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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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열차의 유리창에 호호 입김을 불어가며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려 본 적이 있을까요. 어둠이 내려앉은 차창 밖의 먼 풍경으로부터 나의 시선을 그렇게나마 가까이 두고자 했던 어설픈 행위. 뽀얗게 변한 유리창에 엉성하게 그려진 어떤 형체는 차라리 이별의 무게 혹은 그리움의 한계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선이 멀어질수록 가슴속 빈자리도 커져가고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휑하게 뚫린 가슴을 차곡차곡 채워갈 것임을 그 시절에도 나는 잘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멀어지려는 나의 시선을 필사적으로 붙잡기 위해 성에가 낀 유리창에 형체도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리거나, 문득 떠오르는 어떤 이름 석 자를 써보거나, 흩어지는 성에를 붙잡기 위해 반복하여 입김을 불어넣기도 했던 것입니다. 삶이 지루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이미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행복한 삶을 자신만 모르는 채 살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 시절에 깨달았는지도 모릅니다.


"이십 년 만에 다시 온 침묵은 예전처럼 따스하지도, 농밀하지도, 밝지도 않다. 처음의 침묵이 출생 이전의 그것에 가까웠다면, 이번의 침묵은 마치 죽은 뒤의 것 같다. 예전에는 물속에서 어른어른한 물 밖의 세계를 바라보았다면, 이제는 딱딱한 벽과 땅을 타고 다니는 그림자가 되어 거대한 수조에 담긴 삶을 바깥에서 들여다보는 것 같다. 모든 언어가 낱낱이 들리고 읽히는데, 입술을 열어 소리를 낼 수 없다. 육체를 잃은 그림자처럼, 죽은 나무의 텅 빈 속처럼, 운석과 운석 사이의 어두운 공간처럼 차고 희박한 침묵이다."  (p.19)


한강의 소설 <희랍어 시간>을 다시 읽는 동안 나는 야간열차에서의 어두운 기억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마치 전시 포로병의 소지품을 면밀히 검색하는 군 수사관의 시선으로 보고 또 보았던 것입니다. 과거의 기억 속에 내가 미처 몰랐던 어떤 큰 비밀이라도 숨겨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한강의 <희랍어 시간> 역시 소멸해가는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남들보다 유난히 소리에 민감했던 여자는 열일곱 살 겨울 무렵 갑작스레 말을 잃고 맙니다. 그렇게 말을 잃고 살아가던 여자의 말문을 다시 틔워 준 것은 낯선 외국어였던 한 개의 불어 단어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이혼을 한 여자는 아홉 살 난 아이의 양육권마저 빼앗긴 채 다시 말을 잃고 무기력한 일상을 살아갑니다. 말을 다시 찾았던 과거의 기억에 기대어 그녀가 선택한 마지막 희망이 희랍어였습니다.


"이따금 그녀는 자신이 사람이기보다 어떤 물질이라고, 움직이는 고체이거나 액체라고 느낀다. 따뜻한 밥을 먹을 때 그녀는 자신이 밥이라고 느낀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할 때 그녀는 자신이 물이라고 느낀다. 동시에 자신이 결코 밥도 물도 아니라고, 그 어떤 존재와도 끝끝내 섞이지 않는 가혹하고 단단한 물질이라고 느낀다. 침묵의 얼음 속에서 그녀가 온 힘을 다해 건져내 들여다보는 것은 이주에 하룻밤 함께 지내는 것이 허락된 아이의 얼굴과, 연필을 쥐고 꾹꾹 눌러쓰는 죽은 희랍 단어들뿐이다."  (p.59)


여자가 듣는 희랍어 강의의 강사 역시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는 한 남자입니다. 가족들을 모두 독일에 두고 십수 년 만에 혼자 한국에 입국하여 희랍어를 가르치고 있는 남자는 앞을 볼 수 없다는 마흔을 일이 년 앞두고 있습니다. 남자는 자신의 수강생 중 말을 하지도, 웃지도 않는 여자를 지켜보면서 여자의 침묵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소설은 그렇게 목소리를 잃은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의 과거가 교차하면서 두 사람의 삶을 응시합니다.


"심장과 심장을 맞댄 채, 여전히 그는 그녀를 모른다. 오래전 아이였을 때, 자신이 이 세계에 존재해도 되는지 알 수 없어 어스름이 내리는 마당을 내다보았던 것을 모른다. 바늘처럼 맨몸을 찌르던 말言들의 갑옷을 모른다. 그녀의 눈에 그의 눈이 비쳐 있고, 그 비친 눈에 그녀의 눈이, 그 눈에 다시 그의 눈이...... 그렇게 끝없이 비치고 있는 것을 모른다. 그것이 두려워, 이미 핏발이 맺힌 그녀의 입술이 굳게 악물려 있는 것을 모른다."  (p.183)


우리가 잃어가는 게 비단 말語과 시력뿐이겠습니까. 다소의 시차는 존재하겠지만 언젠가 소멸하게 될 한시적인 현상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영원히 존재하는 궁극적인 그 무엇에 새길, 혹은 영원에 약조하고픈 하나의 징표로 남길 만한 어떤 의미를 찾기 위해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모두 소진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사랑이 됐든 연민이 됐든 말입니다. 작가는 우리 모두가 한시적인 현상계에 사는 여리디여린 존재임을 소설을 통해 일깨우고 있습니다. 야간열차의 유리창에 아주 잠깐 남아 있었던 나의 입김처럼 우리 모두는 기억하기도 어려운 찰나의 순간을 살다 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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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뺀 세상의 전부 - 김소연 산문집
김소연 지음 / 마음의숲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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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이야기를 좋아할까? 하는 문제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한 편의 논문을 쓸 정도로 관련 자료를 훑어보고 나름의 결론을 도출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저 문득 이것이 궁금했을 뿐이다. 어느 시인에 따르면 '우리는 이야기를 매개로 지각을 펼치고 세상을 탐지한다. 이야기는 인간 사회를 결속시키며, 생물학적 생존 이익에 기여한다. 이야기는 인간을 인간으로 빚는 강력한 요소다. 그것이 우리가 이야기를 지어내고 퍼뜨리는 호모 픽투스(Homo fictus), 즉 이야기하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유다.'라고 설명한다. 또 어떤 이는 '인간이 영웅 이야기를 좋아하는 건, 그것이 우리 삶의 인식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김영하 작가 역시 그의 소설 <작별 인사>에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서사를 끊임없이 생각한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인간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건 근본적으로 호기심이 많은 인간의 본능 때문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본능이 인간 삶의 유한성과 결합하여 그 궁금증을 증폭시켰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유한한 삶에서는 결코 체험하지 못할 수없이 많은 다른 인생과 그 결과에 대한 궁금증은 다른 어떤 대상보다 더 강한 유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나에게 죽음이라는 장애물이 없었더라면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다른 인생이 내가 살아볼 수 없다는 이유로, 이번 생에서는 결코 체험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에 대한 호기심은 두 배 세 배 증폭되는 것이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법이니까.


"독자는 소설을 읽는다는 자의식을 놓고, 그냥 그 세계에 들어가 잠시 동안 무언가가 들어왔다가 빠져나간 인물이 된다. 잠에서 깨어난 듯 책을 덮고 났을 때에 나를 둘러싼 방 한 칸이 낯설어질 만큼 그 세계에서 살다 나온다. 이런 종류의 낯섦을 처음 경험했던 어린 시절의 그날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p.176)


김소연 시인의 산문집 <나를 뺀 세상의 전부>는 비교적 편안하게 읽히는 책이다. 현학적이거나 작가 개인만 알 듯한 특이한 체험을 기록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직장 동료나 학교 선후배를 통해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이야기 혹은 나의 삶에서도 있었던 유사한 경험을 통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산문집 전반에 흩어져 있다. 시인은 으레 사물이나 사람을 대함에 있어 극도로 예민하고 까탈스럽다는 편견은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쉽게 깨트릴 수 있다. 애초부터 그런 편견은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람도 많을 테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누군가의 주장을 듣고 있을 때보다 누군가의 하루를 지켜보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게 될 때에 더 크게 설득되고 더 큰 경이감이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나도, 되도록 생각한 바와 주장하는 바를 글로 쓰지 않고, 다만 내가 직접 만났거나 직접 겪었던 일들만을 글로 써보고 싶어졌다. 나를 뺀 세상의 전부, 내가 만난 모든 접촉면이 내가 받은 영향이며, 나의 입장이자 나의 사유라는 걸 믿어보기로 했다."  (p.10 '책머리에' 중에서)


'겨울 이야기, 봄 이야기, 여름 이야기, 가을 이야기, 다시 겨울 이야기'로 구성된 이 책은 시인의 일상 역시 독자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 책을 쓴 시인 역시 자신의 삶이 자신을 제외한 다른 누군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시인의 특별하지 않은 일상을 책으로 읽는 까닭은 그 속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고자 함도 아니요, 무료한 일상을 독서로 때우고자 함도 아니다. 서로 다른 이야기와 서사를 창조하는, 이야기 창조자로서의 동지 의식 혹은 같은 처지의 인간으로서 느끼는 동질감을 체감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책을 읽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12월이 다가온다. 다가온다고 적으니 벌써부터 긴장이 감돈다. 물론 가장 아무것도 아닌 12월이 될 것이다. 가장 아무것도 아닌 선물을 또 누군가에게 줄 것이고 받을 것이다. 가장 시시한 일을 하며 가장 시시하게 지낼 것을 알면서도 해마다 12월은 무작정 설렌다. 왜 그런가를 따져보고 싶지는 않다. 다만, 가장 시시함에도 가장 설렐 수 있다는 것은 무조건 축복이고 무조건 내게는 기적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p.250)


우리는 비단 우러러보거나 존경할 만한 사람의 특별한 일상만 궁금해하거나 관심을 두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아닌 다른 어떤 이의 일상도 궁금하여 때로는 호기심이 동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별것 아닌 각자의 일상도 소중히 다루어져야 한다. 다른 누군가가 궁금해하는 소중한 서사이기 때문이다. 결코 허투루 다룰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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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온실 수리 보고서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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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던 눈은 이제 비로 변하였다. 봄이나 여름과 다르게 겨울에 비를 맞고 서 있는 나무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숙연한 느낌이 들게 한다. 겨울이라고 해서 살아 있는 생명체인 나무가 물을 필요로 하지 않을 리 없겠지만 추위 속에 종일 비를 맞고 있는 모습은 처연하다 못해 숙연한 느낌마저 들게 하는 것이다. 물론 그와 같은 생각은 전적으로 나의 주관적인 느낌일 뿐 당사자인 나무는 나와 전혀 다른 느낌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돌아보면 항상 어떤 장소를 지워버림으로써 삶을 견뎌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잊어야겠다 싶은 장소들은 아예 발길을 끊어서 최대한 망각할 수 있게 노력해왔지만 이 일을 맡으면 그곳에 대해 생각하고 더 알게 될 것이었다. 거기에는 일년 남짓의 내 임시 일자리가 있었고 600년 전에 건축된 고궁이 있었고 잊지 않으면 살 수가 없겠구나 싶어 망각을 결심한 낙원하숙이 있었다."  (p.17)


소설가 김금희의 전작을 모두 읽어 본 것은 아니지만 최근에 나온 신작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작가의 이전 작품들과 비교하여 크게 달라져 있음을 느꼈다. <경애의 마음>에 비해 작품의 스케일이나 구조가 대폭 확대된 것은 사실이지만 주제의 전달력이나 작품의 밀도는 전에 비해 떨어진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결과는 곧 독자의 집중력이 흐트러지게 하고 때때로 지루함을 느끼게 하는 상황으로 이어지도록 한다. 말하자면 가독력이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한 셈이다. 자신의 작품에 있어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러한 변화를 시도하는 첫 단계는 그리 녹록지 않은 것이다.


작품은 대온실 보수공사를 맡은 바위 건축사사무소에서 문화재 공사 백서 기록담당자 채용을 위한 면접을 보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석모도에서 나고 자란 주인공 영두는 단짝 친구인 은혜의 도움으로 면접에 응하게 된 것인데, 공사 현장인 창경궁의 대온실은 영두의 아픈 기억이 서린 원서동의 낙원하숙과 가까운 곳이어서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아빠와 단둘이 살던 영두는 아빠의 주선으로 2003년, 중학생 시절 섬을 떠나 창덕궁 담을 마주 보는 동네인 원서동으로 떠나게 된다. 당시 석모도에는 고등학교가 없었던 까닭에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려면 섬을 떠나야만 했는데 원서동에서 낙원하숙을 하던 문자 할머니의 권유로 그보다 좀 이른 나이에 섬을 떠나게 된 것이었다. 영두는 문자 할머니의 손녀로 알려진 동갑내기 '리사'와 같은 방을 쓰면서 같은 학교를 오가게 된다. 그러나 명랑하고 순박한 성격의 영두와 매사 까칠하고 맹랑한 성격의 '리사'는 처음부터 어울리기 힘든 조합이었다.


"헤어진다는 상상만으로도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나약함을 감추는 건 내 마음과 몸에 습관처럼 배어 있었다. 순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최종의 마음까지는 내보이지 않았다. 그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방법을 몰랐던 데 가까운 것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그런 것이 너무 어려웠다. 슬프면 슬프다고, 상처가 있으면 상처가 있다고, 떠날까봐 두려우면 두렵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p.195)


영두는 결국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원서동을 떠났었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쓰게 되면서 영두는 다시는 들춰내고 싶지 않았던 낙원하숙에서의 시간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마리코였던 문자 할머니가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겪어야만 했던 아픈 역사와도 대면한다. 그와 같은 아픔은 중2 소녀가 겪었던 지난 상처와 겹치면서 또 다른 길로 영두를 안내한다. 대대적인 수리를 거쳐 재개장을 앞둔 대온실과 이제는 모두 떠나고 집의 형체와 추억만 덩그러니 남은 낙원하숙은 그 추억을 아름답게 지키려는 사람과 어떻게든 그 모든 것을 지워버리려는 사람의 충돌로 이어진다.


"산아는 왜 옛날이야기들은 이렇게 슬프게 끝나는지 모르겠다고, 역사책 읽을 때마다 해피엔드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너무 옳은 말이라서 또다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역사가 슬픈 건 죽은 이들 때문일 수도 있고, 늘 미완으로 남는 소망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p.267)


낮에 잠깐 비로 변했던 눈은 밤이 되자 다시 찬바람과 함께 진눈깨비가 되어 내린다. 싸락싸락 소리를 내며 우산에 엉겨 붙는 진눈깨비. 어제부터 내린 눈은 117년 만의 기록적인 11월 폭설이라는데 누군가의 억울한 이야기도 이와 같지 않을까. 구름을 따라 이곳저곳 유령처럼 떠돌다가 누군가의 슬픈 추억과 함께 실타래처럼 풀려나오는 게 아닐까.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그렇게 읽혔다. 눈이 많이 내려 '대설(大雪)주의보'가 아니라 이야기가 많이 풀려나와 '대설(大說)주의보',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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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 - 한정원의 8월 시의적절 8
한정원 지음 / 난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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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이제 겨울을 향해 잰걸음으로 달려가고 있는 듯합니다. 제법 낮아진 아침 기온이 오슬오슬 추위를 느끼게 하지만 아직은 여리고 부드러운 추위입니다. 귀가 떨어져 나갈 듯한 날카롭고 매서운 추위가 닥치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리겠지요. 어제는 시골에 사는 지인의 집을 방문했었습니다. 십여 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마을을 가로질러 작은 하천이 흐르고 하천을 따라 올라가면 산 어귀의 제일 끝집이 지인의 집이었습니다. 방 안에는 화목난로가 구석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고, 방 한가운데 놓인 좌탁 위에는 지인의 것인 듯한 약이 한 보따리 놓여 있었습니다. 병명은 알 수 없었지만 신경외과에서 처방을 받은 색색깔의 알약들이 1회분으로 나뉜 투명한 봉지 안에 한 움큼씩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건강하던 지인도 이제는 약에 의존하여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짠해졌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이러이러한 불행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은 불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어렵게 구축한 삶의 보호막은 예리한 시간의 칼끝에 의해 너무도 쉽게 뚫려버리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러이러한 행복은 나에게 절대 일어날 리가 없다는 가정도 무용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는 동안 우리는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행복한 장면들을 깜짝선물처럼 받으며 삶의 시름을 잊어왔기 때문입니다. 언제 있었던 일인지 기억은 희미하지만 지인과 있었던 작은 에피소드가 떠오릅니다. 평소 담배를 피우지 않던 지인이 한 잔의 술을 앞에 놓은 채 심각한 얼굴로 내게 담배를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떨결에 나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지인에게 건넸고, 지인은 어색하지 않은 모습으로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토해냈습니다. 놀란 얼굴을 하며 내가 "참, 의외네요." 하자, "의외라니? 우리의 삶은 모든 게 의외야. 의외가 아니라거나 자신이 예측한 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믿는 인간이 오만한 거지."라고 말하던 지인의 얼굴이 엊그제 일처럼 지금도 생생합니다.


"여름에는 정말 미심쩍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게 아닐까. 중지되고 정체되는 감각. 여름을 제일로 사랑했다면 다르게 느꼈을지도, 하지만 여름은 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이다. 세 번을 거쳐온 마음은 미약하다. 그래도 싫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 한껏 사랑할 수 없다면 조금 사랑하면 되지."  (p.42)


손에 들고 갔던 한정원의 에세이집 <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을 지인이 타 준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다 읽었습니다. 밖으로부터 느지막한 오후 햇살이 창을 통해 스며들었고,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야 겨우 들릴 듯한 거칠지 않은 바람소리가 자장가처럼 퍼졌습니다. 순식간에 불붙은 계절의 변화처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온통 '의외'로 가득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인의 얼굴이 문득 떠오른 것도, 아무런 준비도 없이 훌쩍 떠나온 것도 미처 예견하지 못한 '의외'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일은 대개 저지대에서 속절없이 일어난다. 슬픔은 단연코 저지대로 모여드는 것이다. 내가 거기 있지 않다고 해서 다행일 수 없다. 거기와 여기는 하나의 세계이다. 거기가 슬픔에 잠겨 있는데 어떻게 여기가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이 계절에는 빗물과 눈물의 총량이 앞을 다툰다."  (p.79)


책에서 나는 작가가 선별한 사진과 시와 산문을 두서없이 읽거나 그 형상과 함께 떠오르는 생각을 골똘히 부여잡으면서 지인도 의식하지 못한 채 한나절을 보낸 듯합니다. 밖으로 나와 잠시 서성였습니다. 햇살이 모여드는 산자락엔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까닥까닥 머리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해거름녘의 시골은 덥혀졌던 지면이 금세 식었고, 부드럽던 바람결마저 거칠어졌습니다. 저녁을 먹고 가라는 지인의 권유를 정중히 뿌리치며 귀가를 서둘렀지만, 어둠은 이미 좁디좁은 시골 도로를 가득 뒤덮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한다. 곧 멀리 떠나야 할 사람. 둘은 마주앉아 바라보고 바라본다. 마지막 밤이 서로의 윤곽을 서서히 뭉갤 때까지, 다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영영 만나지 못할지도. 순식간에 그늘이 심장을 거쳐 발바닥까지 떨어진다. 발밑에 흥건한 어둠. 빛이 필요해, 한 사람이 초를 밝힌다. 어둠이 흔들린다. 밤이 흔들린다. 둘의 그림자가 흰 벽 위에서 흔들린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의 그림자를 어루만진다. 붙잡았으면, 붙잡혔으면, 그림자라도. 한 사람이 붓을 들어 그림자의 윤곽을 따라 긋는다. 선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한 사람이 완성된다. 언젠가 한 사람이 떠나고 또 한 사람이 떠나도, 뜨지 못하는 영혼처럼 테두리는 남는다."  (P.8 '작가의 말' 중에서)


어둠을 몰아내는 전조등 불빛을 따라 지인의 얼굴이 그려집니다. 세월에 닳고 닳은 탁한 음성도 함께입니다. "우리의 삶은 모든 게 의외야." 나는 반박할 수 없는 어떤 명제 앞에서 처참히 무너집니다. 핸들을 잡은 팔에 나도 모르게 기운이 빠지고, 켜켜이 쌓인 어둠이 못내 부담스러운 밤이었습니다. 어쩌면 한정원 작가의 8월도 그와 같은 '의외'로 가득했는지도 모릅니다. 예정에도 없었던 지인의 시골집을 무작정 방문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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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의 루시 - 루시 바턴 시리즈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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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억은 시간의 경과에 관계없이 백만 년 전의 그것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그런 기억들 중에는 아주 최근의 것들도 있고, 희미하게 닳고 닳은 아주 오래된 기억도 물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통과했던 기억도 내게는 아주 먼 과거의 그것인 양 아득하게 느껴지는 것 중 하나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인생에서 처음이었을 그 이상한 경험이 왜 그토록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일까. 치료제도 백신도 없이, 단지 개인의 위생과 격리를 무기로 감염의 공포와 싸워야 했던 그 길었던 시간이 왜 그토록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마치 나의 인생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시간을 내 인생의 빈 시간에 억지로 욱여넣은 것처럼.


"그리고 나는 또한 깨달았다. 슬픔은 혼자만의 것이라고. 맙소사, 슬픔은 혼자만의 것이다."  (p.66)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바닷가의 루시> 역시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의 뉴욕을 배경으로 한다. 나는 사실 연작 소설처럼 이어지는 스트라우트 식 소설 작법을 좋아한다. 주인공도, 시공간적 배경도 이전 작품과는 전혀 다른 단행본을 선호하는 독자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은 축에 속한다는 얘기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을 읽고 있는 시간만큼은 나의 인생도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불멸의 삶을 부여받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죽음이나 끝에 대한 두려움 없이 오롯이 소설 속에 머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안온한 느낌 때문에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을 계속해서 읽게 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여기저기 돌아다녔다는 것, 그게 내가 말하려는 것이다. 날씨는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물질적인 세상이 우리에게 손을 펴 보이는 듯한 느낌이 존재했고, 그것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도움이 되었다."  (p.170)


<오, 윌리엄!>의 후속작이자 '루시 바턴' 시리즈의 최신작인 <바닷가의 루시>는 주인공인 루시와 그녀의 첫 남편인 윌리엄이 당시 만연했던 뉴욕의 바이러스를 피해 한적한 바닷가의 집으로 가게 되면서 일어난 일을 그리고 있다. 말하자면 바이러스의 위험을 감지한 윌리엄이 아무것도 모른 채 위험천만한 생활을 하고 있던 루시를 돌보기 위해 메인 주에 있는 밥 버지스 소유의 바닷가 주택을 임대하여 루시와 함께 자가 격리에 들어가는 것이다. 미국 북동부 국경지대의 해안가에 위치한 메인 주는 동부 도시 주민들의 여름 휴양지이지만, 대개의 휴양지가 그렇듯 휴가철을 제외하면 인적이 끊기고 항구도시 특유의 회색빛 거친 바람이 부는 을씨년스러운 곳이다. 소설 속 주인공 루시도 이곳에서 심한 고립감을 느낀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내 마음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하루하루가 내가 걸어가야 하는 넓은 빙판길 같았다. 그리고 그 빙판에는 붙박인 작은 나무들과 잔가지들이 있었는데, 그것이 내가 그 풍경을 묘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세상이 다른 풍경이 되어버린 것 같았고, 나는 이 상황이 언제 끝날지 알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견뎌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고, 그래서 나는 큰 불안감을 느꼈다."  (p.83)


한없이 서먹한 관계일 수 있는 두 사람(루시와 윌리엄)은 고립된 생활 속에서 지난날을 떠올리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며,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들에 대해 끝없이 걱정한다. 고립된 삶이 두 사람에게 꼭 나쁘게만 작용한 것은 아니어서, 유년시절 가난과 폭력 속에서 성장했던 루시는 그녀처럼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불행한 유년시절을 보냈던 집주인 밥 버지스를 통하여 사별한 남편 데이비드에 대한 상실감을 위로받기도 한다.


"그러자 밥이 말했다. "당신은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는 바보 같지 않잖아요., 루시. 그리고 나는 당신이 세상일에 바보 같다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그가 말을 중단했다가, 이어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어요. 나도 좀 그런 경향이 있거든요.""  (p.117)


루시의 말처럼 슬픔은 혼자만의 것이지만 우리는 슬픔 속에서 타인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나와 비슷한 종류의 슬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흔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팬데믹이라는 거대한 불안과 공포를 겪어내는 동안 우리들 각자의 나약함을 확인했고, 서로의 등에 닿는 누군가의 체온이 언제나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 공포에 저항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현실에서 깨닫게 해 준 하나의 기회이자 창구였다.


"이 나라에 깊고 깊은 불안이 존재하고, 시민전쟁이 일어날 거라는 소곤거림이 내가 뚜렷이 느낄 수는 없어도 감지할 수 있는 미풍처럼 내 주변을 휘도는 것 같은 환시.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받아 그곳을 떠났고, 내가 윌리엄에게 무엇을 느꼈는지 말하자 그가 "나도 알아" 하고 말했다. 그것이 내게 머물렀다. 그날 저녁에 내가 받았던 그 느낌이."  (p.218)


혹자는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기록하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이 지겹지도 않으냐고 묻는다. 다른 누군가는 특별한 사건도 없이 잔잔한 일상을 기록한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는 느낌이 들어서 스트라우트의 소설을 좋아하는 게 아니냐고 묻는다. 나의 생각은 다르다. 작가가 구축한 소설 속의 견고한 질서와 배경, 그 속에서 펼쳐지는 반복적인 일상은 늘 크고 작은 불안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안심과 위로를 선사하는 까닭이라고. 적어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을 읽는 동안은 불안하지 않다고. 소설을 읽고 있는 그 시간에는 우리에게 예정된 죽음도 아주 멀게만 느껴진다고. 작가는 그렇게 특별하지 않은 방식으로 우리를 위로하며 다독이고 있다. 나는 어쩌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에게 중독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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