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테러와 이라크 전쟁(9.11 Terror and Invasion of Iraq 2003)

(비행기 테러를 당한 쌍둥이 빌딩)

 

20세기가 끝나고 21세기가 시작되는 2001년 전 세계에 충격을 준 사건이 미국 뉴욕에서 발생했다. 2001년 9월 11일 오전 8시 46분쯤 ‘아메리칸 항공 11기’가 뉴욕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Center) 북쪽 빌딩에 충돌했다. 그로부터 20여 분이 지난 9시 3분 유나이티드 항공 175기가 다시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Center) 남쪽 빌딩에 충돌했고, 30분 뒤에는 ‘아메리칸 항공 77기’가 수도 워싱턴 국방부 청사 펜타곤에 들이받았다. 이 국제적 테러를 감행한 세력은 극단적 이슬람주의 단체인 알카에다와 그 알카에다의 수장인 오사마 빈라덴(Osama Bin Laden)이었다. 오사마 빈라덴이 뉴욕에 감행한 테러는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 세기의 대폭발 테러로 인해 최소 3000명 이상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고, 비행기가 충돌한 세계무역기구 건물인 쌍둥이 빌딩은 무너져 버렸다.

(현재 9.11 기념관 근처에 있는 쌍둥이 빌딩 위치, 현재는 이것을 잊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곳으로 만들었다.)

 

9.11 테러는 미국에게 있어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자신들의 본토가 공격당한 사례였다. 이 테러 사건이 있고 나자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은 즉각적으로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을 선포했다. 부시 대통령과 그의 공화당 측근들은 오사마 빈라덴이 주도하는 이슬람 군사조직인 알카에다(Al-Qaeda)를 괴멸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그들은 9.11이 일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탈레반이 오사마 빈라덴을 숨겨주고 있다”라는 이유를 들어 아프가니스탄을 대상으로한 전면적인 군사적 침공에 나섰다. 그 결과 미국의 부시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지만, 단기간에 오사마 빈라덴을 체포하고 알카에다를 섬멸시키는 목표를 실패하게 되며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전쟁의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오사마 빈라덴)

이렇게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2001년 9월에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을 개시한 미국의 조지 부시는 2002년 1월 미국하고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북한, 이란, 이라크를 향해 ‘악의 축(Axis of Evil)’이라 표현했다. 미국의 부시 정부가 21세기를 시작하며 타국을 대상으로 군사적으로 위협적으로 나설 것이라는 모습을 악의 축이라는 발언을 통해 보여주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의 부시 정부는 의회에서 소위 ‘미국애국자법(Patriot Act)’ 통과시켰다. 이 애국자법은 단순한 혐의만으로도 기소 없이, 그리고 헌법에 규정된 정당한 법 절차에 따른 권리 없이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을 구금할 수 있는 권한을 미국법무부에 부여한 것이었다. 즉 이 법에 따르면 어떤 집단이든 ‘테러리스트로’ 지정할 수 있고, 그렇게 지정된 조직에 성원이나 자금을 제공한 사람을 체포하고 구금 추방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대략 1000명 이상의 아랍계 미국인들이 어떠한 기소 절차 없이 구금되는 일이 발생했었다.

(미국의 조지 부시)

미국은 9.11 테러를 거치면서 소위 자신들이 표현한 대로 테러와의 전쟁을 통해 적대국을 무너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더불어 또 다른 나라를 상대로 한 군사적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나라가 바로 후세인의 이라크였다. 부시 정부가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한 전략은 미국인들에게 잘 먹혀들어 갔다. 이라크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미국은 2003년 3월 20일 이라크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전면적인 군사적 침공을 개시했다. 당시 부시는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이라크의 민주화’, ‘대량 살상무기의 개발과 은닉’ 그리고 ‘알카에다와 같은 테러조작과의 연계’라는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침공 작전 이름도 ‘이라크 자유작전(Operation Iraqi Freedom)’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이 표면적으로 이라크을 침공하기 위해 만든 구실이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진 목적은 석유였다. 이라크는 세계에서 석유매장량이 3위였다. 즉 이런 이라크의 지정학적 조건 미국으로 하여금 이라크에서 석유 이권을 독식하겠다는 제국주의적 야욕을 자극했고, 이라크는 미제국주의의 희생자가 됐다.

(이라크 전쟁 당시 사막 상공을 비행하는 미국과 영국측 군항공기)

(바그다드 폭격)

미국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그 나라를 오사마 빈라덴의 알카에다와 연관지어 얘기했지만, 오사마 빈라덴의 조국이자 9.11 테러범 19명 중 16명의 조국인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해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반인권적이고, 억압적인 지배계급들이 미국과 협력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부시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타국 침략 명분으로 내세웠던 구실은 큰 모순을 가지고 있었고, 중동의 민주화나 중동 여성인권 보호라는 미국의 주장은 악랄한 정치적 선동에 불과했다.

(미군의 폭격으로 불타는 사담 후세인의 관저)

 

(바그다드 함락 이후 항공모함에서 연설하는 조지 부시)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12년 전 걸프전쟁에서 그랬듯이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했다. 2003년에 시작된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는 24만 1500명의 미군과 4만명의 영국군이 동원되었는데, 여기에는 2000명의 호주군과 200명의 폴란드군도 포함되었다. 3월 21일에닌 미 해병대 1사단이 이라크-쿠웨이트 국경지대를 넘어 이라크 영토에 들어갔고, 막각한 화력을 바탕으로 이라크 정규군대를 손쉽게 무너뜨리며 이라크를 장악해나갔다. 개전 3주만인 4월 9일에는 미군이 수도 바그다드를 장악하면서 후세인 정부가 붕괴되버렸다. 대량살상무기라는 핑계를 들어 이라크를 침공했던 미국은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했다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즉 미국의 주장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또한 이 과정에서 이라크의 도시와 지역들은 미군의 폭격으로 초토화되었다. 이번에도 미국은 걸프전쟁에서처럼 막강한 공군력을 전쟁에 동원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단기간에 이라크를 접수한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2003년 5월 1일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링컨에서 ‘임무 완수’라는 현수막을 걸고 마치 이라크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행동했다. 미군이 이라크에 입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후세인을 무너뜨린 기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고, 혼란이 생기며 미군을 상대로 하는 게릴라전이 이라크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미국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린 이후의 행정적인 대처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쉽게 말해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 또한 이라크에 대해 사전지식이 부족했다. 미국은 당시 체포한 후세인을 2006년에 교수대로 보내 사형시켰지만, 이라크 내에서 일어나는 게릴라전은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지속됐다.

(폐허속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는 미군)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고 난 이후의 이라크 전쟁은 미군과 이에 맞서는 게릴라들의 전투로 양상이 바뀌었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면서 표면적인 성과와는 달리 제2의 베트남 전쟁과 같은 양상이 돼버렸다. 미군의 점령하고 있던 이라크의 도시와 지역에서 미군을 상대로하는 폭탄 테러와 같은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2003년 10월 말 이라크 반군의 공세가 고조되기도 했었는데, 당시 미군은 한 달 동안 82명이 사망하고 337명이 부상당했다. 2004년 6월 28일에 미군 등 연합군의 점령이 공식 종료됐지만, 이라크 반군은 저항을 계속했고, 내란 양상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2004년에만 미군 848명이 사망하고 9034명이 부상당했다. 2009년에서 2010년 기준으로 이라크에서의 미군 전사자는 최소 4500명을 넘겼다. 즉 이 말은 4500명을 넘겼음에도 미국은 이라크 전선에서 고전하며, 사태를 안정시키지 못했다는 증거다.

(미군의 이라크 포로 학대, 이는 2004년에 촬영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치르면서 4조달러에 달하는 엄청난 전쟁 비용과 100억 달러 상당의 전후 복구 비용을 지출했다. 결국 이라크에서 의미없는 전쟁을 치르게 된 미국은 2007년 4월 미 의회에서 상정된 이라크 철군 결의안에 동조했다. 이렇게 되면서 미국을 포함한 NATO의 일원국들도 철군을 시작했고, 부시 이후 흑인 최초로 미국 대통령이된 버락 오바마는 대선 공약으로 이라크 철군을 국민들에게 주장했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2011년 9월 1일 “이라크에서 자신들의 역할이 끝났음”을 선언하며 철군을 시작했고, 2011년 12월 15일 미국은 공식으로 종전을 선언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18일 미군은 이라크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되었다.

(미군의 이라크 철수를 보여주는 시사만화)


2011년 12월 미군 철수 이후 이라크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됐다. 2013년 이라크 정부군과 이슬람의 한 종파인 수니파 세력이 충돌하며 수백명이 사망하는 등 분쟁이 본격화되고 시리아 내전에 개입해 있던 ‘이라크-레바논 이슬람국가(ISIL)’가 이라크 지역 중 일부를 차지하게 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미국 오바마 정부는 2014년 6월 미국 미국민 보호 명목으로 이라크에 다시 파병하기로 결정하고 8월 미군은 IS에 장악된 이라크 북부를 공습을 감행했다. 미군은 이라크 정부군을 돕기 시작했고, IS에게 빼앗겼던 영토 1/3을 회복함으로써, 2017년 12월 최종 승리를 선언했다. 이렇게 해서 이라크 내에서의 전쟁은 완벽히 끝이 났다. 현재(2020년 1월 기준)까지도 수천 명의 미군이 이라크에 주둔하는 중이다.

(2012년에 시작된 이라크 내전을 보여주는 만화)


2003년 미국이 침략으로 시작된 이라크 전쟁은 미국식 민주주의 전파를 위해선 물불을 가리지 않으며 아주 극단적인 모습을 보였던 네오콘들의 사상과 오만한 확신이 중동에 어떠한 피바람을 불러왔는지 또는 그 결과가 어땠는지를 보여줬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기간 동안 최소 60만 이상의 민간인이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사망했다. 2004년에는 미군이 이라크 포로를 학대했던 것이 큰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라크 출신의 포로 수감자가 분뇨로 몸이 더럽혀지거나 성적 학대를 당하는 모습과 발가벗긴 채 피를 흘리면서 미군에게 맞기도 하고, 군견에게 물리거나 위협당하는 장면이 영상으로 촬영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소위 민주주의 국가 미국이 이라크에게 보였던 모습이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당시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수백만 명이 전쟁 반대 시위에 참여했었다. 2006년에 행해진 설문 조사를 보면 대다수의 미국인이 전쟁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많은 사람이 이라크 전쟁을 부당한 전쟁으로 생각했다는 반증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990년대 미국의 군사 개입과 사회문제

(로드니 킹 사건 당시 촬영된 영상)


1990년대 미국은 세계 제1의 초강대국이 되었다. 1991년 소련의 해체로 인하여 구공산권 국가들은 대부분 몰락의 길을 걸었고, 걸프전쟁에서의 승리는 미군의 신화를 다시 만들었다. 미국은 걸프전쟁과 냉전에서 승리했다. 거기다 1980년대부터 대중화되기 시작한 컴퓨터가 1990년대에 들어서 더 대중화됨과 동시에 인터넷(Internet)이 발달하면서 미국 힘을 더 편리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 미국은 제1의 초강대국이 된 것에서 자부심을 느꼈겠지만, 보통 자유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문제가 매우 많은 나라였다. 1950, 60년대만큼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미국내의 인종갈등은 존재했다.

(LA 폭동 당시 불타는 거리)


1991년 가을 로스앤젤레스 경찰이 흑인 운전자인 로드니 킹(Rodney King)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도로에 눕혀 50차례 이상 구타를 가해 빈사 상태에 이르게 했는데, 이 구타 장면이 비디오로 촬영되어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인종 갈등이 극심해졌다. 무엇보다 1992년 4월 백인만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폭행에 가담한 4명의 경찰관 전원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자 흑인과 히스패닉은 분노했고 그들은 거리로 나와 폭력적인 시위를 전개했다. 1992년 LA 폭동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LA에 있던 한인타운 또한 큰 피해를 보기도 했는데, 이것은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같은 소수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흑인들을 멸시한 결과이기도 했다. 이 폭동은 로스엔젤레스에서 5일간 전개되었고, 51명의 사망자와 2000명의 부상자 그리고 4500건의 방화 사건과 10억 달러 달하는 재산 피해를 초래했다. 로스앤젤레스 경찰이 흑인 운전자인 로드니 킹을 체포한 것에 대해선 여러 의견이 분분하지만, 흑인들이 이렇게까지 분노한 데에는 미국 지배계급들과 백인들이 흑인들을 멸시하고 차별해왔다는 반증일 것이다.

(오클라호마 연방청사 폭파 사건)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에서 나온 네오나치)


인종갈등이 극심한 미국사회의 지도층들은 그 시기에 소위 ‘세계화(Globalization)’를 주장하며 공식적으로 다문화 사회를 추구했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규모는 작지만 미국의 극단적 인종차별주의자들의 무차별적 테러가 일어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었다. 1995년 4월 19일 아침 오클라호마시티의 연방 건물 앞에 주차되어 있던 노란색 렌터카 트럭이 폭팔하면서 9층짜리 연방 건물이 붕괴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 폭탄 테러로 어린이를 포함한 168명의 사망자와 8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미국인들은 이 테러를 중동의 극단적 이슬람 세력이 일으킨 것으로 의심했지만, 사실 이 테러는 네오나치(Neo Nazi)가 저지른 것이었다. 이 폭탄 테러를 저질렀던 맥베이를 조사해본 결과 그는 소위 아리안 인종우윌주의자(Aryan Supremacists) 조직하고 연결고리가 있었다. 이렇듯 미국은 지배계급들이 탄생시킨 인종주의의 폐해가 곳곳에서 드러났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1990년대 미국 사회는 그야말로 감옥 및 교도소 수감자가 무수히 많았었다. 올리버 스톤이 집필한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The Untold History of the United States)에 따르면 “1980년 50만 명이었던 교도소 수감자 숫자가 20년 후, 빌 클린턴의 두 차례 임기가 끝나는 시점에는 200만 명을 기록했다.”라고 한다. 이중 수감자의 45%가 흑인이고 15%가 히스패닉이었다. 1997년 8월 16일자 FLT-AP 통신의 단신 기사에 따르면 “1996년 미국에서는 역사상 가장 많은 550만 명이 감옥에 갇혔다”라고 보도했었다. 스웨덴 공산당원 마리오 소사가 쓴 책 ‘진실이 밝혀지다’에 따르면 “이는 1995년보다 20만 명이 증가한 수치로서, 미국의 범죄자 수가 성인 인구의 2.8%에 해당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 자료는 미연방 법무부의 통계에 따른 것이다”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스탈린 시기의 굴라그(Gulag)에 가장 많이 수용되었던 시기의 죄수 숫자보다 300만이나 더 많은 숫자였다. 즉 이 통계가 사실이라면 미국은 소련의 굴라그 수용소보다 훨씬 더 많은 죄수를 수용했었다는 얘기가 된다.

(소말리아 내전 당시 작전을 전개하는 미군)


냉전이 끝난 이후에도 미제국의 군사 개입과 위협 행동은 계속되었다. 전편에서 다루었던 걸프전쟁 이후에도 미국은 1993년 소말리아 내전에 개입했었다. 1993년 10월 미국의 클린턴 정부는 소말리아 내전 당시 가장 세력이 큰 군벌 모하메드 아이디드(Mohamed Aidid)를 체포하기 위해 군사작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 작전은 19명의 미군과 2000명 이상의 소말리아인이 사망하는 결과만 낳았다. 2001년 미국에서 개봉했던 어떤 영화는 미국의 이러한 군사적 도발 행위를 미화했는데, 그 영화가 바로 블랙 호크 다운(Black Hawk Down)이다. 미국의 소말리아 내전 개입은 명백한 내정간섭이었다. 소말리아 내전은 군벌들 간의 전쟁이었고, 이런 전쟁에 미국은 인권과 평화라는 수식어를 붙여 군사 개입을 감행했고 정당화했다.

(영화 블랙 호크 다운, 이 영화는 미국의 소말리아 내전 개입을 미국주의로 옹호했다.)


그 시기 미국은 동북아시아에 있는 북한을 상대로 여러 전쟁 위협 및 도발을 했었다. 사실 미국이 적잖은 군사적 위협과 협박을 가했던 나라 북한은 1985년 12월 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했었다. 물론 북한은 미국의 위협을 인식해서였는지 핵안전조치협정에는 체결하지 않았었다. 1989년 9월 프랑스의 인공위성이 북한의 영변 핵시설을 촬영하자 미국은 핵시찰을 하기 위해 국제원자력기구와 한국을 동원하여 북한에게 압박을 가했었다. 이러자 북한의 김일성은 1991년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했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부시는 9월 27일 주한미군의 전술핵무기 철수를 선언했다.

(1994년 한반도 전쟁 위기 당시 한국의 뉴스 기사)


이처럼 미국과 북한은 서로 양보하는 모습을 보이며 1992년에는 비정기사찰이 순조롭게 진행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미국은 군사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을 북한에게 요구했다. 당연히 북한은 주권침해라 여기고 이를 거부했지만, 이에 불만을 품은 미국은 1993년 2월 25일 원자력기구관리이사회를 통해 특별 사찰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게 하고 북한이 끝까지 거부할 경우 유엔 안보리에 상정하여 전쟁까지도 불사하겠다는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 이렇게 갑자기미국과 북한의 관계가 나빠진건 민주당의 클린턴 정부가 들어서면서였다. 클린턴 정부는 팀스피리트 훈련을 재개했다. 팀스피리트 훈련엔 미군과 한국군 20만이 동원되었고, 평양에 대한 핵폭격 훈련, 원산과 흥남항에 대한 대규모 상륙훈련 등이 진행되었다. 1994년 미국의 클린턴 정부는 실제로 북폭 계획과 북한을 상대로한 전쟁까지 실제로 계획했었다. 즉 북한을 군사적으로 전복시키려 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전쟁 위협은 당시 한국의 대통령이던 김영삼이 강력히 반대하면서 실행되지 않았다. 어쨌든 그 시기 미국은 실제로 북한을 군사적으로 공격하려 했던 폭력성을 보여주었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폐허가 된 거리)


1990년대 미국은 또 다른 사태에 개입했었는데, 그게 바로 보스니아 내전(Bosnian War)이다. 1980년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가 사망한 이후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소위 민족갈등이 일어났다. 유고슬라비아는 6개의 연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민족갈등으로 분열되었고, 1992년에는 보스니아 지역에서 내전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끔찍한 인종청소(Ethnic Cleansing)를 불러왔고, 3년 동안 26만 명 이상이나 되는 사람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으며, 많은 여성이 전쟁 동안 강간당했다.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 유혈이 낭자하자 미국은 NATO국의 일원으로 대략 2만 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미군의 임무 중에는 폭격 지원 임무도 있었다. 대략 비슷한 규모로 민간 기업 직원들이 그 지역에 동행했는데, 이들은 기업 부정행위를 저질렀고 세르비아 마피아로부터 동거 성노예를 구매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코소보 내전 당시 유고슬라비아를 폭격하는 장면, 이런 무차별 폭격으로 수많은 민간인이 죽었다.)


클린턴의 임기 마지막 해인 1999년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인 발칸반도에서 위기가 다시 반발했다. 1999년 3월 미군이 주도하는 나토군은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폭격을 개시했다. 당시 미군의 폭격 명분은 코소보에서 벌어지는 인종청소를 막는다는 것이었지만, 이런 미군의 무차별 폭격은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를 포함하여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민간인 사상자를 낳았다.

(9.11 테러를 보도한 잡지)


이처럼 냉전에서 승리자가 된 미국은 사회적으로도 많은 문제가 있었고, 인종주의적 갈등은 1950, 60년대 만큼은 아니더라도 극심했다. 그들은 세계화와 다문화를 외쳤음에도 미국에선 인종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구공산권 국가들이 몰락하는 모습을 보자 같은 시각으로 동북아시아에 있던 북한 또한 같은 길을 걸어 스스로 붕괴할 것이라고 잘못 예측했고, 북한을 대상으로 경제적 제제와 군사적 위협을 강행했다. 1993년에는 소말리아 내전에 간섭하여 무고한 인명피해를 초래했고,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 일어난 보스니아 내전과 코소보 내전에 개입하여 무차별 폭격을 감행함으로써 무수한 인명피해를 초래했다. 1990년대가 끝나고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미국은 21세기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그러나 21세기가 시작되기 무섭게 미국은 다시 한번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2001년 9월 11일 뉴옥에 있는 세계 무역 센터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저지른 비행기 테러는 미국에게 진주만 기습공격 이래로 큰 충격을 주었다. 미국은 21세기를 충격과 공포를 맞보며 시작하게 되었고, 그 충격과 공포를 무차별 폭력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 미제국은 9.11 보다 더한 폭력성과 잔인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행인96 2020-03-15 0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NamGiKim 2020-03-15 00:1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냉전의 승리와 걸프전쟁

(프랜시스 후쿠야먀, 그는 일본계 미국인 학자로서 미국주의를 신봉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전 세계는 큰 변화를 맞이했다. 미국과 체제 경쟁을 하던 소련은 고르바초프가 정권을 잡은 이래로 소위 페레스트로이카와 같은 자본주의의 물결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갔는데, 그것을 시작으로 1955년에 세워졌던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가입국들 또한 내부 분열되기 시작했다. 1989년에는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정권이 몰락했고, 40년 이상이나 독일을 가르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짐으로써 독일은 통일하게 되었다. 1960년대부터 소련과 수정주의 논쟁을 하던 중국도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한 이후 덩샤오핑과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개혁개방 노선을 추진하게 되었고, 미국을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한 베트남 또한 1986년에 도이모이를 추진하게 되었다. 유고슬라비아 또한 1980년 티토가 사망한 이래로 변화를 겪으며 10년 뒤 내전을 겪게 되었다.

(소련 해체 이후 파괴된 레닌 동상)


1980년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정권이 반공주의를 표방할 때, 소위 현실 사회주의라 불리던 국가들은 변화를 겪었다. 미국과 경쟁하던 소련은 1991년 결국 연방이 해체되면서 15개의 국가로 분리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그러한 변화를 거치지 않으려고 했던 현실 사회주의 국가는 대표적으로 쿠바와 북한이 있었지만, 쿠바는 지속해서 미국의 경제적 제재에 시달렸다. 북한은 1990년대가 되어 소련과 중국에서 오던 지원이 끊겼고, 1994년 김일성 사망과 더불어 대홍수와 같은 자연재해 그리고 미국의 경제 제재에 시달리면서 소위 고난의 행군이라는 대기근을 겪게 되었다.


이처럼 미국과 대척점에 있거나 정치 체제적으로 다른 노선을 추구했던 국가들이 큰 변화를 겪자 미국은 마치 자신들이 승리자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일본계 미국인 경제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먀(Francis Fukuyama)는 자신의 저서 ‘역사의 종말(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에서 “냉전 종식 이후, 세계가 미국 등 서방 자유민주 진영의 주도로 큰 전쟁이나 대립 없이 평화를 이어나가고, 자유민주주의적 체제에서 더 이상의 체제 발달 없이 사회가 유지될 것”이라는 굉장히 미국 극우파 편향적이고 오만한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이것은 소위 미국의 신보수주의라 할 수 있는 네오콘적인 관점으로 매우 미국 중심적이고, 소위 미국식 자유주의 사상의 폭력성과 오만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프랜시스 후쿠야마를 비롯한 미국 중심적 보수주의자들이 그리도 찬양하고 숭배하는 미국식 자본주의는 완벽한 체제도 아닐뿐더러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필요한 체제이기 때문이다. 현실 사회주의권에 이와 같은 변화가 있자 “세계는 유일 초강대국으로 우뚝 선 미국의 패권적 질서 아래 놓이게 될 것이고,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라고 보며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노먼 슈워츠코프 장군, 그는 걸프전쟁에서 작전을 지휘했다.)

 

(전쟁 당시 작전을 지휘하는 노먼 슈워츠코프)


냉전이 끝나가던 1990년 미국은 중동에서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그 전쟁은 바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을 상대로 한 전쟁이었다. 걸프전쟁에서 미국과 싸웠던 이라크는 한 때 미국의 강력한 동맹국이었다. 대략 100만에서 15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던 이란-이라크 전쟁(Iran-Iraq War)에서 미국은 이라크의 동맹국이었다. 당시 미국은 동맹국 이라크에게 무기를 제공했고, 이는 이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미국은 그 전쟁에서 이라크를 지원했었다. 그랬던 미국이 1990년에 와서는 이라크와 전쟁을 하게 된 것이다.

(걸프전쟁 당시 미군의 작전 지도)


 

(사담 후세인)


미국이 이라크하고 전쟁을 하게 된 데에는 1990년 8월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이 인접국가였던 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부터였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미국은 이에 반발했다. 미국은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 군대를 섬멸하기 위해 소위 32개국의 전투부대와 비전투부대로 이루어진 ‘다국적군’을 편성하여 신속한 군사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다국적군의 주력은 미국이었고, 그다음으론 사우디아라비아와 영국, 프랑스가 많은 병력을 지원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배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런 패배의식은 1990년에도 사회에 존재했다. 따라서 다국적군을 편성한 미국은 제2의 베트남 전쟁과 같은 결과를 초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지했고, 전략 전술도 그 맥락에서 지휘하게 되었다.

(사막지대를 폭격하는 미군 전투기)

 

(걸프전쟁 당시 최신식 미군 탱크)


걸프전쟁에서의 미군은 참으로 신속하게 작전을 전개했다. 1991년 1월 17일 미국의 노먼 슈워츠코프(Norman H. Schwartzkopf) 장군은 다국적군을 이끌고 이라크군을 섬멸하기 위한 ‘사막 폭풍 작전(Operation Desert Storm)’을 개시했다. 당연히 이 작전의 목적은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점령하고 있던 이라크군을 섬멸한다는 것이었고, 더나아가 다국적군은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를 공중폭격으로 초토화했다. 이라크에 있는 도로나 교량 수도, 댐 , 전기공급 시설 그리고 유전지대 등과 같은 공공시설이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됐고, 심지어 민간인 거주 지역과 병원 학교까지도 초토화됐다. 이러한 미군의 폭격으로 최소 수천 명의 이라크 시민들이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고, 이 사막 폭풍 작전은 1991년 2월 28까지 대략 6주 동안 전개되었다. 작전은 약 1000여 시간의 제1단계 공중폭격과 100시간의 제2단계 지상전으로 펼쳐졌다.

(미군의 스텔스 전투기)

1991년 2월 28일까지 작전을 끝마친 미국은 신속한 승리감에 도취했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을 이어 미국의 대통령이 된 조지 부시 대통령(이 부시는 아버지 부시다.)과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사막 폭풍 작전에서 미군이 거둔 승리를 찬양했다. 그들은 “베트남 전쟁에서 겪었던 비참한 실패라는 유령이 마침내 안식에 들어 사라졌다”라고 주장했다. 미국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초강대국인 자신들이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었다.


사실 걸프전쟁에서 미국이 이라크군을 대상으로 신속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이 군사기술 분야에 막대한 재정을 투입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군은 세계에서 내로라 할만큼 강력한 군대였다. 대략 수십만 이상의 군대와 수천 대의 탱크를 보유하고 있던 이라크 육군은 미군이 사막 폭풍 작전을 전개했을 때 100시간 만에 괴멸당했었다. 이 전쟁에서 이라크군은 대략 5만 명 이상이 전사했고, 3300대의 탱크와 2100대의 장갑차 그리고 110대 이상의 항공기가 파괴되었다. 그에 반해 다국적군은 292명이 전사했고, 31대의 탱크만 잃었으며, 미군은 148명만 전사했다. 쉽게 말해 6주간의 전쟁에서 미군은 이라크군을 사실상 학살하는 정도로 궤멸시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라크의 경제봉쇄와 대량 아사를 옹호하는 매들린 울브라이트)

 

이런 미군의 전과는 제2의 베트남 전쟁을 예상했던 몇몇 군사 전문가들의 예측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전에서 최신식 무기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구식 군대를 처참하게 파괴할 수 있는지를 아주 잘 보여준 사례였다. 특히나 최신식 스텔스 전투기와 같은 최강의 공군력을 동원한 미군의 전술이 걸프전쟁에서 이라크의 강력한 육군을 궤멸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1등 공신이었다. 미국에게 있어 걸프전쟁은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배를 극복하게 된 사건이었지만, 이라크 국민들에겐 참혹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미국 CNN 방송에서 인용한 이라크의 인명피해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공식집계를 보면 1991년 6월 사망 10만 명, 부상 30만 명 실종 탈영 15만 명, 포로 6만 명이라고 보도했는데, 전쟁 이후 미국이 이라크를 대상으로 경제제제를 가하며 질병과 기아로 죽은 이라크인은 최소 100만 명 이상을 넘었었다. 그렇게 죽은 100만 명 중 50만 명 이상이 다섯 살 미만의 어린이와 유아였다. 미국은 냉전의 승리와 걸프전쟁의 승리를 거두며 이라크에서 이렇게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지만,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 1996년 5월 12일 CBS 뉴스프로그램의 기자 레슬리 스탈이 민주당 대통령 빌 클린턴의 국무장관인 매들린 올브라이트(Madeleine Korbel Albright)와 인터뷰 했을 때 울브라이트는 “이라크에서 50만 명이 넘는 아이들이 죽었고, 이는 히로시마에서 죽은 사람들 보다 더 많은 수치이며 그럴 가치가 있느냐?”는 질문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라고 대답했다. 따라서 미국은 냉전에서 승리한 뒤, 이전보다 더 오만해졌고 그런 오만함과 폭력성은 걸프전쟁과 이라크의 경제제제에서 아주 명백히 드러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이아드랑 계곡 위치)


1964년 통킹만 사건 이후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참전하게 된 미국은 1965년 3월 3500명의 미해병대를 다낭에 상륙시킨 것을 시작으로 남베트남에 주둔하는 미군 숫자를 증가시켰다. 당시 베트콩과 전투를 치르고 있던 남베트남군(ARVN)은 전투에서 베트콩에게 참패를 당하기 일쑤였다. 1963년 1월 압박 전투에서 적은 규모의 베트콩에게 대패했던 남베트남군은 1965년 빈지아 전투(Battle of Binh Gia)와 ‘동 쏘 아이 전투(Battle of Dong Xoai)’ 등에서도 패배했고, 1965년 5월 말 소규모의 베트콩 부대가 꽝응아이 근처에 있던 남베트남군 여단을 매복 공격하여 남베트남군 2개 대대를 궤멸시키기까지 했다.

(이아드랑 전투 당시 투입된 헬기 부대)


군대로써 허접한 모습을 보이던 남베트남군을 대신하여 미군 정규부대가 베트콩과 호치민 루트를 통해 증파된 북베트남군을 상대하기 시작했고, 남베트남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미군이 주로 주도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미군과 북베트남 정규군(NVA), 베트콩이 대략 4일에 걸쳐 치르게 된 전투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베트남 중부 고원지대에 있는 계곡 근처에서 벌어졌던 이아드랑 전투(Battle of Ia Drang)다. 사실 이 지역은 미군이 들어가기 11년 전인 1954년 6월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된 프랑스군이 마지막으로 베트민에게 대패했던 장소였다. 안케 전투(Battle of An Khê)에서 프랑스군은 베트민에게 최소 5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패배했었고, 이것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마지막으로 치러진 전투였다.

(진격하는 북베트남군)


1965년 9월 미국은 16000명이나 되는 규모를 자랑하는 제1 기병사단과 1600대의 차량 그리고 435대의 헬기를 중부 고원지대 끝부분에 있는 안케기지에 배치해 놓았다. 그 부대는 미군의 최정예 부대로써 1876년 윌리엄 커스터 장군 휘하에서 원주민을 학살했고,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는 노근리 지역에서 300명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했던 부대였다. 즉 이런 부대가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을 섬멸하기 위해 베트남 중부고원지대에 최신식 헬기까지 지원하며 투입된 것이었다. 이렇게 미군 최정예 부대가 중부고원지대에 배치되자 북베트남군 수천 명이 호치민 루트(Ho Chi Minh Trail)를 따라 현지의 베트콩 부대와 합류했다. 그들은 추퐁산(Chu Pong Mountain)에다 기지를 구축했고, 미군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M-16 소총을 들고 있는 미군)


1965년 10월 19일 북베트남측 특공대가 12명의 미군 그린베레 대원과 남베트남 병사 14명 그리고 현지 산악부족(Montagnard) 400명이 지키고 있던 플레이미(Plei Mi) 기지를 2일간 공격하여 9명의 그린베레 대원을 전투에서 사살했다. 당시 미군은 ‘은빛 작전(Operation Silver Bayonet)’하여 작전을 3단계로 나누어 진행했는데, 10월 중후반에 북베트남측 특공대의 공격이 있자, 구조작전인 1단계 작전을 진행했고, 10월 말에 1단계 작전이 끝나자 2단계 작전으로 나갔다. 2단계 작전은 헬기의 공중지원을 받는 미군 제1 기병사단이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을 추격하여 섬멸하는 작전이었다.

(지역을 수색하는 미군 병사)


1965년 11월 14일 미군은 캄보디아 국경지대 근처에 있는 이아드랑 계곡에 대규모 헬기를 동원하여 제1 기병사단 공중 강습 부대를 착륙시켰다. 한국전쟁 참전용사이자 당시 공중 강습 부대 지휘관이던 할 무어 중령은 산기슭 어긴가에 거대한 북베트남군 기지가 있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실제로 응우옌 후 안이 이끄는 부대는 미군이 착륙한 LZ X-Ray 근처 지하에 있었다. 상륙한 할 무어의 군대는 북베트남측의 탈영병 한 명을 포로로 붙잡았다. 탈영병 한 명은 “현재 산에 3개 대대로 이루어진 1600명의 병사가 있다.”고 말했다. 사실은 그보다 더 많은 북베트남군 병사 3000명이 그 근처에 있었지만 말이다.

(포위 당한 미군 지도)


그날 오후 미군 강습 부대가 거의 다 착륙하자 전투가 시작되었다. 3000명 이상의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1954년 프랑스군을 포위하여 섬멸했던 안케 전투에서처럼 미군을 포위했고, 포위 당안 할 무어의 부대는 북베트남군의 포위에 당황했다. 그 다음날인 15일에는 북베트남군과 미군이 정면에서 맞붙었다. 이 전투에선 미군과 북베트남군이 마주 볼 수 있을 정도였고, 북베트남군은 미군을 섬멸하기 위해 끊임없이 공격했다. 전투 과정에서 미군은 전투 헬기의 화력 지원과 포병의 지원을 쏟아부었다. 또한 미군 사령부에 연락하여 항공모함에서 전투기 공습까지 지원받았다.

(이아드랑 전투 둘째날을 묘사한 그림)


이 전투에서 18000발의 포격이 있었고, 무장한 UH-1 헬기는 3000발 이상의 로켓탄을 쏘았으며, 심지어 B-52 폭격기까지 이 전투에 동원되었다. 미군 측의 이런 화력 지원으로 인하여 엄청나게 많은 사상자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측에서 나왔다. 하지만 이런 화력 지원으로 인하여 미군 또한 아군 네이팜 폭탄에 희생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11월 17일 북베트남군은 할 무어 중령 휘하의 미군이 지키고 있던 곳을 4번 더 공격했고, 할 무어 중령의 부대는 포병대의 지원과 막강한 헬기의 기관총 사격으로 막아냈다. 이 과정에서 미군은 북베트남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어 냈다.

(이아드랑 전투 당시 미군을 지휘했던 할 무어 중령)


1965년 11월 18일 이아드랑 전투는 끝이 났다. 이 전투에서 북베트남군 1700명 이상이 사망했던 데에 비해 미군은 308명이 전사했다. 거의 전사자 비율이 6 대 1 수준이었다. 그러나 북베트남군은 11월 18일 날 다른 대대를 매복시켜 LZ Albany 지역에 있던 미군을 섬멸했다. 공격한 북베트남군이 미군에게 너무 근접해있었기에 포병지원을 부를 수 없었고, 결국 미군은 155명이 사망하며 올버니 지역에서 북베트남군에게 패배했다. 비록 올버니 지역에서는 미군이 패배했지만, 6대1 전사자 비율로 보았을 때는 미군의 승리였기에 미국 정부는 이아드랑 전투에서 자신들이 승리했다 주장했다. 물론 비율만 가지고 보았을 때, 이아드랑 전투는 미군의 승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아드랑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지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하지는 못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이아드랑 전투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지금으로부터 101년 전 조선 반도 전역에서 민중들과 민족대표들이 뜻을 모아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저항했다. 그 저항운동에는 수많은 식민지 조선의 민중들이 참가했고, 그 민중들이 참가한 시위는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났었다. 그것이 바로 3.1 운동이다.

 

1. 식민지 조선의 시대적 상황

  

  

19세기 중후반 서구식 근대화를 거친 일본은 조선 반도를 지배하고자 했었다. 1894년에 일어났었던 동학 농민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던 일본은 1895년에는 조선의 민비인 명성황후를 암살했고, 그 외에도 타이완과 요동 반도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었다. 결국 조선 반도를 놓고 러시아 제국과 이권 다툼을 벌이던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를 이기고, 조선의 고종황제에게 을사조약을 체결토록 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이에 반발하여 몇몇 조선 사람들은 의병활동을 전개하여 일본에 맞서 싸웠지만, 현대식 무기와 군사기술로 무장한 일본군에 의해 진압당했다.

 

그 외에도 애국계몽운동이나 독립협회운동 그리고 신민회 조직과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같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결국 1910829일 조선은 을사늑약에 따라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조선을 식민지배하게 된 일본이 펼쳤던 정책은 소위 무단통치였다. 무단통치란 지배자 일본이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강점정책을 실행하던 통치였다. 그들은 조선총독부를 만들어 조선의 행정권, 입법권 그리고 군대사용권 등을 모두 가지고 있었고, 일본 헌병이 경찰력을 대신했다.

 

또한 일본은 토지조사사업이라 하여 명목상 근대적 자본주의적 소유권을 확립한다는 명목으로 실행했지만, 대한제국 시대부터 이루어진 일본인의 조선토지 소유를 합법화하고, 일본인을 대거 조선에 이민시켜 확보한 토지를 그들에게 불하함으로써 일본인 지주를 양산하고 식민지 지주경영제를 강화하여 한반도를 일본의 식량공급지로 만들고자했다. 당연히 이런 일본의 무단통치에 조선인들은 반발과 불만이 많았고, 이런 토대는 조선인들이 일본에게 저항하거나 잘 따르지 않으려 하는 계기가 되었다.

 

2. 3.1 운동의 전개

  

  

이런 과정에서 1914년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연합국 편에서 참전했고,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일본은 승전국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1918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이후 서구 열강들은 패전국의 식민지 문제를 놓고 논의를 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전후질서의 14개조 원칙을 제안했다. 그 안에는 소위 민족자결주의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식민지 지배를 받는 약소민족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당시 중국 상해에 있던 여운형은 미국 대통령 특사인 찰스 크레인을 만나 미국이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고, 이에따라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19191월 중국 텐진에 있던 우사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프랑스에 보냈다. 여운형과 더불어 신한청년당 단원이었던 장덕수는 일본 도쿄로 건너가 유학생들과 접촉하여 28일 이광수를 포함한 200명의 학생들과 함께 2.8독립선언식을 가졌다. 그리고 신한청년당의 회원인 선우혁은 조선에 들어와 선천, 평양 등지에서 기독교계의 이승훈 양전백 등과 접촉하여 독립운동을 촉구했다. 또 여운형은 직접 러시아령 니콜리스크에 가서 전러시아조신인대회에 참석하고, 이어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에 갈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해외의 독립운동가들이 움직이고 있는 동안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졌다. 동학의 후예라 할 수 있는 천도교의 지도자 손병희와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은 1918년 말부터 여러 차례 모임을 갖고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따른 독립운동 혹은 자치운동을 논의했다. 19191월 중순경 그들은 만세시위 형태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를 봤다. 기독교계도 독자전인 운동을 준비했었다. 27일 천도교 측이 평양에 사람을 보내 이승훈을 서울로 불러 독립운동을 협의했고, 225일 천도교와 기독교계는 마침내 연합에 합의하고 학생들에게도 함께 운동을 전개하자고 요청하며 불교계도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운동 지도부는 독립선언에 서명할 33인을 선정하고, 최남선에게 독립선언문의 작성을 맡겼다.

 

19193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29명이 참석하여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들이 따로 독립선언식을 열었고, 선언식을 마친 뒤 민족대표 29명이 일본 경찰에 연행되자 학생들은 서울 시가지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같은 시각 서울 외에도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 주요도시에서 동시에 독립선언과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서울의 학생들은 예정대로 35일 서울역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렇게 시작된 3.1운동은 3월 중순이 되어 청년, 학생, 교사나 지식인만이 참가하는 시위가 아닌 도시노동자 및 상인층이 참가하고 그들에 의해 전국 소도시로 확산되었다. 그 시기에는 중남부 지방, 면 단위 이하의 농촌 지역 심지어 산간벽촌에 이르기까지 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운동의 양상도 달라져 계급, 계층 간, 종교단체 간 연대가 활발히 이루어졌고, 시위 자체의 조직화 지속화 현상이 두드러졌다. 3월 하순부터 4월 상순까지의 시위는 다수의 민중이 시위에 적극 참여하면서 시위도 다소 과격화되기도 했다. 물론 그 과격화나 폭력성이란 말은 일본 경찰의 가혹한 탄압에 대한 정당방위의 성격을 지닌 경우가 대다수였지. 처음부터 공세적인 시위가 많았던 것은 아니었다.

 

322일 서울에서 노동자와 청년 학생들이 준비한 노동자대회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참여해 시위를 전개했다. 이 시위는 이후 서울 시가지 시위의 기폭제가 되어 23일 이후 매일 밤 시내 도처에서 게릴라식 시위가 벌어졌다. 26, 27일에는 전차 종업원, 경성철도 노동자, 만철 경성관리국 노동자들도 파업에 돌입했다.

 

 

이렇게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일제는 이 시위를강력하게 진압했다. 31일 조선 총독 하세가와는 추호의 가차도 없이 엄중 처단한다는 협박문을 발표하고 발포 명령을 내렸다.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2개 사단 23000명이 있었는데, 이걸로는 시위 진압에 부족하다 느낀 일제는 3.1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4월 들어 일본 본토에서 헌병과 보병부대를 증파시켰다. 3월 중순 이후 시간이 흐를수록 시위 도중 군경의 발포로 인한 사망자가 크게 늘어났고, 이를 진압하는 일본 측의 잔인함도 극심해졌다. 일례로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유관순과 그 동료들은 서대문형무소에서 극심한 고문을 받았었다. 1919415일 수원 제암리에서는 30명의 주민이 일제의 보복으로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3.1운동에서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나왔는지는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일제 측 자료에 따르면 19193월 이후 1년간 피살자를 350명 혹은 630, 부상자는 800명 혹은 1900명으로 기록하고 있고, 투옥된 이들은 8000~900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결국 191931일에 시작된 전국적인 만세 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끝이 났다.

 

3. 3.1운동의 역사적 의의  

  

3.1운동은 해방 이후 남북 할거없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남한의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도 소위 애국심을 부추기는 차원에서 3.1운동을 국가적으로 띄었다. 그중 가장 많이 띄운 인물을 뽑자면 아마 유관순을 들 수 있다. 물론 유관순이 3.1운동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는 사실은 당연히 인정하고 업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3.1운동 그 차제를 유관순이라는 인물 하나만 가지고 얘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3.1 운동은 소수의 지식인 계층만이 참가한 운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에서도 상술했듯이 3.1 운동에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경제적으로 수탈받고 억압받던 노동자 농민 계층도 같이 참여했고, 계층의 구분 없이 조선의 독립 쟁취라는 깃발아래 식민지 조선 전역에서 전개되었던 민중 투쟁이었다. 3.1운동으로 투옥된 이들은 8511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것은 농민이었고, 농민은 그 전체의 58.4%였다. 또한 서울에 있던 노동자들이 학생들과 더불어 노동자 대회를 가지고 자발적으로 파업에 돌입했던 사실에서 우리는 3.1운동은 민중들의 투쟁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따라서 3.1운동은 비록 달성하고자 했던 목표에는 실패했더라도 이런 노동자 농민들이 학생, 지식인들과 연대하여 반일 투쟁에 나섰다는 점에서 3.1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3.1 운동은 한국 독립운동사에 가장 큰 의미를 지닌 사건이다. 왜냐하면 거의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연합하여 일본에 맞서 독립을 외친 일은 이것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분, 계급, 지역, 종교를 넘어 하나로 뭉치게 한 사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3.1 운동은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다 할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중국이 그러했다. 3.1운동에 감명받은 중국의 대학생들은 1919545.4 운동을 전개했다. 더 나아가 3.1운동의 소식은 인도, 베트남, 필리핀 등 아시아 각국의 민족운동에도 자극울 주었다. 이처럼 3.1운동이 우리에게 가지는 의미가 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