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길잡화점
이민혁 지음 / 뜰book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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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깊으면 그리움의 꼬리가 길다. 석양의 햇살을 받은 시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지 않는 것처럼 그리움의 시간이 두려워서 눈앞의 사랑을 밀쳐낼 수 없는 게 인간의 운명이다. 우리는 그저 사랑에 맹목적일 수밖에 없는 사랑의 청맹과니일 뿐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닥치는 인생의 모든 비극은 바로 그 지점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사랑이 없으면 인생 자체도 무의미하며 우리에게 닥칠 그 어떤 비극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사랑의 품은 넓고 크니까.


이민혁의 소설 <복길 잡화점> 역시 사랑 때문에 울고 웃는 한 집안의 2대에 걸친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1970년대에 시작된 경석과 연화의 사랑과 이제 막 꽃을 피우는 그들의 아들 복길과 민정의 이야기. 시대와 상황은 다르지만 알게 모르게 그들의 사랑은 닮아 있다. 그리고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닌 그들을 둘러싼 주변 이웃들의 내면에 흐르는 보이지 않는 사랑도 소설을 읽는 독자들의 마음을 한결 따뜻하게 한다.


"세상 모든 것을 녹이려는 듯 벌벌 끓던 태양도 주황빛 숯처럼 식어버린 저녁. 막차를 몰고 온 버스 기사는 "안 탈 거요?"를 외치다 먼지를 일으키며 떠나갔고 경석과 연화는 다시 뜨겁게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할 때까지 정류장과 아까시나무 사이를 수없이 걷고 또 걸었다."  (p.2)


좌판에서 장사를 하던 경석은 고등학생인 연화를 사랑한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입대를 하게 된 경석은 연화에게 사랑 고백을 하고 제대할 때까지 기다려 줄 것을 부탁한다. 월남전에 파병되었던 경석이 무사히 제대를 한 후 결혼과 함께 열게 된 복길 잡화점. 부지런하고 올곧은 성격의 경석과 마음씨 착한 연화는 작게 시작한 가게 복길 잡화점에 이어 복길 마트를 개업함으로써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어렵게 낳은 복길이 결혼을 하여 딸 소리를 얻었지만 병으로 아내를 잃고 만다.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은 소리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보살핌 속에서 밝게 성장한다. 게다가 어려운 시기에 경석 부부의 도움을 받았던 민정이 잡화점을 똑소리 나게 운영하는 한편 엄마처럼 혹은 언니처럼 소리를 돌본다. 철이 없는 복길은 자신이 벌였던 사업을 말아먹고 결국 경석으로부터 복길 마트를 넘겨받게 된다. 그러나 복길 마트 주변에 대형 마트가 입성함으로써 고객을 잃은 복길 마트는 사양길로 접어든다. 그런 와중에 청천벽력과 같은 연화의 치매 소식이 전해지고 어떻게든 연화의 병을 극복하려는 경석의 눈물겨운 노력이 진행되는데...


"연화는 저녁마다 '벅시'에서 풍겨오는 이국적인 버터 향을 맡으며 계산대에 앉아 군침을 삼켰었다. 지금껏 한 번도 저기 가서 식사를 해보잔 말을 하지 않았지만 경석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저곳을 얼마나 동경했는지⋯. 하지만 과거의 기억대로 움직이는 것이지만 좀처럼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은 경석이 우뚝 멈춰선다. "내가 꼭 한 번 당신 데리고 가고 싶었단 말야." 경석은 이미 새 원피스를 사주며 과거의 기억을 왜곡해버렸음에도 또다시 '벅시'에 데려가고 싶은 마음에 떼를 쓰고 있다."  (p.157)


연화가 세상을 뜨고 결국 혼자 남게 된 경석. 그의 곁에는 아들 복길이 사랑하는 민정과 손녀 소리가 있다. 복길이 연화의 치매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직원들과 함께 벌였던 눈물겨운 헌신은 철이 없었던 아들 복길을 움직였다. 복길은 자신의 부모가 걸어왔을 고난의 세월을 경석이 연화를 위해 재현했던 과거의 경험들을 통해 보고 배웠다. 복길의 행동은 그렇게 서서히 바뀌어 갔다. 곁에서 복길과 경석을 위해 노력하는 민정의 헌신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제 그들의 온기는 영원히 사라졌고 그 온기를 채워야 할 세대가 바로 자신이 됐음을 알게 된 복길은 두려움부터 앞선다. 그들이 나에게 주었던 만큼 나도 해낼 수 있을까. 이 집의 온기는 영원히 식지 않을 거란 믿음을 아이들에게 줄 수 있을까. 이 집의 지붕은 온갖 비바람을 막아줄 거란 인식을 가족들에게 남겨 줄 수 있을까. 복길은 이제 이 집의 새 주인이자 경석의 자리를 물려받은 가장이 되었다."  (p.224~p.225)


사랑이 깊으면 그리움의 꼬리는 더욱 길고 어둡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을 멈추지 않는다. 결국 우리가 마지막에 가져가야 할 것은 사랑했던 기억들뿐이기 때문이다. 날이 차다. 그러나 성탄절 연휴를 맞는 사람들의 가슴은 왠지 모르게 따뜻하다. 사랑은 그렇게 사람들의 온기 속으로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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