다가서지 못하는 느낌일테다.

그래서 그녀는 결혼 생활 내내, 아이를 간절히 원해왔던 남편 몰래 피임약을 먹는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남편 인철은 그 길로 집을 나가게 되고,

경주는 남편과 함께 살던 뉴저지에서 한국으로 들어오게 된다.



오랜만의 전화에서 엄마는 어디 좀 가자고 했다.

지방이라 기차를 타고 가야 한다고 했다.

이틀 정도 걸릴 참인데 혹시 일에 지장은 없겠느냐는 말을 엄마는 이미 기차표를 끊었다고 한 뒤에 했다.

나는 괜찮다고는 했지만, 어딜 가냐고는 묻지 않았다.


_8p


이것이 바로 이 소설의 시작이다.

경주 인생의 비어있는 기억 속 '어디'는 이렇게 다시 시작된다.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을 오랫동안 잃은 채로 살아온 경주는 그 '어디'조차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인간의 출생, 그 뿌리는 태어나는 순간의 아기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 걸까?

나를 구성하는 세포들이 기원한 곳,

아버지와 어머니의 존재란 자식에게 있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자식과 부모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새로운 관점으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단순히 나를 낳아준 사람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존재하게 된 이유이기 때문에.

헌신적으로 양육하고, 보호하고, 세상에 길러내는 무한한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 그 자체의 성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다.

탄생의 순간을 떠올려 보면 알 수 있다.

이제 막 엄마의 뱃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온 '나'의 존재를 나는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생명은 경이롭다.

나의 몸을 구성하는 모든 세포들이 기원한 곳을 안다고 해도,

나의 정신, 영혼은 부모님이 물려준 것이 아니다.

세포가 기원한 곳에 정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의 정신적인 영역은 결국 나에게 온전히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여정 또한 철저히 나의 것이 된다.


생명의 본질적인 속성을 생각해보게 된 건,

나와 부모님의 연결고리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다.

여기에서 시작하는 것이 바로 이 소설 속 인물, '경주'의 뿌리를 찾아나가는 여정일 것이기 때문이다.


경주가 원한 건 부모의 헌신적인 사랑도, 관심도, 그 어떤 감정의 영역도 아니다.

내가 시작된 곳이 어디인지 알게 되어, 다시 나로부터 시작될 그 무엇을 알게 되는 것.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어지는 '역사'속으로 들어가는 일.

생명의 '근원'으로 들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소설 속에서 경주와 그녀의 어머니 김순효씨와 함께, 나의 여행도 이렇게 시작되었다.



엄마는 피아노를 치고 있… 아니, 치고 있지 않았다.

피아노를 치는 척만 하고 있었다.

손가락이 건반에 닿지 않고 공중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얼른 둘러보니 의자에 앉은 사람들은 저마다 휴대폰에 코를 박고 있느라

다행히 엄마를 쳐다볼 겨를이 없는 것 같았다.

제일 끝자리에 앉은 남자 노인만 지팡이에 올린 두 손에 얼굴을 고이고 피아노 쪽을 보고 있었다.

엄마의 등 쪽에서 꼬마 아이 하나가 피아노 쪽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아이는 혓바닥을 빼문 채 엄마와 피아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뒤돌아 누군가에게 빨리 오라고 손을 펄럭였다.

엄청나게 신기한 구경거리가 있다는 듯….

무리도 아니었다.

엄마는 미간이 팰 정도로 눈을 질끈 감고서 몸을 좌우로 움직이며

소리 안 나는 피아노 연주에 몰입해 있었다.

나는 얼른 백팩과 카메라 가방을 챙겨 들고 일어나 엄마에게 다가들었다.

엄마 팔을 잡으며 귀에 입을 대고 가자고 속삭였다.

놀란 엄마가 화들짝 몸서리를 치더니 눈을 뜨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엄마의 한쪽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힘주어 엄마를 일으켰다.

도망자가 된 심정으로 엄마와 자리를 뜨는데 뒤에서 지팡이 노인의 가래 낀 음성이 들렸다.

앵코올.


_33,34P


경주와 어머니의 여정이 시작되면서부터 많은 인물들이 스쳐 지나간다.

이 소설의 매력들 중에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카메라를 들고 줌인,줌아웃 하듯 가까워졌다가 멀어져가는 행인들은 소설 속 주인공들과 무관하지만 섬세하게 포착된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 사람은 이 행인들과 함께 소설 속을 여행하며, 주인공들의 여정을 적당한 거리에서 관찰하게 된다.

경주의 어머니 김순효 씨는 70세 넘어 단역배우로 활동해왔다.

딸과 함께 고창에 내려가는 길에 지하철역 대합실에서 그녀는 그랜드 피아노를 발견하고

열정적으로 연주하는 연기를 펼친다.

83세의 할머니가 피아노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고 치는 '척'하는 것을 보고

"앵코올"을 외치는 한 노인.

그 행인의 반응이 나의 반응과 일치할 때, 소설의 일부가 되는 느낌에 두근거렸다.



남자가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일반 카메라가 아님을 알아본 듯했다.

나는 멀어져 가는 남자의 등을 롱숏으로 담았다.

시골도 아니고, 그렇다고 분주한 도시라고도 할 수 없는 고창 시가지는

다분히 이국적인 데가 있었다.

위압적으로 높은 빌딩도 없어 내가 살던 뉴저지의 작은 타운과 비슷했다.

대도시에 이렇게 누군가를 향해 손 흔드는 사람이 있던가….


_51P


경주와 어머니가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고창에 도착하고, 처음으로 경주가 카메라를 꺼내어 촬영하는 장면이다.

물론, 이때는 아직 그들의 <인생 인터뷰>가 시작하지 않았을 때이다.

결혼하고 뉴저지에서 살다가 다시 한국으로 들어온 경주가 낯선 도시에 들어서는 첫 순간.

심지어 한번도 가보지 않은, 그러나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 태어난 곳이기도 한 바로 그 '고창'.

고향에 첫 발걸음을 내딘 경주에 대한 묘사가 인상 깊었다.

그 배경에는 전혀 모르는 타인에게, 푸근하고 해맑게 손을 흔드는 또 한 명의 행인이 있다.

낯선 도시에 들어설 때 가장 인상적인 풍경은 역시 '사람들'일테다.

도시의 이방인인 나에게 무해하고 순수한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

고창의 첫인상에서부터 알 수 없는 운명이 시작되는 것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경주야, 그럼 어때서 그래. 친딸이 아니면 어때서….

그때 인철이 했던 말이 바람 소리에 실려 실제로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눈을 덮은 머리칼을 떼내는데 인철의 프러포즈에 “Yes”라고 할 때처럼

내 안에서 어떤 선명한 결심 같은 게 일어섰다.

〈인생 인터뷰〉시즌 5의 여섯 번째 에피소드로 ‘단역배우 김순효 씨’ 편을 진행해 보자고….

단, 모녀지간이 아닌 구성작가와 게스트로….

한기가 드는지 일순, 부르르 떨려 양팔로 얼른 몸을 싸안았다.


_70p


경주는 휴먼 다큐 <인생 인터뷰>의 구성 작가이다. 

처음에 어머니가 '어디'가자고 했을 때 대구를 가는 줄 알았던 경주는 친구이자 제작사 사장인 용석에게 이번 에피소드를 자신이 찍어오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는 바람에, 그녀는 졸지에 고창을 가서 다큐를 찍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리고 아이러니 하게도 게스트는 경주의 어머니 "김순효 씨"가 되어버린 것이다.

인터뷰어는 방송 작가인 딸이, 게스트는 그의 어머니가.

친자관계가 아니면서 공식적으로는 모녀지간인 그녀들이 평생 각자의 가슴에 묻고 살았던

인생의 진실을 바로 <인생 인터뷰> 촬영을 통해 밝히게 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머니 김순효 씨의 한이 맺힐 정도로 절절한, 가슴에 고이 간직해왔던 '진실'의 고백이다.

어머니가 경주를 데리고 고창에 간 건, 사실은 경주의 '뿌리'를 찾아주기 위해서였다.

이 사실을 알 리가 없는 경주는 어머니를 게스트로 다큐를 촬영하고,

어머니 김순효 씨는 카메라에 대고 경주에게 전하고 싶었던 진실을 전하는 동시에,

지금껏 누구에게도 꺼내지 않았던 인생 속 가슴 아픈 이야기들을 펼친다.

이 소설의 제목이 "단역배우 김순효 씨"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친딸이 아니기 때문에 망설였던 경주가 <인생 인터뷰> '단역배우 김순효 씨' 편을 촬영하겠다고 결심한 순간에는, 남편 인철의 말이 겹쳐 흐른다.

"친딸이 아니면 어때서"라며, 경주를 따뜻하게 위로했던 인철의 오래전 한 마디가 스쳐 지나가면서,

그녀는 드디어 어머니 김순효 씨를 게스트로, 촬영을 시작한다.



반갑습니다. 이렇게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청자분들께 직접 본인 소개를 해주시겠어요?


제 이름은 김순효라 카지예. 순할 순에, 효도할 효, 순효지예.

일천구백사십일 년생이고요. 올해 팔십셋 됐네예.

태어나기는,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면 장암리 삼십….


_77p


드디어 <인생 인터뷰> 촬영을 시작하며 경주가 첫 질문을 한다.

나는 소설을 다 읽은 지금도 이 장면이 애틋하게 느껴진다.

누군가의 '어머니'가 아니라, '김순효' 라는 사람으로 카메라 앞에 서게 되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인생 깊숙히 숨겨온 이야기들을 꺼내는 순간,

그녀가 진짜 '김순효'라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내가 '나'일 수 있는 순간들이 지금껏 한번이라도 있었다면

김순효 씨는 그렇게 절절하고 아픈 이야기들을 진작에 꺼낼 수 있었을 것이다.

여태껏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는 건,

진짜 '내'가 될 수 있었던 순간은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이기도 하다.

김순효 씨 인생의 피날레는 바로 <인생 인터뷰>에서 시작된다.

나의 인생을 구성하는 것들을 나 자신과, 타인과, 세상에 꺼내어 보여주는 순간

비로소 나는 내가 되기에.



혹시 조금이라도 더 일찍 배우가 됐더라면, 하고 아쉬운 생각이 들 때는 없었는지요.


어뎨예. 그런 생각은 요만큼도 안 들었어예.

내 같은 사람이 우예 일찍 배우가 되것어요.

배우라 카믄 남의 맴을 잘 알아야 하지 않것어예.

남의 맴을 잘 알아야 그 사람 맴처럼 연기를 할 것 아니것어예.

내처럼 핵교도 제대로 못 다닌 사람이 우예 다른 사람 맴을 알겠어예.

내 같은 사람은 저꺼보는 수밖에는 없는 기라요.


말씀 중에 죄송한데… 저꺼본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몸으로 직접 저꺼봐야 한다꼬예. 서울말로 뭐라카노….


아, 겪어보는 거 말씀인가 보네요. 경험해 보는 거요.


글치예! 내가 칠십에 데부했으까니, 남이 맴을 저꺼보는데, 아니, 겪어보는데 칠십 년이 걸렸네예.

그 세월이 있어 노이 내 같은 사람도 배우가 될 수 있는 기지예.

늦어서 아쉽기는예. 가당치도 않어예.

지금 내가 요래, 배우가 돼삐맀다 생각하믄 자다가도 좋아서 웃어쌓는데예.


_81,82p


비록 70세 넘어 단역 배우로 잠깐씩 출연하는 것이지만,

한 사람의 꿈이 이루어지는 장면을 보는 건, 언제나 벅차오르고 눈물겹다.

'저꺼본다', 즉 '경험'해보면서 타인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알게 되는 것이

'배우'가 되는 길이라 생각했던 김순효 씨.

감히 끌어 안을 수 없는 것들을 자기 인생에 끌어 안은 사람의 '위대함'을 

그녀의 인생 인터뷰를 통해 느낄 수 있게 된다.


사랑 너머에 '포용'이 있다.

사랑보다 더 큰 것이 포용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모든 사람들을 품은 것이 아니다.

사랑으로 그 모진 인생을 품은 것이 아니다.

비극과 불행을 포용하는 힘은 사랑에 있는 게 아니라, '사람'에 있다.

그녀가 좋은 사람이기에, 성숙한 인간으로 나아가는 사람이기에 그런 일들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남편과 살림을 차리고 아이까지 낳은 여자를 품었고,

그 여자의 아이도 품었고,

그들이 살았던 집과 땅도 품었고,

시간이 흘러 그 터전에 살아가는 사람들까지 품었다.

그녀의 인생은 사람과 땅과 자연을 품는 것의 연속이었다.

포용이 가진 힘은 사랑에 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보여준 용서와 포용에서 인간이 어디까지 성숙해질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문학이 보여줄 수 있는 성숙함이 바로 여기, '김순효'라는 인물에 담겨 있다.

김순효 씨를 이해함으로써 독자인 나는 '포용'의 가치를 배우고, 성숙함에 다가간다.



내 눈에는 별 감흥 없는 것들이 엄마에게서는

“시상에!” “움무야꼬” “어쩜 좋아!” 같은 다양하고도 현란한 감탄사를 끌어냈다.

같이 구경 다니며 많은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으나 엄마의 리액션이 조금 과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엄마에게서 그런 리액션이 나올 타이밍이면 언니는 먼저 흉내를 내기도 했다.

그 과해 보이던 반응이 사실은 엄마의 진심이라는 걸 나는 고창에 와서 알게 되었다.

무언가를 보고 감탄할 때, 뷰파인더 속 얼굴을 확대해서 보면

엄마의 눈은 진짜로 처음 보는 아이의 그것처럼 반짝였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진짜 딱 그만큼 감탄스럽다고 말하는 눈이었다.


_93p


세상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순수하고 투명하게 바라보는 김순효 씨의 성질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 그녀였기에 누구도 감히 할 수 없는 '포용'으로 자신과 타인의 인생을 품을 수 있었던 것이다.

'헌신'이라는 것은 어쩌면 누구가의 인생 전부를 품는 일일지도 모른다.

친어머니가 아니었지만 어머니로서 경주를 키워 온 것은,

경주의 인생 자체를 품었기에 가능한 일 아닐까?

사랑이라는 애매모호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의 '포용'과 그것의 위대한 힘이 느껴졌다.

나는 누군가의 인생을 이렇게 한가득 품을 수 있는 사람일까?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된다.



보통 소나무에 비해 몸통이 가느다란 소나무가 대나무의 몸을 휘감은 채 하늘로 뻗어 있었다.

닮은 데라곤 전혀 없는 이질적인 두 나무의 오묘한 섞임….

묵은 감정을 풀지 못해 드잡이하는 것도 같고, 결코 이루지 못할 사랑을 애달파하는 것도 같고….

엉겨든 두 나무를 카메라에 온전히 담으려면 한참 뒷걸음질 쳐야 했다.

두 나무가 있는 곳의 지반은 경사가 있었다.

거기, 기우뚱하게 서서 만면에 미소를 띤 엄마가 나를 보고 있었다.


야야, 누가 누구 땅에 들어온 거 같노?

여그, 천지에 대나무다 보이, 소나무가 대나무 숲에 들어온 거 같제?

...

틀렸데이. 여긴 원래가 소나무 땅인기라. 소나무가 여그에 먼저 살았다 이 말이제.

이 소나무 나이가 이백년도 더 됐다 안 하나.

그라이까네, 소나무가 여기 들어온 게 아니고 같이 살자고 찾아온 대나무를 소나무가 받아줬다, 이 말이다

...

 나무가 있는 쪽으로 두 사람이 걸음을 떼었다.

여자가 남자의 한쪽 겨드랑이에 손을 끼우며 엉킨 두 나무를 올려다보더니 말 했다.


대나무는 똑바로 자랐는데 소나무만 몸이 배배 꼬였네. 소나무가 고달프겠다, 그치?


남자가 팔을 풀어 여자의 어깨에 두르면서 다른 손으로 나무 꼭대기를 가리켰다.


대신 위로 길게 자랐잖아. 저렇게 키 큰 소나무 봤어?


_96~100p


저 혼자서만 뿌리가 다른 경주는 대나무일테고, 함께 살아온 나머지 가족들은 소나무일까?

대나무를 품느라 온 몸이 휘면서 자랐지만, 그 소나무는 다른 나무에 비해 갸날프지만 높게 자랐다.

직선으로 올곧게 높이 자라는 대나무의 성질은 소나무가 제 몸을 휘어가면서 품은 덕분에 자신의 성질 그대로 자랄 수 있었고, 소나무는 비록 휘고 얇아졌지만 대나무와 함께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자랐다.

낯선 땅에 찾아온 대나무에게 제 몸을 내어주며 그를 품지 않았다면, 지금 이 곳은 대나무 숲이 아니라 소나무만 가득한 곳이겠지.


어쩌면 우리 모두는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이방인일지도 모른다.

나의 세포가 기원한 곳으로부터 독립하여 정신적으로 홀로 서야만 하는 운명.

그건 인간이 죽는 순간까지 해내야 하는 숙제이며, 동시에 성숙한 인간으로 나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같은 땅 위에서 서로의 몸을 휘감고 얽히면서 이방인인 존재가 그 땅의 주인이 되기도 한다.

외로운 운명이 다른 또 하나의 운명과 얽히는 일은 이방인으로서의 존재가 부딪혀야할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부정하며 회피할지, 아니면 소나무가 그랬듯 제 몸을 내어주며 온전히 품을지

그것은 하나의 선택일 뿐이다.

모든 소나무가 대나무를 품어주지는 않듯이.


살면서 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제일 많이 한다면,

그 못지않게 많이 하는 생각이 후회되는 일에 관해서가 아닐지요.

이미 지난 일이라 후회해도 아무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 말이에요.

김순효 씨도 살아오시면서 후회되는 일이 있으셨나요?


은지예. 지난 세월 다 싸잡아 후회되는 일이라 카믄, 내한테는 일등짜리가 있지요.

일등짜리라서 맨날 생각하고 맨날 후회하는 일이 있지예.


_101,102p


의사가 서류 같은 걸 들고 오드마는 내한테 주면서 그라데예.

목이 말랐을 낍니더. 숨 넘구기 전에 얼라 목이 마이 말랐을 낍니더.

내가, 그때 울었어예. 그때부터 바닥에 퍼지고 앉아서 돌은 여자맨쿠로 울었어예.

발도 구르고 가슴을 쥐어짰다가 주먹으로 쳤다가…. 내 뺨따구도 여러 번 친 것 같어예.

고마, 숨이 안 쉬어지는 기라요. 그 간호사가 오드마는 진정하라 카데요.

내가 아무 죄 없는 간호사 팔을 붙잡고 막 소리 질렀지예.

보이소, 얼라가 목이 말랐다 안 합니꺼. 죽기 전에 목이 말랐다 안 합니꺼.

바깥에 눈이 천지빼까린데, 눈이라도 먹였다믄, 눈이라도 뭉쳐서 입에 넣어줬다믄….

내는 몰랐어예. 폐렴에 걸리면 목이 마른지를 몰랐어예.

이 무식한 어메를 우얍니꺼. 저 불쌍한 얼라를 우얍니꺼.


_111p


살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였냐는 질문 뒤에는, 이렇게 가장 후회되는 순간에 대한 질문이 이어진다.

어쩌면 김순효 씨 인생에 가장 아픈 기억일지도 모른다.

다른 모든 사건들이 생에서 생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면,

이 이야기는 죽음으로 이어져,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의 자식에 관한 것일 때, 그것은 더 이상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영역에 이른다.

감히 품을 수 없는 것들을 품으며 위대한 포용의 힘을 보여준 김순효 씨의 인생은,

의도한 건 아니지만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소중한 생명을 잃어야 했던 기억까지도 품었던 것이다.

자신을 부정하며, 현실로부터 도망칠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는 삶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

여기에 남아 또 뿌리를 내리며 자신을, 타인을 품는다.


은지예. 그기… 우예 일이 그리 꼬였을까예.

칠푼이 아니면 아무도 그 땅을 안 살 끼다 했는데 알고 보이 내가 그 칠푼인 기라예.


설마, 그 땅을 산다고 하신 건가요?


_172p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 곳이 바로 고창이었고, 김순효 씨는 아주 오래전 그 고창을 찾아갔다.

아무 잘못 없는 김순효 씨가 벌벌 떨며, 죄지은 사람처럼 그 집에 몰래 들어갔을 때

남편의 여자는 그녀에게 '거시기, 땅 보러 오셨어라?'고 말을 건다.

이것이 경주의 친엄마와 키워준 엄마의 첫 만남이다.

사실 경주 아버지는 자신이 결혼한 것을 속인 채 경주 친어머니와 또 결혼을 했다.

그래서 경주의 친어머니는 또한 피해자이다.

그러니 김순효씨가 그녀를 미워할 이유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 모든 사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자신의 정체를 차마 밝힐 수 없었던 김순효 씨는 그렇게 남편의 여자와 뒷산을 오르며 땅을 보러 올라간다.

무성한 나무와 돌로 가득한, 심지어 무덤까지 있는, 땅으로서의 경제적인 가치가 한 푼도 없는 그 땅을

김순효 씨가 사겠다고 한 것이다.

그 땅은 경주 친어머니의 땅이자, 경주 외할머니가 묻혀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 땅을 김순효 씨가 사겠다고 한건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우린 가끔 어쩌면 자주,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생각들과 반대되는 행동을 한다.

답을 알면서도 바보같이 그것과 전혀 반대 방향에 있는 어리석은 답 쪽으로 가고 마는 것이다.

김순효 씨는 남편의 여자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못했다.

그 여자 또한 아무것도 모르고 결혼한 피해자인데 둘 다 동시에 불행해지게 만드는 것은 김순효 씨의 인품과는 거리가 먼 것이기도 했다.

받아들여야만 하는 진실을 눈 앞에서 확인하며, 허탈하고 무너지는 마음을 그 땅으로 채운 것 아닐까?

그렇게라도 구멍난 가슴을 메워야 했던 것 아닐까?

누군가에게 화풀이를 하거나 역정을 내는 건 그녀의 성질이 아니다.

자식의 죽음도 가슴에 묻고, 남편의 허물도 가슴에 묻듯, 이 진실 또한 묻으며

그녀는 그 땅이라도 사야 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우리의 선택은 의도하지 않게 역사를 만든다.

그게 인생과 우주가 주는 신비일 것이다.

그 신비를 포착하는 것이 문학을 읽는 즐거움이자, 현실 속을 살아가는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이 땅이 바로 경주의 '뿌리'를 찾아줄 수 있는 연결고리가 되기 때문이다.

당시에 김순효 씨가 그것을 알고 땅을 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의미를 담지 않은 선택과 행동이, 세월이 흘러 한 사람의 잃어버린 기억과 시간과 정체성을 찾게 되는 계기가 될 줄이야.



질질 울면서 걸어가는데 뒤에서 “아줌씨요”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기라요.

돌아보니까 저짝이데요. 얼라를 업고 손에 봉다리 하나를 들고 종종종 뛰어오데요.

봉다리를 내밀길래 받아 열어보이…. 감이 네 개 들은 기라요.

나무에서 금방 땄능가, 이파리가 요래 붙어 있드만요.

먼 길 가는데 손이 번잡시러 불 것 같아서 쪼매만 담았다 카데요.

다음에 볼 때 더 많이 준다 카데요.

등에 업힌 얼라가 내한 테 손을 뻗데요. 쪼매난 감을 하나 쥐었데예.

저짝이 워메 착한 거, 하니까 얼라가 말을 알아묵는지 감을 내한테로 더 내미는 기라요.

감을 받아주이, 그 조막만 한 손으로 좋다고 손뼉을 치데요.


_177p


남편의 여자, 경주의 친어머니, 그녀의 이름은 '최안순'이다.

그녀에게서 김순효씨가 땅을 넘겨받으면서 쓴 토지매매 계약서에서 경주 친어머니의 이름이 밝혀진다.

이 대목에서 경주 친어머니의 성품 또한 드러난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는 떠나는 김순효씨에게 감을 한봉다리 들려준다.

사실 그녀의 집은 동네에서 가장 큰 대봉 감나무가 있어서 '감나무 집 대봉댁'이라 불린다.

먼 길 떠난다고 무거울까봐 많이 못 담고, 다음에 더 많이 주겠다는 그녀의 말에서

경주 친어머니 또한 김순효 씨처럼 마음이 여린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침묵하고 회피하는 경주 아버지는 자신은 전혀 무관한 사람인 것처럼 내빼고,

남은 사람들이 서로를 안쓰러워하며, 쓰라린 상처를 보듬는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알게 된다.

진실로부터 도망가는 것은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님을.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이 비록 비극적이더라도, 부정하지 않고 그대로 품으며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김순효씨의 인생을 보면서 포용의 위대한 힘을 느낀다.


그리고 또 하나, 

그때는 별거 아닌 사건이 훗날 거대한 인연으로 이어지는 만남 또한 있다.

등에 업힌 조그만 얼라는 김순효 씨의 자식이 되기 때문이다.

대봉감에서 대봉감으로 이어지는 인연.

손에 감을 쥐어주는 인연에서 모녀지간으로 얽히는 기묘한 인연이라니.

인생이 이러한 종류의 신비라면, 살아볼 만도 함을 느낀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내어주는 무언가가, 언제 어디에서 또 무엇으로 이어질지 지금은 모른다.

어떻게 얽히게 될지 지금은 모르지만, 끝까지 가보면 알게 되겠지.

이 소설의 아름다움은 또 여기에 있었다.


죄다 흐릿해지는 가운데 한 가지 선명한 느낌이 솟아올랐다.

그 느낌은 내게 할 말이 있다는 듯 물성을 입고 배를 지나 가슴을 통과해 목구멍으로 치받쳐 올라왔다.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어디쯤에서 내가 이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느낌….

어떤 시간이 손 내밀어 끌어당기는 듯 내 몸이 어딘가로 빨려드는 느낌….

그 강렬한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내 손이 감나무 꼭대기에 매달린 감을 향해 저절로 들어 올려졌다.

그 손에 겹쳐오는 또 다른 손은 지금의 절반도 안 되게 자그마했다.

그 또한 내 손이었다.

이명처럼 아득하게 귀를 울리는 소리도 있었다.

남자의 웃음소리… 여자의 노랫소리… 어린아이 말소리… 움마, 압빠, 움마, 압빠….

그 소리에 자석처럼 이끌려 발이 앞으로 떼어졌다.

순간, 격앙된 목소리가 파고들면서 그 모든 건 수증기처럼 삽시간에 공중으로 흩어졌다.


-197p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속의 '나'를 드디어 찾게 된 경주.

그 기억 속에는 감나무에 손이 닿지 않을 만큼 작은 아이가 있고,

그 아이를 어깨에 태운 아빠가 있고, 노래를 흥얼거리는 엄마가 있다.

그렇다. 경주에게도 아빠가 있었고, 엄마가 있었다.

그리고 함께 살았던 집과 땅이 있었다.

그 곳에 자랐던 대봉 감나무에서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실수하지 않는 인생이란 없다.

내가 한 실수 그 자체보다, 그것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이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

언제나 돌아서면 후회하고, 자신을 탓하게 될지라도

내가 만든 인연들로부터 도망가지만 않는다면,

언제든 다시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내 앞에서 문을 열어주길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경주의 아버지가 결혼생활 중에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 건 그의 실수이고 잘못이다.

그러나, 그의 딸 경주의 탄생은 잘못이 아니다.

실수로 태어난 생명이 아니다.

그러니 경주의 아버지는 경주의 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녀를 원래 자신의 가족들에게 데려왔을 때,

'죽은 친구의 딸'이 아니라, '나와 최안순씨의 딸'이라고 소개해야 했다.

비록 자신의 허물이 가족들에게 드러나 비난을 받게 될지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이 만들어 낸 인연들을 모두 품었어야 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실수로부터 도망쳤고, 가족들에게 '미안해'라는 말 밖에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만약 그가 용기를 내어 잘못을 고백하고, 모든 비난을 감수하며 가족들과 함께 나아갔다면,

그는 가족들에게 '미안해'가 아닌 '사랑해'라는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포용이 없다면 사랑은 존재할 수가 없다.

형체가 없는 사랑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형체가 있는 사람의 포용이다.



지금 이 순간은 존재하는 동시에 사라지는 시간들이다.

순간을 붙잡을 수는 없지만, 기억 속에는 남아있게 된다.

그리고 나와 우리가 동일한 역사 속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게 된다.

홀로 떠도는 사람이 아닌, 나의 '안식처'를 이 땅에 갖게 되는 것이다.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나아갈 지를 알게 되는 그 순간부터,

나의 여정은 시작되는 것이다.

나만의 안식처, 내가 돌아올 곳이 있기에 이방인으로서의 존재는 비로소 자신의 의지로 여행을 시작한다.



내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오로지 숨을 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숨 대신, 입술 사이로 비명 같은 외마디가 반복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 소리는 내 의지와 너무 상관없어서 다른 사람 입에서 나오는 듯 낯설었다.

- 엄마, 엄마, 엄마, 엄마….


_230p


시간의 갈림길 속에서 방황하던 경주는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을 돌려받았다.

자신의 뿌리, 자신을 낳아준 친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그녀는 숨이 터지며, '엄마'라는 단어를 쏟아낸다.


"스핀 숏의 피사체가 된 듯 내 몸만 빼고 세상 모든 게 빙글빙글 돌았다. 세상은 컴컴하고, 고요하고, 아득했다. 물속이 틀림없었다.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그 원류를 알 수 없는 물이 내 손을 타고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델 것처럼 뜨거워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기억을 돌려받는 것, 내가 시작된 곳을 찾게 되는 순간은

이처럼 세상으로부터 밀려난 듯 아득해지며, 마치 나를 감싸는 무엇과 분리되어

처음 세상에 태어난 아기처럼 탄생하는 것과 동일한 느낌일까.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아득하면서도 뜨거운 무언가에 몸이 휘감기는 느낌을 받았다.

중심을 잃고 쓰러질까봐 어지러우면서 정신을 붙잡아야 할만큼.



이미 세상에 태어났으면서도, 우리는 이처럼 다시 한번 '탄생'의 순간을 느껴야 하는 때가 있지 않을까?



고개를 들고 보니, 허리 숙인 나무들에 닿은 햇빛이 세 개의 고인돌을 사선으로 비추고 있었다.

세 고인돌의 그림자가 나란히 같은 방향으로 드리워지면서 하나의 그림자로 합쳐졌다.

그림자가 된 고인돌들은 원래보다 몸피가 몇 배로 커졌다.

세계 최대의 고인돌이라 해도 무색하지 않게….


_257p


첫번째 고인돌은 김순효씨가 경주의 친어머니를 위해 만든 무덤이다.

두번째 고인돌은 경주가 김순효씨를 위해 만든 무덤이고,

마지막으로 세번째 고인돌은 그 옆에 경주가 만든 작은 고인돌이다.

그것은 누구를 위한 고인돌이었을까?

독자들의 많은 해석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어머니들과 하나의 땅 위에 영원히 함께 놓여 있고 싶은 경주의 마음이,

자신의 고인돌을 옆에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생각해보고 싶다.


더 이상 시간을 함께 할 수 없는 영원한 이별은 인간들로 하여금 무덤을 만들게 하고,

이 땅에는 살아있는 사람만큼 죽은 자의 무덤이 존재한다.

고인돌 또한 수천년 전에도 이러했을 인간들의 마음을 담은 역사일 것이다.



나를 옭아맸다고 생각했던 이야기가 내가 해야 하는 이야기임을 깨달아서다.

그 이야기를 해야 하는 사람이 나이기에 그 이야기가 끈질기게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는 걸 알아서다.

엄마는 나보다 그걸 먼저 알았다.

고창에서 카메라에 대고 이야기할 때 엄마는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 자신에게 이야기했다.

당신 입으로 한 번도 말해본 적 없기에 아직 당신의 이야기가 되지 못한 이야기를 했다.

...

엄마는 그래서 내게 그리 말한 것이다.

내 이야기를 스스로 들으라고….

내가 자신에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그것이 비로소 진짜 내 이야기가 된다는 걸 엄마는 알았다.


-262p


"내가 나에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그것이 비로소 진짜 나의 이야기가 된다"



어쩌면 이 소설의 모든 여정이 바로 '이야기'를 찾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우리의 이야기를 찾는 것.

나는 알 수 없지만, 타인은 알고 있는 진실과

나는 알지만 타인은 모르고 있는 진실을

우리는 언젠가 서로에게 건네야만 할 때가 있다.

그것이 사실 유쾌한 일만은 아니다.

진실에 다가서는 일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하고, 진실을 품는 일조차도 엄청난 포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온전히 품을 줄 아는 사람의 위대함을 보여주었다.

사랑보다 더 큰 '포용'의 힘을 "김순효" 라는 인물을 통해 일깨워주었다.

어머니의 유산은 땅도, 사랑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진실과 역사를 품어 온 바로 그 '포용'에 있다.

그것은 경주의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속 자신의 뿌리를 찾게 해주었고,

다시 나로부터 시작될 '무엇'에 다가갈 수 있는 용기를 선물해주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이방인이 된다.

나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들이 기원한 곳과는 독립되어,

나의 정신과 영혼은 온전히 나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여정은, 내가 탄생한 시작점으로부터 출발하는 것과는 또 다른 것이 된다.

이것이 바로 나만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여정의 시작이다.

나를 구성하는 것들의 이야기를 언젠가 내 자신에게 꺼내고, 세상에 꺼내게 되는 순간

나는 비로소 '나'라는 사람이 되는 것 아닐까?


소설의 끝에서 나도, '나의 이야기'를 찾아 나서는 여행을 시작해보려고 한다.

한 사람이 전해준 이야기는 이렇게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어서 시작하라고.' 

저마다의 이야기를 찾는 여정을 응원하며, 발걸음을 내딛어 본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5-03-17 1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17 2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17 2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17 2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넬로페 2025-03-17 2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로 소설 한 편을 읽었어요.
경주는 자신이 형제들과 엄마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기에 뿌리가 궁금해졌을 것 같아요. 보통은 그냥 기억이 시작되는 곳에서 생을 시작하잖아요.
소설을 통해 아무 관심 없던 나에 대해 내가 좀 들여다 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봐요.

전야제 님, 오랜만에 서재에 오셨네요
건강하게 잘 지내시지요?

전야제 2025-03-17 22:32   좋아요 1 | URL
네! 너무 오랜만이죠?ㅎㅎ
바쁘다는 핑계로 내일은 들어가야지, 들어가서 글도 읽고 글도 쓰고 해야지, 이렇게 미루다가
오늘 용기내서 들어왔습니다.
페넬로페님도 그렇구, 서재 운영자분들 대단하세요!
모두 바쁘실텐데, 시간내서 책도 읽고 글도 꾸준히 쓰시고, 저도 반성합니다ㅎㅎ
이제 자주 들어올게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저는 아까 저녁부터 페넬로페님 서재부터 해서 그동안 못 읽은 리뷰들 쭉 읽고 있는 중이에요!
창덕궁 리뷰 읽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조각케익 사진보다가 배고파지고 또 간식 잠깐 먹고 그랬답니다ㅎㅎ
참 사건도 많고 혼란한 시기이지만, 일상을 지키는 힘이 그 어느때보다 필요한 때인 것 같아요.
이럴 때 책을 읽을 수 있어 다행이고, 무엇보다 서재라는 공간에서 이렇게 글을 읽고 이야기 나누는 게 넘 소중하다는 것을 또 깨닫습니다.
공부할 것이 많아 조바심도 나지만, 간간히 읽고 싶었던 소설, 문학 읽으면서 힘을 얻는 것 같아요.
페넬로페님도 건강히, 또 행복한 일상 되셨으면 바래요!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5-03-17 23: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나와 우리의 이야기를 찾는것,
진실에 다가서는 일!
용기가 필요하죠.
어떤 면에서는 내가 나 자신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납득시키는 일이 제일 어렵다는 생각이 드네요

전야제 2025-03-18 00:11   좋아요 3 | URL
네 역시 정곡을 찌르시네요!ㅎㅎ
맞아요. 내 안의 이야기를 나 자신한테 하는 일, 이것이 이 소설 속 인물들이 궁극적으로 나아가는 방향인 것 같아요.
나라는 사람을 객관화시키는 건, 인간이 닿을 수 있는 성숙함의 가장 높은 단계인데,
이 소설이 보여주는 문학적 성숙함이 좋았어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서로의 이야기를 온전히 품어줄 만큼 관용적이지 못한데,
역시 문학에서는 그런 것이 가능해지는 걸 보여줄 수 있구나. 하는 마음에 리뷰를 썼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사랑이 사랑일 수 있도록 - 사랑에 관한 뜨거운 탐구로 전하는 차가운 위로
조중걸 지음 / 지혜정원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창 밖을 내다보라. 수없이 많은 영혼이 질주한다.

누군가 당신의 인연이 될 수 있었고,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누가 누구에게 특별한가?

모든 것이 전체를 이룬다. 이것이 먼저이다.

그리고 어떤 인연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 인연은 전체에서 돌출한 것이 아니다.

그 인연은 바로 나 자신의 '나'와의 인연이다.

거기에 타자는 없다. 모든 것이 나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나의 거미줄에 걸쳐진다면

나는 그가 누구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보살필 것이다.

그이기 때문이 아니다. '나'이기 때문이고, '세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랑의 배타성이 사라진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을 위한 사랑'이다.


_ 제 3장 <사랑의 가능성> 중에서 '사랑을 위한 사랑'의 일부.





#내가 '나'이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에요.



나의 사랑을 먼저 고백하겠다.

몇 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좋아하는 마음을 지금도 품고 있으니, 진행 중인 사랑이기도 하다.

우연히 만난 사람을 평생 마음에 품을지도 모르는, 이 말도 안되는 경우가 세상엔 있다는 걸 글로써 수줍게 고백한다.

첫 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는가? 나의 경우에는 아니었다.

사람에 대해 알아가는 무수한 시간과 경험 후에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누군가를 내 안에 받아들이는 일은 그렇게 많은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역시 머리 속에서만 존재하는 수많은 방법론과 이론은 허망한 것임을.

이 책에서 말하듯, 전통 철학에서 플라톤이 확립한 '지성'은 사랑을 포착할 수 있는 도구가 절대 아님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세계가 나에게 주는 우연의 시간은, 우연의 그 사람을 내 눈 앞에 슬며시 내려 놓았고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첫 눈에 반했고,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그의 눈을 바라본 것도, 그가 나를 바라본 것도

우리의 눈이 마주치게 된 것은 계획된 것이 아닌, 우연이었으니.

그가 저만치에서 한 발을 다른 한 발 앞에 두며 나를 응시하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옆으로 돌려 눈을 피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깐 사랑은, 비실증적인 그것은 그 때 처음으로 탄생한 것이다.

그 사람에게는 아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그 때 이후로 몇 년 동안 내 마음 속에 품은 사랑은 변하지 않고 계속 자리하고 있다.

어째서 나는 당신이 좋은 걸까?

내가 무언가를 한번 좋아하면 영원히 좋아하는 성격이라서?

그런 줄만 알았다.

하지만 조중걸 작가님의 책 <사랑이 사랑일 수 있도록>을 읽고 나서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나'이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는 것.

당신이 어떠한 성질의 사람이라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운명이라서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에는 어떠한 이유도 필요하지 않다.

사랑에 끝없이 의미 부여를 하면서 우리의 사랑이 '운명'임을 강조하는 많은 연인들이 있지만,

조중걸 작가님이 이 책에서 짚어주신 것처럼, 사랑에는 어떠한 의미도 부여하지 않아야 한다.

그건 오히려 사랑을 퇴색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걸.



그러나 사랑은 하나의 의미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에게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이 의미라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어떤 의미이다.

따라서 이 사람들은 공허 위에 무엇인가를 쌓았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기만이 사랑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불러들인다.

그리고 다시 그 위에 배타적 이기심과 감상을 쌓아올린다.

어떤 것이 '의미'를 입으면 그것은 세계에 돌출된다.

'의미'는 잔인하다.

종교는 '신'의 의미를 앞세워 많은 잔인한 일들을 저질렀고,

히틀러는 '민족'이라는 의미로 대량 학살을 저질렀고,

'가족'이라는 의미는 삶을 냉혹하고 이기적인 전쟁터로 만들었다.


어디에도 의미가 부여될 수 없는 것처럼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의미가 아니다. 실재가 아닌 것이 어떻게 존재를 얻을 수 있겠는가?

예수가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 할 때 거기 어디에 사랑의 의미가 있는가?

예수의 사랑은 스스로를 포함한 무수한 만물이 세계이고,

그것에 대한 인식이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_232,233p


내가 '나'이게 하는 나의 무한한 성질들 중에서 단 하나라도 다른 성질로 바뀐다면,

아마도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유난히도 부서지기 쉽고 상처받기 쉬운 성질의 것들을 좋아한 탓에, 당신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당신이 유약하고 섬세하기 때문에 내가 당신을 좋아한 것이 아니다.

내가 유난히도 외톨이같이 혼자만의 싸움을 하는 풍경을 좋아한 탓에, 당신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당신이 홀로 수심 가득한 얼굴로 고뇌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신을 좋아한 것이 아니다.

내가, 이런 '나'이기 때문에 나의 세계가 당신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나의 세계와 마음에 당신을 품게 된 것이다.

내 사랑에는 이토록 당신과는 독립된 세계가 있고, 당신에게는 당신만이 존재하는 세계가 있다.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당신과는 독립된 그 무엇이라는 걸.

모든 것이 '나'이기 때문이라는 조중걸 작가님의 말씀이 정말 맞았다.


절망적이게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환희에 차오르는 느낌만 선물하지는 않는다.

그 이후에 나는 그 사람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품었다는 이유만으로, 만날 때마다 고통스러웠다.

혼자만의 마음을 간직해야만 하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것인지 그 때 처음으로 알았다.

왜 그에게 고백하지 않느냐고?

왜 그 사람과 사귀지 않느냐고?

그 이유를 말하기 위해선 먼저 이 책의 '사랑'에 대한 논리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이제부터 바보같은 나의 사랑의 방식을 말해본다.

바보같다고 하겠지만, 사랑이라는 초월적인 존재를 품고 내 안에서 지키는 것이 나의 사랑이다.

조중걸 작가님은 그 '사랑'을 실증적이지 않은 것으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랑이라고 말하는 연애(애정),섹스,혈연,결혼 등을 실증적인 것으로 먼저 분리를 하기 위해 철학의 도구를 사용하여 논리를 펼쳐 나간다.

이것은 진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위한 자리를 남겨 놓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의 이론을 수도 없이 인용했고, 그것은 정말 탁월했다.

사랑이 침묵 속에 지나쳐야 할 것이라고, 말해져서는 안 될 것이라고 작가님께서 주장하시는 데에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다.

독자들 중에선 이것을 많이 오해하여 '사랑에 대해선 아무 얘기도 하지 말고 입을 다물라' 라고 받아들일 수 있겠으나,



따라서 사랑은 희구와 열망이지, 손에 쥐어지는 어떤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아를 세계 속에서 소멸시키는 것을 전제한다.

무엇인가와 하나가 되려는 열망으로.

소멸은 수양이고 열망은 사랑에의 충동이다.

이 둘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이 아슬아슬하게 사랑의 희끄무레한 가능성을 제시할 뿐이다.


_239,240p

 

이 구절에서처럼, 우리가 사랑이라고 오해하는 것들을 하나씩 베어나감으로써 '사랑을 위한 사랑'에 도달할 가능성을 제시하기 위함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타인이 느끼지도 못하고, 증명할 수 없는 것이니 '비실증적'인 것이다.

사랑이 아니라면 설명될 수 없는 그것은 실증적인 것이 아님을 작가님은 누누히 강조하고 있다.

오히려 작가님은 사랑을 굉장히 특별하고 고귀한 그 무엇으로 여기고 있다.

사랑에서 의미, 감성, 감상, 실증적인 것들을 모두 베어냈을 때 남아있는 그 '무엇'에 독자들이 도달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건 사랑을 품어본 적 있는 누구에게든 존재하는 '그것'일테니.


여기에서 나의 사랑의 방식도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님을 말할 수 있다.

태초에 누군가에 대한 강렬한 이끌림과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 사랑이라는 초월적인 존재가 탄생했다고 하자.

비실증적인 그 '사랑'이 실증적인 연애,애정,섹스,결혼,출산,혈연 등으로 이어지는 것이 흔히 우리가 사랑이라고 잘못 부르는 것들이다.

실증적이지 않은 것과 실증적인 것은 독립되어 있다.

즉, 사랑한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연애나 섹스, 결혼 등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사랑은 실증적이지 않다.

아무리 이것을 원인으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른다고 하더라도,

사랑은 이것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강렬한 그 마음, 사랑이 반드시 실증적인 것들로 이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영역에 존재하는 사랑이 보이는 것으로 그 정체를 드러나게 되는 것이 애정을 기반으로 한 '연애'라는 것이라면,

이것은 단지, 사랑을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 만들려는 욕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욕심을 부정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단지 초월적인 사랑이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곳에 가두어져 있다가, 인간 세계에 실존하는 것으로 꺼내어지는 순간 벌어지는 일들에 대하여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사랑 때문에 힘들다고 말할 땐 바로 그 비실증적인 사랑이 실증적인 것들로 이어지는 단계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헌신, 자기 희생, 친근감, 그리움, 애정, 질투, 실망, 분노 등등.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사랑의 결과나 요소이거나 사실은 사랑과는 전혀 관련 없는 것들이지,

사랑 자체는 아니다.

이것들을 다 합쳐도 사랑이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느낌으로 이미 안다. 사랑은 이것들을 넘어서는 특별한 것을 의미한다고.


_43p


왜 사랑이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 드러나야 하는 걸까?

그것은 초월적인 존재이기에 아무도 만질 수 없는 곳에 자리 잡은 것인데,

우리들은 사랑한다는 이유로 이것을 현실 세계에 가시적으로 드러나게 만든다.

판도라의 상자 안에 고이 잘 간직되어 있는 사랑을, 기어이 열어서 밖으로 꺼내고야 마는 걸까?

이것이 연애나 결혼이 가진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 태초에 품었던 열렬한 사랑의 마음은 지금도 당신들에게 남아있는가?

아니, 그것을 지키려 애쓰고 있는가?

그것은 연애와 결혼 생활 속 그 어떤 행위들과도 독립된 것이다.

사랑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서 연역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은 연애와 결혼 생활 속에서 현존하는 것들로 사랑을 채워나간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형태를 갖지 않은 사랑을, 현실 속에서 저마다의 형태로 존재하게 만들었으면서.

그 선택에 대한 고통으로 아파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괴로울 때가 있다.

나는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용기내서 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사랑의 마음을 그저 품고만 있는 나 자신이 때로는 겁쟁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적어도 불확실한 성질의 그 사랑을 굳건하게 품고 있다는 점에서는 겁쟁이가 아니다.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사랑은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무언가라고 했다.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어떠한 것은 비록 그 형태가 눈에 보이지 않을지언정,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하여 너무 불안해한다.

그 불확실성을 참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어째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 자체만으로는 완벽한 것으로 인정받지 못할까?

이것이 실제적인 행위들로 서로 간에 오고 가야, 그제서야 사랑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것일까?

나는 그런 점에서 회의적이다.



'운명적 만남'은 없다. 세계는 우연이고 만남도 우연이다.

그저 숙명으로 말해지는 우연이 있을 뿐이다.

왜 '운명'이라는 것을 강조할까? 왜 '필연'이라는 것을 강조할까?

인간은 왜 모든 것이 우연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까?


인간은 자신의 전락에 대한 피난처를 예비하고자 한다.

운명은 모든 전락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은신처이다.

그와 나의 결합은 운명이다. 그리고 필연이다.

운명은 그와 나의 가치와 행위를 넘어서 있다.

따라서 어떤 조건에서도 우리의 만남은 그 자체로 영속된다.

운명을 고집하는 것은 전락할 권리를 획득하려는 것이다.

운명은 여자들 사이에서의 그녀와 남자들 사이에서의 그의 배타적 결합을 가능하게 했다.

따라서 계속되는 개인적 전락에도 불구하고 둘의 결합은 영원하다.


_226,227p


'운명'에 대해 이토록 명석하게 분석한 사람이 또 있을까?

심리학에서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어째서 운명을 끌어들여 마음의 안정을 찾는가'에 대한 이론이 있을 것 같다.

현실 세계를 이루는 모든 것인 '우연'은 인간에게 매우 불확실한 느낌을 선사한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한다.

확실한 그 무엇으로 치환하기 위한 행동들이 우리가 매일 하는 선택들이다.

그래서 행동은 비합리적인 성질을 자주 띠게 된다.

모든 것이 '불확실성' 때문이다.

조중걸 작가님은 이것을 '자신의 전락에 대한 피난처를 예비하고자' 한다고 표현했다.

매우 정확하다. 우리의 실패와 추락, 그 모든 전락의 가능성에 대비하여 운명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모든 비극이 '운명' 때문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럭저럭 받아들일 수 있게 되니깐.


연인들은 잘 알고 있다. 사랑은 비실증적이고 불확실한 것이라고.

그래서 서로의 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그들이 끌어들이는 이론이 바로 '운명'인 것이다.

우리의 사랑이 변할 수도 있다는 걸 마음 속으로는 잘 알기 때문에,

그것에 대비하고자 사랑을 '운명'으로 치환한다.

그럼, 그 어떤 변화에도 서로의 사랑은 영원하게 될테니깐.

이것이 연애 관계에서 오는 불행 중 한 모습이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

어떠한 방법과 수단을 사용한대도, 불확실한 것이 확실한 것으로 변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변화할 것은 변화하기 마련이다.

여기에서 인과관계를 주장하는 것은 미련이고, 억지를 부리는 것.

아무리 처절하게 상대의 마음을 부여잡는대도, 이미 변한 마음은 예전 그 마음이 아니다.



모든 것이 필연이라면 우리는 거기에 실려 가면 된다.

우리는 얼마든지 안일할 수 있으며 얼마든지 방탕하고 전락할 수 있다.

삶이 어떻다 해도 운명에 따를 뿐이니깐.

그러나 모든 것이 우연이라면 우리에겐 최선이 남는다.

지금 이 순간도 우연이고 내일도 우연일 것이다.

우리를 벗어난 어떤 것도 삶의 안정성과 예측 가능함을 보증해주지 않는다.

우연에 처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순간을 사는 것이다.


_227,228p


자,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이 '우연'인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지에 대해 조금은 희망을 찾아볼 수 있다.

불확실함에 대해 불안을 느끼는 것을 어찌 해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선, 모든 것을 운명으로 엮으려는 생각을 베어내야 한다.

운명 탓하면서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데에서, 우린 비합리적인 행동들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우연'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린 '최선'을 다해볼 수 있는 근거가 생기게 된다.

운명이 모든 질서를 정하려는 성질의 것이라면, 우연은 우리가 조금이라도 바꿔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운명은 인간의 의지를 밀어내지만, 우연은 그 의지를 필요로 한다.

설령, 우리의 용기있는 행동이 만족할만한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게 되더라도 우리는 각자의 '최선'을 다했음에 행복하다.


사랑은 바로 '우연'의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최선을 다해볼 수 있는 여지가 있게 된다.

우연은 불확실성이기 때문에 우리의 최선이 예상하는 결과에서 빗겨간대도, 

순간을 살았던 우리들은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우연 앞에서 최선을 다했던 날들이 먼 훗날 우리가 간직하는 추억이듯이.


 

세계는 단일하다. 그리고 이 단일자는 거미줄을 가진다.

수없이 복잡하게 얽힌 거미줄. 우리는 그 거미줄 어딘가에 걸쳐 있다.

나의 연인, 나의 아내, 나의 아이 등은 이 수많은 거미줄에 같이 걸쳐졌다.

그것이 나의 선택이거나 결단이라고 믿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다.

선택은 없다. 수없이 많은 우연 가운데 그 우연이 있게 되었다.

우리는 다른 우연 속에서 서로가 맺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이러한 인연에 매이고 말았다.

그만큼은 행복과 슬픔, 환희와 만남이 공존하게 된다.

어쩌겠는가? 어떤 우연이 우리를 그렇게 엮고 말았는데.

그 관계에서 최선을 다할 일만 남는다. 

말한 것처럼 선택 자체가 우연이었다.

이것은 선택에 대한 책임에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우연에 대해 우연 자체를 살자는 얘기이다.

이것이 사랑을 위한 사랑이다.

그가 필연적으로 나의 남편일 이유도, 아이가 나의 아이일 이유도 없다.

모든 것이 우연이다.

그렇게 우연히 우리는 해체될 것이다.

따라서 이 관계는 배타적일 수가 없다.

어디에도 운명이나 필연은 없기 때문이다.


_249p


작가님이 '선택'이 아니라 '우연'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다.

만약 그 사람과 결혼한 것을 나의 '선택'이라고 한다면, 나는 이 선택 앞에서 우월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끝없이 그 선택을 평가하며, 후회하며, 상대를 부정하며,

나와 그 사람의 세계까지 무너뜨릴 수 있는 '우월한 존재'로 군림하게 된다.

그러나 선택이 아니라 '우연'이라고 한다면

나와 함께 하는 그 사람과 나의 아이는, 그저 같은 거미줄에 걸려 있는 사람들일 뿐이다.

우연으로 묶인 존재들에게 '위계'란 없게 된다.

어떤 누가 더 위에 있지도 않고, 우월하지도 않으며, 모두가 '동등'하게 얽혀있는 존재들이다.

우연으로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가 그 관계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남아있게 된다.

작가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것은 책임이 아니라 '우연 자체를 사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현실 속에서 기어이 사랑을 실증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 사람들에게 있어 최상의 처방전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을 앞서 말했듯 판도라 상자를 열어버린 '대가'로 대할지,

아니면 내게 주어진 '우연'에 대한 감사와 행복의 마음으로 대할지는 여러분들의 몫이다.

'나는 나의 세계이다' 라고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이, 그는 '그의 세계'이다.

우린 애초에 독립한 존재들이다.

우리가 가진 사랑의 마음도 서로에게서 독립되어 있다.

그것은 처음 탄생할 때 초월적인 존재로서, 현실 세계가 아닌 '초월적인 곳'에 자리 잡게 된다.

그것이 현실 속에서 형태를 가지고 실존하는 것으로 만드는 게 연애, 섹스, 결혼 등이라면,

우린 판도라의 상자를 열은 대가를 치르는 것도, 그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도 모두 감당해야만 할 일이다.

이것을 알고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나의 세계뿐만 아니라, 상대의 세계도 파멸시킬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사랑이 파멸적인 것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부디 사랑이 사랑일 수 있도록.

조중걸 작가님의 책은 '사랑이 오로지 사랑일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적은 따뜻한 처방전이다.



우리는 자신을 묘사할 수 없다.

묘사는 대상 밖에서 안을 바라볼 때에만 가능하다.

우리에게 하나의 그림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그림의 대상 밖에서 그것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_206p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을 그저 마음 속에서만 품고 있는 것이 나의 사랑이라고 해도,

그것이 숭고하다거나 고결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랑에도 그것만의 배타적인 숭고함과 고결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 사랑의 방식이 유난히 더 특별하지도 않고, 고귀하지도 않다.

그저 '나'이기 때문에 나는 이런 사랑을 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 그대로 두려는 것. 이것도 사랑의 하나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그저 사랑이 연애나 결혼으로 이어진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의 완성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결합한다고 해서, 함께 삶을 살아간다고 해서,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기꺼이 바라보고,

그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는,

그런 내가 세상에 존재함을 삶의 순간마다 새기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세계 속에서 시작하고 완결되는, 나만의 사랑의 방식이다.

짝사랑과 비슷하겠다.

상대에게 전해지지 않으니.

혼자만의 마음으로 영원히 간직하는 것은 무한한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쾌락과 행복을 주기도 한다.

고통에서 오는 쾌락이 아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에서 오는 초월적인 에너지를 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그것 외에 더 무엇을 바라거나 욕심내지 않을 뿐이다.

내 안의 사랑을 반드시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 만들려고 하지 않는 것이 내 사랑의 본모습이다.

나는 그런 욕망을 감당하기엔 너무 유약한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사람이라, 심장 터질 듯 들뜨는 사랑의 마음도 겨우 품을 만큼인데

이런 내가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을까?



왜 자신과의 승부를 걸지 않는 것일까?

모든 결의와 성취는 스스로에게 수렴된다.


제 1장 '사랑은 무엇인가?'에서 <허영>의 일부.


조중걸 작가님께서 이 책에서 말씀하신 사랑의 본질에 도달하다보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이것은 예전부터 계속, 이상하게 내 머릿 속에서 자주 그려지는 풍경이기도 했다.


'하얀 민들레 홀씨가 바람에 날아가는 것.

그리고 어딘가에 내려앉아, 땅에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세워 노란 꽃을 피워내는 것.'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자주 이런 풍경을 그려보고는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드디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민들레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홀씨들을 만들어 낸다.

바람이 그것을 대기 중에 날려보낸다.

어느 홀씨가 어디에 뿌리를 내릴지는 수학적으로 계산될 수 없다.

'우연'인 것이다.

홀씨와 땅이 맺는 관계는 정말 우연인 것이다.

그 땅이 방사능 물질 가득한 땅일 수도 있고, 쓰레기장에서 흘러나온 악취 가득한 땅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홀씨는 어디에든 뿌리내려 노란 꽃을 피운다.

이것을 민들레의 생명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이것에서 사랑의 참모습을 본다.

연약한 홀씨에게 주어진 '우연'의 요소들 앞에서, 홀씨는 우연 그 자체로 살아간다.

거기에 어떤 감정이 있고 어떤 비극이 있겠는가?

바람이 홀씨를 날아가게 만든다고 해서,

땅이 비옥하지 않다고 해서,

대기의 자연현상이 그를 떨게 만든다고 해서,

민들레 홀씨에게 있어서 그 모든 것은 우월한 존재가 아니다.

홀씨는 홀씨의 세계이고, 홀씨가 민들레로 성장하는 데에는 세상의 많은 요소들과 관계하지만

결국 홀씨가 노란 꽃을 피워내는 데에는 홀씨 자신의 '사랑'이 존재한다.

홀씨는 어떤 우연들과 엮이게 되더라도, 민들레가 되었을 것이다.


그에게서, '자신 안에서 완결되는 사랑'을 기쁘게 느껴본다.

이 사랑이 내가 추구하는 사랑임을.









*조중걸 작가님께서 '조지수'라는 필명으로 쓰신 소설책 <나스타샤>와 <마지막 외출>에는

사랑에 관한 통찰들이 문학적으로, 철학적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두고두고 읽는 재미가 있다.

가끔 책을 읽다 보면, 몇 년에 걸쳐 공들여 읽어야 하는 책과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을 느끼게 된다는 것은, 단지 자신의 것만을 책에 담은 게 아니라

우리들의 거대한 인생을 담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연과 운명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이 인간일테다.

그 변화무쌍한 발자취를 포착한다는 것은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작업일 것이다.

명작은 인간의 형체가 아니라, 그 뒤에 가려진 영혼의 발자취들을 끝없이 포착해내는 과정을 담고 있다.

끝을 알 수 없는 인생이 더 이상 두렵지 않고, 기대가 되게 만드는 책을 만나면 행복해진다.

기꺼이 끝을 향해 나아가는 인생의 여정이 아름답게 보일 때.

작가님의 글은, 책 한 권으로 인생을 가진 기분을 들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5-01-29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1-29 2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1-30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1-30 14: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1-30 1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와같다면 2025-01-30 1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가 유난히도 부서지기 쉽고 상처받기 쉬운 성질의 것들을 좋아한 탓에, 당신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내가 유난히도 외톨이같이 혼자만의 싸움을 하는 풍경을 좋아한 탓에, 당신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내가 했던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전야제 2025-01-30 14:55   좋아요 1 | URL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서 나 자신을 보고, 알게 되는 것 같아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가게 되더라구요. 신기하게도.

댓글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5-02-12 14: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
알려고 들수록 어럽고,,, 끌림이라는 것 이유를 규정하기 힘드는 듯요.
그런데, 막상 사랑에 빠지면, 쉽게 빠지죠. ㅎㅎ

전야제 2025-02-12 20:37   좋아요 1 | URL
ㅎㅎㅎ 맞아요.
아직 제대로 된 연애도 해본 적 없어서, 사랑은 제 인생에 있어 어쩌면 가장 큰 숙제인 것 같네요.
하지만 언젠가 사귀고 싶은 사람이 눈 앞에 나타난다면, 용기내서 잘 해보고 싶어서 요런 책도 읽어보았답니다ㅎㅎ
요즘 너무 춥죠ㅠㅠ
얼른 봄이 왔으면 좋겠네요! 남은 겨울 따뜻하게 보내세요^^
 


생명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우울'이라는 것도 같이 태어나는 게 아닐까 싶다.

내 등에 찰떡같이 달라붙어 심장을 관통하고, 마음을 어지럽히고, 머리 속까지 파고들어 결국은 이성까지도 마비시키는.

이 무시무시한 괴물은 언제나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리곤 한다.

우울은 자신과 세상 사이에 벽을 쌓으라고 지시하기도 하며, 누구와도 마음을 나누지 못하도록 가두기도 한다.

방에서 한 발자국 나가는 일도 어렵게 만들며, 그렇게 하고 싶었던 일조차도 포기해버리게 만든다.

사랑도, 희망도 우울 앞에서는 그다지 빛나는 존재가 아니다.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도 우울 속에서 나를 꺼내주지는 않는다. 

어느 영화 속 주인공이 말했던, 나를 환희에 차오르게 만들었던 '희망'은

때로 내 열정에 환한 촛불을 켜주기도 했지만,

얼음같은 우울의 세계에 들어오는 순간 녹아서 없어져 버리는, 겨우 그 정도의 작은 촛불일지도 모른다.


이소무라 유키코의 연주곡 <風の住む街>을 들으면서 어떤 외로운 풍경이 생생히 그려졌다.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다는 것,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없다는 것.'

보이지 않는 바람이 거리를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바람이 느끼고 있을 공허함이 

있는 대로 모조리 나에게로 날아와 나를 한없이 공허하게 만들었다.

공허한 감정은 단지 감정이 아니라, 텅 빈 내 몸 그 자체이다.

육체는 살아있다는 이유로 잠시도 쉬지 않고, 혈액이 온 몸을 돌며 심장을 쿵쾅거리게 만들고

체온을 유지하며 끊임없이 영양분을 갈구하지만,

단 한순간이라도 그것들을 채워주지 않는다면 육체는 텅 빈, 바람 빠진 고무 풍선같은 존재일 뿐이다.


내가 지금 살아가는 곳, 지금 앉아있는 곳의 역사를 떠올린다.

100년 전에 이 곳에 앉았던 사람의 생활을, 고뇌를, 우울을 상상해본다.

산다는 것, 그것은 이미 죽어 없어진 오래 전 사람들의 것이기도 했다.

한 때 그들도 살아서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배를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동을 하고,

생을 끝내게 만들어버리는 병마에 맞서 싸우고,

각 시대에 투쟁해야만 했던 신념과 적과도 싸우고,

어쩔 수 없는 현실 앞에 무너지기도 하고,

타인의 죽음을 지켜보는 와중에 자신도 곧 떠날 채비를 하고.

그렇게 탄생과 소멸을 거치면서 역사는 계속 되어 왔다.


한 때 이 땅에 태어났었고, 잿빛 가루가 되어 다시 지구의 성분으로 돌아갔을 수많은 생명들.

그들의 우울과 나의 우울이 맞물리는 순간,

그것의 정체는 두려운 것에서 초라한 것으로 모습을 바꾼다.

나를 고통스럽게 짓눌렀던 거대한 우울이, 한없이 초라해져 발에 밟히는 어떤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되는 상상을 해본다.

생명과 우울의 거리를 그렇게 잔뜩 늘려보기도, 줄여보기도 하면서

생은 흘러간다.


우울은 역사 속 모든 사람들의 것이다.

누가 되었든 우리들은 생에 최초로 태어나고 최후로 살아가는, 세상 단 하나의 존재이기 때문에

'우울'은 필연적으로 우리와 함께 하는 운명인 것이다.

단지 세상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인간은 우울과 한 몸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깐 우울은 한 순간의 감정이 아니다.

언제든, 어떤 모습으로든 변신하며 나를 농락하는 존재, 그것이 '우울'이라고 하면 조금 와 닿을까?

그것은 그렇게 내 등 뒤에 딱 붙어 죽는 순간까지도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 것.

이쯤 되면 우울이란 것은 나를 미치도록 사랑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가는 내내 함께 하는 것이니 당연히 애증의 관계가 될 수 밖에.


그러나 우울은 마냥 우리를 무기력하게만 만들지는 않는다.

우울이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것은 우울이 보여주는 인격의 아주 다양한 형태 중 하나일 뿐이다.

우울은 우리를 환희에 차오르게 만들기도 한다.

'살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도 다름 아닌, '우울'이라는 녀석이 하는 일이다.

영화 <체리향기>에서 죽으려고 나무에 밧줄을 동여매다가, 부드러운 촉감의 체리를 손에 잡고 그 달콤한 맛으로 죽으려는 생각을 바꿨다는 '바게리'씨처럼.


우울은 한순간 변모하여 갑자기 체리가 되기도 한다.

붉고 탐스런 체리의 맛과 향기가 죽으려던 사람의 마음을 돌려놓기도 한다.

체리가 불러일으킨 생에 대한 의지가 어디 정체 모를 곳에서 온 것이 아니다.

살아야겠다는 마음 또한 내 마음에서, 그리고 그것을 조종하는 우울에서 오는 것이다.

우울은 죽음이 아니다. 그 둘을 같은 취급하면 우울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우울이 가진 수많은 인격을 느끼고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울이 우리를 잠식하는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녀석은 나를 열정에 불타오르는 존재로 만들기도 하고, 모든 것을 꼴보기 싫다는 마음으로 은둔하게 만들기도 한다.

자기 파괴의 행동을 하게 만들기도 하고, 세상 밖으로 나가 미친 사람처럼 춤추게 만들기도 한다.

우울은 그런 녀석이다. 나를 끝없이 농락하고야 마는.


그러나 우울 때문에 한없이 힘들고 괴로워 세상 모든 무게가 내 몸에서 느껴지고,

우주의 법칙인 중력마저 철저히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속수무책으로 그저 온 몸으로 고통을 느끼면서 버틸 뿐, 더 무슨 해결책이 없을 때이다.

그럴 때마저도 내 등 뒤의 우울은 갑자기 어디서 또 나를 희망에 차오르게 만드는 무엇을 끌어다 준다.

우울이 나의 귀를 열고, 청력을 높여 내가 들어야 할 또 하나의 아름다움을 향하게 만든다.


유튜브를 보다가 최근에 <한일 톱텐쇼>라는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노래를 부른 '나카시마 미카'의 영상이 눈 앞에 딱 등장했다.

무기력했던 마음이 갑자기 일어나는 기분에 나도 놀랐다.

그녀가 부른 노래는 <僕が死のうと思ったのは>, 한국어로 번역하면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

제목 그대로 우울의 극치이다.

어떤 사람은 이 노래가 '죽고 싶다'가 아니라, '살려 달라'라는 구호의 의미로 들렸다고도 한다.

그만큼 이 노래에는 '살고 싶다'는 뜻이 담겨있기도 하다.

너무 좋아했던 노래였지만, 잊고 있었던 노래.

이 노래가 울려 퍼질 때, 그 처절하고 아름다운 가사가 자막으로 등장할 때, 나는 무너졌다.

좋아서. 너무 아름다워서 주저 앉았다.


그렇다. 이제야 알았다.

아름다움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 안의 어둠도 함께 조명되고야 만다.

숙명이다. 어쩔 수 없는. 빛과 그림자는 뗄 수 없는 거니깐.

우리가 삶에서 너무 아름다운 것들을 보았기 때문에,

추악한 것들을 용서할 수 없는 마음.

내 안의 아름다움이 성장할수록, 내게서 그것과 반대되는 속성의 것들이 뿌리내리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우울은 우리로 하여금 아름다움도 보게 만들지만, 동시에 추악함도 보게 만든다.

한쪽만 담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삶에서 권태나 고뇌, 분노를 느낀다면 그것은 우울 때문이 아니다.

우울 탓으로 돌려 죽음으로 향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냥, 너무나도 아름답기 때문에.

우리는 슬프고 힘든 것이다.

내 우울이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두려운 것이 아니다.

내 우울은 나를 살리기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서 무한한 용기와 영감으로 꿈꾸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울은 끝나지도 않고, 끝나서도 안되는 나의 '또다른 나'인 것이다.

거리를 두고 좁혀가기도, 멀어지기도 하면서 친하게 지내야만 하는 것이다.


나카시마 미카가 분홍과 보라빛의 오묘한 조명 속에서 <僕が死のうと思ったのは>를 부를 때,

그녀가 두 팔을 벌려 마치 모든 사람들의 우울을 끌어안는 듯,

자신의 우울을 환영하는 듯,

그녀가 보여주는 거대한 포용에 넋을 잃었다.

그녀의 열정 가득했던 음악 인생에도 절벽같은 시련이 있었다.

노래를 제대로 할 수 없는 병 앞에서도 피하지 않고 무대에서 노래하고자 했던 그녀의 의지는,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보듬어 줄 수 있는 노래를 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것이 나에게 날아와, 나를 또 날아오르게 만든다.

나의 우울이 나의 귀와 마음을 또 다시 연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은 항상 똑같은 모습으로 자리에 가만히 있는데, 달라지는 건 언제나 나이다.


노래 가사 중에 나카시마 미카 본인도 울컥했다고 한 부분이 있다.

나 역시 이 가사에서 마음이 아팠다.


ぬことばかりえてしまうのは

죽는 것만 생각해 버리는 것은

きっときる真面目すぎるから


분명 삶에 너무 진심이기 때문이야



진심을 다해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실패나 거절은 사람을 더욱 슬프게 만든다.


삶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죽고 싶다는 마음.


무엇 때문에 삶이 힘들든


나카시마 미카에게도, 나에게도, 또 우리에게도 이 마음은 숙명과도 같다.


힘든 이유는 달라도, 힘들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든 똑같이 주어진다.


그래서 음악으로 지친 마음을 달래고, 다시 환희에 차오르며 내일을 살아간다.







(YouTube 나카시마 미카 노래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j1_oSburh70&list=RDGMEMCMFH2exzjBeE_zAHHJOdxgVMj1_oSburh70&index=1





나카시마 미카 <僕が死のうと思ったのは,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




のうとったのはウミネコが桟橋いたから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 괭이갈매기가 부두에서 울었기 때문이야.



随意かんでえる過去ばんでんでいけ

물결에 밀려오는대로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과거도 쪼아먹고 날아가렴.



のうとったのは誕生日いたから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 생일에 살구꽃이 피었기 때문이야.


その木漏でうたたしたら死骸になれるかな

그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 아래에서 얕은 잠에 들면,


벌레의 시체와 함께 흙이 될 수 있을까?


薄荷飴,漁港灯台,びたアーチ,てた自転車

박하사탕항구의 등대, 녹슨 아치형 다리, 버려진 자전거


木造のストーブのまえでどこにも旅立てない

나무로 지어진 역의 난로 앞에서 어디로도 떠날 수 없는 마음


今日まるで昨日みたいだ明日えるなら今日えなきゃ

오늘은 마치 어제와 같아. 내일을 바꾸려면 오늘을 바꾸어야 해.


かってるかってるけれど

알고 있어, 알고 있어, 하지만


のうとったのはっぽになったから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 마음이 텅 비어 버렸기 때문이야.


たされないといているのはきっとたされたいとうから

채워지지 않는다며 울고 있는 것은 분명 채워지고 싶다고 바라기 때문이야.


のうとったのは靴紐けたから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 신발끈이 풀렸기 때문이야.


びなおすのは苦手なんだよとのがりもまた

매듭을 다시 바로 묶는 건 서툴단 말이야.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야.


のうとったのは少年つめていたから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 소년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야.


ベッドの土下座してるよあのにごめんなさいと

침대 위에 엎드려서 조아리고 있어. 그 날의 나에게 미안하다며.


パソコンの薄明かり,上階部屋生活音

컴퓨터의 희미한 빛, 윗 방의 사람 사는 소리들


インターフォンのチャイムの,かごの少年

인터폰의 차임벨 소리, 귀를 틀어 막는 새장 속의 소년


えないってる六畳一間のドンキホーテ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고 있는, 다다미 여섯 장 단칸방의 돈키호테


ゴールはどうせいものさ

Goal은 어차피 추할 뿐이야.


のうとったのはたいわれたから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 차가운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야.


されたいといているのはもりをってしまったから

사랑받고 싶다며 울고 있는 것은 사람의 따스함을 알아 버렸기 때문이야.


のうとったのはあなたが綺麗うから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 네가 아름답게 웃고 있어서야.


ぬことばかりえてしまうのは

죽는 것만 생각해 버리는 것은


きっときる真面目すぎるから


분명 삶에 너무 진심이기 때문이야.


のうとったのはまだあなたに出会ってなかったから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 아직 너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야.


あなたのようなまれた世界きになったよ

너 같은 사람이 태어난 세상을 조금은 좋아하게 됐어.


あなたのようなきてる世界期待するよ


너 같은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 조금은 기대해 볼게.







->영화 <체리향기>중에서.





조금만 있으면 봄이 된다는 사실이 당신을 기쁘게 할까?


나에게는 봄을 기다리는 이유가 딱 하나 있다.


언제나 이 이유는 변하지 않고 계속 되어 왔다.


마치 봄을 대하는 의식처럼, 내가 봄을 기다리는 단 하나의 이유.



레미오로멘(レミオロメン) 의 <3月 9日>



나는 3월 9일에 항상 이 노래를 듣는다.


이 노래가 나에게 상징하는 것을 흠뻑 느끼고, 봄을 느끼고, 생의 의미를 느끼는 것이


매년 내가 의식처럼 하는 일이다.


인생 전반에 걸쳐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추억 그 자체이다.


그것은 나만의 비밀이기도, 꿈이기도, 현실이기도 한.


나만이 알 수 있는 기쁨인 것이다.



瞳を閉じればあなたが


눈을 감으면 당신이



まぶたのうらにいることで


눈꺼풀 뒤에 있다는 것으로



どれほど強くなれたでしょう


얼마나 강해졌는지 몰라요.



あなたにとって私もそうでありたい


그대에게 있어서 나도 그런 존재이고 싶어요.


花さくを待つ喜びを
꽃이 피는 것을 기다리는 기쁨을


分かち合えるのであればそれは幸せ

서로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은 행복이겠죠.



다가오는 봄을 희망하며...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25-01-12 0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1-12 1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야제 2025-01-12 1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신의 우울이 당신을 비상하도록 만드는 순간을 기대하고 응원합니다.
힘든 시간 쌓아온 내공과 저력은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강한 것이며, 당신을 날아오르게 할 것을 믿으니깐요.
화이팅!

2025-01-12 17: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1-12 1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5-01-12 18: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사가 많은 생각을 하는 사람의 것이란 생각이 드네요.

전야제 2025-01-12 18:23   좋아요 1 | URL
맞아요! 이 곡의 작곡가가 Amazarashi(아마자라시)라는 일본 밴드의 보컬 분이신데, 음유시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가사가 문학적이에요. 진심을 쏟아내는 사람의 글은 언제나 아프고 아름다운 것 같아요. 댓글 감사합니다ㅎㅎ

2025-01-13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1-13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1-13 2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젤소민아 2025-01-29 0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뭔데 이리 가사가 좋은 걸까요...자꾸 듣게 돼요~~

전야제 2025-01-29 21:2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ㅎㅎ 밥 딜런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아요.
한 편의 시같은 노래가사도 넘 깊은 울림을 주네요^^
 


"이 책의 글들은 시도 아니고 수필도 아닌, 그냥 잡스러운 글들입니다.

평생 한번도 글짓기를 배워 본 적 없는 사진쟁이가 쓴 글이 오죽하겠습니까.


그래도, 사진을 찍으며 했었던 이런 생각 저런 생각들을 누구에겐가 한번쯤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이 책의 모든 사진들은 하나 빠짐없이 엄마가 무쇠솥에 장작불로 지어주시던 밥처럼

옛날 사진기에 필름 넣어 찍어낸 나의 피붙이들입니다."


_안승일 <우리 동네 꽃 동네>의 서문 중에서.




백두산에 올라 북녘 산하를 보며 '내가 지금까지 어디 있었나. 여기서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전율을 느꼈다던,

안승일 사진 작가.

그가 자신의 인생 전부를 바쳐 찍은 사진들과 날 것 그대로의 글을 읽으면서,

인간은 자연의 것이라는 사실을 온 몸으로 받아들인 그에게서 물아일체의 경지가 느껴졌다.

그는 인생의 대부분을 산과 들에서 살아 온 사람이다.

거칠고 서툴지만 바람처럼, 물처럼 살아왔다.

꽃 앞에 카메라를 떡 하니 세워 놓고 마치 자연 위에 인간이 있다는 듯 멋대로 셔터를 눌러 대는 사진가들과는 다른 사람이다.


그는 먼저 꽃에게 대화를 건넨다. "사진 한번 찍어도 될까요?"

꽃의 표정을 살피고, 그의 언어를 느낀다.

온 몸으로 꽃과 마음을 주고 받는다.

꽃이 허락할 때, 그제서야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누른다.

인간 생각의 잣대로 원하는 사진을 찍기 위해 자연을 유린하지 않는다.

사람이 원할 때가 아니라, '자연'이 원할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사진가이다.

그는 어젯밤 비바람 속에 지친 꽃들에겐 사진 찍자고 하지 않는다.

이토록 생명체 하나 하나를 사람 대하듯, 아니 그보다 더 귀중하고 섬세하게 대한다.


자연 속으로 들어가 자연의 세계를 이루는 것들과 온전히 '친구'가 되어 함께 살아갈 때,

비로소 자연의 사진을 찍는 사람.

진짜 자연의 사진을 찍는다는 건 바로 이런 태도가 먼저가 아닐까?

사진에 대한 그의 장인 정신은 바로 여기에서 예술이 된다.


안승일 사진가의 소중한 사진 인생이 담긴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인생도 돌아보았다.

한 해의 마지막에 서서, 지난 1년을 돌아보다가

하나의 인생 전체를 돌이켜본다.

'투쟁'

지난 날의 나는 무엇을 그토록 이기려 했는지, 나는 내게 주어진 것들에 대하여 끝없이 투쟁해온 것 같다.

잡초 하나조차도 생명을 이어갈 수 있도록 아늑하고 거룩한 대지를 만들어 모든 생명을 품어내는 것처럼,

자연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인데.

나는 포용에 거부하고, 혼자서 나의 길이라 믿는 것을 의심하며 확인해왔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의 성질이 아니다.

길은 알고 갈 때가 아니라, 걸어감으로써 생기는 것.

'산과의 투쟁에서 내가 이기려 함이 아니다.'

'바람과의 대결이 아니라, 대화하는 것'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자연과 삶과 운명에 맞서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하는 것.

앞으로 내가 살아가고 싶은 인생은 바로 이런 것임을 깨달았다.

격렬하게 흔들렸던 지난 날의 내가, 이제서야 인생과 대화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며 모든 것을 보고, 품고, 느끼고

그것에서 아름다움을 확인하고

내가 본 아름다움을 나의 일에 담아, 내 손으로 다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

'삶이 당신에게 레몬을 준다면, 그것으로 레모네이드를 만들어라'라는 말의 의미를

이제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다.

아마 내년의 나는 조금 더 달라져 있겠지.

하지만 삶에서 아름다움을 더 보고 느낄 것이라는 기대감에 온 몸이 떨리기도 한다.


내가 만나게 될 세상과, 어쩌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세상 속으로

용감하게 들어 가보자.

다가오는 2025년에는 이런 마음으로 새 출발을 해보자고,

나에게 말해본다.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위대한지,

그들의 삶에 경의를 표하러 가보자."



*이제부터는 안승일 사진 작가의 <우리 동네 꽃 동네> 속 사진과 글이 나옵니다.

절판된 책이라서 많은 분들께 닿질 못하는 아쉬운 마음에 여기에서라도 소개해봅니다.

자연과 친구가 되어 한 평생을 산과 꽃 사진으로 채워 온 안승일 사진작가의 순수한 마음을 느껴보세요^^




바람이 뭐라고 속삭이며 지나가는 줄 알아요?

당신이 예뻐 눈이 시리대요. 당신이 너무 예뻐 눈이 시리대요.


내가 먼저 수작을 걸었다.

"사진 한번 찍어도 될까요?"

그녀는 볼을 약간 붉힌 채 그대로 가만히 있다.

그래도 그녀의 눈빛은 내가 실없는 난봉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고 있는 듯 했다.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설치했다.

파인다 속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살짝 웃어주는 듯 하다. 가슴이 뛴다.

나도 그녀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낸다.

이 작은 꽃을 사진 찍으며 생각했다.

숲 속을 다닐 때 조심해야겠다.

잘못하면 그녀를 밟아버릴 수도 있을 테니까.







"선상님, 꽃 사진 어떻게 찍나요?"

"꽃을 찍으려구요? 그냥 꽃이 되세요."


들에서 그녀와 함께 피어나고 

그녀가 마시는 샘물을 함께 마시고

들에서 산에서 그녀와 함께 살아야지요.

그래서 당신도 들꽃일 때 사진도 되지요.

그냥 아무 생각없이 인화지에 꽃들을

복제해 놓으면, 옮겨다 놓으면

그녀는 금새 시들어버리고 말지요.


우선 그녀에게 물어보세요.

"당신 이름이 뭐지요?" 

"닻꽃."

그녀와 사랑에 빠져 마음이 통하면

이제는 카메라를 꺼내도 되겠지요.

그녀의 표정을 잘 살펴보세요.


살아있는 사진이 될 것입니다.

시들지 않는 싱싱한 사진이 될 것입니다.

향기 탐스러운 사진이 될 것입니다.






사진은 사진이니까. 사진은 진실하니까.

가장 가깝게 진실을 전할 수 있는 방법.


그런데 내 가슴 속 아주 깊은 데까지

넘실대는 이 꽃내음과 그들의 속삭임들은 

정겨운 그녀들의 노랫소리는 또

어떻게 사진에 담아낼 수가 있겠는가.

사진으로 어떻게 표현해낼 수 있겠는가.


신이 만들어낸 불가사의한 경지를

인간이 넘볼 수 없을 것 같으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

온몸으로 빗방울 머금은 달구지풀이 금빛 햇살을 향하여 두 팔 활짝 벌린 자태가 너무 아름답다.

바라보는 나조차도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기분이다.

꽃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는 사진작가의 마음이 돋보인다.)





"당신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나요?"


사진이 될 만한 꽃을 찾아 숲을 헤매다가

마음에 드는 꽃 한 송이라도 만나면 말을 건넨다.

"당신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나요?"

우리는 서로 외로움을 타기 때문이다.






인간이 도저히 살아낼 수 없다고 생각되는 그런 곳에서도 꽃들은 피어난다.


당신, 이 험한 겨울을,

그 지독한 날들을

그 깊은 산 속에서 어찌 살아내는가.

긴 겨울을 어찌 견디어 살아내고

그리도 고귀한 꽃을 피워내는가.


당신과 나 멀리 떨어져 있어

당신과 나 더욱 더 가까워진다.






바람은 함부로 부는 게 아니다.


고산화원을 저렇게 피워내는 것은

빛이고 바람인 것이다. 풍광으로 살아난다.


그런데 이 구절초들은 

며칠 밤낮을 위에서 아래로, 아래서 위로

미친 바람이 잠시도 쉬지 않고 흔들어대도

맨몸으로 받아내고 끄덕도 없는 것은

열매를 맺기 위한 간절한 소망인 것이다.

그렇게 열매를 맺으면 바람은 또 한번

구절초의 씨앗을 멀리 날려 보내줄 것이다.


그 바람은 함부로 부는 게 아니다.

꽃들을 위해서 바람은 그러는 것이다.






산을 사진찍는 일은 기다림이다.


산정은 혹독할 꺼라는

산 아래 사람들의 상상은 틀리다.

모든 게 풍요로운 눈 속은 그래서 따뜻하다.

욕심내지 않고 자제하며 사는 게 눈 속의 삶이다.


산을 사진찍는 일은 기다림이다.

꼭 무엇을 찍어야겠다는 급한 마음을 달래고

산과 함께 살며 산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조바심 치면서 기다릴 수는 없다.


가끔씩은 지독한 외로움에 서럽기도 하지만

나는 기다림의 시간을 즐기며 사는 또라이다.






새싹을 흙 위로 끌어 올려주는 봄날의 대지


연하디 연한 새싹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천하장사도 아닌데.

겨우내 눈에 짓눌리고 바람에 다져진

딱딱한 땅을 어떻게 뚫고 나올 수 있는가.


봄볕과 바람은 밤새워 봄서리를 만들고

그들 셋이 힘을 모으고 마음을 합해서

그 애어린 순이 다치지 않고 땅거죽을

뚫고 나오게 도와주는 것이다.

흙덩이의 무게를 이겨낼 수 있도록

손을 잡아 대지 위로 끌어올려 주는 거다.


한번쯤 봄날의 대지를 만져보라.

아주 잘 익은 카스테라나 솜사탕보다

더 부드럽고 따뜻할 것이다.

살짝 건드려도 부러질 꽃고비 새싹들.

그 가녀린 생명들은 그렇게 해서

봄을, 푸르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들 마음을 싹틔우고 살찌우는 것이다.






형광색 꽃무리 속에 취하면 영혼마저 빼앗기는 수가 있지요.


달빛이 파랗게 부서지는 밤에 한번쯤

들판으로 달맞이꽃을 맞으러 가 보세요.

그 눈부신 형광색 꽃무리 속에 취하면

영혼마저 빼앗기는 수가 있지요.


깊은 산 속보다 자동차길 옆 여기저기

가까운 들판에 많이 살고 있으니까

차 몰고 가다 한번쯤 관심 가져 보세요.


너무 성급하게 달리지 말고, 뛰지 말고

쫓겨다니듯 힘겹게 살지 말고, 화내지 말고

가끔씩은 무거운 짐 벗어 던져버리고,

조금만 나가면 달맞이꽃들이 기다릴테니.


달밤에 바람을 타고 춤추는 그 꽃들은

잠 못 들어 밤을 헤매는 날벌레들을 위해

세상사에 지친 당신을 달래주기 위해

온밤을 그렇게 춤을 추는 거지요.

온밤을 그렇게 피어서 기다리는 거지요.

밤마다 그렇게 기다리며 사는 거지요.







그리움, 돌아갈 곳이 있어 다시 힘을 내.


그보다 더 견디어내기 어려운 게 있다.

그리움이란 거 그거 참기 정말 어렵다.

보고싶은 마음 저 벌판 끝까지 꽉 차버린다.

그렇게 그리워하는 마음조차 없으면

나는 이 고된 일을 해낼 수 없을 것이다.

보고싶은 사람들과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

돌아갈 곳이 있음으로 나는 힘을 얻는다.

나는 사랑하는 그들을 위해 이 일을 한다.


나의 사진을 알고 기다려주는 그들을 위해.






백두산 고산화원에서 꽃들도 행복해서 기립박수, 기립박수!


일에 지쳐 곤하게 잠들어 있는 그 사람.

가만히 들여다 보아 주세요. 착한 그 사람.

당신 위해 얼마나 마음쓰고 있는가.

나의 그 못나고 급한 성질 죄다 받아 주고

제 모든 걸 내게 다 주고, 그래도 좋아, 그게 좋아

편한 얼굴로 잠든 그 사람, 이쁜 그 사람.


내일은 당신 끓인 우거지국이 제일 맛있다고

아주 맛나다고 진실을 진실로 말해주고

모든 시름 제쳐두고 백두산에 한번 와보세요.

환웅을 지아비로 맞은 곰네의 신비스러운

사랑 이야기를 엿보러 한번 와보세요.


그 사람 얼마나 좋아할까요.

행복한 두 사람 보면 꽃들도 좋아하겠지요.

화장하지 않은 당신의 깨끗한 민낯이

이슬묻은 꽃들보다 더 이쁘다고

저 많은 꽃들보다 훨씬 더 이쁘다고

아주 큰 소리로 말해도 꽃들은 질투 안하지요.

그리고 당신의 따뜻한 가슴으로 사랑스런 그 사람

꼬옥 안아주세요.

백두산 고산화원에서

꽃들도 행복해서 기립박수, 기립박수!







질 때를 알기에 피어 있을 때 더욱 고귀한 것


그 꽃들은 어느날 바람을 타고 한꺼번에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질 때가 아름답다.

누추한 꼴을 보이지 않고 갈 때를 잘 안다.

그래서 피어 있을 때 더욱 고귀하다.

바람에 꽃잎을 날려 보내며 서럽지 않다.

좀 있으면 씨마다 모두 모두 낙하산을 펴고

멀리 멀리 신나는 여행을 떠날 테니까.







내일은 비 오세요.


내일은 비 오세요. 하루종일 촉촉히 봄비 오세요.

내일은 사진 안 찍고 하루 종일 술이나 서너 근 마시게.

한 잔 하고 꽃 얘기 하고, 또 한 잔 하고 산 얘기 하고,

또 한 잔, 사진하는 얘기 하게. 하루 종일 비 오세요.






오늘 하늘은 어떤 빛깔을 하고 있을까?

또 무슨 꽃들이 나와 만나려 기다릴까?


밤중에도 잠 못 들어 자꾸만 밖에 나가

별을 찾아본다. 졸리운 줄도 모르고 좋아한다.

하루도 거를 수 없는 나의 일이요, 삶이다.






꽃의 속마음을 들여다보아요.


높고 큰 산을 대할 때의 감동도 크지만

마이크로렌즈로 꽃의 속마음을 들여다볼 때도

그 섬세한 자연의 숨결은 경이로울 것이다.

그 감동은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왜 사진 찍는지 너는 아니?"


어떤 카메라로 꽃을 찍으면 좋겠냐고

인생 상담처럼 물어오는 사람들이 많다.

약간의 유리와 쇠붙이로 구성된 기계.

카메라는 그냥 차가운 도구일 뿐이다.

그놈은 느낌도 없고 철학도 없다.

별 생각 없이 카메라의 성능에 의존해서

기술로만 찍는 사진은 생명 없는 사진이다.

사진, 어떻게 찍을 것인가? 그보다는


사진, 왜 찍는가? 그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며칠을 헤매더라도 당신 가슴을 쿵덕 쿵덕 뛰게 하는

행복한 꽃 한 송이를 만나라!


식물원의 꽃들은 벌써 야생화가 아니다.

인간에게 보호되면 야생은 사라지고 만다.

재배되고 있는 꽃은 꿈을 잃은 슬픔이다.

절벽에 매달려 바람에 시달리며 끈질기게

피워낸 그 꽃들은 빛깔조차 다르다.

당신이 진정한 야생화 사진을 하려면

그 꽃들의 행복한 표정을 찾아내야 한다.

울타리 안에 줄 맞추어 반듯하게 늘어선

그 꽃들이 왜 불행한지 알아야 한다.


당신이 신념 가득 찬 들빛 사진가로 되려면

표본실같은 식물원 근처를 기웃거리지 말고

계곡 깊숙이, 벼랑 끝, 산등성이를 넘어서

환하게 피어나는 들꽃들을 찾아 나서라.

며칠을 헤매더라도 당신 가슴을 쿵덕쿵덕

뛰게 하는 행복한 꽃 한 송이를 만나라.






산 속의 모두가 힘을 모아 봄을 만드네.


그 두터운 눈덩이를 녹여내는 것은

지열이며 바람이며 빗물이며 햇볕이다.

그 모두들이 힘을 모아 봄을 만들어 간다.






벽 앞에서도 꽃은 정면 돌파, 무모할지라도 피어난다.


나의 큰골에는 특별한 기능이 추가된다.

나는 언제나 행복하다고 느끼는 능력이 있다.

무슨 일이 생겨도 잘 됐다고 생각해버린다.

아주 험한 일을 당해도 팔자려니 생각하고

정해져 있던 운명으로 돌리면 맘 편하다.

마음 약한 운명론자라 해도 나는 좋다. 하하하






흙의 숨소리, 언젠가 나의 숨소리가 될 그것을 맡아보자, 들어보자.


사진을 찍으려면 코를 땅에 박아야 한다.

불룩나온 배를 땅에 찰싹 붙여야 한다.

그럴 때면 언제나 땅 냄새를 맡는다.

부드러운 흙의 숨소리를 듣는다.


나, 일 끝내고 떠나면 아직 쓸모 있는 데는

필요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나머지 껍데기는 불태워 재로 만들어서

향기로운 흙 속에 스며들겠지.

흙과 함께 숨 쉬러 흙으로 돌아가겠지.


화인다 들여다보다 힘들고 지칠 때

내가 돌아갈 포근한 땅에 뺨 부벼 본다.

대지의 부드러움과 향이 온몸으로 온다.






자기를 내세우려 하지 않고 묵묵히 뒤에서

어려운 일을 해내는 아름다운 사람들.


나는 돌밭이나 바위 틈에 뿌리를 박고

강인하게 피어나는 꽃들을 만나면

무조건 좋아한다. 무조건 존경한다.

지독한 태양열에 달궈진 암벽의 복사열과

계속되는 가뭄의 극단적인 갈증을 참고

모질게 불어대는 미친 바람도 견디고

피할 수도 숨을 수도 없는 극한 상황을 극복해내는

그 여린 듯 강한 생명들.

그들에게 우리 모두 기립 박수를 보내자.


그들의 삶을 한번쯤 생각해보자.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느라

바위 틈의 악조건에서 열심히 물과 양분을 만들어 보내는

뿌리들, 숨은 일꾼들.

우리 사는 세상에도 그런 이들은 있다.

자기를 내세우려 하지 않고 묵묵히 뒤에서

어려운 일을 해내는 아름다운 사람들.

진정으로 기립 박수를 받아야 할 그들이다.


누가 꽃이 되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우리 세상을 꽃 피울 뿌리같은 사람들

그들 덕에 우리는 숨 쉬며, 웃으며 살 수 있다.



     



산이 내게 베풀지 않으면 사진은 못 한다.


이제는 기다리던 빛의 모양이 이루어졌으니

허둥대지 말고 찬찬히 살펴보자.

이제부터 마음 속에 사진을 담아야 한다.

사진은 맑아야 한다. 탁한 느낌은 안된다.

꽃과 산을 얼기설기 되는대로 엮어놓으면

뒤숭숭한 사진이 되고 만다. 더 안 된다.

얼렁뚱땅 허둥지둥 들여다 보고 그냥

대충대충 셔텨를 누르면 사진은 어설퍼진다.


산이 내게 베풀지 않으면 사진은 못 한다.

내 차지가 아닌 걸 애써 욕심내서도 안 된다.

사진, 아주 많은 걸 생각하게 된다.


세상살이도 한가지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했다.





솔체꽃의 꽃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러나 제 힘으로 열심히 피어난다.


백두산에는 잡초가 하나도 없다.

어느 꽃이나 모두가 그 땅의 주인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재배되지 않고

스스로가 제 힘으로 열심히 살아가니까.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한 포기의 풀 만큼이나 열심히 살아왔는가?

얼마나 멋진 씨앗을 세상에 남길 수 있는가.


꽃이 지는 것은 허망함이 아니다.

화려했던 젊은 날의 힘차게 퍼덕이던

날개를 접고 씨를 퍼뜨리는 보람이다.


새싹을 키워내던 희망도

꽃을 피우던 아름다운 시절도

사랑을 나누고 씨를 맺었던 기쁨도

모두 모두 바람에 날려 보내 버리고

마른 풀잎들은 흉하게 버려진 게 아니다.

쓸쓸한 가을이기보다 풍요로운 가을이다.


사진은 느낌을 찍어 표현하는 것이다.

나는 씨앗을 모두 날려 보내고 이제는

꺾여져서도 당당하게 대지 위에 서 있는 자그마한 마른 풀대에서

보잘 것 없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의 위대한 생애가 내년의 고산화원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해줄 것이다.





나는 모진 바람을 더 견디어 낼 수 있다.


그렇다. 쓰러지지 않는다.

씨앗들을 멀리멀리 하늘 너머 낯선 땅

저 끝까지 남김없이 떠나 보내는 날까지

부러지거나 쓰러지면 안 된다.

그 가녀린 가지로 광풍을 견디는 괴력은

우리네 어머니의 마음과 한가지다.


나 이제야 겨우

사진이 무엇인가를 조금 알 것 같다.

왜 사진을 하는가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누구의 가르침도 없이

수많은 착오와 오류를 범하며 나 혼자

지름길을 두고 먼길을 외둘러서 힘겹게

이제사 여기까지밖에 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렵사리 얻어낸 몇 알의 씨앗을

바람에 날려보내 이 땅 어딘가에 뿌리를 내려서

야들야들한 애기 잎이 돋아나고 넓게 가지를 치고

내가 볼 수 없는 훗날에라도 아주 큰 나무로 자랄 수 있다면,

그를 위해서라면 이제 나에게

얼마 남지 않은 삶의 모두를 바칠 수 있다.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새롭게!


내가 살아온 길을 되돌아본다.

척박한 이 나라에서 사진을 천직으로 살았다.

사진 보리고개에서도 그 좌절의 시간들을

사진을 해야 한다는 의지 하나로 버티어냈다.


예술대학이라는 데에서도 갈팡질팡 헤매고

내가 가야 할 길을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나 혼자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왔다.


이제는 여태까지 한 길로만 달려오며 느낀

많은 생각들과 그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새로운 일들을 계획할 것이다.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새롭게 공부하고

내 삶의 반환점을 돌아 다시 뛸 것이다.


산길은 가파르겠지만 나는 다시 뛸 것이다.















안승일 사진 작가의 <고산 화원>도 기대된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4-12-24 15: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2-24 15: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야제 2024-12-24 15: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좋은 책을 만나 행복합니다.
오래전부터 사진 찍는 걸 좋아했는데, 언젠가 꼭 사진을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꿈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자연의 언어를 온 몸으로 느낀 사람의 글이 정말 아름다워서 이 책으로 2024년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올해 여기에서 만난 서재 이웃님들께 정말 감사한 마음 가득합니다.
서재 이웃님들이 아니었다면 글 쓸 용기도 내지 못 했을 거에요.
내년에도 열심히 글 쓰면서, 서재 이웃님들의 좋은 글 만날 생각에 기쁩니다ㅎㅎ
모두 한 해 마무리 잘 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랄게요!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나와같다면 2024-12-24 16: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란 복수초(福壽草)를 보면 저는
고 김대중 대통령님과 광주가 떠오릅니다. 춥고 긴 겨울을 이겨내고 눈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

아.. 서양에서는 복수초의 꽃말이 ‘슬픈 추억‘이라고 합니다

전야제 2024-12-24 16:35   좋아요 1 | URL
방금 찾아보니 생전 가장 좋아하신 꽃이 노란 복수초였네요.
가장 추울 때 피어나니 그 생명력이 정말 대단하고 슬프기도 합니다.
또 다른 꽃말은 ‘영원한 행복‘이라고 해요.
나와 같다면님, 행복 가득하고 건강한 2025년 보내시길 바랄게요!
댓글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4-12-27 13:28   좋아요 1 | URL
전 인동덩굴이 생각나요.
달빛에 비친 하얀 꽃

그레이스 2024-12-27 1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갈나무 투쟁기가 생각나네요^^

전야제 2024-12-27 15:25   좋아요 1 | URL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완전 제 취향이에요ㅎㅎ 새해에 꼭 읽어보겠습니다~~그레이스님, 미리 새해 인사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계획하시는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시길 바라겠습니다. 항상 응원할게요! 댓글 감사합니다^^

전야제 2024-12-27 15:29   좋아요 1 | URL
인동덩굴 찾아보았어요 방금ㅎㅎ 갸냘프면서도 우아하고 너무 예쁜 꽃이 열리네요. 멋진 식물 알고 계신 그레이스님! 즐거운 연말 보내세요^^

2024-12-31 2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2-31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행복만을 보았다
그레구아르 들라쿠르 지음, 이선민 옮김 / 문학테라피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게 아니었어요. '날을 잡아'라는 말은 야수의 그림자가 아니라, 빛을 잡으라는 거였어요.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거죠. 다른 걸 잡으라고, 미지의 것을 향해 가라고.

인생을 향해 가라고. 

이제는 그곳에 가고 싶네요. 미지의 것을 향해."


인생을 향해, 미지의 것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고 말하는 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선택으로 자기 인생뿐만 아니라, 타인의 인생까지 파멸시킨 사람이다.

그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을 파괴할 만큼,

한 사람의 비극 속에 오랫동안 숨겨져 온 야수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소설 속 주인공인 앙투안, 그의 인생 전체를 이해할 때 비로소 알 수 있게 된다.

불행했던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부모님의 따스한 손길과 사랑을 갈구했던 한 소년의 마음에는

'비겁함'이라는 존재가 뿌리 내렸고, 그건 그의 인생 전체를 갉아먹는 괴물이 되어버렸다.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침묵하고, 비겁하게 자신을 숨겨왔던 그가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소리를 내었던 순간.

바로 그의 딸 조세핀에게 총을 겨눈 순간이었다.

이 말도 안되는 행동을 이해하기까지는, 적어도 두 가정의 붕괴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가족이 어떻게 탄생하고 해체되는지 지켜보면서, 현실 속 우리들의 가족은 어떠한 모습인지 돌아볼 수 있게 된다.

언제나 그렇듯 반성은 고통을 동반하기에 이 소설은 참 아프게 읽어야만 했고,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버지가 자신의 딸에게 총을 쏜 행위는 명백하게 범죄이고,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윤리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이 소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진정한 가치는 이 비극적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상처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여정' 속에 있다.


"이해한다는 건 타인을 향해 성큼 다가서는 거예요. 용서의 첫걸음인 셈이죠."


주인공 앙투안의 말이다.

앙투안의 비극적인 삶을 제대로 이해하고 용서한 유일한 사람이, 바로 그가 총을 겨누었던 그의 딸 조세핀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파괴한 사람이 자신을 용서하는 과정을 담았기에 이 이야기는 어쩌면 '용서'에 초점을 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용서도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용서함으로써 사랑보다 더 큰, 그 너머에 있는 인간의 행복과 기쁨을 나는 이 소설에서 보았다.

사랑받고자 했고, 사랑만이 구원이라고 생각했던 한 사람의 고통을 지켜보면서

정답은 사랑에 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독자들은 알 수 있게 된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에서 행복이 실현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행복은 사랑의 충족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소리 없이 전달하고 있다.

그럼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고?

그 답을 찾는 것은 역시나 독자들의 몫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왠지 모르지만, '사랑'이라는 것에 큰 의문을 가져왔다.

것이 인생의 전부도 아니고, 목적도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그보다 더 큰 무엇이 있을거라는 막연한 느낌.

그러나 내가 본 적도 없고 경험한 적도 없는 것이기에, 사랑 그 너머에 있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사랑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알았기에 그 누구로부터 사랑을 갈구하지는 않았다.

사랑을 갈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적어도 사랑으로 인한 외로움은 없게 된다.

원래 외로움을 잘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앙투안의 외로움을 따라가려면 나도 어떻게든 내 인생의 외로움을 돌아보아야만 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알게 된 건, 사랑받길 원하지 않는 이에겐 사랑받는 일 또한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 일은 내게 참 어색한 일이기도 했다.

좋아한다는 고백도, 감정도 이해되지 않기에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나를 좋아했던 사람들에겐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다.

그래서 이소라의 노래 중에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라는 가사가 있는 걸지도.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과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어느 쪽도 서로를 이해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앙투안과 그의 어머니, 아버지도 마찬가지이다.


앙투안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

시를 사랑했고, 화학을 전공하는 20살의 청년과 작가를 꿈꾸었던 17살의 소녀가 첫눈에 반해 결혼을 했다.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결혼을 했으니, 그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 자식들은 불행을 선택할 수 없다.

남녀가 만나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게 되는 순간부터, 그 아이의 운명에는 절대로 바뀔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하게 된다.

태어나서 내가 자라게 될 가정이 화목한지, 부모님은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지, 이 가정이 오래도록 존재할 것인지.

이런 것들은 온전히 아기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비극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만약 화목하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가족이 깨어지지 않고 영원히 지속된다면 

앙투안이 이렇게 마음 고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 보아도,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아도, 아무리 애원해보아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 같아.


이렇듯 앙투안의 기억 속의 가정의 모습은 화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앙투안의 어머니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책을 좋아하는 문학소녀였다.

작가가 되길 희망했으나 일찍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주부가 되었다.

그 현실을 인정하지 못해 이른 아침부터 맥주를 마시고, 멘톨 담배를 끊임없이 피웠다.

현실도피. 그녀는 아이와 아버지가 지켜보는 가족 내에서 끝없이 회피하는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앙투안과 아버지는 짐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어머니의 '비겁함'이 드러난다.

어머니는 앙투안에게 아버지같은 사람이 되지 말 것을 얘기했다.

아버지의 '비겁함'을 문제삼으면서.

아버지의 비겁한 모습은 아버지 자신이 타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면,

어머니의 비겁함은 주어진 현실보다 자신의 허황된 꿈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정말 작가가 되고 싶었다면, 그녀는 맥주 대신 펜을 집어들었어야 했다.

물론 육아를 하면서 집필까지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작가가 되겠다는 '희망'만 있었지, 그것을 이루려는 노력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담배 연기 속에서 언젠가 눈 앞에 펼쳐질지도 모르는 허황된 삶을 꿈꾸셨어.

어머니는 행복을 누릴 수 없는 사람이었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셨거든.


앙투안의 말에서 어머니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드러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른다'는 것.

현실 도피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자기 자신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자신이 속한 가족을 보려하지 않았고, 결국 가정 내의 자신의 삶조차 내던지게 된다.

앙투안이 5살 때, 부모님은 쌍둥이 여자아이 둘을 또 낳게 된다.

'안'과 '안나'.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안'은 원인 모를 이유로 죽게 되고, 안의 죽음을 핑계 삼아 어머니는 집을 나간다.

처음에는 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집을 나간 것이라 추측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집을 나가 수많은 애인들을 만나고 술과 담배에 절어 살게 된다.

앙투안과 안나가 엄마를 보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도 답장하지 않는다.

더욱이 그녀가 작가가 되기 위해 글을 쓰는 행위는 전혀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녀는 집을 나가서도 역시 현실 도피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녀 자신이 비겁한 사람이었던 것.

앙투안과 안나는 아버지에게 어머니를 되찾아 올 것을 바랬지만, 아버지는 어머니를 붙잡지 않았다.

앙투안의 가슴 속에 야수가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아버지의 침묵과 소극적인 행동들이 깔려있다.

아버지로서 행동해주길 바랬던 것들과 아버지가 결국 하지 않았던 것들이 맞물려

앙투안의 가슴 속에는 폭발적으로 표출될 수 밖에 없는 야수가 점점 자라게 된 것이었다.

앙투안은 아버지의 비겁함을 줄곧 비난했지만, 어머니 역시 비겁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앙투안은 부모님이 그랬듯 '침묵과 숨김'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앙투안은 사랑을 갈구하기 이전에 누군가를 진정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앙투안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표현들이 있다.

아버지가 일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을 좋아했고,

실험할 때마다 풍겨오는 냄새, 실험이 잘 되지 않을 때 들리던 고함소리, 잘 될 때의 기쁜 외침도 

앙투안은 너무나도 좋아했다.

아버지가 아침마다 신문을 펼치던 모습. 그때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건네는 시시콜콜한 몇 마디에 무심하게 핀잔주는 어머니의 모습도 앙투안에게는 예뻐보였다고.

어머니가 담뱃불을 붙일 때의 팔뚝의 움직임이 마치 루돌프 누레예프가 '소 드 샤 saut de chat'를 하듯 우아해 보였다고 한다.

누군가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건 어마어마한 애정이 있다는 것.

앙투안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그저 가정 내의 역할로서가 아니라, 그와 그녀로써 사랑했다는 것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비극이 탄생했다.

아이는 부모를 사랑하지만,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때.

엄밀히 말하자면, 앙투안의 부모님은 앙투안을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라,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줄 '용기'가 없는 비겁한 사람들에 가까웠다.


장장 30년 동안 아버지가 미소 짓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어. 특히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은 단 한번도 웃질 않으셨지.


여기서 말하는 30년은 어머니가 가족을 버리고 집을 나가게 되고, 아버지께서 새로 맞이하신 새어머니와의 30년이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나서도 붙잡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잠시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새로운 여자에게 반하게 되고 그녀를 새 부인으로 맞이한다.

앙투안과 안나는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새어머니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새어머니는 그들의 친어머니와는 전혀 달랐다.

'안'이 죽고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나서, 안나는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렸고, 앙투안은 벽을 내려쳤다.

새어머니는 아이들을 걱정해서 아버지로 하여금 정신과 상담을 받게 했다.

자신의 자식들도 아닌데 헌신적으로 챙기고, 30년간 가족을 하나로 묶어왔다.

그것이 그저 어머니라는 '역할'에 충실한 것이라고 평가하기에는 부족하다.

가족을 지탱하려는 노력은 앙투안의 친어머니에게는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 어느 가족에게든 반드시 '위기'가 찾아오게 된다.

그 위기 앞에서 가족 구성원들은 서로 다른 슬픔 속에 빠진다.

사랑이 저절로 가족 구성원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주지는 않는다.

이것이 사랑의 충족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은 가족에게 찾아온 하나의 시련을 두고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극복하려 한다.

앙투안의 어머니는 집을 나갔고, 앙투안의 아내 나탈리는 새로운 남자에게로 가서 가정을 꾸렸다.

하나의 가족이 탄생하고 소멸하는 과정 속에서, 가족 구성원들의 마음 속에는 상처가 자리 잡게 된다.

안나는 비록 실어증에 걸렸지만, 자신의 반쪽짜리 언어를 채워줄 따뜻한 '토마'를 만나 상처를 치유하게 된다.

앙투안과 아내 나탈리는 한때 서로 열정적으로 사랑했지만, 나탈리는 바람을 피우고 결국 새 남자에게로 갔다.


앙투안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용기낸 행동으로 인해 회사에서 해고 당하고,

그의 아버지는 말기 암에 걸리고,

아내 나탈리는 바람을 피운 남자와 가정을 꾸리고,

자식들인 조세핀과 레옹도 아내의 새 남자를 영웅처럼 따르게 되자,

앙투안 속에 억누르고 있던 수많은 모욕과 마음의 상처들이 폭발하게 된 것이다.

루거 LCR 22 한자루.

조세핀과 레옹과의 인생 가장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침대에 재우고선,

그는 딸 조세핀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중에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 앙투안은 의사에게 말한다.

그날 밤 날려버리고 싶었던 것은 '불행'이었다고.

자신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자신과 아이들이 죽는다면, 더 이상 고통받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나 총알은 빗겨나갔고, 조세핀의 턱이 날아가는 것에서 그쳤다.

조세핀은 턱뼈와 피부 이식 수술을 마치고 언어 치료를 받고 무사히 발음할 수 있을 때까지 거의 4년이 넘게 걸렸다.


마지막 제 3부 <행복만을 보았다>는 조세핀의 시점에서 쓰여졌다.

자신에게 총을 겨누었던 아버지에 대해 증오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조세핀은 정신과 치료를 병행하며 상처를 치유한다.


"고통이란 이물질 같은 것. 사람은 외피를 만들어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지만, 느끼지 못하면 치유될 수 없는 것."


정신과 치료는 조세핀에게 닥쳤던 비극을 그녀가 제대로 마주할 수 있도록 진행된다.

처음에 '아빠'라는 말을 할 수 없었던 그녀가 마지막에는 아빠라고 말하면서 아버지 앙투안과의 행복했던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린다.


지금의 모습 그대로 중요한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언젠가 나한테 있었던 일을 꼭 얘기하게 된다면 좋겠다.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왜냐하면 한때는 이 모든 두려움 이전에, 공포 너머에 사랑이 존재했을 테니까.


아버지를 원망하고 증오했던 조세핀이 치료를 거듭하면서 아버지를 이해해나가는 과정이 정말 압권이다.

상처를 치유하려면 결국 그 상처를 들여다봐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공포스러운 일.

시간이 흘러 조세핀이 친구를 사귀고, 사랑을 하게 되고, 그렇게 성장하면서

점점 더 아버지 앙투안의 내면에 다가가게 된다.

조세핀이 드디어 '날 위한 행복과 평화를 찾고 싶은 마음. 나의 가족과 나의 자리를 되찾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 때,

상담 선생님은 '예전에 살아왔던 모습이 아니라 이제 지금 네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싶은 것'이라고 좋은 현상이라고 했다.

그동안 자신의 비극적 삶에 대해 품었던 연민, 고통, 환멸, 멸시에서 벗어나, 드디어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했을 때, 조세핀의 상처에서 새 살이 돋아났음을 알 수 있다.


조세핀이 아버지 앙투안이 멕시코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상담 선생님 앞에서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눈물을 쏟는다.

아버지에 대한 모든 증오를 다 해소하게 된 순간이었다.

선생님은 여기서 아주 아름다운 한마디를 건넨다.


"원래 탄생의 순간에는 언제나 엄청난 양의 물과 눈물이 동반되는 거란다.

반갑다, 조세핀, 반가워."


아버지를 드디어 용서할 수 있게 된 조세핀은 그를 만나러 멕시코로 떠난다.

두렵지만 '기쁨'을 한가득 품고선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조세핀이 아버지 앙투안의 상처를 진심으로 이해하기까지의 여정은 얼마나 힘들었던가.

그녀가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에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기쁨 때문에 몸이 벌벌 떨린다고 했을 때,

나는 사랑보다 더 큰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사랑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드디어 보았다.

인내와 용서와 이해 끝에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기쁨'.

행복은 바로 그 '기쁨'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상처에서 두려움 너머의 사랑을 볼 수 있게 되고, 그 사랑 너머에 있는 '기쁨'을 진정 느끼게 되기까지.

앙투안과 조세핀은 자신들의 얼룩진 삶 속에서 행복만을 보기까지 많은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조세핀이 비행기에서 헤드셋을 끼고 음악을 듣는데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다는 듯, 신비한 노래 가사가 흘러나온다.

이 가사를 읽으며 눈물이 쏟아졌다.


"그 사람 얘기 좀 들려줘요, 어떻게 지내죠? 이젠 행복해하나요?"


아버지와 딸이 각자의 상처를 치유하고, 행복을 찾고, 마침내 진정한 가족이 되기까지의 여정을 축복하면서...





->사랑 너머에 있는, 사랑보다 더 큰 '기쁨'을 잘 알고 있는 토마와 안나.

이 둘은 이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행복한 가정을 꾸리면서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실어증으로 인해 반쪽짜리 말만 하는 안나에게 나머지 반쪽의 언어를 채워주는 토마.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관계라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야제 2024-12-20 1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생의 공백기에 부지런히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있습니다. 사실 ‘행복‘이란 단어에 꽂혀서 구매한 책인데, 내용은 정말 정반대여서 당황했습니다. 그렇지만 마지막 장 넘기는 순간 홀가분해지면서 한 편의 영화를 본 것처럼 많은 감정들이 떠오르더라구요. 서재라는 공간이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서재 이웃님들의 책에 대한 열정과 좋은 글 덕분에 저도 많은 힘이 납니다ㅎㅎ 행복한 연말 보내세요^^

자목련 2024-12-20 11:33   좋아요 1 | URL
오래 전에 이 작가의 <내 욕망의 리스트>를 읽었는데 좋았던 느낌이 있어요.
전야제 님의 리뷰로 만난 이 소설도 비슷한 느낌인 것 같아요. 남은 연말 평온하고 건강하게 보내시길 바라요.

전야제 2024-12-20 11:5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내 욕망의 리스트> 꼭 읽어보겠습니다. 넘 기대되요ㅎㅎ 연속 2번 읽을만큼 문체가 넘 개성있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작품 찾아볼 생각도 못했어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자목련님도 건강하고 무탈한 연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