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베란다에서 얼굴만 빼꼼히 내밀고 내려다보면 아이들 놀이터가 한눈에 들어온다. 나는 휴일 한낮의 느긋함을 확인하기 위해 놀이터의 풍경을 몰래 훔쳐보곤 한다. 쇠양배양 돌아치는 아이들의 잰 몸놀림을 미처 따라잡지 못한 시간은 급할 것 없다는 듯 느릿느릿 흘러간다. 꾸물꾸물 늦장을 부리는 시간 속을 쉼 없이 움직이는 아이들. 극과 극의 대비가 휴일 한낮의 놀이터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나는 지금은 군에 있는 아들의 어린 시절을 응시하는 부모의 시선이 되었다가 이따금 거침없이 뛰노는 아이의 시선이 되기도 하면서 단지 관객으로서 누릴 수 있는 느긋한 여유를 즐긴다. 휴일의 시간은 그렇게 나릿나릿 흘러간다.


12월의 첫날.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비장한 표정이다. 하필이면 첫날이 월요일이라서 그랬는지도 모르고 어제보다 기온이 떨어져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또는 비상계엄 1주년이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켜보고 있을 때의 시간은 정말 느리게 흐르지만 대충 뭉뚱그려 따져보는 시간은 너무너무 빨리 흐른다. 벌써 1년이라니... 뜬금없는 비상계엄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시민들의 노력 그리고 암담하게 흘러가던 시간들. 내란에 대한 죄과가 낱낱이 드러난 것도 아니고, 그에 대한 처벌이 시작된 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그 처참하고 암담했던 시간에서 벗어나 보통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하고 있다.


영화감독 윤가은의 산문집 <호호호>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나는 별자리 운세에 꽤 진지하다. 꿈은 너무 멀고 사랑은 계속 아픈데, 나는 내 마음조차 모르겠어 끝도 없이 방황하던 시절에 별자리를 만났다. 친한 선배의 소개로 점성술사 수전 밀러의 별점을 다달이 번역해 올려주는 개인 홈페이지를 방문했다가 전에 경험한 적 없던 큰 위로를 받았던 것이다.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다. 크고 따뜻한 무언가가 나와 내 인생을 깊이 이해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절대 겁을 주거나 경고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그저 다정하게 위로하고 부드럽게 격려할 뿐이었다.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도 같았다. 너와 비슷한 주기로 넘어지고 일어나는 다른 친구들도 많이 있다고, 그들과 함께 가는 거니까 너무 외로워 말고 힘내라고 응원해주는 것도 같았다."  (p.165)


우리는 비록 별자리는 서로 다르지만 '비상계엄'이라는 엄청나게 높은 산을 함께 넘은 동지이자 동시대의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시민으로서 '비상계엄 1주기'에 맞춰 힘내라는 응원의 말이라도 나누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추워진 날씨에 우리는 갑자기 서로의 건강이 문득 걱정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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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가 긴 슬픔이 가슴을 헤집어놓고 사라질 때가 더러 있습니다. 인간이란 본디 기쁨보다는 슬픔에 더 익숙한 까닭에 슬픔이 찾아올 때면 오히려 따뜻하고 안온한 느낌이 들게 마련입니다. 이를테면 아주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슬픔이 지나간 뒤의 후유증은 만만치 않은 것이어서 온몸에 힘이 빠지고 만사에 의욕이 사라지곤 합니다. 한번 그렇게 떨어진 의욕이 다시 보통 사람의 그것으로 회복하는 데는 꽤나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가슴을 열고 슬픔이 무시로 드나들 수 없도록 가슴을 꽁꽁 걸어 잠그는 게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어디 현관문을 잠그듯 필요할 때마다 그렇게 잠가 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문지기를 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지요.


오늘 아침은 생각보다 춥지 않았습니다. 나는 탁하고 텁텁한 미세먼지의 온기에 기대어 비교적 수월한 산행을 했습니다. 어제 내렸던 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워낙 적은 양의 비가 내렸던 탓일 테지요. 다만 어제 불던 바람은 잦아들어 어둠에 싸인 숲은 그저 고요했습니다. 나는 사실 요 며칠 뉴스를 뒤덮었던 내란 재판 변호사들의 난동과 대한민국의 종교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난동을 부렸던 변호사들 역시 종교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는 개신교는 자신들의 돈에 대한 탐욕을 교묘한 언어로 숨겨왔습니다. 자유민주주의라거나 자유시장경제 등의 언어를 교묘하게 섞어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의 돈과 권력에 대한 탐욕을 그와 같은 언어 뒤에 숨겨왔습니다. 사리사욕을 위해 전두환과 같은 살인자에게 '각하'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목사도 있고, 피고인 김건희와 함께 사찰을 방문하여 절을 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종교는 뒷전이고 오직 자신의 권력과 돈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사실 나는 대한민국 개신교의 발전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자신의 종교를 단순히 돈과 권력을 획득하는 용도로 사용해 왔다는 데 화가 날 뿐입니다. '그게 어제오늘의 일도 아닌데 왜 갑자기?'라고 반문하실 분도 있겠습니다만, 윤석열 정권을 지나오면서 그들의 행태는 선량한 국민들이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난동을 부렸던 변호사는 "일본 제국주의가, 그렇기 때문에 일본이 선진국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진관이 같은 놈을 데리고 있으니까 우리가 선진국이 못 되는 거죠. 저 같잖은 놈이, 안경 쓴 키 작은 남자라고 써 놓고서 자기 얘기인지도 모르고.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입니까?"라는 말 속에는 자신을 감치한 판사를 조롱하는 것과 더불어 그의 뇌리에 뿌리 깊이 박힌 일제에 대한 찬양과 동경의, 얼룩진 역사 인식이 존재합니다. 말하자면 그는 폴란드를 침공했던 독일 나치에 대해 오직 자신의 돈과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대중이 용납할 수 없는 언어로 나치를 찬양하는 폴란드 유태인과 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대한민국의 반역자인 동시에 인류 보편적 인권에 반하는 언어를 내뱉은 자입니다. 이와 같은 행위는 국가인권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 역시 종교를 방패막이 삼아 장애인이나 동성애자와 같은 소수자를 차별하고 혐오하며 증오를 부추깁니다. 인권을 보호하고 증진해야 할 그들이 앞장서서 인권을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행태는 박근혜 정권을 넘어서면서 일부 불교 종파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말하자면 종교의 가면을 쓰고 자신들의 돈과 권력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돈에 눈이 먼 그들이 대중에게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팔 날도 그리 멀지 않은 듯합니다.


종교를 방패로 삼는 이들의 특징 중 하나는 그들의 언어가 주로 욕설과 저주의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진실한 종교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 혐오와 차별, 그리고 증오의 언어로 어찌 신의 사랑이나 자비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들은 사이비 종교인일 뿐입니다. 나는 비록 세례를 받은 천주교인이지만 그들처럼 인간에 대한 증오의 말을 쏟아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신실한 종교인으로 살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서로 종교가 다를지라도 인류애라는 보편적 가치는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조국과 민족을 배신할 수 있고, 같은 민족을 향해 저주의 말을 쏟아내는 그런 비열한 인간은 되지 말았으면 합니다. 적어도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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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11-27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개신교는 율리아누스 황제와 같은 이가 나와서 뭔가 싹다 정리를 해야할 거 같습니다~

꼼쥐 2025-11-28 13:53   좋아요 0 | URL
지금이야말로 종교개혁이 필요한 시기인 게 아닌가 싶어요. 소위 목회자라는 놈들이 돈과 권력에 눈이 멀었으니...쯧쯧.
 

'국회의 물리적 충돌을 방지하고 대화와 타협을 증진하며, 소수 의견 개진의 기회를 보장하면서도 심의의 효율성을 강화하여 민주적이고 효율적인 국회를 구현하고자' 2012년 5월 2일에 개정된 국회법 조항이 있다. 이른바 우리가 알고 있는 '국회선진화법'이 바로 그것이다. '국회선진화법'은 사실 위반시 매우 엄격한 처벌이 가해지는 까닭에 현직 국회의원 및 국회의원에 출마하고자 하는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국회선진화법' 저촉 여부를 심각하게 따져볼 수밖에 없다. 500만 원 이상의 벌금형이 확정되면 의원직 상실은 물론 5년 동안 피선거권이 박탈되기 때문이다. 일반인에게 5년은 짧다면 짧은 기간일 수 있지만 정치인에게 5년은 영원과 같은 시간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치인을 벌벌 떨게 만드는 법이라고 해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 사람들은 늘 있게 마련, 남편이 판사이거나, 현직 국민의힘 의원이거나, 내란 재판을 받고 있는 윤석열. 김건희와 가깝게 지냈던 사람이라면 전혀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예컨대 국회에서 빠루를 들고 설치다 기소가 되어도 1심 선고가 내려지는 데는 무려 6년이란 긴 시간이 소모되기도 하고, 여론에 등 떠밀려 재판이 열린다 한들 검찰의 구형과는 상관없이 벌금 400만 원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형에 처해짐으로써 의원직은 그대로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재판장의 하혜와 같은 배려가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해 벌금 400만 원이 준비된 능력자라면 앞으로도 계속 국회에서 빠루를 들고 설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된다는 점이다. 그게 보기 싫다고? 그러면 당신도 판사 남편을 두거나 국민의힘 의원이 되면 된다.


2019년 국회 패스트트랙 충돌 사건으로 기소되었었던 국민의힘 전신 자유한국당 지도부 전원이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결심공판에서 500만 원 미만의 비교적 가벼운 벌금형에 처해짐으로써 다시 동물 국회로 회귀해도 된다는 법원의 공식적인 허가를 받게 되었다. 법원을 나서는 피고인들의 표정에서 그들의 속내를 추측하자면, "너무 부당한 것 같다고? 지금 감히 하느님과 동격인 판사의 결정에 불복한다는 얘기? 고귀하고 신성시하는 사법부의 권위에 도전하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어디 한번 나와 봐라. 이참에 본때를 톡톡히 보여줄 테니. 그리고 재판장과 가까운 사람은 너희와 같은 대중 나부랭이와 계급이 달라.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고 외치는 놈들은 다 빨갱이고, 좌파야. 어딜 감히..."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법원은, 말하자면 사법부는 법률로 정한 국회의 운영도 자신들의 맘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되돌릴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쥐고 있다. 2025년 11월 20일의 판결을 통해 그것을 대한민국 국민 전체에게 보여주었다. 사법부는 하느님과 동격이니 어느 누구건 대들지 말지어다. 대한민국 국회는 다시 동물 국회로의 회귀를 명한다. "땅, 땅,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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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뉴스에는 집안일을 도와주는 가정용 휴머노이드 로봇의 사전 주문을 받고 있다는 기사가 있었다. 버튼 클릭이나 음성 명만으로 각종 집안일, 이를테면 문 열기, 물건 가져오기, 방 정리, 조명 켜고 끄기, 세탁물 개기 등 기본적인 가사 업무를 수행하는 로봇인데, 우리 돈 월 71만 원으로 구독 가능하다는 기사였다.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세상 편해졌구나' 하는 식의 긍정적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심 걱정되는 바가 있었다. 지금처럼 로봇과 피지컬 AI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윤리적 제어 시스템마저 느슨해진다면 인류의 미래는 과연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가.


상업적 휴머노이드 시장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편안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이 아닐까 싶다. 얼마 전 국내에 출간된 마이클 이스터의 저작 <편안함의 습격>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은 사실 의외의 일이었지만, 아무튼 인류는 불편함을 제거하는 쪽으로 과학을 발전시켜 온 게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작금에 이르러서 인류는 육체적 불편함뿐만 아니라 정신적 불편함도 제거하려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게 남녀 관계와 성적 욕망의 해소 문제이다. 얼마 전 생성형 AI 대표 주자인 챗GPT는 올해 12월부터 성적 대화를 허용하겠다고 발표함으로써 AI 시장에서 윤리적 규제가 조금씩 느슨해지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경주 에이펙에서 젠슨 황 CEO가 밝혔던 것처럼 생성형 AI와 피지컬 AI의 결합은 필연적인 결과인 만큼 섹스 로봇에 생성형 AI가 주입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보아야 한다.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이었던 과거에 비해 작금의 청춘 남녀가 연인 관계로 발전하는 데는 시간적으로나 감정적으로 훨씬 수월해진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남녀 관계는 여전히 밀고 당기는 관계를 지속함으로써 서로의 애정을 테스트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말하자면 불필요한 감정 소모가 극심하다는 얘기다. 이와 같은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휴머노이드이다. 집안일도 겸하면서 주인의 성적 욕구를 취향에 맞춰 해소시켜 주는 휴머노이드의 출현은 시간문제인 듯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비단 남자에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닌 듯하다. 불필요한 감정 소모 없이 돈만 있으면 언제든 자신의 성적 취향에 어울리는 휴머노이드를 구매하거나 개조할 수 있다는 사실은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현대인에게 지극히 매력적으로 다가갈 것이다. 자신의 기분에 맞춰 언제든 성적인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더불어 육체적 욕망도 함께 해소할 수 있다면 굳이 인간 연인을 사귀기 위한 경제적, 시간적, 감정적 소모를 감행하려 할까.


결국 그런 세상이 온다면 휴머노이드를 구입할 능력이 되지 않는 가난한 인간들만 지금처럼 인간 연인을 만들기 위한 구애 활동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문제는 성적 욕망의 해소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 하나로 인해 문화 전반이 바뀔 위기에 처할 것이다. 사랑을 노래하는 시나 소설 등 순수문학은 물론 이를 바탕으로 한 영화마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사랑은 단순히 경제적 등가물일 뿐 지금처럼 극적이고 신비한 체험의 결과물로 인식되지는 않게 될 것이다. 아스팔트에 낙엽이 쌓이고 있다. 신호 대기를 하던 차들이 앞을 향해 달려 나갈 때마다 낙엽들이 바퀴를 따라 쪼르르 달려간다. 나도 데려가라는 듯 말이다. 오늘처럼 바람이 불고 으스스 추워지는 날이면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는 낭만도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는 '올 가을에는 새로운 휴머노이드나 하나 장만해야겠는걸' 하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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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11-09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에서 상상으로 그려지던 세상이 영화 이후 30 여년 만에 현실화가 되어 가네요. 유토피아일까요 디스토피아일까요.

꼼쥐 2025-11-10 17:16   좋아요 0 | URL
디스토피아가 아닐까 싶어요. 사랑이라는 감정이 구시대적 유물로 남는다면 삶은 어디에서 가치를 찾아야 할지요.

하루살이 2025-11-11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히려 휴머노이드와의 저렴한 사랑을 생각해보았네요... 인간과의 사랑이 오히려 고비용일 거라고 상상했거든요... 재미있는 생각해보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꼼쥐 2025-11-15 12:01   좋아요 0 | URL
저의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인간은 사랑에 이르기 위한 감정소모마저 불필요하게 여기는 것 같아요. 사실 그 모든 게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소소한 재미인데 말이죠. 단순히 편안함과 간단한 것만 좋아하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삭막할까요.
 

공동체에 충격을 주는 어떤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the wisdom of crowds)'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미국의 곤충학자인 윌리엄 모턴 휠러(William Morton Wheeler)가 1910년에 출간한 그의 저서 <개미 : 그들의 구조·발달·행동(Ants : Their Structure, Develpement, and Behavior)>에서 처음 제시하였다는 이 개념은 '다수의 개체들의 협력 또는 협업을 통하여 얻게 된 집단적 능력'이라는 뜻이며, 집단지능, 협업지성, 공생적 지능이라고도 말하여집니다. 물론 이것이 요즘처럼 사회학적 용어로 쓰이게 된 것은 그로부터 70여 년이나 지난 1983년 피터 러셀에 의한 정의였고, 사이버 공간에서의 집단지성 개념을 정리한 것은 그보다 늦게 사회학자인 피에르 레비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집단지성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어서 때로는 '집단적 광기'나 '집단오류'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뜬금없이 왜 갑자기 '집단지성'?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실 분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나는 최근에 뉴욕에 거주하는 여동생과 전화 통화를 한 후 '집단지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차기 뉴욕시장으로 30대의 인도계 무슬림인 맘다니가 당선되었기 때문입니다. 선거가 있기 전부터 조란 맘다니에 대한 소식은 동생으로부터 종종 들었던 나였지만 '설마 되겠어?' 하는 회의감이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민주적 사회주의자'임을 공공연하게 밝혔을 뿐만 아니라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체포영장이 발부된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뉴욕을 방문할 경우 뉴욕 경찰에게 체포를 지시하겠다는 공약도 내세운 상태였습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지켜질지 아닐지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기독교가 주류인 미국 사회에서 네타냐후가 아무리 나쁜 짓을 많이 했다고 하더라도 정의를 지향하는 맘다니를 과연 몇 퍼센트나 지지할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뉴욕 시민은 나의 예상을 깨고 차기 시장으로 보란 듯이 맘다니를 선택했습니다.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깨고 이와 같은 결과가 나온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동생은 가장 큰 이유로 뉴욕의 고물가와 생활고를 들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트럼프의 독재와 일부 마가(MAGA) 세력의 비이성적 행동, 극단적 혐오와 차별이 뉴욕 시민을 움직인 결과라고 분석했습니다. 어쩌면 경제 붕괴와 민주주의의 파괴라는 위험이 맘다니의 당선을 부채질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평화보다는 위기의 시기에 '집단지성'은 더 쉽게 발휘됩니다. 평화의 시기에 윤석열과 같은 미치광이를 국가 지도자로 뽑았던 '집단적 광기' 또는 '집단오류'가 발생되었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지금 우리가 평화의 시기를 누리고 있다면 우리는 '집단지성'의 발현을 기대하기보다 '집단적 광기'가 다시 요동치지 않을지 걱정하고 대비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국가 조찬 기도회에서 보였던 그들만의 리그, 기독교라는 폐쇄적인 집단과 기성 정치인들의 야합, 그리고 그들의 일치된 욕심과 광란의 몸짓을 다시 보지 않으려면 우리는 항상 귀를 열고 두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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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9 1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1-09 16: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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