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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과 생각
정용준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2월
평점 :
사생팬이 되겠다는 건 아니지만 책을 읽다 보면 이따금 한 작가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고 싶을 때가 더러 있다. 책날개에 있는 작가의 짧은 프로필이나 인터넷에 떠도는 어설픈 정보를 떠나 작가의 유년기는 어땠는지, 청소년기에는 주로 어떤 생각을 하며 보냈는지, 성인이 된 지금은 어떤 가치관으로 살고 있는지 등 작가 스스로 밝히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내밀한 이야기를 속속들이 알고 싶은 것이다. (흠, 이렇게 쓰고 나니 어쩐지 내가 사생팬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위험한 인물로 느껴지기도 한다, 아무튼) 그러나 연예인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에 관심이 그닥 많지 않은 까닭에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작가의 인생사를 굳이 알고 싶어 하는 경우는 극히 적다고 하겠다. (사실 나는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유명하다는 연예인의 이름도 허다하게 모른다. 부전자전인지 나의 아들도 그렇다.) 어떤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하는 원인은 일차적으로 그가 쓴 책에서 비롯된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이치일지 모른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자신의 책이나 언론 인터뷰를 통해 언급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정용준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던 건 그의 에세이 <밑줄과 생각>을 읽은 직후였다. 전에도 작가의 이름은 몇 번 들어 본 듯한데 그의 작품은 생각나는 게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그의 작품을 읽은 적이 없었다. 불행하게도 말이다. 누군가 넌지시 읽어보라고 귀띔이라도 해줬더라면 그의 작품 중 한두 권쯤은 진즉에 읽지 않았을까 싶긴 한데 아무도 내게 권하는 이가 없었던 걸 보면 그는 대중적으로 크게 인기를 얻은 작가는 아닌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암튼 그렇다.
"밑줄 긋는 것이 좋습니다. 그 문장이 몸과 마음에 천천히 스며드는 시간도 좋습니다. 그 언어와 내 언어가 섞이고 남의 언어를 닮은 새로운 나의 언어가 생기는 것이 좋습니다. 밑줄이 그어지면 책은 책 이상이 됩니다. 단어와 문장에 그어진 한 줄의 흔적은 마음에도 그어져 있습니다. 문신처럼 흉터처럼 남아 내 삶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저자와 악수하고 인물과 포옹하고 이야기와 연결되는 느낌. 이보다 좋은 것을 아직 경험해본 적 없습니다." (p.6 '작가의 말' 중에서)
나는 책의 서두에 적힌 이 몇 개의 문장에 '계몽되'고 말았다. 하마터면 나는 어느 날 헌법재판소의 재판정에 나왔던 어느 변호사의 말을 그대로 읊을 뻔했다. '나는 계몽되었습니다!'라고. 책의 내용 역시 '작가의 말'에 버금갈 정도로 좋았던 게 사실이다. 책을 출간하고자 하는 어떤 작가도 자신의 책을 준비함에 있어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테지만, 소설가로 알려진 작가가 <밑줄과 생각>이라는 제목의 산문집을 준비함에 있어 그는 아마도 남다른 각오와 결심이 서지 않았을까 싶다. 한 글자 한 글자, 한 문장 한 문장에 정성을 다한 느낌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좋아하는 작가가 여름에 발표한 소설을 읽었다. 좋았다. 문장을 읽다 말고 잠깐 눈을 감고 멍하게 있었다. 분주한 마음이 가라앉고 다시 읽었다. 눈으로 쭉 읽어나가다가 연필을 들어 밑줄을 그었다. 어떤 단어는 손끝에 만져졌다. 어떤 문장은 온도가 느껴졌다. 어떤 장면에선 마음이 아팠고 어떤 대화에선 마음이 환해졌다. 소설은 작가의 일기가 아닌데 나는 그 작가의 소설이 일기였으면 한다. 그래서 읽으면 읽을수록 작가를 사적으로 많이 알게 되고 가까워졌으면 좋겠다. 그런 착각이라도, 그런 허상이라도, 좋다." (p.176)
'한 줄의 문장', '한 줄의 밑줄', '한 줄의 생각'이라는 소제목으로 구성된 이 책은 자신이 읽었던 인상 깊었던 소설과 글을 소개하면서 작가의 깨달음과 통찰을 더한다. 소설을 쓰는 소설가가 다른 소설가의 작품을 읽고 공감하며 깨닫고 자신의 소설 작법에 있어 잘못된 점을 개선하는 것이야 당연한 이치이겠으나, 소설가가 보편적 일상을 살아가는 무명의 독자로서 여러 작가의 작품을 읽고 자신이 깨달은 바를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여러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기회는 흔하지 않다. 그런 까닭에 소설가는 자신의 독서 체험을, 음악이나 영화 감상의 체험을 일반 대중과 나누기 위해 책이라는 지면을 통해 소통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이 일상처럼 가볍고 진부해서는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전업으로 글을 쓰는 작가라면 자신의 생각이 일회성의 어떤 것으로 그쳐서는 곤란하다는 얘기다. 떠오르는 생각에 밑줄을 긋고, 그 생각에 새로운 생각을 첨삭하는 일을 끝없이 반복하여 그 열정이 독자의 가슴에 닿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용준 작가의 <밑줄과 생각>은 비로소 대중의 주파수와 일치하여 그들과 교신하게 되었다.
"나는 작가를 감히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가 보고 그가 증언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나도 아주 조금은 알고 있다고 믿고 싶다. 작가에게 신은 인간을 포기하는 관념이 아니다. 도리어 인간의 손목을 움켜쥐고 끝까지 떠오르게 하는 안간힘에 가깝다. 작가는 안다. 때로는 변호하는 것이, 우기고 또 우기는 것이,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아이처럼 떼쓰는 것이, 태양을 멈추고, 운명을 바꾸고, 신의 마음을 돌이키기도 한다는 것을." (p.331)
어제 내린 비 때문인지 하늘은 맑고 공기는 청명하다. 봄바람 속에 은은한 벚꽃 향기가 실려 오는 듯도 하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거닐며 꽃구경에 여념이 없다. 한 사람의 웃음이 곁에 있는 다른 사람의 웃음을 유발하고 급기야 꽃망울이 터지듯 주변의 모든 사람들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우리는 그 웃음에 밑줄을 긋고 삶의 의미를 가벼이 음미한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읊었던 천상병 시인의 시구처럼 오늘 그들 얼굴에 번졌던 미소가 아름다운 추억으로, 아름다운 삶으로 귀결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