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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
지젤 사피로 지음, 원은영 옮김 / 이음 / 2025년 1월
평점 :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쓰는 말 중에는 그 의미를 명확히 구분하여 적절한 대상에게 한정하여 사용할 필요가 있는 것들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적절한 대상을 구별하지 않은 채 모든 대상에 함부로 사용하였을 때,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어린 아이나 의미도 모른 채 어떤 말이든 마구 사용하는 청소년기의 아이들에게 우리는 기성인으로서 잘못된 선례를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말들 중에 대표적인 단어가 '훌륭하다'이다. '훌륭하다'는 말은 '사람의 됨됨이나 행실 또는 능력 등이 썩 좋아서 나무랄 곳이 없다'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썩 좋다'는 기능적 부분과 더불어 '됨됨이나 행실'을 규정하는 도덕적 의미를 함께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능적으로는 우수하지만 사람의 됨됨이는 시원찮은 이에게 '훌륭하다'는 말을 결코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한 야당 국회의원이 어느 인터뷰에서 말하길, "국민의힘에도 훌륭한 법조인이 많다."고 하는 걸 보고 나는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는 적어도 '훌륭한'을 '유능한'으로 대체해야만 했다. 그들이 법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인간성이 좋다는 것은 많은 국민들이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훌륭하다'는 말의 오용 사례가 비단 정치권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언어를 다루는 일을 업으로 하는 문학계에서도 그와 같은 사례는 빈번하게 발생한다. 노벨상 후보에 올랐던 어느 시인이나 표절 의혹이 밝혀지기 전까지 국민 작가로 칭송되던 어느 소설가에게도 '훌륭하다'는 말은 마치 그들에게 수여된 명예 훈장처럼 끝없이 따라붙곤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읽는 문학 작품에 대하여 작가의 추한 사생활이나 도덕적 결함을 도외시한 채 오직 작품으로서 객관적인 평가가 내려질 수 있을까?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지젤 사피로는 그의 최근 저서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에서 우리가 작가와 작품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문화계를 전문으로 하는 사회학자로서, 작가의 도덕성과 작품의 도덕성이 가진 관계를 부정하지 않고, 작품이 어떤 사람들이나 집단의 출신, 성별 또는 성적 기호를 이유로 하는 혐오 선동과 물리적 또는 상징 폭력 선동을 포함하지 않는 한, 문화 생산 장의 고유한 기준에 따라 상대적이고 자율적인 방식으로 작품을 판단할 것을 요구하는 중간 입장을 결론에서 제시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작품 생산의 조건 및 작가들에 대한 공론을 막아서는 안 된다." (p.32)
책의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이 책은 사회학적 연구 결과가 아닌 '에세이' 수준의 저서이지만 다양한 이론과 학문적 논의를 바탕으로 작가와 작품의 분리라는 문제를 심도 있게 탐구한다. 물론 저자는 이 문제를 문학, 철학, 영화, 미술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거론하고 있는 까닭에 문화적 지식이나 소양이 일천한 나와 같은 독자에게는 책을 읽고 소화하는 데 힘겨운 측면이 없지 않으나, 논란이 되는 사안마다 저자가 제시하는 접근 방법과 분석 과정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저자의 의견에 어느 정도 수긍하게 된다. 그러므로 독자는 이론적 토대가 되는 책의 1부를 비교적 꼼꼼하게 훑고 기억하면서 2부의 사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폴란스키, 하이데거, 블랑쇼, 한트케 등에 대한 사전 지식과 함께.
"폴란스키처럼 작가가 권위를 남용할 때, 또는 인종차별적이거나 성차별적인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기 위해 자신의 명성을 이용할 때(다시 한번 분명히 하지만 한트케의 사례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를 용인하고 심지어 상까지 주어야 하는지는 아직 남아 있는 문제다. 심사 위원들이 최고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양심에 비추어 행동해야 한다. (공모를 내포하는) 모든 책임하에." (p.201)
지젤 사피로의 저서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가 우리에게 관심을 끄는 이유는 제국주의 일본에 의한 식민지 과정을 겪었던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 때문이기도 하고 해방 이후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이념적 대립 양상으로 발발한 한국전쟁의 비극을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했던 여러 작가들, 이를테면 이광수, 채만식, 서정주 등과 같은 친일 부역 작가들의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백석이나 홍명희와 같은 월북 작가들의 작품에 대해 국가적 이데올로기를 배제한 채 수용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 그리고 최근에는 박민규, 신경숙 등의 작품에서 불거진 표절 문제와 그들이 쓴 이후의 작품에 대해서, 성추행 의혹 폭로 이후 작품 활동을 이어간 고은 시인과 같은 문제 등 작가와 작품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에게도 결코 명쾌하지 않다.
"창작 작업은 작가의 의도로 환원될 수 없기에 작가는 당대의 사회적 표상들을 전하게 되는데, 비평가들은 작품이 어떻게 이러한 표상들을 재생산하거나 전복하는지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회화와 영화에도 적용된다. 하지만 표상은 작품을 포섭하기에 충분치 않다. 형식은 전혀 중립적이지 않다." (p.221)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만이 문학적으로 충만한 작품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작가와 작품은 일정 부분 분리하여 수용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독자 역시 이념적 성향이나 도덕적 관념에 의해 지배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 역시 박민규 작가의 팬 중 한 사람으로서 그가 썼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낮잠>이라는 작품이 각각 인터넷 게시판 글과 일본 만화를 표절했다는 사실을 작가 스스로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작가의 재능을 안타까워하며 차기 작품을 기다리고 있는 입장이다. 작가와 작품을 완벽히 분리하는 게 여전히 쉽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개인의 기호와 취향이 결합되었을 때는 이 문제는 더더욱 어려워진다. 그럼에도 나는 박민규를 일러 훌륭한 작가라고는 말할 수 없다. 표절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지만 그의 재능은 빛나는 까닭에 나는 지금도 그가 유능한 작가라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