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과 생각
정용준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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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팬이 되겠다는 건 아니지만 책을 읽다 보면 이따금 한 작가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고 싶을 때가 더러 있다. 책날개에 있는 작가의 짧은 프로필이나 인터넷에 떠도는 어설픈 정보를 떠나 작가의 유년기는 어땠는지, 청소년기에는 주로 어떤 생각을 하며 보냈는지, 성인이 된 지금은 어떤 가치관으로 살고 있는지 등 작가 스스로 밝히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내밀한 이야기를 속속들이 알고 싶은 것이다. (흠, 이렇게 쓰고 나니 어쩐지 내가 사생팬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위험한 인물로 느껴지기도 한다, 아무튼) 그러나 연예인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에 관심이 그닥 많지 않은 까닭에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작가의 인생사를 굳이 알고 싶어 하는 경우는 극히 적다고 하겠다. (사실 나는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유명하다는 연예인의 이름도 허다하게 모른다. 부전자전인지 나의 아들도 그렇다.) 어떤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하는 원인은 일차적으로 그가 쓴 책에서 비롯된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이치일지 모른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자신의 책이나 언론 인터뷰를 통해 언급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정용준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던 건 그의 에세이 <밑줄과 생각>을 읽은 직후였다. 전에도 작가의 이름은 몇 번 들어 본 듯한데 그의 작품은 생각나는 게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그의 작품을 읽은 적이 없었다. 불행하게도 말이다. 누군가 넌지시 읽어보라고 귀띔이라도 해줬더라면 그의 작품 중 한두 권쯤은 진즉에 읽지 않았을까 싶긴 한데 아무도 내게 권하는 이가 없었던 걸 보면 그는 대중적으로 크게 인기를 얻은 작가는 아닌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암튼 그렇다.


"밑줄 긋는 것이 좋습니다. 그 문장이 몸과 마음에 천천히 스며드는 시간도 좋습니다. 그 언어와 내 언어가 섞이고 남의 언어를 닮은 새로운 나의 언어가 생기는 것이 좋습니다. 밑줄이 그어지면 책은 책 이상이 됩니다. 단어와 문장에 그어진 한 줄의 흔적은 마음에도 그어져 있습니다. 문신처럼 흉터처럼 남아 내 삶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저자와 악수하고 인물과 포옹하고 이야기와 연결되는 느낌. 이보다 좋은 것을 아직 경험해본 적 없습니다."  (p.6 '작가의 말' 중에서)


나는 책의 서두에 적힌 이 몇 개의 문장에 '계몽되'고 말았다. 하마터면 나는 어느 날 헌법재판소의 재판정에 나왔던 어느 변호사의 말을 그대로 읊을 뻔했다. '나는 계몽되었습니다!'라고. 책의 내용 역시 '작가의 말'에 버금갈 정도로 좋았던 게 사실이다. 책을 출간하고자 하는 어떤 작가도 자신의 책을 준비함에 있어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테지만, 소설가로 알려진 작가가 <밑줄과 생각>이라는 제목의 산문집을 준비함에 있어 그는 아마도 남다른 각오와 결심이 서지 않았을까 싶다. 한 글자 한 글자, 한 문장 한 문장에 정성을 다한 느낌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좋아하는 작가가 여름에 발표한 소설을 읽었다. 좋았다. 문장을 읽다 말고 잠깐 눈을 감고 멍하게 있었다. 분주한 마음이 가라앉고 다시 읽었다. 눈으로 쭉 읽어나가다가 연필을 들어 밑줄을 그었다. 어떤 단어는 손끝에 만져졌다. 어떤 문장은 온도가 느껴졌다. 어떤 장면에선 마음이 아팠고 어떤 대화에선 마음이 환해졌다. 소설은 작가의 일기가 아닌데 나는 그 작가의 소설이 일기였으면 한다. 그래서 읽으면 읽을수록 작가를 사적으로 많이 알게 되고 가까워졌으면 좋겠다. 그런 착각이라도, 그런 허상이라도, 좋다."  (p.176)


'한 줄의 문장', '한 줄의 밑줄', '한 줄의 생각'이라는 소제목으로 구성된 이 책은 자신이 읽었던 인상 깊었던 소설과 글을 소개하면서 작가의 깨달음과 통찰을 더한다. 소설을 쓰는 소설가가 다른 소설가의 작품을 읽고 공감하며 깨닫고 자신의 소설 작법에 있어 잘못된 점을 개선하는 것이야 당연한 이치이겠으나, 소설가가 보편적 일상을 살아가는 무명의 독자로서 여러 작가의 작품을 읽고 자신이 깨달은 바를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여러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기회는 흔하지 않다. 그런 까닭에 소설가는 자신의 독서 체험을, 음악이나 영화 감상의 체험을 일반 대중과 나누기 위해 책이라는 지면을 통해 소통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이 일상처럼 가볍고 진부해서는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전업으로 글을 쓰는 작가라면 자신의 생각이 일회성의 어떤 것으로 그쳐서는 곤란하다는 얘기다. 떠오르는 생각에 밑줄을 긋고, 그 생각에 새로운 생각을 첨삭하는 일을 끝없이 반복하여 그 열정이 독자의 가슴에 닿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용준 작가의 <밑줄과 생각>은 비로소 대중의 주파수와 일치하여 그들과 교신하게 되었다.


"나는 작가를 감히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가 보고 그가 증언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나도 아주 조금은 알고 있다고 믿고 싶다. 작가에게 신은 인간을 포기하는 관념이 아니다. 도리어 인간의 손목을 움켜쥐고 끝까지 떠오르게 하는 안간힘에 가깝다. 작가는 안다. 때로는 변호하는 것이, 우기고 또 우기는 것이,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아이처럼 떼쓰는 것이, 태양을 멈추고, 운명을 바꾸고, 신의 마음을 돌이키기도 한다는 것을."  (p.331)


어제 내린 비 때문인지 하늘은 맑고 공기는 청명하다. 봄바람 속에 은은한 벚꽃 향기가 실려 오는 듯도 하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거닐며 꽃구경에 여념이 없다. 한 사람의 웃음이 곁에 있는 다른 사람의 웃음을 유발하고 급기야 꽃망울이 터지듯 주변의 모든 사람들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우리는 그 웃음에 밑줄을 긋고 삶의 의미를 가벼이 음미한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읊었던 천상병 시인의 시구처럼 오늘 그들 얼굴에 번졌던 미소가 아름다운 추억으로, 아름다운 삶으로 귀결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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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온 시간의 기억은 때론 혼재되거나 소멸하고, 왜곡되거나 재탄생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하는 과거란 물리적인 시간의 경과에 의해 차례차례 기억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모두 진실임을 입증할 방법도 전혀 없다. 따라서 어떤 기억은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마치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고, 또 어떤 기억은 최근의 일이지만 까마득한 옛일처럼 희미하거나 아득한 느낌마저 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미 지나쳐온 시간은 물리적인 순서를 따지는 게 불필요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우리가 사건을 기록하고 관리하는 사학자가 아니라면 말이다.


2024년 12월 3일, 난데없는 계엄령 발표와 그로 인한 국민들의 혼란과 공포. 돌이켜보면 그로부터 4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마치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다. 아무런 이유도 명분도 없는 계엄령 발표에 사람들은 다들 "지금 시점에 왜? 뭐 때문에?" 하면서 도대체 어떤 목적으로, 누구의 머리에서 비롯된 발상인지 무척이나 궁금해했다. 2024년 12월 14일 윤석열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한 후, 헌법재판소의 파면 선고를 기다리는 지난한 시간 동안 단 하루도 마음 편하게 보내지 못했다. 환율은 치솟고, 소비심리는 급격히 위축되고, 기울어져가는 난파선 대한민국호의 이용객들은 다들 '이대로 가다가는 망하겠는걸.' 하는 우려는 꾸준히 높아져만 갔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해가 바뀐 2025년의 청명일이자 암브로시오(윤석열의 세례명) 성인의 사망일이었던 4월 4일, 그토록 애를 태우던 헌법재판소가 윤석열에 대한 재판관 8명 전원 일치의 파면을 선고하였다는 사실이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사람들이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는 문형배 헌재 소장 권한대행의 주문이 낭독되는 순간 서로가 서로를 다독이면서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하고 벅차오르는 감격을 나누었다. 이로써 대한민국호는 항로를 잃고 좌초 위기에 빠졌던 상황에서 벗어나 조금씩 제자리를 찾게 된 것이다. 


주말을 맞는 식당의 점심시간. 모처럼의 활기에 주문을 받는 사장님도, 음식을 기다리는 손님들도 모두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지나온 시간의 기억은 때론 혼재되거나 소멸하고, 왜곡되거나 재탄생하기도 하지만, 4월 4일 오늘의 기억은 온전한 모습으로 영원히 기억되기를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의 웃음을 향해 기도했다.


'청명에는 부지깽이만 꽂아도 싹이 난다'고 하던데 오늘은 청명을 하루 넘긴 한식. 하늘은 희끄무레 어둡고 이따금 비가 내린다. 저 비와 함께 대한민국에도 새 생명이 움트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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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어른
이옥선 지음 / 이야기장수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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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으로 순서를 밟아 등단한 작가와 그렇지 않은 작가의 글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잘 쓰고 못 쓰고의 차이가 아니다. 재기 발랄함이랄까 아니면 자유분방함이랄까. 아무튼 신춘문예와 같은 정식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 어쩌다 누군가의 눈에 띄어 등 떠밀려 책을 내게 된 사람의 글에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거칢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은 웃음 코드가 존재한다. 물론 적절한 유머와 타고난 글솜씨를 발휘하여 독자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는 작가들이 왜 없을까마는 정식으로 등단한 작가의 유머에는 왠지 모르게 정형화되고 순서에 얽매인 듯한 느낌이 들뿐만 아니라 어디선가 읽었음 직한 기시감이 드는 게 사실이다. 어쩌면 그들 나름의 정제되고 틀에 잡힌 일정한 웃음 코드가 따로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식 절차를 밟지 않은 작가의 글에는 독자가 미리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내용의 웃음 코드가 반드시(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존재한다. 방심하며 읽다가 허를 찔렸다고 할까, 암튼 어느 정도의 의외성은 아마추어 작가의 글을 읽는 또 다른 재미가 아닐 수 없다.


"마침 언제 읽었는지 생각도 안 나지만 내가 이런 메모를 해둔 걸 발견했다. (나는 평소에 책을 읽을 때 메모도 잘 안 하고 그 시간에 또다른 책을 읽는 스따일이다. 그만큼 이 문제에 골몰했다는 뜻 되시겠다, 흠.) 독일 작가 홀거 라이너스 (『남자 나이 50』의 저자)는 "대단한 재능이 곧 성공적인 삶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뛰어난 재능을 갖게 됨으로써 편협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하기 쉽다. 이런 현상은 거의 모든 직업에서 나타난다. 예술가든 사업가든 운동선수든 상관없이 말이다"라는 말을 남겨서 아니 고뢔! 싶은 마음이 들게 했으며, ..."  (p.47~p.48)


평소에 내가 많은 책을 읽는 건 아니지만 이옥선 작가와 같은 '어작'(내가 재미 삼아 붙인 호칭. '어쩌다 작가'라는 뜻)의 작품이 우연히 얻어걸릴 때면 괜스레 웃음이 나곤 한다. 예컨대 김미옥 작가가 쓴 <미오기傳>이라든가 전시륜 작가의 유고집 <어느 무명 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 등은 이따금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배시시 웃음 짓게 된다. 잡식성의 독서를 하는 나와 같은 이들이 누릴 수 있는 또다른 즐거움이라고 하겠다. 특별한 계획도 없고, 이렇다 할 목적도 없는 이의 손에 우연히 들어온 한 권의 책, 선물과도 같은 그 시간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이옥선의 산문집 <즐거운 어른>도 그런 책이었다.


"나는 이제 어느 정도 자유롭다. 관습과 도덕으로부터, 또 종교와 신념으로부터, 이런저런 인간관계로부터 거의 자유롭다. 다만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는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으며 지금까지 먼 길을 온 것만으로도 나는 감사한다."  (p.214)


1부 '인생살이, 어디 그럴 리가?', 2부 '나에게 관심 가지는 사람은 나밖에 없음에 안도하며'의 단출한 구성의 이 책에서 작가는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 자유로움을 마음껏 펼쳐 보인다. 성형수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나 공공장소에서 보게 되는 낯 뜨거운 애정행각에 대한 견해 등은 1948년 그것도 경상도 태생인 작가에게는 눈꼴 시려서 그냥 넘길 수 없는 사회 풍조임을 여실히 드러내는, 꼰대스러움(?)을 맘껏 풍기는 한 단면이었지만 그런 사소한 것들을 제외한다면 70대 중반의 할머니가 쓴 글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유려한 산문집이었다. 건강을 위해 틈틈이 요가를 하고, 동네 목욕탕에 출근 도장을 찍는 등 그 나이대의 사람들이 누리는 일상을 유쾌하게 풀어내는가 하면 어려서부터 즐겨 들었던 음악과 오랫동안 친목을 다져왔던 사람들과의 에피소드도 눈길을 끈다.


"달목욕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제 가사에서 좀 놓여나서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긴 50, 60대가 많다. 40대는 얼마 안 되고 70대도 많지는 않다. 매일 대략 비슷한 시간대에 다니기 때문에 학교 다니는 것 같고, 새벽반(일찍 깨는 노인이나 자영업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전반 오후반(오전에 운동 프로그램이 있어 나는 주로 오후반에 나간다) 저녁반(작장인들이 퇴근 후 많이 온다)끼리는 같은 반 친구처럼 얼굴도 다 안다. "어제는 왜 안 왔느냐" "이 동네는 어째 사생활 보장이 안 된다니까" "오늘은 좀 늦었네" 등등의 말을 나누고, 몇 년을 그렇게 다니다보니 서로의 사정을 알게 되고 친밀하게 지낸다."  (p.140)


아이들을 키울 때 쓴 육아일기 <빅토리 노트>를 출간한 후 새 글을 다시 쓸 일은 없다고 생각했던 작가가 '글을 쓰다보니 내 안에 이렇게 할말이 많았나 싶게' 빠른 속도로 진도가 나갔다는 이 산문집은 그래서 더 공감하며 읽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작가라는 타이틀을 떼고,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을 살아가는 일반인으로서, 어깨에 힘을 빼고 가볍게 써내려간 글이기에 책을 읽는 나도 작가와 조금 더 거리를 좁힐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여유가 없는 게 아니라 마음이 동해야 겨우 책을 읽는 게으른 독서가로서 이옥선 작가와 같은 '어작'(어쩌다 작가)의 작품을 읽게 되는 건 그야말로 귀한 선물이라고 하겠다. 나는 여전히 감나무 아래 입 벌리고 누워, 감이 떨어지기만 기다리는 심정으로 다음에 만날 '어작'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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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여름 2024 소설 보다
서장원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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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소설 보다> 여름 호에 실린 '그 개와 혁명'을 읽어보려고 했던 것은 순전히 예소연 작가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제48회 이상문학상 대상 작품이기도 한 '그 개와 혁명'은 작품의 내용보다 1992년생인 신예 작가 예소연에 의해 발표된 작품이라는 데 더 큰 방점이 찍혔던 사실을 나는 기사를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더구나 등단 4년 만에 이상문학상 대상을 거머쥐었다는 쾌거도 예소연 작가에 대한 궁금증을 키웠다. 이름도 잘 모르는 신예 작가가 어떻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건 예소연 작가의 능력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이상문학상'의 권위가 무겁게 짓눌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태수 씨의 죽음에 관해 우스갯소리를 하고 이것저것 계획하며 삶을 영위해나갔다. 그것은 죽음을 도모하며 삶을 버티는 행위였다. 태수 씨는 자신이 죽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했지만, 자신의 죽음을 계획하는 일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두 가지는 태수 씨에게 전혀 다른 것이었다."  (p.80 '그 개와 혁명' 중에서)


'이데올로기를 압도하는 혁명적 사랑이자 가히 혁명적인 포용의 서사'라는 심사위원회의 평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소연이라는 젊은 작가가 내놓은 이 한 편의 단편소설에 대해 심사위원들이 받은 느낌은 놀라움이지 않았을까 싶다. '태수 씨는 죽기 전까지 통 잠을 못 잤다.';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아빠라는 호칭 대신에 '태수 씨'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도,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가볍고 경쾌하게 다루는 것도 무척이나 이채롭다. 그러나 이와 같은 파격은 80년대 PD계열 운동권이었던 '태수 씨'가 NL계열 여자와 머리핀 공장에서 만나 결혼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딸인 수민의 타박에도 불구하고 제사상을 차릴 때 손도 까딱하지 않는 등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태수 씨가 아픈 뒤로도 조금씩 기뻐했다. 물론 많이 슬펐지만, 슬픈 와중에도 틈틈이 기뻐했다. 우리는 태수 씨가 아프고 나서 태수 씨의 먹는 것과 싸는 것에 모두 집중하고 좋아했다. 나는 태수 씨가 미음을 한 숟가락 뜨거나 통잠을 자면 온 가족에게 전화를 걸었고 대변을 보면 그것을 사진으로 찍어 기록해두었다."  (p.67)


아들이 없는 집안의 장녀인 수민은 동생 수진과 함께 태수 씨의 병간호를 도맡아 하며 전에는 알지 못했던 태수 씨의 모습을 비로소 알게 된다. 태수 씨가 수민, 수진과 함께 자신의 장례식을 도모하면서 그들은 비로소 세대를 넘어 한 세대를 함께 살았던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80년대 운동권의 시각에서 본 요즘 애들과 옛날 사람으로 갈린 너와 나의 모습이 아니라 현재를 공유하는 '태수 씨'와 '수민'으로 재결합하는 순간이었다. 수민은 자신 역시 태수 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모든 일에 훼방을 놓고야 마는 사람'. 끝내 수민은 그와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태수 씨와 함께 장례식을 엉망으로 만들 계획을 세운다. 그것은 바로 태수 씨를 따르던 애완견 '유자'의 등장이었다. 평소 친구가 많았던 태수 씨와 달리 손으로 꼽을 정도로 관계의 폭이 넓지 않았던 수민. 두 사람은 그렇게 하나가 된다.


"있잖아, 수민아. 그냥 죽고 싶은 마음과 절대 죽고 싶지 않은 마음이 매일매일 속을 아프게 해. 그런데 더 무서운 게 뭔지 알아?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고 온갖 것이 나를 다 살리는 방식으로 죽인다는 거야. 나는 너희들이 걱정돼.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돈이 더 많이 들어서."  (p.73)


나는 사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떠올렸다. 물론 정지아 작가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온 사람들을 통해 아버지의 삶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소설을 완성하였던 반면, 예소연 작가는 공통분모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아빠와 딸의 관계가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을 통하여 비로소 이해하고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죽음 저편에서 바라보는 인간 개개인의 삶은 이해하지 못할 것도, 용서하지 못할 것도 없음을 넌지시 알려준다. 그리고 태수 씨가 없는 장례식장에서 태수 씨를 따르던 애완견 '유자'가 난장을 친들 뭐가 그리 대수이겠는가.


서로를 향해 새해 인사를 나누었던 게 꼭 엊그제 일 같은데 벌써 3월의 마지막주를 보내고 있다. 등산로에는 조팝나무에도, 참나무의 어린 묘목에도, 찔레나무에도 모두 연녹색의 여린 잎이 돋아나고 있다. 인근 공원의 벚나무도 꼬마전구를 밝힌 듯 환하게 꽃을 피우고 있다. 화마가 휩쓸고 간 남녘에는 죽음과 공포의 그림자가 우리의 삶을 짓누르는데 봄의 생명력이 저리 환해도 되는가. '산불 피해 모금'에 온라인 송금을 한 것으로 내 소임을 다했다고 느끼는 알량한 나의 양심이 못내 부끄러운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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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톨스토이 단편선 소담 클래식 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은연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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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고전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고전 작품이 현대 작품에 비해 무척이나 담백하구나, 하는 것이다. 담백하다는 말은 사실 좋게 표현한 것이고,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작가가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뻔히 보인다고 할까 아무튼 소설의 구성이나 표현이 너무도 솔직해서 책을 끝까지 읽지 않아도 주제나 결말을 지레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현대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 속에서 본인의 의도나 결말을 숨기기 위해 얼마나 고심하고 머리를 굴려야 할까 하는 생각에 괜스레 짠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과거에 비해 현대 소설이 발전한 것은 작가의 의도를 얼마나 꽁꽁 숨길 수 있느냐 하는 문제, 즉 작가의 숨은 의도를 들키지 않기 위한 기술을 얼마나 완벽하게 실현하느냐 하는 문제에만 집착해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것은 비단 소설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다. 사적인 대화에서도 사람들은 자신의 의도나 목적을 숨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던가.


레프 톨스토이의 단편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남을 속이는 데 온갖 기술과 편법을 동원하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이와 같은 고전은 오히려 시시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작가의 의도나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심지어 제목만으로도 그 주제를 짐작하는 데 모자람이 없다. 문체 또한 간결하고 작가의 의도를 전달하는 데 집중하는 까닭에 나와 같은 현대인들은 작가의 의도를 곱씹는 데 시간을 할애하기보다 소설의 첫 부분을 읽으면서도 저 멀리 소설의 결말 쪽으로 미리 달려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나쁜 독서 습관이 비단 나 하나의 문제일까마는 나는 몇 번이나 반성하며 톨스토이의 문장 하나하나가 주는 의미를 깨닫는 데 집중하고자 했다.


"사람은 자신의 일을 걱정하고 애씀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오직 사랑에 의해서 살아간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사랑 속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세계에 살고 있으며 하나님은 바로 그 사람 안에 계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p.51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중에서)


책에는 표제작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외에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바보 이반', '촛불', '예멜리얀과 북', '무엇 때문에' 등 우리가 익히 들어보았음 직한 7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소설의 구성이나 문체는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무척이나 간결하고 단조롭다. 복잡한 구석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조차 없다. 구전되어 내려오던 이야기를 소설로 옮긴 것도 한 이유가 될지 모른다. 가난한 구둣방 부부가 예배당 근처에서 알몸의 젊은이를 발견한 후 그와 함께 지내면서 발견한 삶의 진실과 그 젊은이는 사실 하나님에게서 벌을 받은 천사였다는 내용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책에 실린 소설의 대부분은 우리가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죄라고! 사람을 죽이는 건 물론 죄가 되지만 그놈이 인간인가? 착한 인간을 죽이는 것은 분명 죄가 되지. 그러나 그런 개만도 못한 인간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야. 인간을 위해서 미친개는 죽어야 해. 그놈을 죽이지 않으면 죄만 커질 뿐이야. 놈이 사람을 괴롭힌 생각을 하면 치가 떨린다고. 만일 이 일로 고초를 당한다 해도 사람들을 위한 일이야. 모두들 우리에게 고맙다고 할걸 우리가 당하고만 있으면 놈은 우리를 모두 죽이고 말 거야."  (P.170 '촛불' 중에서)


소설 ;촛불'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아무리 나쁜 인간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죽일 수는 없다. 심지어 계엄령을 통해 자신의 뜻에 반하는 수천 명의 사람들을 죽이려고 계획했던 독재자, 내란 수괴의 원흉조차 우리 손으로 해를 가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소설 '촛불'은 마태복음 5장 38절~39절로 시작된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고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보복하지 말라.'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평생 민중들과 함께했던 톨스토이. 물론 19세기 당시의 민중들은 선량함과 잔인함이라는 양면성을 지닌 절대다수의 농민들이었지만 톨스토이가 바랐던 것처럼 그들이 사랑, 용서, 구원을 통하여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기는 어려웠을 터, 톨스토이는 자신이 쓴 작품을 통해 그 바람을 염원하고 있을 뿐이다.


"한 번은 우리 곁을 지나갈 때 러시아인 의사가 '너무 심하게 때리지 마십시오'라고 병사들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러나 그들은 사정없이 내리쳤어요. 그가 내 곁을 두 번 지나갔을 때에는 이미 자기 발로 걷지 못하고 끌려갔습니다. 그의 등은 너무나 참혹해 차마 볼 수가 없었어요. 나는 눈을 감았습니다. 그는 결국 쓰러져 실려 나갔고 다음에 두 번째 사람이 끌려 왔어요. 그리고 세 번째 사람이, 또 네 번째 사람이 끌려왔습니다. 모두들 쓰러졌어요. 어떤 사람은 겨우 살아서 들려 나갔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그것을 서서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처형은 이른 아침에 시작되어 오후 2시까지 여섯 시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P.226 '무엇 때문에' 중에서)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으로 있는 유흥식 추기경은 "정의에는 중립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안에, 저 깊숙이 살아있는 정의와 양심의 소리를 듣는다면 더 이상 (선고를) 지체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는 말씀도 덧붙였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보다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들이, 적어도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는 더욱 잔인하며 그들의 입에서 사랑이나 용서와 같은 말은 더 이상 듣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우리는 서울의 심장부인 광화문 광장을 지날 때마다 그 사실을 눈과 귀로 확인하곤 한다. 자신의 의도나 목적을 교묘히 숨기는 기술을 끝없이 연마해 온 현대인은 자신의 말과 글에서도 그것을 숨기는 데 아무런 죄책감이 없다. 하기에 광화문에 모인 사람들 역시 입으로는 아멘을 외치면서 헌재를 파괴하고 누군가를 죽이자는 구호를 서슴없이 외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다만 타인을 속이기 위한 작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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