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대 감기
윤이형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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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그친 직후에 숲길을 걸어본 사람이라면 잘 알지도 모르겠다. 숲 밖에는 비가 그쳤지만 숲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키가 큰 나무의 잎사귀에 고여 있던 빗물이 그보다 작은 나무의 잎사귀로, 그리고 마침내 길 옆의 작은 풀잎으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마치 빗소리처럼 선명하게 들리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낙수효과(落水效果)를 현실에서 체험하는 셈인데 공동의 번영을 위한 상부상조의 미덕은 자연계에서는 너무나 흔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유독 인간의 세계에서 만큼은 쉽게 접할 수 없는 진귀한 일이고 보니 이따금 듣게 되는 낙숫물 소리에 씁쓸한 느낌이 절로 들곤 한다. 인간에게 있어 권력과 부는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 베풀어야 하는 빗물과 같은 게 아니라 움켜쥐고 놓지 않아야 할 그 무엇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로 인하여 비가 그친 오후의 어느 숲길을 걸을 때마다 나는 크게 다르지 않은 한 인간으로서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끼곤 한다.

 

윤이형의 소설 <붕대 감기>는 페미니즘 이슈를 다룬 소설인 동시에 다름이 곧 분열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다름을 통하여 공존과 화합의 길로 나아가 종국에는 모두가 꿈꾸는 다양하고 다채로운 세상을 만들 수는 없을까를 생각하게 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예컨대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가해자인 동시에 다른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은 피해자인 까닭에 중첩되는 마음을 자신의 내부에서 낮과 밤의 경계처럼 확연히 선을 긋고 어느 한쪽을 걷어낼 수 없는, 말하자면 우리는 똥 묻은 개인 동시에 겨 묻은 개와 같은 존재인 까닭에 서로에게 우리는 위로와 용서를 구할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다가, 무언가를 하니까 또다시 당신은 자격이 없다고 비난하는 건 연대가 아니야. 그건 그냥 미움이야. 가진 것이 다르고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다고 해서 계속 밀어내고 비난하기만 하면 어떻게 다른 사람과 이어질 수 있어? 그리고, 사람은 신이 아니야. 누구도 일주일에 7일, 24시간 내내 타인의 고통만 생각할 수 없어. 너는 그렇게 할 수 있니? 너도 그럴 수 없는 걸 왜 남한테 요구해?" (p.108~p.109)

 

소설의 큰 얼개는 고등학교 동창인 진경과 세연의 우정과 그들을 둘러싼 인물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예쁜 외모와 따뜻한 마음씨로 어려서부터 인기가 많았던 진경과 커다란 모공과 여드름 자국을 가리기 위해 친구들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화장을 고집했던 세연. 교련 시간에 우연히 짝이 되었던 두 사람은 서로의 머리에 붕대를 감는 실습을 하게 되었고 타인의 시선에 익숙하지 않았던 세연은 붕대를 한 바퀴 더 감는 바람에 짧아진 붕대의 뒷마무리를 하지 못한 채 바짝 잡아당기는 바람에 진경은 비명을 지르고 만다. 그 일을 계기로 가까워진 두 사람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되는데...

 

"우정이라는 적립금을 필요할 때 찾아 쓰려면 평소에 조금씩이라도 적립을 해뒀어야 했다. 은정은 그런 적립을 해둬야 한다는 생각도, 자신에게 도움이 필요할 거라는 예측도 하지 못했다. 그런 식의 적립과 인출이 너무도 부자연스럽다고, 노골적인 이해관계나 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친분을 쌓는 사람들을 남몰래 폄하했다." (p.23)

 

소설에서는 계층, 학력, 나이, 직업 등이 모두 다른 다양한 여성들의 개별적인 서사가 연쇄적으로 이어진다. 불법 촬영 동영상 피해자였던 친구를 보고도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시위 현장에 나가게 되는 미용사 지현, 영화 홍보기획사에 다니는 워킹맘이자 의식불명에 빠진 아들 서균을 둔 은정, 그런 서균과 간은 어린이집에 다니는 딸 율아의 엄마 진경, 진경의 절친한 친구이자 출판기획자인 세연 등 자라나 온 환경도, 지금 처한 입장이나 처지도 각자 다른 우리 시대의 여성들이 고해성사를 하듯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러나 '다름'은 때로 비난이나 경멸의 빌미가 되고, 다르다는 이유로 미움을 키워가게 마련. 여고 동창생인 진경과 세연도 다르지 않았다.

 

"진경은 여전히 세연을 좋아했고 존경할 만한 친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지만 세연아, 너의 물기들은 어디로 갔어? 바람이 조금 빠진 자전거 타이어처럼 눌러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피식피식 웃을 수밖에 없던 너의 여유는, 농담들은, 꿈꾸는 듯한 문장들은 어디로 간 거야? 그건 너와 내가 공유하던 빛나던 보물이었는데. 왜 이렇게 지상의 삶에 밀착되어 자갈과 흙과 모래들만 바라보는 사람이 된 거야? 그 돌들끼리 부딪칠 때면 이를 가는 것처럼 진절머리가 나는 소리가 나던데, 어떻게 그것들을 쉬지도 않고 다 듣고 있는 거야? 진경은 그렇게 묻고 싶었다. 세연은 결코 들을 일도 대답할 일도 없겠지만." (p.62)

 

결혼하여 딸을 두고 있는 진경과 독신으로 오직 성공을 위해 달려왔던 세연이 각자의 입장을 도외시한 채 전적으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더구나 성장기에 겪었던 각자의 가정환경이나 자신에게 주어진 신체적 특징으로 인해 형성된 가치관이나 세계관도 무시할 수는 없는 일. 이처럼 우리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의 숲에서 제 삶의 영역을 확보하고 나를 이해하는 누군가와 연대하며 또 누군가를 향해 애정의 손길을 뻗어보지만 그 모든 게 키 큰 나무가 자신의 잎사귀에 고인 빗물을 흘려주는 것처럼 자연스러울 리는 없다. 고등학교 시절 자신의 얼굴에 난 결점을 가리기 위해 기를 쓰고 화장을 하던 세연이 화장을 적극적으로 권하는 대학에서의 달라진 풍경을 보며 환멸을 느끼고 화장을 그만두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자연에서의 '다름'이 '조화'와 '상생'을 통해 멋진 풍경을 연출하는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의 '다름'이 공격의 빌미가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멋진 '조화'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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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하면서 쓰고, 쓰면서 여행하는 벅찬 즐거움 하루키의 여행법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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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그저 추적추적 내릴 뿐이다. 그쳤다가도 잊을 만하면 심심함을 달래려는 듯 금세 다시 이어지곤 했다. 기상청의 예보와는 달리 장맛비 치고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그런 비가 종일 이어지다 보니 이것은 마치 한 방에 사내아이 두 명을 가둬 둔 풍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얼핏 스쳐가기도 했다. 활동력이 왕성한 사내아이 둘을 한 방에 가둬 둔 채 놀잇감이라곤 책 몇 권이 전부인 상황을 상상해 보라. 넘치는 에너지를 소진하기 위해 밖에 나가 놀 수도 없는 자신들의 불쌍한 처지를 애써 외면하려는 듯 각자의 손에 쥐어진 한 권의 책에 관심을 기울여 보지만 그것은 단지 시간을 보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을 감싸는 어색한 공기를 지우려는 듯 책에서 눈을 뗀 순간 허공에서 상대방의 시선과 마주쳤을 때 자신의 머쓱한 심정을 숨기기 위한 어색한 웃음이 한동안 길게 이어지곤 한다. 방 안에 흐르는 어색하고 데면데면한 분위기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낯설고 지루하다. 오늘 내리는 어색한 빗줄기처럼.

 

"10월이 되면 햄프턴 거리에는 오락이라고 할 만한 놀잇거리가 전혀 없다. 그렇게 되면 책을 읽거나 작업하는 것밖에 할 일이 없다. 그리고 그나마도 싫증 나면 산책을 할 뿐이다. 다행히도 이곳은 산책하기에는 정말 이상적인 장소이다." (P.22)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기 <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는 오늘과 같은 날씨에 읽기 적합한 책인지도 모른다. 한 방에 갇힌 두 명의 사내아이가 좀이 쑤셔 견딜 수 없을 때에도 이 책은 어쩌면 책에는 도통 관심도 없었던 그들의 시선을 붙잡고 서로 먼저 읽겠다 가벼운 실랑이를 벌이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루키의 유명한 여행기 <먼 북소리>만큼이나 깊이 있는 책은 아니지만 말이다. 책에는 미국 이스트햄프턴을 비롯하여 하루키가 여행했던 다양한 지역이 등장하지만 그중 일본 야마구치 현에 있는 무인도 까마귀 섬을 다녀온 기록은 오늘처럼 맨송맨송한 날씨에 특별한 자극이 될 수도 있겠다.

 

"텐트 속은 좁은 데다가 찌는 듯이 덥기까지 했다. 그런 텐트 안에 성인 남자 두 사람이 들어앉아 있으니 재미가 있을 리 없다. 바깥에 나가면 벌레가 있다. 벌레들은 텐트의 지붕 위에도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머리 위에서 버석버석하는 기분 나쁜 소리를 계속 내고 있다. 밤이 되면 밤의 작은 생물들이 땅을 지배한다. 그들의 세계에 제멋대로 쳐들어온 침입자들인 것이다. 그런 주제이고 보니 불평을 늘어놓을 처지도 못 된다. 작다지만 무인도에는 무인도대로의 자립적인 생태계가 엄연히 존재한다." (p.40)

 

무라카미 하루키의 오래된 팬 중 한 사람인 나로서는 어느 유명 아나운서의 내레이션과도 같은 작가의 건조하고 딱딱한 문체가 다소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소설에서 보여주는 적확하고 풍부한 비유와 묘사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책머리에서 작가는 여행기의 '가장 중요한 것은, 이처럼 변경이 소멸한 시대라 하더라도 자기 자신 속에는 아직까지도 변경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장소가 있다고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추구하고 확인하는 것이 바로 여행인 것이다.'라고 썼다. 비록 변경이나 오지가 사라진 시대라고 할지라도 마음속에서 변경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 것, 작가의 그러한 믿음이야말로 여행기를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변경을 복원하고 그 미지의 세계를 향해 여행을 꿈꾸도록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지도에는 아직 자기가 가본 적 없는 지역이 펼쳐져 있다. 조용히, 말없이, 그러나 도전적으로. 들어본 적도 없는 지명이 허다하다. 건너본 적이 없는 커다란 강이 흐르고, 본 적이 없는 높은 산맥이 줄을 잇고 잇다. 호수나 하구는 하나같이 매력적으로 보인다. 변변치 않은 사막조차도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을 보낸다. 지도를 펴놓고 자기가 아직 가본 적이 없는 곳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마녀의 노래를 듣고 있을 때처럼 마음이 자꾸만 끌려 들어간다." (p.239)

 

비는 지금도 여전히 소리도 없이 내린다. 사람들의 관심 따위는 필요조차 없다는 듯 말이다.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라는 어느 작가의 책 제목처럼 조용한 빗줄기 위로 어둠이 내리고 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려는 듯 대지를 적시는 가는 빗줄기를 타고 사뿐히 내려오는 희뿌연 어둠. 도시의 건물과 건물 사이를 길게 가로지르는 어둠의 빗줄기가 침묵처럼 길게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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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머물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소담출판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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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작가의 잡동사니와 같은 글들을 한 권의 책으로 읽을 때가 있다. 간단한 메모도 있고, 날짜도 없는 일기 몇 편, 그리고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 좋아하는 작품에 대한 리뷰나 간단한 소회,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나 지인들과 얽힌 추억 등 여러 글들이 순서도 없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책을 펴낸 작가도, 책을 읽는 독자도 머릿속은 온통 갈피가 잡히지 않고 되레 어수선해지는 그런 책 말이다. 남들이 생각할 때는 '그런 책을 도대체 뭐하러 읽누?' 하면서 끌끌 혀를 차거나 샐쭉 눈을 흘기면서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와 같은 책이 주는 독특한 매력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어서 작가에 대해 느끼는 자유분방함이나 하나의 문장 혹은 한 단어를 통해 은연중에 깨닫게 되는 작가의 성향 등은 우리가 흔히 읽게 되는 가지런한 책에서는 절대로 발견할 수 없는 보석과 같은 점이 아닐 수 없다.

 

"글자에는 질량이 있어, 글자를 쓰면 내게 그 질량만큼의 조그만 구멍이 뚫린다. 가령 내가 안녕이라고 쓰면, 안녕이라는 두 글자만큼의 구멍이 내게 뚫려서, 그때껏 닫혀 있던 나의 안쪽이 바깥과 이어진다. 가령 이 계절이면 나는, 겨울이 되었네요 하고 편지에 쓸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그때껏 나의 안쪽에만 존재하던 나의 겨울이 바깥의 겨울과 이어진다. 쓴다는 것은, 자신을 조금 밖으로 흘리는 것이다. 글자가 뚫은 조그만 구멍으로." (p.52)

 

에쿠니 가오리 하면 <냉정과 열정 사이>나 <도쿄 타워>를 떠올릴 만큼 그녀의 이미지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 고정되어 있거나 강렬했던 한두 작품으로 일관되게 평가를 할지도 모른다. 그게 벌써 20여 년 전의 일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변하게 마련이고 관심을 갖고 꾸준히 지켜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 일정 부분 오해나 왜곡된 견해를 내놓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글을 쓰는 작가라는 사람들은 시대의 변화에 얼마나 민감한가.

 

"내가 이야기 속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현실의 시간은 쉼 없이 흐르고 있고, 거리도 사람도 시스템도 변하고, 그렇게 상황이 완전히 달라져 당혹스럽습니다. 최근에는 미지의 장소에 여행을 떠난 것처럼 즐기자고 마음먹고 있는데, 사실은 이쪽이 현실이고, 이야기 속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 믿을 수 없는 기분입니다. 불안해지고, 두려워집니다. 그래서 한시 빨리 이야기 속으로 돌아가고 싶어집니다." (p.127)

 

생에 처음 손에 잡은 그림책을 통해 세계를 마주하는 법을 배웠다는 작가는 젊은 시절 쓰는 것 외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게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으며, 어느 날 자신의 소설이 활자로 찍혀 처음 세상에 소개되었고, 이제는 매일 아침 일어나 목욕을 하고 끼니를 해결하듯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게 일상이 되었다고 말한다. 어쩌면 작가라는 직업은 누군가에 의해 억지로 길러지거나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운명이라는 토대 위에 세월을 자양분 삼아 자연스레 성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에쿠니 가오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1996년부터 2017년까지의 각기 다른 시기에, 저마다 다른 주제로 다른 장소에서 쓰인 듯한 잡동사니의 글들을 한 권의 책으로 읽는다는 건 얼핏 시간낭비인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세월의 추이에 따라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는 것처럼 개인의 변화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시대의 변화를 역사서로 읽는 것처럼 좋아하는 작가의 변화를 한 권의 에세이로 읽는다는 건 팬의 한 사람으로서 꽤나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나는 특히 엷은 분홍색 자귀나무 꽃을 좋아했다. 그 꽃은 정말 하늘하늘, 파란 저녁 어두운 공기에 녹아버릴 듯 가련하게 핀다. 고사리를 닮은 이파리는 저녁이 되면 닫히는데, 꽃은 저녁부터 밤에 걸쳐 활짝 핀다. 합환수라는 다른 이름의 울림이 잠을 연상케 하고, 그리고 잠든 것처럼 소리 없이, 그래서 아무도 방해해서는 안 될 나무라고 생각했다. 여름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죽는다는 말은 정말일까. 그런 대사가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아마도)에 등장하는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여름에 죽을지도 모르겠다" (p.196)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건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취미이자 유희일 때는 그렇다. 그러나 그것이 의무이자 생계수단 혹은 호구지책의 일환으로 변질되었을 때, 글을 쓴다는 건 하나의 노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때가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러므로 독자들로부터 꾸준한 인기를 유지한다는 건 결국 작가 스스로가 글을 쓰는 일체의 행위 자체를 노동이 아닌 놀이로 인식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에게 이와 같은 잡동사니의 글은 '쉼'이나 '휴식'의 차원에서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작가의 '쉼'을 엿보는 한 장의 스냅사진처럼 에쿠니 가오리의 산문집 <한동안 머물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술술 읽혔던 책이다. 적어도 내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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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 - 내 인생의 셀프 심리학
캐럴 피어슨 지음, 류시화 옮김 / 연금술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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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기의 나이도 아닌데 하릴없이 하루하루 지구에 무게만 더해간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삶은 더욱 단출해지고, 욕심으로부터 점점 멀어져야 하건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작년에 비해 몸무게가 족히 3, 4 킬로그램은 늘어난 듯한, 두둑한 살집 때문에 행동마저 둔해진 듯한 느낌을 받을 때마다 스멀스멀 부끄러움이 솟아오르곤 한다. 욕심은 끝이 없어서 없던 식탐도 만들어내는가 보다.

 

계절이 바뀌고 말로만 듣던 불볕더위를 직접 몸으로 겪게 되면서 한편으로는 내심 '잘 됐다. 땀을 흘리면 살도 좀 빠지지 않을까?' 은근한 기대감도 높아지는 게 사실이지만 어디 그게 생각대로 되는가 말이지. 아침마다 산을 오르고 한낮 더위에 노출되는 시간도 일부러 길게 가져보지만 작년보다 딱 1년만큼 더 나이가 들었다는 당연한 사실만 확인할 뿐 세월을 거슬러 체력이 더 좋아졌다거나 비슷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느낌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게 현실. 우리는 세월을 기억으로 대체하면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자신의 생명력을 세월과 맞바꾸고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일들은 우리 자신이 삶에 대해 어떤 상상을 하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우리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고, 많은 부분 그 이야기대로 살아간다. 삶이 어떤 모습인가는 의식적으로, 혹은 더 많게는 무의식적으로 우리 자신이 선택한 대본에 달려 있다." (p.16)

 

융 학파의 심리학자 캐럴 피어슨이 쓴 <나는 나(The Hero Within)>를 읽게 된 것도 세월에 따른 나 자신의 변화를 감지한 데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에게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운명에 고립된 듯, 변화에 대한 열망은 마음속에 늘 있지만 정해진 운명에 갇혀버린 듯 살아가게 되는 근본 원인이 과연 무엇인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은 각자 자신이 의미를 부여한 세계에서 살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내면을 어떤 원형(archetype)이 지배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칼 융의 원형 심리학을 바탕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심리 원형을 고아, 방랑자, 전사, 이타주의자, 순수주의자, 마법사 등 여섯 가지로 분류하고, 이 여섯 가지 원형이 한 사람의 내면에서 평생 동안 어떻게 형성되고 어떤 모습으로 성장하고 지배하는가를 설명함으로써 여섯 가지 원형이 개인의 삶과 자아 형성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독자들에게 각인시킨다.

 

"삶에서 자주 무력감을 느끼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다면, 이 고아 단계를 통과하도록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 누구도 홀로 고통을 겪어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는 상처 입은 사람들이며 누구나 불완전한 존재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 안의 고아가 주는 선물이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단순히 위안과 지지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저마다 커다란 퍼즐의 한 조각이며 누구도 모든 해답을 갖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p.53)

 

고아 원형은 사람을 믿지 않고, 자신을 희생자로 보며, 삶에 대해 별로 기대하지 않는 심리적 추방자이고, 방랑자 원형은 삶이 어딘가에 갇혀있는 것처럼 느끼고 이상적인 곳을 찾아 떠나는 유형이며, 전사 원형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싸우는 유형으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자신을 몰아붙이는가 하면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과 개인적 책임감으로 넘쳐난다. 이타주의자 원형은 자신보다 숭고한 무엇인가를 위해 혹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는 자세를 지니게 되며, 순수주의자 원형은 삶을 낙관하고 보다 큰 선에 대한 믿음을 가진 유형으로 자신이 희생자라는 피해 의식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마법사 원형은 자신의 미래를 마법사처럼 변화시키려는 강한 의지를 지닌 사람으로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놓고 삶의 주인을 자신으로 설정하는 유형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삶에서 방향을 잃을 때마다 각자의 내면에 있는 고아는 회복력을, 방랑자는 독립심을, 전사는 용기를, 이타주의자는 연민을, 순수주의자는 삶에 대한 믿음을, 마법사는 변화를 이끌어내도록 돕는다.

 

"내면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외부의 역할 속에 얼마나 표현하는가에 따라 삶은 수월해진다. 자신 안의 에너지가 외부의 행위를 향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을 억압할 때, 지금 실제로 하고 있는 일에는 에너지가 담기지 않는다. 그 결과 늘 지치거나 감정적이 된다. 자신 안의 원형에 잠재된 에너지가 외부의 행위와 잘 어우러질 때, 일이 쉽게 진행되고 삶이 즐거워진다." (p.281)

 

'나 자신은 세상을 향해 던져진 하나의 물음이며, 나는 그 물음에 나의 해답을 제시해야만 한다.'고 했던 칼 융의 말처럼  우리들 각자는 자신만의 해답을 제시하기 위해 삶을 소진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이 자신의 의지가 아닌 '세상이 주는 답에 따라 살아가는' 게 현실. 의도하지 않았던 삶의 변화에 스트레스를 받고 원치 않은 상황에서 좌절하며 때로는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현실 앞에서 모든 걸 포기하기도 한다. 제대로 된 원인도 찾지 못한 채 말이다. 류시화 시인의 번역으로 출간된 이 책은 삶에서 발생하는 하나의 문제가 오직 한 개인에게 국한되지만은 않는다는 걸 말해준다.

 

"당신은 나에게 배우고 나는 당신에게 배운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성장하는 방식이고,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다. 당신 개인의 삶은 인류의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하나의 물줄기이다. 당신은 자신의 삶이 얼마나 많은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정확히 알 수 없겠지만, 자신의 삶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는 것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의 삶이 그러하듯이." (p.310)

 

간밤에 지나간 비로 바깥공기는 답답하고 끈적끈적하다. 쉴 새 없이 던져지는 삶의 문제들을 무작정 바라만 보거나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해결하려는 생각은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애초부터 세상은 그렇게 설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은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배가 고프다. 체중이 늘면 늘수록 육체가 던져주는 답에 따라 살게 되는 것처럼 내가 세상을 향한 나만의 해답을 준비하지 못한다면 삶은 여전히 불만족스러울 것이다. 무덥고 습한 오늘의 날씨가 마냥 불만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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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밖의 모든 말들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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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릿한 밤꽃 냄새가 온 산에 퍼지기 시작하면 여름이다. 며칠 전부터 밤꽃 냄새가 예사롭지 않다 싶더니만 키가 큰 밤나무 우듬지마다 소복소복 눈이 쌓인 듯 밤꽃이 만개했다. 산을 내려와 올해 들어 처음으로 선풍기를 켠 아침, 낮게 드리운 구름이 우울을 가장한 채 몇 조각의 슬픈 감정을 던져준다. 휴일이라는 이유로 한껏 느슨해진 마음의 밀도. 그 성긴 틈새를 따라 빗물처럼 슬픈 감정이 흐른다. '뭐라도 해야지' 마음을 다잡아보지만 이럴 때 몸과 마음은 갈라선 연인처럼 서로에게 한없이 무감하다. 나는 결국 커피를 끓인다. 카페인의 힘을 빌려서라도 오늘 내로 꼭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말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해지고 누군가의 얼굴은 흐릿하게 지워짐으로써 더 정확히 지시할 수 있다. 영화 <윤희에게>(임대형, 2019)에서 달의 형태가 여러 번 바뀐 뒤에야 보름달이 되어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영화에서 그 만월까지의 시간은 아픈 윤희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되돌아보고 진정한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한 과정이 된다." (p.188 '사랑 밖의 모든 말들' 중에서)

 

후다다닥 잰걸음으로만 달리던 시간들이 불현듯 터벅터벅 느린 발걸음으로 속도를 늦춘 듯한 휴일이면 나른한 피로가 몸의 이곳저곳을 찌른다. 마치 검진을 하듯 이곳저곳을 찔러본다. 무턱대고. 통제할 수 없는 시간들이 들쭉날쭉한 감정의 골을 따라, 무심한 시간들이 시시각각 변하는 내 감정을 무시한 채 폭군처럼 빠르게 흘러갈 때, 나는 차마 숨죽인 채 뒤처지는 나를 그리고 어쩌면 너를 못 본 척 지나칠 수 없었기에 틈만 나면 책을 펼쳤고, 그렇게 한 줄 기억도 되지 않는 독서를 이어갔고, 읽었던 책들 중에 그나마 약간의 기억이라도 남아 기어코 나를 붙잡는 책이 있다면 리뷰를 써야겠다고, 오늘 내로 꼭 써보고야 말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영화 <사랑의 블랙홀>(해럴드 래미스, 1993)에는 매일 똑같은 하루를 보내야 하는 비운의 남자 필이 등장한다. 반복의 운명은 필에게 금고털이, 뭇 여성들과의 데이트 같은 일탈의 자유를 선사하지만 오늘 무슨 일을 겪었든 내일이 되면 다시 리셋되고 마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필은 절망에 빠져 자살을 기도한다. 그 숨막히는 반복의 하루, 똑같은 뉴스, 똑같은 표정과 행동의 사람들, 똑같은 날씨, 똑같은 대화 속에서 필은 죽음으로라도 이 상황에 변형을 가하고 싶은 절박함을 느끼는 것이다. 달라지지 않는 삶이란 얼마나 사람을 무기력하고 우울하게 만드는가." (p.209 '또다시라는 미래' 중에서)

 

<사랑 밖의 모든 말들>은 김금희 작가가 데뷔 11년 만에 펴낸 그녀의 첫 번째 산문집이라고 했다. 데뷔 직후 발표한 글부터 '주간 문학동네'에 연재한 글들 중 42편을 뽑아 묶은 이 책에는 대학시절 이야기나 친구와의 일화, 엄마를 잃은 엄마에 대한 관찰과 할머니에 대한 회상, 출판 노동자 시절 이야기, 혼밥에 대한 생각 등 작가의 성향이나 진솔한 속내를 엿볼 수 있는 글들이 빼곡하다.

 

"아픈 기억을 버리거나 덮지 않고 꼭 쥔 채 어른이 되고 마흔이 된 날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아프다고 손에서 놓았다면 나는 결국 지금보다 스스로를 더 미워하는 사람이 되었을 테니까. 그리고 삶의 그늘과 그 밖을 구분할 힘도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대개 현명하지 않은 방법으로 상처를 앓는 사람들이지만 그래서 안전해지기도 한다고 믿는다." (p.5 '서문' 중에서)

 

'세상은 형편없이 나빠지는데 좋은 사람들, 자꾸 보고 싶은 얼굴들이 많아지는 것은 기쁘면서도 슬퍼지는 일'이라는 작가의 말이 가슴에 박힌다. 코로나19로 인해 서로의 안부만 겨우 확인한 채 무심히 또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들. 시간은 우리의 사정을 조금도 봐주지 않은 채 사정없이 흘러만 가는데, 우리는 또 그에 따라 나이가 들고, 누군가는 늙어가고, 또 누군가는 죽어가고...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으나 중력을 통해서만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암흑물질처럼 내 삶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많은 시간들. 허투루 보냈던 시간 밖의 모든 시간들에 삼가 조의를 표하게 되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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