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만난 물고기
이찬혁 지음 / 수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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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는 '죽음'이라는 가장 완벽한 방식으로 세상과 결별하게 되겠지만 그 이전에 겪는 크고 작은 이별을 통해 '죽음'에 대한 공포와 완전한 이별에 대한 상실감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들곤 한다. 그렇다면 삶에서 겪는 의도하지 않았거나 의도된 이별은 과연 무슨 소용일까. 우리에게 어떤 의미, 어떤 철학적 깨우침을 주는 것일까.

 

불교 경전 법화경에는 만남과 헤어짐에 대한 명징한 대답이 기록되어 있다. '만난 사람은 헤어짐이 정해져 있고, 가버린 사람은 반드시 돌아온다.(會者定離去者必返)'는 이 말은 잔인할 정도로 냉정하게 들리지만 결국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음을 절감하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끝없이 새로운 만남을 꿈꾸고 새로운 이별에 번번이 절망하며 상처 받는다. 만남과 헤어짐의 무의미한 반복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혜택은 어쩌면 영혼의 성숙과 이를 통한 예술로의 승화가 아닐까 싶다. 그런 까닭에 예술은 개인의 고통을 자양분 삼아 탄생하는 고통의 산물이다.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라면 예술가는 노래로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예술가는 그림으로 시위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어쩌면 몽상가 혹은 혁명가. 자신이 선택한 종목보다 한 움큼 더 느끼고 한 발치 더 앞서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내가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찾고 그 길을 선택한다고 해도 그것은 특별하고 굉장한 일이 아닌, 이미 포화 직전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는 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p.63)

 

악동뮤지션 이찬혁의 첫 번째 소설 <물 만난 물고기> 역시 주인공 '선'이 '진짜 예술가가 되기 위해 떠난 여행길에서 매력적인 여인 '해야'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선아는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사람을 싫어한다는 해야의 자유에 대한 갈망과 틀에 얽매이지 않는 소원들에 공감하며 순간순간 떠오르는 노랫말을 기록하고, 선아 역시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음악가가 되기를, 진정한 예술가 되는 꿈을 꾼다. 얼룩말을 타고 횡단보도를 건너보고 싶다는 해야, 현실과 환상의 절묘한 조화를 통해 삶에서의 자유를 동경하는 해야와 어울리면서 선아 역시 세상의 틀에서 자유로워진 자신을 느낀다.

 

"나는 이야기를 듣다 잠이 든 해야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침실에 눕혀주었다. 곤히 잠겨 있던 그녀의 눈꺼풀이 눈에 띄었다. 그녀를 만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못했으면 난 이 마지막 여행 이후로 음악을 하지 않을 것이었다. 음악가보다 환경미화원이 더 멋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야는 나의 음악에서 결핍된 자리를 정확히 채워주고 있었다. 그녀의 말과 생각은 나를 번뜩이게 만들었다." (p.114~p.115)

 

사실 이 소설은 전문 소설가의 작품에 비하면 독자의 기대에 한참이나 뒤진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이름을 들으면 알 만한 유명인들이 수필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예술관을, 자신의 가치관을, 그리고 삶의 목표나 지난 삶에 대한 회상을 두서도 없이 써내려갔던 것과는 다르게 소설이라는, 일반인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분야에 도전함으로써 음악인으로서의 일탈과 자유를 향한 의지를 피력했다는 점에서 나는 이찬혁의 도전을 칭찬해주고 싶다.

 

"해야는 한 권의 책이에요. 그녀의 시작과 결말은 정해져 있는 거죠. 하지만 그녀가 그걸 의식하면서 따라가는 건 아니에요. 그녀가 순간순간 만들어나가는 게 곧 그녀의 이야기인 한편, 자신이 결정적인 순간에 어떠한 역할을 할지는 이미 결정이 끝났다는 거예요." (p.150)

 

어떤 소설이든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 이야기는 만들어지고, 사랑과 이별, 욕망과 성취, 절제와 일탈 등 인간의 다양한 모습들을 그리며, 결국 한 편의 소설은 작가 내면에 존재하는 삶의 의미를 이끌어내곤 한다. 아무리 좋은 소설이라도 독자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무리 하찮은 소설이라도 독자 모두가 싫어하지는 않는다. 결국 우리는 다양한 소설을 통해 자신의 전체적인 삶을 계획하고, 따라해 보고, 수정하며,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간다. 다만 우리에게 정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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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판 사나이 이삭줍기 환상문학 1
아델베르트 샤미소 지음, 최문규 옮김 / 열림원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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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한동안 쉼 없이 글을 쓰다 보면 글을 쓰지 않는 일상의 순간에도맥락없는 단어들이 머릿속을 맴도는 경우가 더러 있다. 어떤 날은 '돌연', '불현듯', '과연' 등과 같은 부사가 내 머릿속을 놀이터 삼아 온종일 휘젓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이내', '겻불', '부지깽이' 등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우리말 명사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런 경험은 주로 산길을 거니는 아침 시간이나 노을을 바라보는 잠깐의 여유 시간에 진해지게 마련인데 자맥질하듯 떠오르는 단어들을 하나하나 음미하며 그중 맘에 드는 단어들을 골라 멋진 글로 구성하기에는 시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한참 뒤떨어진 나로서는 언감생심 욕심에 불과할 뿐 결국 머리만 어지럽힌 채 잠깐의 여유 시간을 허비하고 만다. 이런 변명은 물론 글재주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나의 결함을 방어하기 위한 치졸한 수단에 불과하겠지만 말이다.

 

마치 몽유병과도 같은 단어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나는 '간헐적 단식'이 아닌 '간헐적 글쓰기'를 선택하기에 이르렀는데, 이게 또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어서 글을 쓰는 일이 낯선 일이 된 까닭에 한 편의 짧은 글을 완성하는 데도 전에 없이 많은 시간을 소비하기도 하고, 전에는 감당할 수 없는 많은 단어들이 떠올라 고민이던 게 이제는 숫제 꼭 써야 할 단어조차 좀체 떠오르지 않는 지경에 이르러 글을 쓴다는 것 자체를 포기해야 할까 고민을 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머리를 쥐어짜며 끙끙대서 겨우 한 편의 글을 완성하기도 한다.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다 읽고 리뷰를 써야겠다 마음먹었던 것도 꽤나 오래전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내내 붓방아만 찧고 글은 한 줄도 쓰지 못한 채 시간만 보냈다. 그러다가 나는 또 몇 권의 다른 책을 읽으면서도 리뷰는 쓰지 않았다. 자본주의 태동기에 쓰인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마치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면 할수록 황금만능주의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는 걸 미리 예견이라도 한 듯 소설 속 주인공 슐레밀은 자신의 그림자를 팔라는 정체불명의 사내에게 기다렸다는 듯 선뜻 팔아넘기고 만다. 대신에 그는 금화가 고갈되지 않는 마법의 주머니를 받는다.

 

"이 세상에서 돈이 업적과 덕성보다 훨씬 중요할지라도, 그림자야말로 그러한 돈보다 훤씬 더 소중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예전에는 양심을 지키기 위해 모든 재산을 바쳤지만 지금은 단순한 돈 때문에 그림자를 바치고 만 것이었다. 이제 나는 이 지상에서 어떤 사람이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P.33)

 

슐레밀은 비록 자신의 그림자를 잃었지만 마법의 주머니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부러움을 얻으며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한다. 그에게는 더없이 충성스러운 하인 벤델이 있었고, 그림자가 필요할 때는 기꺼이 그의 곁에 서주었다. 그러나 그림자가 없이는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지위를 온전히 얻지 못하며 사람들에게 혐오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인의 도움 없이는 방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음은 물론 사랑하는 여인에게도 적극적으로 다가서지 못한 채 주변만 맴도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슐레밀에게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그는 결국 자신의 왕국에서도 쫓겨난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한 순간 자신의 그림자를 사 간 정체불명의 사내가 찾아온다.

 

"우리는 단지 동일하게 수동적으로 작동되는 동시에 능동적으로 작동하는 수레바퀴처럼 그 안에 맞물려 있는 거야. 일어나야만 하는 일은 일어나는 법이며, 그러한 섭리가 없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법이지. 결국 내 운명에서, 그리고 내 운명을 공격하는 이들의 운명 속에서 나는 그러한 섭리를 존중하는 것을 배웠던 거야." (p.92~p.93)

 

정체불명의 사내는 자신에게 영혼을 팔면 그림자를 되돌려 주겠노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슐레밀은 그의 제안을 거절한 채 방랑길에 오른다. 그리고 전 세계를 떠돌던 슐레밀은 한 때 자신의 하인이었던 벤델의 고향 근처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자신에게서 받았던 금화로 벤델은 '슐레밀 병원 재단'을 설립하였고, 슐레밀은 자신의 이름을 딴 '슐레밀 병원'에서 깨어났다. 의식이 돌아온 슐레밀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벤델과 과부가 된 미나의 대화를 듣게 된다.

 

"아니에요, 벤델 씨, 기나긴 꿈을 꾸고서 마음속에서 다시 깨어난 이후 저는 평온하답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며, 또한 죽음도 두렵지 않게 되었어요. 이제 저는 평온한 마음으로 과거와 미래를 생각할 뿐입니다. 당신이 지금 신을 공격하는 마음으로 당신의 주인이자 친구에게 봉사하는 것도 내면이 평온한 행복감으로 가득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p.129)

 

이 소설의 작가인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는 프랑스의 귀족 출신이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으로 인해 독일로 망명을 해야 했고 평생을 독일인으로 살아야 했다. 말하자면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야만 했던 그는 독일과 프랑스 어느 한 편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인이자 외톨이였다. 그런 까닭에 슐레밀에 투영된 자신의 삶이 독자들에게 온전히 전달되는 듯한 이 소설은 작가의 의도와 주제가 쉽게 드러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가 어떻든 황금만능주의로 치닫는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경고는 과거에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유효하다는 점이다. 검찰과 언론에 대한 국민의 개혁 요구가 어느 때보다 드높은 요즘, 우리 모두는 자신의 지나친 욕심 때문에 정체불명의 누군가에게 자신의 그림자마저 팔아치우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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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이정호 그림 / 알마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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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합리적인 근거를 갖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계절은 역시 가을이 아닌가 싶다. 날씨가 선선해지고 초록의 나뭇잎들이 울긋불긋 단풍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의 몸도 마음도 시나브로 사색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변화의 절정은 역시 낙엽이 지고 스산한 바람이 부는 바야흐로 만추가 되겠지만 말이다. 이와 같은 계절에 인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돕는 책이라면 역시 올리버 색스의 책들이 아닐까 싶다. '의학계의 계관시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의사로서뿐 아니라 문필가로도 유명한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신경학자로서 전문적 식견과 따스한 휴머니즘을 드러냄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인간 존엄을 깨닫도록 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아서 매년 가을이면 그의 대표작인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종종 꺼내 읽곤 한다. 물론 다른 계절에도 마음이 울적할 때면 이따금 꺼내 읽기는 하지만.

 

수줍음이 많고 나서기를 싫어했던 색스는 브롱크스 자치구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혼자 살면서 신경과 의사로서의 경험과 자신이 만났던 환자들의 사연을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들려준다. 1부와 2부에서는 주로 뇌 기능의 결핍과 과잉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3부와 4부에서는 지적장애를 지닌 환자들에게 발견되는 발작적 회상, 변형된 지각, 비범한 정신적 자각 등을 다루었다. 책을 읽다 보면 정말 이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일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면서 '아, 나 역시 이들과 비슷한 정신적 상처를 한두 개쯤 안고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자각을 하게 된다.

 

"이후 3개월간, 우리는 참을성 있게 검토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저항하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했으며 자기 자신과 삶에 대해 자신감을 잃기도 했다. 그러나 건강하고 인간적인 잠재 능력이 그에게 숨어 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심한 투렛 증후군으로 고생하며 살아온 20년의 세월에도 상실되지 않고 남아 있던, 인격 저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잠재 능력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p.173)

 

우리는 종종 차별적인 용어를 통해 자신과 다른 사람을 구분하곤 한다. 이를테면 '미친X'라거나 '병X' 등 입에 담기조차 힘든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함으로써, 그들을 격하시키고 더불어 자신을 우월한 위치에 놓이게 하는, 정말 야비하고 비열한 행위를 다수의 편에 속한 우리는 무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비록 의도적이거나 악의적으로 한 말은 아닐지라도  

 

"더러는 지능이 낮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자물쇠를 열지도 못하고, 하물며 뉴턴의 운동법칙을 이해하거나 세계를 개념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많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 있다. 그것은 세계를 구체적인 것, 상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마틴이나 호세, 쌍둥이 형제처럼 재능이 풍부한 '바보'들이 가진 또 하나의 측면이다." (p.295)

 

'아기'라는 보편적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는 자신의 이름을 가지 개별적 인간으로 성장하여 한동안 또 그렇게 살아가다 결국에는 '노인'이라는 보편적 인간으로 죽어간다. 나는 이러한 사실이 무척이나 다행스럽다고 생각한다. 개별적 인간으로 살아갈 때의 심한 격차와 불평등, 차별과 소외 그리고 무한경쟁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피곤한 현실에서 벗어나 '노인'이라는 보편적 인간이 된다는 건 체념과 수용을 전제로 같은 인간이 될 수 있음을 이해하는 나이가 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하나 누구에게도 강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공감'이라는 정신적 활동이다.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타인에게 공감을 강요하거나 강제할 수는 없다. 이럴 때 나는 '공감'의 이전 단계로 '이해'의 필요성을 절감하곤 한다.

 

올리버 색스의 여러 저서를 읽을 때마다 나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중증의 신경병 환자들에게 쏟았을 저자의 헌신과 노력을 어느 정도 직감하곤 한다. 그들의 아픔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공감하지 않고서는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영혼'은 과학적인 용어가 아니기 때문에 그는 이 단어를 사용하는 데 약간 주저하면서 많이 사용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러나 이 단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현상이 있음을 그는 믿고 잇다. 우리는 24편의 이야기 가운데 어느 것을 읽어도 그의 환자에 대한 애정이 가슴 찡하게 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이것도 '영혼'이라는 개념을 굳게 신뢰하는 그의 신념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그가 병 자체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였다면 이렇게 진한 감동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p.385 '역자후기' 중에서)

 

인간을 이해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영화감독 루이스 부뉴엘의 회고록에는 기억에 대한 비참하면서도 가슴 섬뜩한 말이 등장한다. 이 책에서도 인용이 되고 있는 부뉴엘의 말은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내가 기다리는 것은 완전한 기억상실뿐이다. 그것만이 내 삶을 모두 지워버릴 수 있다. 내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이다. 색스 역시 '만약 기억의 대부분을 잃어버린다면, 그래서 자신의 과거를 잃어버리고 현재 자신이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다면, 과연 그 사람에게는 어떤 삶(만약 그런 게 있다면), 어떤 세계, 어떤 자아가 남게 될 것인가?' 하고 묻는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정체성은 우리 각자에게 속한 기억의 총체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신의 기억을 완전히 잃었거나 영혼에 이상이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 인간 영혼의 틀을 벗어난 그들마저 이해하기에는 나는 여전히 부족한 인간이다. 옷깃을 파고드는 소슬한 한기로 인해 사색을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계절, 가을이다. 인간을 이해하고 가엾이 여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한 첫걸음이자 삶을 통해 배워야 할 깨우침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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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살 것인가 -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꾸다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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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원하는 물건을 선택하고 구매하는 데 있어 그 기준은 항상 구매력, 즉 자신의 경제적 형편에 달려 있는 듯 보인다. 불행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좀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의 구매력을 높이기 위해 투잡, 쓰리잡도 마다하지 않으며, 때로는 도시를 떠나 이거고 저거고 모든 걸 포기한 채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게 어디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마는 작게는 아주 소소한 기호식품의 구매에서부터 크게는 가족 전체가 살기 위한 주택의 구매에 이르기까지 모든 선택의 기준이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돈이라고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리곤 한다.

 

건축가 유현준이 쓴 <어디서 살 것인가>는 자신 살 곳을 고르는 데 있어 모든 사람이 천편일률적으로 제시하는 돈이라는 기준에서 벗어나도록 돕는다. 그렇다고 이 책이 배산임수를 논하는 풍수지리서도 아니요, 자녀의 교육과 교통, 의료와 문화 시설에 대한 접근성 등을 따지는 부동산 관련 서적도 아니다. 인류 문화를 탄생시킨 요람으로서의 공간이 가진 기능과 그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오직 돈에 매몰되어가는 현대인의 기준을 벗어나 우리는 어떤 공간에서 행복을 느끼며, 어떤 주변 환경이 우리를 더 풍요롭게 하는지, 물질적 풍요가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어떠해야 우리는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지, 그러자면 우리는 어떠한 공간에서 어떻게 우리 아이를 성장하도록 해야 하는지 등 삶의 주체로서 우리가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변모시키기 위해 우리는 어떠한 선택적 대안을 제시하고 발전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제반 문제를 공간과 결부지어 이야기하고 있다.

 

"필자는 건축을 즐긴다. 건축을 공부했기 때문에 다른 도시로 여행을 가거나, 식당을 고르거나, 카페에 가거나, 길을 걸을 때 비전공자보다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볼 줄 알게 되고, 음악을 자꾸 들으면 귀가 만들어지듯이, 독자 여러분이 이 책을 통해서 건축을 맛보고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조금이나마 키워졌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건축을 느끼면 인생이 더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다. 결국 인생은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고 다른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건축도 우리의 행복을 더하는 데 일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p.372)

 

이 책에서 저자는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교도소를 닮은 현대 학교 건축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힙합 가수가 후드티를 입는 이유와 쇼핑몰에는 왜 멀티플렉스 극장이 존재하는지, 파라오와 진시황제가 싸우면 누가 이길지, 현대인이 SNS를 많이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 건축과 상관도 없는 듯한 이야기들로 전개되다가 위기와 발명이 만든 도시를 통해 서울의 얼굴로 이어지고 자연스레 도시의 미래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저자는 벽, 창문, 기둥, 지붕, 길, 다리 같은 각각의 건축 요소를 통해 건축가의 시선에서 공간에 대한 생각들을 들려준다.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건축은 일종의 인류 문화의 총체, 인간 정신의 구체적 발현처럼 느껴진다. 집이란 그저 다 늦은 저녁에 하루의 피로를 풀기 위한 장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현대인의 인식을 바로잡으려는 듯 저자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의 공간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구획하며 어떤 방식으로 이끌어가는지, 삶이 진행되는 시간에 따라 우리는 어떠한 공간을 선택해야 하는지 과거와 현대를 넘나들며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통해 설득하고 있다. 책을 읽는 독자는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하고,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구수한 옛날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에 빠지기도 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 속 주인공 키팅 선생님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책상 위에 올라가라고 요청한다. 작지만 수십 센티미터 커지는 그 시점의 변화가 엄청난 생각의 변화를 가져온다. 일상에서 그 변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 계단이다. 어린아이들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재미있어하는데 어쩌면 키가 작은 아이가 어른보다 커지는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 계단이어서일지도 모르겠다." (p.222)

 

사물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기실 우리의 사고만 변화시키는 게 아니다. 작게는 우리의 느낌을, 우리의 행동을 변하게도 하고, 크게는 우리의 가치관을, 인생관을 변화시킴으로써 우리들 삶 전체를 바꾸기도 한다. 가을 늦더위가 한풀 꺾인 오후, 옅은 침묵을 배경으로 드문드문 가을 우수가 빗방울처럼 흩어지는 주말 휴일에 나는 도서관 한켠에 앉아 이 글을 쓴다. 도서관을 방문할 때마다 나는 번잡한 도시의 한 공간에 위치하면서도 도시의 소음이나 경쟁으로부터 멀찌기 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책들이 빽빽하게 꽂힌 서가의 숲을 거닐다 보면 왠지 모를 슬픔과, 아련한 추억과, 내가 좋아하는 작가와, 오래전에 읽었던 많은 작품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도서관 공간이 주는 묘한 여운이 나의 생각에 화답하듯 멋진 화음으로 응답하는, 사람들의 책장 넘기는 소리가 마치 어느 동굴의 메아리처럼 울려퍼지는 그런 오후. 지금껏 돈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자로서의 빈껍데기 삶을 살아왔던 내가 건축가 유현준의 <어디서 살 것인가>를 읽고 모든 게 달라질 리 없지만 공간이 뿜어내는 울림 하나하나를 느끼고 기억하다 보면 나에게도 언젠가 그 울림에 화답하듯 '내가 살 곳은 바로 여기야!' 하고 외치게 될 날이 찾아오지 않을까. 그때 나는 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가을 오후를 떠올리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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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와 잘 지내지 맙시다 - '셀프헬프 유튜버' 오마르의 아주 다양한 문제들
오마르 지음 / 팩토리나인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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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면서 겪는 대부분의 문제 앞에서 타인의 조언을 절실히 구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렇게 조언을 구하는 근본 이유는 조언자의 제안을 그대로 실천하겠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단지 내가 처한 상황과 지금 내가 겪는 고통을 누군가 알아주고 공감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조언은 단지 조언일 뿐 우리들 각자는 저마다의 생각이 있고, 스스로 판단을 하며, 여러 방법 중에서 조금이라도 나아 보이는 것을 선택하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과거에는 삶에서 직면하는 문제에 대한 조언을 우리 주변에서 구하곤 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 학교 선배나 친구, 자신이 믿는 종교의 성직자 등 대상이 되는 사람은 매우 다양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오프라인에서의 만남을 꺼려하는 추세를 반영하듯 삶에 필요한 조언도 유튜브가 대신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소위 '유 선생'으로부터 모든 걸 배우고 익히는 '유 선생'의 제자이자 동급생이 된 셈이다. 나 역시 유튜브 동영상을 자주 보는 건 아니지만 누군가를 기다리는 무료한 시간이나 대중교통을 타고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경우에 이따금 보게 된다. 유튜브 동영상을 검색하다 보면 유튜브에 콘텐츠를 올리는 많은 크리에이터 중에는 전문적인 지식을 알려주는 사람도 있지만, 삶에서 부딪치는 문제나 개인적인 고민을 상담하고 조언을 해주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다는 걸 알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고 그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걸까?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어쩌면 유튜브 크리에이터 오마르의 책 <모두와 잘 지내지 맙시다>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책을 다 읽은 후에야 비로소 그가 올린 유튜브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중단발 머리에 거뭇거뭇한 콧수염, 그닥 단정하지 않은 외모에 사뭇 반항적인 듯한 그의 말투는 전형적인 문제아처럼 보이지만 그래서인지 구독자는 제법 많은 듯 보였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걸 알려주고 싶어 한다는 건 무슨 뜻이냐면, 아는 게 없다는 뜻이다. 아무 문제가 없는 젊은이들을 문제 삼고 싶어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면, 지한테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꼰대가 되는 걸 예방하는 방법은 사실 간단하다. 잘 살아야 한다. 물론 쉽지는 않다. 한 인간으로 스스로 만족할 만큼 제 몫을 하는 제대로 된 인간이 돼야 한다. 아니면 정말로 고장 안 인간, 어처구니없는 인간이 될 수 있다." (p.26)

 

총 3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그가 올린 100여 개 이상의 콘텐츠 중 수십만 구독자들이 공감하고 열광했던 콘텐츠부터 선별해 담았고, 영상에선 못했던 '보태기' 이야기를 담았다고 한다. 제一장 '나를 '불편'하게 하는 속 '편한' 사람들', 제二장 '연애도 '체력'이 필요해', 제三장 '안 만만해지기 연습'에서 느껴지는 바와 같이 우리의 삶에서 누구나 겪게 될 문제들, 이를테면 인간관계에서 오는 문제들, 사회생활에서 부딪히는 예절과 관습에 대한 문제, 연애와 자존심 등에 관련된 문제 등 인생 전체를 망칠 만큼 중대한 문제는 아니지만 사소하다고 무작정 방치하기에도 뭔가 찜찜한 문제들에 대해 저자는 시원하게 처방을 내린다.

 

"착하다는 말, 듣기 좋다.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도 달콤하지. 근데 그 말 듣자고 굳이 잘 맞지도 않는 사람들과 잘 지내고 열심히 잘해줄 필요는 없잖나. 그건 결구 자신을 갉아먹는 일이다. 그래, 내 옛 친구 B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남들 비위 맞추느라 자신의 의사를 외면하지 말자. 좋은 이미지를 위안 삼으며 스트레스를 모르는 척하는 건 한계가 있다." (p.234)

 

나는 우리가 사는 인생에서 많은 가르침이나 교훈이 필요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신의 삶에서 건지는 건 시간에 켜켜이 쌓은 경험의 축적일 뿐 매 순간 누군가의 가르침이나 조언에 의해 정해진 삶을 살아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누군가의 가르침이나 조언을 끝없이 갈구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타인과의 교감이나 공감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조금쯤 누그러뜨릴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 모두가 이번 생이 처음이다. 그리고 2회차라고 해도 지금보다 딱히 더 현명한 모습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수학엔 정석이 있지만 인생은 그런 게 없으니까. 이건 수학의 정석을 3년 내내 베개로 썼던 사람이 쓴 삶의 참고서다. 참고서니까 그냥 참고만 하기를." (p.7 '프롤로그' 중에서)

 

어제 서초동 검찰청사 앞을 가득 메웠던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절대 권력에 저항하는 시민의 연대와 지지가 우리 사회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데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나와 생각이 비슷한 사람을 만난다는 건 유튜브 크리에이터의 콘텐츠에 '좋아요'나 '구독'을 누르는 것보다 훨씬 더 귀찮고 복잡한 일이지만 그 불편함을 딛고 우리 모두를 밖으로 이끌어냈던 원동력은 정의와 평등에 대한 우리 모두의 갈망이었는지도 모른다. 해방 이후 단 한 차례도 이루지 못했던 그 가치를 위해 우리는 공포를 딛고 서로의 등을 토닥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장엄한 물결을 두려워하는 어떤 이들은 '정신 나간 이들'이나 '좌좀' 등으로 폄하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쩌면 변화를 두려워하는 그들의 공포를 고스란히 드러낸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은 불의를 지지하는 소수의 몇몇 사람들의 의사를 무시한 채 다수가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조금씩 움직이게 되어 있다. 그것이 역사의 순리임을 유튜브 크리에이터 '오마르'의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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