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것엔 언제나 애틋함이 묻어납니다. 흘러가는 세월, 흘러가는 강물, 흘러가는 구름, 흘러가는 이야기, 그리고... 흘러가는 모든 것에 대한 애틋함은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불가역성에 있습니다. 지금의 나는 과거 청소년기의 나나 청년기의 나와 한 몸이지만 엄연히 다른 존재, 그러나 세월을 거슬러 지금의 내가 청년기의 나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영원히 오지 않습니다. 강물 위에 떠가던 지난가을의 단풍잎을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와 같은 애틋함을 잊어버리거나 순간순간 지우기 위해 우리는 파편화된 시간을 살아가곤 합니다. 에크하르트 톨레와 같은 선지자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흘러간 거리가 멀면 멀수록 흘러가는 것에 대한 애틋한 감정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속절없이 떠밀려가는 그 과정이 서글프고 애틋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3.15 의거 기념일입니다.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민.학생의 평화적 시위가 있었고,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키려는 경찰에 맞서 격렬한 투석전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소위 '마산 데모 사건'이었습니다. 당시에 경찰의 무차별 발포와 체포.구금으로 희생자가 속출하자 이에 맞서 저항했던 시위대 중 8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던 바,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17세의 마산상고 신입생 김주열 열사는 행방불명되었다가 27일이 지난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4.19 의거의 도화선이 되었던 이 사건과 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인해 결국 이승만 독재정권이 붕괴되었습니다만, 희생자들에 대한 감사와 추모의 마음은 해가 갈수록 약해지는 듯합니다.


캐나다 작가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이 쓴 <고요의 바다에서>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등장합니다.

"그것이 현실 아닐까? 우리 대부분은 상당히 비(非)클라이맥스적인 방식으로 죽지 않을까? 우리가 떠났다는 사실이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눈에 띄지 않고, 우리의 죽음은 주변 사람들의 서사에서 하나의 플롯 포인트가 될 뿐인 것 아닐까?"  (p.143)


흘러가는 것엔 언제나 속절없는 안타까움과 애틋함이 묻어납니다. 출발점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애틋함의 강도는 더욱 높아져 삶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최고점에 도달하겠지만, 우리는 여전히 '지금 이 순간을 살라'는 말에 현혹되어 조각조각 파편화된 시간을 바쁘게 살아가면서 그 애틋함을 못 본 체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는 그 애틋함을 일부러 회피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흘러가는 것엔 언제나 애틋함이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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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3-15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흘러가는 것, 하면 서유석의 <가는 세월>이 그냥 떠오르네요.

꼼쥐 2026-03-18 14:53   좋아요 0 | URL
저도 그 노래는 왠지 익숙합니다.
 

아침 산행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마치 단골식당의 주인아주머니와의 관계만큼이나 뭐라 한마디로 규정지을 수 없는 애매한 측면이 있다 하겠습니다. 오랫동안 자주 만나던 사이이니만큼 가깝고 익숙하지만 서로 사는 곳도, 이름도 알지 못하는(알려고도 하지 않는) 까닭에 언제든 관계를 좁힐 수 있는 여지만 남겨둔 채로 기존의 관계를 무한정 연장하는 그런 사이라고나 할까요. 매일 새벽 남들이 다 잠에 취해 있는 시각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산에 올라 늘 마주치는 장소에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때로는 짧은 덕담을 건네기도 하고, 일 년에 한두 번쯤 넋두리 삼아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면서 불편하지 않은 관계를 수 년째 이어오고는 있지만 서로의 이름도, 연락처도, 사는 곳도 모른 채 지내왔던 것입니다.


내가 요즘도 매일 아침 오르는 아파트 뒤편의 야산에서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또 많은 사람들과 악수조차 없이 헤어졌습니다.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2년쯤 전에 욕쟁이 할머니가 등산로에서 사라지더니 네댓 달 전쯤에는 언제나 말을 곱게 하시던 소녀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달 중순께부터는 멋쟁이 할아버지마저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겨우내 추위 속에서도 서로를 격려하며 거르지 않고 산에 오를 수 있도록 힘을 북돋워주던 분이셨는데... 1940년생이라고 하셨던 멋쟁이 할아버지는 얼마 전에 올린 나의 블로그 포스팅에서도 언급이 있었지만 지난해 여름까지만 하더라도 정정하셨는데 언제부턴가 한 손에 지팡이를 짚으신 채 나타나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운동에 열심이셨는데, 이제는 숫제 나타나지 않으시는 걸 보면서 나는 운동을 마치고 산을 내려오는 순간까지 이상한 상상에 빠지곤 합니다. '그렇지 않을 거야. 갑자기 이사를 가게 된 것일 테지.' 나는 애써 그런 생각을 하며 나쁜 생각을 떨쳐내곤 합니다.


나는 요즘 내가 좋아하는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이야기를 들려줘요(Tell Me Everything)>를 읽고 있습니다.


"내 요점은,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아주 복잡하다는 거예요. 밥, 우리는 모두 아주 복잡하고, 우리가 누군가와 한 순간이라도 - 어쩌면 평생 - 같이 한다는 건 우리가 그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연결되어 있어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연결되어 있지 않죠. 왜냐하면 누구도 다른 사람의 마음속 깊은 틈으로는 들어갈 수 없으니까요. 심지어 그 사람 자신도 자기 마음의 깊은 틈으로는 들어가지 못해요. 하지만 우리는 - 우리 모두는 - 그럴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요. 그리고 난 그걸 존중해요, 밥. 정말로 존중해요. 하지만 우리 누구도 단단한 땅에 서 있지 않아요. 우리는 그저 우리가 그렇다고 스스로 말할 뿐이에요. 그리고 그래야 하고요. 나는 그걸 알 것 같고, 앞서 말했듯 존중해요. 나는 단지......" 그러고는 말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는데,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p.306~p.307)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속 깊은 틈으로는 들어갈 수 없지만, 그럴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가 하면 우리는 단단한 땅에 서 있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스스로 말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며칠 미세먼지로 탁하던 대기는 다시 깨끗해졌습니다. 열흘을 넘겨 계속되고 있는 중동 지역의 전쟁은 지금도 포화가 그치지 않고 이어지는가 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것은 물론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고 있는데 그들을 조롱하고 아무일 아니라는 듯 지껄이는 미친 작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일러 '악마' 또는 '사탄'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고, 누군가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트리는 순간 그 절망의 화살이 복수의 칼날이 되어 나에게 향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말입니다. 우리에게는 달콤한 휴식이 주어질 테지만 전쟁의 포화 속에 있는 그들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 밤잠을 설칠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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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별별 유형의 사람을 다 만나게 되지만 유독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사에 거침이 없고, 자신이 마치 모든 분야에 정통한 듯 행동하는, 좋게 말하면 경력직 인생을 살고 있는 듯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특징은 자신의 말과 행동에 주저함이 없고, 자신이 하는 말이 진리인 듯 떠벌린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어떠한 결과가 발생하고, 그 결과로 인해 혹시나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는 그들 머릿속에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도 면밀하게 팩트체크를 해보면 오류 투성이인 경우가 다반사이지만 신경 쓰지 않습니다. 물론 자신이 했던 말들에 대한 변명이나 사과는 있을 수 없습니다. 나처럼 매사에 노심초사하고 튼튼한 돌다리도 거듭하여 두드려보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에게는 그들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그저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유형의 사람들이 별 영향력이 없는, 낮은 지위에 있을 때에는 우리 사회에 그닥 해가 되지 않겠지만, 만약 그들이 사회에 크나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고위직에 위치한다면 우리가 감당해야 할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어느 기업의 대표나 임원을 넘어 한 국가의 최고 권력자라면 어떻겠습니까? 상상하기도 싫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지금 그와 같은 현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트럼프라는 한 인간이 미국이라는 한 국가의 대통령인 동시에 세계 대통령으로 군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도 아무런 죄책감이나 미안함을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게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응대합니다. 게다가 자신의 섣부른 결정으로 인한 막대한 피해에 대해서도 사과 한마디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와 같은 유형의 대통령을 경험한 바 있고,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마치 경력직 인생을 살고 있는 듯한 사람들의 무례함은 도를 넘는 경우가 다반사이지만 그들에게 어떤 권력이 쥐어지는 한 반성이나 개선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억제하는 언론이나 제도에 대한 적개심만 증가할 뿐입니다. 윤석열이 그러했고, 트럼프나 네타냐후 역시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까닭에 그런 유형의 사람들에게 있어 민주주의 제도는 자신의 자유를 제약하는 커다란 걸림돌이자 타파해야 할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민주주의 제도를 실행하는 어떤 사회에 그들과 같은 유형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그들이야말로 반사회적 인물인 동시에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는 반드시 격리해야 할 대상인 셈이지요. 그들은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어떠한 피해에 대해서도 사회 구성원에게 절대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나는 지금 권민수 작가가 엮은 <고요하고 단단하게, 법정의 말>을 읽고 있습니다. 법정 스님이 입적하신 게 엊그제 같은 데 벌써 1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나를 기준으로 삼지 않는 것이 '바르게' 보는 것이며,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고 생각하는 것을 멈춘다면 '바르고 완전하게 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p.69)


거침이 없고 머뭇거리지 않는 사람이 때로는 멋있게 보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는 우리가 사는 공동체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인물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지금 그와 같은 인물의 대표적인 표상을 현실에서 마주하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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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날처럼 새벽에 집을 나서는데 바깥은 온통 젖어 있었습니다. 비는 그쳤지만 간밤에 내린 비의 양이 간단치 않았는지 낮은 곳에는 제법 물웅덩이가 고였습니다. 하늘은 우중충하니 잔뜩 흐린 채였고 이따금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어지간한 추위는 아닐지라도 으스스한 한기가 품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경칩도 지났는데... 산의 초입에 있는 계단을 다 오르자 가볍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에는 새벽잠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고 나온 노력이 아까워서 차마 그리 할 수 없었습니다. 후둑후둑 떨어지는 빗소리의 리듬에 맞춰 걸음은 평소보다 절반은 늦춰진 듯했고, 인적이 끊긴 등산로에는 적막이 감돌았습니다.


나는 며칠 전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숨진 이란의 초등학생들을 애도하며 걸었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전쟁은 미친 짓입니다. 그 많은 민간인들이 아무런 잘못도 없이 처참하게 생명을 잃는다는 건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 정부는 이제 더 이상 히틀러의 만행을 비난할 권리가 그들에게는 없는 듯 보입니다. 그들 역시 히틀러의 만행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학살과 온갖 잔인한 전쟁 범죄를 저질러 왔고, 지금도 역시 그와 같은 만행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이처럼 참혹한 살상을 허락한 이스라엘과 미국의 권력자들에게 가장 먼저 지옥행 열차를 타도록 할 것입니다.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말입니다.


희끄무레한 어둠에 싸인 등산로는 빗물에 질척거리고 미끄러웠습니다. 등산로 주변의 낙엽 위에는 비에 섞여 내린 진눈깨비가 녹지 않은 채 하얀 잔설로 덮여 있었습니다. 검게 드러나는 등산로와 잔설이 쌓인 숲의 대비는 마치 한 폭의 수묵담채화인 양 그려졌습니다.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입고 나갔던 운동복 상의도 비에 젖었습니다. 손전등 불빛이 한 뼘의 어둠을 쫓아낼 때마다 땅 위에 번지는 타원형의 불빛 속으로 작은 빗방울들이 다투어 모여드는 듯했습니다.


어제 했던 친구의 말이 떠오릅니다. "완벽하게 인간을 닮은 로봇이 출현하기 전에 우리 인간이 완벽하게 로봇을 닮는 게 순서적으로 더 먼저이지 않을까?"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정치인들을 보면 그들은 마치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어떤 연민이나 안타까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감각한 인간들처럼 보입니다. '나는 심장이 없어. 나는 심장이 없어. 그래서 아픈 걸 느낄 리 없어.'라고 노래했던 어느 가수의 노랫말이 생각납니다. 오늘은 금요일이고 내게는 이틀간의 휴가가 주어졌습니다. 회사원이라면 대부분 그렇겠지만 말입니다. 가슴 아픈 소식은 이제 더 이상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하기에는 지금 나의 몸 컨디션이 너무나 안 좋기 때문입니다. 경칩도 지났는데 날씨는 제법 쌀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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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그렇겠습니다만 자신의 노력에 비해 과도한 칭찬을 받을 때가 더러 있습니다. 오늘 새벽 산행길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날씨가 풀리면서 산을 찾는 등산객이 늘어난 탓에 등산로에 버려지는 쓰레기의 양이 겨울에 비해 배는 증가한 듯합니다. 어차피 빈 손으로 내려올 바에는 쓰레기라도 주워서 내려오는 게 환경에도 좋고, 기분도 좋고 여러 모로 나쁠 게 없으니 나는 꽤나 오래전부터 등산로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자고 생각했었고, 아침 운동을 마치고 산을 내려올 때면 양손 가득 쓰레기를 들려 있는 게 습관처럼 굳어졌습니다.


오늘도 여느 날처럼 작은 골판지 박스며, 페트병이며, 사탕 껍질이며, 사용한 화장지 등을 두 손에 나눠 들고 내려오는데 오늘 처음 본 아저씨 한 분이 나를 향해 과도한 칭찬을 쏟아내는 것이었습니다. 훌륭하시다는 둥 너무나 좋은 일을 하신다는 둥 온갖 칭찬을 늘어놓는 바람에 얼굴이 화끈거리고 민망하여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줍는 사람 따로 있고, 버리는 사람 따로 있느냐며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에 대한 성토를 이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가까스로 그분을 진정시키고 산을 내려오는데 절로 웃음이 났습니다. 그러나 기분은 전혀 나쁘지 않았습니다. 온종일 즐거운 마음으로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요?


"우리는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아름다움을 통해서만 삶에서 벗어난다. 그때 우리는 시간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어떤 지속을 느끼지만, 곧바로 한층 더 불투명해진 세계와 마주하게 된다. 그토록 아름다운 자연조차 실은 무심하다. 들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시골길 한가운데에서도 인간은 살해될 수 있다. 그러니 피난처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그건 그다지 두려운 일은 아니다. 진정 두려운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그 안에서 모두가 어느 정도 길을 잃고 있는 이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크리스티앙 보뱅의 <세상의 빛> 중에서)


크리스티앙 보뱅의 지적처럼 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에서 어느 정도 길을 잃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는 않는 듯합니다. 엊그제 시작한 듯한 2026년도 벌써 두 달을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다가오는 3월을 어떻게 보낼지 막막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시시각각 길을 잃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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