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를 떠나면
크리스털 하나 김 지음, 허선영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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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신이 살아야 할 시대나 환경을 제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그런 면으로 보면 인생이란 참으로 불공평하다. 내던져지듯 주어진 삶의 환경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환경에 걸맞은 뻔한 스토리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다가 생을 마감한다. 특별할 것도 없이 말이다. 그러나 개중에는 앞으로 전개될 자신의 뻔한 스토리를 거부한 채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자신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라도 그렇고 그렇게 전개되는 뻔한 스토리를 자신의 삶으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게 그들의 의지이자 뜻이다. 역사에 기록되는 대부분의 인물은 주로 그런 부류의 인간들이지만, 소설과 같은 픽션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작가는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뻔한 스토리를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는 어떤 인물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어진 조건에서 뻔하디 뻔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그들이 헤쳐가는 삶의 결말이 도무지 예측이 되지 않는다. 소설 속 주인공의 삶을 그저 경이와 감탄의 시선으로 읽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크리스털 하나 김의 소설 <네가 나를 떠나면>을 읽는 독자라면 주인공 해미의 삶에서 그와 같은 느낌을 받지 않을까.


"나는 어린 미라를 보면서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자기 시대 사고방식에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성년이 된 이후 내내 미워했던 여자. 어머니는 내가 눈앞의 일만 보느라 분노한 이후의 상황을 보지 못할 때 나를 위해 고민했다. 나는 언제나 부러졌지만, 어머니는 세상에서 부러지지 않고 살아남는 법을 아는 여자였다. 이 상황에서 어머니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p.369)


소설은 한국전쟁이 진행 중에 있었던 1951년 피난지 부산의 해미네 가족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머니와 몸이 아픈 동생 현기와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온 해미네는 운이 좋게도 어머니의 종조부가 살던 집에 들어가 살게 되었지만, 해미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경환과 싸돌아 다니는 것 말고는 특별히 운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해미의 마음은 언제나 경환에게 있었지만 전쟁통에 삶의 질을 추구하기에 앞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탓에 경환과 이어지지는 못한다. 대신에 경환의 사촌 형인 지수가 남동생의 약을 구해다 주기도 하고, 번번이 음식도 들고 오면서 해미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표시를 내는 바람에 해미는 결국 지수와의 결혼을 선택한다. 그리고 지수와 경환은 한국군에 입대한다.


"나는 지수와의 결혼, 번갯불에 콩 볶듯 올린 예식 또는 그날 밤에 지수가 군인들이 가득 찬 트럭으로 당당하게 걸어갔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너무 빨리 일어난 일들이었다. 어떤 날은 기억마저 조잡하고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머니가 소박한 혼례용 한복을 추씨 아주머니에게 빌려 왔고, 나는 그걸 입고 우리 집 주위를 걸어 다녔다. 짧은 초록색 저고리와 풍성한 빨간 치마는 우리 일상생활에 비해 너무 강렬해 보였다. 우리 집의 헐벗은 나무 기둥과 어머니의 단호한 분위기에 대비되는 그 색깔은 우리의 진실을 드러냈다. 우리는 이제 초라해졌고, 우리의 겉모습만이 겨우 내놓을 만한 형태를 이루고 있을 뿐이었다."  (p.153)


자신이 선택한 삶이기에 해미는 지수를 사랑하려 노력한다. 딸 셋을 낳은 해미였지만 지수는 거리로, 술집으로 나돌며 대놓고 바람을 피운다. 그럼에도 지수는 아들을 낳을 때까지 해미에게 계속해서 임신을 요구한다. 해미는 지수 몰래 18개월 된 갓난쟁이 막내딸을 데리고 보육원에서 일을 시작한다. 그리고 경환에게 편지를 쓴다. 경환과 재회한 해미는 경환에게 자신을 서울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는데...


"나는 그의 집요함에, 아니 속으로는 내 어리석음에 짜증이 나서 몸을 돌렸다. 경환은 절대 날 놔주지 않을 것이다. 그와 지수는 나를 자기 거라고 주장하기만을 원했다. 마치 내가 보리나 비누나 소, 아니면 애 낳는 기계라도 되듯이. 경환은 한 번도 구속돼 본 적이 없어서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p.455)


총 5부로 이어진 이 소설은 1967년의 대한민국으로 길게 이어진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기를 바랐던 이해미의 고단하고 지난한 삶은 아프게 읽힌다. 거부할 수 없는 시대의 덫은 때로는 이를 거부하는 이의 올가미가 되어 그의 운명을 옥죈다.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그의 숨통이 조여 오는 것이다. 운명에 맞설 용기가 없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와 환경에 걸맞은 뻔하디 뻔한 인생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길게 이어지던 가을 장마도 이제는 그 끝에 이른 듯하다. 어둠이 내린 하늘엔 이따금 구름이 떠다니고 한 계절을 힘겹게 살아낸 개개인의 역사가 구름 저편으로 밀려나는 듯하다. 어둠의 틈새를 뚫고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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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 위에 우리가 있었다 - 대일항쟁기, 강제 동원된 조선인의 기억과 흔적을 찾아 일본을 걷다 19100829-19450815
이재갑 지음 / 책숲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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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사진작가가 있다. 2005년 루게릭병으로 세상을 떠난 김영갑 작가가 그분이다. 작가 스스로 '외로움과 평화를 찍었다.'고 했던 그의 사진들을 보면 그가 20년 동안 머물렀던 제주도의 바람, 정서, 그리고 작가의 영혼이 그가 촬영한 한 장의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틀에 박힌 한 장의 스틸컷이 아니라 작가 스스로가 느낄 수 있는 황홀한 순간을 만나기 위해 같은 장소를 수없이 방문하고 기다려야 했던 작가의 열정은 이제 그가 남긴 작품으로만 만날 수 있다. 사진은 작가의 의지와 신(또는 자연)의 의지가 결합된 순간의 미학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신의 의지를 깨닫게 되는 그 순간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최근에 나는 김영갑 사진작가와는 결이 다른, 이재갑 사진가의 사진 에세이 <그 길 위에 우리가 있었다>를 읽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작가에 대해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다. 나는 적어도 작가의 에세이집을 한두 권쯤은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의 아픈 과거와 역사의 현장에 대해 천착했던 작가는 한국전쟁과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일제 강점기 때 끌려갔던 조선인 노동자와 원폭 피해자 등 전쟁이 남긴 역사의 흔적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사진은 어쩌면 시간 속에서 스러져가는 시간의 파편을 한 장의 사진을 통해 들춰내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그가 생각하는 사진은 유구한 시간 속을 흐르던 '시간의 운석'인 셈이다.


"글로 표현하기는 민망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이렇게 표현한다. 풀과 돌, 나무들이 말을 걸어왔다. 인간의 언어로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현장의 소리를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하고자 했다. 마치 무엇에 홀린 것처럼 현장에 가면 여러 소리가 들린다. 사진으로 말(언어)을 한다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어렵고 힘들다. 그러나 운명처럼 들려오는 현장의 소리를 지나칠 수 없어 한참을 듣고 또 듣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자신만의 언어로 다가오고 이를 시각화 작업을 하고 1차, 2차 과정을 거쳐 마무리하게 된다."  (p.6 '저자 서문' 중에서)


<그 길 위에 우리가 있었다>에서 작가는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으로 끌려가 강제 노역에 시달렸던 조선인 노동자의 흔적을 찾아 일본 전역을 훑고 있다. 제1장에서 다루고 잇는 후쿠오카를 비롯하여 2장 나가사키, 3장 오사카, 4장 히로시마, 5장 오키나와로 이어지는 이 책은 많은 한국인들이 찾는 관광 대국 일본의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우리 선조의 희생과 피로 얼룩진 가슴 먹먹한 역사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우리는 그저 삼일절이나 광복절 등 특정 국경일에 한하여 우리의 아픈 역사와 조상들의 희생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 지나칠 뿐 그때의 기록을 생생하게 대면하려는 노력은 잘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우리 선조의 희생을 한낱 조롱거리로 삼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발생하고, 친일파 선조를 둔 어느 연예인이 방송에 나와 자랑스럽게 밝히는 해프닝도 발생한다.


"멀리서 보면 섬 전체의 모습이 군함 같다고 해서 일명 쿤칸지마(軍艦島)로 불렸고,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조선인과 중국인이 강제 동원되어 지옥과도 같은 노동에 시달렸다고 해서 광부들 사이에서는 지옥 섬이라고 불렸다. 원폭 피해자의 삶과 그 뒷이야기를 담은 한수산의 소설 <까마귀>의 실제 배경이기도 하다."  (p.123~p.124)


작가가 찍은 사진과 직접 쓴 글을 따라가다 보면 사진 작업이 단순히 좋은 사진기와 작가의 테크닉에 의한 하나의 기계적인 결과물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사진이야말로 작가의 열정과 작가의 깊은 공명이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구현되는, 일종의 영혼의 구현이나 영혼의 발현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한 장의 사진 속에 영혼을 담지 않으면 이것을 감상하는 관객은 어떤 감동도 받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책을 읽었던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사진과 글에서 느꼈던 먹먹한 감정 탓에 때로는 책을 덮고 잠시 먼산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지 않을까 싶다.


"목숨을 담보로 진행된 무리한 공사 탓에 숙소를 탈출하는 일도 많았다. 낯선 지형 때문에 깊은 산속을 돌아다니다가 도랑이나 폭포 등으로 떨어져 실족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도망가다 붙잡히면 다리에 나무를 매달아놓고 나뭇잎을 태워 연기를 마시게 하는 등 갖가지 방법으로 고문했다고 한다. 기사에는 전혀 믿기 어려운 내용도 있었다. '히로시마 강제 연행을 생각하는 모임'의 대표는 히로시마현 북동부 쪽에 있는 고보댐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을 소개했다. 1942년 시작된 댐 공사에는 경상도 출신의 조선인 노동자 2,000여 명이 강제 동원되어 일하고 있었다. 댐 구조물 공사를 하던 중 조선인 노동자들이 구조물 밑바닥 시멘트 더미 위로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밑으로 떨어진 그들은 위를 향해 살려달라고 있는 힘을 모아 소리쳤다. 동료인 조선인 노동자들이 밧줄을 내려보내 구하려는 순간 일본인 감독이 작업을 중단하지 말라고 고함을 내질렀다. 이어 감독은 직접 시멘트를 삽으로 떠서 아래로 부었다. 조선인들은 울음을 터뜨리며 머리 위로 떨어지는 시멘트를 팔로 막으려 했지만 잠시 후 조용해졌다. 생매장당한 것이다. 당시 사망한 조선인 수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 뒤 고보 댐은 '인골(人骨) 댐'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p.258~p.259)


아침에 비를 뿌리던 하늘은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며 대기의 습도를 높이고 있다. 아파트 화단에 핀 맨드라미도 더위 탓인지 시들시들 생기를 잃고 있는 듯하다. 얼마 전 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자신이 속한 사진 동아리의 정기 전시회에서 자신이 걸었던 사진 다섯 점 중 두 점이 팔렸다며 좋아하던 게 문득 떠오른다. 공대를 다니고 있는 아들이 졸업 후 어떤 방향으로 진로를 정할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사진은 손에서 놓지 않을 듯하다. 홀로코스트의 생존자 빅터 프랭클이 주창했던 로고테라피의 주장처럼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으며, 그 의미를 통해 삶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아들도 자신이 좋아하는 사진을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해 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게 된다. 밝아졌던 하늘은 다시 또 어두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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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은 연결된다 - 이타적 에고이스트의 책 읽기 나와 잘 지내는 시간 3
김성민 지음 / 구름의시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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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선택하는 기준은 그 사람의 성향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어떤 동인으로 그 책에 흥미를 느꼈는가 하는 문제가 때로는 한 사람을 평가하는 데 더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예컨대 중년의 한 남성이 서점에 들러 한 권의 동화를 선택했다면 '그 나이에 왜?'라는 질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성인이 된 남성들 중에도 여전히 동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비록 그것이 그 사람의 오래된 취향이라고 할지라도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그 나이에 동화를 고른 동인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고, 그것이 곧 그 사람을 평가하는 하나의 관점이 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자신을 일컬어 '이타적 에고이스트'라고 하는 김성민 작가의 리뷰 에세이 <고독은 연결된다>를 읽게 된 것은 단순한 우연이었다. 며칠 전 자주 들르는 도서관에서 이 책 저 책을 기웃거리며 시간을 보내다가 괜찮은 책인 듯 보여 대출로 이어졌으니 말이다. 물론 나는 다 읽지도 못할 거면서 대책도 없이 책만 빌려 오는 상습적 '책 산책자'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빌려온 책을 무작정 쌓아놓고 묵히다가 들춰보지도 않은 채 책을 반납하는 비양심적인 사람은 아닌 것이다. 이번 책처럼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후루룩 다 읽어버리는 경우도 더러 있으니 말이다.


"도서관을 단순히 책 빌리는 곳이라고만 말한다면 허전하고 부족하다. 도서관은 책 자체를 체험하는 곳. 책을 구경하고 읽으며 도서관에서 마련한 수업을 듣고 책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다채로운 방법이 있는 곳이다. 베스트셀러나 신간 위주로 배열된 대형 서점에서는 책들이 저마다 존재감을 뽐내지만, 도서관에서는 책들이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수백 년 전에 쓰인 책들이 지금 현재와 만나고 있다는 사실, 무덤에 있는 저자들이 곁에 살아 있는 것 같은 상상을 한다. 그래서 도서관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무한한 세계라고 말한 보르헤스가 떠오른다."  (p.62)


<고독은 연결된다>에는 작가가 책을 읽고 느낀 감정이나 사유 또는 연결된 에피소드나 깨달음 등으로 인하여 책을 읽는 독자 역시 작가가 언급한 책을 읽고 작가와 비슷한 경험을 해보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게 된다. 이런 부류의 책 대부분이 그렇지만 말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도서관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나도 모르게 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와 같은 상습적 '책 산책자'에겐 이 책이 무척이나 위험한 책이라고 하겠다. 빼곡하게 적은 도서 목록을 들고 하시라도 도서관 나들이를 마다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여기에 모인 스물아홉 편의 글은 함께 읽기와 다시 읽기의 결과물이다. 대개 읽고 나서 쓰지만 때로는 쓰기 위해 읽는다. 쓰기 위해 다시 읽는 과정은 나의 이해를 허물고 재구성하는 시간이었다. 삶을 다시 살 수 없지만 책은 얼마든지 다시 읽을 수 있다는 말처럼 다시 읽기는 독자로서 갖는 즐거움이다."  (p.8 '들어서며' 중에서)


오늘 아침 새벽 운동에 나섰던 나는 깜짝 놀랐었다. 산의 입구에서부터 매일 들었던 매미 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귀뚜라미 소리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이렇게 갑자기 모두 사라졌다고?' 나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웬걸, 산의 능선에 올라서자 매미 소리가 어제와 다름없이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날씨가 다시 더워지는 바람에 매미들도 조금 더 시원하고 조용한 곳으로 피서를 왔나?' 생각하면서 피식 웃음이 터졌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습한 등산로를 매미 소리 덕분에 가볍게 걸을 수 있었다. 소리에 민감한 우리 인간들처럼 어쩌면 여리디 여린 귀뚜라미들도 시끄러운 매미 소리에 한껏 항의를 할지도 모르겠다. 아파트 층간 소음 문제로 다투는 우리들처럼 말이다.


"층간 소음문제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인 이유는 개인 간에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개인 간 해결하려다가 감정이 격해져 폭력을 행사하여 정말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 뉴스를 흔하게 접하곤 한다. 여기서 누스바움이  주목하는 것은 감정이다. 감정이 사회 정치적 문제를 유발할 수 있는 요인이 되는 동시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도 감정에 있다고 본다."  (p.184)


무더위가 정말이지 오래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주택가 가까운 곳에서 시끄럽게 울던 매미도 차츰 먼 곳으로 떠나고 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미세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는 것이다. 8월의 마지막주를 우리는 힘겹게 보내고 있지만 그것이 비단 인간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듯 서둘러 온 귀뚜라미도 더위 속에서 힘겹게 제 짝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시간은 흐르고, 새로운 기억들이 각자의 삶 속에 새록새록 쌓이고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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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아들
데니스 존슨 지음, 박아람 옮김 / 기이프레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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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나지 않는 삶의 음영을 수시로 확인할 수는 없겠지만, 이따금 마음의 눈에 편광 필터를 장착한 채 자신의 내면을 샅샅이 훑어보는 일은 누구에게나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나 자신의 외관이 아닌 내면을 시간을 들여 꼼꼼히 살핀다는 건 낯설고 번거로운 일일뿐더러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마음에 난 상처는 그 실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상처의 크기도, 발병의 원인이나 시기도 무엇 하나 제대로 밝혀지는 게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살피는 일에 순진할 정도로 무지하거나 관심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습관으로 하여 우리는 자신의 내면이 타인의 그것처럼 데면데면하고 푸접없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내면과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긴요한 일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에 있던 근육이 나이와 함께 소실되는 것을 염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게는 없던 마음의 근육이 나이가 들수록 더욱 절실해지는 것이다. 나와 가까웠던 사람들이 하나둘 작별을 고하기도 하고, 종국에는 나만 홀로 남겨진 듯한 세상이 머지않은 시기에 도래한다는 건 너무나 명확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마음의 근육을 조금씩 키워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영화, 음악, 명상, 독서 등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겠다. 심지어 어떤 이에게는 달리기가 그 역할을 대신할지도 모른다. 그나마 책을 싫어하지 않는 나로서는 여러 작가의 글을 통해 나의 내면을 살피는 데 익숙할 뿐이다. 그와 같은 역할을 했던 작품은 읽고 지나친 후에도 가끔 생각이 난다. 얼마 전에 읽었던 데니스 존슨의 소설 <기차의 꿈>도 그런 책 중 한 권이다. 모름지기 좋은 책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자기도 모르게 부지불식간에 떠오르거나 연상되는 어떤 사물이나 상황으로 인해 소설 속의 한 장면을 자신의 의식 속으로 소환하게 되는 책. 그렇게 소환된 소설 속 한 장면으로 인해 나의 내면이 자연스레 내 의식의 벽면에 파노라마처럼 상영되는 일.


"사고 차량에 늘어져 있던 남자는 내가 지나갈 때 아직 살아 있었다. 이 무렵 나는 그가 심하게 다쳤다는 사실에 조금 익숙해져서 걸음을 멈추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는 요란하고 무례하게 코를 골았다. 숨을 쉴 때마다 입에서 피가 부글부글 나왔다. 그런 숨조차 많이 남지는 않은 듯했다. 나는 알았지만 그는 몰랐고, 그렇기에 나는 그를 내려다보면서 이 지상에서 인간의 삶이 얼마나 측은한지 절감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가 결국 죽는다는 것,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는 자기가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내게 말할 수 없고 나는 현실이 어떤지 그에게 말할 수 없다는 것, 그 점이 내게는 지독히 측은하게 느껴졌다."  (p.30 '히치하이킹 도중에 일어난 자동차 사고' 중에서)


데니스 존슨의 단편집 <예수의 아들>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거나 평범한 이의 삶과 비교하면 무척이나 예외적인 삶을 다루고 있다. 20대 내내 마약과 술에 중독된 채 살았던 작가의 경험을 반영한 듯 책 속의 인물들은 모두 삶이 부러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부서지고 흩어져서 우리가 생각하는 '보통의 삶'으로의 복귀가 불가능해 보이는 삶일지라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반짝이는 순간이 기적처럼 찾아온다는 것이다. 작가는 그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고 노력한 것 같다. 그러나 반짝이는 그 순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의 삶, 이를테면 허물어지고 한없이 흐트러진 삶을 보여주기 위해 작가가 제공하는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의 모습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너무나 삐뚜름하게 보인다. 구멍이 숭숭 난 스웨터처럼 온전한 모습으로는 결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바인에서는 그런 순간이 많았다. 오늘이 어제인 줄, 어제가 내일인 줄 착각하는 순간. 왜냐면 우리는 모두 우리가 비참하다고 여기며 술을 마셨으니까. 우리는 그런 무력감, 우리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우리는 수갑을 찬 채로 죽을 터였다. 결국 우리의 삶은 강제로 종지부를 찍을 터였고 심지어 우리 잘못도 아닌 일로 그렇게 될 터였다. 우리는 그렇게 상상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늘 터무니없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곤 했다."  (p.63 '보석(保釋)' 중에서)


데니스 존슨의 단편집 <예수의 아들>은 편집 또한 기괴하다. 소설의 목차는 책의 가장 뒤편에 배치되어 있고, 책에 실린 단편소설의 제목 역시 소설이 끝나는 마지막 페이지에 등장한다. 말하자면 독자는 단편소설의 제목도 모른 채 본문부터 읽기 시작하여 소설을 다 읽은 후에야 비로소 제목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편집 방식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독자라면 제목이나 목차를 먼저 확인하고 읽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책에 실린 단편소설의 제목을 보면, ''히치하이킹 도중에 일어난 사고', '두 남자', '보석', '던던', '일', '응급실', ';더럽혀진 결혼', '다른 한 남자', '해피아워', '시애틀 종합 병원에서 본 굳건한 손', '베벌리 요양 병원' 등 11편이다. 소설은 지극히 짧은 소설에서부터 적당히 긴 소설에 이르기까지 꽤나 다양하다. 소설은 사실과 환각이 뒤엉키고 시제 역시 불분명한 까닭에 처음에는 잘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소설을 읽다 보면 작가가 서술하지 않아 잘려나간 듯한 부분 역시 독자의 상상력으로 자연스레 메워지게 된다.


"내가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기껏해야 일주일에 10시간, 12시간, 그 정도였다. 나는 정규직 일자리를 찾고 있었고 헤로인 중독 치료 모임에도 나갔으며, 지역 알코올 중독 수용 센터에도 정기적으로 보고해야 했고, 사막의 봄을 산책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베벌리 요양 병원의 원형 복도는 마치 이승의 삶들 사이에 머무는 곳처럼 느껴졌다. 한 생을 살고 난 뒤 돌아와서 다른 영혼들과 뒤섞인 채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곳."  (p.181 '베벌리 요양 병원' 중에서)


우리는 이따금 자신의 삶은 되돌아보지 않은 채 타인의 삶을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마치 '남의 눈에는 티, 내 눈에는 들보'라는 격언처럼 제 눈에 있는 들보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데니스 존슨의 단편집 <예수의 아들>을 읽다 보면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들에 대해 '왜 그렇게 살아?'라고 비난할 사람이 혹여라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존경해 마지않는 교황이나 달라이라마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삶은 다 거기서 거기라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나는 너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천만의 말씀이다. 그런 사람을 주위에서 볼라치면 어느 영화의 시니컬한 대사처럼 "너나 잘하세요."라고 충고하는 게 맞을 듯하다. 데니스 존슨이 이 소설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당신의 인생도 이들과 다를 게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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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희진 지음 / 나루서가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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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의 주변부에 있었을 때 우리는 여름이 하냥 만만하게 보였다. 그러나 더위의 중심부를 통과했을 때의 우리에게 여름은 무섭고 두려운 어떤 것으로 변해 있었다. 삶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삼시 세끼를 부모에게 의존하던 시기에 삶은 그저 한 번의 롤러코스트를 타는 것처럼 가볍고 시시한 것쯤으로 보였지만, 삶의 고비를 여러 번 겪고 난 중년의 어느 시기쯤에서 바라보면 삶은 마치 보따리를 풀면 풀수록 해결할 수 없는 참담한 문제들이 끝없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하나의 괴물 보따리쯤으로 여겨진다. 방희진의 소설집 <패치워크>를 읽는 동안 나는 아스라이 멀어져 간 듯 느껴지는 가까웠던 여름의 폭염과 그에 얽힌 몇몇 기억들을 떠올렸다. 마치 재질이 다른 조각천을 조각조각 이어 붙이듯 말이다.


"이름 아래 소개된 약력을 검지로 톡톡 치며 진영은 그렇게 말했다. 선망이나 비웃음이 담긴 말투는 아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여자의 부지런함만은 나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혜린은 갤러리 관장 외에도 미술평론가, 수도권 대학의 겸임교수로 불리고 있었다. 나는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오혜린의 글을 읽었다. 장 드뷔페의 아르 브뤼 미술을 미학적 관점에서 재조명한 것이었다. 새로운 주제는 아니었다. 진영의 말대로 평론이라 하기에는 애매했다. 인용한 문장이 많아선지 현학적이고 난삽해서 요점을 잡기가 어려웠다."  (p.110 '패치워크' 중에서)


방희진의 소설집에는 표제작인 '패치워크'를 포함하여 8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패치워크'에는 세 여인이 등장한다. 오정순이었다가 개명을 통하여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된 오혜린과 주인공인 나(이정선)와 진영이 그들이다. 아버지 쪽 친척 여동생인 진영은 짧았던 결혼생활을 접고 그림에만 매달려 대외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편이었다. 반면에 백화점 디스플레이어로 일만 하던 나는 번아웃이 왔고, 그런 나에게 다시 붓을 쥐어준 이가 진영이었다. 전시회 때문에 오혜린을 만났던 진영이 나의 전화번호를 오혜린에게 건네주었고, 오혜린은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30년 전의 흐릿한 기억을 되살린다. 나는 무명이었던 김옥환 화백이 그의 화실에서 수강생을 모아 서양화를 가르쳤을 때 오혜린과 함께 그림을 배웠던 수강생 중 한 명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세 사람은 내가 선물로 받았던 팔찌를 통하여 각기 다른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하나의 팔찌에 세 개의 다른 기억이라고 해야 할까. 소유하게 된 배경이나 동기도 서로 다르지만. 마치 소재와 색상이 다른 각각의 원단처럼.


"뒤늦게 첫 소설집을 내며 기쁨보다는 괴로움이 더 컸다. 의미를 따지는 평소의 습관대로 이 책에 대해서도 뜻있는 뭔가를 자꾸 찾으려 들었기 때문이다. 결론은 얻지 못했다. 다만 먼 길을 가는 사람이 첫발을 떼면서 호들갑부터 떤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그러니 용감하게 첫걸음을 내딛자, 이 책의 의미를 입증하는 알리바이로 그만큼만 주장하자 마음을 다졌다. 나중에는 나중의 알리바이를 주장할 테지만."  (p.254 '작가의 말' 중에서)


소설은 대개 피할 수 없는 관계와 그러한 관계 속에서 비롯되는 삶의 고뇌와 갈등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에 깨닫게 되는 여러 감정과 회한 또는 결심이 주를 이룬다. 어느 소설이든 다 그런 범주에 속할 테지만 말이다. 이 소설집에는 무엇인가를 잃었거나 삶의 목표에 근접하지 못한 인물들이 다수 등장한다. 작가는 이들의 내면 풍경을 그리기 위해 주변의 인물들을 동원하여 좀 더 심층적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에 흐르는 쓸쓸하고 덧없는 감정까지 말끔하게 지우지는 못한다. 그것은 인간이 지고 가야 할 원죄라도 되는 것인 양.


"수진이 저녁에 돌아와 하려던 말은 끝내 듣지 못했다. 그날 저녁의 약속만 아니었다면 수진은 무사했을까. 나는 대답을 얻지 못한 채 오래도록 내 안의 피멍에 주먹질을 했다. 아이를 치고 달아난 운전자에게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저주란 저주는 죄다 퍼부었다. 경찰에선 어떤 단서도 찾지 못했고 남편과 내가 내건 현수막은 그해 가로수가 모조리 잎을 떨어내고 겨울바람이 부는 동안에도 이면도로 가에서 저 혼자 펄럭였다."  (p.179 '이불' 중에서)


지면을 적시는 비는 꽤나 오랜만에 보는 듯하다. 아침에 내리던 비는 그쳤지만 높아진 습도 탓에 불쾌지수가 높아진 저녁, 군데군데 먹장구름이 떠 있는 하늘 위로 노을이 번지고 있다. 방희진 작가의 소설집 <패치워크>를 읽고 왠지 모르게 울적해진 오늘, 삶은 여전히 진행 중에 있고 내 삶의 보따리를 풀어 보면 전에는 보이지 않던 고만고만한 문제들이 울적해진 마음에 불을 붙일 듯하다. 노을이 번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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