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이 이용하는 공공시설에는 언제나 소위 '빌런'이라고 불리는 악당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지하철 빌런이나 아파트 지하 주차장의 주차 빌런도 있다. 게다가 일반인은 잘 알지 못하는 특이한 빌런들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콜센터에 전화를 걸어 분노를 유발하기도 하고, 가짜 화재 신고나 112 신고를 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개중에는 처벌을 받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 곳곳에서 활동하는 빌런들의 활약(?)은 여전히 뜨겁다. 심지어 어떤 이는 원고 투고 후 매일 출판사에 전화를 하는, 이른바 원고 투고 빌런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하니 세상은 참으로 요지경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어제는 모처럼 도서관 나들이를 갔었다. 자주 가다 보니 도서관 직원들은 대체로 낯이 익은데 그중 한 분과 잠깐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분 왈, 도서관에 출근 도장을 찍는 것처럼 매일 나오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으로 인한 민원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는 것이었다. 반바지 차림에 가방을 메고 나오는 그 사람은 도서관에 도착하자마자 슬리퍼로 갈아 신고 미리 예약한 컴퓨터 좌석에 앉아 유튜브 동영상을 시청한다고 한다. 거기까지는 뭐 그렇다 치는데 문제는 그다음, 맨발에 슬리퍼 차림이었던 그 사람은 한쪽 발을 다른 쪽 무릎에 올려 놓고 발바닥을 주물럭거리곤 하는데 그 손으로 컴퓨터 자판을 만지기도 하고, 자세를 삐딱하게 앉아 옆 좌석의 사람과 종종 마찰을 빚기도 한다는 것. 게다가 조금 덥다 싶은 날에는 화장실 세면대에서 머리를 감기도 하고, 발을 씻기도 한다고 했다. 이와 같은 현장을 목격한 다른 이용자들이 직원에게 자주 신고를 한다는데, 그때마다 주의를 줘도 막무가내라는 얘기였다. 연세도 많이 든 어르신이라 심하게 말을 할 수도 없으니 직원들의 고충이 이만저만 아니라는 것이었다. 세상에 참 별별 사람도 많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런 사람은 우리 주변에 의외로 많다는 걸 깨닫게 된다.
내가 매일 아침 오르는 산의 능선에 놓인 운동기구, 소위 '산스장'에도 올여름에 나타난 빌런이 있다. 나이도 지긋한 그분 역시 빌런으로서의 모든 재능을 갖추고 있다. 다른 이의 눈치를 보지 않는 능력도 탁월하고, 막무가내 고집불통의 재능도 우수하다. 민소매 운동복 차림으로 산스장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산스장에 하나뿐인 역기를 독차지한다. 모기를 쫓기 위해 준비한 스프레이로 주변을 정리하고, 누운 자세로 역기를 몇 번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한 후 그 자리에 앉아 다른 이는 그 시간에 역기를 할 수 없게 만든다. 몇 발자국 옆에는 벤치도 있는데 그분은 도통 움직일 생각이 없다. 그렇게 역기를 전세 낸 채 몇십 분을 보낸다. 출근 때문에 기다릴 수 없는 나는 역기 대신 다른 운동(팔굽혀펴기와 같은)을 하고 산을 내려올 수밖에 없다. 역기 옆의 작은 공터에서 훌라후프를 돌리는 어르신들도 그분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역기 거치대에 앉아 도통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게 산스장의 빌런으로 등극하신 그분도 이따금 피곤한 탓인지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런 날이면 아침에 만나는 모든 이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그렇게 좋아할 일인가 싶기는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마주치는 빌런들에게는 몇몇 공통된 특징이 있다.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데 조금 어려운 점이 있거나 제대로 된 공공의식을 교육받지 못했거나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인식하지 못하는, 이른바 사회성이 뒤떨어진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원시부족사회에서 살다가 많은 규칙과 법이 존재하는 문명사회로 어느 날 갑자기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불쌍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말도 통하지 않는 그들에게 화를 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우리는 지금 수많은 빌런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