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에서 온 신사
안드레 애치먼 지음, 홍한별 옮김 / 비채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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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유한하다는 건 우리에게 언제나 후회와 아쉬움을 남긴다. 그런 까닭에 사는 동안 우리는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부인(또는 남편)을 배우자로 선택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을 이따금 농담 삼아 받게 된다. 물론 그와 같은 질문 속에는 지금과 같은 삶이 몇 번이고 다시 반복될 것이라는 가정이 내포되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러한 가정은 종종 소설의 주요 테마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의 한껏 부풀려진 기대를 작가는 자신의 소설 속에서 마치 사실인 양 펼쳐 보인다. 전생의 부부였거나 연인이었던 사람들이 현생에서 다시 전생의 인연을 이어가는 것은 물론 전생에 미처 하지 못했던 일들을 현생에서 원 없이 펼쳐 보임으로써 독자들은 현실에서의 제약이 무한대로 봉인해제된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이다. 도파민 뿜뿜이라고 해야 할까, 암튼 독자는 삶의 유한성에서 오는 슬픔과 아쉬움을 말끔히 날려버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바른 정렬이 일어나는 때를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삶이라는 게 그런 거니까요. 기약 없는 대기실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죽은 이들을 생각해보세요. 평생의 기다림을 지하 세계로까지 가지고 가서 다시 지상으로 나올 때까지, 다시 살면서 또 기다리게 될 때까지 계속 기다리는 이들을요. 그러니, 한 시간을 들여 후회할 일을 하는 편이, 하늘이 다시 우리 삶과 맞닿을 때까지 평생을 기다리는 쪽보다 낫지요."  (p.58~p.59)


안드레 애치먼의 소설 <페루에서 온 신사> 역시 전생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소설이다. 남부 이탈리아의 휴양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소설에서 작가는 젊음과 나이듦, 휴양지의 떠들썩한 분위기와 원주민만 아는 비밀 정원의 고요 등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킴으로써 삶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여러 욕망의 엇갈림을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통상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현생에서의 어설픈 꿈이나 간절함은 몇 세대 후의 다음 생에서나 어쩌다 이루어질 수 있는 허튼 꿈이라고 작가는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삶은 가장 완벽한 날을 망쳐버리기도 한다. 삶이 그렇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 스스로 그렇게 한다. 이제 정말로 돌이킬 수 없이 망가져버렸음을 라울은 알았다."  (p.135~p.136)


친구들과 함께 크루즈 여행을 떠난 젊은이들이 보트 고장으로 인해 해안가의 한 고급 호텔에서 머물게 된다. 이탈리아 남부의 유명 휴양지인 아말피 해안. 젊은이들은 보트가 수리되는 동안 함께 몰려다니며 수영을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수다를 떨거나 한다. 그러던 중 그들의 눈에 뜨인 한 남자가 있었다. 호텔 식당에 언제나 같은 시각에 홀로 나타나는 수수께끼의 신사 '라울'. 어느 날 우연히 말을 섞게 되었는데 젊은 사람들은 '라울'의 신비한 능력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고질병처럼 여겼던 어깨 통증이 그의 손길 한 번에 말끔히 사라지는가 하면 아무도 모르는 개인의 비밀을 알아맞히기도 하고, 일정 때문에 함께 여행을 오지 못한 친구에게 투자의 팁을 알려줌으로써 큰돈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렇게 스스럼없는 사이가 된 라울과 젊은이들. 어느 날 라울은 그들 무리 중 한 사람인 마고와 점심을 함께 하고 자신만 알고 있는 비밀의 장소를 알려주겠다며 그녀와 산책을 한다. 라울의 안내로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마고는 묘한 기시감에 빠져들게 되고, 마침내 라울과 있었던 전생의 인연을 떠올리게 되는데...


"나는 여기까지 걸어와서, 저기 나무 그늘에서 책을 읽다가 다시 걸어서 돌아가길 좋아해요. 걷다가 모래가 샌들에 들어가면 어린 시절 샌들에 모래가 들어가는 게 싫어서 맨발로 걸어 다니던 때로 돌아가는 것 같아요. 여기에 오면 내가 세상을 사랑하고, 살아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고, 심지어 나 자신도 조금은 좋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p.85)


라울이 젊은이들에게 펼쳐 보이는 마법과 같은 이야기로 인해 판타지 소설쯤으로 읽히기 시작했던 초반 분위기는 라울과 마고의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금세 분위기는 바뀌어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가 소설의 분위기를 지배한다. 전생은 물론 다음 생도 알고 있는 라울이 마고에게 하는 당부는 독자들로 하여금 심금을 울리게 한다. '우리는 삶을 바로잡으려고 돌아옵니다. 모든 삶은 불완전하기 때문이죠.(p.39)'라고 말했던 라울. 과연 우리는 이번 생의 불완전함을 바로잡기 위해 다음 생에도 돌아올 수 있을까?


모처럼 내리던 가을비는 오후가 되자 금세 그쳤다. 구름 사이로 가을 햇살이 자맥질하듯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여름 늦더위가 끝난 후에 비다운 비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듯했다. 그마저도 물론 대지를 흠뻑 적실만큼 충분한 양은 아니었지만, 등산로를 걸을 때마다 흙먼지가 풀썩풀썩 일던 모습은 당분간 볼 수 없을 듯하다. 그게 어딘가. 삶에서 순간순간 이어지는 우리의 아쉬움은 다음 생에서도 습관처럼 전해지는 것 같다. 아쉬움은 때때로 슬픔처럼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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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의 여름
루시 스티즈 지음, 노진선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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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대표하는 과학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의 주장에 의하면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All Life is Problem Solving)'라고 귀결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관계의 복잡함을 생각할 때 도무지 삶을 예측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의 속성이나 행동을 그 누구도 속속들이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의 불행은 그곳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각자의 삶에서 평생 동안 만나고 헤어지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그저 피상적으로만 알고 지낼 뿐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자기 자신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결국 사람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는 게 모든 불행의 씨앗이다.


"삶은 한 치씩 꾸역꾸역 나아갔고, 그녀는 살아 있었다. 부당하게도, 미치고 팔짝 뛰게도 그녀는 살아 있었다. 어떤 날에는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고, 어떤 날에는 차라리 자신이 죽었더라면 좋았을걸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시간은 살금살금 흘러갔고, 매 순간 주위로 새로운 삶이 펼쳐졌다."  (p.388)


영국 작가 루시 스티즈의 소설 <에티의 여름>을 읽었던 건 지난 추석 명절의 연휴 기간 동안이었다. 그닥 길지 않은 연휴였지만 오고 가는 내내 시간이 날 때마다 짬짬이 꺼내 읽곤 했다. 학계에 몸담고 있던 평범한 연구원이었던 작가가 소설이 쓰고 싶어 1년 동안만 집필에 몰두하고자 직장을 그만둔 후 12개월 만에 나온 초고가 억대의 선인세와 두 권의 출간 계약이라는 이례적인 조건으로 계약이 성사된 것도 놀랍지만 연구원에서 소설가로 전업한 지 단 1년 만에 한 편의 원고로 영국 문단의 가장 주목받는 신인이 된 것 역시 경이적인 성과라고 하겠다. 나는 소설을 읽는 동안 작가의 유려한 문체와 섬세한 묘사 그리고 잘 짜인 구성 등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책을 손에서 놓아야 하는 순간에도 머릿속에 남아 있는 소설의 잔상을 말끔히 털어내지 못하곤 했다.


"왜 시간은 거꾸로 흐를 수 없을까? 왜 이미 일어난 일을 전부 되돌릴 수 없을까? 지난 3년의 실타래를 다시 감아 새로 시작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내놓으리라. 형과 어머니를 집에 가둬두고 온갖 방법으로 둘을 해치려고 모의하는 세상에 나가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인생은 교묘한 함정을 너무 많이 감추고 있다."  (p.112)


소설은 신생 잡지사의 기자인 조지프가 유명한 은둔 화가 타르튀프로부터 달랑 "오라(Venez)"는 한 단어만 적힌 편지 한 장을 들고 그가 사는 프로방스 지역의 외딴 농가를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20년, 전설적인 화가 타르튀프는 세상과 단절한 채 그 어떤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를 돌보며 챙겨주는 유일한 사람은 조카인 에티뿐이었다. 에티는 조지프를 새 그림의 모델이라 둘러대며 집 안으로 들인다. 그렇게 세 사람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오전에는 '오렌지를 든 청년'의 실제 모델이 되어 타르튀프의 화실에서 꼼짝없이 갇혀 지내지만, 오후에는 기사를 쓰거나 책을 읽으며 소일할 수 있는 비교적 여유로운 생활이었다. 일곱 살에 엄마를 잃고 삼촌인 타르튀프의 삶을 보조하면서 외롭게 성장했던 에티와 양심적 병역 거부자로 전쟁을 겪지 않았던 조지프. 두 사람의 상처는 다른 듯 닮아 있다. 타르튀프로부터 도망쳐 사랑하는 사람과 미국행을 선택했던 에티의 엄마는 끝내 죽음이 되어 돌아왔고, 아무것도 할 줄 몰랐던 어린 에티는 스스로의 힘으로 글을 익히고, 요리를 배우고, 삼촌의 온갖 허드렛일을 도왔다. 삼촌은 에티의 완벽한 보조 덕분에 오직 그림에만 몰두할 수 있었고, 그의 그림은 비싼 가격에 팔렸다. 반면 매사에 유능했던 형 루퍼트가 자진하여 전쟁에 나갔던 반면 조지프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대에 들어가 그림을 배운다. 전쟁이 끝나고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를 안은 채 귀가한 형과 독감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엄마로 인해 정신적 충격을 받은 조지프는 미대를 그만두고 작가가 된다. 비겁한 겁쟁이라는 질타는 그의 마음에 온전한 짐으로 남는다.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자랐던 에티는 성장하면서 조금씩 엄마의 외로움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에티는 결국 전쟁이 한참이던 시기에 삼촌을 속이고 간호사로 참전한다. 그곳에서 부상당한 병사를 치료하던 중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그와의 사랑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고, 다시 삼촌 곁으로 되돌아온다.


"짓이겨진 몸뚱이를 보고도 몸서리를 치거나 숨을 헉 들이쉬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자부심의 징표였다. 그녀는 자신의 의연한 태도가 그들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절대 손이 떨리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얼굴을 찡그리거나 움찔하거나 눈앞의 광경에서 눈을 돌리지도 않았다.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인간의 삶이었다. 삶과 죽음이 떼려야 뗄 수 없이 뒤엉킨 현장이었다."  (p.364)


"아미르와 함께 언덕에 서 있던 그때, 그녀는 처음으로 엄마가 느꼈던 충동을 이해했다. 도망치고 싶은 욕망. 다시는 돌아보고 싶지 않은 욕망. 엄마가 미국에 묻혔더라면 좋았을 텐데. 죽어서까지 다시 생 오귀스트로 끌려왔다는 사실이 어딘가 서글펐다. 엄마는 끝내 생 오귀스트를 벗어나지 못했다."  (p.380)


타르튀프의 눈을 피해 서로의 아픔을 보듬고 이해하며 사랑을 키워가던 조지프와 에티. '오렌지를 든 청년'이 완성된 후에도 그곳을 떠나지 못하던 조지프는 비로소 타르튀프의 비밀과 에티의 감추어진 재능을 발견한다. 그것은 어쩌면 혼자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한 타르튀프의 비겁한 폭력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림에 대한 뛰어난 재능을 보유했음에도 여자라는 이유로 삼촌을 보조하면서 허드렛일만 강요받았던 에티였지만 그녀는 끝내 자신의 힘으로 삼촌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삼촌의 눈을 피해 아슬아슬한 사랑을 일궈가는 두 사람. 에티가 타르튀프의 그림을 불태우는 장면을 목격했지만 그 그림이 도매상에게 버젓이 인계되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던 조지프. 두 사람의 사랑과 불타버린 그림에 대한 비밀은 어떤 방식으로 밝혀질까?


가을이 깊어지면서 독서에 대한 열정도, 소소한 일상을 글로 남겨야겠다는 욕심도 시나브로 옅어지는 느낌이다. 뜨거운 열기 탓에 바깥에서의 일상이 도통 궁금하지 않았던 지난여름과는 달리 숲의 변화도, 사람들의 다채로운 표정도, 저무는 햇살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어느 것 하나 궁금하지 않은 게 없다. 어제는 시골에 가서 떨어진 알밤을 한 되쯤 주워 왔다. 밤을 삶는 일도, 껍질을 벗겨 속살을 발라내는 일도 여간 귀찮은 게 아니지만 밤을 줍기 위해 피곤한 줄 모르고 여기저기 뛰어다녔던 게 무엇보다 즐거웠다. 이렇게 밖으로만 나돌다 보면 책을 읽고 리뷰를 남길 일이 도무지 없겠다 싶었다. 읽었던 모든 책에 대해 리뷰를 남길 자신은 없지만 가슴에 남는 어떤 책은 책을 읽었다는 작은 표시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잘했어요'라는 칭찬 문구의 스탬프를 찍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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갸, 직업이 뭐이가?
표재순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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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억하는 삶의 에피소드에는 언제나 자신이 즐겨 듣던 노래나 자주 보았던 드라마, 벽에 걸려 있던 그림 한 점, 우연히 보았던 영화나 연극 등과 결부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몇몇 기억에는 그런 것들과 더불어 그 순간에 먹었던 특별했던 음식이 더해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추억의 대부분은 그 시절에 유행하던 예술의 한 토막을 실마리로 갖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컴퓨터 기억장치에 폴더의 이름을 지정하는 것과 같아서 수많은 기억 속에서 하나의 색인처럼 작동하는 것이다. 예컨대 '서울올림픽 개회식의 굴렁쇠 소년'이나 당시의 올림픽 공식 주제가였던 '손에 손잡고(Hand in Hand)'를 떠올리면 올림픽 기념우표를 손에 넣었던 친구의 뻐기는 듯한 얼굴 표정이 나도 모르게 재생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서 예술은 추억을 떠올리는 중요한 실마리 역할을 하면서 우리 삶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했던 표재순 연출가와 같은 이에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 삶을 구성하는 많은 추억의 색인표에는 그가 만든 작품명이 줄줄이 끌려 나올 테니까 말이다.


"경기장에 모인 10만 관중이 일제히 탄성을 쏟아냈다. 전 세계에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던 22억 명도 숨을 죽였다. 한쪽 모서리에서 나타난 소년이 굴렁쇠를 굴리며 경기장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렀다. 그것은 하나의 점이었다. 빨간색 챙이 달린 흰 모자를 쓰고 하얀색 반소매 상의와 반바지에 흰 양말과 신발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소년이 오른손으로 굴렁쇠를 굴리며 움직였다. 능숙한 솜씨였다. 3분의 2지점쯤 갔을까? 소년이 멈춰 섰다. 굴렁쇠를 오른쪽 어깨 위로 올린 채 관중석을 향해 왼손을 흔들었다. 박수갈채가 잠실벌을 가득 채웠다. 소년은 다시 굴렁쇠를 굴리며 성화가 타오르는 방향으로 사라졌다. 그것은 하나의 선이었다. 이 장면은 서울올림픽 개회식의 백미로 꼽힌다. 화려함도 웅장함도 기발함도 없어 보이는 굴렁쇠 굴리는 한 소년의 평범한 이 모습이 왜 그토록 수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준 걸까? 당시 나는 개회식 제작단장으로 총연출을 맡고 있었다. 모두가 감격스러워하는 열기의 현장 속에서 내 가슴은 새가슴처럼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살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p.31~p.32)


1937년 생, 구순에 가까운 원로 연출가 표재순의 자전 에세이 <갸, 직업이 뭐이가>의 서두는 이렇게 이 시대의 선명한 기억 속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으로 시작된다. 음악극, 뮤지컬, 오페라, 마당놀이 등 장르를 불문하고 자신의 열정을 불태웠던 무대 연출가였고, 서울올림픽, 한일 월드컵 등 국가적 행사를 진두지휘했던 거장이었으며, 평균 시청률 50%를 상회했던 '모래시계'를 탄생시킨 명제작자였고, 세종문화회관 초대 이사장 등을 역임한 문화행정가이기도 했던 표재순 연출가는 그 이름만으로도 우리에게 추억의 몇몇 장면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가 메가폰을 잡았던 현장들을 생생하게 회고하고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그는 대한민국 국민 전체의 기억을 관통하는 추억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책을 읽는 독자는 글에서 느끼는 감동이 아니라 자신이 불러낸 추억의 몇몇 장면을 통해 가슴 먹먹한 감동을 맛보게 된다.


"출범 5년 차였던 신생 방송사 SBS는 '모래시계'의 대박에 힘입어 KBS, MBC를 따라잡으며 전국 방송으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신영균 회장과 나 그리고 송지나 작가와 김종학 PD는 이 드라마를 정치 드라마나 시국에 편승한 그런 드라마로 만들려 했던 게 아니었다. 젊은 남녀 세 사람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드라마였다. 한 명은 깡패고, 한 명은 검사고, 이 두 친구가 좋아했던 여인이 등장하다 보니 시대 상황이 배경으로 나온 것인데, 의도치 않게 시국 드라마가 되어 버렸다. 비극과 혼돈이 공존하던 질풍노도 시기, 똑같은 시대적 상황이엇으나 한 번은 조직을 떠나야 했던 쓰라린 기억으로 한 번은 조직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 환희의 기억으로 남게 되었으니 참으로 아이로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p.266)


'제1막 무대는 항상 예측불허다', 제2막 좋은 만남이 좋은 연출을 낳는다', 제3막 드라마는 시대를 담는 그릇이다', '제4막 배우는 가도 무대는 남는다', 제5막 왕십리에서 DMZ까지, 모든 것이 무대였다'의 총 5부로 구성된 이 책은 450쪽이 넘는 두툼한 책이지만, 평생 기발한 아이디어와 참신한 구성을 기획하면서 살아온 까닭인지 책의 구성 역시 독자들로 하여금 책을 손에서 쉽게 내려놓을 수 없게 만드는 마력의 힘이 작동하고 있는 듯 느껴졌다. 명절 전후에 짬이 날 때마다 간간이 읽었음에도 너무도 빨리 읽은 듯한 느낌이 들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나는 작가의 책을 읽었던 게 아니라 작가와 함께 내 추억의 몇몇을 들춰보았는지도 모른다.


"돌아보면 내 인생에는 낭비가 참 많았던 것 같다. 'Wasted Life', 낭비된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 연극이면 연극, 뮤지컬이면 뮤지컬, 드라마면 드라마, 행사 이벤트면 행사 이벤트, 이렇게 외골수처럼 쭉 한길을 가야 하는데, 나는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다 하면서 갈지자로 걸어왔다. 여기저기 헤매고 다니다 놓친 것이 많은 바보 같은 삶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갸, 직업이 뭐이가?" 장민호 선생이 나를 두고 이렇게 물은 건 그런 까닭에서였을 것이다."  (p.449 '에필로그' 중에서)


누구에게나 100% 만족한 삶이란 있을 수 없다. 지나고 보면 아쉬움과 후회가 남게 마련이다. 그러나 후회만 말하기에는 인생은 너무 짧고, 성공만 말하기에는 인생은 한없이 덧없다. 그러므로 나는 구순의 연출가가 들려주는 그의 성공과 실패에 집중하기보다 그가 참여했던 여러 드라마나 행사의 장면들을 떠올리며 어리거나 젊었던 당시의 내가 겪었던 추억들을 회상했다. 말하자면 나는 책을 읽었던 게 아니라 나에게 얽힌 추억을 읽었던 셈이다.


일본 나고야 아시안게임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텔레비전을 통해 전달되는 중계영상을 보면서 매 순간 일희일비하는 듯 보이지만, 미래의 관점에서 지금을 본다면 그 영상 하나하나가 우리 기억의 색인표가 되어 보고픈 추억을 소환할 때 실마리로 작동할 것이다. 가을이 깊어가는 어느 날 저녁, 금메달을 목에 건 대한민국 국가대표 중 한 선수의 환한 표정이 우리들 각자가 겪었던 서로 다른 추억을 먼 훗날 마치 어제 일인 양 또다시 불러낼지도 모른다. 하나의 이벤트는, 시대를 이끌었던 하나의 예술은 우리들 각자의 추억을 소환하는 하나의 색인이 되는 것이다. 표재순 연출가의 자전적 에세이가 그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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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딸들의 미친년의 역사
이랑 지음 / 이야기장수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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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맹이는 없고 형식만 존재하는 삶이 기약도 없이 이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내 삶은 뱀의 허물이나 매미의 껍질처럼 가볍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영혼도 없이 출근을 하고, 뭘 했는지 기억도 하지 못하면서 누군가가 요구하는 일을 어떤 감정도 담지 않은 채 꾸역꾸역 하다 보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하는 심정으로 퇴근을 한다. 그런 날들이 쭉 이어진다.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왜 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의문을 가질 필요조차 없다. 어차피 시간은 물 흐르듯 흐르고 나의 가벼운 삶은 종이배처럼 떠다닐 테니까. 그리고 시간의 여울만 만나지 않는다면 내 삶의 종이배도 이따금 기우뚱거릴 수는 있어도 시간 속으로 영원히 가라앉지는 않을 테니까.


"가부장제와 남아선호사상에 물든 집안에서 태어난 우리 엄마 김경형의 '미친년 인생'은 엄마 탓이 아니다. 엄마 탓은 아니지만 엄마가 미친년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 잔혹한 굴레 속에서 나 또한 미친년으로 자라났다. 그나마 나는 내 이야기를 세상에 꺼낼 수 있는 미친년이라 다행이다. 하지만 나뿐 아니라 엄마의 미친년 역사도 무척 소중하기에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다."  (p.51)


가수이자 작가, 영상 감독으로 일하고 있는 이랑의 에세이 <엄마와 딸들의 미친년의 역사>를 읽는 독자라면 이 책의 저자가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가수 이랑과 동일인이라는 사실에 다소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방송에 노출되던 그녀가 가수로서 우쭐대거나 거들먹거린 적은 없지만 사람들에게 꽤나 특별하게 들렸던 노래 '늑대가 나타났다'를 작사, 작곡한 것은 물론 직접 노래까지 불렀던 천재 아티스트의 이면에 그처럼 아픈 성장 스토리가 있었다는 건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 폭력적인 아빠와 우울증을 앓던 엄마. 엄마의 곪은 감정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자라다가 결국 자퇴를 하고 집을 뛰쳐나가야만 했던 이랑의 성장기는 아프다 못해 가슴 답답하다.


"언니는 가족이 싫다고 10대 때 집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내가, 부럽고 미웠을까. 엄마와 아빠, 할머니와 동생을 돌보느라 정신없던 언니에게 나는 수차례 '그만두라'고 말을 했다. 언니는 그때마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가족이 필요하다'며 울었다. 언니가 필요로 했던 가족은 아마 건강한 가족이었겠지만, 우리가 가진 가족은 너무 허약했고 결핍투성이였다. 언니는 그들에게 힘을 보태느라 자기 힘을 다 소진해버렸다. 나는 언니의 죽음이 '자살'이라기보다 힘이 다 빠져 죽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p.110)


폭력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3남매. 특수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언니와 가수이자 작가인 이랑 본인과 장애를 안고 태어난 남동생 이완. 작가는 자신을 포함한 3남매를 혈연이 아닌 '피해생존자 동지'로서 사랑한다고 말한다. 명문대와 명문여대 국어국문학과를 다녔던 아빠와 엄마 덕분(?)에 집안에는 작은 도서관처럼 많은 책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고,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아빠와 심한 우울증으로 집안일에서 손을 놓다시피 했던 엄마로 인해 집은 언제나 좁고 지저분했다. 그러나 깔끔한 성격의 작가가 달아날 곳은 없었다. 엄마 옆에 앉아 책을 읽고 노래를 불렀다.


"나는 자신의 약함을 아는 인간을 좋아한다. 약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방법을 탐구하는 인간이 좋다. 살아나가는 두려움을 아는 인간이 좋다. 살아갈 방법을 무언가에 의탁하지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 생각하려는 인간이 좋다. 자신의 방법을 전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이 좋다. 더 탁월한 방법으로 말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이 좋다. 말과 글이 좋다. 말과 글을 좋아하는 인간이 좋다. 겪지 않은 이야기로 끝없이 상상할 수 있는 인간이 좋다. 나는 인간으로, 현재 존재하는 인간들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이다음을 살아갈 인간들을 상상하면서."  (p.205~p.206)


추석 연휴가 시작되었다. 길지 않은 연휴 탓인지 사람들은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 않은 채 차분한 휴일을 보내겠다고 다짐하는 분위기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과 친인척들. 가깝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말과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폭력이다. 사랑만 주기에도 이번 연휴는 그 기간이 너무나 짧은 듯하다. 추석 명절을 보내고 다시 일터로 복귀한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와 사랑의 열기가 가득했으면 좋겠다. 이랑의 노래 '잘 듣고 있어요'를 들으며 오늘 내가 읽었던 <엄마와 딸들의 미친년의 역사>를 떠올린다. 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잘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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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 쓰기
김연수 외 지음 / 물결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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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에서 '철들다'는 말은 절기, 제철을 알고 산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계절의 순환을 알고 그에 맞춰 삶을 꾸려간다는 뜻이다. 계절의 순환을 안다는 게 무에 그리 어려울까 싶지만은 '철들자 망령'이라는 우리 속담에서 보듯 사람은 죽기 직전까지 계절의 순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걸 조상들은 은연중에 넌지시 암시하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자연의 순리를 어느 정도 깨우친 듯싶은 순간이 찾아오면 우리는 이미 생을 마감할 시기가 되었다는 뜻이다. 농사를 짓던 조상들도 이럴진대 계절의 변화를 사무실이나 거실 유리창을 통하여 감지하는 나와 같은 도시내기들은 오죽할까 싶다.


그럼에도 계절의 변화를 남들보다 민감하게 느끼는 이들이 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거나, 음악을 하는 이들이 그러하다. 계절이 교차하는 그 순간의 특별한 느낌이나 감정을 예민한 감각으로 포착하지 못하면 매번 우리는 그날이 그날 같은, 변하지 않는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는 것 같은 둔감하고 탁한 느낌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른바 예술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 익숙함이란 결국 죽음과 같은 것이다.


"요새는 알 수 없다는 말을 많이 한다. 50년을 살았는데, 다음 해에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요즘처럼 많이 한 적은 없다. 그런데 그것 또한 어쩌면 자연스러운 섭리인지 모른다. 나이 든 사람은 닥쳐오는 어두운 겨울을 애써 들여다보는 대신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는 것도, 이 가을에는, 다가오는 겨울을 생각하면서 아직 어린 것들을 거두어 건사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p.41)


소설가 김연수 외 7명이 공동 집필한 <계절 쓰기>는 각각의 계절에 대해 두 명씩 나누어 씀으로써 사계절을 아우르고 있지만, 글쓴이의 구성이 모두 문학가는 아니어서 책을 읽는 독자들은 다분히 '아, 이제는 인류학자도, 식물분류학자도 계절을 사는 일에 민감해졌구나.'라는 생각에 놀랄지도 모른다. 물론 이와 같은 변화가 최근에 벌어진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우리가 과거에 알던 계절은 이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계절의 모습도, 계절이 찾아오는 시기도, 계절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모두 달라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는 멈춰 선 게 아니라 지금도 꾸준히 진행 중에 있다.


"정원의 가구에 녹이 슬고 있다. 겨울을 맞아 치워두는 것을 잊은 것이다. 나무들이 뼈대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공기에 불 냄새가 감돈다. 온갖 영혼들이 사냥감을 찾아다니고 있다. 하지만 장미들이, 아직 장미들이 있다. 습기와 한기 속에, 생명이 사라진 듯 보이는 덤불 위에 활짝 핀 장미가, 아직 있다. 저 색깔 좀 봐."  (p.118)


우리는 점점 모호해지는 계절과 계절 사이의 경계를, 두 계절 또는 세 계절이 한 계절에 중첩된 듯한 낯선 계절의 이미지를, 그리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또렷한 사계절의 변화를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난여름에 겪었던 혹독한 더위를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것이 끝이 아닐 것이라고, 어쩌면 올여름이 우리가 앞으로 마주하게 될 여름 가운데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지도 모른다고 전망한다. 화석 연료의 사용으로 인한 기후 변화는 히말라야 빙하마저 녹게 했고 네팔 대홍수와 같은 처참한 재난을 겪게 했다. 문제는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계절에 예민한 작가와 학자들로 하여금 예전과 달라진 우리의 계절에 대해 솔직한 느낌을 기술하게 한다.


"그렇게 우리의 여름은 지나가고 있습니다. 바람과 구름이 지나가듯이. 매일의 날씨가 달라지듯이.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고, 낮과 밤이 번갈아 찾아옵니다. 낮은 밤을 모르고 밤은 아침을 알지 못하지만, 여름은 그렇게 지나가고 또 돌아옵니다."  (p.24)


이웃나라 일본은 22일째 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 사이에 우리나라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내가 사는 곳을 포함하여 우리나라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았다. 연일 끈적끈적한 습도로 더 큰 더위를 느끼게 했던 여름에서 벗어나자마자 칼로 무를 자르듯 단칼에 습도를 끊어낸 느낌이다. 그렇게 이어진 건조한 날씨는 등산로의 크고 작은 물웅덩이마저 씨를 말렸고, 그 덕분인지 이맘때면 기승을 부리던 가을 모기도 올가을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샤워를 하고 선풍기를 틀지 않아도 금세 보송보송한 피부로 전환된다. 가을을 만끽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씨가 이어지고는 있지만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기상이변이 언제 시작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불안의 싹이 움트는 것은 이제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상시적인 현상으로 진화했다. 기상이변을 두려워하면서도 우리는 그 근본 원인에 대해서는 두 눈을 감고 있다. 편안함의 뒷면엔 우리의 불안으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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