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머물렀던 화양계곡의 어느 농가에서 바라본 풍경은 평화로웠다. 사는 게 다 고만고만하지 않느냐는 주인 아주머니의 얼굴에는 세월 따라 익숙해진 체념이 덕지덕지 붙었고, 왠지 모를 서러움이 보는 이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차도 들어가지 못하는 비탈길을 300미터쯤 걸어 올라가야 비로소 닿을 수 있는 외딴집. 한 달마다 찾아오는 전기 검침원이 걱정되어 겨울에는 검침원이 오지 못하게 할 요량으로 계량기 읽는 방법도 익히셨다는 아주머니의 따뜻한 마음씨가 내 앞에 놓인 진한 생강차만큼이나 웅숭깊었다.

 

 

어제는 대입 수능시험이 있었고, 그래서인지 수험생도 아닌 나는 왠지 모를 나른함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환상처럼 가벼웠던 계절이 낙엽이 지는 가을의 끝자락에 무거워지는 건 신비로운 일이다. 잔망스럽던 사람들의 발걸음도 무거워지고, 세상이 온통 무지개처럼 빛나던 풍경도 무채색의 무거움으로 변한다. 세상의 무거움을 온통 겨울의 침묵이 감싸는 시간. 이제 2019년의 달력은 겨우 한 장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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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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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화된 계급 제도는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조선의 양반 제도가 그러했고, 인도의 카스트제도가 그러했으며, 미국의 노예제도 역시 같은 길을 걸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권력자에 의한 자의적인 신분제도는 다만 시간상의 문제일 뿐 언젠가는 무너지고 만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적 사례를 통해 배워왔다. 그러나 무서운 것은 공식화되지 않은, 말하자면 비공식적인 신분제도는 무너지기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국민 개개인이 자신의 계급을 알 수 없기 때문이며, 그 결과 동일한 계급의 사람들끼리 단합이나 결속을 꾀하기 곤란하며, 국가는 공식적으로 누구든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다고 선전하며 이로 인하여 자신의 신분이 낮은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채택하는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발생하는 문제이다.

 

"우리가 사회적 신분 상승을 찬양하지만, 거기에는 부정적인 면도 존재한다. 어떤 성질의 것이든 이동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신분 상승이라는 용어는 이론적으로 더 나은 삶을 향해 간다는 의미이지만, 어딘가로부터 떠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일단 떠나고 나면 과거의 생활을 더는 뜻대로 통제할 수 없다." (p.322)

 

<힐빌리의 노래>를 쓴 J.D. 밴스는 러스트벨트 지역 출신이었던 자신이 미국 최고 명문인 예일 로스쿨을 졸업한 후 실리콘밸리의 전도유망한 젊은 사업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회고록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쇠락한 공업 지대인 러스트벨트 지역은 애팔래치아 산맥에 가로막힌 척박하고 고립된 환경과 가난에 갇혀 미래를 포기해버린 사람들이 가정 폭력과 가족의 해체, 문화적 고립 속에서 살아가는 곳이다. 무식하고 난폭한 '힐빌리'들은 사회문제이자 복지 제도의 대상이었을 뿐, 그들의 목소리는 미국 내에서도 낯선 것이었다.

 

"나는 러스트벨트Rust Belt에 속하는 오하이오의 철강 도시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곳은 일자리와 희망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큰 폭으로 사라져가는 동네였다. 부모님과 나의 관계는 좋게 말해 복잡한데, 엄마는 거의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약물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를 키워준 외조부모님은 고등학교도 나오지 않았고, 친척들까지 포함해도 우리 집안에서 대학에 진학한 사람은 거의 없다. 통계적으로 나 같은 아이들의 미래는 비참하다. 운이 좋으면 수급자 신세를 면하는 정도고 운이 나쁘면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다. 자그마한 우리 동네에서 작년에만 수십 명이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p.10 '프롤로그' 중에서)

 

저자인 밴스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자신의 성공담을 설명하려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의 정점에 있는 미국 내에서도 자신과 같은 사회 하층민이 존재하며, 그들은 사람들의 냉대와 무관심 속에 하루하루를 살고 있지만 적극적인 개선을 요구하는 정당한 주장이나 요구가 없었던 까닭에 그들의 목소리는 사회 문제로 이슈화되지 않았음을 밴스는 자신의 책을 통해 알리고 있다. 밴스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겪었던 기억 저편의 과거를 날 것 그대로 기록함으로써 고통스럽고 처절했던 삶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약물 중독에 빠진 엄마와 일찍부터 양육권을 포기한 아빠, 가난과 가정 폭력, 우울과 불안 등 너무 이른 시기에 감당해야 했던 온갖 고통들을 담담하고 용기 있게 고백했던 저자는 자초한 상처로 고통받고 있는 그들의 문화를 적나라하게 폭로한 배신자로 불릴 위험을 각오해야 했다고 말한다.

 

"나는 우리 힐빌리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지독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머니를 모욕한 사람을 찾아가 전기톱을 들이대는 사람들이다. 또 우리는 여동생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여동생을 모욕한 놈의 입을 벌려 면 속옷을 욱여넣는 사람들이다." (p.392~p.393)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로 촉발된 우리 사회의 '공정'에 대한 요구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상황이다. 오죽하면 대통령까지 나서서 '교육이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특권을 대물림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상실감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을까. 그것이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닐지도 모른다.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대규모 시위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칠레와 볼리비아를 비롯한 남미에서, '노란 조끼 시위'의 프랑스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내려놓은 사람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계층 간 이동이 자유롭고, 노력만 하면 누구든 신분 상승이 가능하도록 제도적으로 정비하고 강력한 실천 의지로 이를 뒷받침하지 않는 한 시위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힐빌리의 노래>는 끊어진 계층 사다리를 억지로 돌파한 한 명의 돌연변이에 대한 찬사의 글이 아니다. 밴스 자신이 겪었던 생생한 가족 이야기와 밴스가 제기하는 문제들이다. 힐빌리들이 겪는 불운한 인생에서 그들의 책임이 과연 어느 정도나 될까. 힐빌리 문화로부터 분리되기까지 밴스 자신이 겪어야만 했던 수많은 시행착오와 멸시와 냉대, 자신의 내면에 뿌리 깊게 내려앉은 힐빌리의 문화들. 그럼에도 되돌아가지 않고 스스로를 발전시켜왔던 나날들. 책을 읽는 독자들이 새롭게 깨닫는 사실은 우리 다음 세대 중 절반 이상이 힐빌리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적어도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아야 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이다. 튼튼한 계층 사다리를 복원하기 위해 우리는 과연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할까.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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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관한 9가지 거짓말
마커스 버킹엄.애슐리 구달 지음, 이영래 그림 / 쌤앤파커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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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교육을 모두 마친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거쳐온 학교 시스템 혹은 교육 과정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거나 학교 교육 전체에 대한 무용론을 가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학교라는 제도는 사실 개개인의 재능과 능력을 극대화하는 데 집중한다기보다 그들이 속한 공동체에 적응하고 체제에 순응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 역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학교는 개인의 자유를 일정 부분 제한함으로써 사회 구성원이 그들이 속한 공동체에 순응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고, 구성원 각자는 좋든 싫든 공동체가 요구하는 기본적인 교과목을 학습하도록 요구받는다. 개인의 타고난 능력 혹은 좋아하는 분야만 개발하도록 무제한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학교는 재미없거나 따분한 곳이 되고 만다.

 

성인이 된 후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학창 시절에 배웠던 일에 대한 관념들은 하나 둘 거짓으로 판명되거나 진실과는 사뭇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예컨대 '최고의 계획은 성공이다', '최고의 인재는 다재다능한 사람이다', '사람들에게는 잠재력이 있다', '리더십은 중요한 것이다' 등과 같이 일과 결부된 관념들은 실상 현실에서 크게 벗어나 있음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강점 혁명'으로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 마커스 버킹엄과 애슐리 구달은 이와 같은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일에 관한 9가지 거짓말>을 썼다.

 

"이 책에는 9가지 거짓말이 나온다. 피카소에 따르면 "모든 창조 행위의 출발은 파괴"이므로 어떤 강하고 정교한 것을 만들기보다 먼저 각각의 거짓말을 해체하고(일련의 사소한 사례에만 적용하는 진실로 출발해 모든 사례에 적용하는 거짓말로 퍼져 나간 방식을 파악하고) 그 뒤에 숨은 더 광범위한 진실을 밝히는 방향을 택하고자 한다." (p.16 '시작하며' 중에서)

 

성실하게 출근한 직장인들 중 자신의 업무에 몰입하는 사람은 100명 중 15명뿐이라고 한다. ADT연구소가 전 세계 19개국 2만여 명의 직장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85명은 자신의 업무를 설렁설렁 해치우거나 마지못해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이 그들의 의욕을 꺾고 몰입을 방해하는 걸까? <일에 관한 9가지 거짓말>은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해결책을 제시한다. 사실 이 책은 ADP 연구소의 '2018 세계 업무 몰입도 연구'의 통계조사 분석 결과, 우리가 이제껏 일에 관해 진실이라고 믿어온 수많은 것들이 다 거짓임이 드러났고, 그 논문은 그 현상과 원인을 적나라하게 분석해 경영계, 기업계에 큰 충격을 주었던 바,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쓰인 것이다.

 

"결국 오늘날 많은 회사가 그렇게 하듯 도급업자나 긱 워커를 팀에 더 빨리 진정성 있게 받아들일수록 그들의 업무 몰입도와 생산성은 높아지고 이직률은 낮아질 가능성이 크다. 물론 그 역도 참이다. 더 많은 기업이 전형적인 정규직을 긱 노동과 유사하게 만들수록, 즉 팀원이 더 유연성을 누리고 더 강한 주인의식을 갖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할 기회를 많이 줄수록 정규직의 업무 몰입도와 생산성은 높아지고 이직률은 낮아질 것이다." (p.333)

 

우리가 잘못 알고 있던 게 어디 일뿐이랴. 그저 습관처럼, 편견과 선입견으로, 대물림되듯 잘못된 지식을 대대로 학습함으로써, 혹은 과거에는 사실이었지만 지금은 달라진 까닭에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채 사실인 양 믿고 지내는 것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산재해 있지 않을까. 정시 확대로 촉발된 교육의 공정성 문제만 보더라도 사실 정시냐 수시냐의 문제가 아니라 입시제도의 단순성이 확보된다면 편법이 끼어들 가능성도 줄고 어느 정도의 공정성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대학이 잠재력이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려면 학과 교수들이 모여 지원 학생 각자를 심층 면접하면 된다. 그러나 수천, 수만 명의 지원 학생을 장시간에 걸쳐 심층적으로 면접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입시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학부모 전체의 설문조사를 통해서 결론지어야 하지 않을까. 교사를 포함한 교육계는 적극 반대하겠지만. 어디 그뿐인가. 몇몇 학생들이 모여 조국 반대 시위를 했다고 해서 대학 전체가 반대하는 양 보도하는 언론의 행태에 의해서 우리는 거짓을 사실인 양 믿게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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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는 최근 시골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도시와 멀어질수록 주민의 평균 연령은 높아지고, 최신 트렌드와 유행 코드와는 멀어지게 마련이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말이다. 개중에는 은퇴 후 귀촌을 한 사람도 있고, 젊은 시절 나름 패셔니스타라고 자부했던 사람도 있게 마련이니까. 그런데 하나 재미있는 건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도 자신의 이념과 사상에 따라 그 친밀도가 나뉜다는 점이다. 마을이라 봐야 손바닥만 한 작은 지역이고 가구수도 많지 않은데 설마 사상과 이념이 다르다고 해서 서로 반목하며 데면데면 지내겠느냐 싶겠지만 사실이란다.

 

나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 할수록 그게 어느 정도 사실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보수적 색채가 짙은 사람일수록 현 정권과 대통령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과 거친 표현이 수위를 더했다. 말의 품격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개 XX라든가 호로 XX라든가 욕설도 서슴지 않았다. 처음 보는 나에게 그런 저속한 표현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품위만 떨어진다는 걸 잘 알 텐데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뱉는 걸 보면서 내가 오히려 당황스럽고 민망하였다. 학력이 낮은 사람만 그러는 게 아니었다. 배울 만큼 배웠다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언어 사용의 저속함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나의 추론은 경쟁심에서 출발한다는 결론이다. 그들에게 경쟁은 그야말로 총칼을 들고 대치하는 전쟁에 가깝다는 인식이 지배적이고, 그러므로 아무리 사소한 경쟁에서도 패배는 곧 죽음과 같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이념이 다른 마을 사람들조차 적으로 만들었다는 게 나의 결론이다. 공동체 의식은 사라진 지 오래고 대화와 포용의 상대는 실종되었다. 물론 경쟁에서 이기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라고 말할 수도 있겠고, 경쟁의 저변에는 개인의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보수를 지향하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그 정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빤스 목사가 학력이 낮아서 그런 거친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닌 것처럼 소위 보수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저속한 언어 사용으로 인해 보수 세력에 대한 민심 이반 현상은 가속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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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 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실질적 조언
샐리 티스데일 지음, 박미경 옮김 / 비잉(Being)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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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0월 31일마다 듣게 되는 노래가 있다. 원하든 원치 않든 말이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라는 노랫말에서 우리는 이별의 슬픔과 계절의 스산함을 동시에 느끼곤 한다. 가수 이용이 부른 '잊혀진 계절'은 그렇게 10월을 대표하는 명곡이 되었다.

 

금년에도 다르지 않았다.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이용보다는 가수 아이유가 부른 '잊혀진 계절'을 더 많이 들었다는 것뿐. 그러나 올해는 예년과 다른 어떤 것이 있었다. 10월 31일을 몇 분 남기지 않은 시점에 우리에게 속보로 전해진 안타까운 사건. 어업 중 다친 선원을 병원으로 옮기기 위해 출동했던 소방헬기의 추락. 헬기에는 환자와 보호자 구조대원 등 7명이 타고 있었다. 헬기에 탑승했던 구조대원 중에는 유일한 여성 탑승자이자 소방관으로서 자부심이 컸던 새내기 구조대원과 결혼한 지 겨우 2개월 된 새 신랑 구조대원도 있었다고 했다. 이틀이 지난 지금도 그들을 찾는 수색작업이 진행되고는 있지만 탑승자의 시신 3구만 겨우 찾았을 뿐이라고 하니 탑승자의 가족들에게는 올해의 10월 31일이 그야말로 '잊혀진 계절'이 되지 않았을까. 어쩌면 가족을 잃은 큰 슬픔으로 인해 '잊을 수 없는 계절'이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작가이자 완화의료 분야 종사자이기도 한 샐리 티스데일의 책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는 우리에게 죽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가장 먼 미래는 '죽음'이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미래의 범주 속에 '죽음'을 끼워넣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다. 자신은 언제나 예외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삶의 끝은 '죽음'으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좋은 죽음이란 무엇이며,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이 좋은 죽음이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10년 넘게 완화치료 간호사로 일한 샐리 티스데일의 조언을 들어보자.

 

"사람들은 흔히 자기 몸을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상태에서 조용히 떠나는 걸 상상한다. 흠, 그야말로 상상이다. 소위 좋은 죽음에 대한 이상이 우리를 옥죄고 있다. 죽음은 성공이냐 실패냐의 문제도 아니고, 성취해야 할 대상도 아니다. 삶과 죽음은 소유물이 아니다. 죽음이 특정 방식을 띠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와 다를 땐 나쁘다고 판단할 것인가? 남들이 원하거나 계획한 방식을 함부로 왈가왈부하지 마라. 어차피 혼자서 가야 할 길이다." (p.76)

 

우리 민족에게도 '죽음'에 대한 그와 같은 선입견이 있다. 나이가 들어 숙환으로 별세했을 때 조문을 온 문상객들은 '호상'이라며 상주와 가족들을 위로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가족들의 슬픔을 고려하지 않은 채 말이다. '호상'이라는 평가는 그야말로 자의적인 해석일 뿐만 아니라 '죽음'을 맞는 당사자가 아닌 살아 있는 자들의 일방적인 해석일 뿐이다. 저자는 자신의 삶과 일에서 마주쳤던 여러 '죽음'에 관한 일화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전 세계 다양한 문화와 전통과 문학에서 찾은 죽음의 일화를 통해 우리가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맞이하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 현실적인 조언을 책에 실었다. 

 

"석양은 우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서서히 저문다. 우리는 위태로운 삶을 너무나 소중히 여긴다. 눈앞에서 덧없이 흘러가는, 변화무쌍한 삶에 간절히 매달린다. 우리는 나날이 빛나는 특별한 삶을 찬미한다. 하지만 태어난 모든 것에는 죽음이 따른다. 아무리 다정하고 완벽한 만남도 결국엔 헤어짐이 있다. 우리는 스러져가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을 바라본다.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바람, 뺨에 와 닿는 숨결, 물 한 모금, 힘없이 떨어지는 단풍,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 우리 자신의 삶." (p.298)

 

저자의 결론은 간단하다. 죽음을 터부시하면서 마냥 피하고 등질 게 아니라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여 정확하게 인식하면 할수록 우리의 삶은 풍성하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불안을 극복함으로써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가자는 게 저자의 주장일 수 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의 순간을 위해 부록에 실린 죽음 계획서와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 장기와 조직 기증, 조력사 등도 도움이 될 수 있겠다.

 

"나는 신문에 실리는 사망 기사를 즐겨 읽는다. 짤막한 기사에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가 놀랍도록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나는 목록을 훑어보면서 거의 대부분 늦은 나이에 사망했다는 사실에 내심 안도한다. 고백건대, 나한테는 그 점이 무척 중요하다. 텔레비전을 보면, 연쇄 살인범 손에 죽거나 청초한 모습을 간직한 채 암으로 죽거나 음주 운전자의 차에 치여 죽는 사람이 아주 많다. 하지만 미디어가 심어준 믿음과 달리, 우리는 대개 지구상에 존재했던 대다수 사람들만큼, 혹은 그들보다 더 오래 살 것이다." (p.184)

 

어제는 '내게도 사랑이', '풍문으로 들었소' 등으로 유명한 가수 함중아가 향년 67세의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났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음'은 우리의 곁을 서성이며 대상을 물색하고 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그것이 우리가 처한 운명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처럼 오늘을 산다. '죽음'이 선명할수록 삶은 소중해진다. 다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세먼지로 탁해진 대기 속에서도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의 자태가 선명했던 하루였다. 어쩌면 가을은 '죽음'을 사색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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