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0일이 결혼기념일이었다. 내가 무슨 기념일이라고 요란을 떨며 보내는 성격도 아니다 보니 13년이 될 때까지 특별하게 결혼기념일을 챙긴 기억은 없다. 더구나 결혼을 추석 무렵에 해서 시댁에 오가는 중이거나 설거지를 하며 보낸 날이 대부분이었다.
이번 추석은 10월에 멀찍이 떨어져 있고, 마침 주말에 내려온 남편이 완도를 떠나기 전에 꼭 한 번 가자고 했던 조도 이야기를 꺼냈다. 진도군에 속해 있으면서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 지역인 조도는 완도 살 때 아니면 일부러 찾아가기 어려운 곳이라며. 먼 길 온 남편에게 좀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그래, 내일은 결혼기념일인데 하는 마음이 겹쳐 토요일 점심을 먹고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명량해전이 있었던 울돌목 근처에서 놀다 진도 팽목항에서 출발하는 마지막 배를 아슬아슬하게 타고는 조도로 향했다. 팽목항은 2년 전 진도에 왔을 때 한 번 들른 적이 있다. 바로 저 항구에 서서 조도를 바라보며 사진도 찍고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다도해의 진수를 느끼려면 조도에 꼭 가 보아야 한다고...
6시에 출발하는 마지막 배를 탔기에 바다로 떨어지는 일몰을 볼 수 있었다. 진도에서 가장 낙조가 아름다운 곳은 세방낙조라고 했지만 배에서 바라본 낙조도 아름다워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우리가 타고 온 배가 팽목항을 출발한 지 40분 만에 조도에 닿았다. 섬으로 들어오는 마지막 배고 여름 휴가철도 다 지난 때라 배 안은 썰렁~ 물론 여행자 차림은 우리 가족뿐이었다. 그런데 난 이렇게 한적하게 하는 여행이 더 좋아라.
조도항(어류포) 입구의 풍경. 배에서 내리면 여객선 매표소가 왼쪽에 있고, 오른쪽에는 국립공원 다도해 서부 사무소(목포에 있음) 조도 분소가 있다. 사무소 뒤로 보이는 붉은색 건물은 우리가 묵은 여관이고.
국립공원 조도 분소의 모습. 남편이 소속된 사무소는 아니지만 국립공원이라는 간판만 보아도 기분 좋고 고향에 온 것 같다. 사무소 앞에 있는 자전거는 여행하는 이들이 원하면 언제든지 무료로 빌려준다고 한다. 자전거를 타고 하는 조도 여행도 즐거울 것 같다.
우리는 조도에 도착하자마자 국립공원 사무소 뒤에 있는 산해장이라는 여관에 짐을 풀었다. 변변한 식당 하나 없는 섬이라는 이야기는 미리 듣고 왔지만 시간에 쫓겨 아무 준비도 없이 섬에 들어온 우리. 배고프다는 아이들의 성화에 여관에서 물어 보니 여관 아래로 가면 식당이 하나 있다고 알려주었다.
식당에 들어서니 탁자가 두 개 있었는데 그나마 하나는 짐이 잔뜩 쌓여 있어서 정작 손님이 앉을 수 있는 탁자는 딱 하나였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망설이는데 좀 무섭게 생긴 주인 아줌마가 "밥 먹게?" 이러는 바람에 나가지도 못하고 그냥 주저앉고 말았다.
우리는 해물탕 먹고 싶다고 했는데 메뉴도 아줌마 마음대로, 반찬도 밥도 모두 아줌마 마음대로 내놓고 거기다 소주까지. 술에 약한 나는 소주는 정말 마시고 싶지 않았는데 이미 병을 따고 건배를 외치는 아줌마 땜시 나도 연달아 소주 석 잔을 마시는 쾌거를... 그리고 그후 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소주 석 잔에 거의 기절 상태에 이른 나는 남편한테 기대어 여관으로 돌아왔고 아이들이 뭐라뭐라 하는 소리를 들으며 꼬로록... 결혼기념일을 맞이하여 아이들과 파티도 좀 하고 싶었는데 그 주모(?) 아줌마 땜시 모두 망했다.
일찍 잔 덕에 새벽 5시 반 무렵에 잠이 깨어 창밖을 내다 보니 하늘이 붉어져가고 있어 얼른 카메라를 챙겨 들고 나왔다. 야, 일출이다~
곤히 자고 있는 식구들을 깨우기가 미안하여 나 홀로 부두로 나와 붉디 붉은 기운이 바다를 물들이고, 하늘을 물들이고, 구름을 물들인 후 해가 쑤욱~ 떠오르는 걸 지켜보았다. 자연이 연출하는 화려한 풍경 앞에 사귄 지 얼마 안 된 연인이라도 마주한 듯 가슴이 설레였다. 남편 깨워서 같이 나올 걸 후회스러워라.
아침 먹으러 그 아줌마네 식당으로 또 가기가 싫어서(그 아줌마 아침부터 술 먹자고 할까 무서워!) 가게에서 컵라면을 사다가 먹은 후 하조도 등대를 보러 갔다.
하조도 등대는 올해로 등대 설치 100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하지만 원래 모습은 다 사라지고 몇 년 전 지금의 모습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았다고.
날씨가 안 좋을 때 등대 불빛 대신 길잡이 역할을 해주는 여러 가지 도구들.
하조도 등대에서 바라본 다도해 풍경. 점점이 섬이 보인다. 하지만 아직 다도해의 진수를 느끼기엔 이르다.
벤치에 앉아 바라본 전망대 올라가는 계단과 하늘도 참 예쁘다. 전망대에 올라가면 꼭 하늘 끝에 닿을 것만 같다.
햇살이 비친 바다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울돌목 만큼이나 물살이 센 바다에 금가루가 출렁이는 듯했다.
하조도 등대에서 내려온 우리는 국립공원 사무소에 들러 안내해줄 직원 강현 씨와 함께 상조도로 향했다. 이 조도 대교는 하조도와 상조도를 연결하는 다리로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설치했다고 한다. 앞에 보이는 풍경이 하늘밖에 없어서 꼭 차를 타고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다리를 지나면서 들었던 상조도에 있던 초등학교가 폐교된 이야기는 가슴을 찡하게, 그리고 안타깝게 만들었다. 이 동네 초등학교에는 12명의 학생이 다니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3년 전 세 아이가 함께 바다에서 스티로폼을 타고 놀다가 물살에 휩쓸려 모두 하늘 나라로 떠나는 사고가 발생했고, 10명 이하의 학교는 폐교되는 원칙에 따라 남아 있던 아홉 명의 아이들은 현재 하조도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구불구불한 길을 오르고 올라 도리산 전망대에 드디어 도착했다. 오는 동안 강현 씨가 들려주는 조도와 그곳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정말 재미있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그 지역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며 여행하는 것과 풍경만 담아두는 여행은 정말 느낌이 다르다. 혹시 조도를 여행하게 되면 국립공원 사무소에 들러 꼭 해설을 부탁하시라. 용인이 고향인 조도의 미녀 우리 강현 씨에게!
멀리 우리가 건너온 하조도와 상조도를 연결하는 조도 대교가 보인다.
점점이 박혀 있는 게 모두 섬이다. 이 섬들을 모두 묶어 조도 군도라고 한다. 조도(鳥島)라는 이름은 새들이 많아서가 아니라 바다 위에 떠 있는 섬들이 꼭 새들이 앉아 있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전망대에 올라서는 순간 우리 아들이 "왜 다도해(多島海)라고 하는지 알겠다"고 했을 정도로 어디로 눈을 돌려도 섬, 섬, 섬이었다.
남편도 다도해(多島海)라는 글자를 통해서가 아닌 실제 풍경을 보며 섬이 많은 바다를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서울에서 내려와 쉬고 싶었을 텐데 기꺼운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준 남편이 정말 고맙다. "당신은 내 인생 수많은 선택 중 최고의 선택이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