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뻘짓이란 '아무런 쓸모없이 헛되게 하는 짓', 말하자면 '허튼짓' 혹은 '헛짓거리'를 일컫는 서남 방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뻘짓에도 등급이 있어서 철없는 아기들의 무해한(보는 이들에게 웃음과 사랑스러움을 무한대로 공급한다는 측면에서 한편으로 유익한), 최상위 등급의 뻘짓에서부터 모든 이들에게 해로움만 안겨줄 뿐 그 누구에게도 이로움이 없는 최하위 등급의 뻘짓(이를테면 지난 3일 윤석열 씨의 비상계엄령 선포와 같은)이 존재한다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물론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뻘짓은 유익하지도 유해하지도 않은,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우연찮은 몸개그 등과 같은 생활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간 등급의 뻘짓이겠지만 말입니다.


12월 3일 화요일, 소비자의 날이기도 했던 바로 그날 우리는 영화에서나 보았음직한 한 장면을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목격하고, 허둥지둥 안정을 찾지 못하고, 분노와 공포 속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습니다. 그 발단은 바로 미치광이 윤석열의 비상계엄령 선포였습니다. 국민 대다수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뜬금없는 일이었습니다. 무장 병력이 국회에 난입하고 이를 저지하는 시민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장면을 현실에서 목격해야만 했습니다. 국내는 물론 전 세계의 언론에 긴급 뉴스로 타전되는 상황을 보면서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이유 하나로 창피함을 넘어 '아,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하는 통탄과 울분의 감정을 삭여야 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중대 범죄를 저지른 자였지만 대통령이라는 직위 하나로, 최고 권력자라는 이유 하나로 그는 국민들의 분노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사나흘의 잠행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다 오늘, 탄핵 표결이 예정된 12월 7일 토요일의 오늘 별것 아니라는 듯 사과 한마디 툭 던지고는 사라졌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극심한 혼란 상황에서 한 주를 보내지 않았을까 싶은데 정작 이와 같은 혼란의 주범은 너무나 당당하고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와 같은 미치광이를 최고 권력자로 선출한 데에는 뭐니뭐니 해도 권력에 붙어 기생하는 언론과 종교인들의 책임이 크다 하겠습니다. 해방 이후부터 성장한 개신교 목사들과 MB 이후 권력의 맛을 알기 시작한 불교계 인사들이 윤석열과 같은 괴물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윤석열에 버금가는 괴물들은 국민의힘 내에 차고도 넘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지금 이 시간에도 자신들의 잇속을 챙겨줄 인사를 찾기 위해 개신교와 불교계는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우리는 그들의 이름 앞에 성스러울 성(聖) 자를 붙여 성직자로 칭하기도 합니다. 일반 소시민보다 더 욕심이 많고 사악한 그들을 두고 말입니다. 괴물 정치인이야 어쩌다 탄핵이라도 된다지만 괴물 성직자와 언론인은 탄핵도 불가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진정한 권력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윤석열이라는 괴물 정치인을 몰아내기 위해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힘을 소진해야 할까요. 그를 몰아내기 이전에 우리는 권력에 기생하는 종교인과 언론인부터 솎아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살아 있는 한 윤석열과 같은 괴물 정치인은 우리들 앞에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최하등급의 뻘짓으로 우리를 놀라게 할 테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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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08 1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2-08 16: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그 당시 나는 초등학교 4,5학년쯤 되지 않았을까 싶다. 햇살이 따사로웠던 주말의 어느 봄날, 나와 친구들은 낡은 텐트를 둘러메고 산을 올라 양지바른 언덕의 묏등 잔디밭에 텐트를 쳤다. 강원도의 봄은 언제나 지축을 뒤흔들 듯한 바람과 함께 시작되는데 그날도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좁은 텐트 안에서 바람을 피하며 쏟아지는 봄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이제는 슬슬 내려가야겠다 생각할 즈음 한두 살쯤 어린 동네 후배들이 지나가다 우리를 발견하고는 뭐 하느냐며 다가왔고, 이런저런 시답잖은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그들 무리 중 한 명이 라이터에 불을 붙여 마른 잔디를 태우기 시작했다. 쉽게 끌 수 있겠거니 생각하고 작게 시작된 불장난은 바람에 의해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불길은 묘의 주변을 둘러싼 어린 소나무까지 옮겨 붙었다. 더럭 겁이 나기 시작한 것은 그때쯤이었고, 누가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닌데 우리는 다들 손에 솔가지를 꺾어 들거나 상의를 벗어 들고 번지는 들불을 끄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들불과 사투를 벌인 결과 간신히 불길을 잡긴 했으나 그곳에 있던 아이들의 몰골은 봐주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했다. 눈썹이 그슬린 것은 물론 숯검정이 묻어 가관이었다. '들불처럼 번지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이 그야말로 들풀처럼 번지고 있다. 어찌나 많은지 각각의 선언문을 일일이 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선언문이 더러 있었다.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로 시작하여 '우리는 이제 폐허 속에 부끄럽게 머물지 않고, 인간다움을 삶에서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새로운 말과 현실을 발명하기 위해 함께 목소리를 낸다. 대통령으로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무관심하며, 거짓으로 진실을 가리고, 무지와 무책임으로 제멋대로 돌진하는 윤석열은 즉각 퇴진하라!'는 말로 끝을 맺고 있는 경희대 시국선언문과 '어째서 사람이 이모양인가!'라는 질책으로 시작하여 '오늘 우리가 드리는 말씀은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니 방관하지 말자는 뜻입니다. 아무도 죄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매섭게 꾸짖어 사람의 본분을 회복시켜주는 사랑과 자비를 발휘하자는 것입니다.'로 끝을 맺고 있는 천주교 사제 1466인 시국선언문이었다. 물론 '당신은 더 이상 우리의 대통령이 아니다.'는 선언으로 시작하는 연세대의 시국선언문에도 눈길이 갔다. 그렇다고 다른 대학의 시국선언문을 숫제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꼼꼼히 읽고 기억하지 못했을 뿐이다한 번 번진 들불은 끄기 어렵다. 타오르는 불꽃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이리 날고 저리 건너뛰는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그 무서움을 잘 안다. 그러므로 들불은 발원 자체를 차단하는 게 최선이다. 그렇지 않다면 발화의 초창기에 사람들 모두가 합심하여 꺼야만 불길을 잡을 수 있다. 들불이 번져 숲으로 옮겨 붙었다면 그 피해는 장담하기 어려워진다.


엊그제 28일에는 대통령의 모교인 서울대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있었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윤석열 대통령 퇴진과 김건희 특검에 뜻을 모은 동료 시민들, 전국 각 대학의 동료 교수·연구자들과 함께 윤석열 정부의 조속한 퇴진을 강력하게 촉구합니다.'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고 있는 서울대 시국선언문. 이 정도 됐으면,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사과하고 물러나는 게 순리이겠으나 대한민국의 국민 모두는 당사자인 그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는 부끄러움도, 미안함도,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나 애국심도 전혀 없는 철면피 무뢰배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그 누구보다 자신의 부인을 사랑하는 사랑꾼임을 자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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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4-11-30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끄러움을 아는 자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죠. 그래서 인간으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꼼쥐 2024-12-01 15:15   좋아요 0 | URL
문제는 스스로 물러나려고 하지 않는 자를 물러나게 해야 한다는 점이죠. 국민 대다수의 고민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같은 날 사람들의 주제와 관심사는 단연코 첫눈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압수수색 하는 날 웬 눈이야!" 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지방 출장 갔다 와야 하는데..." 하면서 발을 구르는 사람도 있을 테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오늘은 펑펑 쏟아지는 첫눈을 보면서 깊은 상념에 젖거나 첫눈에 얽힌 몇몇 장면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첫눈이란 누구에게나 특별한 감정을 던져주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감정 역시 신체와 별반 다를 게 없어서 나이가 들수록 점점 메마르거나 지극히 현실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 건 어찌할 수 없는가 보다.


사무실 근처의 한 중학교에서도 학생들이 창문을 열고 눈 내리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이가 어릴수록 눈에 대한 상상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상상력과 기쁨은 하루가 다르게 감소하고 손에는 눈처럼 텅 빈 허무와 아쉬움만 덩그러니 남는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눈에 대한 상상력을 모두 잃은, 냉랭한 시선의 인간이 되었음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빅토리아 베넷이 쓴 <들풀의 구원>은 아름다운 책이다. 오늘처럼 눈보라가 몰아치고 옛 기억이 눈처럼 쌓여, 나의 휑한 가슴에도 그리운 이의 말과 추억이 소복소복 쌓이는 날에 읽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를 것만 같은 그런 책이다.


"어머니의 삶이란 무엇으로 측정될까? 드러나지 않은 사랑의 행위는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고, 가치는 인정받지 못한다. 우리가 뒤늦게야 잃은 것의 무게를 마치 손에 바다의 돌을 쥔 것처럼 느끼는 날까지. 나는 공책과 영수증과 작은 스크랩북을 낡은 패치워크 치마 자투리에 싸서 망가지지 않도록 보관한다. 이것은 어머니가 살아냈던 문자들이다. 과거로부터 내 펜이 조급하게 또각거리며, 말이 영영 사라져버리기 전에 우리 삶의 해설지에 뭐라도 적어넣고 싶어 한다. 나는 어머니에게 내가 본다고, 기억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한 인생에 담긴 그 수많은 작은 사랑의 행위들은 어머니가 매일같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낸 선물이었으며, 어머니는 그 하나하나의 행위를 통해서 자기 꿈의 씨앗을 뿌린 것이었다. 어머니는 이 얼마나 멋진 정원을 우리에게 만들어줬는지."  ('들풀의 구원' 중에서)


귀가를 서두르는 사람들의 어깨 위로 어둠이 내리고 있다. 낮에 내리던 진눈깨비는 밤이 되자 무게를 잃고 가벼워졌다. 그러나 삶의 무게는 밤이 되어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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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심란하거나 울적할 때면 찾게 되는 사람이 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말이다. 물론 책을 읽어도 좋겠지만 어떤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가 더러 있어서 그런 순간에는 책이란 한낱 장식품에 불과할 뿐, 마음의 양식으로서의 역할은 기대하기 힘들어진다. 심리적으로 지치거나 바닥으로 가라앉아 수면 위로 떠오르기에는 어떤 자구책도 그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어진 상태, 자력으로 물을 박차고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미는 것이 불가능한 어떤 순간에는 사람의 힘을 빌리는 것이 정답이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되는 것이다. 부모님을 모두 여읜 나로서는 누군가에게 터놓고 하소연할 처지도 아니지만, 살아 계셨을 때도 살갑게 굴던 자식은 아니었으니 나는 어쩌면 가족보다는 오히려 피가 섞이지 않은 외부의 누군가로부터 더 큰 위로를 받으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울적하여 기신기신 영 기운을 차리지 못할 때면 나는 언제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성직자분들을 찾곤 한다. 성당 신부님이나 교회 목사님, 또는 사찰의 스님이 그런 분들이다. 그분들을 어떤 종교적 목적으로 찾았던 적은 없는 듯하다. 물론 천주교 신자를 자처하는 나로서는 어쩌다 신부님을 대할라치면 으레 몸이 굳고 예를 갖춰야 할 것 같은 강박이 모든 행동거지를 불안정하게 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무도 없는 산꼭대기 암자에서 도무지 내려올 생각을 않는 스님에게 어리광을 부리듯 전화를 걸 때가 많다. 스님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말이다.


어젯밤에도 스님과 통화를 했었다. 말이 좋아 안부전화지, 내가 필요로 하지 않을 때는 스님께 전화를 걸었던 게 1년을 다 합쳐야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은 게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스님도 내 전화라면 귀찮은 내색을 하지 않으신다. 밤이 깊도록 스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문득 내 귀에 얹혀 오늘까지 나를 괴롭혔던(?) 말이 있다.


"소멸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연민을 느껴야 해.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이 우주에 소멸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 심지어 아주 강한 듯 보이는 바위 덩어리도 약하디 약한 물과 바람과 햇빛에 의해 소멸하잖아. 이 광대한 우주에서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다만 소멸하고 다시 만들어지는 데는 다 의미가 있는 거야. 그걸 잊지 말았으면 해."


시인 한정원의 에세이집 <내가 네 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가까이에서 더러 보아왔다. 기억을 잃어가는 것. 내 조부가 그랬고, 내가 돌보던 시설의 여성들이 그랬고, 내가 존경하는 수도승이 그랬고, 이제 내 나이든 고양이가 그렇다. 순간순간 그들의 눈 속에서 빛이 꺼지고 눈동자가 멈추는 것을 목도했다. 그럴 때 그들은 아주 먼 데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시선을 나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기억을 잃으면, 사랑했다는 기억을 잃으면, 끝내 사랑을 잃는 것이라는 사실을 감각할 수 있게 되었다."


작금의 이 무도한 정권을 보다 못한 각 대학 교수님들의 시국선언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올여름이 그랬던 것처럼, 어젯밤 스님의 말씀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들 역시 소멸할지니, 소멸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연민을 느껴야 한다는 스님 말씀을 가슴에 새기려 애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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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4-11-22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쥐님의 글 속에 ˝성주괴공(成住壞空)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뜻이 담겨 있네요. 게다가 그러한 것들에 연민을 느껴야 한다는 스님의 귀한 말씀, 저도 함께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 합니다.

꼼쥐 2024-11-24 12:48   좋아요 1 | URL
저는 사실 무식하기 짝이 없어서 스님의 말씀을 절반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지만, 그럼에도 스님과의 수다를 끝내고 나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지고 힘이 나곤 합니다. 공짜로 정신과 상담을 받는 기분이랄까, 뭐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댓글 감사합니다.^^ 즐거운 휴일 보내시길~~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호명을 하면 구름 속에 숨었던 누군가가 "네!" 하고 금세 대답을 할 것만 같은, 어두운 구름이 깔린 스산한 날씨였다. 옷깃을 파고드는 소소리바람. 어제와 오늘을 분명하게 구획하려는 듯 급변한 날씨. 늦여름에서 겨울로, 또는 초가을에서 겨울로 넘어온 듯한 날씨 탓에 사람들은 꽤나 당혹스러운 듯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듯 햇빛 한 점 없이 어두운 하늘을 보며 나는 올 한 해도 다 갔구나, 하는 푸념을 긴 한숨과 함께 뱉었다.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학가의 시국 선언이 줄을 잇고 있다. 국민들의 인내심이 점점 임계치에 이르고 있다는 신호가 아닌가. 모 대학의 시국 선언문 명단에 이름을 올린 사람 중에는 나의 오랜 친구도 끼어 있지만 사실 대학 교수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들은 대개가 보수적인 성향이 일반적이고, 일부 진보적 성향의 지식인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직위를 걸 정도의 위험한 도박은 결코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전면에 나섰다는 것은 어쩌면 지금의 권력이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올여름의 더위가 하루아침에 급변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 징후를 감지하고 앞에 나설 수 있는 지식인이 존재한다는 건 한없이 가라앉던 우리나라에게도 약간의 희망이 존재한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미약하지만 다시 되살릴 수 있는 희망의 불씨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믿고 그동안 붙잡아왔던 절망과 자조의 끈을 과감히 놓아야 한다.


어제는 비가 내렸다.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었다. 그들의 목소리도 시국 선언을 하는 대학 교수들의 뜻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국가 경제는 나날이 기울고, 한반도의 전쟁 위험은 나날이 증가하고, 공정과 상식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저소득층과 서민을 위한 대책과 복지는 나날이 감소하고, 오직 내 편 나를 위해 충성하는 자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이 정권의 비열함에 사람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우리는 여러 나라가 기대고 있고 또 열심히 전파하는 창건 신화에 익숙해요. 점령한 권력에 대항한, 귀족과 교회의 압제에 대항한 영웅적 투쟁의 신화, 피를 흘려 자유라는 약한 식물을 기른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투쟁의 신화. 그러나 르낭은 그런 투쟁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르낭은 나라로 존재하려면 자기 역사를 잘못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우리나라가 대변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믿기 위해 항상, 매일, 작은 행동과 생각, 또 큰 행동과 생각에서 우리 자신을 속여야 해요. 위안을 주는 잠자리 동화를 늘 반복하듯이." (줄리언 반스의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그럴지도 모른다. 지금의 대통령이 취임한 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나라로 존재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국민 대다수가 '항상, 매일, 작은 행동과 생각, 큰 행동과 생각에서 자신을 속여' 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대통령이 공정과 상식을 실천할 거라고.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거짓을 진실인 양 끝없이 속여 온 덕분에 대한민국은 망하지 않고 건재한 것인지도 모른다. 위태위태하지만 쓰러지지는 않은 채.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호명을 하면 구름 속에 숨었던 누군가가 "네!" 하고 금세 대답을 할 것만 같은 날씨가 종일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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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4-11-17 13: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경희대 교수님들의 시국선언문을 읽고 먼가 울컥했었습니다! 빗속에서도 촛불을든 시민들을 보면서 미안하고,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이제는 절망과 자조의 끈을 놓고 새로운 희망을 실현해야 할 시간인것 같습니다! 좋은글 보고 힘내서 저도 열심히 새 희망을 외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ㅎ

꼼쥐 2024-11-19 15:18   좋아요 1 | URL
경희대 교수님들의 시국선언문은 조금 특별했죠. 저도 읽어보았습니다. 감동적이기도 했고 말이죠. 어쩌면 이게 시작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지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