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처럼 부어라 마셔라 하는 송년 모임은 사라진 지 오래되었지만 이맘때의 거리는 여전히 송구영신의 기치로 들썩인다. 가는 세월이 아쉬운 건 늙다리 기성세대나 MZ세대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일 뿐 어느 한 세대에게 국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모임의 내용이나 형식은 많이 달라졌다 할지라도 '송구(送舊)'하고 '영신(迎新)'하려는 마음은 여전히 남아 오페라의 유령처럼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물론 뜬금없이 계엄령을 선포하는 바람에 시국이 뒤숭숭하고, 가뜩이나 어려운 경기에 찬물을 끼얹은 측면이 없지 않으나 나처럼 모임을 회피하는 '피회족(避會族)'들에게는 이맘때의 송년 모임마저 취소하고 나면 참가할 만한 모임이 거의 사라지고 마는 까닭에 모임 취소를 극구 뜯어말리는 기현상을 연출하게 되었다.


어제는 인근에 사는 초등학교 동창 몇몇과 송년 모임을 가졌다. 몇 순배 술잔이 돌고,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대화 주제, 이를테면 건강이나 정년, 자녀의 학업이나 취업 또는 결혼 등 나올 만한 주제는 모두 지나고 나자 꺼낼까 말까 입이 간지럽기는 하지만 좀처럼 꺼내지 않는 정치가 도마 위에 올랐다. 그 시발점은 서울의 모처에서 오래전부터 점집(당사자는 언제나 철학관이라고 우기지만)을 운영하고 있는 친구의 입을 통해서였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윤석열이 대통령이 된 것은 대한민국 무속신앙의 승리였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냐? 개신교 목사든, 조계사 승려든 이 사실을 모른다고 할 사람은 아마 없을 거야. 그들 역시 다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윤석열에게 머리를 조아렸을 뿐이야. 그러니 나처럼 철학관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윤석열 부부가 얼마나 고마웠겠냐? 천공이니 건진법사니 하는 사이비 무속인들도 당당히 어깨를 펼 수 있었고 말이야. 윤석열 부부가 아니었다면 그게 가당키나 했겠어?"


반쯤 혀가 꼬부라진 친구의 말에 이렇다 저렇다 반론을 펴는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친구의 일방적인 주장이 길게 이어지자 한 친구 왈, "목사님들을 싸잡아 비난하면 안 되지.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윤석열 부부가 무속에 심취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거야. 알았다면 그를 지지할 리가 없지. 그거야 말로 우상숭배나 다름없으니까 말이야." 하며 화를 냈다. 모태신앙의 독실한 신자답게 그의 반론 역시 진지했다. 그러자 철학관을 운영하는 친구 왈, "야, 말은 똑바로 하자. 그걸 몰랐다고?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알던 사실을? 목사님들은 어디 북한 출신만 있냐?" 하며 대드는 바람에 술자리는 온통 정치와 종교가 뒤섞인 난장판으로 변하고 말았다. 뒷수습은 물론 종교가 없는 무교인들 차지였다. 우리는 그렇게 '송구(送舊)'하고 '영신(迎新)'하자는 다짐을 하고 밤 늦게 헤어졌다.


못 먹는 술을 한 잔 받아 마신 탓인지, 윤석열의 대통령 당선이 대한민국 무속신앙의 승리라는 친구의 말이 충격적이었던 탓인지 어제부터 있었던 두통이 지금도 사라지지 않는다. "아이고 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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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스러운 시간이 묵묵히 흘러가는 동안 나와 당신의 틈새를 메웠던 삶의 질료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따금 생각하곤 합니다. 말하자면 그런 것이지요. 조급하거나 성마른 성격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사소한 이유로 당신과의 관계를 무 자르듯 싹둑 단절하거나 데면데면 멀어지지 않은 채 그토록 오랜 세월을 한결같이 지켜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랄까 원천이랄까 뭐 그런 게 궁금했던 것이지요. 우정이나 공감 또는 배려와 같은 추상적인 단 어로 대답을 갈음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뭔가 미진한 부분이 남는 게 사실입니다. 우리는 헤어지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쓴 것도 아니요, 남녀 간의 사랑과 같은 본능적 관계에 의지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나는 우르술라 누버가 쓴 책 <나는 ‘아직도’ 내가 제일 어렵다>에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당신과 내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오랜 세월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며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에 대한 작은 단서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책 서문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만약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면 우리는 ‘발가벗은’ 채로 다른 사람과 마주해야 한다. 이마에 적혀 있기라도 한 것처럼 타인이 내 생각을 훤히 읽을 수 있다면, 우리의 감정이나 희망사항, 계획을 호기심 가득한 낯선 사람의 시선에서 지켜낼 수 없다. 비밀이 없다면 무방비 상태로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의도, 희망, 욕구에 휘둘리기 쉽다. 즉 비밀은 우리 인생에 어떤 권한도 없는 사람이 우리 삶에 함부로 기웃거리지 못하게 막아주는 울타리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도 비밀은 윤활제 역할을 한다. 모든 것을 밝히고 드러내야 한다면 사회 공동체는 제대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절대적 진실’만 존재하는 사회는 스스로를 감당하기 힘들다. 긍정적인 비밀에는 절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는 매력적인 사회적 가치가 있다.” (p.13)

 

그렇습니다. 나는 지금 당신과 나 사이에 존재했던 ‘비밀’에 대해 말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관계를 발전시키겠다는 어떤 특별한 목적도 없이 서로의 비밀을 조금씩 공유해 왔던 것입니다. 삶의 고통을 견뎌야 하는 어떤 순간에도 우리는 기회가 찾아올 때마다 언제나 자신이 간직해 온 비밀을 조금씩 조금씩 상대방에게 주입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각자가 정한 삶의 테두리 속으로 상대방의 출입을 무시로 허락하게 되었고, 서로가 서로의 손을 맞잡지 않았어도 우리는 단단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언제였는지 확실한 시점은 떠오르지 않지만 내가 언제부터 책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어떤 계기로 책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당신 은 내게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때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한 채 우물쭈물 얼버무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의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비밀’이 내 인생에 있어 하나의 전기로 작용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책을 좋아하게 된 계기나 특정 시점을 명시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나에게도 하나둘 비밀이 생겨나면서부터 책과 자연스레 가까워졌음은 분명한 듯합니다. 독서란 결국 타인의 비밀을 공유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밝힐 수 없는 어떤 비밀을 끌어안게 된 어느 날,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다른 누군가의 비밀도 궁금해지는 법이니까 말입니다. 어쩌면 타인의 ‘비밀’을 정당한 방법으로 엿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독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은영의 소설집 <쇼코의 미소>에도 ‘비밀’이 가득합니다. 소설에서 고등학생이던 ‘나’는 한국을 찾은 일본의 자매학교 학생인 쇼코를 일주일간 집에서 재우게 되지요. 일제 강점기에 일본어를 배웠던 할아버지는 언어가 잘 통하지 않는 ‘나’보다 더 살뜰히 쇼코를 살피며 잘 지내게 됩니다. 이후 쇼코는 할아버지에게는 일본어로, ‘나’에게는 영어로 편지를 꾸준히 써서 보내지요. 대학에 가고 바빠지면서 ‘나’와 쇼코는 연락도 끊기고 관계도 멀어집니다. 소설 속 주인공인 ‘나’가 쇼코와 멀어지는 동안에도 할아버지와 쇼코는 자신의 비밀을 서로에게 내보이며 한동안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한편 <쇼코의 미소>에 실린 또 다른 단편 소설 ‘씬짜오, 씬짜오’에는 마음으로 공감할 수 없는 두 가족의 비밀이 소설 전반에 드러납니다. 말하자면 비밀을 공유할 수 없다는 건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지요.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p.89 '씬짜오, 씬짜오‘ 중에서)

 

<쇼코의 미소>에서 작가 최은영은 표제작인 ‘쇼코의 미소’를 비롯하여 7편의 이야기를 이 책에 싣고 있지만 결국 작가는 ‘비밀’이 들려주는 여러 변주를 독자들에게 말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애란의 소설집 <바깥은 여름>에도 가슴 아픈 ‘비밀’이 등장합니다. 어린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고 상실감으로 어찌할 바 모르던 부부는 찬바람이 부는 입동의 자정 무렵, 복분자의 붉은 물이 튄 벽에 도배를 다시 하기로 합니다. 어쩌면 부부에게 도배는 죽은 아들을 잊고 새 출발을 다짐하자는 의미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도배를 하기 위해 가구를 치웠을 때 그 밑에서 아들의 삐뚤빼뚤한 낙서가 나옵니다. 말하자면 시간이 가면 자연스럽게 잊혔을지도 모르는 아들의 비밀 한 조각이 부부에게 드러난 셈이지요. 부부는 마지막 남은 한 장의 벽지를 마저 붙이지 못한 채 오열합니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가슴이 저릴 정도로 무고한 얼굴로 잤다. 신기한 건 그렇게 짧은 잠을 청하고도 눈뜨면 그사이 살이 오르고 인상이 변해 있다는 거였다. 아이들은 정말 크는 게 아까울 정도로 빨리 자랐다. 그리고 그런 걸 마주한 때라야 비로소 나는 계절이 하는 일과 시간이 맡은 몫을 알 수 있었다. 3월이 하는 일과 7월이 해낸 일을 알 수 있었다. 5월 또는 9월도 마찬가지였다.” (p.18 '입동‘ 중에서)

 















‘비밀’은 글로 쓰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말하여지기도 합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비밀’은 때로는 마음의 병이 되어 한 사람을 쓰러트리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비밀을 들어주고 그 아픔을 다른 누군가에게 토로하지 못한 채 자신의 가슴에만 담아야 하는 이도 있습니다. 정신과의사가 바로 그런 사람이지요. 정신과의사 김진세가 쓴 <길은 모두에게 다른 말을 건다>는 정신과의사의 고충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김진세의 산티아고 순례기이기도 한 이 책은 개인이 만들어가는 ‘비밀’을 우리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삶은 음미하는 것이다. 급하게 보내면 언제 갔는지도 모르게 지나가버리는 삶, 비록 지긋지긋한 삶이라도 그 고통에서 헤어나오고 싶은 것이지, 실제로 인생이 빨리 흘러가길 바라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인생을 즐기려면, 마치 음식을 천천히 씹으며 참맛을 느끼듯, 천천히 살아가야 한다.” (p.31)















나는 요즘 내가 좋아하는 작가 최진영의 산문집 <어떤 비밀>을 읽고 있습니다. 일부러 작정한 것은 아니지만 나의 삶도 희끗희끗 탈색이 되고,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의 경계가 점점 선명해지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내가 알던 당신은 어떤 힘든 일에도 몸을 사리는 법이 없었고, 얼굴에는 늘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당신이나 나나 이미 버거운 나이가 된 게 아닌지요. 나를 만날 때마다 이따금 내뱉는 당신의 옅은 한숨이 나를 슬프게 합니다. 그것은 차마 당신에게 말할 수 없었던 나만의 비밀이었습니다. 최진영의 산문집 중 '대한의 편지'라는 소제목으로 쓴 작가의 문장을 옮겨보겠습니다.


"좋은 사람에게 얼룩처럼 나를 묻히고 다닌 적이 있습니다. 묻어 있으면 나도 그처럼 좋아질 것 같았거든요. 그래요, 아마도 나는 기억되고 싶었나 봅니다."  (p.344~p.345)

 

오늘은 동지(冬至). 악귀를 쫓기 위해 팥죽을 쑤어먹는 집은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지만 당신에게 뜨끈한 팥죽 한 사발 보내고 싶은 날입니다.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는 살풍경한 느낌의 오늘 하루를 영원히 기억하고픈 까닭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나와 당신은 각자의 ‘비밀’을 짓고, 기억하고, 편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렇겠지요. 만들어진 ‘비밀’은 차후 당신과 나의 만남에서 서로 교환될 수도 있고, ‘비밀’로 숨겨질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나는 당신의 비밀을 언제든 응원한다는 사실을 당신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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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차다. 겨울인데 이 정도 추위도 없다면 그게 어디 겨울인가? 하고 반문할 이도 있겠지만 추위는 아무튼 사람들을 의기소침하게 한다. 집 근처의 도서관에 들러 책 한 권을 빌려 돌아오는 길, 나들이 삼아 도서관을 찾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듯한 아가의 손을 잡고 도서관 나들이에 나선 젊은 부부에서부터 서로에게 의지하여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는 팔순의 노부부에 이르기까지 그 행색이나 구성은 제각각이었지만, 주말을 맞아 책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자 하는 마음은 비슷한 듯 보였다. 여린 겨울 햇살이 그들의 어깨 위로 가볍게 흩어지고 있었다.


오늘은 내란 수괴 윤석열에 대한 탄핵 투표가 있는 날이다. 그러나 비상계엄이 있었던 날로부터 10여 일이 훌쩍 지났지만 그 실체와 과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그러한 의문 중에서 사람들이 무엇보다 궁금해하는 것은 비상계엄의 동기가 아닐까 싶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반란이나 소요 등 혼란 상황이 지속되었던 것도 아닌데, 대통령은 무슨 근거로 비상계엄을 발동하였고, 도대체 그 목적은 무엇이었는지 이렇게 저렇게 추측에 추측을 거듭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게 중론이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제 무덤을 제가 파는 게 가당키나 한가 싶은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이성적인 절제가 잘 되지 않아서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먹고 싶으면 먹고 싸고 싶으면 싸고 자고 싶으면 자야 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본능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어서 그들에게 본능을 억제하도록 종용하는 어떤 순간이 찾아오면 솟구쳐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대통령으로서 마음껏 먹고, 마음껏 자고, 마음껏 여행하고 싶은 기대와 욕망이 있었는데 이것이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반국가세력에 의해) 좌절되자 이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없었을 뿐이다. 그것이 곧 비상계엄의 선포였다. 이에 대한 국민의힘 의원들의 옹호도 이해가 되는 측면이 있다. 그들 역시 본능에 충실한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본능에 충실한 인간들로 하여금 고차원적인 가치를 따르라고, 좀 더 이성적인 행동을 하라고 윽박지르며 요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의 화를 돋우고 엇나가는 행동(이를테면 반사회적 행동)을 유발하게 할 뿐이다.


오늘 내가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은 조지 오웰의 산문집 <책 대 담배>이다. 조지 오웰의 글은 언제 읽어도 감탄을 자아내게 하지만 요즘과 같은 어수선한 시국에 읽으면 이해가 훨씬 빠르다.


"정치에서는 두 악 중에서 그나마 덜 악한 것을 결정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없고, 미치광이처럼 행동해야만 간신히 벗어날 수 있는 상황들이 있다. 가령 전쟁이 필요할 수 있지만 전쟁은 분명 옳거나 온전한 것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심지어 총선이라고 해서 딱히 유쾌하고 즐거운 행위나 교훈적인 광경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런 일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면 - 노령, 우둔함 혹은 위선이라는 갑옷을 입지 않는 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 자신의 일부분만은 침해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삶은 이미 분리됐기 때문에 그 문제가 동일한 형식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실제로 대다수 사람들은 여가 시간에만 진정으로 살아 있고 그들의 노동과 정치 행위는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더구나 대다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정치적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노동자로 비하하도록 요구받는 경우가 없다. 예술가는 특히 작가는 그런 요구를 받는다. - 사실 그것은 정치인들이 작가에게 요구하는 유일한 것이다."  ('책 대 담배' 중에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책이 유해 도서로 채택되는 까닭도 그런 맥락이다. 본능에 충실한 작자들에게 이성적인 절제나 영혼의 가치를 추구하는 일은 너무나 무의미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강요하는 세력은 곧 반국가세력인 동시에 자유민주주의 체제 전복 세력인 것이다. 윤석열은 자신의 본능을 절제하도록 요구하는 야당과 국민에게 분노했을 뿐이다. 그것이 비상계엄의 동기인 셈이다. 더도 덜도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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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뻘짓이란 '아무런 쓸모없이 헛되게 하는 짓', 말하자면 '허튼짓' 혹은 '헛짓거리'를 일컫는 서남 방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뻘짓에도 등급이 있어서 철없는 아기들의 무해한(보는 이들에게 웃음과 사랑스러움을 무한대로 공급한다는 측면에서 한편으로 유익한), 최상위 등급의 뻘짓에서부터 모든 이들에게 해로움만 안겨줄 뿐 그 누구에게도 이로움이 없는 최하위 등급의 뻘짓(이를테면 지난 3일 윤석열 씨의 비상계엄령 선포와 같은)이 존재한다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물론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뻘짓은 유익하지도 유해하지도 않은,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우연찮은 몸개그 등과 같은 생활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간 등급의 뻘짓이겠지만 말입니다.


12월 3일 화요일, 소비자의 날이기도 했던 바로 그날 우리는 영화에서나 보았음직한 한 장면을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목격하고, 허둥지둥 안정을 찾지 못하고, 분노와 공포 속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습니다. 그 발단은 바로 미치광이 윤석열의 비상계엄령 선포였습니다. 국민 대다수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뜬금없는 일이었습니다. 무장 병력이 국회에 난입하고 이를 저지하는 시민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장면을 현실에서 목격해야만 했습니다. 국내는 물론 전 세계의 언론에 긴급 뉴스로 타전되는 상황을 보면서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이유 하나로 창피함을 넘어 '아,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하는 통탄과 울분의 감정을 삭여야 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중대 범죄를 저지른 자였지만 대통령이라는 직위 하나로, 최고 권력자라는 이유 하나로 그는 국민들의 분노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사나흘의 잠행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다 오늘, 탄핵 표결이 예정된 12월 7일 토요일의 오늘 별것 아니라는 듯 사과 한마디 툭 던지고는 사라졌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극심한 혼란 상황에서 한 주를 보내지 않았을까 싶은데 정작 이와 같은 혼란의 주범은 너무나 당당하고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와 같은 미치광이를 최고 권력자로 선출한 데에는 뭐니뭐니 해도 권력에 붙어 기생하는 언론과 종교인들의 책임이 크다 하겠습니다. 해방 이후부터 성장한 개신교 목사들과 MB 이후 권력의 맛을 알기 시작한 불교계 인사들이 윤석열과 같은 괴물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윤석열에 버금가는 괴물들은 국민의힘 내에 차고도 넘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지금 이 시간에도 자신들의 잇속을 챙겨줄 인사를 찾기 위해 개신교와 불교계는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우리는 그들의 이름 앞에 성스러울 성(聖) 자를 붙여 성직자로 칭하기도 합니다. 일반 소시민보다 더 욕심이 많고 사악한 그들을 두고 말입니다. 괴물 정치인이야 어쩌다 탄핵이라도 된다지만 괴물 성직자와 언론인은 탄핵도 불가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진정한 권력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윤석열이라는 괴물 정치인을 몰아내기 위해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힘을 소진해야 할까요. 그를 몰아내기 이전에 우리는 권력에 기생하는 종교인과 언론인부터 솎아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살아 있는 한 윤석열과 같은 괴물 정치인은 우리들 앞에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최하등급의 뻘짓으로 우리를 놀라게 할 테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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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4 2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2-08 16: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그 당시 나는 초등학교 4,5학년쯤 되지 않았을까 싶다. 햇살이 따사로웠던 주말의 어느 봄날, 나와 친구들은 낡은 텐트를 둘러메고 산을 올라 양지바른 언덕의 묏등 잔디밭에 텐트를 쳤다. 강원도의 봄은 언제나 지축을 뒤흔들 듯한 바람과 함께 시작되는데 그날도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좁은 텐트 안에서 바람을 피하며 쏟아지는 봄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이제는 슬슬 내려가야겠다 생각할 즈음 한두 살쯤 어린 동네 후배들이 지나가다 우리를 발견하고는 뭐 하느냐며 다가왔고, 이런저런 시답잖은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그들 무리 중 한 명이 라이터에 불을 붙여 마른 잔디를 태우기 시작했다. 쉽게 끌 수 있겠거니 생각하고 작게 시작된 불장난은 바람에 의해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불길은 묘의 주변을 둘러싼 어린 소나무까지 옮겨 붙었다. 더럭 겁이 나기 시작한 것은 그때쯤이었고, 누가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닌데 우리는 다들 손에 솔가지를 꺾어 들거나 상의를 벗어 들고 번지는 들불을 끄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들불과 사투를 벌인 결과 간신히 불길을 잡긴 했으나 그곳에 있던 아이들의 몰골은 봐주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했다. 눈썹이 그슬린 것은 물론 숯검정이 묻어 가관이었다. '들불처럼 번지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이 그야말로 들풀처럼 번지고 있다. 어찌나 많은지 각각의 선언문을 일일이 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선언문이 더러 있었다.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로 시작하여 '우리는 이제 폐허 속에 부끄럽게 머물지 않고, 인간다움을 삶에서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새로운 말과 현실을 발명하기 위해 함께 목소리를 낸다. 대통령으로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무관심하며, 거짓으로 진실을 가리고, 무지와 무책임으로 제멋대로 돌진하는 윤석열은 즉각 퇴진하라!'는 말로 끝을 맺고 있는 경희대 시국선언문과 '어째서 사람이 이모양인가!'라는 질책으로 시작하여 '오늘 우리가 드리는 말씀은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니 방관하지 말자는 뜻입니다. 아무도 죄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매섭게 꾸짖어 사람의 본분을 회복시켜주는 사랑과 자비를 발휘하자는 것입니다.'로 끝을 맺고 있는 천주교 사제 1466인 시국선언문이었다. 물론 '당신은 더 이상 우리의 대통령이 아니다.'는 선언으로 시작하는 연세대의 시국선언문에도 눈길이 갔다. 그렇다고 다른 대학의 시국선언문을 숫제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꼼꼼히 읽고 기억하지 못했을 뿐이다한 번 번진 들불은 끄기 어렵다. 타오르는 불꽃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이리 날고 저리 건너뛰는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그 무서움을 잘 안다. 그러므로 들불은 발원 자체를 차단하는 게 최선이다. 그렇지 않다면 발화의 초창기에 사람들 모두가 합심하여 꺼야만 불길을 잡을 수 있다. 들불이 번져 숲으로 옮겨 붙었다면 그 피해는 장담하기 어려워진다.


엊그제 28일에는 대통령의 모교인 서울대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있었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윤석열 대통령 퇴진과 김건희 특검에 뜻을 모은 동료 시민들, 전국 각 대학의 동료 교수·연구자들과 함께 윤석열 정부의 조속한 퇴진을 강력하게 촉구합니다.'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고 있는 서울대 시국선언문. 이 정도 됐으면,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사과하고 물러나는 게 순리이겠으나 대한민국의 국민 모두는 당사자인 그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는 부끄러움도, 미안함도,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나 애국심도 전혀 없는 철면피 무뢰배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그 누구보다 자신의 부인을 사랑하는 사랑꾼임을 자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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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4-11-30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끄러움을 아는 자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죠. 그래서 인간으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꼼쥐 2024-12-01 15:15   좋아요 0 | URL
문제는 스스로 물러나려고 하지 않는 자를 물러나게 해야 한다는 점이죠. 국민 대다수의 고민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