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자신의 삶을 매 순간 또렷이 감각하고 인지하면서 살아야 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들 대부분은 세월의 흐름에 수동적으로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때로는 지겹고 힘든 날들을 보내기도 합니다.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이 그날이 그날 같은, 지루하고 반복적인 날들로 채워지고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자신의 죽음을 유예할 수 없는 까닭에 자신이 감각하는 삶을 유예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누구에게나 반드시 찾아오는 죽음의 순간을 자신의 뜻에 따라 앞당길 수는 있어도 간절히 원한다고 해서 그 순간을 뒤로 한정 없이 미루기는커녕 단 일 초도 유예할 수 없기에 삶을 지속하고자 하는 우리는 그 삶에서 감각할 수 있는 것들을 유예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마저 유예할 수 있다면 순간순간 느끼고 감각하는 것들도 때로는 무미건조하게 지나치거나 쉽게 잊은 채 지나친다 한들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조금도 유예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고 너무도 당연한 진리이지만 말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 하락에서 비롯된 기자회견이었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나만의 주관적인 판단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민주당의 신임 당대표를 비롯한 당내 국회의원들의 정치적 이해타산과 이를 이용하여 경제적 이득과 명성을 취하고자 했던 일부 유튜버와 정치 지망생들의 결합에서 시작된 멸칭과 조롱의 정치 비평은 의식 있는 국민들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아 왔고, 그 기간 또한 결코 짧지 않았습니다. 같은 진영 내의 갈등과 마찰을 적극적으로 봉합하여야 했던 청와대는 오히려 이를 방치하고, 용인하고, 때로는 부추기는 듯 보였습니다. 멸칭과 조롱을 일삼는 인사를 오히려 중용하고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반명'이니 '신천지'니 하면서 차별하였던 것입니다.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위기는 기회'라고 역설해 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위기에도 정도가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극단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 시야는 극도로 좁아지고 관심사는 오직 자신에게로 쏠립니다. 인간의 생존본능상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특이하게도 극단적인 자만과 극단적인 위기 상황은 쌍둥이처럼 닮아 있습니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70%에 육박하였을 때 대통령을 비롯한 이른바 친명 세력은 극단적인 자만에 취해 있었고, 자신들이 미워하는 일부 지지자들이 빠져나간다고 하더라도 걱정할 게 없다고 생각했었던 듯합니다. 그러나 지지율이 끝없이 추락하여 극단적인 위기 상황에 처하자 이제는 오직 자신들의 생존만 중요할 뿐 주변의 다른 이들을 돌볼 여력이 없어진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더욱더 분노를 쏟아내야 할 테고, 자신들의 행동이 초래할 타인의 아픔에 대해서는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살필 여유는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대통령의 지지율이 최고치로 높았을 때도, 지지율이 끝 간 데 없이 추락할 때에도 멸칭과 조롱을 일삼으며 하던 짓을 계속하게 될 뿐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막기 위해서는 사태의 초기에 막았어야 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높은 지지율에 취해 기고만장하던 시기인지라 '설마' 하던 기류가 팽배했었습니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을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삶을 지속하면서 시시각각 삶을 감각하고 인식한다는 건 자신의 삶을 유예하지 않고 현재의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즐거워하면서 순간순간의 자기감정을 감각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공동체 속에서 자신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자신의 삶이 전체 인생에서 어느 지점을 통과하고 있는지 조금씩 알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른바 친명을 자처하는 일부 유튜버와 정치가들은 그런 것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오직 자신의 생존을 위해 파닥거리며 누군가를 향해 분노하는 듯 보입니다. 그들도 부디 자신의 삶을 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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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때의 등산로는 여뀌와 달개비의 세상입니다. 다른 풀과 나뭇잎이 시들시들  말라가는 시기에 여뀌와 달개비는 내 세상입네,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그들 무리 속에 키가 껑충한 미국자리공과 돼지감자도 이따금 한 자리를 차지한 듯 보이지만 여뀌와 달개비의 푸른 생명력에 묻혀 잔뜩 움츠러든 모습입니다. 가을을 노래하는 귀뚜라미 소리가 고즈넉한 숲의 고요를 깨우고 여뀌와 달개비에 맺힌 새벽 이슬이 등산객의 바짓가랑이를 적십니다. 추석 명절이 가까워지면서 가을 느낌이 한층 깊어지는 요즘입니다.


활동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 찾아왔건만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을 생각하면 마음은 한없이 무겁기만 합니다.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30% 초반대를 보이고 이것이 바닥이라는 징후도 전혀 보이지 않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 까닭인지 오는 18일에 대통령의 기자간담회를 갖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18일을 기점으로 대통령의 지지율이 바닥을 찍고 반등에 성공할까요?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지지율은 계속해서 하락할 것이라고 봅니다. 근본적으로 대통령의 자세나 여론을 대하는 태도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은 며칠 전 자신의 sns에 올린 글에서 '개혁의 가장 큰 걸림돌은 개혁의 이름으로 개혁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말하자면 자신의 뜻에 반하여 바른말을 하는 사람은 개혁을 방해하는 세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른바 윤석열이 자신의 뜻에 반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반국가 세력'이라고 칭했던 것과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자신의 뜻에 반하는 사람들을 향해 '개혁을 방해하는 세력'이라고 하면 민주 대통령이고 '반국가 세력'이라고 하면 반민주 대통령일까요?


전에도 밝힌 바 있지만 나는 성인 된 이후 꾸준히 민주당을 지지해 왔던 사람입니다. 그랬던 내가 민주당 출신의 대통령과 압도적인 차이의 여대야소 정국에서 대통령과 민주당 당대표의 뻘짓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쓰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5년의 임기 내내 '명비어천가'만 읊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취임 후 2년도 되지 않은 임기 초반에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정말...


사람은 대체로 자신의 마음속에 억울함이 있으면 그 억울함을 풀기 위해 외부의 적을 세우게 마련입니다. 하나의 억울함이 있으면 한 사람의 적을, 두 개의 억울함이 있으면 두 사람의 적을, 세 개의 억울함이 있으면 세 사람의 적을... 이렇게 자신이 품은 억울함의 개수에 비례하여 외부의 적도 끝없이 늘려가게 마련이지요. 대통령이 지금 그런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이 나서서 직언을 하면 그 사람의 말에 대해 억울함을 품는 것은 물론 그 즉시 그를 적으로 돌려버립니다. 그리고 속으로는 '나는 잘하고 있는데 왜 저렇게 말할까? 나는 억울하다.'라고 앙심을 품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로는 국정 지지율을 끌어올릴 방법이 없습니다. 민주당의 당대표라는 자도 대통령과 뜻을 같이 하여 감찰을 하겠다는 둥 공천을 주지 않겠다는 둥 지지자들을 하나둘 적으로 돌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반등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비판에 대해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신이 개선할 점을 살피는 전향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대통령과 그 권력에 기생하는 여권의 정치인들은 그렇게 할 의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지지율은 계속해서 하락할 수밖에...


낮에는 제법 올랐던 기온이 빠르게 떨어지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지지율처럼 말입니다. 일교차가 어찌나 심한지 주변에는 감기 환자가 급격히 늘었습니다. 일상에서 우리도 자신의 내부에 억울함을 품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결국 손해를 보는 쪽은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내부에 품은 억울함이 누군가로 향한 증오가 되고, 그것이 분출되면 결국 분란만 일으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니까 말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비판의 말이나 직언을 할라치면 자신의 행동을 살피고 개선점을 찾는 성숙한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것이 정신건강에도 도움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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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생각에 얽매일 필요도 없다. 우리들 대부분은 삶의 중심부를 향해 단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한 채, 말하자면 삶의 테두리를 의미도 없이 빙빙 겉돌기만 하다가 주어진 삶을 마감하는 까닭에 어차피 그렇게 될 것이라면 어떤 것에도 구애됨이 없이 자유롭게 살다 죽는 것이 매사에 노심초사하면서 사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로운 삶을 전혀 경험해 본 바 없거나 그것에 대해 극히 제한적인 경험을 갖고 있는 게 전부여서 자유로운 삶을 어떻게 구현하고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기껏해야 우리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조르바의 삶이 자유로운 삶의 원형 또는 그와 유사한 어떤 것이라고 어렴풋이 추측할 뿐이다. 이런 얄팍한 지식으로는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자유로운 삶을 현실에서 구현하기는 어렵다. 어려울 뿐만 아니라 위험하다. 그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남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모나지 않게 사는 것이 안전하다는 뜻이다. 조금 구질구질하기는 해도 말이다.


나희덕 시인의 산문집 <마음의 장소>를 읽고 있다. 시인이 쓴 산문은 한 꼭지 한 꼭지가 마치 한 편의 시처럼 짧고 단정하다. 전할 말만 남기고 기타의 군더더기는 모두 제거한 느낌이다. 사실 나는 시인이 쓴 산문을 좋아하는데 그 이유가 이처럼 간결하기 때문이 아니라 유려하고 멋진 표현력 때문일 경우가 많다. 나희덕 시인은 나의 그런 바람을 충족시켜 주기는커녕 그 반대에 가까운데 나는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한 채 계속하여 읽고 있다. 달콤한 과자가 몸에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하여 손이 가는 것처럼 말이다.


"누구에게나 특별한 마음의 장소라는 게 있다. 살면서 지치고 외로울 때 오래된 친구를 찾아가듯 몸과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곳. 나에게도 그런 장소가 몇 있는데, 그중 하나가 전남 강진에 있는 백운동 별서정원이다. 그곳과의 인연은 꽤 긴 편이다. 십여 년 전 지인의 안내로 월출산 아래 멋진 동백숲이 있는 집터를 가보게 되었다. 그 후로 낮은 돌담과 작은 오두막이 있는 그곳에 이따금 혼자 찾아가 앉아 있곤 했다. 집터를 구입할 사정은 안 되지만, 마음으로는 그곳에 수없이 집을 짓고 허물기를 반복했다."  (p.190 '마음의 장소' 중에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한 편의 시가 고픈 것은 순전히 계절 탓이다. 가을이라는 계절이 나처럼 뻣뻣하고 감정이 무딘 사람에게도 한 편의 시를 읽게 하는 걸 보면 '가을의 마법'이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러나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시를 읽었다. 서점 가판대에서 시집은 제법 인기 있는 코너였다. 세월이 무상하게도 요즘 사람들은 시를 잘 읽지 않는다. 유행 때문은 아니지만 나 역시 시와는 한참이나 멀어졌다. 계절을 핑계로 시집 한 권쯤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순전히 계절 탓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간절히 시가 고픈 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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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찾아온 가을에 들뜬 사람들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기라도 하려는 듯 요 며칠 맑았던 하늘은 어제오늘 우중충하게 흐려 있습니다. 길게 이어지던 늦더위는 사라진 듯하고 뚝 떨어진 아침저녁의 기온은 으스스한 한기마저 느끼게 합니다. 계절이 바뀌는 이 시기에 우리는 제법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연일 추락하는 대통령의 지지율을 보면서 나는 요즘 우리가 전임 정권 시절에 보았던 정치인 이재명에 대한 판단이나 생각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 국민 대다수가 인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는 매우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성인이 될 때까지 꽤나 힘겨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스스로의 힘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사법고시를 통과하여 변호사가 되었던 것을 보면 그는 남들보다 뛰어난 의지와 목표의식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은 성과를 낼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지닌 의지나 열정을 의심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가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온몸으로 겪고 목격하였기에 누구보다도 서민의 삶을 잘 이해하고 그들을 위한 정책을 펼칠 것이라고 착각하였다는 점입니다. 그가 늘 입에 달고 살았던 '억강부약(抑强扶弱)'이 현실에서 구현될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속담을 까맣게 잊은 채 말입니다.


게다가 개인의 목표를 향한 강한 의지를 마치 어떤 신념이나 용기로 착각하였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우리는 그가 부당한 권력에 맞서 싸우고 그 과정에서 마주칠 수 있는 어떠한 위험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인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정의와 용기를 몸으로 체득한 사람이라고 믿었다는 게 우리의 착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정치인 이재명은 자신이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임기응변과 대처 능력으로 위기를 돌파했을 뿐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좋았을 뿐이지요. 낙선을 뻔히 예감하면서도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부산 출마를 강행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 여정과는 사뭇 달랐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고집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마지막 모습에서 불안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비겁을 감추기 위해 실용이라는 말로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다는 것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계속되는 지지율 하락을 지켜보는 진보 진영의 많은 사람들은 지지율 반등의 모멘텀을 모색하기 위한 여러 방안을 내놓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 상태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는 게 나의 생각입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전당대회 이전부터 민주당의 여러 사안에 대해 음으로 양으로 개입하여 왔고, 대부분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졌던 게 사실입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기 위해 같은 진영의 지지자들을 향해 '문조000'이라는 멸칭과 조롱을 일삼는 여러 언론과 유튜버들을 부추기거나 용인하였고, 자신이 원하는 '구조적 다수'를 획득하기 위해 극우적 인물도 등용하였던 게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면서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자들의 마음이 차갑게 식어갔고 '문조000'를 외치던 사람들은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자들을 향한 조롱을 멈추지 않은 채 '반명' 딱지를 붙이거나 듣도 보도 못한 '신천지' 딱지를 붙이기에 이르렀습니다.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자들은 이제 그야말로 실질적인 '반명' 세력이 되고 말았습니다. 머리가 좋고 눈치가 빠른 이재명 대통령이 작금의 현실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문조000'를 외쳤던 자들을 징계한다거나 전통적 지지자들에게 사과한다는 말은 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문조000'를 외쳤던 사람들이 '반명'으로 돌아서고 말 테니까 말입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잔꾀에 의한 지지율 하락을 지켜보면서 다른 방안을 모색할 테지요. 개헌이나 파병을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의 한 방안인 듯 보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시적으로 자신을 지지하는 일부 유튜버의 눈을 속일 수는 있겠지만 국민 전체를 속일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이재명 대통령은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꼴이지만 우리나라의 정치 발전을 위해서 나쁜 결과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싶습니다. 내란의 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국민의힘과 '구조적 다수'라는 헛된 꿈을 꾸고 있는 민주당의 양당 체제를 무너뜨릴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두 정당을 견제할 수 있는 제3의 정당이 출현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정치사에서 조금 더 발전된 민주 제도가 정착될 수만 있다면 지금의 혼란은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하늘은 여전히 어둡고 불어오는 바람 속에는 으스스한 한기가 스민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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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하는 질문에 답장이라도 하려는 듯 요 며칠 바람이 불었습니다. 습기를 말끔히 걷어낸 건조한 햇살이 대지를 말리는 동안 푸르름을 드러낸 하늘은 한 뼘쯤 높아진 듯했습니다. 곡식이 익어가는 계절, 농촌의 농부들에겐 타들어갈 듯 건조한 햇살이 계절에 맞춰 알곡을 여물게 하고, 과일의 단맛을 더욱 깊게 하는 더없이 소중한 존재일 테지만, 나와 같은 도시내기들에겐 그저 살갗을 태우는 잉여의 열기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늘에서 맞는 끈적이지 않는 바람의 감촉은 마냥 좋았습니다.


나는 계절이 바뀌는 시기마다 익숙했던 지난 계절을 떠올리곤 합니다. 익숙하다는 건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곧 잊힌다는 것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새로운 계절에 익숙해지는 것처럼 나와 가까웠던 사람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날 때마다 나는 그들이 없는 세상에 조금씩 익숙해져 왔고, 새로운 세상을 의식하지 못할 만큼 익숙한 지금 나는 그들과 함께 했던 많은 기억들을 잊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게 마련'이라는 옛사람들의 말처럼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무뎌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다 문득, 계절이 바뀌듯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어떤 시기가 찾아오면 옅어진 죄책감에 새로운 색을 입혀 그들과의 추억을 조금씩 되살리곤 합니다. 지워질 듯 지워지지 않는 초등학교 시절에 쓴 연필 글씨처럼 한동안 잊고 지내던 추억은 뿌연 연기 속에서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되살아나곤 합니다.


나는 지금 김연수 작가 외 7인이 쓴 <계절 쓰기>를 읽고 있습니다. 김연수 작가와 전의령 인류학자는 여름을, 홍한별 번역가와 윤경희 문학평론가는 가을을, 김소연 시인과 김지승 작가는 겨울을, 허태임 식물분류학자와 은유 작가는 봄을 씀으로써 책은 사계절을 아우르게 되었습니다. 홍한별 번역가가 쓴 가을의 일부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 나의 계절도 가을이다. 낮이 점점 짧아지고 총기도 사그라진다. 심장이 덜컹거리고 감정은 둔탁하다. 가을은 시들고 이우는 계절이지만, 무성한 잎을 내주는 대신 결실을 맺는 계절이기도 하다. 찬란하지는 않지만 쓸모가 있는 계절이다. 그래야 하는데, 어느덧 시대가 바뀌었고 내가 지금껏 축적해 온 지식이 무용해져 버린 듯한 기분이 든다. 나는 글을 쓰고 싶었지만 무얼 써야 할지를 몰랐다. 그래서 시인이 되는 대신 남이 써놓은 것을 따라서 쓰는 번역가가 되었다."  (p.40)


베란다에서도 차츰 뜨거워지는 마른 햇살의 열기가 느껴집니다. 아파트 화단의 정원수에는 지금도 짝을 찾지 못한 수컷 말매미의 울음소리가 이따금 빈 하늘에 공허한 메아리로 맴돌고, 새로운 계절에 지문을 남기려는 듯 마른 잎사귀가 지면을 향해 살랑살랑 떨어집니다. 나는 이제 익숙했던 계절과 이별하고 새로운 계절에 익숙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늘한 새벽 기온에 잠이 깨어 열린 창문을 닫기도 하고, 투명해진 햇살에 지그시 눈을 감기도 합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조금씩 가을을 잊어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익숙해진다는 건 잊힌다는 뜻의 다른 표현이라는 걸 나는 수십 년의 세월을 살아낸 후 겨우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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