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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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묘년 한 해가 신기루처럼 흘렀다. 시간 속으로의 '그 용감한 낙하를 누군가 안전하게 받아줄 거라고, 진심으로 믿'는 건 아니지만 우리는 또 우리 앞에 다가올 갑진년 한해를 향해 용감하게 몸을 던질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혹은 무모하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한 인터넷 서점에서 구매하여 읽기 시작했던 게 2023년 9월 말경이었다. 하루키의 열렬한 팬을 자처하는 나로서는 그의 신간 소설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곤 하는 처지이니 구매 후 굳이 뜸을 들일 필요도 없었던 게 사실, 760쪽이 넘는 꽤나 긴 이야기지만 채 며칠이 지나기도 전에 후루룩 읽어버렸다. 그렇다. 나는 하루키의 소설만큼은 야금야금 아껴가며 읽어야 한다는 대원칙을 망각한 채 너무도 쉽게 읽어버린 것이다. 아쉬운 마음 가눌 길이 없었던 나는 맘에 들었던 몇몇 구절의 문장을 필사하며 작가의 생각을 어림해보려 애쓰곤 했다.


"내가 가까스로 알 수 있는 건 지금 나 자신의 위치가 아마도 '저쪽'과 이쪽' 세계의 경계선 근처이리라는 것 정도였다. 이 반지하 방과 마찬가지다. 지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하도 아니다. 흘러드는 빛은 엷고 흐릿하다. 나는 그렇듯 어슴푸레한 세계에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인지 확실히 판단할 수 없는 미묘한 장소에. 그리고 나는 어떻게든 확인하려고 한다. 내가 정말 어느 쪽에 있는지. 그리고 내가 나 자신이라는 인간의 어느 쪽에 있는지를."  (p.495)


내가 하루키의 팬이 되고자 했던 이유는 분명하다.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구분하여 명확히 선을 그을 수는 없지만 그의 소설은 대개 현실과 비현실,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드는 경계선, 칼날과 같은 좁디좁은 경계에 터를 잡은 채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리얼리즘 소설을 표방했던 <노르웨이의 숲>을 제외하고 말이다. 작가가 설정한 그의 소설 속 '하루키 영역'은 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항상 '소설의 효용' 혹은 '소설의 기능'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현실에 지친 우리가 다시 또 소설 속 현실 속으로 들어가 인물들 간의 갈등을 지켜보면서 무거운 현실을 되새김질한다는 건 너무 가혹한 일 아닌가. 오히려 소설을 읽을 때만이라도 이건 소설이니까, 하면서 잠시 동안 현실을 잊고 쉴 수 있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머릿속에서 현실과 비현실이 격렬히 싸우며 뒤엉켰다. 나는 바야흐로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의 경계에 와 있다. 이곳은 의식과 비의식의 얇은 접면이고, 나는 어느 세계에 속해야 할지 지금 바로 선택해야 한다."  (p.209)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주인공인 '나'의 일대기에 가깝다. 그렇다면 리얼리즘 소설인가 하고 의심을 할 수도 있겠지만, 앞에서도 언급한 바 하루키 소설의 특성상 그럴 리가 없다. 하루키의 팬이라면 그 제목만 들어도 흥분이 되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배경이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도 중첩된다.  열일곱 살의 나'는 고교 에세이 대회 수상식에서 열여섯 살의 여학생을 만나 열렬한 사랑에 빠진다. 자신이 꾼 꿈을 상세히 적어 놓는 버릇이 있는 여학생은 '나'에게도 자신의 꿈 이야기를 긴 편지를 통해 써 보내곤 했다. 그러나 그 여학생은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사라졌다. 진실로 사랑했던 여인을 잃은 '나'는 깊은 상실감에 빠져 지낸다. 어찌어찌 대학을 겨우 졸업한 '나'는 출판 유통회사에서 근무한다. 여전히 '나'는 독신이고 청소년기에 만났던 그 여학생을 그리워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우연히 여학생이 자신의 꿈속에서 구축해 놓았던 도시에 떨어진다. 도시는 높고 단단한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동물이라고는 단각수와 밤꾀꼬리가 유일하며, 도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그림자를 떼어내야 한다는 규칙이 있는, 디시를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강이 있고, 강 옆으로 모래톱이 존재하며, 도시에 하나뿐인 출입문에는 문지기가 지키고 해가 지면 뿔피리를 불어 단각수들을 도시 밖으로 내보내는, 그곳에서 내가 사랑하던 소녀는 도서관에서 근무한다. '나'는 그곳 도서관에서 '꿈 읽는 이'로 근무한다. 소녀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잊혀진 꿈을 읽는 '나'를 보조하기 위해 난로에 불을 지피고 차를 끓여준다. 도시에는 바늘이 없는 시계탑이 있다. 내가 그렇게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지내는 동안 나와 분리된 그림자는 점차 생명력을 잃고 죽어간다. 도시의 지도를 그리기 위해 분주하던 '나'는 도시로부터 나의 그림자를 탈출시킨다.


현실의 '나'는 이제 45세의 중년 직장인이다. 여전히 독신이지만 평범한 회사 생활을 이어오던 나는 갑자기 다니던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한다. 회사를 그만둔 나는 꿈속에서 보았던 어느 산간 지방의 작은 도서관에 관장으로 취직한다. 그곳에서 '나'는 전임 관장이자 도서관의 실질적인 소유주였던 고야스 씨를 만난다. 그러나 도서관의 직원인 소에다 씨로부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고야스 씨는 이미 죽은 인물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고야스 씨의 유령을 만난 셈이었다. 교통사고로 자식을 잃고 사랑하는 아내마저 잃은 고야스 씨는 베레모와 스커트로 대변되는 특이한 복장으로 생활하면서부터 생동감을 찾았고 자신이 운영하던 양조장을 마을 도서관으로 바꿔 도서관장으로 근무하다 사망하였다. '나'는 죽은 고야스 씨로부터 도서관의 운영에 관한 많은 것을 배웠다. 도서관을 자주 출입하는 이용자 중에는 옐로 서브마린 점퍼를 입은 M**이라는 소년이 있었다. 고야스 씨의 묘지 앞에서 독백처럼 말했던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소년은 '나'도 그리지 못했던 도시의 지도를 완벽에 가깝게 그려낸다. 부모는 물론 다른 누구와도 소통을 하지 않던 소년이 '나'에게 마음을 연 순간이었다. 소년은 오직 도서관에서 책만 읽었다. 어느 날 밤 소년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현실에서의 '나'는 소년의 가족들로부터 추궁을 당한다. 그리고 '나'는 높고 단단한 벽이 있는 그 도시에서 소년과 재회하게 되는데...


도시는 '마음의 역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높고 단단한 벽을 쳐 놓았다고 밝힌다. 현실의 시공간 속에서 사는 우리는 끝없이 변화하는 세상에 던져질 수밖에 없고, 좋든 싫든 우리는 마음의 역병을 견디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도, 공간의 변화도 없는 도시에서 '나'는 '마음의 역병'으로부터 '나'를 단단히 방어한 채 다른 이의 영혼에서 분리된 '잊혀진 꿈'을 읽으며 묵묵히 살아갈 뿐이다.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이동을 제어할 수만 있다면 인간은 자신의 행복한 삶을 꿈꿀 수 있을까?


"나는 그 슬픔을 무척 잘 기억했다. 말로 설명할 길 없는, 또한 시간과 더불어 사라지지도 않는 종류의 깊은 슬픔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를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가만히 남기고 가는 슬픔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대체 어떻게 다뤄야 할까?"  (p.280)


한해의 마지막 날. 매년 이맘때면 나는 감기처럼 연말 우울증을 앓는다. 연말연시마다 일시적으로 우울감을 느끼는 심리 상태인 '홀리데이 블루스(Holiday Blues)'일지도 모른다. 세월이 흐르고, 주변의 환경도 빠르게 변하는데 나만 홀로 뒤처진 채 헐떡거리며 알 수도 없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막연히 뒤쫓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나는 높고 단단한 벽도 미처 세우지 못한 채 '마음의 역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겨울비가 오락가락하던 하늘은 해도 없이 온종일 어둡기만 하다. 그렇게 나는 연말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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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멀미를 하듯 부정적인 생각이 몸속 깊은 곳으로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를 때가 있습니다. 어떤 특별한 환경(예컨대 비가 내리거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날과 같은)이나 특별한 경험(이를테면 직장 동료나 상사로부터 안 좋은 소리를 들었거나 집안에 예기치 못한 불상사가 있거나 하는)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조차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어떤 순간에 불현듯, 낡은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다가 우연히 찌릿 감전이 되는 것처럼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문득 부정적인 생각이 둥실 떠오르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정신적 면역 상태가 온전하거나 아주 좋았던 시간에는 내 몸 어딘가를 떠돌면서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숨죽인 채 빙빙 기회만 엿보다가 내가 긴장의 끈을 놓는 어떤 순간에 '옳다구나!' 하면서 발현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상대방의 허점을 파고드는 어느 격투기 선수의 대응처럼 말입니다.


크리스마스이브인 오늘, 오전에 눈이 조금 내렸습니다. 뿌옇게 흐린 하늘과 분분히 날리는 눈발을 보며 나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대감으로 잠깐 설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속한 도시는 이내 희뿌옇게 변한 포장도로와 질척하게 녹은 눈석임물로 인해 더럽혀졌고, 오가는 차량들도 구정물을 뒤집어쓴 듯 어두워졌습니다. 도시는 이렇듯 사람들의 감성마저 쉽게 무너뜨립니다. 케케묵은 감성은 자본주의 발전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질책하는 듯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선택의 자유가 현대의 삶이 이룩한 위대한 진보의 표식 가운데 하나라고 지적할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이런 견해에는 어느 정도 진실이 담겨 있다. 비참한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음식을 먹을지에 대해서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직업 선택의 자유란 것도 극심한 경제 불황으로 일자리가 없을 때는 의미가 없다. 그러나 현대 세계의 특징은 우리들 대다수에게 그 이전보다 선택 - 어떤 사람이 될지, 어떻게 행동할지, 누구 줄에 설지 - 의 폭이 더 넓어졌다는 바로 그 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이런 종류의 실존적 선택에 직면했을 때, 저것 아닌 '이것'을 선택하게끔 해주는 참다운 동기가 없다는 점에 있다. 웨슬리 오트리가 위험에 처한 사람과 마주쳤을 때 느꼈던 확실성을 우리 자신의 삶과 행동에서 발견하기란 사실 무척 어려운 일이다."  (p.20)


휴버트 드레이퍼스와 숀 켈리가 쓴 <모든 것은 빛난다>를 읽고 있습니다. 성탄 연휴의 들뜬 분위기에 읽기에는 다소 무거운 주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 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라는 부제가 나의 시선을 사로잡고 말았습니다. 나는 이처럼 단순하고 무기력한 인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 너절한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께도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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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3-12-24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혀 너절하지 않습니다 ^^
꼼쥐님, 메리 크리스마스!

꼼쥐 2023-12-31 17:1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벌써 한 해의 마지막 날이에요. 내일이면 1월 1일, 그렇게 또 한 해가 시작되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길~~

수이 2023-12-24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리 크리스마스! 꼼쥐님 :)

꼼쥐 2023-12-31 17:13   좋아요 0 | URL
수이 님, 해피 뉴 이어!!

잉크냄새 2023-12-25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리 크리스마스!

꼼쥐 2023-12-31 17:13   좋아요 0 | URL
잉크냄새 님도 해피 뉴 이어!!

페크pek0501 2023-12-25 17: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꼼쥐 님도 메리 크리스마스!!!

꼼쥐 2023-12-31 17:14   좋아요 2 | URL
페크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페크 님의 좋은 글 자주 읽도록 하겠습니다.

꼬마요정 2023-12-25 19: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크리스마스 당일이지만, 시간을 거슬러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꼼쥐 2023-12-31 17:15   좋아요 2 | URL
ㅎㅎ 꼬마요정 님의 넘치는 센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길~~

루피닷 2024-01-01 0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꼼쥐 2024-01-02 16:26   좋아요 1 | URL
루피닷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길~~
 
복길잡화점
이민혁 지음 / 뜰book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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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깊으면 그리움의 꼬리가 길다. 석양의 햇살을 받은 시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지 않는 것처럼 그리움의 시간이 두려워서 눈앞의 사랑을 밀쳐낼 수 없는 게 인간의 운명이다. 우리는 그저 사랑에 맹목적일 수밖에 없는 사랑의 청맹과니일 뿐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닥치는 인생의 모든 비극은 바로 그 지점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사랑이 없으면 인생 자체도 무의미하며 우리에게 닥칠 그 어떤 비극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사랑의 품은 넓고 크니까.


이민혁의 소설 <복길 잡화점> 역시 사랑 때문에 울고 웃는 한 집안의 2대에 걸친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1970년대에 시작된 경석과 연화의 사랑과 이제 막 꽃을 피우는 그들의 아들 복길과 민정의 이야기. 시대와 상황은 다르지만 알게 모르게 그들의 사랑은 닮아 있다. 그리고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닌 그들을 둘러싼 주변 이웃들의 내면에 흐르는 보이지 않는 사랑도 소설을 읽는 독자들의 마음을 한결 따뜻하게 한다.


"세상 모든 것을 녹이려는 듯 벌벌 끓던 태양도 주황빛 숯처럼 식어버린 저녁. 막차를 몰고 온 버스 기사는 "안 탈 거요?"를 외치다 먼지를 일으키며 떠나갔고 경석과 연화는 다시 뜨겁게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할 때까지 정류장과 아까시나무 사이를 수없이 걷고 또 걸었다."  (p.2)


좌판에서 장사를 하던 경석은 고등학생인 연화를 사랑한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입대를 하게 된 경석은 연화에게 사랑 고백을 하고 제대할 때까지 기다려 줄 것을 부탁한다. 월남전에 파병되었던 경석이 무사히 제대를 한 후 결혼과 함께 열게 된 복길 잡화점. 부지런하고 올곧은 성격의 경석과 마음씨 착한 연화는 작게 시작한 가게 복길 잡화점에 이어 복길 마트를 개업함으로써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어렵게 낳은 복길이 결혼을 하여 딸 소리를 얻었지만 병으로 아내를 잃고 만다.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은 소리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보살핌 속에서 밝게 성장한다. 게다가 어려운 시기에 경석 부부의 도움을 받았던 민정이 잡화점을 똑소리 나게 운영하는 한편 엄마처럼 혹은 언니처럼 소리를 돌본다. 철이 없는 복길은 자신이 벌였던 사업을 말아먹고 결국 경석으로부터 복길 마트를 넘겨받게 된다. 그러나 복길 마트 주변에 대형 마트가 입성함으로써 고객을 잃은 복길 마트는 사양길로 접어든다. 그런 와중에 청천벽력과 같은 연화의 치매 소식이 전해지고 어떻게든 연화의 병을 극복하려는 경석의 눈물겨운 노력이 진행되는데...


"연화는 저녁마다 '벅시'에서 풍겨오는 이국적인 버터 향을 맡으며 계산대에 앉아 군침을 삼켰었다. 지금껏 한 번도 저기 가서 식사를 해보잔 말을 하지 않았지만 경석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저곳을 얼마나 동경했는지⋯. 하지만 과거의 기억대로 움직이는 것이지만 좀처럼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은 경석이 우뚝 멈춰선다. "내가 꼭 한 번 당신 데리고 가고 싶었단 말야." 경석은 이미 새 원피스를 사주며 과거의 기억을 왜곡해버렸음에도 또다시 '벅시'에 데려가고 싶은 마음에 떼를 쓰고 있다."  (p.157)


연화가 세상을 뜨고 결국 혼자 남게 된 경석. 그의 곁에는 아들 복길이 사랑하는 민정과 손녀 소리가 있다. 복길이 연화의 치매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직원들과 함께 벌였던 눈물겨운 헌신은 철이 없었던 아들 복길을 움직였다. 복길은 자신의 부모가 걸어왔을 고난의 세월을 경석이 연화를 위해 재현했던 과거의 경험들을 통해 보고 배웠다. 복길의 행동은 그렇게 서서히 바뀌어 갔다. 곁에서 복길과 경석을 위해 노력하는 민정의 헌신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제 그들의 온기는 영원히 사라졌고 그 온기를 채워야 할 세대가 바로 자신이 됐음을 알게 된 복길은 두려움부터 앞선다. 그들이 나에게 주었던 만큼 나도 해낼 수 있을까. 이 집의 온기는 영원히 식지 않을 거란 믿음을 아이들에게 줄 수 있을까. 이 집의 지붕은 온갖 비바람을 막아줄 거란 인식을 가족들에게 남겨 줄 수 있을까. 복길은 이제 이 집의 새 주인이자 경석의 자리를 물려받은 가장이 되었다."  (p.224~p.225)


사랑이 깊으면 그리움의 꼬리는 더욱 길고 어둡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을 멈추지 않는다. 결국 우리가 마지막에 가져가야 할 것은 사랑했던 기억들뿐이기 때문이다. 날이 차다. 그러나 성탄절 연휴를 맞는 사람들의 가슴은 왠지 모르게 따뜻하다. 사랑은 그렇게 사람들의 온기 속으로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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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지듯 당신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을에 이어 겨울 이야기가 덧붙여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낭만도 뭣도 아닌, 어느 월간지의 별책부록처럼 누군가의 이야기가 우연처럼 끝없이 덧대어져 마침내 관계의 미로를 형성하게 됩니다.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관계의 미로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속한 시대를 함께 살아온 어느 악인의 이야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늘 그렇듯 시대를 이끌어가는 것은 그 시대의 악인이 담당해야 할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그 악인의 이야기에 수없이 많은 당신의(혹은 당신이라는 익명의) 이야기가 덧붙여집니다. 역사는 그런 것이지요.


맹위를 떨치는 동장군의 기세는 한낮에도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하의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은 저마다 플라스틱 썰매를 한 손에 거머쥐고 아파트 인근의 공원 잔디밭으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잔디 위에 소복이 쌓인 눈은 한낮이 되어서도 녹지 않았던 것입니다.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아이들은 해맑은 웃음과 함께 아래로 아래로 내달립니다. 썰매의 매력은 내가 적응할 수 있는 속도를 적당히 추월하는 데 있습니다. 내 예상을 앞지른 썰매의 속도는 약간의 긴장감에 공포와 스릴을 더하곤 합니다. 그럴 때 삶은 마냥 더디게 흐를 것만 같습니다.


"최근의 여론 조사는 미국인들이 이제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자산이 버텨주는 나이보다 오래 사는 일을 더 두려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다른 조사에서는, 나이 많은 미국인 대부분이 여전히 은퇴를 ‘휴식의 시간’으로 보고 있음에도, 자신이 전혀 일하지 않으면서 말년을 보내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겨우 17퍼센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p.109~p.110)


저널리스트 제시카 브루더의 저서 <노마드랜드>를 읽고 있습니다. 2008년 금융 위기의 여파로 타격을 입은 이들의 삶의 형태가 어떻게 무너지고 변화되었나를 차분하고 날카롭게, 그리고 인간미 넘치는 시선으로 조명하는 이 책은 각자도생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되짚어보게 합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고가의 명품백을 장난감처럼 수집하기도 하고, 탐욕에 눈이 먼 재벌들을 대동하여 소맥 파티와 떡볶이 먹방을 선보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어느 악인의 이야기에 수없이 많은 당신의(혹은 당신이라는 익명의) 이야기가 덧붙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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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밖의 모든 말들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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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이미 전조가 있었다. 목요일 오후부터 시작된 비가 주말을 앞둔 금요일 오후까지 이어지더니 주말을 맞는 사람들의 들뜬 기분에 찬물이라도 끼얹겠다는 것인 양 바람이 불고 풀풀 눈발이 치고 있었다. 스산한 날씨였다. 목요일부터 시작된 스산한 날씨에 대한 전조는 주말까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아파트 인근의 중학교 운동장에는 운동을 나온 어느 할머니의 무거운 발걸음이 십여 분째 이어지고 있다. 어두운 구름 사이로 잊혔던 햇살이 문득 고개를 내밀고 거세지는 바람결을 따라 불현듯 사라지곤 했다. 자맥질을 하듯 언뜻언뜻 겨울 햇살이 되살아나는 동안 나는 운동을 하는 할머니의 지친 발걸음을 주시하고 있었고, 발끝에 매달린 삶의 무게에 나의 생각이 잠깐 머물렀다 사라지곤 했다.


"나는 요즘 할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보다 더 자주 할머니에 대해 생각한다. 원래 할머니는 내게 북쪽과 남쪽의 거리만큼 아주 멀리 계셨던 분이므로 나는 그 부재에 대해 실감이 없고 그러니 마치 살아 계신 듯 느껴지기도 한다. 여전히 실감과는 거리가 있는 태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점은 이제 비로소 어떤 용기가 생겼다는 것이다. 할머니와 가까웠든 가깝지 못했든 할머니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찾아든 할머니의 부재, 그 공평한 부재 속에서 '나의 할머니'에 대해 느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모두 다 보고 싶다는 할머니의 말, 그 말을 곱씹는 데서 시작해, 조금씩 그러나 오래오래."  (P.21~P.22)


김금희 작가의 산문집 <사랑 밖의 모든 말들>을 읽었다. 데뷔 11년 만에 펴낸 작가의 첫 번째 산문집이라는 이 책은 데뷔 직후 발표한 글부터 2020년 3월 초 문을 연 '주간 문학동네'에 연재한 글들 중 42편을 뽑아 묶었다고 한다. 대학시절 이야기나 친구와의 일화, 엄마를 잃은 엄마에 대한 관찰과 할머니에 대한 회상, 특이한 택시를 탔던 기억, 출판 노동자 시절 이야기 등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이 작가의 올곧은 시선에서 재해석된다. 누구나 그렇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드러내는 일은 마치 스산한 겨울 날씨를 견디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어느 할머니의 발걸음처럼 무겁고 힘겨운 일일 터, 그와 같은 작은 발걸음들이 모여 지금의 김금희 작가를 있게 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아픈 기억을 버리거나 덮지 않고 꼭 쥔 채 어른이 되고 마흔이 된 날들을 ㅜ회하지 않는다. 아프다고 손에서 놓았다면 나는 결국 지금보다 스스로를 더 미워하는 사람이 되었을 테니까. 그리고 삶의 그늘과 그 밖을 구분할 힘도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대개 현명하지 않은 방법으로 상처를 앓는 사람들이지만 그래서 안전해지기도 한다고 믿는다. 삶에 대해 예민한 감각을 갖게 될 것이고, 느끼게 될 것이고, 마음먹게 될 것이며 결국 나가서 걸을 수 있을 것이다."  (P.5~P.6 '서문' 중에서)


1부 '언제나 귤이었다', 2부 '소설 수업', 3부 '밤을 기록하는 밤', 4부 '유미의 얼굴', 5부 '송년 산보' 등 총 5부로 구성된 이 책은 김금희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는 애독자들에게 작가에 대한 또 다른 매력을 선물하는 귀중한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소설가의 실제 모습을 소설 속에서는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죽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근원적으로 품고 가야 하는 고통이자 딜레마다. 죽음이 어떻게 다루어지는가는 어떻게 사는가만큼이나 중요하다. 죽음을 덮거나 피하지 않고 진정으로 애도할 수 있는 사회 그럴 수 있도록 사회의 공기를 조성하고 충분히 슬퍼하고 분노할 수 있게 하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만이 삶은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이 된다. 죽음이 고유해질 때 우리 모두는 숫자 속에 숨은 익명이 아니라 고유한 개인이 되어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안녕이라고 말하지 못한 이별들은 은폐되거나 덮이는 것이 아니라 기억되고 말해져야 한다."  (P.208)


숨었던 햇살이 제 속살을 내보이며 다시 나타났다. 빈 운동장을 하염없이 걷던 할머니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바람은 여전히 거세고 밀려난 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언뜻언뜻 고개를 내밀고 있다. 영화 '서울의 봄'이 천만 관객을 목전에 두고 있다. 누군가의 죽음을 익명으로 처리하려 했던 자들, 자신이 얻은 권력을 마치 전리품처럼 인식하여 사적인 욕심을 극대화하려 했던 자들, 그들에 의해 저마다의 고유성을 상실한 채 익명의 죽음을 맞아야만 했던 사람들의 영혼이 우리를 영화관으로 이끌고 있다.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하여, 세월호 참사에 대하여, 그리고 이태원 참사에 대하여 우리는 충분히 슬퍼하고 분노할 수 있었던가. 안녕이라고 말하지 못한 이별들이 가슴에서 응어리로 맺힌 기억들이 우리에겐 너무도 많았던 게 아닌가. 빈 운동장을 걷는 누군가의 발걸음이 한없이 가벼워질 그날이 오기를 기원하며 나는 김금희의 산문집 <사랑 밖의 모든 말들>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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