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차다. 겨울인데 이 정도 추위도 없다면 그게 어디 겨울인가? 하고 반문할 이도 있겠지만 추위는 아무튼 사람들을 의기소침하게 한다. 집 근처의 도서관에 들러 책 한 권을 빌려 돌아오는 길, 나들이 삼아 도서관을 찾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듯한 아가의 손을 잡고 도서관 나들이에 나선 젊은 부부에서부터 서로에게 의지하여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는 팔순의 노부부에 이르기까지 그 행색이나 구성은 제각각이었지만, 주말을 맞아 책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자 하는 마음은 비슷한 듯 보였다. 여린 겨울 햇살이 그들의 어깨 위로 가볍게 흩어지고 있었다.
오늘은 내란 수괴 윤석열에 대한 탄핵 투표가 있는 날이다. 그러나 비상계엄이 있었던 날로부터 10여 일이 훌쩍 지났지만 그 실체와 과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그러한 의문 중에서 사람들이 무엇보다 궁금해하는 것은 비상계엄의 동기가 아닐까 싶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반란이나 소요 등 혼란 상황이 지속되었던 것도 아닌데, 대통령은 무슨 근거로 비상계엄을 발동하였고, 도대체 그 목적은 무엇이었는지 이렇게 저렇게 추측에 추측을 거듭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게 중론이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제 무덤을 제가 파는 게 가당키나 한가 싶은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이성적인 절제가 잘 되지 않아서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먹고 싶으면 먹고 싸고 싶으면 싸고 자고 싶으면 자야 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본능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어서 그들에게 본능을 억제하도록 종용하는 어떤 순간이 찾아오면 솟구쳐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대통령으로서 마음껏 먹고, 마음껏 자고, 마음껏 여행하고 싶은 기대와 욕망이 있었는데 이것이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반국가세력에 의해) 좌절되자 이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없었을 뿐이다. 그것이 곧 비상계엄의 선포였다. 이에 대한 국민의힘 의원들의 옹호도 이해가 되는 측면이 있다. 그들 역시 본능에 충실한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본능에 충실한 인간들로 하여금 고차원적인 가치를 따르라고, 좀 더 이성적인 행동을 하라고 윽박지르며 요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의 화를 돋우고 엇나가는 행동(이를테면 반사회적 행동)을 유발하게 할 뿐이다.
오늘 내가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은 조지 오웰의 산문집 <책 대 담배>이다. 조지 오웰의 글은 언제 읽어도 감탄을 자아내게 하지만 요즘과 같은 어수선한 시국에 읽으면 이해가 훨씬 빠르다.
"정치에서는 두 악 중에서 그나마 덜 악한 것을 결정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없고, 미치광이처럼 행동해야만 간신히 벗어날 수 있는 상황들이 있다. 가령 전쟁이 필요할 수 있지만 전쟁은 분명 옳거나 온전한 것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심지어 총선이라고 해서 딱히 유쾌하고 즐거운 행위나 교훈적인 광경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런 일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면 - 노령, 우둔함 혹은 위선이라는 갑옷을 입지 않는 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 자신의 일부분만은 침해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삶은 이미 분리됐기 때문에 그 문제가 동일한 형식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실제로 대다수 사람들은 여가 시간에만 진정으로 살아 있고 그들의 노동과 정치 행위는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더구나 대다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정치적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노동자로 비하하도록 요구받는 경우가 없다. 예술가는 특히 작가는 그런 요구를 받는다. - 사실 그것은 정치인들이 작가에게 요구하는 유일한 것이다." ('책 대 담배' 중에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책이 유해 도서로 채택되는 까닭도 그런 맥락이다. 본능에 충실한 작자들에게 이성적인 절제나 영혼의 가치를 추구하는 일은 너무나 무의미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강요하는 세력은 곧 반국가세력인 동시에 자유민주주의 체제 전복 세력인 것이다. 윤석열은 자신의 본능을 절제하도록 요구하는 야당과 국민에게 분노했을 뿐이다. 그것이 비상계엄의 동기인 셈이다. 더도 덜도 아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