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전고운 외 지음 / 유선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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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재미있는 일도 취미가 아닌 직업이 되는 순간 재미는 완전히 사라지거나 반감되게 마련이다. 심지어 웬만한 아이들이라면 쉽게 빠져드는 인터넷 게임도 취미가 아닌 업으로 변하는 순간 흥미를 잃게 된다고 한다. 그도 당연한 것이 수십, 수백억 원의 연봉을 받는 프로 선수가 자신의 책임을 망각한 채 설렁설렁 취미인 양 임한다면 그를 고용한 구단에서도 참으로 난감한 지경에 처하게 됨은 물론 자신 역시 발전된 기량을 통해 더 많은 연봉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애초에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바라볼 때 글을 쓰는 일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 보인다. 아마추어 작가일 때는 다른 무엇보다도 좋아하던 글쓰기가 시간과 돈에 의해 제한되는 업으로 변하는 순간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여겨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원고 요청을 제법 잘 거절하지만 여전히, 나를 원한다는 이유로 확신이 부족한 상태에서 시작하는 글이 있다. 또는 일이기 때문에 쓴다. 내가 쓰고 싶다는 이유로 시작하는 글을 내가 원한 대로 지키기는 늘 어렵다. 내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을 때도 있으니까."  (p.92 '이다혜' 중에서)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는 어쩌다 보니 글쓰기가 업이 된 9명의 사람들이 글쓰기에 대한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담은 가벼운 책이다. 전업 작가가 된다는 건 어쩌면 대단한 특권이자 적지 않은 노력의 결과물임은 분명할 터, 작가 지망생들이 보기에는 '배부른 소리'로 읽힐 수도 있는 쓰고 싶지 않은 마음들은 대체로 마감을 앞둔 극도의 긴장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아마추어 작가일 때는 쓰고 싶은 순간에 자신이 쓰고 싶은 주제로 원하는 분량만큼 쓸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지만 돈을 받고 쓰는 글에는 그와 같은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다. 글의 주제나 분량도, 마감 시한도 전적으로 의뢰자의 사정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토록 좋아하던 글쓰기 작업도 '의무'라는 무게에 눌려 압사 직전의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쓰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진 나의 머릿속에서 '자, 이제 준비기 되었으니 글을 써볼까?'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더 할 일이 없는 건지, 정말 지금 완벽하게 글을 쓰기 위한 상태가 된 것이 맞는 건지 지뵤하게 묻고 있다는 걸. 그리하여 마침내 생각도 못했던 다른 할 일을 '녀석'이 기어이 찾아내는 걸 보면서 나는 알았다. 그동안 나는 쓰기 위한 준비를 해왔던 게 아니라 오로지 그 일을 하지 않기 위해 피해 다니기만 했었다는 걸. 그게 두려움이나 권태든 다른 무엇 때문이든 간에 나는 이 일이 음악이 그랬던 것처럼 또 하기 싫어졌다는 걸."  (p.70 '이석원' 중에서)


프로 작가가 된 후 마감 시한에 맞춰 글을 쓰기 위한 각자의 노력이나 일상 습관은 열이면 열 서로 다 다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가 되기 위해 쏟아부었던 열정이나 노력은 글쓰기에 대한 각자의 애정만큼이나 서로 비슷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여타의 취미와는 달리 글쓰기는 타고난 재능만으로는 결코 좋아질 수 없는 취미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만 글쓰기를 잘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양한 분야의 책 읽기가 선행돼야 하며, 산책이나 명상 등 생각의 파편들을 한데 모으는 작업을 수시로 반복해야 하며,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한 결과물을 다듬고 고치는 일이 지루하다거나 지겹지 않아야 한다. 그와 같은 반복을 통해 더딘 성장을 이룰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자만이 글쓰기를 취미로 갖게 되는 것이다. 글쓰기에 투자된 시간과 노력이 항상 기꺼워야 하며, 아깝다거나 후회하는 마음이 들지 않아야 한다.


"나는 청결하고 질서 정연한 세계 속에서 평화와 안정을 느끼지만, 동시에 저항하고 싶고 그 세계를 파괴해 버리고 싶다. 나는 정치적 올바름의 가치를 중요시하지만, 내 곁에 항상 올바른 사람들만 두고 싶진 않다. 나는 엘리트주의를 혐오하는 동시에 몰개성적인 다수를 혐오한다. 금욕적인 청교도 정신을 거부하면서 카톨릭 사제를 매력적으로 여긴다. 나는 무신론자이자 기독교인이고, 남성이자 페미니스트다. 나는 발언하고 싶지만 입을 닫고 싶다. 쓰고 싶지만 쓰고 싶지 않다."  (p.241 '임대형' 중에서)


오늘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13주기 추도식이 있었던 날. 검은 상복 속에 숨어든 많은 말들이 세상의 허무 속으로 흩어진다. 대기는 알 수 없는 미래처럼 탁했고, 흘러간 세월만큼 옅어진 슬픔이 잔기침과 함께 툭툭 불거진다. 아무도 막지 못했던 십삼 년 전 오늘의 미래가 세월을 따라 켜켜이 슬픔의 과거가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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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보는 마음
김유담 지음 / 민음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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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엄마를 잃고 고아 아닌 고아가 되었던 건 지난해였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여동생까지 슬하에 3남 3녀의 많은 자식을 두었건만 병든 노모를 거두고 돌보겠다는 자식은 아무도 없었다. 팍팍한 현실이 만들어 준 이런저런 변명과 구실들이 노모를 모시지 못하는 주된 이유였지만, 요양원이라는 더없이 편리한 기관이 자식들의 불효를 모두 덮어주는 까닭에 지근거리에서 노모를 모시지 않고도 어떤 자책이나 회의감 없이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작은 아파트에서 홀로 사셨던 엄마가 재작년 어느 날 목욕탕에서 넘어져 약간의 뇌출혈 증상을 보였던 게 요양원 생활의 시작이었다. 엄마는 그렇게 감옥과도 같았던 요양원에서 2년 남짓을 보내고 돌아가셨다. 코로나 시국에 면회도 되지 않는 그 답답했던 시간을 엄마는 끝내 이겨내지 못했다.


"면회가 금지된 한 달 사이에, 대명의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졌다고 주치의가 전했다. 그는 마스크로 얼굴을 절반쯤 덮고 일남과 두어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 대명의 임종 상황을 설명했다. 한 달 만에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지난달 면회 때만 해도 아주 좋아 보이셨다고, 일남은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흔둘, 언제 어느 순간에 세상을 떠나도 이상하지 않은 연세였다."  (p.254 '특별재난지역' 중에서)


김유담 작가의 소설집 <돌보는 마음>을 읽다가 기어코 흐르는 눈물을 찍어내고야 말았다. 표제작인 '돌보는 마음'을 포함하여 열 편의 단편소설이 담긴 이 소설집은 돌봄을 근간으로 한 여성의 서사를 보여준다.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감정적 파고를 직접 겪어 보았고, 이를 통해 '돌봄 노동'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는 작가는 자신이 쓴 열 편의 짧은 소설을 매개로 독자와 소통하고 있다. '돌봄'을 소재로 다양한 직업군의 여성, 이를테면 청소년과 노년, 전업주부와 감정 노동 종사자 등 각계각층의 시선으로 돌봄의 현실과 마음을 펼쳐 보인다.


"임신을 확인한 순간부터 그녀는 아기를 독립적인 자아를 지닌 타인으로 인정하며 키우겠다고 다짐했다. 실제로 임신 기간 내내 태아는 자신과 개별적인 존재로 느껴졌다. 그녀의 의지나 생활 패턴과는 무관하게 태동하고, 무관하게 반응하는 아기의 존재를 확인할 때마다 태아와 자신이 연결되어 있다기보다는 타자를 품고 있다는 이물감이 앞섰다. 하지만 친구가 툭 던지듯 말한 인생의 성패라는 단어가 가슴 한구석에 날카롭게 박히는 순간, 자신과 아기가 서로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p.139 조리원 천국' 중에서)


<돌보는 마음>에는 김유정작가상을 수상한 『안(安)』도 수록되어 있다. 가정을 위해 헌신하는 큰엄마와 여성의 능력을 강조하는 엄마,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자란 '나'의 고민을 통해 '집 안 여자'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소설이다.  그 외에도 복직을 앞둔 워킹맘 '미연'의 베이비시터에 관한 고민을 다룬 소설 '돌보는 마음'과 젖 잘 나오는 엄마가 되기 위해 몰두하는 산후 조리원의 풍경을 담은 '조리원 천국', 코로나로 아버지의 임종마저 지키지 못하게 된 가족들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특별재난지역', 노년에 졸혼을 결심한 ‘희숙’과 노년에 결혼을 결심한 ‘명주’를 통해 결혼과 여성의 삶을 새로운 각도로 조망하는 '태풍주의보' 등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각계각층의 여성들을 통해 돌봄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나는 결혼한 지 2년 만에 공과 헤어졌고, 공의 집에서 나왔다. 처음 이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나는 편하게 살면서 호강에 겨운 줄 모른다는 소리를 들었고, 이혼 과정에서는 혼자만 편하려고 모두를 불편하게 만든 여자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p.72~p.73 '안(安)' 중에서)


'평균 수명의 연장이 우리의 삶에 과연 득일까, 실일까?' 하는 문제에 대해 곰곰 생각할 때가 있다. 불과 쉰 살을 넘기지 못했던 수백 년 전의 사람들에 비한다면 우리의 삶은 획기적으로 좋아진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단순한 수명 연장이 우리 모두를 행복한 삶으로 안내할 것이라는 기대는 애저녁에 접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환갑이 지나 백발이 성성해진 자식이 백수를 바라보는 부모를 모시는 일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거동이 불편한 부모가 자식 늙어가는 걸 하릴없이 지켜보는 건 얼마나 가슴 미어지는 일이겠는가. 차라리 젊고 건강한 자식의 배웅을 받으며 세상을 하직하는 게 백 번 행복한 일일 테다. 그러나 돌봄 노동의 부담을 오롯이 홀로 떠안고 있는 대한민국 여성들의 고된 삶과  이를 당연한 듯 여기는 대한민국 남성들의 이기적인 삶을 생각할 때, 약자를 향한 애정의 발현이라는 돌봄이 오늘날에 와서는 노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아프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나는 김유담의 소설집 <돌보는 마음>을 통해 배운다. 신은 사랑의 꼬리표에 돌봄이라는 의무를 우리들 몰래 매달아 두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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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 쓰기가 어렵다고요? - 머리가 새하얘지는 당신을 위한 21일 글쓰기 훈련법
조헌주 지음 / 설렘(SEOLREM)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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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다'와 '훌륭한 글을 쓴다'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여기에서 '훌륭한'이라는 수식어는 누군가가 쓴 글의 결과물에 대한 찬사 혹은 의례적인 덧붙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곧 글쓴이가 겪어 왔을 분투의 시간과 각고의 노력에 대한 경외 또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바라 마지않는다는 기원의 의미를 함께 담고 있다. 인간이 하는 대부분의 일이 그렇지만 글쓰기 역시 타고난 재능만으로는 읽는 이의 감동을 자아내는 훌륭한 글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숙련된 글쓰기를 위해서는 오랜 시간 각고의 노력과 포기하고픈 순간들을 여러 번 경험해야 한다. 그 지난한 과정을 통과한 자만이 비로소 타인으로부터 '훌륭한 글을 쓴다'는 찬사의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십수 년째 블로그를 유지하고 있는 나로서도 글쓰기 실력을 끌어올리는 문제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그렇다고 이 일을 업으로 하겠다는 계획도, 돈벌이로서 이 일을 택했을 때의 장점에 대해서도 일일이 따져보고 미래의 어떤 청사진을 그려본 것은 아니지만, 블로그를 찾는 몇몇 이들로부터 '글이 좋았다'거나 '잘 읽고 간다'는 인사말쯤은 듣고 싶은 게 블로그를 유지하는 나 자신의 솔직한 욕심인지라 글쓰기에 대한 여러 서적을 읽고 도움을 받아왔던 것 또한 사실이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읽었던 글쓰기 서적만도 줄잡아 대여섯 권은 넘지 싶다. 그럼에도 여전히 초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노력의 부족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블로그에 글을 쓴다는 게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지라 천성이 게으른 나로서는 영 진전이 없는 것이다.


"글을 쓰려면 무엇보다 자유롭게 쓰기가 가능해야 한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 문장을 말끔하게 다듬거나, 내용을 풍성하게 꾸미거나 하는 작업은 나중에 해도 된다. 솔직한 내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 때 글만큼이나 자신도 자유로울 수 있다. 자유롭게 글쓰기를 하고 나중에 그 글을 다시 보면 한숨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쓸 소재를 발견할 수도 있다."  (p.180)


극작을 전공하고, 수년간 방송작가로도 활동했던 조헌주의 글쓰기 서적 <첫 문장 쓰기가 어렵다고요?>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세상의 모든 글쓰기 초보들에게 개인의 열정과 실천 방안을 하나로 결합시켜주는 '글쓰기 실천서'라고 할 수 있다. 책을 읽는 독자는 어쩌면 그동안 미루고 미뤄 왔던 글쓰기 연습을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실행에 옮기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저자가 운영하는 블로그나 카페 혹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어렵게 쓴 자신의 글을 저자로부터 평가받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첫 문장 쓰기가 어렵다고요?」는 글쓰기를 하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 나를 알고 싶은 사람,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책 한 권을 완성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글쓰기 습관을 만들어서 더 행복한 인생을 산다는 초점에 맞춰 구성되어 있다. 하루 10분을 내서 쓸 수 있도록 짧은 미션을 담았다. 글을 쓰면서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제시한다. 매일 하루 10분, 21일을 꾸준히 한다면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글쓰기로 여러 도전을 할 수 있다."  (p.7 '프롤로그' 중에서)


프롤로그에 이어 총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1장 '글쓰기 습관으로 삶이 바뀐다고?', 2장 '하루 10분, 글쓰기가 쉬워진다', 3장 '21일 만에 완성하는 글쓰기 전략', 4장 '완벽한 글이 되는 처방전'이라는 소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각자의 삶에서 글쓰기가 꼭 필요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을 위한 글쓰기 처방전인 셈이다. 저자의 설명을 듣고 책에서 저자가 내준 미션을 군말 없이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글쓰기 달인'으로 변모한 자신의 모습에 놀라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나처럼 어린 시절부터 숙제라는 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켰던 사람은 예외가 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볼품없는 글 솜씨를 천연덕스럽게 내보이는 데는 하나의 이유가 있다. 나는 글을 씀으로써 어느 정도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마음의 위안을 얻곤 하기 때문이다. 고백하자면 그렇다. 블로그에 글을 쓴다는 게 삶을 바꿀 만큼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풀썩 무릎이 꺾일 정도로 좌절하거나 기운이 없을 때, 넋두리를 하듯 한참 동안 글을 휘갈겨 쓰고 나면 다시 또 살아갈 힘이 나고, 세상을 향해 나아갈 이유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멀리 있는 누군가의 고단한 삶을 생각하게도 된다. 글쓰기를 통해 나는 알지 못했던 나와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당신들을 생각할 줄 아는 품 넓은 인간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얼굴을 마주한다면 차마 하지 못했을 그런 말들을 글을 통해 용기를 내보는 것이다. 일기를 쓰듯 혹은 한 통의 편지를 쓰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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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준비는 되어 있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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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다는 건 어쩌면 마음만 분주한 상태, 혹은 마음이 어수선하여 집중할 수 없는 상태를 일컫는 말일지도 모른다. 최근 며칠이 그랬다. 나는 어느 한 곳에 진득하니 앉아 하나의 일을 마무리 짓고 이어서 해야 할 다른 일로 넘어가는 평범한 과정을 잊은 채 이 일에 조금 손을 대다가 또 다른 일에 잠깐 손을 보태고, 그러다가 갈팡질팡 목표를 잃고 헤매기를 반복하면서 성과도 없는 나날을 보냈었다. 지나고 나면 '왜 그런 멍청한 짓을 반복했을까' 하는 때 늦은 후회가 밀려오게 마련이지만 사람의 일이란 늘 '지금'보다는 지난 '과거'나 오지 않은 '미래'에 더 관심이 있는 까닭에 자신이 뭔 짓을 하는지도 모른 채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지나고 나면 곧바로 후회 모드로 돌입하면서도 개선의 여지는 보이지 않는 게 현실이다.

 

"무엇 하나 유쾌한 일이 없었다. 아무것도. 아름답지도 푸근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늘 생각나는 것은, 그 여름날의 일이다. 유난히 날씨가 좋았고, 내가 침울한 여자아이였다는 것. 정육점에서 일했던 기와무라 히로토. 보라색 립스틱. 엉뚱한 것만 믿는 열일곱 살짜리 여자애였다는 것."  (p.39 '뒤죽박죽 비스킷' 중에서)

 

후회와 그리움이 뒤섞인 평범한 삶의 한 순간을 포착하여 한 컷의 스냅사진처럼 보여주는 작가가 있다. 물론 단편소설을 쓰는 수많은 작가들 대부분이 그렇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에쿠니 가오리만큼 작가의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채 순간순간의 감정과 표정을 간결하고 건조한 문체로 표현함으로써 삶의 덧없음과 비애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작가는 드물지 않을까 싶다. 건조한 날씨가 이어지던 어느 가을날, 감기에 걸린 가족 누군가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마치 내가 좋아하는 어느 재즈 가수의 구슬픈 목소리를 닮아 있다고 느꼈던 것도 목소리에 담긴 약간의 습기마저 걷어냈을 때 우리가 느끼는 슬픔의 강도는 더욱 증가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나는 나츠키를 데리고 언젠가 파리에 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오늘처럼 추운 겨울밤, 파리에서 걸쭉하고 뜨거운 생선 수프를 먹여 주고 싶다. 바닷속 생물들의 생명 같은 맛이 나고 온갖 향신료의 맛이 섞인, 뼈까지 영양이 녹아드는 생선 수프다. 나는 그 풍요롭고 행복한 음식을 다카시가 아닌 남자에게 배웠다."  (p.190 '울 준비는 되어 있다' 중에서)

 

표제작인 '울 준비는 되어 있다'를 포함하여 12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는 소설집 <울 준비는 되어 있다>는 작가가 선별한 12컷의 스냅사진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의 얇은 책이지만 책을 읽는 독자들은 자신이 흘려보낸 수없이 많은 '보통의 순간'들을 떠올리고, 그것들이 우리 삶에서 얼마나 소중했던가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잔잔한 슬픔과 그리움 속에 한동안 휩싸인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이 애잔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그 지점이기도 하다.

 

"가령 슬픔을 통과할 때, 그 슬픔이 아무리 갑작스러운 것이라도 그 사람은 이미 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잃기 위해서는 소유가 필요하고, 적어도 거기에 분명하게 있었다는 의심 없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거기에 있었겠죠. 과거에 있었던 것과, 그 후에도 죽 있어야 하는 것들의 단편집이 되기를 바랍니다."  (p.210 '작가의 말' 중에서)

 

'자유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고독한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라고 작가는 이 책에 실린 한 단편소설에 쓰고 있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홀로 계시던 '어머니를 저세상으로 보내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었지만, 어머니를 묻고 나자 이제 자유, 란 느낌이 들었다'고 고백한다. 어쩌면 우리는 영원을 꿈꾸는 어떤 대상을 가슴에 품고 있는 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한 우리는 관계의 영속성과 영원한 사랑을 꿈꾸기 때문이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이별과 그 슬픔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게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임을 작가는 이 짧고 건조한 이야기들을 통해 주지시킨다. 그러나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게 더러 있는 법이라고 나는 작가에게 반박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 서러운 봄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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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 한 장처럼 - 오늘을 살아가는 당신을 위한 이해인 수녀의 시 편지
이해인 지음, 오리여인 그림 / 샘터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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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다. 누군들 한 번쯤 자신의 인생에서 그런 낭만적인 시절이 없을까만은 내가 유독 그렇게 말하는 까닭은 남들보다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시를 사랑하고 아꼈기 때문이다. 없는 형편임에도 다달이 시집을 사들이는 것은 물론 좋아하는 시인의 시를 밤새워 외우기도 하고, 번잡한 일상에서 낙서처럼 시를 써보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속절없는 시의 매력에 빠져들어 헤어나질 못했다. 그러는 사이 한여름의 오후처럼 한없이 무료했던 시간들이 빠르게 흘러갔고, 현실에 쌓인 산적한 일들을 보며 자책과 후회만 가득 안은 채 시의 밝음으로부터 차츰 멀어져 갔다.

 

내 삶의 끝은/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이루어질까/밤새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또 한 번 내가

살아 있는 세상!

 

 

아침이 열어준 문을 열고/사랑할 준비를 한다

죽음보다 강한/사랑의 승리자가 되어

다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용기를 구하면서

지혜를 청하면서/나는 크게 웃어본다

밝게 노래하는 새처럼/가벼워진다

 

-이해인의 시 <어느 날의 단상 1>

 

 

이해인 수녀님의 시집 <꽃잎 한 장처럼>을 기꺼운 마음으로 읽었다.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듯 읽는다면 퇴근 후 하룻밤이면 족한 분량이지만 나는 꼭꼭 곱씹듯 한 글자 한 글자 눌러가며 읽었다. 그렇게 느려진 시간의 갈피마다 시를 사랑했던 옛 시절의 추억들이 조롱조롱 되살아났다. 자신의 삶을 가감 없이 기록해 온 수녀님의 시는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향수와 그리움을 더하는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오늘 이 시간 속의

하느님과 이웃이/자연과 사물이

내게 말을 걸어오네

 

 

시로 수필로/소설로 동화로

빛나는 새 얼굴의/첫 페이지를 열며

읽어달라 재촉하네

-이해인의 시 <오늘의 행복> 중에서

 

첫 서원을 한 지 54년이자 희수라고 칭하는 만 77세를 맞았다는 수녀님은 우리가 읽는 수녀님의 시에서 만큼은 여전히 젊고 파릇파릇하다. 그러므로 시인인 수녀님의 계절은 언제나 봄이다. 이제 막 꽃을 피운 행복의 언어들이 화려하게 수놓아지고 연녹색 희망의 언어들이 시의 구석구석을 채운다.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 삶의 기쁨을 노래하기도 하고, 팬데믹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사랑과 우정을 통해 이전과 다름없는 관계를 지켜주는 소중한 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상기시켜주기도 한다. 이해인 수녀님이 일상생활을 기록하고 있는 일기 노트 가운데 2021년에 적었던 글들을 골라 실었다는 4부의 글들을 읽고 있노라면 수녀님의 투명한 마음결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듯하다.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우리 그냥

오래오래/ 고맙다는 말만 하고 살자

이 말 속에 들어 있는/ 사랑과 우정/ 평화와 기도를

시들지 않는/ 꽃으로 만들자

죽어서도 지지 않는/ 별로 뜨게 하자

사랑하는 친구야

- 이해인의 시 〈고맙다는 말〉 중에서

 

소설가 이외수 씨의 별세 소식을 들었던 오늘, 내가 좋아했던 작가들이 한 분 두 분 세상을 뜨는구나, 하는 생각에 흐린 하늘을 보며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한 세대를 살아낸다는 게 이렇듯 고되고 질긴 것임을 나는 봄비에 지는 꽃잎을 보며 깨닫는다. 시나브로 잊히는 이름들. 천상병 시인, 소설가 박경리, 법정 스님, 소설가 박완서, 소설가 이외수... 나는 그들로 인해 삶의 덧없음을 조금씩 지울 수 있었고, 봄꽃처럼 환한 미래를 꿈꿀 수 있었다. 벚꽃이 지는 계절에 이해인 수녀님의 <꽃잎 한 장처럼>을 희망처럼 꾹꾹 눌러가며 읽는 나는 왠지 모를 설움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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