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보다 : 여름 2024 소설 보다
서장원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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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소설 보다> 여름 호에 실린 '그 개와 혁명'을 읽어보려고 했던 것은 순전히 예소연 작가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제48회 이상문학상 대상 작품이기도 한 '그 개와 혁명'은 작품의 내용보다 1992년생인 신예 작가 예소연에 의해 발표된 작품이라는 데 더 큰 방점이 찍혔던 사실을 나는 기사를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더구나 등단 4년 만에 이상문학상 대상을 거머쥐었다는 쾌거도 예소연 작가에 대한 궁금증을 키웠다. 이름도 잘 모르는 신예 작가가 어떻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건 예소연 작가의 능력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이상문학상'의 권위가 무겁게 짓눌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태수 씨의 죽음에 관해 우스갯소리를 하고 이것저것 계획하며 삶을 영위해나갔다. 그것은 죽음을 도모하며 삶을 버티는 행위였다. 태수 씨는 자신이 죽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했지만, 자신의 죽음을 계획하는 일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두 가지는 태수 씨에게 전혀 다른 것이었다."  (p.80 '그 개와 혁명' 중에서)


'이데올로기를 압도하는 혁명적 사랑이자 가히 혁명적인 포용의 서사'라는 심사위원회의 평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소연이라는 젊은 작가가 내놓은 이 한 편의 단편소설에 대해 심사위원들이 받은 느낌은 놀라움이지 않았을까 싶다. '태수 씨는 죽기 전까지 통 잠을 못 잤다.';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아빠라는 호칭 대신에 '태수 씨'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도,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가볍고 경쾌하게 다루는 것도 무척이나 이채롭다. 그러나 이와 같은 파격은 80년대 PD계열 운동권이었던 '태수 씨'가 NL계열 여자와 머리핀 공장에서 만나 결혼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딸인 수민의 타박에도 불구하고 제사상을 차릴 때 손도 까딱하지 않는 등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태수 씨가 아픈 뒤로도 조금씩 기뻐했다. 물론 많이 슬펐지만, 슬픈 와중에도 틈틈이 기뻐했다. 우리는 태수 씨가 아프고 나서 태수 씨의 먹는 것과 싸는 것에 모두 집중하고 좋아했다. 나는 태수 씨가 미음을 한 숟가락 뜨거나 통잠을 자면 온 가족에게 전화를 걸었고 대변을 보면 그것을 사진으로 찍어 기록해두었다."  (p.67)


아들이 없는 집안의 장녀인 수민은 동생 수진과 함께 태수 씨의 병간호를 도맡아 하며 전에는 알지 못했던 태수 씨의 모습을 비로소 알게 된다. 태수 씨가 수민, 수진과 함께 자신의 장례식을 도모하면서 그들은 비로소 세대를 넘어 한 세대를 함께 살았던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80년대 운동권의 시각에서 본 요즘 애들과 옛날 사람으로 갈린 너와 나의 모습이 아니라 현재를 공유하는 '태수 씨'와 '수민'으로 재결합하는 순간이었다. 수민은 자신 역시 태수 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모든 일에 훼방을 놓고야 마는 사람'. 끝내 수민은 그와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태수 씨와 함께 장례식을 엉망으로 만들 계획을 세운다. 그것은 바로 태수 씨를 따르던 애완견 '유자'의 등장이었다. 평소 친구가 많았던 태수 씨와 달리 손으로 꼽을 정도로 관계의 폭이 넓지 않았던 수민. 두 사람은 그렇게 하나가 된다.


"있잖아, 수민아. 그냥 죽고 싶은 마음과 절대 죽고 싶지 않은 마음이 매일매일 속을 아프게 해. 그런데 더 무서운 게 뭔지 알아?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고 온갖 것이 나를 다 살리는 방식으로 죽인다는 거야. 나는 너희들이 걱정돼.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돈이 더 많이 들어서."  (p.73)


나는 사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떠올렸다. 물론 정지아 작가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온 사람들을 통해 아버지의 삶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소설을 완성하였던 반면, 예소연 작가는 공통분모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아빠와 딸의 관계가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을 통하여 비로소 이해하고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죽음 저편에서 바라보는 인간 개개인의 삶은 이해하지 못할 것도, 용서하지 못할 것도 없음을 넌지시 알려준다. 그리고 태수 씨가 없는 장례식장에서 태수 씨를 따르던 애완견 '유자'가 난장을 친들 뭐가 그리 대수이겠는가.


서로를 향해 새해 인사를 나누었던 게 꼭 엊그제 일 같은데 벌써 3월의 마지막주를 보내고 있다. 등산로에는 조팝나무에도, 참나무의 어린 묘목에도, 찔레나무에도 모두 연녹색의 여린 잎이 돋아나고 있다. 인근 공원의 벚나무도 꼬마전구를 밝힌 듯 환하게 꽃을 피우고 있다. 화마가 휩쓸고 간 남녘에는 죽음과 공포의 그림자가 우리의 삶을 짓누르는데 봄의 생명력이 저리 환해도 되는가. '산불 피해 모금'에 온라인 송금을 한 것으로 내 소임을 다했다고 느끼는 알량한 나의 양심이 못내 부끄러운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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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톨스토이 단편선 소담 클래식 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은연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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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고전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고전 작품이 현대 작품에 비해 무척이나 담백하구나, 하는 것이다. 담백하다는 말은 사실 좋게 표현한 것이고,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작가가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뻔히 보인다고 할까 아무튼 소설의 구성이나 표현이 너무도 솔직해서 책을 끝까지 읽지 않아도 주제나 결말을 지레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현대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 속에서 본인의 의도나 결말을 숨기기 위해 얼마나 고심하고 머리를 굴려야 할까 하는 생각에 괜스레 짠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과거에 비해 현대 소설이 발전한 것은 작가의 의도를 얼마나 꽁꽁 숨길 수 있느냐 하는 문제, 즉 작가의 숨은 의도를 들키지 않기 위한 기술을 얼마나 완벽하게 실현하느냐 하는 문제에만 집착해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것은 비단 소설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다. 사적인 대화에서도 사람들은 자신의 의도나 목적을 숨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던가.


레프 톨스토이의 단편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남을 속이는 데 온갖 기술과 편법을 동원하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이와 같은 고전은 오히려 시시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작가의 의도나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심지어 제목만으로도 그 주제를 짐작하는 데 모자람이 없다. 문체 또한 간결하고 작가의 의도를 전달하는 데 집중하는 까닭에 나와 같은 현대인들은 작가의 의도를 곱씹는 데 시간을 할애하기보다 소설의 첫 부분을 읽으면서도 저 멀리 소설의 결말 쪽으로 미리 달려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나쁜 독서 습관이 비단 나 하나의 문제일까마는 나는 몇 번이나 반성하며 톨스토이의 문장 하나하나가 주는 의미를 깨닫는 데 집중하고자 했다.


"사람은 자신의 일을 걱정하고 애씀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오직 사랑에 의해서 살아간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사랑 속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세계에 살고 있으며 하나님은 바로 그 사람 안에 계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p.51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중에서)


책에는 표제작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외에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바보 이반', '촛불', '예멜리얀과 북', '무엇 때문에' 등 우리가 익히 들어보았음 직한 7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소설의 구성이나 문체는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무척이나 간결하고 단조롭다. 복잡한 구석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조차 없다. 구전되어 내려오던 이야기를 소설로 옮긴 것도 한 이유가 될지 모른다. 가난한 구둣방 부부가 예배당 근처에서 알몸의 젊은이를 발견한 후 그와 함께 지내면서 발견한 삶의 진실과 그 젊은이는 사실 하나님에게서 벌을 받은 천사였다는 내용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책에 실린 소설의 대부분은 우리가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죄라고! 사람을 죽이는 건 물론 죄가 되지만 그놈이 인간인가? 착한 인간을 죽이는 것은 분명 죄가 되지. 그러나 그런 개만도 못한 인간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야. 인간을 위해서 미친개는 죽어야 해. 그놈을 죽이지 않으면 죄만 커질 뿐이야. 놈이 사람을 괴롭힌 생각을 하면 치가 떨린다고. 만일 이 일로 고초를 당한다 해도 사람들을 위한 일이야. 모두들 우리에게 고맙다고 할걸 우리가 당하고만 있으면 놈은 우리를 모두 죽이고 말 거야."  (P.170 '촛불' 중에서)


소설 ;촛불'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아무리 나쁜 인간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죽일 수는 없다. 심지어 계엄령을 통해 자신의 뜻에 반하는 수천 명의 사람들을 죽이려고 계획했던 독재자, 내란 수괴의 원흉조차 우리 손으로 해를 가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소설 '촛불'은 마태복음 5장 38절~39절로 시작된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고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보복하지 말라.'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평생 민중들과 함께했던 톨스토이. 물론 19세기 당시의 민중들은 선량함과 잔인함이라는 양면성을 지닌 절대다수의 농민들이었지만 톨스토이가 바랐던 것처럼 그들이 사랑, 용서, 구원을 통하여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기는 어려웠을 터, 톨스토이는 자신이 쓴 작품을 통해 그 바람을 염원하고 있을 뿐이다.


"한 번은 우리 곁을 지나갈 때 러시아인 의사가 '너무 심하게 때리지 마십시오'라고 병사들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러나 그들은 사정없이 내리쳤어요. 그가 내 곁을 두 번 지나갔을 때에는 이미 자기 발로 걷지 못하고 끌려갔습니다. 그의 등은 너무나 참혹해 차마 볼 수가 없었어요. 나는 눈을 감았습니다. 그는 결국 쓰러져 실려 나갔고 다음에 두 번째 사람이 끌려 왔어요. 그리고 세 번째 사람이, 또 네 번째 사람이 끌려왔습니다. 모두들 쓰러졌어요. 어떤 사람은 겨우 살아서 들려 나갔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그것을 서서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처형은 이른 아침에 시작되어 오후 2시까지 여섯 시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P.226 '무엇 때문에' 중에서)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으로 있는 유흥식 추기경은 "정의에는 중립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안에, 저 깊숙이 살아있는 정의와 양심의 소리를 듣는다면 더 이상 (선고를) 지체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는 말씀도 덧붙였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보다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들이, 적어도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는 더욱 잔인하며 그들의 입에서 사랑이나 용서와 같은 말은 더 이상 듣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우리는 서울의 심장부인 광화문 광장을 지날 때마다 그 사실을 눈과 귀로 확인하곤 한다. 자신의 의도나 목적을 교묘히 숨기는 기술을 끝없이 연마해 온 현대인은 자신의 말과 글에서도 그것을 숨기는 데 아무런 죄책감이 없다. 하기에 광화문에 모인 사람들 역시 입으로는 아멘을 외치면서 헌재를 파괴하고 누군가를 죽이자는 구호를 서슴없이 외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다만 타인을 속이기 위한 작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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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칫하며 한 발짝 뒷걸음질 치던 봄이 제자리를 찾은 듯합니다. 내렸던 눈도 모두 녹아 며칠 전의 폭설은 마치 변덕스러운 봄날에 있었던 작은 해프닝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3월 중순에 대설주의보라니... 갑작스러운 눈 소식에 놀랐던 것은 비단 인간만은 아니었던 듯 어제 그제 파랗게 질린 냉기가 새벽 등산로에 가득했었습니다. 사람도, 나무도, 동물도, 땅도, 심지어 대기를 떠도는 공기마저 놀랐었나 봅니다.


기온이 오르자 미세먼지가 가득합니다. 아파트 화단에도 산수유꽃이 피었습니다. 지워질 듯 위태로운 노란 산수유꽃은 자신의 존재감을 내세우지 않아 좋습니다. 알아주는 이 하나 없어도 조용히 피었다가 그 끝도 알려주지 않은 채 지워집니다. 누군가의 부지런한 시선이 주어지지 않는 한 우리는 산수유꽃의 종말을 결코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게 요란하지 않은 모습으로 스러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따금 생각합니다. 죽음이 불러오는 누군가의 슬픔이나 그리움도 없이 그저 조용히, 마치 어제의 일상인 양 가볍게 사라질 수만 있다면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조금 더 겸손해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한덕수 총리의 탄핵심판 선고가 24일 오전으로 정해진 가운데 내란을 주도했던 윤석열에 대한 선고 기일은 여전히 오리무중, 안갯속입니다. 지난해 말부터 이어져 온 국민들의 내란 피로감은 그렇게 끝도 없이 연장되고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 극우 시위자들의 철없는 행동은 점점 도를 넘고 있습니다. 대학생들에 대한 폭력은 물론 이제는 그 대상을 넓혀 정치인들에게로 향하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프랑스에서 보았던 극렬 시위자의 난동을 우리나라에서도 보게 될 줄이야...


현 정부가 집권한 이래 대한민국의 민주화 지수는 크게 추락했습니다. 물론 어느 한 분야도 좋아진 게 없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딱 하나 좋아진 게 있다면 국민들 대부분이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종교를 하나의 산업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대한민국의 종교는 믿음이나 구원의 차원이 아니라 종교 지도자의 배를 불리는 하나의 산업체로서 기능한다는 사실을 국민 대다수가 깨닫게 되었다는 건 현 정부가 이룩한 커다란 성과라고 하겠습니다. 일요일이면 습관처럼 성당에 나가는 나도 주위 사람들로부터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듯 차가운 시선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로 어디 가느냐? 물었을 때 교회에 간다고 답하는 경우입니다. 성당이 아닌 교회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그야말로 하느님이 아닌 목사의 부역자로 전락하는 것은 물론 긴급 구제가 필요한 참으로 딱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식은 교회는 물론 사찰이나 무당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종교를 갖는다는 건 지능이 떨어지는 이의 한심한 작태로밖에 인식되지 않는 듯합니다. 아무리 할 게 없기로서니 목사나 무당의 농간에 놀아나느냐는 비아냥을 수도 없이 들어야 합니다.


한낮 기온이 부쩍 올라 들고 나온 코트가 부담스러운 하루였습니다. 주말을 맞는 사람들의 표정은 제법 밝았고, 헌재 판결이 늦어지면서 생긴 내란의 피로는 그들의 얼굴에 덕지덕지 묻어나는 듯했습니다. 3월도 이제 마지막 한 주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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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
지젤 사피로 지음, 원은영 옮김 / 이음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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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쓰는 말 중에는 그 의미를 명확히 구분하여 적절한 대상에게 한정하여 사용할 필요가 있는 것들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적절한 대상을 구별하지 않은 채 모든 대상에 함부로 사용하였을 때,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어린 아이나 의미도 모른 채 어떤 말이든 마구 사용하는 청소년기의 아이들에게 우리는 기성인으로서 잘못된 선례를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말들 중에 대표적인 단어가 '훌륭하다'이다. '훌륭하다'는 말은 '사람의 됨됨이나 행실 또는 능력 등이 썩 좋아서 나무랄 곳이 없다'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썩 좋다'는 기능적 부분과 더불어 '됨됨이나 행실'을 규정하는 도덕적 의미를 함께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능적으로는 우수하지만 사람의 됨됨이는 시원찮은 이에게 '훌륭하다'는 말을 결코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한 야당 국회의원이 어느 인터뷰에서 말하길, "국민의힘에도 훌륭한 법조인이 많다."고 하는 걸 보고 나는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는 적어도 '훌륭한'을 '유능한'으로 대체해야만 했다. 그들이 법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인간성이 좋다는 것은 많은 국민들이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훌륭하다'는 말의 오용 사례가 비단 정치권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언어를 다루는 일을 업으로 하는 문학계에서도 그와 같은 사례는 빈번하게 발생한다. 노벨상 후보에 올랐던 어느 시인이나 표절 의혹이 밝혀지기 전까지 국민 작가로 칭송되던 어느 소설가에게도 '훌륭하다'는 말은 마치 그들에게 수여된 명예 훈장처럼 끝없이 따라붙곤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읽는 문학 작품에 대하여 작가의 추한 사생활이나 도덕적 결함을 도외시한 채 오직 작품으로서 객관적인 평가가 내려질 수 있을까?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지젤 사피로는 그의 최근 저서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에서 우리가 작가와 작품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문화계를 전문으로 하는 사회학자로서, 작가의 도덕성과 작품의 도덕성이 가진 관계를 부정하지 않고, 작품이 어떤 사람들이나 집단의 출신, 성별 또는 성적 기호를 이유로 하는 혐오 선동과 물리적 또는 상징 폭력 선동을 포함하지 않는 한, 문화 생산 장의 고유한 기준에 따라 상대적이고 자율적인 방식으로 작품을 판단할 것을 요구하는 중간 입장을 결론에서 제시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작품 생산의 조건 및 작가들에 대한 공론을 막아서는 안 된다."  (p.32)


책의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이 책은 사회학적 연구 결과가 아닌 '에세이' 수준의 저서이지만 다양한 이론과 학문적 논의를 바탕으로 작가와 작품의 분리라는 문제를 심도 있게 탐구한다. 물론 저자는 이 문제를 문학, 철학, 영화, 미술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거론하고 있는 까닭에 문화적 지식이나 소양이 일천한 나와 같은 독자에게는 책을 읽고 소화하는 데 힘겨운 측면이 없지 않으나, 논란이 되는 사안마다 저자가 제시하는 접근 방법과 분석 과정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저자의 의견에 어느 정도 수긍하게 된다. 그러므로 독자는 이론적 토대가 되는 책의 1부를 비교적 꼼꼼하게 훑고 기억하면서 2부의 사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폴란스키, 하이데거, 블랑쇼, 한트케 등에 대한 사전 지식과 함께.


"폴란스키처럼 작가가 권위를 남용할 때, 또는 인종차별적이거나 성차별적인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기 위해 자신의 명성을 이용할 때(다시 한번 분명히 하지만 한트케의 사례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를 용인하고 심지어 상까지 주어야 하는지는 아직 남아 있는 문제다. 심사 위원들이 최고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양심에 비추어 행동해야 한다. (공모를 내포하는) 모든 책임하에."  (p.201)


지젤 사피로의 저서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가 우리에게 관심을 끄는 이유는 제국주의 일본에 의한 식민지 과정을 겪었던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 때문이기도 하고 해방 이후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이념적 대립 양상으로 발발한 한국전쟁의 비극을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했던 여러 작가들, 이를테면 이광수, 채만식, 서정주 등과 같은 친일 부역 작가들의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백석이나 홍명희와 같은 월북 작가들의 작품에 대해 국가적 이데올로기를 배제한 채 수용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 그리고 최근에는 박민규, 신경숙 등의 작품에서 불거진 표절 문제와 그들이 쓴 이후의 작품에 대해서, 성추행 의혹 폭로 이후 작품 활동을 이어간 고은 시인과 같은 문제 등 작가와 작품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에게도 결코 명쾌하지 않다.


"창작 작업은 작가의 의도로 환원될 수 없기에 작가는 당대의 사회적 표상들을 전하게 되는데, 비평가들은 작품이 어떻게 이러한 표상들을 재생산하거나 전복하는지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회화와 영화에도 적용된다. 하지만 표상은 작품을 포섭하기에 충분치 않다. 형식은 전혀 중립적이지 않다."  (p.221)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만이 문학적으로 충만한 작품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작가와 작품은 일정 부분 분리하여 수용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독자 역시 이념적 성향이나 도덕적 관념에 의해 지배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 역시 박민규 작가의 팬 중 한 사람으로서 그가 썼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낮잠>이라는 작품이 각각 인터넷 게시판 글과 일본 만화를 표절했다는 사실을 작가 스스로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작가의 재능을 안타까워하며 차기 작품을 기다리고 있는 입장이다. 작가와 작품을 완벽히 분리하는 게 여전히 쉽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개인의 기호와 취향이 결합되었을 때는 이 문제는 더더욱 어려워진다. 그럼에도 나는 박민규를 일러 훌륭한 작가라고는 말할 수 없다. 표절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지만 그의 재능은 빛나는 까닭에 나는 지금도 그가 유능한 작가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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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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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며칠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 떠도는 어떤 동영상도 보지 않은 채 오롯이 책에 묻혀 지냈다. 그러나 눈으로 읽었던 글자는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이해도 되지 않는 책을 읽는다는 건 어둠 속에 놓인 낯선 물체를 매만지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산다는 건 이따금 해결할 수 없는 삶의 부조리를 맥없이 목도하는 일이지만 그래도 무작정 살고자 했던 의지는 그와 같은 부조리와 조우할 때마다 한풀 꺾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란 수괴 혐의를 받고 어렵게 구속되었던 대통령이 까닭도 없이 석방되고, '나는 계몽되었습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17~18세기의 계몽주의 시대로의 회귀를 갈망하는 몇몇 정신이상자의 망언을 듣고 있는다는 건 고문과 진배없었다.



전에도 몇 번 밝힌 바 있지만 마땅히 읽을 책이 없거나 싱숭생숭 책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에는 나는 언제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펼쳐 들곤 한다. 그럴 때 하루키의 소설보다는 그의 에세이가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작가의 감정은 독자의 감정이라는 기치 아래 '감정 동일시의 원칙'을 추구하는 우리나라 에세이와는 다르게 작가가 지나쳐 온 특정 시기의 문화, 예술, 사회 등을 마치 스케치하듯 덤덤하게 글로 옮기는 일본 작가의 에세이는 요 며칠 집중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나와 같은 독자에게는 더없이 좋은 먹잇감이 아닐 수 없었다. 책을 읽는 나 역시 '아하, 그 시절엔 그런 일이 있었던 게로군.' 하고 덤덤하게 넘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기운도 없는 내가 굳이 감정 소모를 할 필요도 없이.


"죽은 자를 칭송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젊은 나이에 죽은 자라면 더욱 그렇다. 죽은 자는 배신하지 않고, 반격도 하지 않는다. 나이도 먹지 않고, 머리도 벗어지지 않으며, 배도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조용하고도 완전하게 죽어 있을 뿐이다. 가령 그대가 그들의 죽음에 싫증이 나 잊어버린다 한들 별문제 될 것은 없다. 그냥 잊어버리면 그만이다. 그것으로 끝이다. 잊혔다고 해서 그들이 그대의 집을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일은 없다. 그들은 그저 암흑 속에서 침묵을 지킬 뿐이다. 그렇다, 죽은 자를 칭송하는 것은 너무도 손쉬운 일이다."  (p.55)


우리나라에서는 2012년 7월에 초판이 발행된 하루키의 얇은 에세이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은 이처럼 시니컬하고 별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말하자면 요즘처럼 날씨 변덕이 심한 환절기의 오후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인근의 작은 공원에 옹기종기 모인 노인 몇몇의  열띤 시국 토론을 책에다 담아 놓은 것과 비슷하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로서의 명성이나 지명도가 없었더라면 책으로서의 생명력은 진즉에 사라졌을 법한 책이지만, 그 어떤 일에도 집중할 수 없고, 어떤 일에도 의욕이 생기지 않았던 요 며칠의 나에게는 '그래도 뭔가 하고 있구나' 하는 위로를 던져주기에는 충분했던 책이었다.


"나는 파티라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초대받아도 가지 않는 게 보통인데, 만약 쌍둥이 자매를 에스코트할 수 있다면 생활 패턴을 적극적으로 바꿀 의향이 있다. 딱히 미인이 아니라도 좋다. 미인이 아니라도 별 상관없다. 아주 평범한 여자 쌍둥이로 족합니다. 꼬드기고 싶다거나, 같이 자고 싶다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나는 그저 쌍둥이 자매와 파티에 가고 싶을 뿐이다. 왠지 아주 특별한 경험이지 않을까 하는 기분이 들 뿐이다."  (p.62)


작가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조하거나 작가가 느낀 감정에 나의 감정을 완전히 일치시켜야만 온전히 책을 읽은 듯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라면 "시간이 남아도는 것도 아닌데 굳이 이런 책을 왜 읽는 거야?" 하는 질문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등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표정으로 책장을 넘기는 것이 독서인의 유일한 자세는 아닐 터, 우리는 이따금 풀어지듯 침대에 누워 때로는 낄낄대기도 하고, 꾸벅꾸벅 졸기도 하면서 시간의 추이를 이따금 가늠하는 것도 독서의 한 형태가 아닐까.


"이 역시 자랑이 아니지만, 나는 한때 상당히 가난했었다. 막 결혼했을 무렵이다. 우리는 가구 하나 없는 방에서 소리 죽여 살았다. 스토브조차 없어서, 겨울밤에는 고양이를 껴안고 추위를 견뎌냈다. 고양이도 추우니까 사람에게 꼭 달라붙어 있었다. 거의 공생에 가까운 상황이다. 길을 걷다가 목이 말라도 찻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여행도 가지 않고 옷도 사지 않았다. 오직 일만 했다. 그렇다고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p.192)


대한민국은 지금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문득 꿈에서 깨고 나면 그제야 비로소 '아, 그때는 정말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암흑의 시간이었지.' 하고 서로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저마다의 기억을 털어놓겠지만, 국가의 모든 시스템이 무너진 지금 이 시간을 견디는 건 그 누구에게도 녹록지 않은 일. 멧돼지를 닮은 한 인간이 저지른 2년 반의 분탕질이 대한민국의 미래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말았다. 지금도 우리는 끝나지 않은 '내란의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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