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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뜨는 나라의 공장 - 개정판 ㅣ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김난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5월
평점 :
누군가의 젊은 시절을 엿보는 것은 꽤나 흥미 있는 일이다. 물리적으로 시간을 거꾸로 되돌릴 수는 없지만, 그가 젊은 시절에 썼던 글이나 사진 등을 보면서 '아, 그때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라거나 '젊은 시절에 그는 이런 스타일의 옷을 입었었네' 하는 식의 감탄은 당사자가 어두운 골방에 갇혀 어쩌다 하게 되는 무익한 회상과는 차원이 다른 행위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지인 몇몇이 모여 앨범이나 일기장을 들춰보면서 하게 되는 농담 섞인 담소나 추억 되살리기는 일종의 작은 축제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글을 쓰는 작가나 포토그래퍼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직업일 수 있다. 물론 연극이나 영화를 하는 배우 역시 그에 못지않게 매력적이지만 말이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30대의 젊은 시절에 썼던 수필집 <해 뜨는 나라의 공장> 역시 그런 작품으로 읽기에는 안성맞춤이다. 70대 중후반의 나이가 된 작가를 마주하고 있는 독자가 시대를 거슬러 그가 30대에 했음직한 생각들을 가늠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가의 생각이 은밀하게 내재된 소설이 아닌, 작가의 생각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산문집이 존재한다는 건 작가를 사랑하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행운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하루키의 애독자 중 한 사람으로서 그가 쓴 작품 대부분을 읽어보았지만, 그럼에도 이따금 하루키의 문체가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가 쓴 소설보다는 에세이에 먼저 손이 가곤 한다. 독자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는 쉽고 간결한 문체로, 독자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듯한 그의 문장 스타일은 읽는 이로 하여금 '쉼'의 느낌을 강하게 자각하게 한다. 그래서인지 하루키의 에세이 한 권을 읽고 나면 왠지 모르게 머리가 맑아진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나는 여행을 떠날 때면 가급적 형편없는 차림을 하는데, 그래도 현지에 도착해서 보면 주위 사람들에 비해 상당히 반듯하게 차려입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황당하곤 한다. 그리고 반대로 일본에 돌아오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너무나 단정하게 입고 잇는 것 같아서 또 한동안 안절부절못한다. 그런 일이 몇 번 거듭되는 사이, 나도 모르게 '아무려면 어때'의 숲속으로 끌려들어가고 만 듯하다." (p.160)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하루키는 소설 외에도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써왔다. 분류하자면 여행에세이나 가벼운 신변잡기를 다룬 경수필 외에도 르포르타주나 탐방기를 쓰기도 했다. 옴진리교 지하철 사린사건을 다룬 르포르타주 <언더그라운드>와 공장 탐방기 <해 뜨는 나라의 공장>가 대표적이다. 하루키의 공장 탐방기라니, 왜?라고 질문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소설을 쓰기 위해 공장을 취재할 수는 있지만, 일반인들이 관광이나 견학을 목적으로 하는 공장 방문을 하고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과의 일문일답을 했던 내용을 책으로 엮는다는 건 소설가가 하는 일상적인 취재 활동과는 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새삼 얘기하기는 좀 뭣하지만, 일본 사람들이란 정말 애처로울 정도로 열심히 일하는 인종이더군요. 잘하기도 할뿐더러 일 자체에서 즐거움과 철학과 긍지와 위로를 찾아내려고 애쓰기도 한다. 그게 옳은 일인지 아닌지는 물론 내가 알 수 없는 노릇이고, 그것이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을 차치하고 내가 지금 이렇게 원고를 쓰고 있는 동안에도 일본 각지의 공장에서 여러 사람들이 몸을 움직여 무수한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왠지 마음이 푸근해지고 용기가 생긴다." (p.12~p.13 '서문' 중에서)
하루키가 방문하고자 했던 공장의 선택 기준은 조금 독특한 면이 있다.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그 기준이 순전히 작가의 호기심에 의해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작가가 방문했었고,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공장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인체모형 공장, 결혼식장, 지우개 공장, 낙농 공장, 콤데가르송 공장, 콤팩트디스크 공장, 아데랑스 공장 등으로 우리의 상식에서 상당히 벗어난 듯도 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공장 이미지와도 잘 부합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작가는 지금 막 결혼식장을 벗어나는 신혼부부마저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인상을 받았던 까닭에 '결혼식장'을 하나의 공장으로 인식한 것을 보면 작가의 시선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종의 공장인 결혼식장, 혹은 '결혼식장'이란 이름의 공장에서 사용하는 원료는 다름아닌 신랑 신부로 불리는 한 쌍의 남녀이며, 그 기계적 추진력은 전문적 노하우와 숙달된 서비스, 주된 부가가치는 감동(좀더 소극적으로 표현하면 정서의 고양), 그 수요를 뒷받침하는 것은 세상 일반의 '관례. 상식. 습관'이다. 그런 식으로 결혼식장에서는 오늘도 흉일만 아니면 한 회 또 한 회, '의식'이라는 이름의 휘황찬란한 상품이 생산되고 있다." (p.52)
어떤 대상에 대한 애착을 표현하는 소위 '덕질'이라는 것이 문학계에서는 다소 수줍게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물론 임경선 작가처럼 하루키를 흠모하는 까닭에 그가 살았던 일본의 몇몇 지역을 직접 방문하여 훑어보는 열혈 덕후도 존재하지만, 대다수의 애독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소장하거나 탐독하는 선에서 그치는 게 일반적이다. 물론 해외여행 중에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무덤을 방문하여 애도를 표하는 경우는 많이 보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독서가의 덕질은 꽤나 은근한 면이 있어서 길을 걷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심지어 낯선 곳을 여행하다가도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어떤 작품이나 문장을 떠올리곤 한다. 말하자면 독자의 내면에 깊이 자리하는 것이다.
기온이 올랐는지 눈이 쌓였던 자리에서 눈석임물이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다. 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가벼운 산책이라도 다녀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