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뜨는 나라의 공장 -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김난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군가의 젊은 시절을 엿보는 것은 꽤나 흥미 있는 일이다. 물리적으로 시간을 거꾸로 되돌릴 수는 없지만, 그가 젊은 시절에 썼던 글이나 사진 등을 보면서 '아, 그때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라거나 '젊은 시절에 그는 이런 스타일의 옷을 입었었네' 하는 식의 감탄은 당사자가 어두운 골방에 갇혀 어쩌다 하게 되는 무익한 회상과는 차원이 다른 행위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지인 몇몇이 모여 앨범이나 일기장을 들춰보면서 하게 되는 농담 섞인 담소나 추억 되살리기는 일종의 작은 축제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글을 쓰는 작가나 포토그래퍼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직업일 수 있다. 물론 연극이나 영화를 하는 배우 역시 그에 못지않게 매력적이지만 말이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30대의 젊은 시절에 썼던 수필집 <해 뜨는 나라의 공장> 역시 그런 작품으로 읽기에는 안성맞춤이다. 70대 중후반의 나이가 된 작가를 마주하고 있는 독자가 시대를 거슬러 그가 30대에 했음직한 생각들을 가늠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가의 생각이 은밀하게 내재된 소설이 아닌, 작가의 생각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산문집이 존재한다는 건 작가를 사랑하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행운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하루키의 애독자 중 한 사람으로서 그가 쓴 작품 대부분을 읽어보았지만, 그럼에도 이따금 하루키의 문체가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가 쓴 소설보다는 에세이에 먼저 손이 가곤 한다. 독자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는 쉽고 간결한 문체로, 독자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듯한 그의 문장 스타일은 읽는 이로 하여금 '쉼'의 느낌을 강하게 자각하게 한다. 그래서인지 하루키의 에세이 한 권을 읽고 나면 왠지 모르게 머리가 맑아진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나는 여행을 떠날 때면 가급적 형편없는 차림을 하는데, 그래도 현지에 도착해서 보면 주위 사람들에 비해 상당히 반듯하게 차려입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황당하곤 한다. 그리고 반대로 일본에 돌아오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너무나 단정하게 입고 잇는 것 같아서 또 한동안 안절부절못한다. 그런 일이 몇 번 거듭되는 사이, 나도 모르게 '아무려면 어때'의 숲속으로 끌려들어가고 만 듯하다."  (p.160)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하루키는 소설 외에도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써왔다. 분류하자면 여행에세이나 가벼운 신변잡기를 다룬 경수필 외에도 르포르타주나 탐방기를 쓰기도 했다. 옴진리교 지하철 사린사건을 다룬 르포르타주 <언더그라운드>와 공장 탐방기 <해 뜨는 나라의 공장>가 대표적이다. 하루키의 공장 탐방기라니, 왜?라고 질문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소설을 쓰기 위해 공장을 취재할 수는 있지만, 일반인들이 관광이나 견학을 목적으로 하는 공장 방문을 하고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과의 일문일답을 했던 내용을 책으로 엮는다는 건 소설가가 하는 일상적인 취재 활동과는 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새삼 얘기하기는 좀 뭣하지만, 일본 사람들이란 정말 애처로울 정도로 열심히 일하는 인종이더군요. 잘하기도 할뿐더러 일 자체에서 즐거움과 철학과 긍지와 위로를 찾아내려고 애쓰기도 한다. 그게 옳은 일인지 아닌지는 물론 내가 알 수 없는 노릇이고, 그것이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을 차치하고 내가 지금 이렇게 원고를 쓰고 있는 동안에도 일본 각지의 공장에서 여러 사람들이 몸을 움직여 무수한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왠지 마음이 푸근해지고 용기가 생긴다."  (p.12~p.13 '서문' 중에서)


하루키가 방문하고자 했던 공장의 선택 기준은 조금 독특한 면이 있다.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그 기준이 순전히 작가의 호기심에 의해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작가가 방문했었고,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공장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인체모형 공장, 결혼식장, 지우개 공장, 낙농 공장, 콤데가르송 공장, 콤팩트디스크 공장, 아데랑스 공장 등으로 우리의 상식에서 상당히 벗어난 듯도 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공장 이미지와도 잘 부합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작가는 지금 막 결혼식장을 벗어나는 신혼부부마저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인상을 받았던 까닭에 '결혼식장'을 하나의 공장으로 인식한 것을 보면 작가의 시선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종의 공장인 결혼식장, 혹은 '결혼식장'이란 이름의 공장에서 사용하는 원료는 다름아닌 신랑 신부로 불리는 한 쌍의 남녀이며, 그 기계적 추진력은 전문적 노하우와 숙달된 서비스, 주된 부가가치는 감동(좀더 소극적으로 표현하면 정서의 고양), 그 수요를 뒷받침하는 것은 세상 일반의 '관례. 상식. 습관'이다. 그런 식으로 결혼식장에서는 오늘도 흉일만 아니면 한 회 또 한 회, '의식'이라는 이름의 휘황찬란한 상품이 생산되고 있다."  (p.52)


어떤 대상에 대한 애착을 표현하는 소위 '덕질'이라는 것이 문학계에서는 다소 수줍게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물론 임경선 작가처럼 하루키를 흠모하는 까닭에 그가 살았던 일본의 몇몇 지역을 직접 방문하여 훑어보는 열혈 덕후도 존재하지만, 대다수의 애독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소장하거나 탐독하는 선에서 그치는 게 일반적이다. 물론 해외여행 중에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무덤을 방문하여 애도를 표하는 경우는 많이 보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독서가의 덕질은 꽤나 은근한 면이 있어서 길을 걷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심지어 낯선 곳을 여행하다가도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어떤 작품이나 문장을 떠올리곤 한다. 말하자면 독자의 내면에 깊이 자리하는 것이다.


기온이 올랐는지 눈이 쌓였던 자리에서 눈석임물이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다. 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가벼운 산책이라도 다녀와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푸르른 틈새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간밤에 눈이 조금 내렸다. 첫눈이었다. 포근한 날에 내리는 함박눈처럼 우리가 기대하는 첫눈의 낭만이나 환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온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날씨는 추웠다. 그리고 지난해 있었던 잊지 못할 기억 때문인지 눈송이마저 푸슬푸슬 가늘게 쪼개지는 듯했고, 옹송그린 채 걷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도 눈이 내리는 허공을 향하지 않고 시종일관 땅으로만 향해 있었다. 나는 행인들의 우울한 시선을 뒤로한 채 서둘러 차를 몰았다. 연말의 바쁜 일정 틈틈이 읽기 시작했던 권여선 작가의 <푸르른 틈새>도 이제 몇 쪽 남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어떤 소설이건 소설을 읽는 독자는 마지막 부분으로 갈수록 손에 땀이 나고 호흡은 거칠어지게 마련, 그 순간에 다른 일로 어쩔 수 없이 책을 손에서 놓아야 했던 독자는 마치 책이 펼쳐 놓은 그물망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듯 어서 빨리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허둥대게 된다.


"나는 연애가 아니라 이별을, 사랑이 아니라 그리움을 기억한다. 연애의 시작이나 과정은 조금도 특별할 것이 없지만 연애의 끝은 언제나 특별하다. 나는 그 특별한 그리움과 집착, 뒤틀린 내 몸 안에 도사리고 있던 특별한 사나움을 기억한다. 실제보다 더 길어 보이는 욕실 거울처럼 이별의 순간을 몹시 길고 캄캄한 세월로 반사하는 내 기억의 틀 속에서......"  (p.202)


작가의 데뷔작이기도 한 이 소설은 소설의 주인공인 미옥이 이사를 앞둔 7일 동안 자신의 자취방에서 서른 살에 이르는 자신의 인생을 회고함으로써 자신에게 있었던 숨겨진 진실을 발견하고 이를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해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그녀의 인생은 대학 시절을 거쳐 삼십 대인 지금에 이르고 있지만, 회고의 중심은 민주화 운동기였던 1980년대 중후반의 대학가를 배경으로 미옥이 운동권 여대생으로 정착되었던 시점을 부각하고 있다. 1960년대에 태어나 대학 입학 정원 확대와 중산층의 성장에 기대어 대학에 진학했고 민주화의 물결 속에서 광장에 섰던 혹은 억지로 그곳에 서야만 했던 시대 상황과 여성성을 억압한 채 남성 중심의 운동 문화 속에서 중성적 여인으로 성장해야 했던 불합리한 현실이 소설 속에 투영되고 있다.


"어느 날엔가 나는 꽃무늬 커튼을 친 어두운 방에서 가구에 둘러싸인 채 동그마니 앉아 있었다. 움직일 수 있다고, 내부에서 무언가 꿈틀거리고 있다고 믿고 싶었지만 믿음과는 달리 습기를 잔뜩 머금은 젖은 나무토막처럼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이렇게 서서히 젖어가고 싶다는 축축한 욕망이 혈관을 타고 번졌다. 먼 훗날 누군가 이 방에 들어와 내겐 전혀 개의치 않고 이 방의 가구들과 함께 나를 들어내어서 어디론가 싣고 가 낱낱이 부수어주기를, 그렇게 해체된 채로 햇볕 받으며 말라가기를, 골수부터 관절까지, 마디마디까지 곰팡이로 뒤덮였던 몸이 콱콱 쪼개지고 틀어지며 버쩍버쩍 말라가기를 나는 꿈꾸었다."  (p.154~p.155)


어린 시절 미옥은 원양어선을 탔던 아버지 덕분에 별 어려움 없이 성장할 수 없었지만, 가산을 탕진한 외삼촌으로 인해 외할머니를 비롯한 외가 식구들이 미옥의 집에 얹혀살았다.  둘째 이모는 남편의 바람기로 자식과 함께 미옥의 집으로 들어왔고, 사업으로 가산을 탕진한 외삼촌으로 인해 외숙모 역시 비슷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미옥의 아버지가 직장을 잃고 실직자가 되었을 때 둘째 이모부는 사업에 성공해서 전세가 역전되었고, 외숙모와 외할머니 역시 미옥의 집을 떠났다. 운동권의 현실에 실망했던 미옥이 휴학계를 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 미옥과 아버지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 집 안에서 머물러야만 했다. 미옥이 다니던 대학에 복학하면서 여성성을 회복하고 한영과의 연애가 시작되는데...


"나는 내일 이사를 떠난다. 지난 일주일의 시간처럼 내가 또 어떤 기다림의 간이역에서 다시금 내 삶을 향해 새로운 일별을 던질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이 언제이든 그때도 나는 이렇게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기억의 화살을 향해 내 가슴을 과녁으로 내보이리라. 이런 생각만으로도 몸 속의 푸르른 창이 열리고 그 틈새로 빛이 쏟아져들어오는 듯하다."  (p.280)


곤두박질쳤던 기온은 조금씩 풀려가는 느낌이다. 어떤 작가든 그의 초기작을 읽을 때면 언제나 약간의 어색함과 부자연스러운 느낌과 함께 작가 자신의 선명한 이미지가 도드라지게 부각되곤 한다. 작가 자신의 정체성이나 세계관이 작품 속에 진솔하게 묻어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유정 작가의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를 읽었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작가가 쓴 소설의 권수가 더해지고 세월이 흐를수록 작가 본연의 색채는 옅어지지만, 어색했던 문장은 더욱 매끄러워진다. 그것을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따금 작가의 데뷔작이 몹시 그리워질 때가 있다. 이 책을 읽었던 것도 그런 까닭이었는지도 모른다. 첫눈을 그리워하듯 내가 좋아하는 어느 작가의 데뷔작을 나는 오늘도 그리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돗자리 장수에서 광장으로 - 민주화 운동가 이오순 평전
임수정 지음 / 밥북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의 운명은 한순간에 변한다. 살아보니 그렇다. 우리는 마치 두께가 다른 얼음판 위에 서서 어디가 얇은지 또는 어디가 두꺼운지 도통 아무런 정보도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얼음판의 둘레를 마구 헤집고 다니는 꼴이다. 겁도 없이 말이다. 단 한 번도 나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얇은 얼음 위를 딛지 않는다는 건 기적에 가깝다. 물론 얇은 얼음을 디뎠지만 물에 휩쓸리기 직전에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경우도 더러 있겠지만 말이다. 이렇듯 삶을 유지하는 건 두렵고 힘든 일이다. 그러나 두렵다고 해서 다들 한 귀퉁이에 모여 오들오들 떨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두려움을 떨치고 과감히 일어나 자신이 밟을 곳이 살얼음판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기꺼이 한 발을 내딛는 이도 있고, 그것을 똑똑히 지켜본 이들 역시 자신의 두려움을 툭툭 털고 일어서 다른 이의 평안한 삶을 위해서, 그리고 현실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서 자신의 편안한 삶을 기꺼이 포기하기도 한다. 삶의 용기는 그렇게 하품처럼 전염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삶이 두려울 때마다 그들의 지난 삶을 회상하기도 하고, 그들의 용기를 가슴에 깊이 새기기도 한다.


"나는 처음부터 이오순의 외동딸 송영숙에 주목했다. 이오순이 서울로 장사하러 떠날 때 열 살이었던 송영숙은 엄마 없는 집에서 가사를 전담했다. 1965년 가족들이 서울로 이주할 때 함께 상경했으며 청계천 봉제공장에 취직해서 가족의 생계를 도왔다. 막냇동생 송광영이 분신하자 엄마와 함께 민주화운동에 동참했다. 내가 인터뷰를 하러 갔을 때 일흔여섯의 송영숙은 치매를 앓고 있었다. 대부분의 질문에 '다 좋았다'고 답했다. 왜 그렇게 열심히 했느냐고 묻자 '막둥이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제'라고 답했다."  (p.6 '책머리에; 중에서)


나는 평전을 좋아한다. 개인의 일생에 대한 필자의 논평이 곁들여진 평전은 전기문에 비해 객관적이고 학술적이라는 게 다수의 견해다. 물론 미화와 왜곡으로 점철된 평전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임수정 작가가 쓴 <민주화 운동가 이오순 평전, 돗자리 장수에서 광장으로>를 읽게 된 것도 지금까지 내가 유지해 온 독서 편력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나는 전두환 독재정권이 발의했던 학원안정법에 반대하여 스스로 분신의 길을 택했던 이오순 여사의 아들 송광영 열사를 익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 책을 읽는 데 주저함이 없도록 했다. 사실 8,90년대의 민주화 과정을 겪어보지 않은 세대에게 있어 '송광영'은 낯선 이름이다. 더구나 그의 모친이었던 '이오순'은 더더욱 낯선 이름이다. 그러나 독재에 저항하고 그들의 탄압에도 결코 굴하지 않았던 용기와 헌신의 역사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오순은 숨죽인 채 오열했다. 머리에 삼베수건을 쓰고 대열의 맨 앞에 서 있던 유가협 어머니들 그 누구도 소리 내어 울지 못했다. 울음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눈물만 뚝뚝 떨궜다. 동백꽃이 툭, 질 때처럼. 심장이 벌떡이는데도 소리 내 울 수는 없었다. 울음소리를 내는 순간 광영의 죽음은 개인적인 일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이오순은 그때 알았다. 침묵만큼 처절하고 슬픈 오열은 없다는 것을. 광영의 죽음, 열사들의 자기희생은 민주주의를 위한 순수한 피흘림이라는 것을. 수천의 군중 앞에서 열사로 호명되는 순간 광영의 죽음은 그 의미가 분명해졌다는 것을. 막내아들 광영은 민주주의를 위해 산화한 투사라는 것을 가슴에 또렷하게 새겼다."  (p.213)


일제강점기였던 1927년에 태어난 이오순은 그녀의 나이 38세에 남편과 사별하고 다섯 명의 어린 자식을 책임지는 가장으로 살다가 1994년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재산이나 연고도 없이 자식들을 데리고 무작정 서울살이를 시작했던 1959년부터 그녀의 삶은 오롯이 해방 이후 우리나라가 겪었던 질곡의 역사를 그대로 재현한 셈이었다. 더구나 1985년에 막내아들을 잃고 1986년부터 시작된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 창립회원으로서의 활동은 평범한 아낙이었던 이오순을 광장의 투사로 변모시켰다. 산업화시기에 서울로 서울로 모여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고단한 삶과 그들의 허기진 일상을 따뜻한 손으로 어루만지지 않았던 위정자와 기업인들로 인해 거리는 온통 최루탄과 화염병이 오갔고, 공장 노동자의 삶은 점점 더 피폐해져 갔었다. 나는 이오순 평전을 읽는 내내 송광영 열사의 짧았던 생애를 떠올렸고, 언젠가 읽었던 권여선 작가의 <푸르른 틈새>가 나도 모르게 오버랩되었다.


"이오순은 자식뿐만 아니라, 이웃, 일가친척, 유가협 동지들을 돌보며 함께 살아갔다. 그녀는 언제나 남들 앞에 나서기보다 뒤에서 조용히 헌신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어떤 헌신을 했을까? 수많은 자료를 훑어보아도 '무엇을 좋아했다', '무엇을 즐겼다'는 기록은 없었다. 늘 돈을 벌러 다녔고 시위에 참여했고 유가협 회원들과 한울삶에서 지냈다."  (p.289 '에필로그' 중에서)


숨이 컥컥 막혀 곧 죽을 것 같던 현실도 지나고 나면 별것 아닌 듯 무척이나 가볍게 느껴질 때가 있다. 기억 속의 시간은 언제나 중력을 잃고 부유한다. 그러나 가벼이 떠다니던 기억들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기록으로 남겨졌을 때, 그것을 읽는 사람들은 그때의 기억을, 그 시절의 삶을 가슴으로 살아내게 된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한 우리는 남편과 자식을 잃고 억척같이 살았던 한 여인의 삶을 다시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어쩌면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이오순이라는 여인과 그 여인을 어머니로 두었던 송광영이라는 이의 뜨거운 피가 책을 통하여 수혈되었는지도 모른다. 영하로 떨어졌던 오늘 아침의 기온 속에서 조금의 추위도 느끼지 못한 채 산을 오를 수 있었던 건 아마도 그런 까닭이었을 테다. 삶의 열정은 역사의 물관을 타고 그렇게 끝없이 전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변신 - 카프카 단편선 소담 클래식 7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배인섭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가 체험하지 못한 글은 독자에게도 감동을 주지 못한다. 대개는 그렇다. 그러므로 작가는 자신이 쓰고 있는 글이 과거에 직접적으로 겪은 체험이든 아니면 자신이 글을 쓰는 가상의 공간에서 지금 현재 겪고 있는 만들어진 체험이든, 아무튼 작가는 자신이 쓰는 글에 대한 생생한 느낌이 존재해야 한다. 사랑의 기쁨이든 실연의 고통이든 그것은 작가의 직접적인 느낌이어야 하며, 그러한 느낌이 고스란히 글로 재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머릿속에서의 단순한 논리나 가정만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작가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것일지도 모른다. 진정한 배우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작품 속의 인물로 완전히 탈바꿈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글을 쓰는 작가가 자신이 만들어 낸 인물들과 얼마나 가깝게 느끼고 그 인물과 혼연일체가 되어 얼마나 근접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가 결국 작품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소설가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1인 다역의 연기자가 되어 소설을 이끌어 갈 수밖에 없다.


지난해 노벨상을 받은 한강 작가 역시 <소년이 온다>를 쓸 당시에 작가가 느꼈을 고통이 작품을 읽는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견딜 수 없는 심적 고통으로 인해 집필에서 손을 뗀 채 몇 날 며칠을 서성였을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우리가 고전이라고 일컫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러하다. 작가의 미세한 심적 변화마저, 슬픔으로 인한 가벼운 떨림조차 행간의 침묵 속에서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에야 비로소 최고 권위의 노벨문학상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작가의 고통과 진실에 대한 세계인이 보내는 작은 답례일지도 모른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역시 내겐 그런 작품으로 기억되고 있다. 비록 그가 노벨상 수상 작가는 아니지만 병약하고 감성적이었던 그가 위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주변의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가면서 겪어야 했을 온갖 수모와 좌절, 그리고 정신적 불안 등이 그의 작품 속에서 그대로 투영되기 때문이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에 글을 쓰는 등 틈틈이 저작 활동을 이어가던 그가 하룻밤 만에 완성했다는 <변신>은 숨 죽이며 살아야 했던 그의 삶이 어떠했을지, 할 수만 있다면 벌레로 변해서라도 가족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기를 그가 얼마나 학수고대했을지 소설을 읽는 독자는 가슴 절절히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는 감동과 사랑으로 가족들과의 추억을 더듬었다. 그가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은 누이동생보다 그레고르 자신에게 더욱 절실했을 것이다. 그레고르는 이런 상태로 허전하고 평화롭게 상념을 정리하고 있었다. 시계탑이 새벽 세 시를 칠 때까지, 창밖이 찬찬히 밝아 오기 시작하는 것을 다시 한번 체험할 수 있었다. 그러고서 그의 머리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풀썩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의 콧구멍에서 마지막 숨이 약하게 새어 나왔다."  (p.192 '변신' 중에서)


소담출판사에서 출간한 <변신: 카프카 단편선>에는 중편소설인 '변신' 외에도 1910년대 초반에 집필한 단편소설 '화부'와 '선고'가 함께 실려 있다. '화부'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카를 로스만이라는 소년은 가정부가 그를 유혹해서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강제적으로 미국에 보내지는데 소설은 카를이 막 미국에 도착하여 하선을 하려는 순간에서 시작한다. 익숙했던 공간에서 벗어난 어린 주인공이 낯설고 적대적인 공간에서 새롭게 정착해야 하는 부담과 불안한 심정 등이 복합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이 소설은 미완성 장편 <아메리카>의 서문 격인 작품이기도 하다.


"카를은 맞을까 무서워서 마구 휘두르는 화부의 두 손을 잡고 싶었다. 아니, 할 수만 있다면 그를 한쪽 구석으로 밀어붙이고 싶었다. 그러고서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나직한 목소리로 흥분을 가라앉혀 줄 말 몇 마디라도 그에게 속삭여 주고 싶었다. 그러나 화부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고 있었다. 카를은 급한 경우 화부가 완전한 절망에서 솟구쳐 나오는 힘으로 이 방의 일곱 남자 모두를 제압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제 심지어 일종의 위안을 얻는 듯 느끼기 시작했다."  (p.40 '화부' 중에서)


카프카 스스로 '자신의 문학적 탄생'이라 평할 만큼 자전적 색채가 짙은 작품인 '선고'는 사업적으로 성공하고 곧 약혼을 하게 되는 주인공 게오르크가 러시아에 있는 친구에게 자신의 약혼 소식을 전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고민을 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에게 털어놓자 아버지는 게오르크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인간관계의 갈등과 다층적 심리, 아버지의 권위와 복종, 죄책감 등 일상에서 빚어질 수 있는 다양한 심리를 간결하게 그려내고 있는 이 소설은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다소 엉뚱하고 어처구니없는 상황으로 인식될지도 모르겠다.


"이제 너도 알겠지. 너 말고도 무엇이 있는지. 이제까지 너는 오로지 너 자신만을 알았지! 너는 본래 순수한 아이였어. 그렇지만 더 본래의 네 모습은 악마 같은 인간이었어! 그런 이유에서 이제 알리노니, 너에게 물에 빠져서 죽을 것을 선고하노라!"  (p.94 '선고' 중에서)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소설 속에서 작가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진실은 작가 스스로가 체험했던 온갖 느낌을 독자에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데서 온다. 결국 그것은 작가의 상상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작품을 쓰는 동안 그가 체험했던 생생한 기록에서 근거한다. 독자는 작가의 체험을 읽으면서 때로는 웃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면서 미처 겪어보지 못했던 다양한 경험을 공유하게 된다. 늦가을의 날씨 치고는 꽤나 따뜻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물기가 쪽 빠진 단풍잎이 제 무게를 잃은 듯 하늘 저편으로 하늘하늘 떨어지고 있다. 하루 종일 흐린 하늘엔 이따금 아이들 웃음이 퍼지곤 한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카프카의 단편을 읽고 짧았던 그의 삶을 생각한다. 가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침을 먹고 느지막이 집을 나서는데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앳된 모습의 남자 한 명이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옆동을 향해 서둘러 뛰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한 손에는 꽃다발이 담긴 쇼핑백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선물 꾸러미를 든 모습이 언뜻 보기에도 누군가의 생일이나 아니면 어떤 특별한 일을 축하하기 위한 행사에 참석하는 차림이었다. 검은색 면바지에 검은색 패딩을 입고, 머리도 한껏 멋을 부려 단정하게 빗은 모습이었지만, 얼굴엔 여드름이 군데군데 솟은 것으로 보아 아직은 성인이 되지 않은 듯한 그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뛰어가는 남자를 향해 마주 보고 달려오는 비슷한 또래의 여자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한참 동안 반가운 포옹을 나눈 후 어렵게 떨어져 나란히 손을 잡은 후 아파트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멋을 내고, 선물을 준비하고, 혹시 잊은 게 없는지 몇 번이고 확인에 확인을 거친 후 집을 나서고,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던 누군가를 만나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되풀이하여 낮에 만났던 그 사람의 목소리를 재생하고, 밤이 늦도록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똘망똘망 정신이 맑아지는 듯 느껴졌던 경험. 사람은 그런 시간으로부터 멀어지는 게 아니라 그런 경험으로부터 멀어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누군가를 만나는 일에 가슴 설레고,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서 한없이 즐거울 수 있다면, 그런 가슴 두근거리는 경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열정과 노력이 있다면 우리는 굳이 영영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그리워하며 청승맞게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될 일이 아닌가.


"사람은 행복하기만 하면 어떤 규율도 견뎌 낼 수 있다. 글쓰기 습관을 깨뜨린 것은 바로 불행이었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다투는지, 내가 얼마나 자주 짜증을 부리며 그녀의 신경을 건드리는지 깨달았을 때 나는 우리의 사랑이 불행한 운명을 맞이하리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사랑이 시작과 끝이 있는 정사로 변한 것이었다. 나는 사랑이 시작된 그 순간을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사랑이 끝난 마지막 순간을 말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p.60 그레이엄 그린의 <사랑의 종말>중에서)


어쩌면 우리는 사랑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는 사랑이 식었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부터 늙음을 경험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곁에 있는 아내 혹은 남편을 만나는 일이, 출가한 자식을 만나는 일이, 꽃 한 다발을 들고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일이 늘 가슴 설레고 기다려지는 사람이라면 그는 영원히 청춘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는 흘러간 시간으로부터 멀어지는 게 아니라 흘러간 경험으로부터 너무나 빨리 멀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늙는다는 건 젊었던 시간으로부터 멀어지는 게 아니라 젊었을 때의 경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