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사슴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24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생에서 시간의 퍼즐이 완성되기까지 우리는 아무도 그 결과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떤 이의 운명을 함부로 예단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단순한 논리 구조로 쉽게 예측할 수 있을 만큼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도, 인간의 직선적인 사고방식으로 점칠 수 있을 만큼 분명한 방향성을 갖는 것도 아닌 까닭에 우리 삶의 결과는 때로 기적처럼 부풀려지기도 하고 농담이나 조롱처럼 무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전체로서 개개인의 삶이 비록 하찮고 무의미할지라도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그 과정은 오직 한 개인에게 귀속된 유일한 것이기에 우리는 이따금 다른 이의 입을 통해 누군가의 삶을 전해듣기도 하고, 한 권의 책 속에서 어떤 이의 삶을 발견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렇게 자신의 삶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남기를 바라며 사는 동안 다른 누군가의 삶을 끝없이 궁금해하는지도 모른다.


한강의 첫 장편소설인 <검은 사슴>은 등장하는 인물이 그리 많지 않은 반면 분량은 꽤나 길고 두꺼운 까닭에 인물 상호 간의 관계와 그에 따른 인물 개개인의 심리를 비교적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소설이다. 물론 사람의 심리라는 게 형식화된 틀 안에서 정형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가 설정한 인물 개개인의 성격이나 지나온 삶의 이력을 대입하면 소설 속 인물 개개인의 행동이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겠다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 대한 일반 독자의 리뷰에서 종종 왜?라는 의문부호를 목도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탄광 지대라는 낯선 환경이 독자들로 하여금 생경한 느낌을 불러일으킨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소설 속 중심인물인 의선의 성장 배경이 그곳이었다는 것도 독자들의 호기심을 부추겼을 테다.


"의선의 생감새는 평범했다. 조그맣고 마른 얼굴에 코와 광대뼈는 평면적이었다. 긴 외까풀 눈이 유달리 맑기는 했다. 인중이 약간 짧아 웃을 때면 입술이 유아적인 동그란 모양으로 벌어졌고, 그 안으로 오종종한 옥니가 보였다. 애써서 찾아보려 해도 남다르게 예쁜 구석이라고는 없는, 누군가 후천적인 매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식의 질문을 던진다면 그때서야 어렴풋하게 떠오를 법한 얼굴이었다. 그러니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도 아닌 내가 이따금씩 그녀를 아름답다고 느꼈던 것은 의아스러운 일이다."  (p.81)


각 인물의 복잡한 심리에 비해 소설의 얼개는 비교적 단순하다. 작은 제약회사에서 근무하던 의선이 알몸으로 거리를 내달리는 황당한 사건으로 인해 실종되자 인영과 명윤이 의선을 찾아 그녀의 고향인 황곡으로 향한다. 같은 건물에 위치한 잡지사에서 근무하는 인영은 의선이 살던 반지하방의 침수로 오갈 데 없어진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이끌었고 진심을 다해 의선을 돌봐준 인물이다. 인영의 후배이기도 한 명윤은 의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한편 의선의 고향인 황곡에서 만난 장종욱은 탄광 사진작가로서 의선과 관련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고통 속에서 성장했던, 혹은 고통과 함께 현실을 살고 있는, 그럼에도 어둠을 박차고 밝은 햇빛을 향해 나아가려고 하는 상상 속의 동물 '검은 사슴'과 닮아 있다는 점이었다.


"한 사람의 정신이 폭발했을 때 그 사건은 얼마만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일까. 더이상 의선은 병원에서 진정제를 맞을 필요가 없었다. 내장에 든 것을 모두 토한 뒤의 마르고 쓸쓸한 얼굴로 웃지도 않았다. 극도로 말을 아끼다가도 매우 이따금, 마치 오랫동안 글로 써서 다듬은 문장 같은 말들을 천천히 독백하던, 나이에 비하여 성숙해 보였던 스물다섯 살의 여자애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p.201)


한때는 번성했지만 이제는 사라져가는 탄광촌 황곡에서 의선을 찾아 헤매는 인영과 명윤의 과거가 허물을 벗듯 하나씩 드러난다. 어쩌면 의선은 인영과 명윤이 겪고 있는 어둠의 트라우마를 벗겨줄 작은 희망, 밝은 침묵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둠에서 태어나 어둠을 벗어나고자 발버둥쳤던 의선이 제풀에 지쳐 쓰러져 다시 어둠 속으로 도피하는 것을 방관한다면 잠시나마 의선과 연이 닿았던 인영과 명윤 역시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불안감이 되돌리려던 그들의 발길을 끝내 황곡에 묶어두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흑백사진에 친밀감을 갖는 것은 밤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또한 누구나 태중의 어둠 속에서 태어났으므로, 그 열 달 동안의 어둠에 대한 기억을 몸 어딘가에 저장해두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기서 몸부림치며 빛 속으로 뛰쳐나오려 했던 마지막 순간의 기억 역시 그 안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p.320)


잔뜩 흐렸던 하늘에는 조금씩 빛이 되살아나고 있다. 다행이었다. 인간의 연약함과 깊은 어둠을 탐색하는 이와 같은 소설을 읽은 날에는 빛이 들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느낌이 들곤 한다. 벗겨진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햇살이 비친다.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좌절과 고통 속에서도 아주 이따금 희망의 웃음을 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어둠에서 태어나 어둠에 익숙한 사람들의 강인한 연대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 내가 쓰러지면 다른 누군가가 즉시 나를 일으켜줄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가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살게 하는지도 모른다. 구름 사이로 드러나는 저 햇살처럼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야간열차의 유리창에 호호 입김을 불어가며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려 본 적이 있을까요. 어둠이 내려앉은 차창 밖의 먼 풍경으로부터 나의 시선을 그렇게나마 가까이 두고자 했던 어설픈 행위. 뽀얗게 변한 유리창에 엉성하게 그려진 어떤 형체는 차라리 이별의 무게 혹은 그리움의 한계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선이 멀어질수록 가슴속 빈자리도 커져가고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휑하게 뚫린 가슴을 차곡차곡 채워갈 것임을 그 시절에도 나는 잘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멀어지려는 나의 시선을 필사적으로 붙잡기 위해 성에가 낀 유리창에 형체도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리거나, 문득 떠오르는 어떤 이름 석 자를 써보거나, 흩어지는 성에를 붙잡기 위해 반복하여 입김을 불어넣기도 했던 것입니다. 삶이 지루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이미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행복한 삶을 자신만 모르는 채 살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 시절에 깨달았는지도 모릅니다.


"이십 년 만에 다시 온 침묵은 예전처럼 따스하지도, 농밀하지도, 밝지도 않다. 처음의 침묵이 출생 이전의 그것에 가까웠다면, 이번의 침묵은 마치 죽은 뒤의 것 같다. 예전에는 물속에서 어른어른한 물 밖의 세계를 바라보았다면, 이제는 딱딱한 벽과 땅을 타고 다니는 그림자가 되어 거대한 수조에 담긴 삶을 바깥에서 들여다보는 것 같다. 모든 언어가 낱낱이 들리고 읽히는데, 입술을 열어 소리를 낼 수 없다. 육체를 잃은 그림자처럼, 죽은 나무의 텅 빈 속처럼, 운석과 운석 사이의 어두운 공간처럼 차고 희박한 침묵이다."  (p.19)


한강의 소설 <희랍어 시간>을 다시 읽는 동안 나는 야간열차에서의 어두운 기억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마치 전시 포로병의 소지품을 면밀히 검색하는 군 수사관의 시선으로 보고 또 보았던 것입니다. 과거의 기억 속에 내가 미처 몰랐던 어떤 큰 비밀이라도 숨겨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한강의 <희랍어 시간> 역시 소멸해가는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남들보다 유난히 소리에 민감했던 여자는 열일곱 살 겨울 무렵 갑작스레 말을 잃고 맙니다. 그렇게 말을 잃고 살아가던 여자의 말문을 다시 틔워 준 것은 낯선 외국어였던 한 개의 불어 단어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이혼을 한 여자는 아홉 살 난 아이의 양육권마저 빼앗긴 채 다시 말을 잃고 무기력한 일상을 살아갑니다. 말을 다시 찾았던 과거의 기억에 기대어 그녀가 선택한 마지막 희망이 희랍어였습니다.


"이따금 그녀는 자신이 사람이기보다 어떤 물질이라고, 움직이는 고체이거나 액체라고 느낀다. 따뜻한 밥을 먹을 때 그녀는 자신이 밥이라고 느낀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할 때 그녀는 자신이 물이라고 느낀다. 동시에 자신이 결코 밥도 물도 아니라고, 그 어떤 존재와도 끝끝내 섞이지 않는 가혹하고 단단한 물질이라고 느낀다. 침묵의 얼음 속에서 그녀가 온 힘을 다해 건져내 들여다보는 것은 이주에 하룻밤 함께 지내는 것이 허락된 아이의 얼굴과, 연필을 쥐고 꾹꾹 눌러쓰는 죽은 희랍 단어들뿐이다."  (p.59)


여자가 듣는 희랍어 강의의 강사 역시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는 한 남자입니다. 가족들을 모두 독일에 두고 십수 년 만에 혼자 한국에 입국하여 희랍어를 가르치고 있는 남자는 앞을 볼 수 없다는 마흔을 일이 년 앞두고 있습니다. 남자는 자신의 수강생 중 말을 하지도, 웃지도 않는 여자를 지켜보면서 여자의 침묵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소설은 그렇게 목소리를 잃은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의 과거가 교차하면서 두 사람의 삶을 응시합니다.


"심장과 심장을 맞댄 채, 여전히 그는 그녀를 모른다. 오래전 아이였을 때, 자신이 이 세계에 존재해도 되는지 알 수 없어 어스름이 내리는 마당을 내다보았던 것을 모른다. 바늘처럼 맨몸을 찌르던 말言들의 갑옷을 모른다. 그녀의 눈에 그의 눈이 비쳐 있고, 그 비친 눈에 그녀의 눈이, 그 눈에 다시 그의 눈이...... 그렇게 끝없이 비치고 있는 것을 모른다. 그것이 두려워, 이미 핏발이 맺힌 그녀의 입술이 굳게 악물려 있는 것을 모른다."  (p.183)


우리가 잃어가는 게 비단 말語과 시력뿐이겠습니까. 다소의 시차는 존재하겠지만 언젠가 소멸하게 될 한시적인 현상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영원히 존재하는 궁극적인 그 무엇에 새길, 혹은 영원에 약조하고픈 하나의 징표로 남길 만한 어떤 의미를 찾기 위해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모두 소진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사랑이 됐든 연민이 됐든 말입니다. 작가는 우리 모두가 한시적인 현상계에 사는 여리디여린 존재임을 소설을 통해 일깨우고 있습니다. 야간열차의 유리창에 아주 잠깐 남아 있었던 나의 입김처럼 우리 모두는 기억하기도 어려운 찰나의 순간을 살다 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를 뺀 세상의 전부 - 김소연 산문집
김소연 지음 / 마음의숲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은 왜 이야기를 좋아할까? 하는 문제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한 편의 논문을 쓸 정도로 관련 자료를 훑어보고 나름의 결론을 도출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저 문득 이것이 궁금했을 뿐이다. 어느 시인에 따르면 '우리는 이야기를 매개로 지각을 펼치고 세상을 탐지한다. 이야기는 인간 사회를 결속시키며, 생물학적 생존 이익에 기여한다. 이야기는 인간을 인간으로 빚는 강력한 요소다. 그것이 우리가 이야기를 지어내고 퍼뜨리는 호모 픽투스(Homo fictus), 즉 이야기하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유다.'라고 설명한다. 또 어떤 이는 '인간이 영웅 이야기를 좋아하는 건, 그것이 우리 삶의 인식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김영하 작가 역시 그의 소설 <작별 인사>에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서사를 끊임없이 생각한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인간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건 근본적으로 호기심이 많은 인간의 본능 때문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본능이 인간 삶의 유한성과 결합하여 그 궁금증을 증폭시켰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유한한 삶에서는 결코 체험하지 못할 수없이 많은 다른 인생과 그 결과에 대한 궁금증은 다른 어떤 대상보다 더 강한 유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나에게 죽음이라는 장애물이 없었더라면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다른 인생이 내가 살아볼 수 없다는 이유로, 이번 생에서는 결코 체험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에 대한 호기심은 두 배 세 배 증폭되는 것이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법이니까.


"독자는 소설을 읽는다는 자의식을 놓고, 그냥 그 세계에 들어가 잠시 동안 무언가가 들어왔다가 빠져나간 인물이 된다. 잠에서 깨어난 듯 책을 덮고 났을 때에 나를 둘러싼 방 한 칸이 낯설어질 만큼 그 세계에서 살다 나온다. 이런 종류의 낯섦을 처음 경험했던 어린 시절의 그날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p.176)


김소연 시인의 산문집 <나를 뺀 세상의 전부>는 비교적 편안하게 읽히는 책이다. 현학적이거나 작가 개인만 알 듯한 특이한 체험을 기록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직장 동료나 학교 선후배를 통해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이야기 혹은 나의 삶에서도 있었던 유사한 경험을 통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산문집 전반에 흩어져 있다. 시인은 으레 사물이나 사람을 대함에 있어 극도로 예민하고 까탈스럽다는 편견은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쉽게 깨트릴 수 있다. 애초부터 그런 편견은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람도 많을 테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누군가의 주장을 듣고 있을 때보다 누군가의 하루를 지켜보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게 될 때에 더 크게 설득되고 더 큰 경이감이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나도, 되도록 생각한 바와 주장하는 바를 글로 쓰지 않고, 다만 내가 직접 만났거나 직접 겪었던 일들만을 글로 써보고 싶어졌다. 나를 뺀 세상의 전부, 내가 만난 모든 접촉면이 내가 받은 영향이며, 나의 입장이자 나의 사유라는 걸 믿어보기로 했다."  (p.10 '책머리에' 중에서)


'겨울 이야기, 봄 이야기, 여름 이야기, 가을 이야기, 다시 겨울 이야기'로 구성된 이 책은 시인의 일상 역시 독자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 책을 쓴 시인 역시 자신의 삶이 자신을 제외한 다른 누군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시인의 특별하지 않은 일상을 책으로 읽는 까닭은 그 속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고자 함도 아니요, 무료한 일상을 독서로 때우고자 함도 아니다. 서로 다른 이야기와 서사를 창조하는, 이야기 창조자로서의 동지 의식 혹은 같은 처지의 인간으로서 느끼는 동질감을 체감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책을 읽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12월이 다가온다. 다가온다고 적으니 벌써부터 긴장이 감돈다. 물론 가장 아무것도 아닌 12월이 될 것이다. 가장 아무것도 아닌 선물을 또 누군가에게 줄 것이고 받을 것이다. 가장 시시한 일을 하며 가장 시시하게 지낼 것을 알면서도 해마다 12월은 무작정 설렌다. 왜 그런가를 따져보고 싶지는 않다. 다만, 가장 시시함에도 가장 설렐 수 있다는 것은 무조건 축복이고 무조건 내게는 기적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p.250)


우리는 비단 우러러보거나 존경할 만한 사람의 특별한 일상만 궁금해하거나 관심을 두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아닌 다른 어떤 이의 일상도 궁금하여 때로는 호기심이 동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별것 아닌 각자의 일상도 소중히 다루어져야 한다. 다른 누군가가 궁금해하는 소중한 서사이기 때문이다. 결코 허투루 다룰 수 없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온실 수리 보고서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리던 눈은 이제 비로 변하였다. 봄이나 여름과 다르게 겨울에 비를 맞고 서 있는 나무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숙연한 느낌이 들게 한다. 겨울이라고 해서 살아 있는 생명체인 나무가 물을 필요로 하지 않을 리 없겠지만 추위 속에 종일 비를 맞고 있는 모습은 처연하다 못해 숙연한 느낌마저 들게 하는 것이다. 물론 그와 같은 생각은 전적으로 나의 주관적인 느낌일 뿐 당사자인 나무는 나와 전혀 다른 느낌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돌아보면 항상 어떤 장소를 지워버림으로써 삶을 견뎌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잊어야겠다 싶은 장소들은 아예 발길을 끊어서 최대한 망각할 수 있게 노력해왔지만 이 일을 맡으면 그곳에 대해 생각하고 더 알게 될 것이었다. 거기에는 일년 남짓의 내 임시 일자리가 있었고 600년 전에 건축된 고궁이 있었고 잊지 않으면 살 수가 없겠구나 싶어 망각을 결심한 낙원하숙이 있었다."  (p.17)


소설가 김금희의 전작을 모두 읽어 본 것은 아니지만 최근에 나온 신작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작가의 이전 작품들과 비교하여 크게 달라져 있음을 느꼈다. <경애의 마음>에 비해 작품의 스케일이나 구조가 대폭 확대된 것은 사실이지만 주제의 전달력이나 작품의 밀도는 전에 비해 떨어진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결과는 곧 독자의 집중력이 흐트러지게 하고 때때로 지루함을 느끼게 하는 상황으로 이어지도록 한다. 말하자면 가독력이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한 셈이다. 자신의 작품에 있어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러한 변화를 시도하는 첫 단계는 그리 녹록지 않은 것이다.


작품은 대온실 보수공사를 맡은 바위 건축사사무소에서 문화재 공사 백서 기록담당자 채용을 위한 면접을 보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석모도에서 나고 자란 주인공 영두는 단짝 친구인 은혜의 도움으로 면접에 응하게 된 것인데, 공사 현장인 창경궁의 대온실은 영두의 아픈 기억이 서린 원서동의 낙원하숙과 가까운 곳이어서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아빠와 단둘이 살던 영두는 아빠의 주선으로 2003년, 중학생 시절 섬을 떠나 창덕궁 담을 마주 보는 동네인 원서동으로 떠나게 된다. 당시 석모도에는 고등학교가 없었던 까닭에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려면 섬을 떠나야만 했는데 원서동에서 낙원하숙을 하던 문자 할머니의 권유로 그보다 좀 이른 나이에 섬을 떠나게 된 것이었다. 영두는 문자 할머니의 손녀로 알려진 동갑내기 '리사'와 같은 방을 쓰면서 같은 학교를 오가게 된다. 그러나 명랑하고 순박한 성격의 영두와 매사 까칠하고 맹랑한 성격의 '리사'는 처음부터 어울리기 힘든 조합이었다.


"헤어진다는 상상만으로도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나약함을 감추는 건 내 마음과 몸에 습관처럼 배어 있었다. 순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최종의 마음까지는 내보이지 않았다. 그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방법을 몰랐던 데 가까운 것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그런 것이 너무 어려웠다. 슬프면 슬프다고, 상처가 있으면 상처가 있다고, 떠날까봐 두려우면 두렵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p.195)


영두는 결국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원서동을 떠났었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쓰게 되면서 영두는 다시는 들춰내고 싶지 않았던 낙원하숙에서의 시간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마리코였던 문자 할머니가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겪어야만 했던 아픈 역사와도 대면한다. 그와 같은 아픔은 중2 소녀가 겪었던 지난 상처와 겹치면서 또 다른 길로 영두를 안내한다. 대대적인 수리를 거쳐 재개장을 앞둔 대온실과 이제는 모두 떠나고 집의 형체와 추억만 덩그러니 남은 낙원하숙은 그 추억을 아름답게 지키려는 사람과 어떻게든 그 모든 것을 지워버리려는 사람의 충돌로 이어진다.


"산아는 왜 옛날이야기들은 이렇게 슬프게 끝나는지 모르겠다고, 역사책 읽을 때마다 해피엔드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너무 옳은 말이라서 또다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역사가 슬픈 건 죽은 이들 때문일 수도 있고, 늘 미완으로 남는 소망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p.267)


낮에 잠깐 비로 변했던 눈은 밤이 되자 다시 찬바람과 함께 진눈깨비가 되어 내린다. 싸락싸락 소리를 내며 우산에 엉겨 붙는 진눈깨비. 어제부터 내린 눈은 117년 만의 기록적인 11월 폭설이라는데 누군가의 억울한 이야기도 이와 같지 않을까. 구름을 따라 이곳저곳 유령처럼 떠돌다가 누군가의 슬픈 추억과 함께 실타래처럼 풀려나오는 게 아닐까.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그렇게 읽혔다. 눈이 많이 내려 '대설(大雪)주의보'가 아니라 이야기가 많이 풀려나와 '대설(大說)주의보',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 - 한정원의 8월 시의적절 8
한정원 지음 / 난다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계절은 이제 겨울을 향해 잰걸음으로 달려가고 있는 듯합니다. 제법 낮아진 아침 기온이 오슬오슬 추위를 느끼게 하지만 아직은 여리고 부드러운 추위입니다. 귀가 떨어져 나갈 듯한 날카롭고 매서운 추위가 닥치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리겠지요. 어제는 시골에 사는 지인의 집을 방문했었습니다. 십여 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마을을 가로질러 작은 하천이 흐르고 하천을 따라 올라가면 산 어귀의 제일 끝집이 지인의 집이었습니다. 방 안에는 화목난로가 구석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고, 방 한가운데 놓인 좌탁 위에는 지인의 것인 듯한 약이 한 보따리 놓여 있었습니다. 병명은 알 수 없었지만 신경외과에서 처방을 받은 색색깔의 알약들이 1회분으로 나뉜 투명한 봉지 안에 한 움큼씩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건강하던 지인도 이제는 약에 의존하여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짠해졌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이러이러한 불행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은 불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어렵게 구축한 삶의 보호막은 예리한 시간의 칼끝에 의해 너무도 쉽게 뚫려버리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러이러한 행복은 나에게 절대 일어날 리가 없다는 가정도 무용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는 동안 우리는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행복한 장면들을 깜짝선물처럼 받으며 삶의 시름을 잊어왔기 때문입니다. 언제 있었던 일인지 기억은 희미하지만 지인과 있었던 작은 에피소드가 떠오릅니다. 평소 담배를 피우지 않던 지인이 한 잔의 술을 앞에 놓은 채 심각한 얼굴로 내게 담배를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떨결에 나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지인에게 건넸고, 지인은 어색하지 않은 모습으로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토해냈습니다. 놀란 얼굴을 하며 내가 "참, 의외네요." 하자, "의외라니? 우리의 삶은 모든 게 의외야. 의외가 아니라거나 자신이 예측한 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믿는 인간이 오만한 거지."라고 말하던 지인의 얼굴이 엊그제 일처럼 지금도 생생합니다.


"여름에는 정말 미심쩍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게 아닐까. 중지되고 정체되는 감각. 여름을 제일로 사랑했다면 다르게 느꼈을지도, 하지만 여름은 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이다. 세 번을 거쳐온 마음은 미약하다. 그래도 싫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 한껏 사랑할 수 없다면 조금 사랑하면 되지."  (p.42)


손에 들고 갔던 한정원의 에세이집 <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을 지인이 타 준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다 읽었습니다. 밖으로부터 느지막한 오후 햇살이 창을 통해 스며들었고,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야 겨우 들릴 듯한 거칠지 않은 바람소리가 자장가처럼 퍼졌습니다. 순식간에 불붙은 계절의 변화처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온통 '의외'로 가득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인의 얼굴이 문득 떠오른 것도, 아무런 준비도 없이 훌쩍 떠나온 것도 미처 예견하지 못한 '의외'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일은 대개 저지대에서 속절없이 일어난다. 슬픔은 단연코 저지대로 모여드는 것이다. 내가 거기 있지 않다고 해서 다행일 수 없다. 거기와 여기는 하나의 세계이다. 거기가 슬픔에 잠겨 있는데 어떻게 여기가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이 계절에는 빗물과 눈물의 총량이 앞을 다툰다."  (p.79)


책에서 나는 작가가 선별한 사진과 시와 산문을 두서없이 읽거나 그 형상과 함께 떠오르는 생각을 골똘히 부여잡으면서 지인도 의식하지 못한 채 한나절을 보낸 듯합니다. 밖으로 나와 잠시 서성였습니다. 햇살이 모여드는 산자락엔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까닥까닥 머리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해거름녘의 시골은 덥혀졌던 지면이 금세 식었고, 부드럽던 바람결마저 거칠어졌습니다. 저녁을 먹고 가라는 지인의 권유를 정중히 뿌리치며 귀가를 서둘렀지만, 어둠은 이미 좁디좁은 시골 도로를 가득 뒤덮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한다. 곧 멀리 떠나야 할 사람. 둘은 마주앉아 바라보고 바라본다. 마지막 밤이 서로의 윤곽을 서서히 뭉갤 때까지, 다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영영 만나지 못할지도. 순식간에 그늘이 심장을 거쳐 발바닥까지 떨어진다. 발밑에 흥건한 어둠. 빛이 필요해, 한 사람이 초를 밝힌다. 어둠이 흔들린다. 밤이 흔들린다. 둘의 그림자가 흰 벽 위에서 흔들린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의 그림자를 어루만진다. 붙잡았으면, 붙잡혔으면, 그림자라도. 한 사람이 붓을 들어 그림자의 윤곽을 따라 긋는다. 선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한 사람이 완성된다. 언젠가 한 사람이 떠나고 또 한 사람이 떠나도, 뜨지 못하는 영혼처럼 테두리는 남는다."  (P.8 '작가의 말' 중에서)


어둠을 몰아내는 전조등 불빛을 따라 지인의 얼굴이 그려집니다. 세월에 닳고 닳은 탁한 음성도 함께입니다. "우리의 삶은 모든 게 의외야." 나는 반박할 수 없는 어떤 명제 앞에서 처참히 무너집니다. 핸들을 잡은 팔에 나도 모르게 기운이 빠지고, 켜켜이 쌓인 어둠이 못내 부담스러운 밤이었습니다. 어쩌면 한정원 작가의 8월도 그와 같은 '의외'로 가득했는지도 모릅니다. 예정에도 없었던 지인의 시골집을 무작정 방문했던 것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