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비가 조금 내렸는지 도로는 젖어 있었다. 도시인의 피로를 닮은 어둠이 새벽녘까지 길게 이어지는 등산로를 따라 여느 날처럼 걸음을 옮겼다. 산등성에 오르자 주택가 어둠으로부터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다. 엊그제 내린 눈이 녹지 않은 채 얼어붙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가사각 경쾌한 소리를 냈다. 낙엽이 쌓인 곳을 밟을 때는 저벅저벅 둔탁한 소리가 나는 것에 비해 얼룩덜룩 잔설이 쌓인 등산로를 지날 때면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곧추선 서릿발을 밟는 듯한 쾌감이 찌릿찌릿 전해졌다.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미끄러운 등산로 탓인지 산을 오르는 등산객은 많지 않았다. 작심삼일도 한참이나 지났으니 새해 계획으로 운동을 결심했던 이들도 이제는 적당히 쉴 때가 되긴 했다.
오늘은 윤석열을 비롯한 내란 혐의 피고인 8명에 대한 결심 공판이 있는 날이다. 지난주 금요일에 있었던 결심 공판에서 있었던 변호인들의 낯 뜨거운 '침대 변론'으로 인하여 구형도 하지 못한 채 오늘로 연기되었던 바, 내란 수괴인 윤석열이 법정에서 꾸벅꾸벅 졸거나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는 모습을 오늘 다시 보아야 한다는 게 영 마뜩지 않지만, 나라와 국민 모두를 사지로 몰았던 내란 수괴에 대한 죄과를 묻기 위해서라도 법정 최고형을 구형하는 게 옳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요즘 유튜브에 올라오는 영상을 보노라면 윤석열을 지지하거나 동조하는 사람들이 가끔 눈에 띈다. 지능이 낮은 건지 아니면 슈퍼챗을 받기 위해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것인지 그 진의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지껄이는 소리를 들어보면 논리도 없고, 근거도 없고, 단 하나 감정만 있는 듯하다. 그렇게 떠벌여서야 타인을 설득한다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이슬아 작가의 인터뷰집 <새 마음으로>를 읽고 있다. 인터뷰이의 면면을 살펴보면 응급실 청소 노동자, 농업인, 아파트 청소 노동자, 인쇄소 기장, 인쇄소 경리, 수선집 사장 등으로 우리 사회에서 꼭 필요한 사람들이지만 우리가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는 것 같지는 않은, 말하자면 그들의 노고에 비해 인색한 대우를 받는 인물들이다. 인터뷰의 성패는 인터뷰이에 대한 인터뷰어의 공감 능력에 달려 있다고 믿는 나로서는 이슬아 작가의 인터뷰가 더없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쩌면 인터뷰 대상자의 선택이 오롯이 이슬아 작가에게 주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너무나 많이 치우고 너무나 많이 헤아리는 그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이순덕이라는 개인이 해내는 촘촘한 일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순덕 님과 함께 목마공원을 한 바퀴 산책했다. 걷다가 순덕 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 팔짱을 꼈다. 27년을 일하면서 이렇게 목마공원에 와보는 건 처음이라고 하셨다. 병원 정문 코앞에 있는 곳인데도 말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다고, 항시 동동거리며 지낸 것 같다고 하셨다. "일 얘기를 이렇게 쭉 한 거는 처음이에요. 얘기를 하니까 행복하네." 순덕 님의 말을 듣고 나는 문득 삶이라는 게 몹시 길게 느껴졌다." (p.49)
짧은 겨울 해가 떨어지자 부쩍 찬 기운이 돌고 있다. 내일 아침에 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어쩌면 이번 겨울에는 단 한 차례도 꺼낸 적 없는 아이젠을 챙겨 나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쨍한 추위를 경험하고 나면 살아 있다는 느낌이 가슴 한가득 차오르곤 한다. 내란 수괴를 지지한다는 둥 컴퓨터 앞에서 헛소리를 늘어놓는 사람들에게도 새벽 산행을 권하고 싶다. 산을 내려올 즈음이면 정신이 번쩍 들지 않을까. 내가 이제껏 멍청한 짓거리로 인생을 낭비하고 있었구나, 하는 반성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