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좋은 날을 살아봐 - 제주 사는 미술치료사의 마음, 예술, 자연 이야기
정은혜 지음 / 아라의정원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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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에 비해 비교적 고단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운명'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곤 한다. 좋아하고 잘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따라 이 일 저 일 안 해본 게 없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하는 일마다 진득하니 오래 버티지를 못하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경험이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횟수가 많아질수록 스스로의 삶에 대한 의문과 혼란이 가중된다. 그들 중 어떤 이는 혼란과 동요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길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많은 이들이 자신의 혼란한 삶을 끝내 극복하지 못한 채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자위한다. 영문도 모르는 채 말이다.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 부른다. 그리고 운명에 거스르는 길을 선택했던 많은 이들이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혼란한 삶을 살다 갔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썼던 엘리자베스 길버트와 같은 삶을 살았던 이는 어쩌면 몇 안 되는 행운아 중 한 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미술치료사이자 생태예술가로서 제주에서 살고 있는 정은혜 작가 역시 그런 행운아 중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비록 그녀의 삶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지만 결국 자신이 좋아하고 운명에 거스르지 않는 길을 스스로 찾아냈으니 말이다. 작가의 산문집 <너의 좋은 날을 살아봐>는 그와 같은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방탕한 삶을 살아왔거나 길을 잃고 헤맸던 것도 아닌데 작가는 힘들고 고단했던 길을 돌고 돌아 지금에 이르렀다. 청소년기에 캐나다로 이민 가서 퀸스 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던 작가가 한국에 와서 미술관 큐레이터를 경험한 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예술대학(SAIC) 석사학위를 받고 미국 공인 미술치료사가 되었던 작가. 그와 같은 이력만으로도 순탄하고 편안한 삶을 꾸려갔을 듯한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


"나는 지금의 삶을 사느라 많은 것을 포기해왔다. 미술치료사가 되기 위해서 미술관 큐레이터 일을 포기했고, 한국에 돌아오기 위해서 캐나다와 미국에서의 삶을 포기했고, 서울에서 제주로 올 때는 안정적인 직장과 돈을 벌 기회를 포기했다. 나는 지금의 삶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들로 값을 치렀는지를 잊은 적이 없다. 내 삶에 만족하는 이유가 어쩌면 '잠정적 손해'로 비싸게 값을 치르고 선택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p.153)


선택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상황이라면 누구나 갈등과 혼란은 피하기 어렵다. 갈등을 최소화하고 확신을 강화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일을 통해 추구할 수 있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인지 몇 번이고 되짚어보는 것이다. 작가 역시 다르지 않았다. 자신의 삶에서 원하는 것 세 가지(친구, 자연, 카페)가 제주에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제주의 자연 속에서, 제주에서 새롭게 형성한 관계 속에서 안정을 찾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안정된 삶을 기반으로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고, 모래사장을 기어 다니며 주운 작은 플라스틱 알갱이로 설치 작품을 만들고, 시간을 내어 글을 쓴다.


"상처 없는 이가 없고, 스크래치 없이 어른으로 성장한 이는 없음을 깨달았다. 나만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경험이 다르고, 문화와 나라가 다르고, 전혀 다른 가족 안에서 있었던 일인데도 내 아픔의 계곡과 다른 이들의 아픔의 계곡 사이에 연결된 다리가 있고, 이 다리를 통해 연민으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  (p.207)


작가는 이 책의 원고를 처음 쓰기 시작한 시점이 '삶이 무너지고 관계들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듯한 때'였다고 회상한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인생 전체에서 그런 시기는 한두 번쯤 찾아오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그 상황에 처한 모든 사람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닐 터, 삶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의 방식은 서로 비슷한 듯 조금씩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시간을 내서 글을 쓰고, 누군가는 신발이 닳도록 숲을 거닐고, 또 누군가는 모든 관계를 끊고 침묵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비록 각자의 방식으로 삶의 협곡을 벗어났을지라도 자신의 경험만큼은 필요로 하는 다른 누군가에게 소중히 전달하고, 자신도 역시 오래도록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 모두 죽어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은유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괜찮게 여겨진다면 우리가 맺는 자연과의 관계가 좀 달라질까? 자연의 일부인 우리는 누구나 이 순환의 어느 단계 안에 놓여 있다. 이 순환을 잘 받아들이면, 자연을 파괴하고 영원히 살고픈 욕망을 좀 내려놓고 우리가 죽이는 다른 생명들에게 연민을 더 가질 수 있을까.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약간은 덜 무서워지지 않을까."  (p.284)


설 명절 연휴가 시작되는 첫날, 나는 밀린 숙제를 하듯 리뷰를 쓴다.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지난 추억을 되새김하는 것처럼 우리는 명절을 핑계 삼아 삶의 순환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뜬 사람들과 다음은 내 차례라는 듯 '아이고' 소리를 달고 사는 친척들과 갓난쟁이를 앞세우고 나타난 젊은 부부며 제법 어른 티가 나는 학생들 그리고... 명절이 아니면 같은 자리에서 한꺼번에 만날 수 없는 여러 얼굴들이 지난해에 비해 크게 달라진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 삶의 순환이란 바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타인을 통해 나의 변화를 감지하고 왠지 모를 슬픔에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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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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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처음 읽는 독자라면 아마도 그녀의 작품 전반에 흐르는 '솔직함'에 대해 놀라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솔직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끝없이 교육받으며 자라왔지만 솔직함으로 인해 받게 된 여러 불합리한 피해들을 경험하면서 솔직함보다는 오히려 숨김이나 외면, 과장이나 허풍, 윤색이나 덧붙임 등에 더욱 익숙해져 온 느낌이다. 그런 까닭에 성인이 된 지금, '솔직함'은 다만 도덕이나 윤리 교과서에 등장하는 형식적 단어일 뿐 실생활과는 거리가 먼, 일종의 소멸된 언어쯤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어른이 하는 말은 대개 촘촘한 여과장치를 통해 걸러진, 자신에게 조금의 피해도 가해지지 않을 듯한 말만 남게 되거나 거짓에 가까운 허풍이나 과장이 주를 이룬다. 이렇듯 어른들의 외면을 받는 '솔직함'이 아니 에르노의 작품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되살아난다.


"나는 늘 내가 쓴 글이 출간될 때쯤이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글을 쓰고 싶어했다. 나는 죽고, 더이상 심판할 사람이 없기라도 할 것처럼 글쓰기. 진실이란 죽음과 연관되어서만 생겨난다고 믿는 것이 어쩌면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p.9)


아니 에르노의 소설 대부분이 그렇듯이, 소설 속 주인공인 '나'와 '작가'인 아니 에르노 사이의 간극은 무척이나 좁다. 워낙에 좁은 간극 탓에 소설을 읽는 독자는 '나'와 '작가'를 동일시하거나 그렇다고 믿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작가가 의도하였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와 같은 결과는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작가의 체험을 일부 차용하여 소설화하는, 이른바 '자전적 소설'이나 '성장소설'과 아니 에르노의 소설을 같은 높이에서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 이것이 전적으로 작가 자신의 체험이라고 밖에 달리 말하기 어려운 적나라하고, 원색적인 표현이나 묘사가 소설 곳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작가 스스로도 '그것은 단지 소설 속 주인공의 경험이자 나(작가)의 상상력에 의한 결과'일 뿐 나의 직접적인 체험의 결과물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며 기자의 짓궂은 질문에 슬몃 발을 뺄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는 얘기다.


"그런 순간이면 태초의 야만성이 솟구쳐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만약 사회가 내 안에 잠재해 있는 충동에 재갈을 물리지 않았다면 내가 저지를 수도 있었을 행위들, 예를 들면 단순히 인터넷에서 그 여자의 이름을 찾아보는 대신 "갈보 같은 년! 더러운 년! 잡년!"이라고 울부짖으며 그녀를 마구 쏘아대는 등의 행위들이 언뜻언뜻 떠올랐다. 게다가 권총만 들지 않았다 뿐이지 나는 커다란 목소리로 종종 그런 짓을 저질렀지 않은가. 결국 내가 겪는 고통, 그것은 그 여자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p.31)


60여 쪽의 짧은 소설인 <집착>은 '육 년간의 관계를 끝내고 몇 달 전 W를 떠난 사람은 바로 나였다'는 말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렇게 헤어진 후 그가 자신의 아파트를 나와 다른 여자의 아파트로 들어가 살게 되면서 새롭게 생긴 규칙들, 이를테면 전화는 그의 휴대전화로만 해야 하고, 만나는 것도 저녁이나 주말은 절대 안 된다는 것과 같은 전에는 없던 새로운 규칙들이 생겨나면서 시작된 질투의 감정. '나'는 결코 사그라들 것 같지 않은 이 감정에 사로잡혀 자신의 삶이 어디로 이끌려가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한다. '내 머리와 가슴과 자궁은 온통 그 여자로 채워졌고, 그녀는 가는 곳마다 나를 따라오며 내 감정을 좌우했다.'고 고백하는 '나'.


"나 자신을 먹잇감이자 관객으로 삼았던 질투에 휘둘리며 상상이 빚어낸 형상들을 끌어내고, 어떻게 제어해볼 새도 없이 머릿속에서 그 수를 불려가던 상투적 표현의 목록을 조사해보고, 저절로 떠오르고 탐욕스럽고 고통스러우며 기어이 진실과, 그리고 행복 -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니까 - 의 획득을 노리는 그 모든 내면의 말들을 기술하는 일을 마쳤다. 나는, 6개월 동안 쉼없이 화장하고 강의하고 말하고 쾌락을 누린 여자의 비어 있던 이미지와 이름을 마침내 글로 채우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그런 여자가 다른 곳에서, 또다른 여자의 머릿속과 살갗에서 역시 살아있으리라는 짐작조차 못해보고."  (p.69)


감기 몸살이라는 유쾌하지 않은 체험을 일주일쯤 하고 나니 책을 읽는 것도, 컴퓨터 화면에서 문장을 이어가는 일도 마치 처음 하는 일처럼 어색하고, 울퉁불퉁 매끄럽지가 않다. 질투 역시 그런 느낌이 아닐까 싶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다른 이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 매일매일의 일상이 마치 열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그것인 양 정상체온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고열 속에서 행해지는 듯한 착각, 마침내 길고 긴 터널을 벗어나 일상으로 되돌아왔을 때 시큼털털한 후회와 함께 터널 속의 일이 마치 꿈결처럼 아득한 의문부호로 남게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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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잉 아이 - Dying Eye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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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 든다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주로 '분노'나 '화'를 그 잣대로 삼는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에도 화를 내지 않거나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이미 철이 든 사람으로 분류한다는 뜻이다. 내 기준에서는 말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철도 들지 않은 채 생을 마감한다는 얘기 아닌가? 하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렇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철이 들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다음 생을 기대하면서. 21세기의 유행은 철이 들지 않은 채 죽는 것이라서 그래,라고 말한다면 뭐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그것도 유행에 속할지 아닐지의 문제는 더 따져봐야 하겠지만 말이다. 유행에 동참하고자 일부러 철이 들지 않은 채 죽었다는 게 믿기지는 않지만, 아무튼.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다잉 아이>는 철이 들기도 한참 전인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억울하게 죽은 한 여인에 얽힌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미스터리 호러'에 가까운 이 소설은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으스스한 공포를 안겨주기도 하고, 작가 특유의 독특한 구성 방식을 구축함으로써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그 결말을 알 수 없게 한다. 내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열혈 독자는 아니지만 머리가 복잡하거나 독서 권태기에 빠져들 때 읽으면 어느 정도 즉각적인 효과를 보곤 해서 이따금 생각이 날 때마다 읽곤 한다. 말하자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코가 맹맹하고 으슬으슬 감기 기운이 있을 때 먹는 타이레놀의 효과와 비슷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신스케는 형사 재판의 판결이 떨어진 직후부터 '양하'에서 일했다. 판결 내용은 징역 2년에 집행 유예 3년이었다. 그러니까 실질적으로는 전과 다름없는 생활을 해도 상관없었지만, 에지마가 손을 써 한동안 치즈코의 가게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에지마의 머릿속에는 그래야 신스케가 불필요한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란 배려와 더불어, 사고에 대해 알고 있는 '시리우스' 단골손님의 시선을 의식한 계산이 있었던 것 같다."  (p.91)


소설의 주인공인 아메무라 신스케는 에지마가 주인인 '시리우스'에서 바텐더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에지마의 차를 운전하다가 교통사고를 냈고, 그 사고로 기시나카 미나에라는 여성이 목숨을 잃었다. 사고 이후 집행유예로 풀려난 신스케는 '양하'로 자리를 옮겨 새 생활을 시작한다. 영업이 끝나갈 시간에 찾아온 한 남자의 습격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 신스케는 기억의 일부를 잃게 된다. 신스케를 공격했던 사람은 죽은 미나에의 남편인 기시나카 레이지였고, 그 후 그는 자신의 집에서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 자신이 저지른 교통사고 당시의 기억이 확실하지 않았던 신스케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기억을 되찾는 일에 매달린다. 여기에는 동거녀였던 나루미의 실종이 한몫했다. 자신이 병원에 있는 동안 집 안을 깨끗이 정리했던 것은 물론 자신의 물건 역시 마구 옮겨져 있었다.


"나루미가 없어졌을 때 그녀의 화장대에 드라이버가 놓여 있었다. 자기 방에서는 본 적 없는 십자드라이버였다. 혹시 나루미가 그 드라이버로 세면실 거울을 떼어 냈던 게 아닐까.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것을 훔쳐 간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짚이는 게 있었다. 신스케가 퇴원해 돌아와 보니 집 안이 싹 바뀌어 있었다. 마치 대청소를 마친 뒤처럼 보였다. 나루미가 그 '무언가'를 찾으려 한 흔적을 없애기 위해 집 안을 그렇게 바꿔 놓은 것인지도 몰랐다."  (p.275)


신스케의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나면서 사고 전후의 내막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날 운전을 했던 당사자는 신스케가 아니라 에지마였고, 미나에의 자전거를 치고 갑자기 핸들을 틀어 차선을 넘는 바람에 옆차선에서 과속을 하던 페라리 한 대가 에지마가 운전하던 벤츠와 충돌한 후 미나에를 치어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이었다. 게다가 페라리를 운전했던 것은 건설회사 직원인 기우치가 아니었고, 기우치의 약혼녀이자 건설회사 사장의 딸이었던 미도리였다. 음주운전을 했던 미도리의 죄를 대신 뒤집어썼던 기우치 역시 사고 당사자가 아니었던 셈이다. 미나에의 마지막 눈빛을 기억하고 있던 미도리는 레이지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 그의 집을 방문하고, 방문의 횟수가 늘어나면서 미도리는 점차 사망한 미나에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광고 인형을 전문적으로 만들었던 레이지의 도움을 받아 미나에의 얼굴로 변신했던 것은 물론 자신의 체중을 감량하고 식습관까지 닮아갔다.


"기시나카 미나에가 죽어 갈 때의 눈. 생명이 꺼지기 직전까지 그녀는 집념의 빛을 번뜩였어. 삶에 대한 집착의 빛,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죽어야 하는 무상의 빛, 자신을 그런 꼴로 만든 상대에 대한 증오의 빛이었지. 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렇게 끔찍한 눈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p.395)


미나에의 모습으로 화한 미도리는 복수를 위해 신스케의 주변을 맴돌게 되고, 기억을 잃었던 신스케 역시 우여곡절 끝에 기억의 대부분을 회복하면서 다시 에지마를 찾게 된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동거녀였던 나루미의 행방을 묻게 되는데...


지금 당신에게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면 당신은 여전히 철이 덜 들었거나 아직 살아가야 할 날이 많이 남았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어떤 목사는 대통령 이름을 들먹이면서 그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공공연히 떠들기도 한다. 그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의 지능은 세살배기 어린애에 불과한 것이다. 이번 생에서 그가 철이 들기를 기대한다는 건 죽은 나무가 되살아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때로 '분노'를 통하여 살아갈 에너지를 얻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성숙한 인간으로 나아가는 시기는 마냥 늦어지게 된다. 내가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어느 목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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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전연명의향서 - 죽음을 인식하면 삶은 다시 정의된다
김지수 지음 / 북루덴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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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죽음'에 연관된 책을 자주 읽게 된다. 연초부터 말이다. 리뷰를 쓰기 전에 읽었던 책을 소개하자면 캐나다 출신 조력 사망 전문의인 스테파니 그린이 쓴 <나는 죽음을 돕는 의사입니다>와 프랑스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이기도 한 디디에 에리봉의 저서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이 그것이다. 그렇게 이어져 온 독서는 김지수 아나운서가 쓴 <나의 사전연명의향서>에까지 이르렀다. 꽤나 오래전에 읽었던 김영민 교수의 저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를 빗대어 말해보자면 '연초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쯤 되겠다. 우리 모두 끝이 있다는 것, 언젠가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가정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사실을 가슴에 새긴다는 건 오늘 하루를, 올 한 해를 의미 있게 살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명이 유한하다는 건 불행이 아니라 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하나의 질문에서 비롯됐다. "존엄한 삶은 무엇인가?" 여기서 '존엄한 삶'이란 내가 어떤 삶을 존엄하다고 믿는지의 문제이다.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아버지를 떠올렸다. 마음 깊은 곳에 묻어뒀던, 지금까지도 온전히 마주하기 힘든 기억의 일부를 끄집어냈다. 고3이었던 1994년 가을, 아버지는 난치병을 선고받았고 6년간 이름 모를 병과 싸웠다. 이때 나는 처음으로 죽음이란 걸 마주했다. 그것은, 난치병의 탈을 쓰고 환자의 장기 하나하나를 망가뜨리며 숨통만큼은 쉽사리 끊지 않는 괴물이었다."  (p.11 '프롤로그' 중에서)


작년 말에 읽었던 남유하 작가의 에세이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 역시 이 책과 무관하지 않다. 이 책의 저자인 김지수 아나운서 역시 죽음 앞에서 마냥 무기력하기만 했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자신 역시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로 인해 보건의료 분야를 취재하는 기자로 살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위중한 환자들을 만나 취재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앓고 있는 우울증과 공황장애, 끊임없는 자살 충동으로부터 벗어나 삶을 끌어안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나쁜 생각의 기세가 나보다 커지면 안 되기 때문에 늘 지켜보고 감시해야 했다. 이렇게 마음을 들여다보고 분석하는 건 내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노력함에도 몹쓸 생각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에서 좌절하기도 했지만, 내 나름의 처방을 내릴 수 있었다. 의사가 개입하는 치료 영역과 별개로 나의 내면을 스스로 돌볼 '통로'가 필요하다는 것. 그건 마음을 들여다보고 분석하는 것보다 더 높은 차원의 '돌봄'이어야 했다. 그게 뭔지 당장 알 수 없더라도 내면을 돌볼 수 있는 무언가를 찾겠다고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알게 될 것 같았다. 이것만으로도 위로가 됐다."  (p.57)


책은 모두 4개의 장(chapter)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버지의 투병 과정을 담은 Chapter 1. '아버지는 밤에만 울지 않았다', 취재 현장에서 경험한 말기 환자들의 모습과 그들을 통해 깨달은 것을 기록한 Chapter 2. '존엄한 삶이라면'과 Chapter 3. '정체성을 지킨다면 존엄한 죽음이다',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깨달았던 존엄한 삶과 죽음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담은 Chapter 4. '나의 사전연명의향서'가 그것이다. 존엄사나 의료 조력 사망을 인정하고 있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존엄하게 삶을 마감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기대수명이 늘면서 암 환자는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존엄한 죽음을 기대한다는 건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치료 가능성이 없는 환자와 가족들이 존엄사가 허용되는 나라로 나가 그곳에서 삶을 마감하는 경우도 증가하고 있다. 자신의 죽음을 평화롭게 맞는다는 게 이렇게나 힘들다.


"요즘 반가운 소식을 자주 접한다.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통계들이 발표되고 있다. 임종 과정에서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고 미리 의사를 밝혀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등록한 사람이 300만 명을 넘겼다는 데 이어, 이러한 사전 서약에 따른 연명의료 중단 건수가 5만 건을 넘어섰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임종을 늦추는 의료서비스를 받지 않는 대신 삶의 마지막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다 가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의미다."  (P220 '에필로그' 중에서)


내가 이 세상에 살았던 기억은 어느 왕조의 오래된 유물처럼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스러질 것이다. 그렇다고 딱히 아쉽다거나 서럽다거나 불행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누구나 그렇듯 삶을 마감하는 그 순간만큼은 크게 고통스럽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존엄한 삶의 출발점은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시작되며, 존엄한 죽음도 결국 그 연장선에 있다'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한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는 점점 어떻게 죽느냐의 문제로 관심의 추가 서서히 기울게 된다는 점은 우리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과정인 듯 보인다. 내게 남은 하나의 바람이 있다면 죽음에 이르러서도 저 공원의 푸른 소나무처럼 담담했으면 하는 것이다. 그 바람이 어쩌면 이승에서 쉽게 얻을 수 없는 크나큰 욕심일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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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 빛나는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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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상황에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신의 허점을 찾아 숨바꼭질을 하듯 찾아 헤매야 할까. 아니면 모든 것을 포기한 채 그저 시간이 흘러가기를 바라야 할까.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모든 게 바뀐 상황에서 그 결과를 어쩔 수 없는 처분처럼 달게 받아야 하는 것일까.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반짝반짝 빛나는>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그런 생각에 부딪히고 말 것이다. 작가는 이따금 너무나 낯선 설정으로 독자를 당황하게 한다. 물론 소설가라는 직업의 특성상 현실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상황이 작가가 설정한 상상력의 공간에서 자유롭게 변주되는 것이지만 <반짝반짝 빛나는>의 설정은 유교주의 지배를 받는 아시아권 사람들에게는 마치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천형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 녀석과 결혼을 하다니, 물을 안는 것이나 진배없지 않으냐." 그때 등에 으슬으슬 서늘한 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나는 나무도 들을 수 있을 만큼 또렷하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전, 섹스를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순간 시아버지는 움찔하는 표정이 되었다가, 그러고는 슬며시 웃었다. 나는 분위기를 전환하고 싶어, 서둘러 일어났다.  (p.20)


그렇다. 일주일 전에 결혼한 쇼코와 무츠키는 정상적인 부부가 아니다. 아르바이트 삼아 이탈리아어를 번역하는 쇼코는 알코올 중독자인 동시에 조울증을 앓고 있다. 의사인 무츠키는 지나친 결병증을 지닌 사람인 반면 동성애자로서 동성 애인인 곤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거짓말이라고는 도무지 할 줄 모르는 무츠키는 쇼코가 곤에 대해 물을 때마다 사실대로 말해준다. 잠들기 전 침대 시트를 다림질하는 일을 제외하고 음식이면 음식, 청소면 청소 집안의 모든 일은 무츠키가 도맡아 한다. 너무나 순박하고 착한 무츠키에게 쇼코는 그 어떤 불만도 없다. 무츠키를 위해 곤과의 관계를 허락하기도 하고, 곤을 집으로 초대하기도 한다. 형식적인 아내이기는 하지만 무츠키는 이와 같은 쇼코의 배려에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차는 한밤중을 똑바로 달린다. 오늘 밤 곤을 만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쇼코의 기분을, 나는 잘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끔찍하도록 긴 하루였다. 어머니의 가시 돋친 목소리와 장인의 험악한 표정, 눈물짓는 장모의 손수건 모양과 고개 숙인 아버지의 옆얼굴. 후회하지 않아. 마음속으로 쇼코에게 말한다. 일찌감치 등받이를 뒤로 넘기고 기댄 곤은 코를 골고 있다. 입은 반쯤 열려 있다."  (p.200)


무츠키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쇼코의 마음은 점점 무츠키에게 기운다. 육체적인 사랑은 아닐지라도 같은 공간에서 그와 함께 지내는 삶에 익숙해지고 편안해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무츠키는 쇼코의 절친인 미즈호를 통하여 쇼코의 옛 애인인 하네기와의 만남을 주선한다. 아무것도 모른 채 쇼코는 미즈호와 그녀의 아들 유타, 그리고 하네기 씨와 함께 놀이공원에 가게 된다. 이 모든 게 무츠키의 계획이었다는 걸 알게 된 쇼코는 크게 화를 내고 미즈호와는 절교를 선언한다. 그렇게 흘러가던 어느 날 무츠키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장인 장모와 시어머니는 결국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무츠키와 쇼코는 남들과 다른 자신들의 관계에 심한 압박을 느낀다.


"집으로 돌아오자, 왠지 맥이 축 빠지고 피로가 몰려왔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고, 핌즈를 전자에일에 섞어 마신다. 가능하면 무츠키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 된 이상 협력해 달라고 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 봐야 하룻밤만 넘기면 되는 일이다. 나는 반짝반짝 닦인 바닥에 엎드리고 누워, 베란다 너머로 저녁 하늘을 바라보았다. 뺨이 싸늘해서 상쾌한 기분이다. 눈을 감고 온몸으로 귀 기울인다. 정겹고 청결하고 편안한 방의 기척. 이러고 있으면 무츠키에게 안겨 있는 것 같다."  (p.211)


사회적 인식과 관습에 얽매인 관계 속에서 아무런 해결책도 찾을 수 없는 두 사람과 그들의 주변을 맴도는 곤. 책을 읽는 독자는 무겁고 착잡한 기분으로 그들을 지켜볼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물론 소설은 에쿠니 가오리 특유의 동화적 결말로 끝이 나고는 있지만 소설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답답한 마음에 속이 터질 듯하고,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읽어나가는 과정이 그저 힘에 겨울 뿐이다. 그리고 힘들어하는 쇼코를 보면서 '우리가 육체적 관계를 떠나 인간 대 인간으로 서로 사랑할 방법은 과연 없단 말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작가 역시 비슷한 문제를 거론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개인의 성적인 취향이나 기호를 떠나 서로의 영혼을 깊이 관찰하고 상대방의 매력에 이끌릴 수 있는 방법은 과연 없는 것인가. 법정 스님과 이해인 수녀님처럼 서로의 순수한 영혼에 이끌려 플라토닉한 사랑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날씨가 조금 풀린다는 기상청 예보가 무색하게 바람에 섞인 한기는 여전히 냉랭하기만 하다. 간밤에 내린 눈이 녹지 않은 채 시린 느낌을 더하고 있다. 겨울 추위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고 있다. 추위 때문에 마냥 움츠러들 게 아니라 겨울을 온전히 사랑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듯하다. 쇼코와 무츠키가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들만의 사랑법을 찾아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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