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향해 귀를 열어 놓는다는 건 꽤나 불편하고 귀찮은 일이지만 아주 이따금 가뭄에 단비처럼 기분 좋은 소식이라도 들려올라치면 '그래, 사람은 역시 바깥소식도 들어야 해.' 하는 생각과 함께 내심 뿌듯하고 흡족한 기분에 빠져드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이 쉽게 볼 수 없는 귀하디귀한 경험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이지만 말이다.

 

지난해 9월 국내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발병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국내 양돈 농가는 물론 전문가들조차 국내 양돈 산업은 끝난 게 아닌가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땅한 치료제도 없고 치사율 100%에 이르는 아프리카돼지열병의 국내 상륙은 그야말로 공포가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것이 엊그제 일 같은데 난리법석이 났던 초기와는 달리 이제는 이렇다 할 뉴스조차 나오지 않는 걸 보면 정부의 발 빠른 조치와 적절한 대응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하겠다. 게다가 지난 17일부터 19일까지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ASF 고위급 국제회의에서 우리나라 방역 사례를 공유하는 자리에 당초 예상을 뛰어넘어 60개국 300명이 참석하면서 북새통을 이루었음은 물론 러시아 등은 우리 측 자료 제공을 직접 요청했다고도 하니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어깨가 으쓱하지 않을 수 없다.

 

돌이켜보면 지난 보수정권 하에서 방역 실패로 인한 혼란과 비용 낭비 사례는 차고도 넘친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자리는 일부러 기피했던 2015년 메르스 사태를 비롯하여 매년 연례행사처럼 벌어지던 구제역과 조류독감, 그로 인한 전국적인 방역과 살처분, 그리고 매립... 철새들의 한반도 상륙을 대대적으로 막은 것도 아닌데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던 그런 떠들썩한 행사(?)들이 사라진 건 순전히 정부의 발 빠른 대책 덕분이라 하겠다.

 

중국 우한 지역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정부의 대책만 보아도 메르스 사태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다. 조계종 스님들에게 설 선물이라며 육포를 보내는 사람들이 정부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더라면 우리는 지금도 주먹구구식 방역 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정부가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국민들은 구제역 관련주에 베팅을 하고 방역을 담당하던 수의사가 과로로 사망을 했다는 기사나 쏟아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일련의 사태를 우리는 기꺼이 선거를 통해 스스로 자초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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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참선 1~2 세트 - 전2권 참선
테오도르 준 박 지음, 구미화 옮김 / 나무의마음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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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잠들어 있는 새벽 시간을 좋아한다. 영혼마저 서늘해지는 듯한 그 시간에 나는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숲길을 따라 산책을 하고, 산 위 체육공원에서 가볍게 몸을 풀고, 맑아진 정신으로 집에 돌아와서는 일 년 365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찬물에 샤워를 한다. 경건한 의식과도 같은 일련의 절차들을 나는 수십 년째 이어오고 있다. 그렇게라도 하면 남보다 예민한 나의 성향이 조금쯤 무뎌지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것은 일본 작가 와타나베 준이치가 말했던 둔감력이 내게는 아주 없거나 있어도 아주 미미한 수준에서 그친다는 사실에 대한 한탄이자 어떻게든 개선해보고자 하는 몸부림이 아닐 수 없다. "둔감, 그것은 바로 본래의 재능을 더 크게 꽃 피우는 최대의 원동력이다."

 

테오도르 준 박이 쓴 <참선 1, 2>을 읽으면서 나 역시 저자와 비슷하게 예민한 성향을 타고 태어났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예민하다는 건 삶의 근원적인 질문에 대해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없이 반복되는 하루하루의 일과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다는 건 차라리 고문에 가까운 일이며 그런 것에는 관심조차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과 어울렁 더울렁 어울려 살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민하다는 건 자신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낼 잠재적인 가능성을 지녔다는 것이며, 이를 스스로 통제하거나 극복하지 못하면 자신의 삶 역시 힘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예민함을 극복하기 위한 현실적인 대안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음악이든, 그림이든, 자신에게 끌리는 예술에 심취하거나 요가든, 명상이든, 혹은 참선이든 자신의 영혼을 직접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하거나. 이런 까닭에 선천적으로 예민하게 태어난 사람은 예술가가 되거나 종교인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다고 나는 믿는다.

 

"왜 나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이토록 힘든 것일까? 왜 나는 그냥 남들처럼 살지 못할까? 인생의 소소한 기쁨들에 감사하며, 피할 수 없는 짐들은 기꺼이 짊어지고, 때때로 발생하는 불편함과 충격을 견디면서 말이다. 세상의 무의미함과 만사의 덧없음을 무심히 넘기면 좋으련만 왜 나는 더 의미 있게 살아갈 방법이 있다고 그토록 확신했을까?" (참선 1, p.124)

 

<참선>을 깊이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던 까닭은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한 인간의 자기 고백처럼 읽혔기 때문이다. 비록 저자와 나는 판이하게 다른 인생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겠지만 저자가 젊은 시절에 밤잠을 설치며 고민했던 인생에 관한 숱한 질문들을 나 역시 끝도 없이 묻고 부딪쳐왔던 까닭에 저자의 고백이 예사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계 미국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 하버드대 비교종교학을 전공했던 저자가 일신의 영달을 뒤로한 채 송담 스님의 시자가 되어 '환산'이라는 법명을 받고 30여 년의 출가생활을 했다는 그가 2017년 환속하여 다시 테오도르 준 박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하면서 저자는 과연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을까. 수행 과정에서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지혜를 그는 이 책을 쓰면서 확연히 깨닫게 된 것은 아닐까.

 

"반면 큰 지혜를 가진 사람들을 어리숙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큰 지혜를 가진 사람은 남의 칭찬이나 욕에 반응하지 않아서 때로는 사회화가 덜 된 사람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멸시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 마음을 들여다보면 큰 지혜를 가진 사람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는 반면, 작은 지혜를 가진 사람은 경쟁심과 불안감으로 가득할 때가 많다." (참선 2, p.184)

 

나도 학창 시절 인연이 닿은 스님으로부터 참선을 배웠던 적이 있다. 수행의 목적이 아니라 공부에 도움이 된다는 스님의 말씀에 혹해서 아주 잠깐 용맹정진에 든 스님들처럼 반가부좌를 틀고 앉아 결기에 차서 참선에 임했던 적도 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자 참선을 행하는 시간은 점차 줄어들었고 사회에 발을 들이면서부터는 숫제 참선과는 멀어지게 되었다.

 

저자는 자신이 "이미 깨달음을 얻고 달관의 경지에 이르러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1'참선 : 마음이 속상할 때는 몸으로 가라'에서 저자는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인천에 있는 용화사를 제 발로 찾아와 송담 스님의 제자가 되는 과정과 수행자로 살면서 저자가 겪었던 고뇌와 갈등, 참선의 원리와 방법, 참선을 일상화하기 위한 전략을 쓰고 있다. 2'참선 : 다시 나에게 돌아가는 길'에서 저자는 속세와 떨어져 살았던 자신이 송담 스님의 조언에 따라 TV에 출연하고 참선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경험했던 참선의 혜택과 효능에 대해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테오도르 준 박의 <참선 >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힘들 때마다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내 인생의 스승과도 같은 스님을 생각했다. 나는 비록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하느님을 믿는 천주교 신자로 살고 있지만 종교를 떠나 인생의 선배로, 동시대를 사는 인생의 도반으로 스님은 내게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젠가 스님이 내게 들려주었던 말이 있다. "수도자는 삶 전체를 탐하는 자요, 속세의 인간은 삶의 순간순간을 탐하는 자이다. 탐하는 대상은 다를지언정 삶을 이어간다는 점에서 다를 게 없다." <참선>을 읽고 멀리 있는 스님 생각을 했던 나는 내일 아침 오랜만에 참선에 들지도 모르겠다. 자세를 가다듬고 호흡을 고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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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 갈수록 신경이 예민해지는가 아니면 무뎌지는가 하는 문제를 이따금 생각해보게 된다. 내 주변에도 명예퇴직을 한 친구들이 더러 생겨나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의 신경은 예민할 대로 예민해져서 말 한마디 한마디가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말이 더러 사달이 나는 경우도 종종 있고, 그들의 사정은 이해하지만 정도가 너무 심한 게 아닌가 하는 불만도 불쑥 터져나오게 된다. 이런 상황을 여러 차례 겪다 보면 인간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인간관계에 있어 점점 더 예민해진다는 결론에 이르곤 한다. 물론 인간이 태어날 때 선한 것이냐 악한 것이냐를 놓고 성선설이 옳다 성악설이 옳다 하면서 결론도 나지 않는 무의미한 논쟁을 계속하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말이다. 어떤 통계를 낼 수 없으니 인간은 각자 다 다르다는 게 맞을지도 모르지만. 세월에 따라 점점 무뎌지기도 하고 예민해지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마다 달라지기도 하고...

 

그러나 산업화 시대를 겪어온 우리 세대는 지금 젊은 친구들이나 어린 학생들에 비해 경제적으로는 조금 힘들었다고 할지라도 빠른 변화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조금 덜 받지 않았을까 싶다. 그 당시에는 큰 변화라는 게 적어도 한 세대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었던 까닭에 사회 구성원들이 그 변화에 적응하고 학습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변화의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미처 적응도 하지 못했는데 또 다른 변화가 닥쳐오는 까닭에 변화에 적응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그로 인해 사회 구성원이 받는 스트레스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기 때문이다. 어린 학생들이나 젊은 친구들이 미래에 대한 기대를 접는 까닭도, 될 대로 되라지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을 갖는 까닭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오전에 눈이 조금 내렸다. 아들은 방학이 무색하게 쉬는 날도 없이 학원을 나가고 있다. '희망'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사치가 되어버린 요즘, 세월이 가면 갈수록 사람들은 신경이 무뎌지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사회의 변화를 따라갈 수 없어 자포자기하는, 그런 인간들이 늘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신년인데 희망을 말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어쩌면 그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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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윤성희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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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은 인간의 존재 이유를 감지하는 데서 온다. 그러므로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유지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데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고, 그 나름의 역할이 있다고 어떤 확신을 갖고 믿는다는 건 타인을 존중하기 위한 최소한의 근거가 된다. 예컨대 그와 같은 믿음이 있는 사람은 적어도 자신의 이해득실이나 체면 따위와는 상관없이 타인을 존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에서 주어진 나의 역할과 존재 이유가 타인의 그것과 같을 수도 없으며, 우리가 보는 수많은 역할들이 어느 건 고귀하고 어느 건 천하다고 평가할 수 없는 까닭도 각각의 역할들이 그 빛깔을 조금씩 달리 하며 스스로 빛나기 때문이다.

 

"죽을 때까지 마리아에게 은밀한 기쁨이 하나 있었다면 그건 태극기를 팔러 가는 일이었다. 살기 위해 무엇이든 떼다 팔던 시절, 마리아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태극기 꾸러미를 리어카에 싣고 팔러 다닌 적이 있었다. 그러다 무엇에 홀린 듯 태극기의 매력에 사로잡히고 말았는데 그건 어쩌면 열아홉 살의 마리아가 미지의 나라 독일로 출발하는 순간에 보았던, 태극기가 무수히 펄럭이던 장면의 뒤늦은 효과인지도 몰랐다." (p.59)

 

'2019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권여선 작가의 단편 소설 <하늘 높이 아름답게>는 마리아의 죽음과 남겨진 사람들의 평가를 통해 인간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드러낸다. 살아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마리아의 존재가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새롭게 부각되었던 까닭은 그녀의 삶이 두드러지게 헌신적이었다거나 이웃을 위해 희생적인 삶을 살았다거나 남들이 하지 못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겨서가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그녀의 삶은 너무나도 미미했고, 있는 듯 없는 듯 남들 눈에 띄지  않는 위치에서 제 역할을 충실히 하다 떠났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집안에서 가장 사소하고 미천한 존재인 막내 마리아는 자라면서 가능한 한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도록 자기 존재를 감추고 무화하는 법을 터득했다. 숨어서 공부했고 숨어서 성당에 나갔고 숨어서 일을 꾸몄다. 그 은신술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마리아가 파독 간호사를 지원해 독일로 떠난 후 사흘이 지나도록 집안에서 그녀의 부재를 눈치챈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죽기 전까지도 숨어서 약을 먹고 주사를 놓았으므로 마리아가 죽을 만큼 아프다는 것을 눈치챈 이웃이나 성도는 아무도 없었다." (p.44)

 

소설은 마리아가 일흔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뒤 생전에 가깝게 지내던 성당의 성도들이 그녀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신장암을 앓던 마리아가 혼자 진통제를 투여하며 죽음의 고통과 싸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정부 수립 무렵 완고한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난 마리아가 체득한 생존 전략이 최대한 자신을 숨기는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고단한 노동과 고독 속에 살다 세상을 떠난 마리아에 대한 뒤늦은 이해와 연민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성도들로 하여금 '고귀한 삶'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지게 한다.

 

"베르타는 가을 저녁의 찬 기운에 오싹함을 느꼈다. 자신이 왜 그들과 계속 만남을 이어왔는지가 분명히 이해되었다. 참 고귀하지를 않다, 전혀 고귀하지가 않구나 우리는…… 베르타는 카디건 앞섶을 여미고 종종걸음을 쳤다. 한 계절이 가고 새로운 계절이 왔다. 마리아의 말대로라면 새로운 힘이 필요할 때였다." (p.67)

 

성당의 가을 바자회가 끝나가는 파라솔 아래서 죽은 마리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사람들은 마리아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는 자신들의 무관심을 자책하며, 마리아가 돌보던 어린 소피아의 입양을 앞다투어 주선할 듯이 떠들어대지만 현실에서의 그들은 당장 내일, 아니 바자회가 끝나는 그 시간이 지나면 누구도 마리아의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자신의 고독이나 고통을 드러내지 않은 채 평생을 일관되게 살았던 마리아와 남들 앞에서는 언제나 선한 척, 고고한 척 살아가는 우리들 중 과연 누구의 삶이 고귀한 것인가? 작가는 소설 속 인물 베르타의 입을 통해 우리들에게 묻고 있다.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라고 말했던 마리아. 자신의 운명과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고자 했던 마리아의 일관된 태도는 이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되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 계절을 살아내기 위해 내가 가진 힘 중 필요한 힘을 쏟아붓고 있는가. 나는 그렇게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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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례(가명) 할머니를 만나던 날은 투명한 겨울 햇살이 사방에 가득했었다. 무겁지 않은 철대문을 지나면 잘 가꾸어진 잔디밭이 나오고 누르스름한 잔디밭의 가장자리를 따라 키가 낮은 자두나무가 듬성듬성 자라 있었다. 한낮에도 햇살을 시샘하는 바람이 강하게 불었고 차에서 내린 나는 소슬한 추위를 느꼈다.

 

낯선 이방인을 맞았던 건 이 집의 주인이 아닌 반려견 누리였다. 잔디의 누런 빛깔과 흡사한 털을 가진 누리는 마당 한켠에 기척도 없이 누워 있다가 이방인의 출현에 짖지도 않고 조용히 다가왔던 것이다. 나는 커다란 덩치의 누리에게 겁을 먹었던 탓에 뒤로 한 발짝 물러섰고, 때 마침 현관문을 열고 나온 김순례 할머니를 향해 어정쩡한 인사를 했던 듯하다.

 

"어서 오세요. 춥지요?"라고 묻는 할머니의 인사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답을 미룬 채 누리를 향한 경계 태세를 여전히 풀지 않고 있었다. "괜찮아요. 안 물어요. 누리야, 이리 와!" 할머니의 다정한 부르심이 반가왔던지 누리는 이방인에 대한 경계를 풀고 주인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때 내가 누리의 뒷모습에서 발견했던 것은 뒷다리 두 개 중 하나는 쓰지 못하고 단지 누리는 세 개의 다리로만 걷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누리가 나이가 많은가 봐요?" 하고 묻자, 할머니는 "많지요. 많고 말고요. 그래도 쟤가 집을 나갔다가 3년만에 돌아온 애예요." 타령을 하듯 대답을 하던 할머니는 우리를 따라 현관에 들어서던 누리를 어루만지며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다. 내가 눈을 치켜뜨면서 "그래요?" 하고 놀랍다는 듯 묻자 할머니는 누리의 지난 삶을 조곤조곤 들려주셨다.

 

도시에서 아파트에 살았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누리의 비만이 걱정이 되어 시골로 이사를 결심했다고 했다. 시골에 집을 짓고 이사를 한 후 누리가 마음껏 뛰어놀도록 목줄을 하지 않았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누리가 사라졌고, 놀란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백방으로 누리를 찾았지만 결국 찾을 수가 없어 반 포기 상태로 지내셨단다. 그런데 3년쯤 지난 어느 여름날 바짝 마른 체구의 누리가 집으로 돌아왔고, 심하게 하혈을 하는 누리를 살리기 위해 곧바로 동물병원을 알아보고 자궁을 들어내는 큰 수술을 했다고 했다수의사로부터 가정집에서 웬 새끼를 그렇게 많이 뽑았느냐는 잘 알지도 못하는 타박과 꾸지람을 들어가면서 누리를 살렸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누리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 여파로 누리는 뒷다리 한쪽을 영영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겨울이 싫어져. 땀을 뻘뻘 흘려도 여름이 좋지 겨울은 정말 싫어. 며칠 전에는 제주도를 다녀왔는데 거기는 가는 곳마다 꽃이 만발한 게 봄이야, . 그래도 거기는 섬이라 짠내가 나고 사람 살기에는 좋지 않더라. 그냥 며칠 다녀오는 건 괜찮지만 말이야." 누리의 이야기를 마친 할머니는 슬쩍 다른 이야기를 하며 방한 조끼를 꺼내 입으셨다. 자신의 얘기인 줄 아는지 현관에 턱을 괴고 누워 있는 누리는 큰 눈을 껌벅이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귀를 쫑긋 세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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