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살고 싶은 시간
신민경 지음 / 책구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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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숙명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나이도 젊고, 여전히 건강한 사람들에게 '죽음'은 단지 호기심의 대상은 될지언정 곧 닥칠 미래에 대한 대비로 여겨지지는 않는 듯하다. 물론 자신의 언저리에 언제나 '죽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유념하면서 사는 사람도 없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까마득히 먼 미래의 이야기일 뿐 현재의 자신과는 하등 관련도 없는, 그렇지만 미래의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직접적인 현실로서의 '죽음'을 인지하게 될 날이 결국 오고야 말 거라는 사실을 꿈결처럼 어렴풋이 떠올리는 게 전부이다. 그러나 아주 멀게만 느껴지던 '죽음'은 숨죽이며 먹이를 쫓던 호랑이의 도약처럼 갑작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하루하루 시간은 흐르고 몸은 더 망가져 가는데,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들 언저리만 계속해서 서성였다. 죽고 나면 어차피 누군가가 다 알아서 해줄 일들. 그렇게 시간을 방치해 두다가 불현듯 '지금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 찾기에 돌입했다. '지금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지금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었던 이유는, 하고 싶은 일을 찾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방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p.27)

 

누구나 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거지만 임박했거나 미리 예고된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쓴 책을 나는 꽤나 여러 권 읽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그들의 삶이 궁금하고, 호기심에 이끌리고, 불안한 마음으로 책을 펼치기에 이른다. 나는 삶의 이편에서 여전히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럴라치면 나는 삶과 죽음의 가느다란 줄 위에 올라 선 듯 아슬아슬한 느낌에 사로잡히곤 한다. 때로는 '죽음' 쪽으로 한 발 더 기운 듯하고, 때로는 삶 쪽으로 한 발 더 다가선 듯하다. 이런 기분은 뭐랄까. 끝을 모르는 절벽 위에서 아스라한 공포에 사로잡혔다고나 할까, 더없는 공포와 비견할 수 없는 평화가 공존하는 그런 기분이다.

 

신민경의 산문집 <새벽 4시, 살고 싶은 시간> 역시 시한부 인생을 사는 젊은 여성이 쓴 책이다. 젊다는 건 때로는 짙은 우울을 동반하기도 한다. 이처럼 이른 나이의 '죽음'이 예정되었을 때는 더욱더. 관광경영학을 전공했다는 저자는 다양한 세상을 깊이 있게 경험하기 위해 호주 자원봉사를 시작으로 40여 개 국가에서 살아보았다고 한다. 2015년 유방암 발병으로 수술했고, 2017년 재발해 두 번째 수술을 했으며, 2020년 영국으로의 유학을 앞두고 다발성 전이를 확인,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는 내용의 책날개에 적힌 저자 소개를 읽으며 나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을 저자의 삶을 가만가만 상상해 보았다.

 

"시간이 흘러 나는 가족과 지인들 몰래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왜 저예요? 저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인 거 아시잖아요? 저한테 어쩜 이러실 수 있어요! 왜? 왜! 왜!" 부정하고 분노하고 따지며 목 놓아 울었다. 물론 나는 이런 걸 바깥으로 티 내는 사람은 아니다."  (p.159)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냈을 때 내게 처음으로 드는 생각은 이제 더는 그에게 궁금한 것을 물을 수 없다는 거였다. 왜 나는 진작 사소하지만 궁금했던 것들을 모두 물어보지 못했을까, 후회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떠난 이에게 궁금했던 모든 질문들은 이제 그만 내려놓아야 한다는 냉엄한 현실이었다. 산다는 건 그에게 궁금한 것들을 질문할 수 있는 시간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지만 그것 역시 영원하지 않기에 잘 산다는 건 그에게 궁금한 것을 그때그때 물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쓰는 내내 너무 살고 싶었다. 살아서 뭐라도 하고 싶다 생각했다. 하지만 괜찮다. 원래 이상과 현실은 차이가 있는 법이고, 그게 삶인 걸 알았으니. 내 걱정은 하실 것 없다. 이승이든 저승이든, 조용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타고난 능력 부족을 노력으로 메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사람은 잘 안 바뀌니까."  (p.197 '에필로그' 중에서)

 

장마철처럼 내리는 비. 나는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거실에서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을 마치 영겁의 시간을 빠져나온 듯 길게 읽었다. 한 사람의 삶이 책 속에 오롯이 담긴, 더 이상 숨길 것도, 그렇다고 더 이상 내세울 것도 없는 저자의 순박하고 투명한 시간들이 책 속에서 말갛게 빛나고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가볍게 죽을 수 있을까?' 나는 짙어가는 어둠 속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빗소리도 잊은 채. 칙칙한 어둠과 함께 굵어지는 빗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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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 문장들 쓰는 존재 4
림태주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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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기계가 아닌 이상 매 시간 균질한 밀도의 삶을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때로는 빡빡하게, 때로는 느슨하게 살다 보면 성긴 시간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후회와 그리움을 소환하고 때로는 희망과 걱정을 저글링 하며 나른한 시간을 채운다. 몸은 움직이지 않을지라도 성긴 시간을 메워주던 그리움과 후회. 그리움과 후회는 어쩌면 희망과 걱정의 대척점에 있는 단어들일지도 모른다. 이미 살아본 시간과 앞으로 살게 될 미래의 시간을 자맥질하며 우리는 고단한 현실을 잊곤 한다. 그럴 때면 누군가 말했던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그저 공허한 메아리로 남는다.

 

"그리워할 수 있다는 건 살아 있다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건 살아남았다는 것이고, 덤벼드는 적들로부터 용케 도망쳤거나 잘 이겨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직 지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그리워할 수 있다. 그리움은 생존 무기다. 무기는 꼭 사용해서가 아니라 가지고 있는 자체만으로도 힘을 가진다. 방호복이나 비상식량처럼 그리움도 나를 지키고 보살피는 데에 긴요하다."  (p.12)

 

림태주가 쓴 <그리움의 문장들>은 그리움에 대한 온갖 것들이 총망라되어 하나의 철학적 관념을 형성하고, 막연하기만 했던 감정들을 하나로 끌어모은다. 그것은 마치 누에고치에서 명주실을 뽑아내는 것처럼 신기하기만 하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움에 종사하다 그리움에서 퇴직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작가의 주장답게 '보고픔과 기다림과 외로움의 합체어가 그리움이라 그리움의 뿌리는 외로움'이라는 결론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리움의 문장들'은 '외로움의 문장들'이기도 하다.

 

"나도 이제 노인의 언어를 이해해야만 하는 나이에 접어들었다. 나는 아마도 침묵의 언어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당신처럼 함부로 외로움을 발설하지 않을 것이다. 알 수 없다. 아버지도 나처럼 다짐했을지도 모른다. 다짐한다 해도 불어나는 외로움의 채무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감정의 수도꼭지가 점점 헐거워지고, 잠가도 흘러나오는 비탄이 하수구를 막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아무리 기다려도 배관공은 오지 않는다."  (p.149)

 

성긴 시간에 찾아드는 그리움, 혹은 변질된 외로움을 우리로서는 막을 도리가 없다. 물길을 막는 저 단단한 수력댐처럼 우리의 삶에서 그리움을 완전히 차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움은 물길처럼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그리움의 습격에 인간은 그저 무기력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 산다는 건 누군가의 가슴에 돋을새김의 그리움을 한 자락 새겨 넣는 일이라지만 그리움과 허무함이 넘치도록 나를 잠식하는 밤이면 마음을 굳게 닫고 저 멀리 달아나고 싶을 때가 더러 있다. 밤을 꼴딱 새우고 부스스한 아침을 맞았을 때의 더러운 기분을 무엇보다 싫어하기 때문이다.

 

산에는 요즘 이소(異所)를 준비하는 어린 까치의 날갯짓이 분주하다. 아카시아 꽃의 시원하고 달착지근한 향기가 온 산을 가득 채우는 동안 어린 까치는 스스로 살아갈 준비를 하고, 한 자락의 그리움을 가슴에 품은 채 서둘러 작별을 고할 것이다. 마침 오늘은 어버이날. 부모의 곁을 떠났던 이맘때의 나는 자라고, 나이 들어 그 시절의 부모님 나이가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한 자락의 그리움을 끈질긴 혈연의 끈인 양 가슴에 품은 채 살아가고 있다.

 

"외로움의 귀퉁이, 그리움의 모서리였을 꽃밭 앞에 하염없이 앉아 있는 엄마가 있다. 내가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면 엄마의 어룽대는 등을 가만히 껴안아 주고 싶다."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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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 젖은 땅 -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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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 적들은 다들 각자 죽었을 것이다. 적선이 깨어지고 불타서 기울 때 물로 뛰어든 적병들이 모두 적의 깃발 아래에서 익명의 죽음을 죽었다 하더라도, 죽어서 물 위에 뜬 그들의 죽음은 저마다의 죽음처럼 보였다.'는 구절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보지도 못한 전쟁의 끔찍함에 오싹한 한기를 느끼곤 한다. 그것은 비록 소설가 김훈의 필력에서 나온 임진왜란의 한 장면에 불과하지만 익명의 죽음에 더해지는 산 자의 무덤덤함과 저마다의 죽음 앞에 오열했을 그들 각자의 슬픔을 생각할 때 나는 가슴 밑바닥으로부터의 저릿저릿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념이나 가치관, 혹은 집단을 대표하는 상징물을 위한 희생은 대개 한데 뭉뚱그려 합산되는 까닭에 개별적인 죽음은 다만 하나의 숫자로만 표기될 뿐 저마다의 죽음으로 애도되거나 기억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예외는 있었다. 티머시 스나이더가 쓴 <피에 젖은 땅(Blood Lands)>을 읽고 나는 적어도 그 당시에 희생된 많은 이들의 개별적인 죽음을 그 자체의 슬픔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1933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의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벨라루스와 발트해 연안국에서 희생된 1400만 명의 대규모 학살은 독일 내 유대인 집단수용과 살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처참하고도 끔찍한 역사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학살만 기억할 뿐 독일의 동쪽, 소련의 서쪽에 위치한 ‘블러드 랜드’에서 발생한 학살은 세계사의 작은 부분으로도 다루지 않는다. 소련과 독일이라는 양대 제국주의가 번갈아가며 자행한 참극이었지만 전쟁의 승자(주로 영국이나 프랑스)에 의해 기록된 역사만 배운 우리로서는 참으로 당혹스러운 기록이었다.

 

"스나이더의 책은 페이지마다 잔악 행위와 대량 살육을 저지르는 과정을 담고 있지만, 그 주체들이 비인도적인 행위를 주저하거나 그에 반항하는 모습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오히려 '살인 할당량을 더 늘려달라'고 상부에 재촉하는 모습, '단지 없애라'는 명령을 상상 이상의 잔혹한 수법으로 실행하며, 거기에 강간·절도·패륜까지 추가하는 장면이 점철된다."  (p.721 '옮긴이의 말' 중에서)

 

최고 결정권자였던 히틀러와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 자행된 대량학살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가족들 눈앞에서 생사람을 도끼로 난자하고, 굶주림에 미쳐버린 부모가 자기 자식들을 잡아먹도록 하고, 어린 소녀들에게 발가벗고 춤을 추게 하고, 집단 강간한 뒤 그 음부를 찔러 죽이는' 등의 세세한 살인 주문마저 그들의 명령이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게다가 극우 파시즘과 극좌 공산주의라는 이념적 대척점에 있었던 두 체제가 번갈아가며 통치했던 블러드 랜드에서 제국을 꿈꿨던 두 명의 이상가(스탈린과 히틀러)가 벌인 대량 학살은 묘하게도 닮아 있었다.

 

"소련과 나치 독일 모두에서, 유토피아는 비전으로 제시되고, 현실과 타협되고, 대량학살로 실행되었다. 1932년에는 스탈린이, 1941년에는 히틀러가 그렇게 했다. 스탈린의 유토피아는 9주에서 12주 동안 소련을 집단화하는 것이었다. 히틀러의 것은 그와 같은 시간에 소련을 정복하는 것이었다. 두 가지 모두 돌이켜보면 말도 안 되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가지 다 큰 거짓말의 힘을 빌려 실행에 옮겨졌다. 심지어 실패가 명확해졌을 때조차 멈춰지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체는 정책의 견실함에 대한 증거물로 제시되었다. 따라서 히틀러와 스탈린은 둘 다 특정 형태의 폭군 정치를 했다."  (p.683)

 

본문만 총 11장에 이르는 이 책을 읽는 데 꼬박 한 달이 걸렸다. 참고문헌과 같은 부록을 빼더라도 700쪽이 넘는 책의 두께도 두께려니와 인간성을 상실한 듯한 야만의 장면 장면들이 나로 하여금 넘기던 책장에서 손을 떼게 했다. 나는 쉬지 않고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고, 나도 모르게 기억의 저편으로 되돌아가려는 본능과 맞서 싸워야 했다. 그것은 인간성 상실에 대한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그러나 나의 기억은 번번이 앞쪽 페이지로 되돌아 가 기껏 읽었던 수많은 페이지를 되새김질하며 끔찍한 장면에서 한동안 멈춰 서곤 했다.

 

"독일 국방군이 소련군 포로들을 기차에 실어 어딘가로 이동시킬 때에는 지붕이 없는 화물열차를 이용했고, 따라서 포로들은 눈비를 비롯한 기상변화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기차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수백 명의, 심지어 때로는 수천 명의 얼어 죽은 시체들이 열차 밖으로 쏟아져 내렸다."  (p.315)

 

역사 서적을 읽는 목적은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인간에 대한 기대를 줄일 목적으로 역사서를 선택하곤 한다. 역사서라는 게 본디 찬란하거나 위대한 인간성의 전형을 전시하기보다 끔찍하거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잔인한 사건들을 더 자주 기록하기 때문이다. 사마천이 궁형(宮刑·남녀의 생식기에 가하는 형벌로 사형에 버금가는 극형)을 당하면서까지 심혈을 기울인 책 <사기>를 보더라도 그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우며 잔인한 인간의 본질을 매우 깊이 있게 성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비열하고 잔인해질 수 있는 존재이다. 티머시 스나이더의 <피에 젖은 땅>을 읽고 반성하는 우리 모두가 책을 통해 자신의 내부에 있는 모든 야만성을 제거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런 야만성에 물든 존재라는 걸 겸허히 수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좀 더 겸손해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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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과 지성 - 뉴욕에서 그린 나와 타인과 세상 사이의 지도
김해완 지음 / 북드라망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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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적인 인간은 만성적으로 불안정한 존재이다.'라고 했던 에릭 호퍼의 전제는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도시에서 그것을 사실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어떤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일정한 방향으로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까닭에 세상은 마치 신이 만든 각본에 따라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각자의 역할을 구성원 모두가 충실히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도시의 구성원으로부터 받는 우리의 느낌은 불안이나 불만족이 아니라 자신감과 열정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로 인해 자신감이 넘치는 구성원 각자의 표정으로부터 인생을 낙관적으로 바라보게도 되고, 삶이 지극히 평범하게 흐를 것 같다는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되는 뉴욕과 같은 거대 도시에서 구성원들은 계급, 인종, 젠더, 국적, 언어 등과 같은 다양한 카테고리를 통해 바라볼 때 인간은 한없이 불안정하며 한 개인에 깃들어 있던 불균형한 기질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뉴욕의 미덕 중 하나는 열정적으로, 온 힘을 다해 사는 것이다. 온 힘을 다해 교육받고, 일자리를 찾고, 쇼핑하고, 술을 마신다. 뭘 하든 간에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한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은 생산적으로 산다며 찬사를 받는다. 하지만 호퍼의 '영혼의 연금술'에 의하면 극단적인 열정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는 지름길이다. 오늘의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내일은 더 나은 자신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이 괴로워도 참아볼 만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종교가 힘을 잃은 상황에서 열정은 구원의 느낌을 대체한다. 뉴욕 사람들의 열정적인 라이프스타일은, 이 도시에 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진실과 마주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계속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p.331)

 

젊은 작가 김해완이 쓴 <뉴욕과 지성>은 '길'을 잃은 대한민국의 모든 젊은이들을 위한 길 안내서로서의 자격을 갖추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부족한 면이 많고 채워져야 할 것들이 곳곳에 존재하겠지만 젊다는 건 여전히 그 가능성을 전제로 부족함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열일곱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인문학 지식공동체인 '남산강학원'에서 5년간 읽고, 쓰고, 질문하는 법을 배웠다는 작가의 이력도 특이하지만, 남산강학원과 인문의역학 연구소인 감이당이 함께하는 MVQ(Moving Vision Quest)의 일환으로 2014년 뉴욕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42개월 동안 살면서 그간의 경험과 배운 바를 바탕으로 이 책을 쓰게 되었다는 점도 눈에 띄었다.

 

"뉴욕의 돈 없는 외국인 학생이라는 변두리 위치에 서서, 같은 공간에 살고 있는 나와 타인(이 타인은 지금 옆집에 사는 이웃일 수도 있고, 몇 십 년 전에 머리를 싸매며 뉴욕과 세계를 고민했던 지성인일 수도 있다)의 삶 사이에 접점을 찾아서 그 사이 공간을 스케치해 보려고 했다."  (p.5 머리말' 중에서)

 

머리말과 부록의 뉴욕 열전을 제외하면 책은 10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1. '가장 보통의 존재의 환상 : 스콧 피츠제럴드와 5번가', 2. '휴머니티의 집 : 하워드 진과 990 아파트', 3.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문화 : 에드워드 사이드와 MTA 지하철', 4. '가장 낮은 곳부터 마비시키는 은총 : 이반 일리치와 워싱턴하이츠', 5. '뉴요커, 우주의 그로테스크한 농담 : 스티븐 제이 굴드와 자연사 박물관', 6. '콘크리트 정글의 신화 : 허먼 멜빌과 월가', 7. '구멍난 몸, '웃픈 도시' : 올리버 색스와 23번가 공원', 8. '연애, 만인의 무정부주의 : 엠마 골드만과 로어이스트사이드', 9. '가족을 위한 블루스 : 제임스 볼드윈과 할렘', 10. '마음-지옥의 방랑기 : 뉴욕과 에릭 호퍼'가 그것이다.

 

이채로운 것은 한없이 감성적일 것 같은 작가가 스티븐 제이 굴드나 올리버 색스를 책의 중간에 끼워넣었다는 사실이다. 알다시피 그들은 문학과는 다소 동떨어진 과학자이거나 의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지엽적인 문제에 앞서 나의 시선에 깊게 각인되었던 것은 책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스콧 피츠제럴드와 마지막을 장식하는 에릭 호퍼였다. '위대한 개츠비'를 쓴 스콧 피츠제럴드에게 있어 뉴욕은 그야말로 자본주의의 환상일 뿐이고 '길 위의 철학자'로 불리는 에릭 호퍼에게 있어 뉴욕은 스콧 피츠제럴드와는 대척점의 위치에 있는, 지극히 현실적인 도시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작가는 어떤 환상을 품은 채 뉴욕에 도착하여 누구보다도 현실적인 사람으로 뉴욕을 떠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목차에서 암묵적으로 말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여행객은 누구나 여행지에 대한 얼마간의 환상을 품게 마련이지만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모든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신의 몸과 영혼을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고려할 때, 비교적 젊은 나이의 작가는 몸도 마음도 가능한 한 멀리까지 행동반경을 넓힐 시기이지 안으로 안으로 축소할 시기는 아니라는 점이다. 젊은 시절의 인간은 인간관계를 넓히고, 더 먼 곳까지 여행하기를 원하고, 영혼이 머무는 자신의 내적 공간을 벗어난 그의 영혼이 환상에 부풀대로 부풀어 아주 멀리까지 뻗어가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년의 시기를 지나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반경을 줄이고, 단출한 인간관계를 지향하며, 밖으로만 나돌던 자신의 영혼을 시간이 날 때마다 내적 공간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결국 우리는 죽음이라는 마지막 종착점에 이르기 전에 자신의 영혼을 각자의 몸 안에 갈무리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만의 인생 서사를 써내려가기에 앞서 우리들 각자는 자신의 현재 위치를 시공간에서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러자면 나는 누구이며, 어떠한 관계 속에 위치하고 있으며, 어떠한 공간, 어떠한 시간을 스쳐가고 있는지 냉정하게 되짚어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좌표를 시공간의 어느 한 점에 위치하기 위해서는 인간관계의 파악이 선행되어야 하고, 그러한 관계 속에서 자신의 소속과 가능성을 객관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지향점과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젊은 시절의 그것은 일종의 환상처럼 허무맹랑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러면 또 어떠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있는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 자신의 인생행로를 다시 찾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작가도 이제야 비로소 스스로의 좌표를 찍을 수 있겠구나, 하고 안심하게 되었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누군가에게, 혹은 자신보다 어린 사람들에게 당신의 좌표는 어디냐고 묻고 있는 듯했다. 자신이 처한 위치도 모른 채 막막한 인생길을 떠난다는 건 너무나 무모한 도전이 아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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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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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삶에도 유행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오래 고민할 것도 없이 지금 유행하는 옷을 입고 주저 없이 거리에 나서는 것처럼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어떻게 사는 게 최선인지 평생 고민할 것도 없이 유행하는 삶의 방식대로 순서에 맞게 살아가는 것도 괜찮겠다,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수십억 명의 사람이 있고, 그들 각자가 자신의 방식으로 제 나름의 삶을 살아가는 까닭에 인간관계는 언제나 복잡하고, 복잡한 인간관계만큼이나 복잡한 삶이 펼쳐지는 것이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 하더라도 삶에 대한 인간의 고민을 덜어줄 방법은 없는 듯하다. 복잡한 방정식을 풀듯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변수들을 제공하면 자신의 인생에서 부딪치는 여러 고민들도 술술 풀려나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클라라와 태양> 역시 우리보다 앞선 미래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지금보다 과학이 발전한 그 시대에도 삶에서 벌어질 수 있는 여러 고민들은 지금과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온라인 학습이 보편화된 까닭에 사회성 교육을 위한 또래들 간의 모임을 고민해야 하고, 일상에서 대화 상대를 찾을 수 없어서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에이에프(AF: Artificial Friend)의 구매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등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고민을 떠안게 된다는 가정을 하고 있지만, 삶의 단계에 따라 부딪치게 되는 근본적인 고민들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 듯 보인다. 예컨대 대학 진학이나 결혼, 출산, 죽음 등과 같은...

 

소설에 등장하는 조시는 '향상'(유전자 편집을 통한 사람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의 증가)을 받은 후 시름시름 앓고 있는 병약한 소녀이다. 그런 조시에게 에이에프의 보살핌은 절실했고, 남편과 이혼한 후 혼자 조시를 돌보고 있는 엄마는 에이에프 매장에서 조시가 선택한 클라라를 구매한다. 조시가 매장에 전시되었던 클라라를 본 소감은 특별했다. '정말 귀엽고 똑똑하고, 약간 프랑스 사람처럼 보이고, 머리가 짧고 색이 짙고 옷도 진한 색이고 눈빛이 정말 친절'하다는 게 13살 소녀 조시의 평이었다. 클라라는 그렇게 조시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조시의 집 주변에는 풀이 무성한 벌판과 건초 더미를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고, 이웃이라고는 '향상'을 받지 않은 또래 친구 릭과 그의 엄마가 사는 집이 유일했다. 그러나 조시의 엄마는 조시가 '향상'을 받지 않은 릭과 어울리는 게 못내 마뜩잖았고, 몸이 아파 출근도 하지 않는 릭의 어머니와도 데면데면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 릭이 조시를 좋아한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릭의 어머니 헬렌은 아들이 어떻게든 대학에 진학하여 조시와 대등한 관계가 되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게 되고, 릭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기에 이른다.

 

"아들에 대한 엄마의 사랑이 숭고해서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을 누를 정도라는 거지 틀린 말은 아닐 거야.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이 삶에서 차라리 외로움을 택할 이유는 그것 말고도 많아. 과거에도 그런 선택을 종종 했지. 예를 들면 나는 릭의 아버지와 같이 살기보다 외로움을 택했어. 그 사람은 안타깝게도 세상을 떴어. 릭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지만. 그렇긴 해도 그 사람이 한동안은 내 남편이었고 아주 형편없는 남편도 아니었어. 우리가 부유하게 살진 못해도 그럭저럭 먹고 사는 것도 그 사람 덕이지."  (p.230)

 

병약하기는 했지만 온라인 수업도 듣고, 사회성 향상을 위한 또래들의 모임에도 참가하는 등 그럭저럭 평범한 삶을 이어가던 조시가 외출은 물론 수업도 듣지 못할 정도로 병이 중해지자 조시의 엄마와 클라라의 시름 역시 깊어진다. 조시의 엄마는 조시의 죽음 이후 클라라를 통한 가상의 조시를 모색하지만 클라라는 자신이 매장의 전시실에 있을 때 목격했던 태양의 능력을 떠올린다. 클라라는 태양의 자양분을 조시에게 쪼이면 자신이 보았던 기적처럼 조시 역시 금방 되살아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매장 쇼윈도에서 보았던 노숙인 거지 아저씨와 그가 안고 있는 개가 죽은 듯 미동도 없었는데, 다음날 해가 강력한 자양분을 그들에게 드리우자 살아나는 모습을 클라라는 내내 기억했던 것이다. 클라라는 전지전능한 태양의 능력에 호소하기 위해 태양이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잠자러 가는 곳으로 짐작되는 맥베인 씨의 헛간에 가보기로 결심한다. 그곳은 들판을 가로질러 가야만 하는 꽤나 먼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클라라의 간절한 희망을 알아챈 릭은 클라라와 동행한다. 반면 조시의 엄마는 언제 떠날지 모르는 조시를 대신할 대상으로 클라라를 지목하고, 카팔디 씨를 통해 조시의 얼굴을 본뜨고, 클라라에게 조시의 행동이나 사고방식을 배우도록 당부한다. 한편 태양을 기쁘게 함으로써 조시에게 자양분을 쪼여줄 기회를 갖기를 원했던 클라라는 결국 공해를 배출하는 기계를 부술 계획을 세운다. 조시의 아빠 폴은 조시 엄마의 계획에는 반대하지만 클라라의 뜻에는 동조하여 클라라를 적극적으로 돕는다.

 

"물론 인간의 마음은 복잡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어딘가에 한계가 있을 거예요. 폴 씨가 시적인 의미로 말씀하셨지만 그래도 배워야 할 것에는 끝이 있을 겁니다. 조시의 마음은 방 안에 또 방이 있는 이상한 집을 닮았을 수 있지요. 하지만 이게 조시를 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면 저는 최선을 다하겠어요. 제가 성공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p.322)

 

소설에서는 줄곧 자신의 주인이자 친구인 조시를 향한 '에이에프 소녀' 클라라의 헌신적인 노력과 포기하지 않는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과정에서 클라라가 보여주는 사랑과 인간 못지않은 현명한 판단은 로봇이 과연 인간의 마음을 어디까지 학습할 수 있으며, 판단을 유도하는 인간의 자의식을 로봇도 공유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게 한다. 물론 소설을 읽는 독자는 클라라가 야적장에 버려지기 전까지 로봇이라는 생각을 전혀 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리고 소설을 읽는 독자는 유난히 호기심이 많고 학습능력이 뛰어났던 클라라에 대한 연민과 가슴 절절한 안타까움을 금하기 어렵다.

 

"아주 특별한 무언가가 분명히 있지만 조시 안에 있는 게 아니었어요. 조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카팔디 씨가 틀렸고 제가 성공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결정한 대로 하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p.442)

 

작가인 가즈오 이시구로는 '에이에프 소녀' 클라라를 통해 우리에게 묻고 있다. 사랑은 얼마나 위대하며, 그것이 비록 생명이 없는 로봇에게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얼마나 큰 감동과 전율을 주는가? 하고 말이다. 세밀한 필체로 사소한 장면까지 눈에 보이는 듯 묘사함으로써 SF라는 가상적 현실에 사실감을 더한 <클라라와 태양>은 인간이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고유한 무엇인가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하고 묻고 있다. 우리는 그에 대한 답변을 준비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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