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의 승리와 걸프전쟁

(프랜시스 후쿠야먀, 그는 일본계 미국인 학자로서 미국주의를 신봉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전 세계는 큰 변화를 맞이했다. 미국과 체제 경쟁을 하던 소련은 고르바초프가 정권을 잡은 이래로 소위 페레스트로이카와 같은 자본주의의 물결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갔는데, 그것을 시작으로 1955년에 세워졌던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가입국들 또한 내부 분열되기 시작했다. 1989년에는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정권이 몰락했고, 40년 이상이나 독일을 가르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짐으로써 독일은 통일하게 되었다. 1960년대부터 소련과 수정주의 논쟁을 하던 중국도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한 이후 덩샤오핑과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개혁개방 노선을 추진하게 되었고, 미국을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한 베트남 또한 1986년에 도이모이를 추진하게 되었다. 유고슬라비아 또한 1980년 티토가 사망한 이래로 변화를 겪으며 10년 뒤 내전을 겪게 되었다.

(소련 해체 이후 파괴된 레닌 동상)


1980년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정권이 반공주의를 표방할 때, 소위 현실 사회주의라 불리던 국가들은 변화를 겪었다. 미국과 경쟁하던 소련은 1991년 결국 연방이 해체되면서 15개의 국가로 분리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그러한 변화를 거치지 않으려고 했던 현실 사회주의 국가는 대표적으로 쿠바와 북한이 있었지만, 쿠바는 지속해서 미국의 경제적 제재에 시달렸다. 북한은 1990년대가 되어 소련과 중국에서 오던 지원이 끊겼고, 1994년 김일성 사망과 더불어 대홍수와 같은 자연재해 그리고 미국의 경제 제재에 시달리면서 소위 고난의 행군이라는 대기근을 겪게 되었다.


이처럼 미국과 대척점에 있거나 정치 체제적으로 다른 노선을 추구했던 국가들이 큰 변화를 겪자 미국은 마치 자신들이 승리자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일본계 미국인 경제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먀(Francis Fukuyama)는 자신의 저서 ‘역사의 종말(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에서 “냉전 종식 이후, 세계가 미국 등 서방 자유민주 진영의 주도로 큰 전쟁이나 대립 없이 평화를 이어나가고, 자유민주주의적 체제에서 더 이상의 체제 발달 없이 사회가 유지될 것”이라는 굉장히 미국 극우파 편향적이고 오만한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이것은 소위 미국의 신보수주의라 할 수 있는 네오콘적인 관점으로 매우 미국 중심적이고, 소위 미국식 자유주의 사상의 폭력성과 오만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프랜시스 후쿠야마를 비롯한 미국 중심적 보수주의자들이 그리도 찬양하고 숭배하는 미국식 자본주의는 완벽한 체제도 아닐뿐더러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필요한 체제이기 때문이다. 현실 사회주의권에 이와 같은 변화가 있자 “세계는 유일 초강대국으로 우뚝 선 미국의 패권적 질서 아래 놓이게 될 것이고,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라고 보며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노먼 슈워츠코프 장군, 그는 걸프전쟁에서 작전을 지휘했다.)

 

(전쟁 당시 작전을 지휘하는 노먼 슈워츠코프)


냉전이 끝나가던 1990년 미국은 중동에서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그 전쟁은 바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을 상대로 한 전쟁이었다. 걸프전쟁에서 미국과 싸웠던 이라크는 한 때 미국의 강력한 동맹국이었다. 대략 100만에서 15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던 이란-이라크 전쟁(Iran-Iraq War)에서 미국은 이라크의 동맹국이었다. 당시 미국은 동맹국 이라크에게 무기를 제공했고, 이는 이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미국은 그 전쟁에서 이라크를 지원했었다. 그랬던 미국이 1990년에 와서는 이라크와 전쟁을 하게 된 것이다.

(걸프전쟁 당시 미군의 작전 지도)


 

(사담 후세인)


미국이 이라크하고 전쟁을 하게 된 데에는 1990년 8월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이 인접국가였던 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부터였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미국은 이에 반발했다. 미국은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 군대를 섬멸하기 위해 소위 32개국의 전투부대와 비전투부대로 이루어진 ‘다국적군’을 편성하여 신속한 군사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다국적군의 주력은 미국이었고, 그다음으론 사우디아라비아와 영국, 프랑스가 많은 병력을 지원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배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런 패배의식은 1990년에도 사회에 존재했다. 따라서 다국적군을 편성한 미국은 제2의 베트남 전쟁과 같은 결과를 초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지했고, 전략 전술도 그 맥락에서 지휘하게 되었다.

(사막지대를 폭격하는 미군 전투기)

 

(걸프전쟁 당시 최신식 미군 탱크)


걸프전쟁에서의 미군은 참으로 신속하게 작전을 전개했다. 1991년 1월 17일 미국의 노먼 슈워츠코프(Norman H. Schwartzkopf) 장군은 다국적군을 이끌고 이라크군을 섬멸하기 위한 ‘사막 폭풍 작전(Operation Desert Storm)’을 개시했다. 당연히 이 작전의 목적은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점령하고 있던 이라크군을 섬멸한다는 것이었고, 더나아가 다국적군은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를 공중폭격으로 초토화했다. 이라크에 있는 도로나 교량 수도, 댐 , 전기공급 시설 그리고 유전지대 등과 같은 공공시설이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됐고, 심지어 민간인 거주 지역과 병원 학교까지도 초토화됐다. 이러한 미군의 폭격으로 최소 수천 명의 이라크 시민들이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고, 이 사막 폭풍 작전은 1991년 2월 28까지 대략 6주 동안 전개되었다. 작전은 약 1000여 시간의 제1단계 공중폭격과 100시간의 제2단계 지상전으로 펼쳐졌다.

(미군의 스텔스 전투기)

1991년 2월 28일까지 작전을 끝마친 미국은 신속한 승리감에 도취했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을 이어 미국의 대통령이 된 조지 부시 대통령(이 부시는 아버지 부시다.)과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사막 폭풍 작전에서 미군이 거둔 승리를 찬양했다. 그들은 “베트남 전쟁에서 겪었던 비참한 실패라는 유령이 마침내 안식에 들어 사라졌다”라고 주장했다. 미국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초강대국인 자신들이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었다.


사실 걸프전쟁에서 미국이 이라크군을 대상으로 신속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이 군사기술 분야에 막대한 재정을 투입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군은 세계에서 내로라 할만큼 강력한 군대였다. 대략 수십만 이상의 군대와 수천 대의 탱크를 보유하고 있던 이라크 육군은 미군이 사막 폭풍 작전을 전개했을 때 100시간 만에 괴멸당했었다. 이 전쟁에서 이라크군은 대략 5만 명 이상이 전사했고, 3300대의 탱크와 2100대의 장갑차 그리고 110대 이상의 항공기가 파괴되었다. 그에 반해 다국적군은 292명이 전사했고, 31대의 탱크만 잃었으며, 미군은 148명만 전사했다. 쉽게 말해 6주간의 전쟁에서 미군은 이라크군을 사실상 학살하는 정도로 궤멸시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라크의 경제봉쇄와 대량 아사를 옹호하는 매들린 울브라이트)

 

이런 미군의 전과는 제2의 베트남 전쟁을 예상했던 몇몇 군사 전문가들의 예측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전에서 최신식 무기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구식 군대를 처참하게 파괴할 수 있는지를 아주 잘 보여준 사례였다. 특히나 최신식 스텔스 전투기와 같은 최강의 공군력을 동원한 미군의 전술이 걸프전쟁에서 이라크의 강력한 육군을 궤멸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1등 공신이었다. 미국에게 있어 걸프전쟁은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배를 극복하게 된 사건이었지만, 이라크 국민들에겐 참혹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미국 CNN 방송에서 인용한 이라크의 인명피해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공식집계를 보면 1991년 6월 사망 10만 명, 부상 30만 명 실종 탈영 15만 명, 포로 6만 명이라고 보도했는데, 전쟁 이후 미국이 이라크를 대상으로 경제제제를 가하며 질병과 기아로 죽은 이라크인은 최소 100만 명 이상을 넘었었다. 그렇게 죽은 100만 명 중 50만 명 이상이 다섯 살 미만의 어린이와 유아였다. 미국은 냉전의 승리와 걸프전쟁의 승리를 거두며 이라크에서 이렇게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지만,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 1996년 5월 12일 CBS 뉴스프로그램의 기자 레슬리 스탈이 민주당 대통령 빌 클린턴의 국무장관인 매들린 올브라이트(Madeleine Korbel Albright)와 인터뷰 했을 때 울브라이트는 “이라크에서 50만 명이 넘는 아이들이 죽었고, 이는 히로시마에서 죽은 사람들 보다 더 많은 수치이며 그럴 가치가 있느냐?”는 질문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라고 대답했다. 따라서 미국은 냉전에서 승리한 뒤, 이전보다 더 오만해졌고 그런 오만함과 폭력성은 걸프전쟁과 이라크의 경제제제에서 아주 명백히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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