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밤에 호루라기를 불어라
이응준 지음 / 민음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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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며칠 동안의 장맛비에 세상 쓸모없는 것 같은 미국자리공이 가슴께까지 자랐다. 키가 작은 여뀌와 달개비가 그저 자신의 푸르름만 더하는 동안 '때는 이때다' 싶은 미국자리공이 물 만난 물고기처럼 쑥쑥 자라난 것이다. 장마도 막바지에 이른 지금, 나는 모처럼 보는 푸른 하늘을 등에 업고 산에 올랐다. 산 중턱에 있는 참나리꽃 군락지에는 꽃이 만개했고, 풀숲에 웃자란 미국자리공이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하는 듯했다. 장맛비에 쑥쑥 자라나는 저 미국자리공처럼 나도 그렇게 쑥쑥 늙어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었다. 나는 장맛비에 쑥쑥 늙어가기 위해 이응준의 에세이 <고독한 밤에 호루라기를 불어라>를 읽었다. 이응준의 수필은 타인의 공감에 무관심한, 지극히 사적인 사유들로 채워져 있는 까닭에 때로는 나 역시 이해하기 어려워 이해를 포기한 채 수시로 건너뛰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쑥쑥 늙어가기 위해서는 이만한 책이 없다고 수시로 믿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헛된 믿음일지라도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 아직도 누군가는 내 어린 시절의 시를 읽어 주고 있고 나는 여전히 오리무중의 모독 속에서 새로운 시를 쓰고 있는 중이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일을 목숨처럼 여기며 살아간다는 것은 일제히 묘한 슬픔을 안겨 준다. 다만 나는 속삭이고 싶다. 사실상 인생은 시나 소설이 아니라고. 인생은 순간순간 한 편의 수필(隨筆)이다. 우리 모두는 시인이나 소설가나 수필가도 아닌 '수필인간(隨筆人間)'이다. 인생과 인간은 시처럼 비장하고 아름답지도, 소설처럼 풍성하고 구조적이지도 않다."  (P.84)


1부 '명왕성에서 이별'에서 작가는 16년 동안 작가와 함께하며 곁을 지켜주었던 강아지 '토토'를 떠나보낸 소회와 다른 강아지 '토토'를 자신의 반려견으로 맞게 된 이야기를 쓰고 있다. 2부 '폭염서정(暴炎抒情)'에서는 표제작이기도 한 '고독한 밤에 호루라기를 불어라'를 비롯하여 '죽음에 관한 소견', '수필인간(隨筆人間)' 등의 소제목으로 우리 삶의 근원적인 문제를 다룸과 동시에 인간의 피할 수 없는 고독에 대해 쓰고 있다. 3부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에서 작가는 사라져 가는 것들과 상실에 대해 쓰고 있다.


"죽음이란 위대한 무기(武器)이자 부적(符籍)이다. 죽음을 각오하면 우리는 삶에서 못 해낼 일이 없다. 그 어떤 적도 멸망시킬 수 있으며 그 어떤 재앙도 씹어 삼켜 소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 일을 다 한 뒤에 당당히 죽을 수가 있다. 우리는 이런 기가 막힌 무기이자 부적을 공평하게 하나씩 지니고 태어난 사람들이다. 죽음은 제대로 살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삶에서 도망치기 위해 있는 게 아니다."  (P.175)


이어지는 4부 '무장시론(武裝詩論)에서는 중학교 2학년 무렵부터 몰래 글을 쓰기 시작하여 스무 살에 시인으로 스물다섯 살에 소설가로 등단했던 작가가 자신의 문학관에 대하여 스스로가 읽었던 책과 자신이 쓴 글들을 중심으로 담담하게 펼쳐 보인다. 5부 '나와 바오밥나무와 하나님과'에서 작가는 식물을 좋아하는 자신에게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바오밥나무를 키워보라는 출판사 대표의 권유에서 비롯된 다양한 사유와 과학 및 종교 등과 연관된 희망과 절망이라는 문학적 주제를 쓰고 있다. 마지막 6부 '성찰하는 괴물'에서 작가는 누구나 화두와 같은 질문 하나를 가슴에 품고 사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잘 살아갈 수 있을까를 탐구하는 여정이다.


"이 책의 절반 정도는 죽음이 내게 가까이 와 있던 시절에 쓴 것들이다. 만약 이 책에 뛰어난 점이 있다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사랑에 대해 질문한다는 것은 인생과 죽음에 대해 질문한다는 것이며, 신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사랑에 대해 질문하는 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P..12 '서문' 중에서)


장마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자 사뭇 싱겁게만 보이던 여름이 된맛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말매미의 울음소리가 전보다 높아진 것도, 땅에 스며들었던 습기가 햇볕을 받아 일시에 날아오르는 것도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이제 시작되는 여름의 무더위를 견디고 나면 이번 장맛비에 허리께까지 자란 미국자리공처럼 나 역시 쑥쑥 늙어갈 수 있을까. 늙어간다는 말에 '쑥쑥이라는 부사를 붙여 쓰지는 않지만 나는 종종 그렇게 말하고 싶을 때가 있다. 죽음을 향해 쑥쑥 늙어가고 싶은 것이다. 아주 장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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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코디언
천명관 지음 / 창비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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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은 시대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천명관의 신작 소설 <아코디언>을 읽으면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한국전쟁 직후의 결핍된 시기를 어느 것 하나 거르거나 미화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려냄으로써 지금과는 천양지차로 달랐던 그 시대를 우리 앞으로 소환한다. 20세기 대한민국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라면 '에이, 설마...' 하면서 그것을 단지 허구로만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전쟁으로 피폐해진 대한민국의 실제 모습이었고, 모든 게 부족했던 까닭에 생존을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만 했던 시기였고, 그럼에도 이웃이나 동료를 위해 자신의 몫을 기꺼이 내주기도 했던 헌신의 시기이기도 했다.


"자신은 벽을 넘는 데 끝내 실패했지만 기어이 살아남아 벽 너머의 세상을 맞이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남들처럼 깡통만 한 꿈이라도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점점 더 의식이 희미해지는 가운데 동이의 머릿속엔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깜상과 연이, 자신의 아들로 삼았던 돈이, 아코디언을 물려준 홍이, 죽은 양 목사와 아미, 그리고 이젠 윤곽조차 희미해진 엄마의 얼굴......"  (p.294)


소설은 버스정류장에서 구걸을 하는 한 소년으로부터 시작된다. 피난민을 태우는 부두에서 잡았던 엄마의 손을 놓치는 바람에 엄마를 잃고 고아가 된 소년 동이. 홀로 부산에 도착했던 동이는 엄마를 찾기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처럼 고아들을 자신의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는 어른(양 목사)의 꼬임에 넘어간다. 양 목사와 아미를 주축으로 하는 앵벌이 조직의 숙소는 해방촌 산자락에 위치한 무허가 판잣집이었다. 그곳에서 동이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과 함께 거주하며 백화점 앞에서 구걸을 계속한다. 앞을 못 보는 연이, 걷지를 못하는 거북이, 늘 울음을 그치지 않는 찬이, 미군의 포탄에 맞아 팔이 하나밖에 없는 깜상 등. 양 목사는 어느 날부터 아이들에게 일명 구름탄이라고 불리는 마약을 먹였다. 마약을 통해 아이들을 손쉽게 지배하려는 속셈이었다.


"언제부턴가 양 목사와 아미는 더이상 아이들을 윽박지르거나 때리지 않았다. 대신 약을 굶겼다. 그것은 밥을 굶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벌칙이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도망가지 않았다. 약을 얻어먹기 위해 더 악착같이 양 목사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목에 올가미가 채워진 가마우지처럼 약기운에 취한 채 온종일 길바닥을 뒹굴어야 했다."  p.42~p.43)


동이는 숙소에 버려졌던 낡은 아코디언을 발견한다. 죽은 연이 할아버지의 유품이라고 했다. 교회 성가대의 피아노 반주를 했던 동이 엄마의 재능을 물려받은 덕분인지 절대음감을 지녔던 동이는 독학으로 아코디언 연주를 시작한다. 아코디언 연주가 손에 익으면서 동이는 노래를 잘 부르는 연이와 한 팀이 되어 움직인다. 동이는 그렇게 앵벌이 조직의 주축으로 성장한다. 그러던 어느 날 판자촌 입구 도랑 옆에서 미국인 시신 한구가 발견되고, 양 목사와 아미가 형사들에게 구속된다. 갑자기 감시자가 사라진 앵벌이 조직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한밤중에 난 화재로 인해 아이들 셋이 죽고, 거북이를 업고 나오던 동이도 화상을 입는다. 죽은 아이들을 묻어주고 아이들은 다시 동이를 중심으로 앵벌이를 하고 조금씩 돈을 모은다. 그렇게 평온한 날들이 이어지나 싶던 어느 날 사라졌던 양 목사가 다시 나타나고...


"다시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굴바위로 옮겨온 지 세 달이 지났다. 죽은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도만친 아이도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돈을 빼돌렸지만, 이전처럼 대놓고 삥땅을 치진 않아 탄약통엔 차곡차곡 돈이 쌓여갔다. 집을 사는 것까진 몰라도 한동안 굶어 죽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움막은 아이들이 두려워하는 무언가가 당장이라도 들이닥칠 것처럼 늘 아슬아슬한 불안감이 감돌았다. 그래도 그들은 함께 밥을 해먹고 숨바꼭질을 하고 계곡에서 다 같이 목욕을 했다."  (p.154)


무엇보다 생존이 우선시 되는 상황에선 언제나 각자가 지닌 본능과 본능이 악다구니를 쓰듯 충돌하게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우리 내면의 선한 본능이 우리도  모르게 발현된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설에서의 극적인 반전을 이끄는 것도 바로 이러한 지점이 아닐까 싶다. 인간 내면에 잠재한 선한 본능. 물론 누군가는 그것조차 외면한 채 끝끝내 지독한 악인으로 남기도 하지만 또 누군가는 그에 저항하여 자신의 목숨마저 선뜻 내놓을 수 있는 선한 본능을 구현하기도 한다. 그로 인하여 우리의 공동체가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의 다른 작품 <고래>가 워낙 탁월한 소설이었기에 그것을 능가할 만한 소설은 작가로부터 다시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지금까지 일부러 그의 소설을 외면해 왔다. 그러다 우연찮게 읽게 된 소설 <아코디언>. 시대를 관통하는 극사실주의 소설을 씀으로써 그는 이제야 자신의 위치를 찾은 게 아닐까 싶다. 작가는 이제 현실에 발을 단단히 디딘 듯한 모습이다. 현실에 살을 맞닿은 채로 그는 이전보다 조금 더 여유로워진 듯했다. 나는 앞으로 천명관 작가의 달라진 모습을 그가 쓸 앞으로의 소설에서 수시로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희망 섞인 기대를 품게 되었다. 그것이 내가 오늘 그의 소설 <아코디언>을 읽은 보람이라면 보람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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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서 帛書 - 125년 만에 도착한 편지
이상훈 지음 / 책마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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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세례를 받은 지 10여 년이 흘렀다. 가족 모두가 천주교 신자라거나 모태신앙도 아닌, 천주교는 나에게 꽤나 낯선 종교였지만 어떤 특별한 계기도 없이, 그야말로 뜬금없이 천주교 신자가 되기로 결심했던 건 우연이거나 필연이었을 테다. 그것도 천주교를 믿는 다른 이의 권유나 전도도 없이 오직 나의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이끌림이었다는 건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그 인과관계의 건너뜀이 큰 의문부호로 남는다. 그리고 나는 당연한 귀결처럼 냉담자가 되었다.


이상훈의 역사소설 백서(帛書)를 읽는 내내 나는 소설의 주인공인 황사영의 삶과 나의 삶을 번갈아가며 생각했다. 250여 년 전에 태어난 사람과 나를 비교한다는 게 가능하지도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같은 종교를 믿으면서 온갖 박해 속에서도 종교를 버리지 않았던 황사영과 자유로운 종교 활동이 보장되는 상황에서 냉담자로 남은 나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 극단적인 대비가 아닐 수 없었다.


"백서를 쓰는 황사영의 심정을 가슴으로 느끼며 또 읽었다. 내가 황사영이 되고 황사영이 내가 되었다. 239년 전에 살았던 황사영이 내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황사영은 천주교 순교자로 하느님을 위해 기꺼이 사지가 찢겨 죽는 순교의 길을 택했지만, 그는 천주교에서도 대접받지 못하고 우리 역사에서도 버림받은 존재가 되었다. 그가 외국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조선에서 벌어지는 살육의 미친 춤판을 끝내 달라고 교황님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 일이 과연 역적으로 비난받을 행위일까? 당시 조선 백성의 삶과 정치 상황 그리고 천주교 박해의 실상을 안다면, 누가 황사영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p.6 '작가의 말' 중에서)


1775년 조선 후기의 정조가 집권하던 시기, 황석범의 유복자로 태어난 황사영은 16세의 나이로 진사과에 장원급제한 천재였다. 정조의 주선으로 정약용의 집안과 관계를 맺게 된 황사영은 결국 정약용의 큰형인 정약현의 딸 정명련과 혼인하여 정약용의 조카사위가 된다. 조선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였던 이승훈이 정약용의 누이와 혼인함으로써 정약용의 집안 역시 천주교를 믿게 되었던 바, 정약용의 조카사위가 된 황사영 역시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지 싶다. 캄캄한 토굴 속에서 숨어 살면서 당시 스물여덟 살이었던 황사영이 가로 62cm, 세로 38cm의 작고 흰 비단 위에 일만 삼천 자가 넘는 한자를 붓으로 적어 내려갈 때의 절절한 심정을 작가 또한 백서 원문을 읽으면서 가슴으로 느꼈었다고 한다. 2027년 8월 WYD World Youth Day(세계청년대회)가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세계의 가톨릭 청년들에게 우리 순교의 역사를 알리고자 소설을 완성했다며 집필 목적을 적었다.


"황사영은 토굴에서 백서를 마쳤다. 마지막 문장을 쓰고 난 후 사영은 정신을 잃었다. 다음날 아침 김귀동이 불러도 기척이 없자 항아리로 막았던 입구를 헤치고 토굴로 들어왔다. 황사영은 탈진해서 쓰러져 있었다. 그만큼 마지막 남은 기력을 백서에 쏟아 부은 것이다. 사영의 몸은 불덩이 같았다. 김귀동은 의원을 부를 수도 없고 해서 급하게 열을 내리는 민간요법으로 응급조치를 하고 차가운 물로 적신 수건으로 사영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p.157)


순교자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신앙을 지키고자 자신의 목숨까지 바쳤던 수많은 희생자 중 한 사람이었던 김범우의 7대손인 진복이 자신의 친구인 박현철 신부와 함께 순교지를 찾아나서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내놓아야 했던 당시 조선의 민중들이 겪어야 했던 아픈 역사와 그 역사의 한 귀퉁이를 가까스로 붙잡기 위해 애쓰는 진복의 모습이 교차하면서 소설은 진행된다. 황사영이 결국 능지처사의 죽음을 당하고 그의 아내인 명련이 관노가 되어 두 살 난 아들과 함께 제주도로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정약용의 모습을 그린 장면은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가슴 먹먹하게 읽었다.


"자신은 양반 신분의 유배 생활에서도 이렇게 냉대와 멸시를 받고 있는데 그렇게 곱고 우아하던 조카 명련이 노비가 되어 외딴 섬 제주도에서 노비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약용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약용은 조카 명련에 대해 글을 남길 수가 없었다. 황사영과 명련은 천주교 괴수로 지목되었기에 약용이 그들을 안타까워하는 글을 남기면 이것이 꼬투리가 되어 노론 벽파의 공격이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생각에 명련에 대한 안타까움은 글로 표현하지 못하고 가슴에 담아둘 수밖에 없었다."  (p.194)


오락가락하던 장맛비는 제헌절 연휴에도 요란하게 이어졌다. 나는 이상훈작가의 역사소설 <백서(帛書)>를 곰곰 되새겨보며 인간에게 과연 종교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내가 지금도 여전히 천주교 신자로 남아 있었다면 결코 들지 않았을 질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각자의 삶에서 아로새겨진 개인의 성향과 인성은 그의 삶이 그것에 반하여 펼쳐질 때마다 도돌이표처럼 원래의 삶으로 되돌려 놓는다. 삶의 원칙이란 바로 그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내놓았던 황사영 역시 그러했을 터, 우리는 각자의 삶이 지정하는 외진 길을 따라 조용히 나아갈 뿐이다. 냉담자로 살고 있는 나도 역시 언젠가 고해성사를 하고 주말 미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언젠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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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단편선 소담 클래식 8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이은연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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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비가 뜸해진 자리엔 무더위가 자리를 잡았다. 잦아진 기상이변 탓인지 과거에는 가난한 사람이 가장 나기 쉬운 계절이 여름이었는데 이제는 정반대가 되고 말았다. 여름이야말로 가난한 사람들이 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계절이 되고 말았다. 살인적인 더위와 게릴라성 폭우는 매년 그 강도를 더하고 있지만 딱히 이렇다 할 대책은 없는 게 현실이다. 그저 침수 피해를 입은 이재민에게 지급되는 일시적인 성금과 보여주기식 복구 활동이 그들을 위한 과분한(?) 성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느린 듯하지만 화살보다도 빠른 한 해 한 해를 살아내고 있다. 무성의한 이웃과 가혹한 하늘을 원망하면서.


소담출판사에서 출간한 <도스토옙스키 단편선>을 읽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열렬한 팬이기도 한 나는 그의 작품 대부분을 읽어보았다, 청소년기의 어느 시기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의 작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고 나는 꽤나 깊은 우울과 인생에 대한 회의감 속에서 한동안 빠져나오지 못했었다. 우리의 삶이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그 시기에 도스토옙스키의 여러 작품을 통해서 배웠다. 그리고 그가 겪었던 지독한 가난과 간질이 마치 나의 경험인 양 아팠다. 그 후에도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문고판으로 나온 그의 작품들을 수시로 꺼내 읽곤 했었다.


<도스토옙스키 단편선>에 실린 작품은 '백야'를 비롯하여 '남의 아내와 침대 밑 사나이', '첫사랑' 등이다. 그의 작품이 늘 그렇듯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이를 통한 철학적 사색을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한편 일관적이지 않은 인간의 변덕스러운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묘사함으로써 책을 읽는 이들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한 번쯤 되돌아보도록 한다. 자신의 모습을 곰곰 되돌아보지 않는 우리는 자신이 마치 신에 버금가는 대단한 사람인 양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까닭에 도스토옙스키와 같이 탁월한 작가에 의해 간접적으로나마 지적을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스텐카, 내가 모욕당한 것을 언제나 기억하리라 생각하는가! 내가 너의 밝고 아늑한 행복에 검은 구름을 드리우리라 생각하는가! 심한 비난의 말을 퍼부어 너의 가슴에 슬픔을 주고, 비밀스러운 가책으로 너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며, 행복한 순간에도 우울한 생각으로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네가 그와 함께 계단을 향해 걸어갈 때 너의 검은 곱슬머리에 꽂은 그 부드러운 꽃 가운데 단 하나라도 짓뭉개 놓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오, 결코,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너의 하늘이 맑게 개기를, 너의 사ㅓ랑스러운 미소가 밝고 평화롭기를, 그리고 감사함으로 가득한 어떤 외로운 가슴에 네가 심어 준 행복과 기쁨의 순간에 대해 축복받기를!"  (p.114 '백야' 중에서)


'백야'에서 작가는 페테르부르크에 사는 소심한 한 남자를 등장시킨다. 어찌나 소심한지 연애 경험도 없고 단지 상상 속에서만 살아가는 그는 어느 날 운하 난간에 기대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젊은 여인을 보게 되고, 그녀를 괴한으로부터 구해 준 것을 계기로 가까워진다. 결혼을 약속한 남자로부터 버림받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여인(나스텐카)을 위로하며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게 된 남자는 자신의 소심함을 떨치고 그녀에게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고백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에 대한 미련을 남겨두었던 여인은 결국... '남의 아내와 침대 밑 사나이'는 질투심에 사로잡힌 한 남자가 이성이 아닌 감정과 본능에 따라 움직임으로써 자신의 사회적인 지위에 상관없이 얼마나 추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는 남자는 아내를 미행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의 오해와 충돌을 풍자적으로 그려낸다.


"그는 긴 외투를 입고 G거리로 달리기 시작했다. 거기서 현장을 덮쳐 그들의 정체를 폭로하고, 대체적으로 어제보다는 좀 더 강력하게 행동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는 금방 집을 찾아 입구로 들어섰다. 그때 외투를 입은 말쑥한 멋쟁이 차림의 한 형태가 그의 팔을 스치듯 가까이 그를 앞질러 3층으로 급히 올라갔다. 이반 안드레예비치는 비록 극장에서 민간인 복장을 한 멋쟁이 차림의 사나이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바로 조금 전에 본 그 말쑥한 차림의 멋쟁이 사나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그는 이미 한 층을 앞서 올라갔다. 마침내 3층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왓다. 문은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벨 소리도 없이 열렸다."  (p.157 '남의 아내와 침대 밑 사나이' 중에서)


마지막 작품인 '첫사랑'은 열한 살 소년의 눈을 통해 바라보게 되는 어른들의 세상이다. 소년이 사랑하는 M 부인은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철저히 숨기지만, 어린 소년 앞에서는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그러나 M 부인의 입장에서 마냥 어리게만 보이는 소년이었지만, 소년의 입장에서 M 부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었고, 그런 까닭에 소년의 시선에서 M 부인의 일거수일투족은 결코 허투루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M 부인과 이를 지켜보는 소년. 첫사랑에 빠진 소년은 M 부인을 통해 어른들의 허영과 위선, 사랑과 고독을 감지한다.


"M 부인이 남편에게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마자 나는 바로 부인 옆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마치 그녀가 한 시간 전부터 같이 산보하자고 청해 놓은 것처럼, 마치 이미 한 달 내내 아침마다 그녀와 함께 산책이라도 해 온 것처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부인은 왜 그렇게 당혹스러워했을까? 또 사소한 거짓말을 할 때 도대체 그녀의 머리엔 무엇이 있었을까? 왜 그녀는 혼자 산보하러 간다고 말하지 못했을까? 이제 나는 어떻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할지 몰랐다."  (p.225 '첫사랑' 중에서)


사회학 연구자인 이승연은 자신의 최근 저서인 <손절사회>에서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체제일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삶, 인간 사회의 모든 측면을 경제적 관점에서 이해하게 함으로써 사회적 연대와 공공의 책임을 해체하는 하나의 정치적 세계관이자 '문화'라고 규정했다. 내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까닭은 도스토옙스키에 나오는 주인공의 모습이나 태도는 우리가 평소에 관계를 맺고 지내는 여러 관계의 간극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소심하여 연애 경험이 없는 남자, 질투심에 불타는 남편, 소년이 연애 대상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성인 여성 등 도스토옙스키가 설정한 소설 속 인물들과의 관계를 맺거나 유지하는 것은 별 이득이 없다고 판단할지도 모른다.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말이다.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한마디로 우리는 그들과 손절을 하고 말 것이라는 얘기다. 우리가 다양한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신자유주의 사상에 물든 우리는 나에게 이득이 없는 관계는 곧바로 손절을 하는 바람에 나와 다른 타인을 연구하고 탐색할 기회마저 잃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삶을 통하여 배워야 할 것은 관계를 통한 의미와 깨달음이지 단순한 손익 관계가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의 손익 계산에 익숙한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 대신에 배척과 혐오로 일관한다. 나와 다르다는 것은 경계를 넘어 배척의 이유가 된 지 오래이다. 그래서인지 현대인에게 고전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어떤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나와 다른 타인을 배척하는 것뿐만 아니라 나와 다른 세대를 배척하기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단지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장마가 지나간 아파트 화단에는 말매미 울음소리가 시작되었다. 어찌나 시끄러운지 낮잠을 자기도 어렵다. 나의 뜻에 반한다는 이유로,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배척하고 없애야 하는가. 저 작고 보잘것없는 미물이 악다구니를 쓰며 묻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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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으면 장례식에 누가 와줄까 (15만 부 리커버 에디션)
김상현 지음 / 필름(Feelm)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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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몇몇 추구하는 것들이 있다. 그중에서 나의 일상을 지배하는 게 있다면 '추상적인 것에 연연하지 말자'는 것이다. 예컨대 '행복하게 살자'와 같은 추상적인 문장을 추구하거나 매달리기보다는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구체적인 행위, 이를테면 산책이나 낮잠 등 때에 따라 다양한  어떤 것을 선택하여 실행에 옮기려 한다는 점이다. 나의 일상이 그렇게 흘러가면서부터 나는 대학생인 아들에게도 어떤 일의 선택 기준이 의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이따금 당부하곤 한다. 이를테면 지금 어떤 일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단순히 어떤 의무나 관습 때문에 해야 하는 일이라면 그런 일은 하지 말거나 다른 방법을 찾아보라는 것이다. 그와 관련하여 나중에 어떤 직장에 취업을 하고 출근을 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정말로 100% 의무감 때문에 하고 있다면 이직을 포함하여 다른 방법을 찾아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변 사람들의 반론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살 수 있느냐는 것.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하기 싫은 일을 할 때라도 그 일의 밑바탕에는 99%의 의무감과 1%의 재미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우리의 인생은 꽤나 긴 듯하지만 사실 지나고 보면 너무나 짧다는 걸 실감하기 때문이다.


"책에 담고 싶었던 세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첫째는 결국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것. 둘째는 좋은 사람이 돼서 좋은 사람을 곁에 두었으면 한다는 것. 셋째는 결국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일들은 다 행복하기 위해 한다고 믿고 있고, 행복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 행복은 과연 어디서 나오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사랑. 저는 행복이라는 건 결국 사람과 사랑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p.8 '작가의 말' 중에서)


김상현 작가의 에세이 <내가 죽으면 장례식에 누가 와줄까>는 출간된 지 적어도 5, 6년은 흘렀고,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책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책에 손이 가지 않았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미신처럼 믿고 있는 책과의 궁합이 맞지 않았던 탓인지도 모른다. 남들이 아무리 좋다며 권하더라도 선뜻 손이 가지 않을 때가 있고, 한참이 지나 책의 인기가 시들해질 무렵 '아, 이 아무개가 이 책을 권한 적이 있었지' 하는 생각이 퍼뜩 떠올라 예정에도 없던 독서를 시작할 때가 있다. 말하자면 이 책도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매일 아침마다 내가 오늘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질문한다. 답은 언제나 똑같다. 또 그런 일상들을 보낼 것이다. 가끔 내가 그리는 미래에 닿았을 때, 그려왔던 모습과 다르면 실망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래도 살아가며 또 다른 답을 찾기도 하고 길을 찾기도 한다. 왜 살아가고 있는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삶의 주제가 온전히 나이기에 끊임없이 되묻고 깨닫고 갈망한다."  (p.165)


우리는 이런 종류의 책이 마치 사회 경험이 부족한 사회 초년생이나 자신의 미래가 불안하여 밤잠을 설치게 되는 결혼 적령기의 그들에게나 어울리는 책으로 분류함으로써 자신에게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은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하루도 타지 않는 날이 없을 만큼 감정에 쏟는 에너지가 극심하여 체력이 남은 상태의 가뿐한 몸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는 날이 없는 까닭에 오늘의 나를 위로할 단 한 줄의 문장은 어느 날이나 필요한 게 아닌가. 마음을 가라앉혀 줄 힐링 에세이는 어쩌면 나의 마음에 건네는 한 병의 박카스가 아닐까 싶다. 인간관계로 인하여, 과도한 불안과 고민으로 인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과 슬픔으로 인하여 지친 우리 영혼을 위하여 우리는 영혼의 자양강장제를 한 병쯤 마셔야 하지 않을까.


"결국 인생은 고통이다. 삶 자체는 고통일 수밖에 없다. 존재 역시도 고통이다. 우리가 죽음으로 회귀하는 동안 살아내야 하는 저항값이 고통인 것이다.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지금 고통 받는 건 당연하다. 허나 고통을 회피하는 건 존재를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나아가고 흘러가기 위해서 많은 것들에 부딪혀야 한다. 그것이 사람일 수도, 환경일 수도, 체제일 수도 있다."  (p.214)


늦은 장마가 시작되면서 하늘은 연일 어둡거나 희미해지고 있다. 몸에 닿는 바람도 전처럼 건조하고 상쾌하지가 않다. 눅눅하고 끈적한 공기가 번번이 의욕을 꺾는 바람에 휴일이면 온통 쉬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우리는 기억의 원심력에 한없이 휩쓸린다. 우리를 강한 인력(引力)으로 빨아들이는 과거의 기억들이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할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대기 중의 습습한 알갱이들마다 나를 붙잡는 기억들로 가득하다. 습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나는 맥을 못 추고 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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