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그렇겠지만 인생에 단 한 번 또래보다 더 많이 안다는 게 자랑이 되는 시기를 지나치게 된다. 그저 스치듯 보았던 것도, 한참이나 나이 든 후에는 고도의 집중력으로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아주 상세히 기억하던 그 시기에 우리는 필요가 아닌 경쟁을 목적으로 지식을 쓸어 담는다. 마치 노름판에서 숨겨놓았던 자신의 패를 뒤집는 것처럼 비록 언제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조만간 있을지도 모르는 대결에서 남들이 모를 만한 비장의 지식을 선보이겠다는 야심. 그런 허황된 꿈이 그 나이대에 있음 직한 여러 유혹들을 뿌리치게 하던...

 

그러나 많이 안다는 게 또는 남들보다 많이 기억한다는 게 부담스럽거나 죄스러워지는 시기가 오고야 만다. 견딜 수 없는 죄스러움으로 인해 자신의 기억을 조금씩 덜어내는 어느 치매 환자의 서글픈 노력에서 우리는 망각의 미덕을 떠올리게 된다. 기억하는 것도, 기억을 털어내는 것도 어느 시기에는 꼭 필요한 일이구나, 깨닫는 건 꽤나 쓸쓸한 일이다. 자신의 삶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처럼 기억하는 일도, 기억을 지우는 일도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이 진행된다는 걸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은 오늘, 오늘은 노무현 전 대통령 10주기 추도식이 있는 날.

 

기억은 때로 사람의 육체마저 무겁게 하는 까닭에 삶의 무게는 기억의 무게에 비례하여 증가하지만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건, 세상에 없는 누군가와의 추억을 가슴에 품는다는 건 '그리움'으로 포장된 또 다른 업(karma). 누구나 인생에 단 한 번 기억이 자랑이던 시기를 지나쳐가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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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을 즐긴다고 할 수는 없지만 습관적으로, 또는 막연한 의무감으로 아침 운동을 하는 까닭에 무슨 일만 있으면 하루쯤 거르는 게 어떨까 하는 유혹에 시달리곤 한다. 예컨대 전날 저녁에 평소보다 늦게 잠자리에 들어서 몸이 찌뿌듯하다거나 미세먼지 수치가 조금 높다거나 해도 '에이, 오늘은 쉬는 게 낫겠다'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그러나 운동을 거른 날이면 몸은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고 누가 캐묻는 것도 아닌데 하루 종일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곤 한다. 그렇게 나는 수십 년 동안 아침 운동을 이어오고 있다. '골골 백세'를 떠올릴 만큼 겨우겨우 또는 꾸역꾸역.

 

아침 운동을 꾸준히 이어오는 까닭에 새벽 등산로에서 자주 보는 사람도 적지 않은데 주로 연세 지긋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대부분이다. 구체적인 나이는 몰라도 대략 칠십대인지 팔십대인지 정도는 알고 있는지라 며칠만 눈에 띄지 않아도 은근한 걱정을 하게 된다. 물론 집도 모르고 설사 안다고 할지라도 굳이 찾아갈 것도 아니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다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만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발생하는 것이다. 그 후로는 영영 보지 못하는 사람도 더러 있는 것이다. 이사를 갔을 수도 있고, 다른 등산로를 택했을 수도 있고, 등산이 아닌 다른 운동을 시작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우울한 추측 속에서 여러 날을 지내게 된다.

 

오늘도 나는 지난해 겨울부터 통 얼굴을 볼 수 없었던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할머니는 당뇨를 앓고 있는데 새벽의 찬 공기가 몸에 좋지 않다는 의사 선생님의 소견에 따라 겨울에는 10시쯤, 여름에는 6시쯤에 운동을 나오는 것으로 시간을 바꾸는 바람에 겨울이나 여름이나 늘 5시 30분에 집에서 나오는 나와는 마주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운동을 마치고 내려가는 나와 이제 막 산 능선에 도착한 할머니와의 반가운 만남은 아주 짧게 끝이 났지만 할머니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나오라며 떨떠름해하는 나의 손에 교회 주보를 쥐어주었다.

 

교회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올해 초 한기총의 대표회장에 선출된 모 목사는 어느 목회자 세미나에서 "내 성도가 됐는지 알아보려면 젊은 여집사에게 빤스(팬티)를 내려보게 하는 옛날 방법이 있다."고 운을 뗀 후 "여집사들이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빤스 벗으라면 다 벗는다. 목사가 벗으라고 해도 안 벗으면 내 성도가 아니다. 한 번 자고 싶다고 해보고 그대로 하면 내 성도요, 거절하면 똥이다."라는 성희롱성 발언을 서슴없이 한 적이 있다. 목사, 언론인, 고위 공직자 등 법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 온갖 특혜를 누려온 사람들은 결국 우리 사회의 괴물로 성장하게 마련이다. 김학의가, 정준영이, 모 신문사의 사주가 그런 괴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우리 사회가, 그들의 선민의식이 적당한 환경을 마련해 주었던 건 아닌지.

 

나는 천주교에 적을 두고는 있지만 착실한 신앙인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아침에 만난 할머니의 권유에 따라 냉큼 개종을 할 정도로 허약한 신앙인도 아니다. 할머니가 쥐어 준 교회 주보를 보며 나는 문득 우리 사회가 길러낸 거대한 괴물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오늘도 몸피를 키우며 성장하고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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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오늘의 하늘은 어찌나 푸르던지요. 오늘은 1년 24절기 중 여덟째 절기인 소만(小滿)이자 부부의 날. 햇볕이 풍부하고 만물이 점차 자라 가득 찬다고 해서 '만(滿)'을 썼다지요. 이맘때면 가을보리를 베고, 모내기를 하고, 밭에 나가 김을 매던 어렸을 적 기억이 떠오릅니다. 여름으로 가는 햇살은 따가웠고, 봉숭아의 잎과 꽃잎을 찧어 백반과 소금을 섞어 손톱에 얹고 호박잎이나 피마자잎을 덮어 노끈으로 챙챙 동여주던 누나의 다정했던 손길이 무척이나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점심을 먹고 근처 공원을 잠깐 걸었습니다. 더위를 식힐 정도의 적당한 바람이 불었고, 그늘 밑 벤치에는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시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도 눈에 띕니다. 인적이 드문 구석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김훈의 <연필로 쓰기>를 마저 읽었습니다. 심술궂은 바람이 제멋대로 책장을 넘기고, 까무룩 들던 낮잠을 저만치 쫓아냅니다.

 

가지런한 봄이 작아지고(小), 바지런한 여름으로 채워지는(滿), 오늘은 소만(小滿). 쾌청한 하늘이 좋아서, 바람이 적당해서, 자꾸만 밖으로 시선이 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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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담장에는 넝쿨장미가 한창입니다. 오늘은 5·18 민주화 운동 39주년이 되는 날. 끄물끄물한 하늘에선 간간이 비가 내렸고, 장미의 붉은빛만 온종일 선명했습니다. 8,90년대를 지나쳐온 누구나가 그렇겠지만 매년 이맘때의 심정은 말할 수 없는 미안함과 부끄러움, 삶에 대한 부질없음이 교차하곤 합니다. 그리고 나는 한나 아렌트를 생각하게 됩니다. 악랄하기 그지없었던 전두환과 그의 일당들, 그리고 직접적인 학살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일을 묵묵히 수행함으로써 그들의 만행에 동조했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생각할 때 그 시대를 살았던 한 사람으로서 나는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악의 평범성'을 주장했던 한나 아렌트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태인 학살에 가담했던 히틀러와 그의 잔당들을 증오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똑같은 방식으로 팔레스타인 국민들을 학살하는 이스라엘 정치인들을 증오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지금의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했던 많은 영령들의 피의 대가였다는 사실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듯합니다. 그러한 까닭에 우리는 감사와 부끄러움을 담아 5·18 영령들께 조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엄혹했던 전두환 군사정권하에서 80년 광주의 사정은 알려지지 않았고, 세월이 한참이나 흐른 뒤에야 겨우 사람들의 입과 입으로, 흐릿한 영상을 통해 조금씩 알려졌을 뿐이지요. 우리는 그렇게 무지했던 시절을 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18 민주화 운동 기념식장에 참석했던 자유당의 대표는 8,90년대를 관통했던 군사정부 시절에 공안검사를 함으로써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고, 독재를 옹호했던, 어찌 보면 독재의 수혜자이자 '악의 평범성'의 전형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의 손에 직접적으로 피를 묻히지 않았다고 해서 죄에서 한 발 비껴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인간은 누구나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실수였든 고의였든 차후에 반성하고 참회함으로써 인간 된 자격을 다시 회복하는 게 아닐까요?  아파트 담장에는 넝쿨장미가 선명했던 오늘, 간간이 비가 내렸고 나는 문득 부끄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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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서 방역 활동을 열심히 한 덕분인지 아니면 최근 지속된 가뭄으로 물웅덩이가 사라진 탓인지 그 원인은 차치하고서라도 예년에 비해 모기 개체수가 현저히 줄어든 듯한 느낌이 든다. 물론 내가 사는 지역만 그럴 뿐 다른 지역은 지나치게 많은 모기 개체수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아무튼 아침 산행에서 모기떼의 집중 공격을 받지 않는 것만으로도 나는 감사한 마음을 금하지 못하겠다. 오늘처럼 바람도 없고 날씨마저 후덥지근한 날 모기떼와 함께 산행을 한다는 건 그닥 유쾌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모기의 공격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자구책으로 한여름에도 긴소매 옷을 고집하는 나로서는 모기의 개체수가 많아진다는 건 그야말로 청천벽력의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면서 지병에 가까운 모기 공포증의 증세가 심해지고 있다.

 

그에 반해 정치인들에 대한 해묵은 혐오증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자유당의 당 대표가 부하들을 이끌고 장외로 나가는 바람에 뉴스 화면에서 그들의 모습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물론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고 욕에 가까운 험한 말들은 이따금 들려오지만 같은 나라에서 살면서 그 정도쯤이야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어차피 국회에서 의정활동을 하더라도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고 자신들의 존재감을 내세우기 위해 싸움질이나 했을 터, 차라리 안 보이는 곳에서 조용히 지내는 게 국민들의 정신건강에 유익하지 싶은 것이다. 어찌 보면 자유당의 황 대표는 국민들의 정치 혐오증을 예방하기 위한 적극적인 방역 활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인지...

 

오늘도 바깥 기온은 초여름 날씨처럼 덥다. 그나마 모기도 없고, 정치인들도 보이지 않으니 괜한 짜증은 나지 않는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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