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도 아닌데 비가 자주 내렸다. 등산로는 축축하거나 물이 고여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버섯과 같은 종균이 자라는지 이따금 쾨쾨한 냄새가 났고, 알밤도 들지 않은 빈 밤송이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새벽 어둠을 뚫고 산을 오르는 등산객의 랜턴 불빛과 저벅거리는 발자국 소리. 괴괴한 적막이 그렇게 깨지고 짓이겨져 도심의 아침은 늘 서둘러 찾아오곤 했다. 늘 잠이 부족한 도시인에게 계절을 구분하지 않고 일정한 출근시간을 요구하는 것은 얼마나 가혹한 일인가.


대한민국 1세대 개그맨으로 불리던 전유성 씨가 향년 76세로 별세했다. 나는 아직도 그의 저서 <컴퓨터 일주일만 하면 전유성만큼 한다> 또는 <하지 말라는 것은 다 재미있다> 등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가물가물한 오래된 책들이 먼저 떠오른다. 전유성 씨의 별세 소식과 더불어 윤석열 씨의 재판 출석 장면이 눈길을 끌었다. 규칙적인 구치소 생활 덕분인지 그는 꽤나 건강한 모습이었다. 술에 절어 살았던 대통령 시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건강을 회복한 모습이었다. 과거 군에 갓 입대한 신병에게 늘 하던 말, "너는 군대 체질이다."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윤석열 씨가 곁에 있었다면 진심으로 해주고 싶었던 말, "당신은 구치소 체질입니다."


추석 명절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길게 이어지는 연휴 탓인지 해외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듯했다. 시계를 30년 전으로만 되돌려도 지금과 같은 날이 오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해외여행이라는 건 일부 특별한 사람들에게나 해당하는 특별한 행사처럼 여겨졌었다. 지금처럼 맘만 먹으면 국민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보편적인 일이 되리라고 그 시절에는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9월의 마지막 주말. 다음 주에는 10월이 시작된다. 2025년도 어찌어찌 다 흘러가는 느낌이다. 아직 세 달이나 남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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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우리는 자신의 미래가 걱정되기보다는 지나온 과거가 손상되거나 파괴되지 않을까 염려하며 노심초사 살아가는 게 아닐까요? 과거의 기억은 우리가 떠올릴 때마다 머릿속에서 수십, 수백 번 변형되고 재편집되며 오늘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특별한 노력을 경주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갈고 닦고 매만지면서 오랜 세월 동안 가꿔온 것이기에 그 기억이 어느 한순간 감쪽같이 사라지거나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짠 하고 등장하지나 앓을까 하는 불안,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자신의 기억을 끝없이 되새김질하게 됩니다. 우리들 각자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한 편의 영화를 제작하는 한 사람의 편집자이자 제작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것은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주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자신을 유일한 관객으로 초대하고자 함이라는 사실이 다른 영화와 구별되는 고유한 특징일지도 모릅니다.


어제는 군에 있는 아들을 면회하기 위해 오산에 다녀왔습니다. 간간이 비가 내렸고 때로는 안개가 자욱했습니다. 아들을 차에 태워 집에 도착한 것은 생각보다 이른 시각이었습니다. 점심을 먹은 후 공원묘지에 들렀는데 생각보다 많은 방문객들이 있어 조금 놀랐습니다. 추석은 아직 먼 느낌인데 말입니다. 저녁으로 피자헛에서 피자를 배달시켜 먹고 집을 나섰던 게 저녁 7시. 병장이 된 아들은 이제 군복을 입은 모습이 꽤나 자연스러워 보였습니다. 아들을 부대에 내려주고 홀로 돌아오는 길은 무척이나 어두웠습니다.


김탁환의 산문집 <읽어가겠다>를 읽고 있습니다.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책이 처음 출간되었던 10여 년 전에도 나는 이 책을 읽었던 듯합니다. 그러나 책에 대한 기억은 흐릿할 뿐 책의 내용은 온전히 새것인 양 남아 있는 게 전혀 없습니다. 뚝 떨어진 아침 기온으로 인해 가을을 실감하였던 나는 생텍쥐페리의 소설 <남방우편기>에 대한 김탁환의 생각을 읽은 후 책을 덮고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잠깐 맑았던 하늘엔 다시 먹구름이 몰려와 어두워졌습니다. 아파트 뒤편 놀이터에는 엄마 아빠와 함께 나온 아이들이 까르르까르르 연신 웃음을 터뜨립니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생텍쥐페리에겐 이런 거듭된 단절이 너무나도 강한 충격이었으니까, 삶에서 만나게 되는 다른 갈등이나 마찰은 충격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전쟁 전야에 공포를 느끼면서도 담담하게 출격 준비를 하는, 비행이 곧 자신의 직업인 존재들만이 갖는 특별한 감정에 근거하여, 생텍쥐페리는 삶과 사랑과 죽음을 바라봤던 것이겠지요."  (p.57)


더없이 좋은 계절에 우리는 괜스레 우울해지거나 그런 감정에 빠질 수밖에 없는 몇몇 이유를 가슴에 품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좋은 계절이 1년 중에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적다는 것과 이 아름다운 계절에 사랑하는 누군가와 영원한 이별을 경험했던 아픈 기억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올해의 가을이 극적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지난여름이 너무나 무더웠던 탓일 테지요. 극과 극의 변화가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지금은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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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이 이용하는 공공시설에는 언제나 소위 '빌런'이라고 불리는 악당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지하철 빌런이나 아파트 지하 주차장의 주차 빌런도 있다. 게다가 일반인은 잘 알지 못하는 특이한 빌런들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콜센터에 전화를 걸어 분노를 유발하기도 하고, 가짜 화재 신고나 112 신고를 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개중에는 처벌을 받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 곳곳에서 활동하는 빌런들의 활약(?)은 여전히 뜨겁다. 심지어 어떤 이는 원고 투고 후 매일 출판사에 전화를 하는, 이른바 원고 투고 빌런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하니 세상은 참으로 요지경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어제는 모처럼 도서관 나들이를 갔었다. 자주 가다 보니 도서관 직원들은 대체로 낯이 익은데 그중 한 분과 잠깐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분 왈, 도서관에 출근 도장을 찍는 것처럼 매일 나오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으로 인한 민원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는 것이었다. 반바지 차림에 가방을 메고 나오는 그 사람은 도서관에 도착하자마자 슬리퍼로 갈아 신고 미리 예약한 컴퓨터 좌석에 앉아 유튜브 동영상을 시청한다고 한다. 거기까지는 뭐 그렇다 치는데 문제는 그다음, 맨발에 슬리퍼 차림이었던 그 사람은 한쪽 발을 다른 쪽 무릎에 올려 놓고 발바닥을 주물럭거리곤 하는데 그 손으로 컴퓨터 자판을 만지기도 하고, 자세를 삐딱하게 앉아 옆 좌석의 사람과 종종 마찰을 빚기도 한다는 것. 게다가 조금 덥다 싶은 날에는 화장실 세면대에서 머리를 감기도 하고, 발을 씻기도 한다고 했다. 이와 같은 현장을 목격한 다른 이용자들이 직원에게 자주 신고를 한다는데, 그때마다 주의를 줘도 막무가내라는 얘기였다. 연세도 많이 든 어르신이라 심하게 말을 할 수도 없으니 직원들의 고충이 이만저만 아니라는 것이었다. 세상에 참 별별 사람도 많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런 사람은 우리 주변에 의외로 많다는 걸 깨닫게 된다.


내가 매일 아침 오르는 산의 능선에 놓인 운동기구, 소위 '산스장'에도 올여름에 나타난 빌런이 있다. 나이도 지긋한 그분 역시 빌런으로서의 모든 재능을 갖추고 있다. 다른 이의 눈치를 보지 않는 능력도 탁월하고, 막무가내 고집불통의 재능도 우수하다. 민소매 운동복 차림으로 산스장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산스장에 하나뿐인 역기를 독차지한다. 모기를 쫓기 위해 준비한 스프레이로 주변을 정리하고, 누운 자세로 역기를 몇 번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한 후 그 자리에 앉아 다른 이는 그 시간에 역기를 할 수 없게 만든다. 몇 발자국 옆에는 벤치도 있는데 그분은 도통 움직일 생각이 없다. 그렇게 역기를 전세 낸 채 몇십 분을 보낸다. 출근 때문에 기다릴 수 없는 나는 역기 대신 다른 운동(팔굽혀펴기와 같은)을 하고 산을 내려올 수밖에 없다. 역기 옆의 작은 공터에서 훌라후프를 돌리는 어르신들도 그분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역기 거치대에 앉아 도통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게 산스장의 빌런으로 등극하신 그분도 이따금 피곤한 탓인지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런 날이면 아침에 만나는 모든 이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그렇게 좋아할 일인가 싶기는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마주치는 빌런들에게는 몇몇 공통된 특징이 있다.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데 조금 어려운 점이 있거나 제대로 된 공공의식을 교육받지 못했거나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인식하지 못하는, 이른바 사회성이 뒤떨어진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원시부족사회에서 살다가 많은 규칙과 법이 존재하는 문명사회로 어느 날 갑자기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불쌍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말도 통하지 않는 그들에게 화를 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우리는 지금 수많은 빌런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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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25-09-14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 고시공부 하던 시절에 돈이 없어서 신림9동 도서관에서 공부했는데 그때 기억이 납니다. 대체 몇년판인지 모를 오래된 법서 잔뜩 쌓아놓고 있던 초로의 수험생... 지금도 거기 있을까 모르겠네요.

꼼쥐 2025-09-15 16:17   좋아요 0 | URL
그분은 아마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겠죠. 그 자리를 다른 빌런이 대체하고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미림여고 올라가는 그 길이 눈에 선하기는 하지만.
 

먼 미래에는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가 인간을 사육하는 날이 기어코 오고야 말 것이라는 상상을 이따금 하게 된다. 그들이 만든 지저분한 축사에서 그들이 던져주는 사료를 먹고 자란 인간을, 알맞게 살이 오른 인간을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하고, 그렇게 팔려 온 인간을 도축장에서 부위별로 자르고 분해하여 그들이 원하는 요리의 재료로 선별되고 포장된 인육. 그리고 그 생명체들에 의해 최종적으로 소비되는 현장. 도무지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이지만 인류가 개인의 욕심에 따라 진화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허무맹랑한 가정이라고 치부하기에도 뭔가 미진한 면이 있는 것이다.


성숙한 인간이 가장 먼저 깨닫는 바는 자신의 몸과 마음 등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다. 내 마음이지만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이가 듦에 따라 자신의 육체 역시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부위가 차츰 늘어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수양이 부족한 인간은 자신에 속한 영과 육을 자신의 통제하에 둘 수 있는 능력이 차츰 소멸되어감에 따라 인간 스스로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게 아니라 타인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에 집착하게 된다. 예컨대 젊고 건강한 육체를 가졌음은 물론 여러 사람을 제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큰 권력을 소유한 인간을 대상으로 자신의 지배하에 두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그들을 유혹할 수 있는 미끼를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와 같은 용도의 미끼는 매우 다양하지만 가장 흔한 것은 돈이다. 그리고 우리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미끼는 종교를 통한 지배이다. 우리나라에서 또는 전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 사이비 종교가 판을 치는 이유도 그런 까닭이다. 물론 우리가 정통 종교라고 믿고 있는 여러 종교도 이러한 욕심에 의해 세속화되고 도구화되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말이다.


우리가 내란 특검과 김건희 특검을 통해 보게 되는 진실은 인간의 욕망과 그러한 욕망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발현되는 믿을 수 없는 추악함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가 조찬 기도회를 주관하고 설교에 나섰던 김 모 목사뿐만 아니라 기도회에 참석한 단일종파 최대 교회의 이 모 목사 등은 종교를 빌미로 권력을 움직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인간들이다. 그야말로 노욕이 아닐 수 없다. 나이가 들어 자신의 영과 육을 자신의 통제하에 둘 수 없음을 인지함에 따라 자신의 외부에 있는 다른 사람의 권력을 통해 자신의 욕심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항상 자신의 다음 선거를 염려해야 하는 정치인은 종교인이 지배하는 신도들이 늘 탐이 나는 건 당연한 일, 노쇠한 종교인의 욕심과 정치인의 야욕이 적절한 선에서 맞아떨어진 셈이라고 하겠다. 매관매직은 물론 부패한 관리의 구명 그리고 자신의 신도들을 동원한 특정 정치인에 대한 지지. 이처럼 악취가 진동하는 욕심의 대환장 파티는 통일교와 신천지 등 사이비 종교인의 노욕에도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을 테다.


영과 육이 노쇠하여 어느 것 하나 자신의 통제하에 둘 수 없는 늙은 종교인의 지시에 따른다는 건 종교를 믿는 게 아니라 부패한 종교인의 노욕의 도구로 이용되는 것이다. 아무런 비판도 없이 그들의 지시에 따른다는 건 산업현장의 로봇과 하등 다를 게 없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욕심이 진화하다 보면 언젠가 우리 인간은 다른 생명체의 지배하에 들어갈 수도 있고, 우리가 지금 사육하는 가축과 같은 신세로 전락하는 일은 어쩌면 시간문제일지도 모른다. '젊은 여집사에게 빤스 내려라 해서 그대로 하면 내 성도요, 거절하면 내 성도 아니다.'라는 말은 노쇠한 종교인이 외부인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게 얼마나 손쉬운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비판의식이 없다면 우리는 그런 신세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언젠가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에 지배당하는 것도 허무맹랑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과연 현실인가 아니면 SF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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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는 매물로 나온 폐가 한 채를 보러 갔다 온 적이 있습니다. 시골에 있는 단독주택이지만 사람이 집을 비운 지는 채 1년이 되지 않아서 집은 비교적 멀쩡할 거라는 집주인의 얘기만 듣고 갔었는데 막상 그곳에 도착하고 보니 건물 주변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당은 온통 잡초와 잡목으로 우거져 이곳이 과연 사람이 살던 곳인가 의심이 들 정도로 상황은 심각했습니다. 어떻게든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 보려고 사람의 키 높이만큼 자란 잡초를 한 손으로 젖히자 숨어 있던 모기와 벌레들이 우르르 몰려나왔습니다. 몇 발자국 내딛지도 않았는데 땀은 비 오듯 흐르고 어린 아카시아 나무의 가시와 억새풀 등 외부 침입자의 진입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보이는 잡초의 등등한 기세에 눌려 나는 그만 진입을 포기한 채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그랬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에게는 그들 나름의 방어기제가 존재한다는 걸 나는 처음으로 목도하였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삶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드러내는 낯선 생명체에 대한 적의는 그 폐가의 마당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도 조용히 간직하고 있었던 듯 보였습니다. 나는 그것을 무시한 채 겁도 없이 그들의 영역 속으로 들어가려 했었고, 그곳의 생명체들은 단합하여 낯선 침입자의 진입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나는 순하고 여리게만 보았던 강아지풀도 그곳에서는 위협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노란 달맞이꽃의 대궁도 억세디 억센 잡목으로만 보였습니다. 그들은 논두렁이나 시골길에서 보았던 친숙한 존재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살고자 하는 욕망은 식물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오늘 아침 예전에 같은 직장의 동료였던 한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문득 폐가의 여린 식물들이 내게 보였던 날 선 적의를 떠올렸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소극적인 방어책이었을 뿐이지만 낯선 이방인이었던 나에게는 충분한 위협으로 느껴졌습니다. 식물들도 그렇게 살고자 애쓴다는 걸 나는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습니다. 과거 한때 직장 동료였던 그분은 올해 초 내게 전화를 걸어 시간이 되면 언제 식사나 같이 하자는 말을 전했었습니다. 그리고 내내 연락이 없었는데 오늘 아침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던 것입니다. 그분은 놀랍게도 자신이 지금 골육종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내게 알렸습니다. 허리가 아파 척추관 협착증 치료를 받으러 내원했다가 우연히 종양이 발견되었고, 정밀 검사를 받은 결과 암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전화를 하겠다고 해놓고 오랫동안 전화를 하지 못해 미안했다는 그분의 말에도 한마디 대꾸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 다음 주 월요일 서울대 병원에 입원한다고 하면서 몸이 좀 나아지면 다시 전화하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폐가에서 보았던 식물의 생명력, 그 날카로운 적의를 그분도 머릿속 깊이 간직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인이 된 위지안 교수의 에세이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가 머릿속에서 똬리를 틀고 떠나지 않았습니다. '언제 밥이나 먹자'는 그분의 말이 영원히 빈말로 남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그분 역시 기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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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즈음 2025-09-05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좋은 소식을 들고 연락오셨음 좋겠습니다.

꼼쥐 2025-09-06 12:51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마음이 심란한 주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