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테러와 이라크 전쟁(9.11 Terror and Invasion of Iraq 2003)

(비행기 테러를 당한 쌍둥이 빌딩)
20세기가 끝나고 21세기가 시작되는 2001년 전 세계에 충격을 준 사건이 미국 뉴욕에서 발생했다. 2001년 9월 11일 오전 8시 46분쯤 ‘아메리칸 항공 11기’가 뉴욕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Center) 북쪽 빌딩에 충돌했다. 그로부터 20여 분이 지난 9시 3분 유나이티드 항공 175기가 다시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Center) 남쪽 빌딩에 충돌했고, 30분 뒤에는 ‘아메리칸 항공 77기’가 수도 워싱턴 국방부 청사 펜타곤에 들이받았다. 이 국제적 테러를 감행한 세력은 극단적 이슬람주의 단체인 알카에다와 그 알카에다의 수장인 오사마 빈라덴(Osama Bin Laden)이었다. 오사마 빈라덴이 뉴욕에 감행한 테러는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 세기의 대폭발 테러로 인해 최소 3000명 이상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고, 비행기가 충돌한 세계무역기구 건물인 쌍둥이 빌딩은 무너져 버렸다.

(현재 9.11 기념관 근처에 있는 쌍둥이 빌딩 위치, 현재는 이것을 잊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곳으로 만들었다.)
9.11 테러는 미국에게 있어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자신들의 본토가 공격당한 사례였다. 이 테러 사건이 있고 나자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은 즉각적으로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을 선포했다. 부시 대통령과 그의 공화당 측근들은 오사마 빈라덴이 주도하는 이슬람 군사조직인 알카에다(Al-Qaeda)를 괴멸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그들은 9.11이 일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탈레반이 오사마 빈라덴을 숨겨주고 있다”라는 이유를 들어 아프가니스탄을 대상으로한 전면적인 군사적 침공에 나섰다. 그 결과 미국의 부시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지만, 단기간에 오사마 빈라덴을 체포하고 알카에다를 섬멸시키는 목표를 실패하게 되며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전쟁의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오사마 빈라덴)
이렇게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2001년 9월에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을 개시한 미국의 조지 부시는 2002년 1월 미국하고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북한, 이란, 이라크를 향해 ‘악의 축(Axis of Evil)’이라 표현했다. 미국의 부시 정부가 21세기를 시작하며 타국을 대상으로 군사적으로 위협적으로 나설 것이라는 모습을 악의 축이라는 발언을 통해 보여주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의 부시 정부는 의회에서 소위 ‘미국애국자법(Patriot Act)’ 통과시켰다. 이 애국자법은 단순한 혐의만으로도 기소 없이, 그리고 헌법에 규정된 정당한 법 절차에 따른 권리 없이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을 구금할 수 있는 권한을 미국법무부에 부여한 것이었다. 즉 이 법에 따르면 어떤 집단이든 ‘테러리스트로’ 지정할 수 있고, 그렇게 지정된 조직에 성원이나 자금을 제공한 사람을 체포하고 구금 추방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대략 1000명 이상의 아랍계 미국인들이 어떠한 기소 절차 없이 구금되는 일이 발생했었다.

(미국의 조지 부시)
미국은 9.11 테러를 거치면서 소위 자신들이 표현한 대로 테러와의 전쟁을 통해 적대국을 무너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더불어 또 다른 나라를 상대로 한 군사적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나라가 바로 후세인의 이라크였다. 부시 정부가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한 전략은 미국인들에게 잘 먹혀들어 갔다. 이라크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미국은 2003년 3월 20일 이라크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전면적인 군사적 침공을 개시했다. 당시 부시는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이라크의 민주화’, ‘대량 살상무기의 개발과 은닉’ 그리고 ‘알카에다와 같은 테러조작과의 연계’라는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침공 작전 이름도 ‘이라크 자유작전(Operation Iraqi Freedom)’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이 표면적으로 이라크을 침공하기 위해 만든 구실이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진 목적은 석유였다. 이라크는 세계에서 석유매장량이 3위였다. 즉 이런 이라크의 지정학적 조건 미국으로 하여금 이라크에서 석유 이권을 독식하겠다는 제국주의적 야욕을 자극했고, 이라크는 미제국주의의 희생자가 됐다.

(이라크 전쟁 당시 사막 상공을 비행하는 미국과 영국측 군항공기)

(바그다드 폭격)
미국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그 나라를 오사마 빈라덴의 알카에다와 연관지어 얘기했지만, 오사마 빈라덴의 조국이자 9.11 테러범 19명 중 16명의 조국인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해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반인권적이고, 억압적인 지배계급들이 미국과 협력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부시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타국 침략 명분으로 내세웠던 구실은 큰 모순을 가지고 있었고, 중동의 민주화나 중동 여성인권 보호라는 미국의 주장은 악랄한 정치적 선동에 불과했다.

(미군의 폭격으로 불타는 사담 후세인의 관저)

(바그다드 함락 이후 항공모함에서 연설하는 조지 부시)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12년 전 걸프전쟁에서 그랬듯이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했다. 2003년에 시작된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는 24만 1500명의 미군과 4만명의 영국군이 동원되었는데, 여기에는 2000명의 호주군과 200명의 폴란드군도 포함되었다. 3월 21일에닌 미 해병대 1사단이 이라크-쿠웨이트 국경지대를 넘어 이라크 영토에 들어갔고, 막각한 화력을 바탕으로 이라크 정규군대를 손쉽게 무너뜨리며 이라크를 장악해나갔다. 개전 3주만인 4월 9일에는 미군이 수도 바그다드를 장악하면서 후세인 정부가 붕괴되버렸다. 대량살상무기라는 핑계를 들어 이라크를 침공했던 미국은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했다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즉 미국의 주장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또한 이 과정에서 이라크의 도시와 지역들은 미군의 폭격으로 초토화되었다. 이번에도 미국은 걸프전쟁에서처럼 막강한 공군력을 전쟁에 동원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단기간에 이라크를 접수한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2003년 5월 1일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링컨에서 ‘임무 완수’라는 현수막을 걸고 마치 이라크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행동했다. 미군이 이라크에 입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후세인을 무너뜨린 기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고, 혼란이 생기며 미군을 상대로 하는 게릴라전이 이라크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미국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린 이후의 행정적인 대처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쉽게 말해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 또한 이라크에 대해 사전지식이 부족했다. 미국은 당시 체포한 후세인을 2006년에 교수대로 보내 사형시켰지만, 이라크 내에서 일어나는 게릴라전은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지속됐다.

(폐허속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는 미군)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고 난 이후의 이라크 전쟁은 미군과 이에 맞서는 게릴라들의 전투로 양상이 바뀌었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면서 표면적인 성과와는 달리 제2의 베트남 전쟁과 같은 양상이 돼버렸다. 미군의 점령하고 있던 이라크의 도시와 지역에서 미군을 상대로하는 폭탄 테러와 같은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2003년 10월 말 이라크 반군의 공세가 고조되기도 했었는데, 당시 미군은 한 달 동안 82명이 사망하고 337명이 부상당했다. 2004년 6월 28일에 미군 등 연합군의 점령이 공식 종료됐지만, 이라크 반군은 저항을 계속했고, 내란 양상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2004년에만 미군 848명이 사망하고 9034명이 부상당했다. 2009년에서 2010년 기준으로 이라크에서의 미군 전사자는 최소 4500명을 넘겼다. 즉 이 말은 4500명을 넘겼음에도 미국은 이라크 전선에서 고전하며, 사태를 안정시키지 못했다는 증거다.

(미군의 이라크 포로 학대, 이는 2004년에 촬영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치르면서 4조달러에 달하는 엄청난 전쟁 비용과 100억 달러 상당의 전후 복구 비용을 지출했다. 결국 이라크에서 의미없는 전쟁을 치르게 된 미국은 2007년 4월 미 의회에서 상정된 이라크 철군 결의안에 동조했다. 이렇게 되면서 미국을 포함한 NATO의 일원국들도 철군을 시작했고, 부시 이후 흑인 최초로 미국 대통령이된 버락 오바마는 대선 공약으로 이라크 철군을 국민들에게 주장했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2011년 9월 1일 “이라크에서 자신들의 역할이 끝났음”을 선언하며 철군을 시작했고, 2011년 12월 15일 미국은 공식으로 종전을 선언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18일 미군은 이라크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되었다.

(미군의 이라크 철수를 보여주는 시사만화)
2011년 12월 미군 철수 이후 이라크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됐다. 2013년 이라크 정부군과 이슬람의 한 종파인 수니파 세력이 충돌하며 수백명이 사망하는 등 분쟁이 본격화되고 시리아 내전에 개입해 있던 ‘이라크-레바논 이슬람국가(ISIL)’가 이라크 지역 중 일부를 차지하게 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미국 오바마 정부는 2014년 6월 미국 미국민 보호 명목으로 이라크에 다시 파병하기로 결정하고 8월 미군은 IS에 장악된 이라크 북부를 공습을 감행했다. 미군은 이라크 정부군을 돕기 시작했고, IS에게 빼앗겼던 영토 1/3을 회복함으로써, 2017년 12월 최종 승리를 선언했다. 이렇게 해서 이라크 내에서의 전쟁은 완벽히 끝이 났다. 현재(2020년 1월 기준)까지도 수천 명의 미군이 이라크에 주둔하는 중이다.

(2012년에 시작된 이라크 내전을 보여주는 만화)
2003년 미국이 침략으로 시작된 이라크 전쟁은 미국식 민주주의 전파를 위해선 물불을 가리지 않으며 아주 극단적인 모습을 보였던 네오콘들의 사상과 오만한 확신이 중동에 어떠한 피바람을 불러왔는지 또는 그 결과가 어땠는지를 보여줬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기간 동안 최소 60만 이상의 민간인이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사망했다. 2004년에는 미군이 이라크 포로를 학대했던 것이 큰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라크 출신의 포로 수감자가 분뇨로 몸이 더럽혀지거나 성적 학대를 당하는 모습과 발가벗긴 채 피를 흘리면서 미군에게 맞기도 하고, 군견에게 물리거나 위협당하는 장면이 영상으로 촬영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소위 민주주의 국가 미국이 이라크에게 보였던 모습이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당시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수백만 명이 전쟁 반대 시위에 참여했었다. 2006년에 행해진 설문 조사를 보면 대다수의 미국인이 전쟁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많은 사람이 이라크 전쟁을 부당한 전쟁으로 생각했다는 반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