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속담은 어느 정도 사실인 듯싶다. 결혼과 동시에 외국에서 타향살이를 시작한 여동생은 뉴욕에 정착하여 지금은 가족 전체가 미국인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얼굴을 맞대고 만나는 것은 고사하고 시간을 맞춰 전화 통화를 하는 일조차 행사 아닌 행사가 된 지 오래다. 우리나라와 13시간의 시차가 나는 까닭에 내일 하지, 내일 하지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서로의 목소리도 듣지 못한 채 한두 달이 훌쩍 지날 때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날짜를 세다 보면 왠지 미안한 마음이 절로 들기도 하고, 타지에서 종종걸음을 칠 여동생이 눈에 밟히는 것이다. 그럴라치면 나는 서둘러 전화를 하곤 한다. 그리고 그곳 사정도 모른 채 대화는 시간을 넘겨 길게 이어지곤 한다.
어제의 전화 통화도 다르지 않았다. 한 번 시작된 통화는 여동생과 가족 전체를 돌아 다시 여동생에게로 되돌아갔을 때 비로소 끝이 나게 마련인데, 어제는 재작년에 대학생이 된 여동생의 큰딸(나에게는 조카)과의 통화가 길게 이어지는 바람에 결국 인사를 대신 전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조카 선에서 끝을 맺고 말았다. 한국어가 서툰 조카는 빠른 영어로 쉼 없이 떠들었고, 나는 잘 들리지도 않는 발음을 알아듣느라 진땀을 흘려야만 했다. 그 발단은 사실 미국 내 대학가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에 관한 것이었다. 조카 역시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학살하는 이스라엘 시오니스트의 만행을 강력히 규탄하며 팔레스타인 주민의 생존권을 위해 연대하겠다고 밝혔다. 학살을 주도하는 이스라엘 정치인과 이를 지원하는 미국 정치인의 행보에 분개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그녀의 외삼촌으로서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사법적 처벌이나 불이익이 염려되는 게 사실이었지만 기성인으로서 차마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제노사이드에 가까운 만행을 보면서도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우리나라 대학생의 현실이 부끄러움을 넘어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사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려는 움직임, 즉 동정심은 인간만이 갖는 감정이다. 이것은 혹시 나에게도 있을지 모르는 미래의 불행에 대한 일종의 보험이다. 나에게 비슷한 불행이 찾아왔을 때 그들 역시 나를 위해 싸워줄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 그것이 없다면 인간의 동정심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어찌 보면 지극히 이타적인 행동인 듯한 동정심과 연대가 그 저변을 살펴보면 지극히 사소하면서도 이기적인 충동이 깔려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결코 나쁘지 않다고 본다. 집단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인간이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하는 올바른 태도이기도 하고. 그렇다면 이와 같은 연대에서 멀어진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어느 나라에 도움을 요청해야 할까. 어쩌면 우리의 젊은이들은 각자도생에 너무나 익숙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인의 불행에 누구 한 사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런 가능성조차 내가 기대할 수 없다면 불안으로 점철된 미래를 어찌 견딜 수 있을까. 내가 조카와의 통화를 마친 후 먼 나라의 대학생이 부러웠던 건 그런 까닭이었다.
오늘은 어린이날. 밖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가까운 곳의 중학교 빈 운동장에는 우산을 쓴 몇몇의 사람들이 운동장을 하릴없이 돌고 있다. 가장자리를 따라 길게 늘어선 벚나무는 가지치기를 했는지 깡똥한 우듬지가 마치 상고머리를 한 중학교 신입생처럼 어색하기만 하다. 잘려 나간 가지들이 운동장 한 켠에서 우두커니 비를 맞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