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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함께 춤을
베르트 케이제르 지음, 오혜경 옮김 / 마고북스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죽음은 삶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우리는 살면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마치 우리의 시계(視界)에 한계가 없듯이 그 한계가 없다." - 비트겐슈타인


저자 베르트 케이제르는 철학을 공부한 철학도이며, 뒤늦게 의학을 공부하여 네덜란드의 한 요양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의사이다. 이 책을 비롯해 <비트겐슈타인 철학 입문>이라는 철학서도 저술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저자는 시니컬하고 냉소적이며, 회의주의적인 태도를 종종 보인다.

본인이 의사이면서도 의학이라는 분야에 대해 냉소적,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좋아하는 것 같으면서도, 내가 보기엔 저자는 소크라테스를 더 닮았을만큼 모든 일에 있어서 질문이 많은 사람이다.

안락사를 결정하는 모든 과정에 있어서도, 동료 의사들과의 가벼운 대화에서도,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그는 진지하고 무거운 철학적 질문들을 서슴없이 계속 던진다.

그것이 안락사를 가장 많이 다루게 되는 이 곳 요양병원에서의 일을 잘 수행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짐작해본다.

안락사를 요청하는 환자들의 확고한 의지를 파악하는 일에는 끊임없는 의심과 질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본인이 직접 안락사의 의지를 보였으면서도 마지막 순간에 흔들리는 경우도 있고, 자신의 의지가 아닌 채 안락사를 요청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확고한 의지를 포착하는 일이 정말 어려운 일임을 저자의 의사로서의 고뇌와 딜레마에서 알 수 있다.


네덜란드는 안락사가 가장 먼저 법제화된 나라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요양병원과 비교해볼 때 죽음을 결정하는 안락사의 문제가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생의 마지막까지 무기력하게 기다리기만 하는 수동적인 풍경이 아니라 환자, 가족, 의료진 이 세 영역의 의견이 활발하게 오가는 적극적인 모습들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죽음을 결정하는 것이 법제화 된다는 사실이, 삶에 있어서 더 주체적이고 적극적이 될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 추측해본다.


나는 지금까지 안락사에 관한 문제를 철저히 '주체'의 측면에서만 생각해왔다. 죽음을 결정하는 데에 '나'의 의사가 중요하다고 그렇게 편협하게만 생각해왔다.

그러나 안락사를 결정하는 주체가 엄격하게 '나 자신'이어야 한다는 사실 말고도 안락사에 관한 문제는 본질적인 다양한 문제들이 얽혀 있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안락사가 가장 많이 행해지는 요양병원에서 그 현장을 세세히 기록한 의사의 책이기 때문에, 단지 법으로 명시된 것에서는 알 수 없는 '현장'의 내용들이 자세히 드러나있다.


이 책은 저자가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환자들의 죽음에 이르는 여정을 기록한 병원 일지에 가까운 글이 담겨있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게 참으로 어렵고 고통스럽기도 했다.

저자가 경험한 환자들의 죽음을 독자 또한 같이 경험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리 밝혀두자면 이 책은 의학 드라마처럼 인물들의 '감정'이라는 것이 개입되어있기보다는, 환자가 삶의 마지막을 결정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질문들과 그에 대한 솔직한 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왜 저자는 이상해보일수도 있는 철학적 질문들을 계속해서 던지는지 나는 처음에 이 책을 읽을 때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병으로 고통받고 이제는 삶의 끝에 와 있는 환자들에게, 그 마지막 순간에도 시니컬하고 냉소적인 태도로 끊임없이 질문을 제시하는 걸까? 그 의문이 결국 책에 마지막에 이르러서 풀렸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알지 못하면서 죽는다. 생각해보면 도대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 죽는 일이 가능하기나 할까? 표현이 좀 어색하긴 하지만, 우리는 태어날 때처럼 죽는다. 어떤 사람도 스스로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지 못하듯이 스스로 죽을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은 정확하게 정의하기가 어렵다."

"사람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서 죽어간다."

"그러므로  '그 여자는 죽어 간다'라는 표현은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나 분명하게 보이는 현상이며 대체로는 지난 후에 되돌아보았을 때나 분명하게 보이는 현상이다."


이 구절들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태어나는 것과 같이 죽는다고 한다.

태어나는 순간에 '내가 태어났구나'를 전혀 느낄 수 없듯이, 죽는 순간에도 '나는 죽는구나'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죽는다고 한다.

여기에서 한 사람의 죽음이 그저 그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님을 잘 알 수 있다.

하나의 생명이 탄생할 때도 산모뿐만 아니라 그 과정을 무사하게 치를 수 있도록 돕는 의료진들, 출생신고부터 생애 주기에 따른 행정적 절차들 담당하는 공무원들 등과 같이 마찬가지로, 죽음에 부수되는 절차와 사람들이 있다.

의사의 사망선고가 내려지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 벌어지는 절차들.

시신이 영안실로 이동되고, 장례식 절차가 행해지고, 남겨진 가족들이 사망신고 하는 등의 행정적 절차들과 상속에 관한 법적인 절차들이 진행된다.


죽음은 절대로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인간을 자유에서 멀어지게 한다.

이것이 안락사에 관한 문제에 있어 참 까다로운 문제들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죽음을 결정짓는 문제들에 사회적인 문제들이 맞물린다.

그러나 죽음에 부수되는 사회적인 절차들보다도, 죽음을 결정하는 주체의 '의지'에 대해서 저자는 초점을 맞춘다.


93세 왈데이크 부인은 이 병원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다. 5년 전의 어려운 수술을 거치고도 살아서 주어진 생을 어떻게든 영위하고 있는 와중에 동맥폐색으로 인한 다리 절단을 결정해야하는 순간이 왔다.

다리를 절단해야만 삶을 연장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녀의 두 아들은 5년 전부터 마치 자신의 어머니가 끈질기게 살아있다는 듯이, '이제 끝이 나야 합니다' 라고 의사에게 안락사를 요구한다.

이 아들들이 어머니를 싫어해서 이런 말과 행동을 던지느냐고? 전혀 아니다.

아들들은 어머니를 사랑한다. 어머니가 5년 전, 아니 그 전부터 겪어온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 보아온 그들이다. 어머니의 고통을 보면서, 어머니의 아름다운 시절들을 떠올리며 속절없이 망가져 가는 비참한 모습을 두 아들은 지켜보기가 괴로웠던 것이다. 


그러나 의사가 이 아들들의 행태에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하다.

심지어 병든 애완동물도 안락사를 해준다는 비유를 들면서 자신의 어머니에게도 안락사를 시행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으니 말이다.

"당신 어머니는 개가 아니지 않습니까?" 의사는 화가 나서 답한다.

그러나 나는 이 다음 아들의 말에 조금은 수긍이 갔다.

"아니요, 차라리 개였더라면. 그랬더라면 어머니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안락사를 요구하는 아들의 행태가 겉에서 보기에 비정함과 잔인함만이 보인다면, 당신은 병으로 인한 끔찍한 고통을 겪어본 적이 없거나 가까이에서 그 고통을 지켜본 적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온 몸을 파괴하는 끔찍한 고통은 불굴의 의지로 가득 찬 정신마저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가족들의 정신과 의지마저 무너뜨리고야 만다.

그래서 말기에 이른 암이나 그 밖의 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부모님을 지켜보는 자식들이 부모님의 안락사를 요구하거나 연명치료 중단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환자는 괴로워하고, 가족들은 협박을 하며, 동료들은 얼굴을 찌푸리고, 죽음은 미소를 짓는데 젊은 의사는 이 난동 속에서 미친 듯이 지그 댄스(아일랜드의 추운 날씨를 견디기 위해서 추던 춤으로 탭 댄스의 원형이 되었다) 를 춘다.

한때 그 의사는 죽음과 함께 완벽하게 통제된 탱고를 추면서 무도회장을 미끄러질 수 있을 것이라고 꿈꾸었다."


죽음에 가까워지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환자 앞에서, 연명치료 중단이나 안락사를 의논하는 가족들과 난감해하는 의료진들. 이들이 다함께 병동에 있는 상황에서 이 모든 것을 결정해야만 하는 의사의 심정이 바로 이 문장에서처럼 '지그댄스'를 춘다고 비유되었다.

이 책의 제목 '죽음과 함께 춤을'은 죽음이 가까이 온 상황에서도 즐겁게 맞이하며 춤을 추라는 낭만적인 뜻을 포함한 것이 절대로 아니다.

환자, 가족, 의료진 이 모두가 원하는 방향이 서로 어긋나고 길을 잃고 헤매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 완벽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오랜 기간 공부하고 수련해왔을 한 의사의 현실 파악이라는 비극적인 뜻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리. 담당의사는 어쨌든 결정해야만 한다. 모두가 원하는 방향으로? 아니다.

이 책의 저자인 요양병원 의사는 모든 순간에 시니컬하고 냉소적인 철학적 질문을 던지며, 안락사를 원하는 환자 앞에서도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안락사를 요구하는 왈데이크 부인의 두 아들에게 저자는 말한다.


"그녀의 생명은 본인이 분명하게 요구할 때에만 끝낼 수 있다."


그에 반기를 들며, 어머니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고통을 끝내 드릴 수도 있다는 아들의 말에 저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그건 '살인'이라고.

살인과 안락사의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장기간의 고통 속에서도 안락사를 스스로 요구하지 않는 것이 분명한 환자에게, 설령 그 자식들이 부모님의 고통을 지켜보기가 괴롭다는 이유로 안락사를 행하는 것은 '살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끝내 환자 자신의 안락사를 결정할 수 없을 만큼 의식을 잃게 된 상황 속에서도, 가족들이 안락사를 결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왈데이크 부인의 사례에서 의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란 환자의 고통을 덜어드리기 위해 과량의 모르핀을 주사하는 것이고, 그것이 동맥폐색으로 인한 다리절단을 하지 않아도 될 유일한 방법이라고 두 아들에게 말한다.

끝내는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과량의 모르핀을 주사해도 생이 일주일 안에 끝날 것이라 의사는 짐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실에서 환자, 가족, 의료진이 합의볼 수 있는 현실적인 결정이다.

그러면서 의사는 두 아들에게 말한다.


"안락사를 결정하는 일이 쉽게 처리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지 마십시오. 결국 이러한 숙제는 환자의 마지막 일주일간 주사를 놓고 매일 다리를 소독해 주어야 하는 사람들의 어깨에 고스란히 지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환자와 그 가족들이 직면하는 어려운 결정의 상황이 있고, 그에 따르는 의료진들의 어려운 숙제와 무거운 짐이 있고, 그 고뇌는 모두에게 얼마나 힘겨운 것인지.

우리들은 삶의 마지막을 결정하는 상황 속에서도 이렇게 혼자만의 숙제가 아니라, 모두와 함께 숙제를 끝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이 책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사회가 안락사에 관한 법과 기준을 만드는 것에 꼭 반영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죽음에 관련된 절차들이 모든 게 무 자르듯 딱 맞추어서 진행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기로에 서 있는 사람들의 고뇌와 부담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절차가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수많은 잡음이 일어나리라 예상되기도 한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남겨진 가족들의 심정 속에는 슬픔만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 뒤의 절차들이 진행되면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을 보아온 경험이 있다.

죽음에 대한 비통함은 의료진에 대한 날선 증오와 비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것을 똑똑히 두 눈으로 보았던 적이 있다. 실제로 의료진은 할 도리를 다했을 뿐 어떠한 것을 더 하지도, 덜 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남겨진 가족들에게는 그들이 어떠한 것을 잘 못 했거나, 무기력하게 덜 했을 것이라는 의문이 가시질 않는다. 망자의 가족들을 비난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다만 이해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의료진을 향한 그들의 원망은 어쩌면 인간이기에 가지게 되는 당연한 심리적인 현상일지도 모른다.

이미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이성적인 사고가 제대로 작동되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할 수 있는 것이 과량의 모르핀만을 주입하는 것이 전부인 무기력한 상황에서, 죽음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의료진들이 무기력한 존재라고 비난하는 것이 과연 옳은 걸까?

그렇게 의료진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본다면, 그런 사회에서는 절대로 안락사가 제대로 시행될 수가 없다.

의료진과 환자, 그리고 그 가족들 간의 서로 다른 입장을 헤아리고 하나의 결정을 내리는 일은,

안락사를 법으로 결정하기에 앞서 반드시 해결되어야만 하는 선결문제라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 확실하게 깨달았다. 


"인생은 한 포기 풀과 같다. 들판의 꽃처럼 핀다. 바람이 불면 사라진다. 꽃이 있던 자리는 더 이상 꽃을 알지 못한다."


성경의 한 구절이라고 한다. 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서 성경을 잘 모르지만 이 구절이 정말 와 닿았다.

냉정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살아서 있던 자리에는 또 다른 생명들이 와서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생명이 이어져 가는 자연의 섭리 속에서, 인간의 죽음을 결정짓는 문제가 자칫 허무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결국 사라져서 잊히게 되는, 언젠가는 그 누구도 존재 자체를 모르게 되는 이름 모를 들풀일테니.

그러나 죽음이 탄생과 같은 것이라면, 우리가 최초에 탄생했을 때 세상 모두가 기뻐했듯이 죽음 또한 적어도 그만큼의 관심과 존중을 받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존엄한 죽음이라는 것은 말만 그렇듯해서는 안된다.

저자는 병원의 이사진들이 안락사에 대한 조례를 제정하는 문서에서 형식적이고 관념적인 안락사에 대한 문구들을 보며 비판적인 어조로 말했다.


"실제로 죽어가는 사람을 다루어 본 경험이 전혀 없는 이사들이, 인간의 자기 결정권에 견고한 형이상학적 기초를 부여하는 당당한 머리말을 만듦으로써 그러한 경험 부족을 보상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회의 중에 그들은 모두 지나치게 윤리적으로 굴면서 언제 이 삶을 떠나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인간이 가지는 고유한 특권을 찬양하는 데 치우치느라고 실제적인 문제들, 이를테면 어떤 독극물을 사용할 것인가 같은 문제에는 별로 관심을 주지 않았다."


윤리적이고 신념적인 것보다는 실제로 죽음을 결정하는 이에게 다가오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먼저임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죽음 이후의 순간에 나의 육체에 관한 것은 철저히 남에게 맡겨진다.

매일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며 단장했던 나의 행동은 죽음의 순간 이후로는 내가 할 수 없다.

나의 시신이 곱게 단장되고, 묻히는 과정은 남겨진 가족들과 그에 관련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하게 된다.

이럴 때면 세상에 다양한 직업이 있다는 것에 참으로 안심이 된다.


말렌스타인 부인의 사례에서 우리가 한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대해야 할 지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답을 찾았다.

말렌스타인 부인은 폐 기능이 심하게 떨어져서 혼수상태로 계속 누워있었고, 그것을 지켜보는 남편은 참다 못해 의사에게 어떻게 좀 해보라고 소리 지른다. 그 '어떻게 좀 해보세요!' 라는 말에는 안락사를 시행해 줄 것을 요구하는 뜻이 담겨 있다. 그녀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이 의사에게 그것을 바란다. 그러나 저자는 거절하며 안락사를 시행하는 자신만의 철학에 대해서 제시한다.


"나의 제 1계명은 미관상의 이유로 생명을 종결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보는 사람이 고통을 지켜보는 것이 어렵다고 해서 생명을 끊지는 말자는 뜻이다."


환자 본인이 안락사를 결정할 수 없을 만큼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기 괴로운 가족들이 안락사를 요구한다고 해서 그것을 행하는 것은 어쩌면 '살인'일수도 있다.

그래서 저자는 그것을 '미관상의 이유'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지켜보기 괴롭다는 이유로 안락사를 행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환자 자신의 확고한 의지로써 죽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절대 안락사를 허용할 수 없음을 저자는 계속해서 강조한다.


결국 말레스타인 부인의 안락사가 진행되고, 저자는 약을 주입하고 시간이 지나서 다시 병실에 돌아왔을 때 그녀의 얼굴 위에 올려진 베개를 보며 경악을 한다.

아내가 힘겹게 죽어가는 과정을 며칠 동안 곁에서 지켜보며 참다 못해 남편이 그녀를 베개로 질식시킨 줄 알고 놀랐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이해가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설명을 덧붙이자면, 죽어가는 아내를 곁에서 남편이 괴로워하며 지켜볼 수 밖에 없도록 만든 상황에 저자는 죄책감을 가지면서도 안락사를 계속 미루었던 상황이었고, 안락사를 결정한 순간에도 남편은 그것을 믿지 못해 결국은 베개로 아내를 질식시켜서 고통에서 드디어 해방시킨 것 아닐까 생각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마지막 순간에는 이토록 당사자 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이들이 참혹한 상황에 갇히게 됨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한 사람의 임종을 대하는 존엄한 행동이 담겨 있다.

'아내의 얼굴에 베개를 올려놓은 행위'

그것은 안락사를 행하는 약물을 주사한 후, 죽은 아내의 입이 힘없이 벌어지는 모습을 보고 남편이 턱을 받치기 위해서 베개를 올려놓은 것이었다. 

죽어가는 마당에 입이 벌려지든 말든 그 모습에 누가 과연 신경이나 쓸까.

나 자신의 마지막 모습은 내가 단장할 수 없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약물이 주입된 아내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마지막 모습을 아름답게 지켜주기 위해서 입이 벌려지지 않도록 한 것이다.

아내의 폐기능이 떨어지고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계속해서 곁에서 지켜봐 온 남편은 그녀의 '죽음의 순간' 에만 치중하지 않았다.

죽은 아내를 편안한 자세로 바꿔 놓고, 틀니를 다시 끼우고, 머리를 빗기고, 손을 가지런히 모아 놓고, 얼굴을 닦아주고, 입을 다물게 하려고 베개를 올려 놓은 행위들.

이미 죽은 아내의 몸을 그렇게 소중하게 다루는 남편은 흔하지 않다고 저자는 말했다.


안락사를 결정하고 그것을 행하는 것만이 존엄한 죽음을 대하는 의식이 아니다.

이미 죽은 모습을 아름답게 단장하며 한 사람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 있다.

죽음을 결정하는 문제에 관해 논의할 때, 죽음을 맞이한 한 인간의 마지막 모습을 아름답게 보살피는 정성 또한 함께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절차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것들' 또한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는 의식으로서 챙겨야 할 부분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년 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의 일이 생각이 났다.

그 때는 코로나가 나타나기 전이라서 병문안 가는 일이 지금보다는 엄격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께서 급성 폐렴으로 입원하시고, 폐암 초기 진단을 받았으나 결국 급작스럽게 폐 기능이 떨어지시는 그 모든 과정을 나는 어머니와 함께 지켜보았다.

이 책의 환자들의 죽음을 묘사한 설명들과 다르지 않았다.

폐 기능이 심하게 떨어져서 혼수상태에 빠지시고 가만히 누워계셨던 모습이 나에게 남아있는 생의 마지막 모습이셨다.

그러한 상태로 며칠을 계속 누워계시던 중 나는 잠시 할머니 댁에 들러 할머니께서 부탁하신 일을 처리하러 나갔고, 그 사이에 할아버지께서 임종하셨다.


한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정의내릴까?

저자는 그것이 참 어려운 일이라 말한다.

의학적으로 사망선고를 내리는 것 말고도 죽음의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볼 지점이 많은 것 같다.

하지만 나와 할머니가 느꼈던, 한 사람의 죽음을 체감했던 순간이 있었다.

화장터에서 가족들과 함께 대기실에서 기다리다가, 모든 과정이 끝나고 할아버지의 유골함을 보았는데 가루 속에 묻힌 어떤 물질이 보이는 것이었다.

가족들과 그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다가, 그것이 바로 인공 관절 금속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할아버지께서는 입원하기 몇 년 전에 다리 관절 문제로 인공 관절 수술을 받으셨다.

무릎 안에 들어있던 금속을 유골함에서 보게 되다니.

그제서야 비로소 한 사람의 죽음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생생하게 살아 움직였던, 빛나던 육체가 가루가 되어 병 속에 들어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우리들의 육체가 다른 무엇으로 변하는 것이, 어렸을 때 내 눈에 새겨진 죽음의 모습이었다.


병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은 어쩌면, 그것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 괴로워서 정신마저도 회피하게 된다.


그래서 누군가의 죽음을 체감하는 순간은 훨씬 더 이후가 되는 것 같다.


"제인구달은 새끼가 죽은 후에도 며칠 동안 새끼를 안고 다니던 어미 침팬지가 축 늘어진 새끼의 시체에 대고 자신의 젖을 헛되이 내밀고 있는 모습을 묘사했다. 어린 침팬지가 시체가 되었다는 깨달음이 그렇게 서서히 찾아오는 과정이, 우리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급작스러운 변화보다 더 이해하기 쉽다.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급작스러운 변화를 지각하지 못한다."


어미 침팬지의 행동이 정말 이해가 된다. 나도 할아버지가 병상에 계셨을 때 그 임종 순간에는 오히려 슬픔이나 상실감을 느끼지 못했다.

화장터에서 유골함에 든 인공 관절 금속을 보았을 때나, 장례식장에서 차를 타고 납골당까지 가는 길에 할아버지가 생전에 사셨던 동네를 창 밖으로 바라볼 때, 그 때 처음으로 울었던 기억이 난다.

누군가의 죽음을 체감하는 것은 죽음의 순간보다 훨씬 더 이후에 다가오게 된다는 걸 침팬지도 안다.

우리들의 지각과 감정 사이에 물리적인 거리가 존재한다는 걸.

그래서 지각과 감정 사이에 작용하는 것들은 불가사의이다. 알 수 없는 영역이다.


이것이 죽음을 결정하는 문제에서 작용하는 난제의 본질적인 것임을 꼭 다루었으면 좋겠다.

한 사람의 죽음을 다루는 문제에서 각자가 보고 느끼는 것 사이에 있는 괴리감이, 안락사를 결정하는 문제에 어설프게 개입하게 되면 안락사의 본래 취지는 실현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의료적, 행정적, 법적인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다.

 

죽음에 부수되는 절차들이 진행되면서 그렇게 한 사람의 죽음은 사라져간다. 



"삶을 계속하시오.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무덤까지 가시오."


저자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포기하려고 했던 환자들의 안락사 요청을 거부했다.
자신의 중요한 결정들을 남에게 미루는 환자의 안락사 요청도 거부한다.
삶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열렬히 부딪혀 본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확고한 의지만을 안락사의 결정에 있어서 허락한다.
그마저도 냉소적으로 질문을 던지며,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안락사를 행하는 자신의 고뇌와 딜레마에서 고통스러워한다.
이런 의사로서의 모습이 안락사를 행하는 사람의 진정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환자가 안락사를 요청하는 것에서 그저 형식적이나 의학적인 것만 판단한다면, 죽음에 대한 확고한 의지 같은 것은 포착할 수 없을테고, 그러한 상태에서 안락사를 행하는 것은 살인 행위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순간까지 용기내서 삶에 부딪혀 본 사람과 마지막까지 환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의지에 대해 질문을 하는 의사. 이 두 영역이 맞아 떨어질 때 안락사의 진정한 취지가 실현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역시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영역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선택권의 문제라는 걸.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안락사에 관한 논의가 좀처럼 잘 진행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죽음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끝까지 싸우다 죽는 것이 '의연한' 것일까?
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죽음을 대하는 의식'에 대해 살아있을 때 진지하게 고민을 해봐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이미 예전에 절판된 책이지만, 현재의 네덜란드의 안락사 관련 법률을 첨부해서 다시 편집되어 출간되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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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8 05: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1-28 0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넬로페 2024-11-28 1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야제님의 긴 글을 읽으며 너무 마음이 복잡해졌어요. 일단 안락사란 단어 안에 들어 있는 의미들이 사람들 각자 다르게 느껴질 것 같아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완전 달라지겠지만 이것이 또 법적인 문제와 연결되어 더 복잡해지잖아요. 한 인간의 의지로만 성취되는 일도 아니고요.
전야제님이 말씀하신 주체의 문제가 그나마 몸이 좀 건강할 때 가능한데
안락사를 결정할 시점은 그렇지 못할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요.
그때는 정신적 문제까지 있으니 더 난감해집니다 ㅠㅠ
빨리 이런 상황들이 고려되어 현실적으로 법제화되면 좋겠습니다^^

전야제 2024-11-28 12:15   좋아요 1 | URL
제가 본의 아니게 페넬로페님을 복잡하게 만들었네요ㅠㅠ 맞아요! 이 책의 저자는 환자가 안락사를 강하게 요구하는 상황에서도 그 의지만 가지고는 안락사를 쉽게 결정하지 않더라구요. 그렇기에 자신의 안락사를 결정할 수 없을만큼 의식이 사라진 상태에서 가족들이 지켜보기 괴롭다는 이유만으로 안락사를 결정하지 않고 사망이 확실하게 다가온 시점에 이르러서야 결국 결정하는 것 같더라구요. 그만큼 죽음을 결정하는 건 환자, 가족, 의료진 모두에게 어려운 일임을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어요. 네덜란드는 우리나라와 상황이 많이 다른데,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법으로 제정되기까지 서로의 이해관계를 잘 풀어나가는 일도 어려울 뿐더러, 법제화되었을 때도 그것에 순응하고 잘 따라갈지도 참 불분명해서 안락사가 법으로 딱 그 기준이 정해지는 일이 쉽지 않아 보여요. 서로의 입장을 좀 더 이해할 줄 아는 성숙한 시민의 문화가 정착되어야만 가능한 것 같아요. 제가 괜히 이 글을 써서 마음을 무겁게 만들어서 죄송해요. 조금 더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면, 저자가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인용한 것처럼 죽음은 경험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누구에게든 죽음을 결정하는 일이 어려울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 점을 잘 알고만 있다면, 어떻게 삶 속에서 그 문제를 대해야 할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페넬로페님 말씀처럼 저마다의 생각이 자신의 종착지를 결정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ㅎㅎ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그레이스 2024-11-28 14: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조력존엄사 라는 말이 있지만 저는 조력안락사라고 말합니다. 존엄인지 판단하기 어려워서요.
한번 법으로 정해지고 나면, 그에 다른 무엇인가가 추가되겠죠. 생존비용이라든지, 무연고자일 경우라든지 점점 느슨해진 틈을 타고 어떤 가치가 끼어들지 알수 없을 거라 생각됩니다.
자신을 향한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하기도 하고, 타인을 향한 칼을 자신에게도 겨누기도 하는게 인간이라서... 조심스럽네요.
의사의 고뇌는 짐작이 갑니다.

그리고 성경인용 부분에서 그 구절의
맥락은 인생은 풀과 같고 들에 꽃과 같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에게 미치는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을 인용해드릴께요.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시편 103:15-18)

이 책 읽어보고 싶네요
저도 고민하는 부분이라.

전야제 2024-11-28 15:41   좋아요 2 | URL
아ㅎㅎㅎ 감사합니다! 성경의 구절이 이 책에서 장례식 장면이 나오면서 자주 언급되는데 저 부분이 딱 저 문장까지만 인용되어 있어서 저는 굉장히 냉소적으로 해석했습니다ㅠㅠ 저자 또한 냉소적인 철학도라서 그 결을 따라가다보니, 제 글이 다소 어두울 수도 있다고 뒤늦게 생각이 드네요. 감사해요! 이렇게 아름다운 성경의 구절을 그레이스님께서 제대로 해석해주시지 않았으면 저는 정말 인생이 들꽃처럼 피었다 사라지는 존재라는 것만 기억에 남을 뻔 했네요ㅎㅎ 그레이스님의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진정 존엄한 죽음이 무엇인지, 법 뒤에 가려져 있는 개인의 권리들이 좀 더 조명되고 지켜져야 하는 것 같습니다. 눈길 조심하세요!^^

appletreeje 2024-11-30 1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Emma Kirkby가 부르는 Nulla in mundo pax sincera sine felle가 각별한 주말 아침입니다.
11월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요.ㅋ 행복한 12월 보내세요.^^ 굿주말!

전야제 2024-11-30 15:13   좋아요 1 | URL
몇년 전에 영화 <샤인>을 보면서 알게된 비발디의 칸타타인데 가사에 너무 감동받아서 잊을 수가 없더라구요.
다시 예전 프로필 사진으로 바꾸고 겨울을 맞아 서재 공간도 다시 따뜻하게 가꾸어보았습니다!
알아봐주셔서 감사해요 appletreeje님^^
10월의 마지막 날에도 꽃으로 마무리하셨었죠ㅎㅎ
벌써 12월이라니. appletreeje님도 즐겁고 행복한 연말 보내세요^^
 

최근 3주 동안 나에게는 내가 심지어 따라가기도 벅찬 무수한 변화들이 있었다.

자취를 시작한 지 1년이 조금 넘어가는 시점에서 급하게 새로운 집을 구해야만 했고,

이번에는 꼭 제대로 된, 사람이 살 만한 공간을 찾고 싶었기에 하루의 절반을 집 구하는 시간에 쏟을 정도로 신중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살게 된 나의 공간은, 너무 오래된 건물이라서 그런지 온갖 벌레들이 사방에서 출현하여 나의 방 뿐만 아니라, 같은 층의 다른 방 세입자들도 벌레가 나타날 때마다 비명을 지르곤 하였다.

한밤 중에 비명 소리가 들릴 때마다, 우리들은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또 벌레가 나타났구나!'

무엇보다 관리비에 난방비가 포함된 중앙 난방인 곳이었는데, 집주인께서 한겨울에 보일러를 잘 틀어주시지 않아서, 영하 10도 아래로 내려가는데 방 바닥이 얼음처럼 차가운 곳에서 자야만 했다. 그러고 작년 겨울을 보냈던 내가 신기할 정도였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올해 봄이 되니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나는 겨울의 혹독함을 금새 잊어버리고 다시 재계약을 했다.

그 곳에서 벗어나서 다른 집으로 이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나는 어째서인지 이동할 의지도 용기도 나지 않았다.

절망 안의 세계에 너무 익숙해지면 점점 헤어나올 수 없는 늪 속으로 자꾸만 가라앉게 된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깨닫게 되었으니.

불과 6개월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이토록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일이다.


그러던 와중에 집을 옮겨야겠다고 강력하게 마음을 먹은 계기가 바로 앞 집 세입자 분의 담배 냄새였다.

방 안에서 하루 종일 담배를 피우셔서 그 연기가 바로 앞인 내 방으로 다 들어왔다.

오래된 집이라 현관문 아래에 틈이 있어서 같은 층의 모든 냄새들이 방으로 다 들어오는 구조였다.

낮에는 창문 열고 환기라도 시킬 수 있다지만, 밤새도록 담배 연기가 내 방 안으로 가득 차서 정말 괴로웠다.

영하 15도에 육박하는 맹추위 속에서도 보일러 없이 어떻게든 버티었던 나였는데, 정말이지 담배 냄새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흡연자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방 안에서의 흡연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분이 담배를 피우시는 매일,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연기를 같이 들이마시게 되는 꼴이니.

집주인께 몇 번씩 말씀드려도 해결이 전혀 되지 않아, 나는 결국 방을 옮기게 되었다.

재계약을 한 상태라서 내가 부동산에 방을 내놓고 복비도 부담하고, 방이 나가기 전까지 월세도 내야한다는.

금전적 손실이 엄청난데도 나는 더 이상 그곳에 살 수가 없다고 판단했고, 좋은 집으로 가고자 하는 의지도 이제서야 생겼다.

10월 말부터 급하게 새로운 집을 구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꼼꼼하게 모든 조건들을 미리 확인하고 구하리라, 단단히 마음 먹었기에 잠도 제대로 못 잘 만큼 집 구하는 일에 몰두했었다.

하지만, 좋은 조건의 집들은 부동산에 연락하면 방금 계약되었다는 절망적인 답변만 들을 수 있었고, 날씨가 점점 추워지는 11월 안에 집을 구하지 못할까봐 눈물까지 났었다.

그러던 와중에, 부동산에 올라온 내부 사진은 조금 낡아보였지만 왠지 정이 가는 한 집을 발견했다.

실제로 집을 보러 가봐야 자세한 걸 알 수 있기에, 부동산에 곧바로 연락하여 아직 계약이 안 되었다면 집을 보러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세입자 분께서 아직 짐을 안 빼셔서 시간이 좀 걸린다는 내용의 답변을 들었다.

11월로 넘어가는 시기였기 때문에 나는 마음이 조급했지만, 급하게 집을 구하면 지난번처럼 또 그렇게 안 좋은 곳에서 살게 될까봐 나는 초조한 마음을 어떻게든 가라앉히고 기다렸다.

그 사이에 내가 원하는 조건의 다른 집들이 나오면 연락을 부탁드린다고 부동산 공인중개사님께 말씀도 드렸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기다린 보람이 있는걸까.

세입자 분께서 모든 정리가 끝났고, 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부동산으로부터 왔다.

떨리는 마음으로 집을 보러간 날,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나는 "여기가 바로 내가 살 곳이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배와 장판, 싱크대 수도 등 아직 수리가 안 되어 있는 상태였지만, 친절하신 집주인께서 집의 모든 곳을 거의 새 집 수준으로 교체해주셨다.

보통 월세는 들어갈 때 벽지와 장판을 매번 새로 교체해주시지 않는다.

나도 그것까지 바란 것은 아니라서 다른 조건들만 충족하면 조금 낡아도 살 수 있겠다 싶었는데, 집주인께서 정말 살기 좋은 환경으로 만들어주셔서 눈물이 날만큼 감사했다.

1년 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11월 10일에 드디어 나의 두번째 공간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일주일 간 이삿짐 정리를 하고, 가구와 책상 등 여러가지를 조립하고 배치하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보다 넓은 집이라서 이번에는 인테리어에 대한 욕심도 조금 생기게 되어, 나만의 공간으로 꾸미는 데 일주일은 걸렸다.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하여, 나는 이 글을 쓰는 오늘에 이르러서야 내가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왔다는 실감이 났다.

집을 구하기 시작했던 3주 전부터 잠을 제대로 자 본 적이 없었고, 이사를 와서도 난생 처음 내 공간을 가꾸는 일을 해보았기 때문에 거의 한 달 동안 수면 부족에 시달리다가 이제서야 잠을 깊게 청해본다.


짐 정리가 거의 마무리가 되어갈 16일 밤에, 주황색 조명의 스탠드를 켜고 책상에 앉았는데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벗어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 갇혀 있었던, 무기력했던 지난 날들이 눈 앞에 스쳐 지나갔다.

더 좋은 상황으로 나아갈 수 있었음에도 어찌할 도리 없이 의지마저도 바닥이 났었던 나였다.

그랬던 내가 새롭게 변화할 수 있었던 건, 온전히 내 스스로의 힘 만으로는 절대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더 좋은 내가 되고 싶다, 더 좋은 내일을 살고 싶다. 그렇게 차츰 의지를 갖게 될 수 있었던 건 올해 나에게 선물처럼 다가온 많은 인연과 기적같은 사건들 덕분이다.

혼자였다면 분명 나는 빛나는 꿈을 품고 있었음에도 또 무기력하게 가라앉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용기내서 내딛은 한 걸음과 그에 맞추어 나에게 다가왔던 다른 이들의 한 걸음이 만들어낸 인연들.

내가 걸어온 길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준 소중한 사람들.

내가 쌓아온 노력들이 아주 조금은 싹 틔울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따뜻한 집에서 이제서야 겨우, 나는 다시 책상에 앉아 책을 읽을 수 있고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내가 누리는 행복이 얼마나 간절했던 것인지.

아니, 상상조차도 못했던 것이었다. 더 나아질 가능성도 나는 철저히 버렸었기 때문에.


책상에 다시 앉아, 내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다시 그려보면서 행복함과 동시에 무한한 두려움이 밀려오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 <스탠바이 웬디>에서 공들여 써온 소설이 공중에 다 날아가버렸을 때, 주인공 웬디가 적은 소설 속의 한 문장이 떠올랐다.


"Captain, there is only one logical direction in which to go : Forward."

"함장님, 논리적인 결론은 단 하나 : 전진입니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는 웬디는 영화 스타트렉의 광팬이자, 작가가 꿈인 소녀이다.

소설 공모전에 출품할 소설을 빼곡히 적은 종이들이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며 꿈마저 무너져버렸을 때, 웬디는 주저앉아 다시 소설을 써나간다.

그 장면에서 나온 영화 속의 명대사이다.

모든 것이 날아가버렸고, 무너졌음에도 역시 '전진'하는 것이 정답이라니.

얼마 전에 나는 분명 이성복 시인의 <그 여름의 끝>에서 몇 차례 폭풍 속에서도 꿋꿋이 피어난 붉은 백일홍의 강인한 생명력에 대해 글을 썼었다.

내가 몇 차례 폭풍을 겪고 나니, 그것이 얼마나 힘겨운 것인지. 지금껏 내가 겪은 고통과는 또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앞으로 살면서 힘들고 괴로운 일이 얼마나 많을지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한, '전진'하는 것. 적어도 주어진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는 전진할 것임을 스스로에게 약속한다.

이것이 나에게 허락된 행복에 보답하는 길임을.


나의 새로운 공간으로 이사온 지 일주일 째 되는 17일이 마침 어머니의 생신이었다.

어머니를 위해 좋은 식당을 찾고, 어머니께서 가보고 싶다는 곳을 하루 종일 걸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춘천에 오래 머물렀으면서도 의암호, 그 멋진 호수를 제대로 바라본 건 처음이었다.

집을 구하는 여정 동안의 걱정과 눈물을 이 날에, 눈부신 호수를 바라보며 다 날려 보냈다.

흐르는 강물처럼, 내 인생도 그렇게 흘러가리라 다짐도 했다.

강물에 산산 조각이 나듯 흩뿌려진 금색의 태양빛은 언제나 아름답다.

잔상이 눈을 감아도 떠오를 만큼 강렬하게 남아있다.

자연은 태초에도, 최후에도 생명을 품어내는 거룩한 존재라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여행 중에 직접 찍은 사진을 여기에 살며시 기록해본다.



-> 관광지로도 유명한 소양강 처녀상이다. 춘천에 계속 살았음에도 이 앞에 정면으로 마주해 본 것은 처음이라 신기하다. 



->11월 중순의 추위에도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붉은 꽃이 예뻐 사진으로 남겨보았다. 푸른 강물과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레트로한 느낌으로 사진에 담겨서 신기했다.



-> 의암호 스카이 워크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마침 보트도 지나가고 있다.



->춘천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어디냐 묻는다면 '호수가 보이는 그 어디든!'이라고 답하고 싶다.

특히 노을 질 때의 호수에 비친 금빛 물결은 입을 꾹 다물게 할 정도로 아름답다.

이 날의 태양과 구름의 형상이 장관이었다.



-> 의암호 근처 <리버레인> 이라는 카페에 앉아서 찍은 풍경. 사진 속 인물은 어머니입니다^^



->부끄럽지만 어머니께서 찍어주신 제 사진도^^



-> 새로운 공간에서 만들어 본 간이 코타츠! 난방비를 줄여보고자 따뜻한 코타츠를 만들었는데 상판 밑에 히터가 없는 코타츠인데도 의외로 엄청 따뜻하다. 앞으로 내년 봄이 오기 전까지는 이 포근하고 아늑한 곳에서 책도 읽고 공부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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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11-18 06: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집 구하고 이사 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전야제님 맘에 쏙 드는 집이라 제가 더 좋습니다.
이 집에서 맘과 몸, 둘 다 따뜻하게,
대박 나시기를 기원합니다.
춘천은 저의 형님(시누이)가 사시는 곳이라 한 번씩 간 적이 있어요.
재작년에는 케이블카 탔는데, 삼학산인가요?
담엔 의암호 스카이 워크 도전해 보겠습니다.
전야제님 모습 보니 좋고요.
코타츠, 넘 맘에 들어요.
여기에서 좋은 책, 많이 읽으시길요^^

전야제 2024-11-18 06:32   좋아요 1 | URL
새로운 공간에서의 시작이 설레면서도 두렵기도 한데, 대박 기원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좋은 결과 거두어서 또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열심히 해볼게요ㅎㅎ 페넬로페님의 가족분께서 춘천에 계신다니! 넘 반갑네요. 삼악산 케이블카 사실 아직까지 못 타 봤어요ㅎㅎ 저도 다음에는 도전해보겠습니다! 매일 따뜻한 나날이라서 행복합니다ㅠㅠ 알라딘 서재 운영자님들 덕분에 독서의 세계에 푹 빠져버렸습니다. 항상 좋은 글 읽으면서 배우고 성장하는 느낌이 너무 소중합니다. 즐겁고 행복한 한 주 되시길 바랄게요^^

2024-11-18 0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1-18 2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 시인선 86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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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그 여름의 끝>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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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시인의 <그 여름의 끝>은 1990년 출간된 그의 세번째 시집이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출간된 이 시집은 사랑에 그리움이 섞인 색채로 빛나고 있다.

이성복 시인의 <서해> 라는 시를 아마 수능 공부를 했던 수험생들은 다 알 것이다.

EBS 수능특강 문학에 실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계실 자리를 위해 가보지 않은 곳을 남겨두어야 할까 봅니다

 내 다 가보면 당신 계실 곳이 남지 않을 것이기에" 라는 시 속의 문장에 흠뻑 빠졌던 적이 있었다.


시를 읽고 어떠한 사랑이 떠올랐다.

당신의 자리를 마련해두고, 그 공간을 마치 지켜주는 듯 환히 밝혀주는 등대같은 사랑.

그러나 등대는 바다 한 가운데서 자신은 어둠에 감추고, 늘 외롭게 존재한다.

바다의 방문객들을 밝혀줌으로써 자신을 유일하게 드러내는.

모두가 그것의 빛을 따라갈 때 등대는 또 모두와 멀어지게 된다.

그의 빛은 언제나 만남과 동시에 이별을 고한다.

자신의 빛이 모두와 인연을 맺게 하지만, 그들이 안전하게 항해하는 뒷모습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숙명.

그것이 등대의 사랑이다.

그러니 등대는 매 순간 사랑과 그리움에 마음이 들끓을 것이다.

그리움은 사람을 얼마나 무력한 존재로 만드는 것인지.


서해라는 시에는 등대라는 단어와 이미지는 등장하지 않지만, 나는 시를 읽으며 등대의 사랑이 느껴졌다.

바다 한가운데 뿌리 박혀, 움직일 수 없으면서도 사랑과 그리움의 애달픈 감정에 끝없이 파도치는 마음.

그것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인생.

거룩하면서도 우아하고 아늑한 품이 느껴지는 사랑이다.


<그 여름의 끝>에 실린 마지막 장의 시의 제목 또한 바로 <그 여름의 끝>이다.

이 시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이다.

시를 읽으면서 백일홍의 붉은 빛깔이 무수한 비바람을 이기며, 중력을 거슬러 위로 솟구치는 영상이 눈 앞에 계속해서 그려졌다.

거센 바람에도 날카로운 빗방울에도 지지 않는 그 꽃은,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다고 한다.

넘어져도 무너져도 그럼 그것대로, 그 자리에서 다시 기어오르고 달라붙는 끈질긴 생명력.

인간의 생에 대한 의지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인간은 그 아름다운 백일홍의 꽃보다는 더 비참하고 처절한 외양을 갖고 있다.

고통과 두려움 속에 잠식된 인간의 민낯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어떻게든 삶 쪽으로 나아가려는 투쟁은 멀리서 보기엔 비장한 아름다움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품고 있는 인간의 겉모습은 심지어 자신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을 만큼 초라하게 느껴진다.

생과의 사투는 그것의 웅장한 이미지에 비해 인간에게는 끝없이 처량함을 느끼게 하면서, 때로는 굴욕적인 모습을 보이게 만든다.

비극이란 것이 나 자신에게서 마지막 남은 아름다움까지 모조리 빼앗아 가는 걸,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찰리 채플린이 말한 바로 그대로이다.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은 다르게 생각한다.

그 처량하고 초라한 모습이 과연 비극의 색채만 띠고 있을까?

바닥에서 허공으로 수없이 기어오르는 의지, 단 한번 웃기 위해 처절하게 움직여야 했을 그 부단한 노동이 비극으로 보이는가?

아니, 나에게는 그것이 희극으로 보인다.

살아있는 것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생에 대한 눈부신 의지 뒤에 감춰진 끝없는 눈물과 인내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면,

그 삶이 희극으로 보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 여름의 끝>에서 백일홍의 생명력이 희극으로 보인 건, 그가 아름다운 외양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다.

몇차례 폭풍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아서 그의 삶이 희극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절망을 끊어내었기 때문에 희극인 것이다.

비바람 속에 무너져 매달리고 타오르는 자신의 모습이 비록 굴욕적이라 할지라도,

스스로는 그것을 희극으로 보았기 때문에 가까이에서도 희극인 것이다.


오히려 그 장엄한 사투를 밖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이들은 그것을 비극이라 볼 것이다.

하지만 기꺼이 안으로 들어가 삶을 함께 살아본다면, 멀리서 보기에 초라하고 비극이었던 것들이 얼마나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생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의 삶과 그 세계에 기꺼이, 기쁘게 함께 해보길 바란다.

힘겹게 나아가는 자신의 삶을 부디 희극으로 보았으면 좋겠다.

의외로 사람들은 타인의 삶을 아름답게 볼 줄 알면서도 자신의 삶은 아름답게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희극으로 볼 수 있게 된다면, 그게 진정 행복한 삶이 아닐까?

자신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차가운 현실 속에서, 부디 이 시 속의 백일홍처럼 자신의 빛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다시 말하고 싶다.

"삶은 멀리서 보면 비극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희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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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전쯤, 9월 25일 오전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 한 통과 연락을 부탁드린다는 문자가 와 있었다.

전날 새벽까지 공부하고 잠든 상태라 점심 때 겨우 일어나서 확인을 하게 되었다.

사실 9월 초에 공모전에 글을 제출했었고, 그 공모전의 주최기관 전화번호였기 때문에 나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마음으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000님, 최우수상에 당선되셨습니다."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는 눈물이 흘렀다.

10년동안 참가했던 수많은 글쓰기 공모전에서 처음으로 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책 읽는 것을 정말 좋아해왔고, 그래서 글쓰기 대회에도 부지런히 나갔었다.

글을 읽고 쓴다는 것에서 무한한 자유로움을 느꼈지만, 그것과 무언가를 써서 인정받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하고 싶은 일과 잘 하는 일의 간극은 내가 절대로 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국어 과목에서 전교 1등을 하고 국어 선생님께서 문제집을 선물로 주셨던 기억이 있다.

국어를 좋아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글을 읽고 쓰고 이해하는 즐거움을 그때도 나는 알고 있었나보다.

그러던 어느날, 시를 써서 그림과 함께 시화 전시회를 하는 행사가 있었고 그 국어 선생님께서 내가 쓴 시를 읽고서는,

"너는 국어는 잘 하는데 시는 참 못 쓰는구나." 라고 하셨다.

나는 시를 너무 좋아하고, 정말 열심히 썼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그렇게 못 쓴 시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때 마음의 상처를 조금 받았지만, 다른 친구들의 시를 읽어보니 선생님께서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알 것 같았다.

당시 우리 학교에서 글 잘 쓴다는 친구들이 몇 있었고, 그들의 시는 나 또한 감동받을 정도로 마음을 움직였다.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다른 사람들이 쓴 글을 읽고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를'


이것은 '작가' 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쓴 책을 읽는 것과는 또 다른 일이다.

네이버 블로그나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등 각종 플랫폼에 어떤 이름 모를 이가 쓴 개인적인 글들을 읽으면서 무언가 감동에 벅차오르는 느낌을 받은 적이 셀 수 없이 많다.

누군가의 진실한 생각과 그 안에 들어있는 아픔, 불안, 걱정, 희망, 사랑 등에서 책을 읽는 것에서는 느낄 수 없는, 한 인간의 생생한 기록을 포착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스쳐지나가는, 이름 모를 이들의 글이 왜 그렇게 좋은지.

오늘 살아있었다는, 잘 살아내었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듯한 하루의 기록과 글.

그래서 나는 유독 수필이라는 장르를 좋아하는건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의 경험과 그것에서 느낀 것들이 글로 표현될 때의 반짝반짝함.


색을 특정할 수 없는 찬란한 빛깔을 평범한 사람들의 글에서 느낄 수 있다면, 당신은 분명 행복할 것이다.


그렇게 나는 일상을 포착하는 글을 혼자만 알 수 있는 곳에 오랫동안 써 왔다.

그것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글이 된다는 건, 내게 있어 그 어떤 상보다도 가치가 있는 일이다.

대단한 글도 아니고, 그저 일하면서의 경험과 그것에서 느낀 것들을 글로 써낸 것인데.

공모전에 제출한 글을 끝까지 읽어주셨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리고 모든 행사가 끝난 지금은, 이 공모전으로 인해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따뜻한 기억을 선물해주신 춘천시장애인종합복지관의 직원분들께 감사한 마음이다.

공모전의 작품을 발표하는 소통 콘서트를 준비하는 동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새로운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다.

저마다의 글을 무대 위에서 발표하는 것이 마냥 떨리기만 한 일인 줄만 알았는데,

각자의 삶 속에서 진심으로 대하는 것들을 글로 표현하고 사람들과 나누는 무대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처음 알게 되었다.


학교 다닐 때 매년 있는 학교 축제 때 무대 위에서 각자의 매력과 재능을 한껏 펼치는 친구들을 보면서, 나는 무한한 동경을 가졌었다.

그때의 나는 소심하고, 내성적이라서 무대 위에 올라가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무대 위에서 아름다운 곡들을 연주하고, 멋진 춤을 추고, 화려한 공연과 연극을 선보여주는 친구들을 보면서 참 부러웠다.

공부 잘 하는 것보다 그렇게 자신만의 다채로운 꿈들을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친구들이 훨씬 더 멋져보였다.

그랬던 내가 서른이 넘어 무대 위에서 내가 쓴 글을 발표하는 것은, 중학생 때의 나는 전혀 몰랐던 일이다.

비록 지방의 작은 공모전이고, 작은 행사였지만 무대 위에서 각자의 진솔한 이야기들을 말하는 시간 동안,

나는 감동이 흘러넘쳐서 '언젠가 내가 할머니가 되어서도 이 순간을 여전히 기억할 것만 같아' 라고 생각했다.


10명의 공모전 수상자분들과 함께 무대에서의 발표를 준비하면서, 중학생 때의 학교 축제날이 계속 떠올랐다.

다같이 하나의 무대를 구성하기 위해 떨리고 긴장되는 마음으로 발표 대본을 가다듬고 리허설을 하면서,

지금까지 내 삶에서 전혀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것을 만나게 되었다.

비록 긴장되고 이 무대가 처음이지만 그 떨림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모든 순간들이 아름다워보였다.

정말 한 사람, 한 사람의 발표 때마다 넋 놓고 바라보았던 것 같다.


나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과 나눈다는 것.

인간과 인간이 나눌 수 있는 모든 것들 중에 그 대상이 '글'이 될 수 있음을 제대로 경험하게 되었다.

나의 생각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모두와 함께 듣고 느끼고 나누는 것이 된다는 것.

줄곧 혼자서의 꿈과 역량을 키우고 품어온 내게 이런 소중한 경험을 선물해준 10명의 수상자분들께 정말 감사드린다.


소통 콘서트에서의 발표가 끝나고, 집에 와서 수상 작품집을 읽었다.

다른 분들의 글을 하나도 빠짐없이 읽으면서 눈물이 흘렀다.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수필이 바로 여기에 있잖아.


자신만이 살아낼 수 있는 삶에서 포착한 생생한 감동과 진실한 마음.

자신의 삶을 공동체 속에서 예쁘게 가꾸어나가는 용기와 따뜻함.

세상과 연결되려는 강한 의지와 발걸음.

살아있다는, 살아내려는 무한한 생명력.

세상 모든 시에서 말하고 있는 것들.

그것들이 모두 수상자분들의 글에 담겨있었다.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들의 힘찬 날갯짓이 계속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 날의 감동을 가슴 깊이 새긴다.


*소통 콘서트를 진행하셨던 이용석 아나운서님께 정말 감사드린다.

10명의 수상자들의 글과 그림을 현장에서 처음 접하시는 것일텐데도, 모든 분들의 발표가 정말 토크쇼처럼 편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질문 하나하나 세심하게 꺼내주셨다. 수상자분들의 나이대가 정말 다양해서 초등학생도 있었는데 아이가 부끄러워 하면서 발표를 머뭇거려도 민망하지 않게 아이를 기다려주시고 아이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던져주시는 등 정말 베테랑 아나운서이셨다.

사실 나는 심장이 터질 정도로 무대 위에서 발표하는 것이 너무 떨렸는데, 이용석 아나운서님께서 정말 꽃보다 더 활짝 웃으시면서 함께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응해주셔서 그래도 발표를 잘 마칠 수 있었다.

발표자들의 발표내용을 현장에서 즉각 듣고 적절한 질문을 바로 생각해서 말하는 능력이 정말 대단하신 것 같다.

진행을 정말 잘 해주셔서 소통 콘서트가 더욱 빛이 났다. 좋은 곳에서 활약하시길 응원합니다!



->이 작품집에는 수상하신 분들의 작품 뿐만 아니라, 수상하진 못했지만 참가하신 분들의 작품도 실려있다.

"당사자, 가족, 이웃으로 더불어 살아가는/살아가기 위한 이야기" 라는 이번 장애인식 공모전의 취지에 정말 걸맞는 것 같아서, 참가한 모두의 이야기를 실어주신 배려에 참 따뜻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들을 다 간직할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ㅠㅠ 



->공모전 수상자분들의 작품을 이렇게 2025년 달력으로 제작해주셨다. 우리들의 이야기로 2025년을 시작할 수 있음에 정말 감사드린다. 단순히 공모전에 참가한 것의 의미를 넘어,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주셨다. 2025 달력은 안 사도 될 것 같다. 여기에 실린 모두의 이야기를 2025년에 두고두고 새겨야지!



->모든 글과 그림이 감동이었지만 이 그림이 하고 있는 말은, 정말 그림만으로도 깊숙히 와 닿았다. 똑같은 사과인데 비장애인이 건네는 것과 장애인이 건넬 때의 차이와 편견. 그것이 너무 아프게 느껴진다. 편견은 언제나 시시각각 깨부수어야 할 것이지만, 인간은 자신이 직접 경험해보기 전까지는 온전히 그 고통과 감정을 느끼는 것이 불가능한 존재인 것 같다. 그러나 전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노력해서 바꿀 수 있는 것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장애인식개선을 주제로 다양한 교육이 진행되고 있고, 이번 공모전도 그러한 취지의 일환이다. 나에게는 별 일 아닌 것이 장애인에게는 세상 전부인 것임을. 자신의 소중한 것들이 부정되지 않고, 왜곡되지 않는 세상을 꿈꾼다. 그것은 장애인에게도, 비장애인에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존중받는 것, 존중하는 것. 



->공모전 시상식에서 준비해주신 꽃다발. 너무 예뻤고, 꽃다발까지 주실 줄은 전혀 몰랐기 때문에 너무 감사했다.

곧 시들어버릴 것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정도였다ㅠㅠ



->오전에 리허설이 끝나고 행사 시작 전 점심 식사 때, 강대 정문에 새로 생긴 '단편'이라는 카페에 갔다.

단편이라는 이름이 너무 시적이고 예뻤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환한 햇빛을 맞이하며 엄마랑 함께 발표할 대본을 연습했다.

좋은 추억으로 남게 될 것 같다.



->행사가 있었던 강원대학교 백령아트홀 주변의 꽃집 앞에 이렇게 낙엽을 하트로 모아 놓았다.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하면서 사진을 찍고선 바로 꽃집에 들어가 주황색 카네이션 3송이를 포장해왔다.



->그렇게 즉흥적으로 구매하게 된 주황색 카네이션 꽃다발.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에게 주는 꽃을 산 것이라서 기분이 참 신기했다. 그러나 더욱 신기했던 사실은 이 다음날, 알라딘 어플에서 이진명 시인의 '젠장, 이런 식으로 꽃을 사나' 라는 시가 오늘의 시로 소개되었다는 것. 시의 일부를 소개한다.


"하긴 부처님은 항상 빙그레 웃고 계시더라. 부처님, 다 보이시죠, 꽃 사는 이 미물의 속. 그렇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꽃이잖아요. 부처님도 예뻐서 늘 무릎 앞에 놓고 계시는 그 꽃이요. 헤헤, 오늘은 나한테 그 꽃을 내주었다 생각하세요. 맘이 맘이 아닌 중생을 한번 쓰다듬어주었다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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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24-10-31 09: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야제 님! 장애인식개선공모전 최우수상 수상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소통 콘서트 이야기도 너무나 의미 있고 마음의 공명을 울립니다. 노란 은행잎 하트도 너무 좋구요~
저는 29일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 이태원 참사 2주기 추모미사에 다녀왔습니다. 사람과 사람들 마음이 이어지는 시간.
‘그래서 춘천에 삽니다‘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이진명 시인의 ‘젠장 이런식으로 꽃을 사나‘~ 저도 그래서 오늘 꾸까에서 꽃이 옵니다.ㅋㅋ
10월의 마지막 날이, 전야제 님 글로 등불처럼 환해졌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전야제 2024-10-31 12:45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참가한 공모전 중에 처음으로 받은 상이라서 너무 얼떨떨하고 신기하고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ㅠㅠ 맞아요. 저도 29일 소통 콘서트였는데 그날이 마침 이태원 참사 2주기라서 전국 곳곳에서 추모 행사가 있었던 걸로 알아요. 함께 서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이 정말 중요하구나라는 걸 이번에 처음 경험했습니다. 상 받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고 들을 수 있는 경험이 너무 좋았어요! 꽃으로 행복해지는 시간ㅎㅎ 10월의 마지막 날을 꽃으로 마무리하신다니 정말 멋집니다^^ 이진명 시인의 시 넘 유쾌해요. 행복한 11월 보내시길 바래요ㅎㅎ

2024-11-07 0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1-07 1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넬로페 2024-11-07 1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전야제 2024-11-07 21:2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아직 알라딘 서재에서 글쓴지 얼마 안되서 낯설지만 멋진 글 올려주시는 페넬로페님 서재를 알고는 있었는데 조심스럽게 친구신청했습니다ㅎㅎ 좋은 글 읽으러 자주 방문할게요^^

그레이스 2024-11-07 20: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닉네임도 멋지신 전야제님!
공모전 당선 축하드려요!

전야제 2024-11-07 21:2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ㅎㅎ 그레이스님 서재는 박물관 같아요. 그레이스님의 멋진 여행과 고전 리뷰들 공부하는 마음으로 하나씩 읽겠습니다. 부끄럽지만 친구신청했습니다.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해요^^

그레이스 2024-11-08 15:05   좋아요 1 | URL
친구신청 감사합니다.
넘 반갑구요
 
매거진 피치 magazine Peach 04호
피치마켓 편집부 지음 / 피치마켓 / 2024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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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출판사의 홍보가 아닌, 제 개인적 호기심과 구매로 쓴 것입니다. 발달장애인의 언어 학습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관련 자료를 찾다가 알게 된 잡지인데, 많은 분들이 교육 자료로 활용하시면 좋을 것 같아서 추천합니다.



#언어와 사람 사이의 틈을 메꾸는 노력, 느린학습자를 위한 매거진 <피치 Peach>


혹시 '읽기 쉬운 책'이라는 용어를 들어보신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읽기 쉬운 책이란, 발달장애인의 문해력 성장을 위해 쉽게,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기존의 책을 다시 재구성해서 만든 책입니다.

기존의 일반 도서들은 문장이 길고, 단어가 어렵고, 발달장애인의 문해력 수준에 따라 접근하기에 어려운 도서들이 대부분이라서 다시 문장을 간결하고 쉽게 가다듬고, 어려운 단어를 쉬운 단어로 바꾸어서 재구성하는 작업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는데요.

2023년 국립장애인도서관에서 처음으로 읽기 쉬운 책을 출간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전국 공공도서관에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작년에 도서관에 근무할 때 저희 시립도서관에도 읽기 쉬운 책이 어린이 도서관에 비치되었는데요,

발달장애인을 포함해서 언어를 통한 이해와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 다양한 사람들을 '느린학습자'라고 합니다.

저는 그동안 책을 읽고 그 세계를 이해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정도로 누구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발달장애인을 위한 책을 따로 제작해야 할 만큼, 느린학습자들의 언어 이해는 그들에게 얼마나 어렵게 다가오는 것인지를 도서관에서 근무하면서 처음으로 생각해보게 되었는데요.

제가 어렵지 않게 읽었던 책들이 발달장애인에게는 얼마나 힘겨웠던 것일지, 또 벽이라고 느낄만큼 넘을 수 없던 것일지 생각해보니 그동안의 제 독서 생활과 가치관에 대해 반성하게 될 만큼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나에게는 당연하게 이해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절대로 이해되지 않는 것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바로 우리가 언어를 받아들이고 소통하는 모든 관계의 시작점인 것 같아요.

발달장애인에게는 언어를 이해하고, 그것으로부터 학습하고, 생활에 적용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보통 사람들보다 굉장히 많이 힘겹고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고나서, 그럼 '어떻게 언어와 책을 이해하고 학습할 수 있을까?' 라는 물음에 답을 찾기 위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과 세상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행복함은 글을 읽고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나 자신을 지키고, 내가 스스로 나의 일들을 결정해나가고, 주체적으로 당당하게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것도 바로 책을 읽고, 그 속의 언어와 세계를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발달장애인이 독서 문화 생활을 어떻게 접근하고 즐길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고민해보게 되면서, 그들을 위한 교육 컨텐츠에 대해 궁금해졌습니다. 

역시나 저는 궁금한 것이 생기면 책에서 답을 찾는 사람이기에, 다양한 책을 검색하다가 느린학습자를 위한 잡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전 잡지를 너무 좋아해서 어렸을 때 잡지 회사에 취직하고 싶다는 생각도 한 적이 있었답니다.ㅎㅎ

너무나도 예쁘고 멋있는 사진들과 심장에 확 꽂히게 만드는 칼럼들...

잡지에도 다양한 주제의 분야가 존재합니다. 제가 주로 읽었던 잡지는 패션지와 문학 관련 잡지들.

하지만 발달장애인을 비롯한 느린학습자를 위한 잡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정말 저에게는 감동과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글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이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잡지가 있다니.

이런 혁명적이고 따스한 책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이 들었습니다.


매거진 피치 Peach는 '피치마켓'이라는 회사에서 만든 느린학습자를 위한 교육 잡지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모든 문장이 간결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어들로 글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누구든지 글을 읽고 실생활에서 적용할 수 있도록 각종 정보와 지식을 재미있게 전달한다는 점이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장점입니다.


제가 구매한 매거진 피치 4호는 주제가 '여행'입니다.

'사람들은 왜 여행을 떠날까요?'라는 질문에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바닷가에 놀러가서 수영하기 전에는 어떤 것을 준비해야 되는지, 여행 중에 갑자기 아프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행 중 길을 잃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행계획표는 어떻게 짜는지, 여행 경비는 어떻게 계산하고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필요한 돈은 어떻게 계산해야 하는지, 여행이 끝난 후에 그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 등 다양한 상황과 삽화를 제시하면서 많은 질문들을 던지고 그것에 대해 답해보는 과정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행을 하는 이유와 '나는 언제 행복한가요?'라는 질문을 함께 생각해보게 만든다는 점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형식적인 여행이 아니라 각자가 스스로 어떤 여행을 하고 싶은지, 또 그것으로 어떻게 행복을 느낄지 읽는 사람에게 생각해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책이라는 매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게 가슴 깊이 느껴집니다.

단순하게 정답과 지식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주요 독자인 느린학습자들이 함께 이 책에 참여하고 현실에서 적용해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학교 밖에서의 교육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여행이 다르고, 자기만의 방법으로 여행하면서 행복을 느낀다고 언급하면서, '나는 어떤 취미가 있나요?' 라는 질문을 던지는 부분도 정말 좋네요. 


그리고 혹시라도 어려울 수 있는 단어가 나오면 쉽게 풀어서 그 뜻을 알려주는 부분들이 정말 세심합니다.

당일치기 여행이라면 '당일치기'의 뜻은 무엇인지, 1박 2일 여행에서 '1박 2일'의 뜻은 무엇인지 쉽게 설명해줍니다.

실제 여행 후기를 소개하면서 그 과정들을 하나하나 쉽게 풀어내면서 다양한 상황에서 필요한 질문이 함께 제시됩니다.

이렇게 실제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질문을 하고 그 답을 생각하는 과정 자체가 언어를 이해하고, 학습하고, 현실에 적용하고, 세상을 다양한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교육'의 방법인 것 같아요.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저도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깐요.


그리고 또 인상 깊었던 부분인데, 이번 4호의 주제인 여행과 관련지어서 시 한 편을 소개하는 점이 정말 좋았습니다.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시를 소개하고, 그것에 대한 질문들이 역시 등장합니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글에 참여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흥미로운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자, 문해력 성장의 본질이 담겨 있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언어를 단순히 읽고 그 뜻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나만의 답을 생각해볼 수 있도록 계속 유도하고 있어서 매거진 피치가 교육용 컨텐츠로서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를 읽고 실제로 다른 친구들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보여줌으로써, '나는 이렇게 생각해' 라고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을 열어준다는 점이 참 좋습니다.

단순히 질문만 제시하면 독자들이 질문만 읽고 끝날 수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를 보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더 용기내서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 세심하게 구성된 내용들에 감동합니다.



대안학교 선생님의 자전거 국토종주 후기를 소개하는 과정도 역시 쉽고 간결한 문장으로 하나하나 차근차근 흘러갑니다.

마지막에 '힘들었지만 고개를 잘 넘은 것처럼 앞으로 살면서 어려운 일이 생겨도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라는 선생님의 느낀 점을 제시하면서, '어려운 일이 생겨서 힘들었던 적이 있나요?' 라는 질문이 나오는데, 이런 것들을 함께 답해보면서 서로의 힘든 기억을 나누고 이해하는 좋은 시간이 될 것 같아요.

이 책은 혼자 읽어도 좋겠지만, 또래 친구들과 함께 읽거나 집단에서 독서가 행해지면 학습 효과가 훨씬 올라갈 수 있어서 다양하게 활용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양한 나라의 음식을 소개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이것은 '잡지'라는 매체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라서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라따뚜이는 먹어본 적도 없고, 그것에 대한 지식도 없었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새로운 것을 접하는 느낌이 무엇인지 새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QR코드가 있어서 라따뚜이를 만드는 영상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심한 배려 진짜 최고입니다!



피치 4호는 여행이 주제이기에 여행지를 소개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단순히 소개에서 그치지 않고, 그 장소의 특징인 '보라색' 을 주제로 다양한 생각을 해보게 한다는 점이 잡지로서의 매력과 교육 컨텐츠로서의 기능을 동시에 하고 있네요. 구성이 정말 알찹니다.


그리고 책의 끝에는 여행에 앞서 무엇을 챙겨야 할지, 짐은 어떻게 챙겨야 하는지 등에 대한 정보를 알기 쉽게 하나하나 실제 사진을 보여주면서 설명하는 부분이 너무 유용합니다. 

여행을 하기 전에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짐을 챙기는 것인데, 보호자가 알아서 다 챙겨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필요한 것들을 직접 생각하면서 스스로 짐을 챙길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의 본질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매거진 피치가 교육 컨텐츠로서 얼마나 훌륭한지 감동하면서 읽느라 벌써 새벽이 다가오네요.ㅎㅎ


언젠가 국립장애인도서관을 소개하는 글을 보았는데, 이런 문구가 있더라구요.

"모든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책과 도서관을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국립장애인도서관"


똑같은 내용의 글과 책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습니다.

발달장애인을 비롯한 느린학습자에게는 언어를 읽고 이해하는 것에 다른 사람들보다는 좀 더 긴 시간과 다양한 방식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모두가 인식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들이 그들에게는 벽으로, 두려움으로 느껴질 거에요.

이처럼 언어와 사람 사이에는 '틈'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을 메꾸려는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동안은 이 틈이 무시되어져 왔을지도 모릅니다. 저 또한 언어를 이해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의 입장에서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니깐요. 부끄럽지만 그렇기 때문에라도 지금부터 느린학습자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공부해보려고 합니다.

그런 와중에 매거진 피치를 알게 된 건 정말 행운입니다. 이 책으로 인해 앞으로의 구체적 진로도 결정할 수 있었으니깐요.

좋은 책 만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많은 분들에게 반드시 도움이 될 거에요.

모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글을 읽고 이해하고 세상 속에서 주체적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 피치마켓에서 운영하시는 공간이라고 합니다. 쉬운 글이 있는 도서관이라니. 언어와 사람 사이의 간격이 이렇게 차곡차곡 메꾸어지는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서울가면 꼭 방문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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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24-10-26 08: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의미하고 멋진 리뷰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좋은 하루를 시작합니다.^^
피치마켓에서 운영하시는 공간, 저도 시간 날 때 방문해 봐야겠어요~
라이브러리 피치, 대학로에 있어서 더욱 반갑네요~^^
즐겁고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전야제 2024-10-26 09:29   좋아요 1 | URL
오늘도 이렇게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양한 독서 문화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은데 서울 사시는 분들은 부럽습니다.ㅎㅎ 저는 춘천에 살아서요. 다음에 서울 여행으로 라이브러리 피치 꼭 들리려고 합니다. 혜화역 대학로는 예전에 연극보러 자주 갔었는데 이런 도서관이 있는 줄 이제야 알았어요. 아마 최근에 생긴 것 같아요! appletreeje님의 노랑무늬영원 리뷰 읽었는데 댓글다는 곳이 아무리 찾아도 없는 것 같아서 좋아요만 눌렀어요.ㅎㅎ 저도 얼마전에 구입해서 아직 읽기 전인데 다음 리뷰는 노랑무늬영원을 읽고 써보려구요. appletreeje님이 올려주신 시에 대한 글들 하루 한 편씩 잘 읽고 있어요. 수필집 내셔도 좋을만큼 너무 담백하고 좋은 글들이라서 읽을 때마다 따뜻한 위로가 됩니다^^ 행복한 주말 되세요!!

appletreeje 2024-10-26 09: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춘천 사세요?^^ 저 춘천 너무 좋아하는 곳인데요~옛날에 카페 이디오피아에서 해질 때까지 만화 그리며 놀았던.ㅎ
춘천에는 ‘망고‘님도 사시는 곳이라 춘천이 더욱 좋아집니다! 제 글들은 그냥 낙엽 한 장일 뿐입니다.ㅋ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굿데이!!!

전야제 2024-10-26 15:04   좋아요 1 | URL
우와 만화 그리세요?ㅎㅎ 저 어렸을 때부터 만화책 정말 좋아해서 많이 읽었어요. 춘천에도 역시 서재 운영자님들이 살고 계시는군요ㅎㅎ 낙엽 한 장이라니, 아니에요. 푸르른 나무같은 글이에요!^^

appletreeje 2024-10-26 15:24   좋아요 1 | URL
아주 옛날에요.ㅋㅋ 낙엽 쓰는 사람을 고운 눈빛으로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야제 님, 좋은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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