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매일매일 - 빵과 책을 굽는 마음
백수린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읽었던 어떤 책에 대한 감상이나 리뷰를 다른 사람의 글을 통해 읽는다는 것 역시 호기심이 동하는 일이지만,  그 사람의 글에서 읽히는 마음결이 나와 비슷할 때, 나는 저으기 안심하게 된다. 내가 어렴풋이 기억하는 유년 시절의 어느 날,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깨었던 나는 아침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엄마의 칼질 소리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차분히 가라앉았던 침묵과 주변을 감싸는 익숙한 냄새들로 인해 소란스러웠던 마음이 금세 가라앉았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의 삶이란 이렇듯 손톱이 자라는 것과 같은 무심함이 차곡차곡 쌓이는 일이지만 세월이 한참 지나서 되짚어 보면 크게 웃자란 손톱을 발견한 듯 크게 놀라곤 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의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있을 정도의 놀람을 몇 차례 경험하다 보면 삶으로부터 저만치 멀어지고 만다. 자신의 옷자락에서 먼지를 털어내듯 말이다.


"우리가 어디로 향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그저 묵묵히, 하루와 하루 사이를 박음질하듯 이으며 살아갈 뿐이니까.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 매일매일 그저 자신에게 최선이라 믿는 길을 선택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 한, 사노의 질문은 길 잃은 자들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북극성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서 빛날 것이다."  (p.192)


백수린의 산문집 <다정한 매일매일>을 읽고 있노라면 우리를 동요케 하는 어떤 큰일이 없이 하루하루가 그저 평범하고 소박한 일상으로 채워질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우리의 삶이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아서 높낮이가 없는 이차원 평면처럼 맨송맨송하지 않다는 걸 잘 알면서도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책을 읽는 동안의 길지 않은 시간만큼은 안심해도 된다는 신의 계시가 나의 일상을 지켜줄 것만 같은 것이다. 작가가 리뷰에 앞서 소개하는 여러 종류의 빵 내음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구수하게 풍겨올 것 같고, 그렇게 느끼는 나는 작가가 소개하는 책에 허기가 동한다.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 목록에 쌓여만 가는 책의 제목들...


"좋은 책의 기준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읽고 난 후 세상을 보는 시선을 바꿔주는 책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무수업』은 나에게 좋은 책이다. 이 책을 읽은 이후 두 번 다시 나무를 그 전과 같은 눈으로 볼 수 없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길을 걷다가 만나는 가로수, 창밖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뒷산의 나무를 보면 그들의 삶이 궁금해진다. 그리고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p.226~p.227)


요즘 나는 군에 간 아들의 전화를 기다리며 일주일을 보내는 느낌이다.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에 걸쳐 아주 잠깐 서로가 꼭 묻고 싶었던 질문들만 모아서 쫓기듯 통화를 하는 그 시간이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겨진다. 아들이 군에 입대하기 전, 그러니까 서로가 여유 있게 대화하고 하시라도 전화나 문자가 가능했던 그 시절에는 그렇게 다급하게 묻거나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을 질문들을 나는 요즘 제한된 짧은 시간 안에 모두 쏟아내곤 한다. 어쩌면 우리는 만남조차 허락되지 않는 이 시기에 서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가는지도 모른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나 정유정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는 아들이 어렸을 때는 왜 그렇게 릭 라이어던의 작품에 빠져 지냈는지와 같은 그런 한가한 질문은 요즘 하지 않는다. 아들이 제대를 하고 조금 여유로운 시간이 주어진다면 한 권의 책을 함께 읽고 각자의 소감을 말하기에는 어떤 책이 좋을지 나 혼자 이따금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캐나다 소설가 앨리스 먼로의 소설들을 좋아하지만, 바람이 몹시 불어 쓸쓸한 어느 밤, 누군가와 갓 구운 단팥빵을 나눠 먹으며 단 한 권의 책을 함께 읽어야 한다면, 다시 읽고 싶은 것은 디어 라이프』다. 이 단편소설집에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거나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을 읽어나가다 보면 우리는 겉보기엔 평범해 보이는 그들이 저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내밀한 어둠을 가슴 깊은 곳에 품고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p.257)


백수린의 산문집 <다정한 매일매일>은 작가 자신이 읽었던 책에 대한 가벼운 감상(평론이 아닌)을 기록한 책이지만 나는 마치 작가의 평범한 일상을 읽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빵과 책을 굽는 마음'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작가 역시 이 책을 통하여 서점이나 도서관으로 달려가는 독자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읽고 쓰는 나날을 기록한 소박한 글들이 온기,라는 단어와 어울렸으면' 하고 바랐던 작가의 바람이 반쯤 이루어진 셈이 되는 것이다. 하늘은 다시 어두워지고 있다. 바깥으로 오랫동안 나돌기에는 무더위의 장벽이 너무 높고 두터운 느낌이다. 이런 날씨에는 에어컨 바람을 쐬며 한 권의 책을 읽는 게 제격이다. 뭐니 뭐니 해도 여름은 역시 독서의 계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쩌면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이 나일지도 몰라 - 지친 나에게 권하는 애니메이션 속 명언
이서희 지음 / 리텍콘텐츠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넓은 의미로 보면 '상실감' 혹은 '상실의 고통'을 겪는 것으로 인해 인간은 모두 서로에게 동병상련의 동지애를 느끼게 된다. 물론 상실의 대상이나 체감하는 강도는 서로 다를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인간은 상실로 인한 자신의 결핍이나 불만족 또는 지난 시간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해 상실을 복구하거나 다른 수단을 통해 대체하고자 하는 데 자신의 남은 삶을 모두 소진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말이다. 예컨대 과거 어떤 시점에 많은 재산을 탕진했거나 한 번의 실수로 전 재산을 날려버렸던 사람은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자신의 정상적인 삶 자체를 포기하기도 하고, 어느 시점에 사랑했던 사람을 잃고 방황했던 사람은 가슴이 뻥 뚫린 듯한 고립감과 허전함으로 인해 삶이 뿌리째 흔들리기도 한다. 때로는 가장 아름답고 화려해야 할 젊은 시기를 무의미하게 흘려보냈다는 상실감을 남들보다 몇 배는 더한 고통으로 체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일, 그것을 만회할 대체수단을 찾을 수밖에 없다. 성형수술을 하거나 많은 돈을 들여 관리를 받는 등 유난스러울 정도로 젊음에 집착하게 된다. 그러자면 이와 같은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병적으로 돈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예를 들면 우리나라 최고 권력자의 아내를 떠올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요지는 바로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일정한 나이가 되면 상실의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고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남은 삶을 소진하는 불쌍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애니메이션이야말로 어른들을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애니메이션을 통해 내 안에 사라진 듯한 순수함을 다시 찾기도 하고,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얻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야 어릴 때 보지 못한 숨겨진 의미가 보이기도 하지요."  (p.6 'Prologue' 중에서)


문화 콘텐츠 기획자이자 전문작가인 이서희의 저서 <어쩌면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이 나일지도 몰라>를 읽다 보면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이나 그리움, 일종의 상실감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과거 회귀를 경험하게 된다. 어릴 적 즐겨 보았던 애니메이션의 유명 대사와 지금 시점에서 저자가 깨닫게 된 어떤 삶의 지혜나 지점들. 책에는 우리가 한 번쯤 보았음직한 12편의 애니메이션 작품이 등장한다. '이웃집 토토로'를 비롯하여 '포켓몬스터', '도라에몽', '벼랑 위의 포뇨', '너의 이름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 '라따뚜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스즈메의 문단속', '겨울왕국', '슬램덩크'가 그것이다. 어쩌면 제목만 들어도 그 시절에 보았던 영상들이 슬라이드처럼 흘러갈지도 모르겠다.


"sentence 111

Here, here. You are lucky. The heart wasn't attacked. The heart is not so easily changed. But the head can be persuaded. I recommend erasing all magic-related memories. I'll make sure that the memories related to magic are safe. But don't worry. I'll leave the fun she willbe okay.

여기, 여기 눕히세요. 운이 좋았네요. 안나의 심장을 공격한 것은 아니에요. 심장은 쉽게 변하지 않아요. 하지만 머리는 변하기가 쉽죠. 저는 마법과 관련된 모든 기억을 지우길 추천합니다. 마법과 관련된 추억들은 안전해지도록 할게요. 하지만 걱정하지는 마세요. 좋았던 순간들은 남겨둘 테니까요. 안나는 괜찮을 겁니다."  (p.168~p.169)


나 역시 과거에 내가 잃어버렸던 어떤 것들로 인해 깊은 상실감에 매몰될 때가 많은 까닭에 주변의 다른 누군가에게 상실감을 만회하기 위해 자신의 남은 삶을 쓸데없이 소진하지 말라는 충고는 감히 하지 못한다. 사실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을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효과적으로, 혹은 유익하게 보낼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게 주어진 삶을 가장 효율적으로 살아내는 방법이겠지만 우리는 시시때때로 과거라는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그 시절에 자신이 잃었던 어떤 대상이나 경험을 보충하거나 만회하기 위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고집스럽게 추진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DNA 분석에 기초한 인간의 자연 수명이 약 38세라는 주장에 눈길이 쏠리기도 한다. 어쩌면 인간은 보너스처럼 주어진 38세 이후의 시간 동안 자신이 잃었던 어떤 것들을 만회하고자 노력하는 반쪽짜리 삶을 살게 되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두려움을 이긴다."라는 주제가 담긴 『겨울왕국』에는 자매의 가족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보통 부모와 자녀의 관계나 성애적 사랑을 다루는 다른 작품들과 차별되는 점이죠. 그리고 엘사는 자신의 능력을 두려워하며 숨기려고 하지만, 결국 이를 받아들이고 자아를 수용하는 과정을 겪습니다."  (p.183)


장마가 잠시 쉬어가는 요 며칠, 날씨는 무덥고 불쾌지수는 끝 간데없이 치솟았다.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것도, 과거에 잃어버렸던 어떤 것에 끝없이 집착하면서 상실감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인간이 성숙하지 못한 까닭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철이 들지 않는 까닭에 인생의 많은 시간 동안 상실감을 부여잡은 채 헛된 시간을 흘려보내고 마는 가엾은 존재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 부인이 보이는 작금의 행태를 십분 이해한다. 그리고 그를 가엾게 여긴다. 나 역시 그런 부류인 까닭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루스트와 오징어 - 독서의 탄생부터 난독증까지, 책 읽는 뇌에 관한 모든 것
매리언 울프 지음, 이희수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학생이던 아들은 휴학을 하고 얼마 전에 군인이 되었다. 물론 아직은 훈련병 신분이지만 말이다. '까꿍' 놀이를 좋아하던 아들이 어느새 자라 군에 입대를 한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20여 년의 세월이 무성영화의 필름처럼 빠르게 감긴 느낌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들은 순하고 명랑한 아이였다. 그러나 심하지는 않았지만 아토피성 피부염을 앓았던 아들의 건강에 대해 예민할 정도로 신경을 썼던 아내는 가뜩이나 약했던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아들의 먹거리와 위생에 온 힘을 쏟았다. 달리 도와줄 게 없었던 나는 하루 건너 한 번씩 아들을 데리고 잤다. 나와 함께 자는 날이면 아들은 늘 <사과가 쿵>이나 <마녀 위니>를 들고 와서 내게 읽어 달라곤 했다. 다 읽고 나면 다시 제일 첫 페이지를 펴서 다시, 금세 또 다 읽으면 다시 첫 페이지를... 나는 그렇게 책 읽기 개미지옥에 빠져 벗어나지 못했다.


"동화를 들으면서 감정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는 동시에 타인과 나를 구분 짓는 경계선이 있다는 점을 인지하기 시작할 무렵, 이번에는 보다 인지적인 차원의 통찰이 떠오른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책 속에는 마치 그림처럼 늘 똑같은 자리에 놓여 있는 길고 짧은 단어들이 가득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진적인 지적 발견을 시작으로 아이는 책에는 고유한 언어가 있다는 보다 넓고 암묵적인 발견에 도달하게 된다."  (p.166)


지금도 나는 아들이 어떻게 읽고 쓰는 것을 스스로 터득하게 되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한다. 언젠가 집에 놀러 오셨던 수녀님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써보겠노라며 연필을 쥔 손에 힘을 주기 위해 바들바들 떨며 글자를 써 내려가던 아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들은 그렇게 한글을 읽고 쓰는 법을 익혔고, 차를 타고 가면서도 도로 주변의 도로 표지판을 빼놓지 않고 읽었다. '주차 금지'라는 말을 들었던 할아버지가 '금지'가 무슨 뜻이냐? 고 물었을 때, 아들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작은 두 손을 X자로 겹쳐 주차하면 안 된다는 뜻이라고 말하였다. 어린 아들의 설명을 듣고 대견해하시던 할아버지는 지금은 우리 곁에 없다.


인지신경학자이자 아동발달학자인 매리언 울프의 저서 <프루스트와 오징어>를 읽는 내내 나는 아들의 성장 과정을 떠올렸다. 1부 '뇌는 어떻게 글을 읽게 되었을까', 2부 '뇌가 독서를 배우는 방법', 3부 '뇌가 독서를 배우지 못할 때' 등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인류가 독서를 통해 지식을 습득하고, 문화를 창조하며, 대를 이어 정보를 전달하는 등 인류의 독보적이면서 경이로운 독서 능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구체적이면서도 과학적인 설명으로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독서의 과정이 먼저 글자를 시각적으로 인지하고, 뇌가 그 정보를 처리하고, 그것을 우리의 기억과 연결시키고, 그렇게 누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필요한 지혜를 얻게 된다. 독서는 이처럼 경이로운 과정이라는 사실을 저자인 매리언 울프는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아들의 성장 과정을 하나하나 되짚어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독서가 아들의 성장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주말마다 했던 대형서점으로의 나들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던 아들, 유학 한 번 다녀온 적 없고 과외 한 번 시킨 적 없는 아들이 스스로 공부하여 토익 만점을 받는 기적과도 같은 성취를 보여주었던 이면에는 어쩌면 '독서'라는 비밀 병기가 숨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이 책에서 난독증에 대해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세계적인 읽기 연구자인 저자가 난독증에 걸린 아들을 키우게 되었다는 건 하나의 아이러니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이유로 난독증에 대해 더 깊이 파고들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토머스 에디슨,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창의적인 천재들에게도 자주 발견되는 것을 보면 독서는 타고난 능력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과학의 관점에서 난독증 연구는 빠른 속도로 헤엄치지 못하는 새끼 오징어를 연구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 오징어가 가진 약간 별난 회로를 들여다보면 헤엄을 잘 치기 위해 필요한 것과 그 오징어가 다른 오징어들처럼 헤엄치지 않아도 죽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독특한 재능에 대해 알 수 있다."  (p.57~p.58)


인류는 지금 디지털 대 전환기의 시기에 직면해 있다. 소크라테스가 독서에 대해 염려했던 것처럼 독서에 익숙한 우리들 역시 동영상 매체를 탐닉하는 다음 세대의 행동 양식을 비판한다. 그러나 문자 언어가 아닌 다른 형태의 언어를 통해서도 독서하는 뇌의 발달은 지속될 것이다.


"'초월적 사고를 하는 시간'이라는 이 신비한 무형적 산물이 바로 독서하는 뇌가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이다. 몇 밀리세컨드에 불과한 이 내재적 시간이 지식을 발전시키고 덕에 대해 사색하고 단 한 번도 표현되지 않았던 것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인간 능력의 발판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표현된 말은 다시 새로운 도약대를 만든다. 그러면 인간은 그것을 딛고 심연으로 돌진해 들어갈 수도, 창공으로 날아오를 수도 있다."  (p.389)


불쾌지수가 높아지는 요즘, 자리에 앉아 진득하게 책을 읽는 일도 쉽지 않다. 그러나 매리언 울프가 설명하는 인류가 독서 능력을 취득하게 되는 흥미진진한 과정을 책으로 읽다 보면 시간은 어느새 훌쩍 흘러가게 된다. 별도의 피서가 필요치 않은 것이다. 책을 읽고 깊이 사색할 수 있는 이 시간이야말로 삶에 있어서 얼마나 귀중하고 값진 기회인가. 매리언 울프는 우리에게 그런 소중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간의 경과를 무시하거나, 건너뛰거나, 사건의 순서를 뒤바꾸기만 해도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게 마련이다. 한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의 순리를 우리는 단 한 번도 거스르거나 의심해 본 적 없기 때문이다. 주어진 삶에서 시간만큼 익숙한 것도 다시없을 터, 시간은 그만큼 우리의 삶을 강한 힘으로 움켜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 저편에서 바라보면 아무것도 아닌 듯 하찮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욘 포세가 쓴 <아침 그리고 저녁>은 빽빽한 시간의 경과를 가볍게 무시하는 소설이다. 익숙했던 흐름에서 한 발 물러선 이 소설을 대하는 태도 혹은 책을 읽는 독자의 첫 번째 반응은 어쩌면 '낯섦'이라는 단어로 귀결될지도 모른다. 이제 막 시간의 도약대에 선 요한네스가 번지점프를 하듯 기척도 없이 삶의 이쪽 편에서 죽음의 저쪽 편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그렇다. 소설의 1부에서 어부인 올라이와 그의 아내 마르타를 부모로 정한 채 산파인 안나의 도움을 받아 이제 막 삶을 시작한 요한네스. 올라이 부부에게는 둘째인 동시에 할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아 요한네스로 불렸던 그가 아니었던가.


"아가 요한네스, 다 잘될 거다, 올라이가 말한다 요한네스라고 부를 거란 말이지요, 늙은 안나가 말한다 그리고 더이상 고요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이 그저 날카로운 울림을 지닌 움직임이 되어 열리고 닫힌다 그리고 그래 그래야 한다 그리고 느리고 빠른 움직임들은 맞서고 합쳐지고 그리고 확실히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다 아무것도 모든 것은 움직임일 뿐이며 색도 규칙적인 박동도 없이 더이상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고요히 고요히 앞으로 모든 것이 그저 나아간다 그리고 더이상 그 무엇도 구별할 수 없고 어린 요한네스는 큰 소리로 운다 그리고 아이의 목소리는 우렁차게 울린다 그리고 아이는 목소리 안에 있고 목소리 밖에 있어 홀로 색깔도 소리도 빛도 없이 아픈 것은 그의 팔 다리 배가 아니라 이 빛 이것 이 움직임들 이것 저 숨 이것들이 아픈 것이다"  (p.25~p.26)


시간의 경과를 무시하는 작가는 문장의 순서를 결정하는 마침표나 쉼표, 느낌표 등 거추장스러운 문장부호를 가볍게 생략한다. 오직 자신의 감각을 날카롭게 벼린 채, 그 감각을 통해 인지되는 모든 것들을 문자 텍스트로 전환하기 위해 분투할 뿐이다. 그와 같은 과정은 마치 빅뱅 직후 플라스마 상태의 우주처럼 모든 게 뒤섞이고 혼란스러운, 물질과 시간마저 제 형태를 갖추지 못한 원시 우주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작가는 어쩌면 우리의 모든 삶과 죽음이 시간을 무시해도 좋은 빅뱅의 순간과 무척이나 닮았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1부가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삶을 시작한 요한네스의 탄생의 순간을 묘사했다면 2부는 노인이 된 요한네스의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옮겨간다. 찌뿌둥한 몸으로 누워 있던 그는 담배 생각이 간절하여 몸을 일으킨다. 젊음은 이미 먼 옛날 이야기가 된 지 오래인 그의 유일한 낙은 결혼하여 근처에 사는 딸 싱네가 이따금 찾아오는 것이다. 작가의 시선은 요한네스의 동선을 따라간다. 요한네스는 친구인 페테르를 만나 낚시를 하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편지를 건넸었던 여인과 마주치기도 하고,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에르나까지 만난다. 너무나 쉽게 말이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난 요한네스의 탄생 장면과 죽음 이후의 모습을 한 권의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맞닿아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가는 그곳에는 너도 나도 없다네, 페테르가 말한다 좋은가, 그곳은? 요한네스가 묻는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어, 하지만 거대하고 고요하고 잔잔히 떨리며 빛이 나지, 환하기도 해, 하지만 이런 말은 별로 도움이 안 될 걸세, 페테르가 말한다"  (p.132)


작가가 묘사하는 사후의 세계는 삶에서의 일상이 단지 시공간을 확장한 것처럼 익숙하고 편안하다. 육체를 벗고 자유로워진 영혼이 어떤 구속이나 장애도 없이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연스레 이어가는 것이다. 비록 서로가 서로를 만질 수도 없고 육체를 통한 삶의 온기를 나눌 수는 없지만 말이다. 책에서 작가는 요한네스가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오는 장면을 그리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그만큼 자연스러운 어떤 것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요한네스 자신의 장례식 장면, 구체적으로 자신의 관에 흙이 덮이고 딸 싱네의 생각이 흰 구름처럼 떠간다.


삶에 대한 집착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지나치게 키운다. 돌이킬 수 없는 진행이라는 건 세상 사람들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지 않느냐고 작가는 묻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다 제쳐두고 오직 나 한 사람만 죽는 일도 아니라는 걸 작가는 새삼 일깨우고 싶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 왔던 누구나가 겪는 일, 삶과 죽음은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임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나 보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것처럼. 곧 장마가 시작된다는데 이 또한 걱정이 된다. 그러나 삶에서의 이러한 고비들 역시 자연스레 지나갈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천사가 날 대신해 소설, 잇다 5
김명순.박민정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을 쓰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는 뜬구름 잡기식의 정의를 걷어내면 소설가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소설가에 대한 생각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소설가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상호 간의 관계를 설정하고 조율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관계를 설정하고 조율한다는 것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사람 사이의 관계란 그 시대의 시대상을 반영하기도 하고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그 깊이가 결정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무리 자유분방한 연애관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리학적 예의식이 강했던 조선시대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더라면 예법을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과감히 행하기는 어려웠을 테고, 유교적 예법을 중시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작금의 유럽 사회에서 자신의 소신을 지켜나간다는 건 무리가 있을 터이다. 소설은 주로 시대에 반항하는 인물을 내세워 시대를 선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시대와 동떨어진 허무맹랑한 인물을 창조하기는 어렵고 독자가 허용할 수 잇는 분명한 한계와 테두리가 주어지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물론 소설 속 인물 상호 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조율하느냐에 따라 소설을 쓰는 작가의 인생관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말이다.


"소설에는 작가가 자연인으로서 듣고 보고 겪은 모든 것들이 각색되어 펼쳐지고 초점 화자는 아무래도 작가 자신을 가장 많이 닮는다. 초점 화자를 의도적으로 적역으로 설정한다고 해도 결국 평자는 가장 작가와 닮아 보이는 인물을 찾아낸다. 그가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어도 기어이 끌고 나온다. 나는 지금도 나와 가장 닮았다고 믿거나 내가 경멸하는 인간상을 뒤섞어 화자의 캐릭터를 구축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내가 쓴 산문이나 작가 노트나 심지어 비공개 SNS에 올린 게시물까지 포함해서, 누군가가 어떤 소설이 얼마나 자전적인 이야기인지 재단한다고 해도 그 역시 사실은 평자의 자유다. 작가의 자존심을 걸고 이런 모든 과정에서 개인인 내가 받는 상처 따위는 당연히 무시한다는 전제에서다."  (p.305 '때가 이르면 굳은 바위도 가슴을 열어' 중에서)


1917년에 '의심의 소녀'로 문단에 데뷔하여 작품활동을 했던 김명순과 2009년 등단하여 지금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박민정 작가는 두 사람 모두 소설가라는 점에서, 여성 작가라는 점에서 서로 닮은 듯 보이지만 100여 년이라는 시대의 격차와 달라진 가치관과 상이한 성장 배경에 의해 그들이 쓴 소설은 사뭇 다른 양상이다. '근대 여성 작가와 현대 여성 작가의 소설을 한 권에 담아 함께 읽는 시리즈로 기획된 '소설, 잇다'의 다섯 번째 작품인 <천사가 날 대신해>에는 김명순의 소설 세 편과 박민정의 소설 한 편과 한 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


방탕한 남편으로 인해 고생하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한 여인의 딸과 그녀의 할아버지가 남편과 첩의 눈을 피해 세상 사람들의 눈을 피해 떠도는 모습을 그린 <의심의 소녀>, 평양에 강연을 하러 온 젊은 이학자 효순을 사랑하게 된 소련은 미혼의 신여성이었으나 효순은 이미 은순이라는 처를 둔 유부남이었다. 둘 사이를 눈치챈 은순은 소련의 고모 류애덕 여사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고모는 최병서와의 결혼을 서두른다. 최병서의 학대와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로 소련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지만 소련은 꿋꿋이 결혼생활을 이어가며 효순과의 영적 연애를 그리게 된다는 내용의 <돌아다볼 때>, 최 씨 가문의 네 남매인 순희, 순철, 상철, 금희를 중심으로 그 시대의 도발적이거나 비극적인 연애사를 다룬 <외로운 사람들>이 김명순의 작품이고, 친구 세윤의 죽음을 '나'의 시선으로 훑어보는 <천사가 날 대신해>는 박민정의 작품이다. 그리고 박민정의 에세이 <때가 이르면 굳은 바위도 가슴을 열어>는 소설가로서 박민정 작가의 솔직한 시선이 담겨 있다.


"살아내려고 이혼을 선택한 세윤에게 더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줄, 자꾸만 불행이 갱신될 줄은 세윤도 나도 미처 몰랐다. 만약 내 충고대로 로사를 멀리했다거나, 그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회사에 갔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하는 일도 어느새 지겨워졌다. 세윤은 로사가 괴롭히기 시작한 후에도 자기는 더는 어떤 실패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사실은 가정법원에서 나오는 길에 다른 여자를 차에 태우고 가는 전남편을 보고 우두커니 섰던 자기가 이겨내지 못할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p.296 '천사가 날 대신해' 중에서)


김명순은 한국 최초의 근대 여성 소설가, 시인이자 평론가, 언론인, 번역가 등 다양한 재주를 지닌 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적인 조선 사회에서 '첩의 딸'이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살아야 했던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이었다. 그녀의 소설에서는 언뜻언뜻 가부장적인 결혼 풍습의 폐해가 그려지지만 그녀 또한 아무런 잘못도 없이 공격을 당한 시대의 피해자였다. 그러나 약자에 대한 비겁한 조리돌림은 과거에만 존재했던 시대의 산물은 아니었던가 보다. 박민정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세윤 역시 약자라는 이유로 스스로 삶을 마감했으니 말이다. 이혼을 한 세윤은 이미 '약자'라는 핸디캡을 안고 로사와 그 무리 속에서 어떠한 수모도 견딜 각오로 뛰어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리 속의 인간은 누군가의 상처를 살뜰히 보살필 만큼 선한 본성의 동물은 아닌 모양이다. 어쩌면 세윤은 자신의 약점을 지우기 위해 더 철저히 비굴해지려 애썼는지도 모른다.


"필경 육신과 영혼을 양편으로 가진 사람들은 약함을 끝끝내 이기진 못하고 운명에게 틈을 엿보여서 나라를 깨트리기도 하고 경우를 잃기도 해서 동서에 울고 웃게 되며 남북에 헤매게 되는 것이다. 여기 이르러 소련의 운명은 그 갈 곳을 확실히 작정했다."  (p.75 '돌아다볼 때' 중에서)


낮고 우울했던 하늘이 점차 밝아지고 있다. 인생의 8할은 인간관계에 있는 것처럼 소설가는 자신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상호 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조율하느냐에 따라 소설가로서의 성패가 결정되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 잇다' 시리즈는 시대를 초월한 두 소설가의 만남인 동시에 한 세기를 비껴간 두 소설의 만남인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100여 년 전 소설 속 주인공 소련과 현대의 주인공 세윤을 하나의 소설에서 만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혼재된 시간 속에서 옳고 그름이 뒤섞인 상상의 시공간 그 어디쯤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