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쓰기 위하여 - 글쓰기의 12가지 비법
천쉐 지음, 조은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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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잘 쓴다는 건 타인과의 교감이나 소통이 원활하다는 의미일 테다. 물론 여타의 다른 재능도 필요할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유명한 작가나 배우 중에는 의외로 낯을 심하게 가리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작가가 살아가는 실제 생활과 그가 작품 속에서 펼치는 가상의 공간 사이에 존재하는 이와 같은 괴리는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것은 아마도 현실 공간과 가상공간 중 어느 곳에 더 많은 비중을 두느냐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내가 만약 가상의 공간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그곳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진다면 현실 공간에서의 나는 아마도 갓 전입한 이등병마냥 어리바리한 모습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익숙한 곳과 익숙하지 않은 곳의 차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내 생각은 그렇다.


<오직 쓰기 위하여>를 쓴 천쉐 작가 역시 자신이 현실에서 사교성이 없다고 말한다. 1970년생인 작가가 연륜이 짧거나 경험이 부족해서 그랬던 것은 아닐 터, 작가는 오직 글을 쓰는 일에 몰두하였거나 삶의 비중을 글쓰기에 두고 살아왔기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중문학과 대학생이 된 스무 살에 소설을 쓰기로 작정했다는 작가는 '가장 존경한 친구'로부터, 대학 문예 동아리 선생님으로부터 '창작의 소질 내지 소양이 없다'는 말을 들었었다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작가는 어떻게 하면 남들보다 글을 더 잘 쓸 수 있을까 궁리했고, 경제적 어려움과 현실의 고난 속에서도 글쓰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시간을 훔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습관이 들고 나니까 쓰지 않으면 불편해졌다. 나중에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만 쓰는 것이 아니라 저녁 시장에서 노점을 벌일 때도 노트를 들고 한쪽에서 쓸 수 있게 됐다. '습관'은 어떤 선언으로 변했다. 나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다. 겉보기에는 야시장 행상인이지만 글쓰기는 내 마음속에 심어져 있고 내 생활에서 표현되고 있다. 때가 되면 나는 소설을 쓸 것이다. 돈을 충분히 모으지 못한다 해도 소설을 쓰겠다는 뜻을 나는 행동으로 여자친구에게 증명해 보였다."  (p.38)


출간은 '10년 뒤에나 생각하자'면서도 1년에 한두 편씩을 계속 썼던 작가는 친구가 자신의 작품을 신인상에 응모하는 바람에 출간의 기회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그러나 작가의 작품 '악녀서'가 대만은 물론 홍콩에서까지 판매되는 중에도 작가는 타이중 야시장에서 옷을 팔았다. 혹여라도 독자가 알아보는 날이면 아니라면서 외면하곤 했다. 재능은 없고, 대학 졸업 뒤 빚더미 가족을 돕느라 시간은 더 없었던 작가는 서빙, 점원, 노래방 도우미, 대필 작가, 여행·모텔·인터뷰 기사 등 가리지 않고 처리하는 프리랜서 등을 하면서 가난하고 힘든 시기를 겪었다.


"장편소설 집필은 노동이라 할 수 있다. 오랜 시간 집중할 수 있는지, 긴 시간 한 글자 한 글자 두드릴 수 있는지, 그리고 구상해놓은 모든 생각이 진짜가 될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예측하지 못한 갖가지 상황이 닥치지만, 모든 시련을 통과해야만 작품이 완성된다. 내 가장 큰 장점은 잘 버틴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그리 큰 기대가 없다. 그리하여 내 초고가 언제나 못 봐줄 만큼 끔찍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용감하게 쓰고, 고치고 또 고치며 나아간다."  (p.79)


우리는 종종 자신의 재능 없음만 탓하고 열정이나 노력의 부재에 대해서는 너그럽게 대하곤 한다. 예술 분야에 대해서는 특히 더 그러하다. 글을 쓰는 일이든, 그림을 그리는 일이든, 혹은 악기를 연주하는 일이든 그 분야의 타고난 천재보다는 긴 시간을 들여 끝없이 노력한 이가 그 분야에서 인정을 받는다는 사실을 때때로 잊어버리곤 한다. 꿈은 있지만 자신에게 타고난 재능이 없다고 풀이 죽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1부 '내가 걸어온 창작의 길', 2부 '창작자에게 건네는 열 가지 조언', 3부 '프리랜서 업무 지침서' 등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천쉐 자신의 회고록인 동시에 재능은 없고 열정만 가득한 모든 꿈쟁이들에게 건네는 희망가라고 할 수 있다.


"친구 말로는 내가 의지력이 강하다지만, 나는 의지력이 아니라 적응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할 수 있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는 능력이랄까. 나는 인내심이 대단하고 온갖 좌절을 딛고 일어서고자 온 힘을 쥐어짤 수 있다. 갖가지 질병과 함께해왔기 때문에 고통 속에서도 글을 쓸 수 있는 갖가지 방법을 개발했다. 우리는 반드시 가장 강해질 필요가 없다. 그러나 더 멀리 걸어가기를 기대할 수는 있다."  (p.147)


천쉐 작가와 같은 노력형 인간의 성공기를 읽고 나면 갑자기 없던 힘이 치솟고 주먹에도 불끈 힘이 들어가지만, 그것도 잠시 열정 생성의 유효기간은 생각처럼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나는 천쉐처럼 의지력이 강한 사람도 아니요, 어떤 분야에 특별한 재능을 갖고 태어난 사람도 아니기에 그저 타인의 성공을 부러워하거나 때로는 누군가의 열정을 응원할 뿐 내가 직접 나서서 추진하지는 않는, 말하자면 나는 지극히 평범하고 때로는 가벼운 인간에 속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따금 금세 지칠 듯한 거창한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분수에 맞지도 않는 큰 성공을 욕심내기도 한다. 그래도 하나 잘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반성을 잘한다는 것.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어떤 거창한 계획을 하나 세울까 고민 중에 있다. 멀지 않은 시점에 통렬한 반성이 이어질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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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빙산 - 김상미의 감성엽서
김상미 지음 / 나무발전소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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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산문집을 읽고 있노라면 가슴 한켠에선 언제나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곤 한다. 시인이 시를 써야지 한가하게 산문을 쓰고 있는 현실이 슬프고, 그렇게 나온 산문집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선뜻 읽고 있는 내가 밉고 그렇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던 서정윤 시인의 시 '홀로서기'가 시중에 혜성처럼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다들 서정주 시인으로 잘못 안 채 시를 먼저 암송했었고, 낭랑한 음성의 성우나 어느 여배우가 읊었던 시낭송 테이프가 여느 대중가요 테이프만큼 인기가 있었던 시절, 약속이 있는 사람들의 손엔 으레 시집 한두 권쯤 모양새처럼 들리던 시절, 소설보다 시집이 더 잘 팔리던 그 시절을 살아보았던 나는 새로운 유행에 밀려 이제는 뒷방 노인네 신세가 된 어느 시인의 산문집을 읽으면서도 못내 미안하고, 부끄럽고, 끝내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한때 누군가의 시낭송 테이프를 닳도록 들었던 나는 '시라는 건 다만 음표가 없는 노래로구나' 생각했었고, 그런 노래를 의미도 모른 채 부르고 또 불렀었다. 그 소리는 어스름에 묻혀 유령처럼 마을을 떠돌고, 가슴에는 어둑어둑 어둠이 짙어지는데 발길을 되돌려 집으로 향하지 못했던 나는 오래도록 산길을 거닐었었다. 그러나 시와 함께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시와 멀어지는 명분은 언제나 시의 무용성과 독해의 어려움이었다. 그렇게 나를 합리화하면서 꾸역꾸역 나이만 먹어 왔다. 나는 어쩌면 시를 잃었던 그 시점부터 젊음의 낭만을 영영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이 세상을 온전히 누리는 대신 그것을 모성이라는 햇빛 속에 집어넣어 우리가 필요로 할 때마다 비로, 눈으로, 따뜻한 햇살로 풀어놓으셨는데... 우리는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 당연한 걸로만 알고 누려만 온 것이다. 어머니는 눈물로 그것을 경고하셨다. 나도 너와 똑같은 인간이며, 내 몸속에도 오성과 오감의 기차가 순환하고 있다고."  (p.38)


김상미 시인의 산문집 <달콤한 빙산>을 읽었던 것도 그런 까닭이다. 언어를 사랑했던 소녀는 31살의 늦은 나이에 고향인 부산을 떠나 서울에 정착하였다. 익명의 도시에서 시를 시작한 시인은 이제 60살이 훌쩍 넘어 늙은 시인이 되고 말았다. 열렬한 독서가이자 그림 애호가이며 음악과 자연을 사랑하는 독신의 시인은 봄·여름·가을·겨울의 4계절을 구성 순서로 삼아 자신의 생애를 솔직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시인의 솔직한 고백이 왠지 애잔하게 느껴져서 200여 쪽 남짓한 이 책을 다 읽는 데 꽤나 긴 시간을 들였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찔끔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때로는 감정이 격해져서 책을 덮어야만 했던 까닭이었다.


"그러니 내 몸이 기억하는 그대로 나는 자연스럽게, 이대로 계속 늙어가는 나를 정겹고 애틋한 마음으로 지켜봐도 되지 않을까. 그리스 옛 시인의 시구처럼 '몸이여, 기억하라'고 애태우지 않아도, 이 광활한 우주에서 한갓 모래알에 불과한 나, 그 몸속에 담긴 나의 흔적, 내 삶, 내가 온 힘을 기울여 살아온 그 흔적과 기억들이 이 우주보다 더 넓을지 우주엔 비교도 안 될 만큼 작고, 작고, 작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그 끝이 무엇이든 어디든 나는 지금까지 니체의 제자(?)답게 '아모르 파티(Amor farti)'로 일관되게 살아왔으니 내 몸이 나를 기억하는 그대로 내 노년 또한 소박하고 치열하게 평온하지 않을까."  (p.147)


본격적인 겨울이 다가오는 순간에도 우리는 미리 겨울을 준비하지 않았던 것처럼 현대인에게 시간은 그저 가벼이 흘러가는 것. 시간이 만들어 낸 주름도 간단한 수술로 제거할 수 있다고 믿는 까닭에 노년은 그저 가난한 누군가에게만 찾아가는 것일 뿐, 자신에게는 영원한 젊음 이후에 갑작스러운 죽음만 존재할 거라는 현대인의 허황된 꿈이 시로부터 우리를 멀게 만들었던 건 아닐까? 시는 자신의 삶과 운명을 사랑하는 천상의 목소리, 음표도 없이 부를 수 있는 그들 각자의 노래, 그리고 시작과 끝을 알려주는 예언서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김상미 시인의 산문집으로부터 배운다. 우리가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아름다운 마무리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는 한동안 참 많이 아팠었다. 그때 쓴  어머니와 나」라는 시는 지금 읽어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 시는 6시집에 넣을 생각이다. 그동안은 어머니를 잃은 후유증이 너무 커 문예지엔 발표했지만, 시집엔 넣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이젠 그 후유증에서도 가벼워졌고, 어머니가 내 시의 스승인 것을 깨닫고 나니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이라고 한 페르난두 페소아의 시구처럼 어머니도 내게 공책 두 권을 주시면서 그곳에 단어들을 채우게 함으로써 일찌감치 '내가 홀로 있는 방식'을 터득하게 하신 게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p.211)


겨울비가 지나간 하늘은 멀끔하게 갠 모습으로 우리를 맞고 있다. 시린 하늘을 배경으로 몇 잎 남지 않은 낙엽이 가늘게 떨고 있다. 우리도 역시 가늘게 떨고 있는 저 나뭇잎처럼 바투 잡은 운명의 끈을 놓칠세라 연신 가늘게 떨고 있는지도 모른다. 평일 내내 가슴 졸이던 새파란 긴장에서 풀려난 탓인지 주말을 맞는 사람들의 표정이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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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국에는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독서란 본디 그런 것이지요. 아무리 반복하여 읽고 또 읽어본들, 읽었던 것을 되짚어 생각하고 유추해 보아도 글을 쓰기 전에 당신이 의도했던 바에 정확히 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독서란 글쓴이의 생각에 이르고자 할 것이 아니라(어쩌면 글쓴이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이) 글을 읽음으로써 독자가 생각하는 방식이 예전과 달라지는 것을 꾀하는 일련의 행위를 일컫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독서란 이전과 달라진 방식으로 도출된 자신의 생각을 읽는 행위일 테지요.


이와 같은 오류는 현실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거리에서 '윤 어게인'을 외치는 사람들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윤석열이 집권했던 지난 3년 동안 실제로 국정을 담당했던 사람이 어쩌면 그의 아내인 김건희였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특검의 수사나 돌아가는 주변 정황으로 볼 때 점점 사실처럼 굳어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윤석열을 추앙했던 세력들은 이제 '윤 어게인'을 외칠 것이 아니라 '김 어게인' 또는 '건희 어게인'을 외치는 게 옳을 듯싶은데, 그들은 여전히 '윤 어게인'을 외치고만 있습니다. 한심하고 미련한 행위이지요. 그와 같은 행위는 한마디로 자신들의 오류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술이나 먹고 사우나나 하던 윤석열은 지금처럼 감옥에 남겨 놓는다 하더라도 실질적인 국정 운영자였던 김건희가 돌아오기를 열망하는 게 거리에 나온 지지자들의 현실적인 선택일 텐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까닭이지요.


독서의 효용은 이렇듯 많은 이의 생각을 수용하거나 차용하려는 게 아니라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글을 읽음으로써 내 생각의 틀을 바꾸고, 달라진 생각의 틀을 통하여 새롭게 도출된 나의 생각을 읽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나의 옛 생각을 버리고 새로워진 나의 생각을 읽는 게 진정한 독서라는 뜻이지요. 우리가 독서의 의미에 대한 대중의 오류를 바로잡는 것처럼 나는 '윤 어게인'을 주창하는 거리의 무법자들을 향해 그들의 오류를 정정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나의 의견을 받아들일지 그렇지 않을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말입니다.


현실에서 자신의 오류를 발견하기란 눈앞에 있는 사람의 생각을 표정만 보고 읽어내는 것만큼이나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아닌 타인의 지적을 겸허히 수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삶을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김건희의 지시를 받았던 박성재의 모습으로 평생을 살아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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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뜨는 나라의 공장 -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김난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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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젊은 시절을 엿보는 것은 꽤나 흥미 있는 일이다. 물리적으로 시간을 거꾸로 되돌릴 수는 없지만, 그가 젊은 시절에 썼던 글이나 사진 등을 보면서 '아, 그때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라거나 '젊은 시절에 그는 이런 스타일의 옷을 입었었네' 하는 식의 감탄은 당사자가 어두운 골방에 갇혀 어쩌다 하게 되는 무익한 회상과는 차원이 다른 행위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지인 몇몇이 모여 앨범이나 일기장을 들춰보면서 하게 되는 농담 섞인 담소나 추억 되살리기는 일종의 작은 축제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글을 쓰는 작가나 포토그래퍼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직업일 수 있다. 물론 연극이나 영화를 하는 배우 역시 그에 못지않게 매력적이지만 말이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30대의 젊은 시절에 썼던 수필집 <해 뜨는 나라의 공장> 역시 그런 작품으로 읽기에는 안성맞춤이다. 70대 중후반의 나이가 된 작가를 마주하고 있는 독자가 시대를 거슬러 그가 30대에 했음직한 생각들을 가늠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가의 생각이 은밀하게 내재된 소설이 아닌, 작가의 생각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산문집이 존재한다는 건 작가를 사랑하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행운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하루키의 애독자 중 한 사람으로서 그가 쓴 작품 대부분을 읽어보았지만, 그럼에도 이따금 하루키의 문체가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가 쓴 소설보다는 에세이에 먼저 손이 가곤 한다. 독자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는 쉽고 간결한 문체로, 독자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듯한 그의 문장 스타일은 읽는 이로 하여금 '쉼'의 느낌을 강하게 자각하게 한다. 그래서인지 하루키의 에세이 한 권을 읽고 나면 왠지 모르게 머리가 맑아진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나는 여행을 떠날 때면 가급적 형편없는 차림을 하는데, 그래도 현지에 도착해서 보면 주위 사람들에 비해 상당히 반듯하게 차려입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황당하곤 한다. 그리고 반대로 일본에 돌아오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너무나 단정하게 입고 잇는 것 같아서 또 한동안 안절부절못한다. 그런 일이 몇 번 거듭되는 사이, 나도 모르게 '아무려면 어때'의 숲속으로 끌려들어가고 만 듯하다."  (p.160)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하루키는 소설 외에도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써왔다. 분류하자면 여행에세이나 가벼운 신변잡기를 다룬 경수필 외에도 르포르타주나 탐방기를 쓰기도 했다. 옴진리교 지하철 사린사건을 다룬 르포르타주 <언더그라운드>와 공장 탐방기 <해 뜨는 나라의 공장>가 대표적이다. 하루키의 공장 탐방기라니, 왜?라고 질문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소설을 쓰기 위해 공장을 취재할 수는 있지만, 일반인들이 관광이나 견학을 목적으로 하는 공장 방문을 하고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과의 일문일답을 했던 내용을 책으로 엮는다는 건 소설가가 하는 일상적인 취재 활동과는 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새삼 얘기하기는 좀 뭣하지만, 일본 사람들이란 정말 애처로울 정도로 열심히 일하는 인종이더군요. 잘하기도 할뿐더러 일 자체에서 즐거움과 철학과 긍지와 위로를 찾아내려고 애쓰기도 한다. 그게 옳은 일인지 아닌지는 물론 내가 알 수 없는 노릇이고, 그것이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을 차치하고 내가 지금 이렇게 원고를 쓰고 있는 동안에도 일본 각지의 공장에서 여러 사람들이 몸을 움직여 무수한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왠지 마음이 푸근해지고 용기가 생긴다."  (p.12~p.13 '서문' 중에서)


하루키가 방문하고자 했던 공장의 선택 기준은 조금 독특한 면이 있다.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그 기준이 순전히 작가의 호기심에 의해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작가가 방문했었고,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공장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인체모형 공장, 결혼식장, 지우개 공장, 낙농 공장, 콤데가르송 공장, 콤팩트디스크 공장, 아데랑스 공장 등으로 우리의 상식에서 상당히 벗어난 듯도 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공장 이미지와도 잘 부합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작가는 지금 막 결혼식장을 벗어나는 신혼부부마저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인상을 받았던 까닭에 '결혼식장'을 하나의 공장으로 인식한 것을 보면 작가의 시선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종의 공장인 결혼식장, 혹은 '결혼식장'이란 이름의 공장에서 사용하는 원료는 다름아닌 신랑 신부로 불리는 한 쌍의 남녀이며, 그 기계적 추진력은 전문적 노하우와 숙달된 서비스, 주된 부가가치는 감동(좀더 소극적으로 표현하면 정서의 고양), 그 수요를 뒷받침하는 것은 세상 일반의 '관례. 상식. 습관'이다. 그런 식으로 결혼식장에서는 오늘도 흉일만 아니면 한 회 또 한 회, '의식'이라는 이름의 휘황찬란한 상품이 생산되고 있다."  (p.52)


어떤 대상에 대한 애착을 표현하는 소위 '덕질'이라는 것이 문학계에서는 다소 수줍게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물론 임경선 작가처럼 하루키를 흠모하는 까닭에 그가 살았던 일본의 몇몇 지역을 직접 방문하여 훑어보는 열혈 덕후도 존재하지만, 대다수의 애독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소장하거나 탐독하는 선에서 그치는 게 일반적이다. 물론 해외여행 중에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무덤을 방문하여 애도를 표하는 경우는 많이 보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독서가의 덕질은 꽤나 은근한 면이 있어서 길을 걷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심지어 낯선 곳을 여행하다가도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어떤 작품이나 문장을 떠올리곤 한다. 말하자면 독자의 내면에 깊이 자리하는 것이다.


기온이 올랐는지 눈이 쌓였던 자리에서 눈석임물이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다. 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가벼운 산책이라도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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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틈새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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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눈이 조금 내렸다. 첫눈이었다. 포근한 날에 내리는 함박눈처럼 우리가 기대하는 첫눈의 낭만이나 환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온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날씨는 추웠다. 그리고 지난해 있었던 잊지 못할 기억 때문인지 눈송이마저 푸슬푸슬 가늘게 쪼개지는 듯했고, 옹송그린 채 걷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도 눈이 내리는 허공을 향하지 않고 시종일관 땅으로만 향해 있었다. 나는 행인들의 우울한 시선을 뒤로한 채 서둘러 차를 몰았다. 연말의 바쁜 일정 틈틈이 읽기 시작했던 권여선 작가의 <푸르른 틈새>도 이제 몇 쪽 남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어떤 소설이건 소설을 읽는 독자는 마지막 부분으로 갈수록 손에 땀이 나고 호흡은 거칠어지게 마련, 그 순간에 다른 일로 어쩔 수 없이 책을 손에서 놓아야 했던 독자는 마치 책이 펼쳐 놓은 그물망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듯 어서 빨리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허둥대게 된다.


"나는 연애가 아니라 이별을, 사랑이 아니라 그리움을 기억한다. 연애의 시작이나 과정은 조금도 특별할 것이 없지만 연애의 끝은 언제나 특별하다. 나는 그 특별한 그리움과 집착, 뒤틀린 내 몸 안에 도사리고 있던 특별한 사나움을 기억한다. 실제보다 더 길어 보이는 욕실 거울처럼 이별의 순간을 몹시 길고 캄캄한 세월로 반사하는 내 기억의 틀 속에서......"  (p.202)


작가의 데뷔작이기도 한 이 소설은 소설의 주인공인 미옥이 이사를 앞둔 7일 동안 자신의 자취방에서 서른 살에 이르는 자신의 인생을 회고함으로써 자신에게 있었던 숨겨진 진실을 발견하고 이를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해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그녀의 인생은 대학 시절을 거쳐 삼십 대인 지금에 이르고 있지만, 회고의 중심은 민주화 운동기였던 1980년대 중후반의 대학가를 배경으로 미옥이 운동권 여대생으로 정착되었던 시점을 부각하고 있다. 1960년대에 태어나 대학 입학 정원 확대와 중산층의 성장에 기대어 대학에 진학했고 민주화의 물결 속에서 광장에 섰던 혹은 억지로 그곳에 서야만 했던 시대 상황과 여성성을 억압한 채 남성 중심의 운동 문화 속에서 중성적 여인으로 성장해야 했던 불합리한 현실이 소설 속에 투영되고 있다.


"어느 날엔가 나는 꽃무늬 커튼을 친 어두운 방에서 가구에 둘러싸인 채 동그마니 앉아 있었다. 움직일 수 있다고, 내부에서 무언가 꿈틀거리고 있다고 믿고 싶었지만 믿음과는 달리 습기를 잔뜩 머금은 젖은 나무토막처럼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이렇게 서서히 젖어가고 싶다는 축축한 욕망이 혈관을 타고 번졌다. 먼 훗날 누군가 이 방에 들어와 내겐 전혀 개의치 않고 이 방의 가구들과 함께 나를 들어내어서 어디론가 싣고 가 낱낱이 부수어주기를, 그렇게 해체된 채로 햇볕 받으며 말라가기를, 골수부터 관절까지, 마디마디까지 곰팡이로 뒤덮였던 몸이 콱콱 쪼개지고 틀어지며 버쩍버쩍 말라가기를 나는 꿈꾸었다."  (p.154~p.155)


어린 시절 미옥은 원양어선을 탔던 아버지 덕분에 별 어려움 없이 성장할 수 없었지만, 가산을 탕진한 외삼촌으로 인해 외할머니를 비롯한 외가 식구들이 미옥의 집에 얹혀살았다.  둘째 이모는 남편의 바람기로 자식과 함께 미옥의 집으로 들어왔고, 사업으로 가산을 탕진한 외삼촌으로 인해 외숙모 역시 비슷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미옥의 아버지가 직장을 잃고 실직자가 되었을 때 둘째 이모부는 사업에 성공해서 전세가 역전되었고, 외숙모와 외할머니 역시 미옥의 집을 떠났다. 운동권의 현실에 실망했던 미옥이 휴학계를 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 미옥과 아버지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 집 안에서 머물러야만 했다. 미옥이 다니던 대학에 복학하면서 여성성을 회복하고 한영과의 연애가 시작되는데...


"나는 내일 이사를 떠난다. 지난 일주일의 시간처럼 내가 또 어떤 기다림의 간이역에서 다시금 내 삶을 향해 새로운 일별을 던질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이 언제이든 그때도 나는 이렇게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기억의 화살을 향해 내 가슴을 과녁으로 내보이리라. 이런 생각만으로도 몸 속의 푸르른 창이 열리고 그 틈새로 빛이 쏟아져들어오는 듯하다."  (p.280)


곤두박질쳤던 기온은 조금씩 풀려가는 느낌이다. 어떤 작가든 그의 초기작을 읽을 때면 언제나 약간의 어색함과 부자연스러운 느낌과 함께 작가 자신의 선명한 이미지가 도드라지게 부각되곤 한다. 작가 자신의 정체성이나 세계관이 작품 속에 진솔하게 묻어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유정 작가의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를 읽었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작가가 쓴 소설의 권수가 더해지고 세월이 흐를수록 작가 본연의 색채는 옅어지지만, 어색했던 문장은 더욱 매끄러워진다. 그것을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따금 작가의 데뷔작이 몹시 그리워질 때가 있다. 이 책을 읽었던 것도 그런 까닭이었는지도 모른다. 첫눈을 그리워하듯 내가 좋아하는 어느 작가의 데뷔작을 나는 오늘도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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