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적으로 눈이 내려 대한민국은 이제 온통 눈 세상이 되었습니다. 건듯 불어오는 바람도 눈의 냉기를 한껏 머금은 듯 조금의 온기마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청량합니다. 점심을 먹은 후 더부룩한 속을 달래느라 근처 공원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반려견을 데리고 산책을 나온 사람들도 보이고, 햇볕을 쪼이며 조곤조곤 담소를 나누는 할머니들 모습도 보입니다. 12월의 첫 주말을 맞는 사람들의 표정은 이렇듯 냉랭한 한기 속에 적잖이 움츠러든 모습입니다.


쿠팡의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건으로 인해 우리가 추구하던 편안함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지불하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사실 나는 그와 같은 편안함을 일부러 피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미련하다는 세평을 꽤나 많이 들어왔습니다. 쿠팡을 이용하지 않는 까닭에 장을 보기 위해 직접 마트를 방문해야 하는 것은 물론 간단한 것을 구매할 때에도 편의점이나 인근의 가게를 방문해야만 합니다. 심지어 나는 어떤 배달앱도 이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배달 음식이 먹고 싶을 때에는 가게에 직접 전화를 걸어 주문을 한 후 약속 시간에 맞춰 찾으러 가곤 합니다. 게다가 나는 남들 다 한다는 '페이'도 이용하지 않고 플라스틱 카드로 결제를 하곤 합니다. 독서를 좋아하지만 전자책은 이용하지 않고 오직 종이책만 고집합니다.


이런 내 모습이 직장 동료들에게는 구시대적 유물처럼 보이나 봅니다. 그럼에도 나는 굴하지 않고 나의 루틴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껏 나의 개인정보가 단 한 번도 유출된 적이 없었을까요? 불행하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 과거 내가 이용하던 인터파크에서도, 최근에는 SK텔레콤에서도 나의 개인 정보는 무참히 유출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전에도 내가 이용하던 인터넷 사이트에서 두어 번의 정보 유출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어차피 개인정보가 유출될 거면 편안함을 추구하고 유출되는 게 더 낫지 않느냐고 나에게 주장합니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그것으로부터 우리가 얻는 편안함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따른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남들이 뭐라 하든 말입니다.


인간의 삶은 어쩌면 아날로그적 경험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실수와 그로 인해 우리가 지불하는 많은 불편과 시간낭비를 통해 더욱 풍요로워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편안함과 효율성만 추구하다 보면 우리의 삶도 그렇게 효율적으로 흘러가게 될 것 같은 불안이 나를 이따금 깨어나게 합니다. 그것은 마치 대량생산을 담당하는 자동화된 공장과 다를 게 없는 듯합니다. 나의 삶도, 당신의 삶도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단일한 삶이라면 우리는 굳이 개별적인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없겠지요. 당신의 삶도, 나의 삶도 이제껏 없었던 고유한 것이기에 우리는 오늘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와 같은 삶을 응원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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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25-12-06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꼼쥐 2025-12-07 11:3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얼굴만 빼꼼히 내밀고 내려다보면 아이들 놀이터가 한눈에 들어온다. 나는 휴일 한낮의 느긋함을 확인하기 위해 놀이터의 풍경을 몰래 훔쳐보곤 한다. 쇠양배양 돌아치는 아이들의 잰 몸놀림을 미처 따라잡지 못한 시간은 급할 것 없다는 듯 느릿느릿 흘러간다. 꾸물꾸물 늦장을 부리는 시간 속을 쉼 없이 움직이는 아이들. 극과 극의 대비가 휴일 한낮의 놀이터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나는 지금은 군에 있는 아들의 어린 시절을 응시하는 부모의 시선이 되었다가 이따금 거침없이 뛰노는 아이의 시선이 되기도 하면서 단지 관객으로서 누릴 수 있는 느긋한 여유를 즐긴다. 휴일의 시간은 그렇게 나릿나릿 흘러간다.


12월의 첫날.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비장한 표정이다. 하필이면 첫날이 월요일이라서 그랬는지도 모르고 어제보다 기온이 떨어져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또는 비상계엄 1주년이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켜보고 있을 때의 시간은 정말 느리게 흐르지만 대충 뭉뚱그려 따져보는 시간은 너무너무 빨리 흐른다. 벌써 1년이라니... 뜬금없는 비상계엄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시민들의 노력 그리고 암담하게 흘러가던 시간들. 내란에 대한 죄과가 낱낱이 드러난 것도 아니고, 그에 대한 처벌이 시작된 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그 처참하고 암담했던 시간에서 벗어나 보통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하고 있다.


영화감독 윤가은의 산문집 <호호호>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나는 별자리 운세에 꽤 진지하다. 꿈은 너무 멀고 사랑은 계속 아픈데, 나는 내 마음조차 모르겠어 끝도 없이 방황하던 시절에 별자리를 만났다. 친한 선배의 소개로 점성술사 수전 밀러의 별점을 다달이 번역해 올려주는 개인 홈페이지를 방문했다가 전에 경험한 적 없던 큰 위로를 받았던 것이다.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다. 크고 따뜻한 무언가가 나와 내 인생을 깊이 이해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절대 겁을 주거나 경고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그저 다정하게 위로하고 부드럽게 격려할 뿐이었다.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도 같았다. 너와 비슷한 주기로 넘어지고 일어나는 다른 친구들도 많이 있다고, 그들과 함께 가는 거니까 너무 외로워 말고 힘내라고 응원해주는 것도 같았다."  (p.165)


우리는 비록 별자리는 서로 다르지만 '비상계엄'이라는 엄청나게 높은 산을 함께 넘은 동지이자 동시대의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시민으로서 '비상계엄 1주기'에 맞춰 힘내라는 응원의 말이라도 나누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추워진 날씨에 우리는 갑자기 서로의 건강이 문득 걱정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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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가 긴 슬픔이 가슴을 헤집어놓고 사라질 때가 더러 있습니다. 인간이란 본디 기쁨보다는 슬픔에 더 익숙한 까닭에 슬픔이 찾아올 때면 오히려 따뜻하고 안온한 느낌이 들게 마련입니다. 이를테면 아주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슬픔이 지나간 뒤의 후유증은 만만치 않은 것이어서 온몸에 힘이 빠지고 만사에 의욕이 사라지곤 합니다. 한번 그렇게 떨어진 의욕이 다시 보통 사람의 그것으로 회복하는 데는 꽤나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가슴을 열고 슬픔이 무시로 드나들 수 없도록 가슴을 꽁꽁 걸어 잠그는 게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어디 현관문을 잠그듯 필요할 때마다 그렇게 잠가 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문지기를 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지요.


오늘 아침은 생각보다 춥지 않았습니다. 나는 탁하고 텁텁한 미세먼지의 온기에 기대어 비교적 수월한 산행을 했습니다. 어제 내렸던 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워낙 적은 양의 비가 내렸던 탓일 테지요. 다만 어제 불던 바람은 잦아들어 어둠에 싸인 숲은 그저 고요했습니다. 나는 사실 요 며칠 뉴스를 뒤덮었던 내란 재판 변호사들의 난동과 대한민국의 종교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난동을 부렸던 변호사들 역시 종교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는 개신교는 자신들의 돈에 대한 탐욕을 교묘한 언어로 숨겨왔습니다. 자유민주주의라거나 자유시장경제 등의 언어를 교묘하게 섞어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의 돈과 권력에 대한 탐욕을 그와 같은 언어 뒤에 숨겨왔습니다. 사리사욕을 위해 전두환과 같은 살인자에게 '각하'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목사도 있고, 피고인 김건희와 함께 사찰을 방문하여 절을 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종교는 뒷전이고 오직 자신의 권력과 돈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사실 나는 대한민국 개신교의 발전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자신의 종교를 단순히 돈과 권력을 획득하는 용도로 사용해 왔다는 데 화가 날 뿐입니다. '그게 어제오늘의 일도 아닌데 왜 갑자기?'라고 반문하실 분도 있겠습니다만, 윤석열 정권을 지나오면서 그들의 행태는 선량한 국민들이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난동을 부렸던 변호사는 "일본 제국주의가, 그렇기 때문에 일본이 선진국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진관이 같은 놈을 데리고 있으니까 우리가 선진국이 못 되는 거죠. 저 같잖은 놈이, 안경 쓴 키 작은 남자라고 써 놓고서 자기 얘기인지도 모르고.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입니까?"라는 말 속에는 자신을 감치한 판사를 조롱하는 것과 더불어 그의 뇌리에 뿌리 깊이 박힌 일제에 대한 찬양과 동경의, 얼룩진 역사 인식이 존재합니다. 말하자면 그는 폴란드를 침공했던 독일 나치에 대해 오직 자신의 돈과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대중이 용납할 수 없는 언어로 나치를 찬양하는 폴란드 유태인과 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대한민국의 반역자인 동시에 인류 보편적 인권에 반하는 언어를 내뱉은 자입니다. 이와 같은 행위는 국가인권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 역시 종교를 방패막이 삼아 장애인이나 동성애자와 같은 소수자를 차별하고 혐오하며 증오를 부추깁니다. 인권을 보호하고 증진해야 할 그들이 앞장서서 인권을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행태는 박근혜 정권을 넘어서면서 일부 불교 종파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말하자면 종교의 가면을 쓰고 자신들의 돈과 권력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돈에 눈이 먼 그들이 대중에게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팔 날도 그리 멀지 않은 듯합니다.


종교를 방패로 삼는 이들의 특징 중 하나는 그들의 언어가 주로 욕설과 저주의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진실한 종교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 혐오와 차별, 그리고 증오의 언어로 어찌 신의 사랑이나 자비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들은 사이비 종교인일 뿐입니다. 나는 비록 세례를 받은 천주교인이지만 그들처럼 인간에 대한 증오의 말을 쏟아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신실한 종교인으로 살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서로 종교가 다를지라도 인류애라는 보편적 가치는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조국과 민족을 배신할 수 있고, 같은 민족을 향해 저주의 말을 쏟아내는 그런 비열한 인간은 되지 말았으면 합니다. 적어도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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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11-27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개신교는 율리아누스 황제와 같은 이가 나와서 뭔가 싹다 정리를 해야할 거 같습니다~

꼼쥐 2025-11-28 13:53   좋아요 0 | URL
지금이야말로 종교개혁이 필요한 시기인 게 아닌가 싶어요. 소위 목회자라는 놈들이 돈과 권력에 눈이 멀었으니...쯧쯧.
 

'국회의 물리적 충돌을 방지하고 대화와 타협을 증진하며, 소수 의견 개진의 기회를 보장하면서도 심의의 효율성을 강화하여 민주적이고 효율적인 국회를 구현하고자' 2012년 5월 2일에 개정된 국회법 조항이 있다. 이른바 우리가 알고 있는 '국회선진화법'이 바로 그것이다. '국회선진화법'은 사실 위반시 매우 엄격한 처벌이 가해지는 까닭에 현직 국회의원 및 국회의원에 출마하고자 하는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국회선진화법' 저촉 여부를 심각하게 따져볼 수밖에 없다. 500만 원 이상의 벌금형이 확정되면 의원직 상실은 물론 5년 동안 피선거권이 박탈되기 때문이다. 일반인에게 5년은 짧다면 짧은 기간일 수 있지만 정치인에게 5년은 영원과 같은 시간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치인을 벌벌 떨게 만드는 법이라고 해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 사람들은 늘 있게 마련, 남편이 판사이거나, 현직 국민의힘 의원이거나, 내란 재판을 받고 있는 윤석열. 김건희와 가깝게 지냈던 사람이라면 전혀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예컨대 국회에서 빠루를 들고 설치다 기소가 되어도 1심 선고가 내려지는 데는 무려 6년이란 긴 시간이 소모되기도 하고, 여론에 등 떠밀려 재판이 열린다 한들 검찰의 구형과는 상관없이 벌금 400만 원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형에 처해짐으로써 의원직은 그대로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재판장의 하혜와 같은 배려가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해 벌금 400만 원이 준비된 능력자라면 앞으로도 계속 국회에서 빠루를 들고 설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된다는 점이다. 그게 보기 싫다고? 그러면 당신도 판사 남편을 두거나 국민의힘 의원이 되면 된다.


2019년 국회 패스트트랙 충돌 사건으로 기소되었었던 국민의힘 전신 자유한국당 지도부 전원이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결심공판에서 500만 원 미만의 비교적 가벼운 벌금형에 처해짐으로써 다시 동물 국회로 회귀해도 된다는 법원의 공식적인 허가를 받게 되었다. 법원을 나서는 피고인들의 표정에서 그들의 속내를 추측하자면, "너무 부당한 것 같다고? 지금 감히 하느님과 동격인 판사의 결정에 불복한다는 얘기? 고귀하고 신성시하는 사법부의 권위에 도전하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어디 한번 나와 봐라. 이참에 본때를 톡톡히 보여줄 테니. 그리고 재판장과 가까운 사람은 너희와 같은 대중 나부랭이와 계급이 달라.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고 외치는 놈들은 다 빨갱이고, 좌파야. 어딜 감히..."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법원은, 말하자면 사법부는 법률로 정한 국회의 운영도 자신들의 맘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되돌릴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쥐고 있다. 2025년 11월 20일의 판결을 통해 그것을 대한민국 국민 전체에게 보여주었다. 사법부는 하느님과 동격이니 어느 누구건 대들지 말지어다. 대한민국 국회는 다시 동물 국회로의 회귀를 명한다. "땅, 땅,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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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뉴스에는 집안일을 도와주는 가정용 휴머노이드 로봇의 사전 주문을 받고 있다는 기사가 있었다. 버튼 클릭이나 음성 명만으로 각종 집안일, 이를테면 문 열기, 물건 가져오기, 방 정리, 조명 켜고 끄기, 세탁물 개기 등 기본적인 가사 업무를 수행하는 로봇인데, 우리 돈 월 71만 원으로 구독 가능하다는 기사였다.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세상 편해졌구나' 하는 식의 긍정적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심 걱정되는 바가 있었다. 지금처럼 로봇과 피지컬 AI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윤리적 제어 시스템마저 느슨해진다면 인류의 미래는 과연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가.


상업적 휴머노이드 시장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편안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이 아닐까 싶다. 얼마 전 국내에 출간된 마이클 이스터의 저작 <편안함의 습격>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은 사실 의외의 일이었지만, 아무튼 인류는 불편함을 제거하는 쪽으로 과학을 발전시켜 온 게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작금에 이르러서 인류는 육체적 불편함뿐만 아니라 정신적 불편함도 제거하려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게 남녀 관계와 성적 욕망의 해소 문제이다. 얼마 전 생성형 AI 대표 주자인 챗GPT는 올해 12월부터 성적 대화를 허용하겠다고 발표함으로써 AI 시장에서 윤리적 규제가 조금씩 느슨해지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경주 에이펙에서 젠슨 황 CEO가 밝혔던 것처럼 생성형 AI와 피지컬 AI의 결합은 필연적인 결과인 만큼 섹스 로봇에 생성형 AI가 주입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보아야 한다.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이었던 과거에 비해 작금의 청춘 남녀가 연인 관계로 발전하는 데는 시간적으로나 감정적으로 훨씬 수월해진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남녀 관계는 여전히 밀고 당기는 관계를 지속함으로써 서로의 애정을 테스트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말하자면 불필요한 감정 소모가 극심하다는 얘기다. 이와 같은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휴머노이드이다. 집안일도 겸하면서 주인의 성적 욕구를 취향에 맞춰 해소시켜 주는 휴머노이드의 출현은 시간문제인 듯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비단 남자에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닌 듯하다. 불필요한 감정 소모 없이 돈만 있으면 언제든 자신의 성적 취향에 어울리는 휴머노이드를 구매하거나 개조할 수 있다는 사실은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현대인에게 지극히 매력적으로 다가갈 것이다. 자신의 기분에 맞춰 언제든 성적인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더불어 육체적 욕망도 함께 해소할 수 있다면 굳이 인간 연인을 사귀기 위한 경제적, 시간적, 감정적 소모를 감행하려 할까.


결국 그런 세상이 온다면 휴머노이드를 구입할 능력이 되지 않는 가난한 인간들만 지금처럼 인간 연인을 만들기 위한 구애 활동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문제는 성적 욕망의 해소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 하나로 인해 문화 전반이 바뀔 위기에 처할 것이다. 사랑을 노래하는 시나 소설 등 순수문학은 물론 이를 바탕으로 한 영화마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사랑은 단순히 경제적 등가물일 뿐 지금처럼 극적이고 신비한 체험의 결과물로 인식되지는 않게 될 것이다. 아스팔트에 낙엽이 쌓이고 있다. 신호 대기를 하던 차들이 앞을 향해 달려 나갈 때마다 낙엽들이 바퀴를 따라 쪼르르 달려간다. 나도 데려가라는 듯 말이다. 오늘처럼 바람이 불고 으스스 추워지는 날이면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는 낭만도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는 '올 가을에는 새로운 휴머노이드나 하나 장만해야겠는걸' 하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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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11-09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에서 상상으로 그려지던 세상이 영화 이후 30 여년 만에 현실화가 되어 가네요. 유토피아일까요 디스토피아일까요.

꼼쥐 2025-11-10 17:16   좋아요 0 | URL
디스토피아가 아닐까 싶어요. 사랑이라는 감정이 구시대적 유물로 남는다면 삶은 어디에서 가치를 찾아야 할지요.

하루살이 2025-11-11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히려 휴머노이드와의 저렴한 사랑을 생각해보았네요... 인간과의 사랑이 오히려 고비용일 거라고 상상했거든요... 재미있는 생각해보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꼼쥐 2025-11-15 12:01   좋아요 0 | URL
저의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인간은 사랑에 이르기 위한 감정소모마저 불필요하게 여기는 것 같아요. 사실 그 모든 게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소소한 재미인데 말이죠. 단순히 편안함과 간단한 것만 좋아하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삭막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