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은 코로나???

gta 산안드레스에서 나왔다. 오늘 게임하다가 보게 되니 참 당황스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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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20-09-29 15: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산안드레아스가 한글버전도 있었군요^^

NamGiKim 2020-09-29 16:24   좋아요 1 | URL
정확히 말하자면 한글패치버젼이죠.
 

(이 글은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반전운동에 나섰던 리영희 교수의 연설문입니다.)

 

평화 국가의 위상이 위기에 처해 있는 이 시각, 며칠 동안 계속 민주주의의 승리를 위해 싸우고 있는 여러분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나는 모처럼 갖지 못했던 귀중한 이 기회에 노무현 대통령과 박관용 국회의장과 여야 국회의원들에게 경고하고 아울러 간곡히 부탁하겠습니다. 대한민국 군대를 이라크에 절대 보내지 말아야 할 이유를 분명하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대통령과 정치인들은 분명히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식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첫째, 그 동안 미국이 이라크 공격을 정당화·합법화하려고 선전한 사항이 모두 거짓임이 드러났습니다. 이라크에서는 대량살상무기도 발견되지 않았고, 화학무기와 그밖에 유엔 안보리가 결정하고 제재를 가할 만한, 미국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둘째, 따라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미국의 거짓된 주장과 요구를 몇 달에 걸쳐 심의한 결과도, 그리고 현지에 파견된 조사단의 철저한 조사 결과도 아무런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 이번 전쟁은 침략전쟁을 구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세계 국가들의 행동 규정을 결정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유엔 헌장, 이 모든 것을 미국은 위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미국의 이라크 군사 공격은 명백한 침략 전쟁입니다.

 

, 파병은 대한민국 헌법의 근간이 되는 유엔 헌장 정신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우리 헌법은 국제 관계에서 국제 행동은 유엔 헌장 정신에 입각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또 우리 헌법에는 침략 전쟁을 부정하는 명백한 조항이 있습니다. 파병은 이것에 대한 위반입니다. 대한민국이 유엔의 결정에 의해 탄생한 국가인 만큼 유엔 정신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행동 결의가 없는 미국의 불법적 전쟁 행위에 군대를 파병하는 것은 유엔 헌장 위반이며 대한민국의 법적 뒷받침이 되고 있는 기반을 파괴하는 겁니다. 따라서 노대통령과 국회의장과, 여야 국회의원들은 분명히 대한민국의 헌법이 정한 바에 따라서 행동해야 할 것이며, 대한민국 헌법을 위반하는 것은 국가와 국민의 대표임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넷째, 우리 대통령과 국회의원들과 파병 지지 세력들은 파병이 한-미 동맹 관계에 바탕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1954년 발효된 것으로, 이 방위조약에는 분명하게 군사행동에 대한 제한이 있습니다. 단순하게 동맹이라 해서 모든 군사행동이 허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대학생이나 그 연배 분들인 거 같아서 대한민국의 군사 행동에 관한 한미방위조약에 관한 강의를 할까 합니다.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은 그 전문에서 상호 군사 행동을 분명하게 제한하고 있습니다.

 

1.파병은 오히려 한미 방위 조약 위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한국이 미국을 도와도, 미국이 한국을 도와도 그것은 외부의 무력 공격이 있어야만 정당화됩니다. , 그 지역은 태평양 지역에만 해당하는 것입니다.

 

노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은 분명하게 외쳐야 합니다. 외부로부터의 명백한 군사 행동이 없었는데도 대한민국이 한미방위조약에 입각했다고 착각하고 미국의 군사공격에 지지를 보낸다면 한미방위조약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미방위조약은 평화적 수단에 의해서 해결하게끔 돼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평화적 수단을 다했습니까?

 

, 국제 관계에서 유엔에 배치되는 방법으로 무력 위협이나 무력 공격을 삼간다고 돼 있습니다. 따라서 유엔에 위배되는 이라크 공격은 한미방위조약에도 위배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라크가 무력 공격을 해 왔습니까? 이라크 국민들이 한국 국민들에게 손가락질 하나 한 일이 있습니까?

 

이라크가 아시아에 있습니까? 극동 지역에 있습니까?

 

이라크가 선제 공격을 했습니까? (청중들:아니오!)

 

그렇다면 우리 대한민국은 미국의 군사 공격을 지지할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박관용 국회의장과 여야 국회의원들은 이제 미국과의 동맹 관계라는 허황된 논리로 파병을 결정하려 하는 이유를 국민들에게 설명해야 합니다.

 

다섯째, 여러분은 젊어서 베트남 전쟁 당시 상황을 잘 모를 겁니다. 대한민국 군대 35만 명이 베트남에 갔고 상시적으로 5만 명이 주둔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군대가 미국을 지원하기 위해 베트남에 갈 때도 한미방위조약에 근거해 간 것이 아니에요. 미국은 이 조약에 근거해 대한민국 군대를 베트남까지 끌고 갈 근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형식을 취했냐 하면 남베트남 정부로 하여금 대한민국에 독자적으로 군대 파병을 요청하게 하는 군색한 방식을 썼습니다.

 

미국의 요청으로 베트남에 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멍청한 한국 사람들이 많은데, 한국이 미국 요청 없이 자발적으로 갔다고 하는 엉터리들이 있는데, 미국은 한미방위조약에 근거가 없으니까 남베트남 정부가 한국에 요청하도록 한 것일 뿐입니다. 아주 교활하고 못된 방법을 쓴 것입니다.

 

여섯째, 그렇다면 동맹 국가는 다른 동맹 국가의 전쟁에 무조건 참전해야 하는가? 베트남 전쟁 때 영국은 군대를 포함해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어요. 그런데 미국이 하도 요청하니까 급기야 의장대 6명을 보냈습니다. 사이공 공항에 의장대를 세워 놓고 마치 영국이 미국을 돕기 위해 참전한 것인 양 쇼를 한 겁니다. 영국이야말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멸망할 것을 마셜 플랜을 비롯한 미국의 원조로 살아난 나라입니다. 미국과 같은 앵글로 색슨 핏줄인 영국은 우리 나라보다도 더욱 대대적으로 미국의 베트남전을 지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의장대 6명만을 보냈다는 사실은 굉장히 인상적이지 않습니까?

 

일곱째, 국가 이익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국가 이익을 획득하는 방법은 도덕적이어야 합니다. 살인·강도의 방법으로, 남의 나라를 침범하고 남의 선량한 국민들을 해치면서 돈을 벌고, 시장을 개척하고, 석유 이권을 챙기는 것을 원하는 극우 반공주의 세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벌더라도 남을 해치지 않고 도덕적으로 해야 합니다. 강도·살인, 절도·강간·파괴·방화 이런 방법으로 번 돈이 얼마나 유익하고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된단 말입니까?

 

여덟째, 노무현 대통령은 북한 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풀기 위해 전략적으로 미국을 지지했다고 고통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한반도 전쟁 위기를 해결하고 북한에 대한 미국의 군사 위협을 해소하기 위해 전쟁을 지지했다면 이것이야말로 한심한 작태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 특히 부시를 비롯한 공화당 세력에게는 미국의 이익이 행동 규범입니다. ‘동맹 국가의 희망이 무엇인가하는 것은 부시 정권의 고려사항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한국 정부가 아양과 아첨을 떤다고 부시 정부가 전쟁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착각도 이만저만한 착각이 아닙니다. 미국은 오로지 미국의, 부시 정권의 철학과 정책과 이익만을 위해 행동하는 집단입니다.


 

아홉째, 한국 국민들은 민주화 운동 과정을 거쳐 높은 민주 의식과 도덕성을 갖췄습니다. 세계인들의 존경을 얻기 위해서는 파병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은 이제 자주적이어야 합니다.

 

열번째, 대한민국의 전투병을 이라크 포로수용소 경비병으로 보내 달라는 요구가 있었습니다. 이 포로 수용소 경비병이야말로 훗날 전범 재판에 회부될 가장 위험한 직책입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연합군 병사들을 포로 수용소에 가두었고 조선인들이 경비병 노릇을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이 가련한 조선인들이 일본의 앞잡이로 몰려서 전범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당했습니다. 포로 수용소 경비는 1급 전범입니다. 아무런 죄가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2. 미국의 행동 규범

 

열 한번째, 우리가 왜 12억 아랍 인구를 적으로 만들어야 합니까? 그럴 이유가 무엇이 있습니까? 나라의 적을 새로 만들어서 국제 외교에 지장을 입을 이유가 없습니다.

 

열 두번째, 국내 반공 수구 세력, 미국의 말이라면 뭐든지 무조건 따르는 일부 수구 세력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열 세번째, 노 대통령 자신이 취임 전과 취임 후에 미국에 대해서 할 말은 한다, 대한민국은 앞으로 미국과의 관계에서 자주적인 태도를 가지겠다 해서 여러분들은 아마 이 정권에게 표를 찍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게 미국에 대해서 할 말을 하는 노 대통령의 모습입니까? 이것은 자기 자신을 배신하고 자기 자신을 배신함으로 해서 대한민국 국민을 배신하고 국가 위신을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열 네번째, 이번에 파병하고 미국이 하라는 대로 하게 되면, 우리 국민은 미국에 더욱 예속될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대한민국은 미국의 보호국처럼 취급받아 왔는데, 이번 파병은 이런 상황을 심화시킬 겁니다.

 

끝으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지해 놓고 미국의 한반도 정책과 대북 적대 정책에 무슨 근거로 대항할 수 있습니까? 미국은 우리의 요구와는 반대로 행동할 겁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묻겠습니다. 이러한 상황에도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을 지지하고 군대를 파병해야 할 비밀 협약이 있는가? 한미방위조약 이외에 그것을 백지화하는 미국과의 비밀 조약이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 헌법과 한미방위조약에 근거해 마땅히 그것을 무효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국민들에게 그 사실을 밝혀야 합니다. 국민은 알 권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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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원 2020-09-25 15: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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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20-09-25 15:12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쿠자누스 2020-09-25 1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영희 교수님 연설보다 몇 달 전이 되겠네요.
시사저널에 제가 기고한 글입니다.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88686

NamGiKim 2020-09-25 18:50   좋아요 0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댜.^-^
 

수백 년 동안 외부세계와 담을 쌓고 지내온 일본은 1853년까지 영토 쟁탈전에 뛰어든 적이 없었다그러던 중 이해에 미국 매슈 C. 페리 제독이 에도만으로 들어와 대포로 위협하고 중세에 머물러 있던 일본의 문호를 개방해 근대 국가로 유도했다일본인들은 페리의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출처일본 제국 패망사 p.55

 

에도막부를 거치며 이른바 쇄국정책을 펼치던 일본은 25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주변국들 일부를 제외한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시도하지 않았다일본이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시도 하지 않던 250년이라는 세월 동안 지구반대편에선 여러 사건들이 일어났다유럽인들은 소위 콜럼버스가 신대륙이라고 부르던 곳에 가서 정착 및 이주를 시작했고, 1776년 미국에선 독립혁명이 일어났으며, 1789년 프랑스에선 자유평등우애라는 가치를 내걸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또한 1804년 황제가 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유럽 정복에 나섰으며(물론 라이프치히 전투와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며 끝났지만), 19세기 초 영국에선 소비재 대량생산을 중심으로 하는 공장건설이 일어나면서 이른바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산업혁명, 19세기에 시작된 산업혁명은 기술과 과학 생산의 발달과 더불어 유럽을 자본주의에서 제국주의 국가로 이끌었다. )

 

산업혁명을 시작으로 유럽은 자본주의를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경제를 발전시켰고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고도의 생산력을 보여줬으며 노동자 계급을 탄생시켰다또한 군사력의 현대화도 이루어졌다그러나 자본주의의 활성화는 소수의 상류계층이 중심이 된 착취를 의미했고자본은 노동자들을 하층화 내지는 비인간화시켰다그와 동시에 산업혁명이 남긴 또 다른 유산이 있었다그게 바로 제국주의(Imperialism)’이다영국프랑스와 같은 자본주의 국가들은 대량생산을 위한 값싼 원료를 제공받고자 했고여러 나라들을 식민지화했으며필요에 따라선 총과 칼을 동원했다나폴레옹 황제가 잠자는 사자에 비유했던 중국(당시는 청나라)은 1842년 아편전쟁에서 영국에게 처참한 패배를 맛보았으며무굴제국으로 명성을 떨치던 인도는 영국의 독점기업 동인도 회사를 통해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

(아편전쟁, 아편전쟁은 산업혁명으로 발전한 제국주의 국가의 과학과 기술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청나라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19세기 산업혁명을 거친 나라들은 전부다 이런 과정을 거쳤고프랑스네덜란드벨기에 등도 똑같은 과정을 통해 많은 나라를 식민지화했다당연히 일본은 국제정세가 이렇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무감각했으며태평한 나날을 보냈다그러던 1853년 일본의 역사가 바뀌는 사건이 일어났다바로 미국이 들어온 것이다미국은 신생국가였지만광활한 영토를 소유한 나라였다어쩌면 일본과 미국의 관계는 여기서 부터가 시작일지도 모른다. 1853년 6월 3(양력으로는 7월 8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동인도 함대 소속의 군함 4척이 일본 에도만의 우라가 항에 나타났다. 1852년 3월 동인도함대 사령관에 취임하여 일본을 개국하라는 지령을 부여 받은 페리 제독은 그해 11월 미국의 필모어 대통령 의 친서를 휴대하고 버지니아 주 노퍽을 출항하여 7월 8일 우라가 항에 입항했다.

(페리 제독, 페리 제독은 미영전쟁의 영웅 올리버 해저드 해리의 동생이다. 그 또한 전쟁영웅이 될 형을 따라 1812년 미영전쟁에 참전했다. 이후 제독의 자리까지 오른 페리는 1850년대 군함을 이끌고가 일본을 개항시켰다.)

 

페리 제독은 막부의 관리들에게 미국 필모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면서미국과의 통상을 요구했다이는 당연히 10년 전 영국이 청나라에게 했던 방법과 비슷했으며만일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시에는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위협도 같이했다페리 제독이 이끌고 온 현대식 군함 4척에 위협을 느낀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페리제독의 요구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신속한 움직임을 보였다페리 내항 사실을 조정에 알렸으며 각 지역 다이묘들에게 의견을 물었다이 과정에서 막부는 페리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론을 취한 반면조정과 다이묘들은 서양 오랑캐를 쫓아내야 한다는 양이론을 내세웠다. 1854년 1월 페리 제독은 이번엔 7척의 배를 이끌고 에도 만 안으로 다시 입항하여 답변을 재촉했다결국 막부는 페리 제독의 요구를 수용하여 1854년 3월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에 들어온 미군 군함, 미국 또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 처럼 산업혁명과 자본주의화를 통해 막강한 군사력을 길렀다.)


(성조기를 달고 있는 미국 군함)

 

미일화친조약 체결로 서양에 대한 문호 개방의 길에 들어섰다하지만 미국의 초대 영사로 부임한 타운젠드 해리스가 제한적 개방에 불만을 갖고 통상의 자유화를 주장하면서해리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막부는 1858년 7월에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정식 조인했다이 조약으로 일본은 개항장을 다섯 개(요코하마하코다테니가타고베나가사키)로 늘리고무역의 전면 자유화 및 협정 관세 채택외국인에 대한 영사재판권 인정하게 됐다또한 막부는 네덜란드와러시아영국프랑스와도 통상조약을 체결했다개국을 한 일본이 서양 열강이 지배하는 국제질서에 편입된 것이다.

(일본에 입항한 페리 제독과 그의 병사들)


(개항한 일본의 도시를 나타낸 지도)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에서 칙허(임금의 허가함)의 문제를 계기로 일본은 정치적 갈등이 전면에 드러났다막부는 통상조약 체결을 결정했고천황에게 칙허를 요청했는데결정적으로 고메이 천황이 이를 거부했다물론 막부는 천황의 의견과는 별개로 통상조약 조인을 강행했다개항을 하게 된 일본이 겪어야 했던 문제는 바로 경제적 문제였다개항으로 인한 수출 급속 증대에 생산이 따라가지 못해 물가가 폭등했고물가상승으로 인한 하급무사와 서민의 생활의 막대한 부담으로 이어졌다거기다 미국과 체결한 수호통상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었으며여기에 대한 불만도 만만치 않았다이런 불만은 외국인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져 1860년 해리스 통역관이 사쓰마번의 낭사(浪士)에게 살해당했고, 1861년 도젠지의 영국 임시 공사관이 습격당하기도 했으며영국 공사관이 일본인들의 습격으로 불태워지기도 했었다.

(일본이 미국에 보낸 사절단, 1860년 일본은 미일수통상조약의 비준 및 교환을 위해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에 사절단을 보냈다.)

 

그러나 일본의 개항은 그들이 서양을 배울 수 있게 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1860년 이른바 신미사절단이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갔고그해 4월 4일엔 수도 워싱턴의 미국의회를 방문했었다. 1861년 말 일본은 개항연기 교섭 담판을 위해 다케우치 사절단이 유럽에 파견되었고이들은 1862년 5월 24일 네덜란드 의회를 방문했으며여기 수행원 중 한 명이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프로이센 의회를 방청하기도 했다. 1863년 12월에는 영국과 프랑스에 이케다 사절단이 파견됐고이들은 1864년 7월에 귀국했다막부 말기부터 일본은 서구 열강을 배우고자 하는 모습을 보였고이는 일본이 서구 열강에 따라 근대화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메이지 유신, 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에도막부가 끝났음을 상징하는 변화였다. 또한 일본이 서구 열강에 들어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동시에 에도막부 말기에 접어들면서 막부의 지배력이 약화되었다막부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막번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정치체제구상으로 공의정체론이 부상했고서양세력의 침략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중앙집권체제로의 전환이 필요성을 깨달았다이 과정에서 막부와 반막부세력으로 나뉘어 1860년대 일본은 이들의 격동과 대립이 전개되었다. 1867년에 들어 막번체제를 개혁하려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1867년 12월 반막부 세력은 왕정복고 쿠데타를 주도하여 천황의 궁정을 장악하고 천황의 이름으로 왕정복고의 대호령울 발표했다이에 따라 막부의 폐지와 삼직(총재·의정·참여)의 설치장군의 관직 사임과 영지 몰수가 결정되었다이렇게 하여 260년간 지속되었던 도쿠가와 막부가 막을 내렸다이것이 바로 메이지 유신이었고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본은 이른바 서구화 및 탈아입구(脱亜入欧だつあにゅうおう)의 길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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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 6 6일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 연합군은 노르망디에 대규모 상륙작전을 감행했다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한 이후 미군은 파죽지세로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향해 진격해 나갔고그해 8월엔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합동작전을 벌여 수도 파리를 해방시켰다프랑스 파리를 해방시킨 연합군은 네덜란드로 진격하기 위해 1944 9월 이른바 마켓가든 작전을 개시했다네덜란드의 에인트호번과 네이메헌을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작전의 궁극적인 목적이었던 라인강의 교량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그해 10월 영미 연합군은 독일 국경근처까지는 도달했지만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많은 전투를 치렀던 연합군은 휴식 상태에 들어갔기에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다.

(벌지 전투 당시 독일군 진격도)


(아르덴 숲, 벨기에에 위치한 아르덴 숲은 침엽수림이 빽빽한 숲으로 전차가 다니기에는 부적합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연합군의 진격을 방어하기에만 급급했던 히틀러는 서부전선에서의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한 마지막 도발을 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벌지 전투였다독일에게는 아르덴 대공세(Ardennes Counteroffensive)라고 불리는 이 전투는 아돌프 히틀러가 서부전선에서 마지막으로 감행하는 대공세였다쉽게 말해 독일 측에 있어서 서부전선의 생사가 걸린 마지막 도발이었다. 1944년 11월 10일 히틀러는 이른바 아르덴 공세를 취하기 위해 준비하라는 명령에 서명했다동프로이센에 있는 전시 본부 늑대의 성채에서 머물던 히틀러는 12월 7일 최종 공격 안을 승인했고히틀러의 명령을 받은 서부전선의 독일군대는 최종 공격을 준비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1944년 12월 15일 당시 벨기에의 숲을 따라 형성된 아르덴 전선에는 6개의 미군 사단이 지키고 있었다이 가운데 3개 사단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부터 여러 전투를 치르며 지쳐있는 상태였고다른 3개 사단은 새로 배치된 부대였다이 지역의 전선은 1944년 10월부터 거의 2개월간 양측 모두 휴전상태에 들어간 상태였고, 12월엔 추운 겨울까지 맏이하여 양측 모두 다 공격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었다따라서 영국의 전쟁영웅(아프리카 전선에서 사막의 쥐라고 불림버나드 몽고메리 장군과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총 지휘했던 아이젠하워도 아르덴 숲에서 독일군이 대공세를 감행할 것이라 생각지 못했다거기다 벨기에의 침엽수림인 아르덴 숲은 독일군의 주력 군대인 전차가 다니기엔 적합하지 못한 지역이었기에그런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만토이펠 장군, 만토이펠은 동부전선과 아프리카 전역 그리고 서부전선에서 활약했던 독일 측 장군이다.)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아르덴 전선에서 공격을 준비했던 독일군은 25만 명의 병사와 수천의 전차와 장갑차로 이루어진 3개 군이 공격 개시 지점으로 이동했고이 부대들은 12월 15일 자정 공격 지점에 집결했다집결한 독일군은 야전원수 룬트슈테트와 동부전선에서 활약했던 발터 모델 장군 그리고 전차부대를 지휘하는 발터 폰 만토이펠 장군의 지휘를 받았다. 1944년 12월 16일 아르덴 전선에 집결한 독일군의 공격이 시작됐다공격을 감행한 독일군은 1940년 이른바 서부전선 전역에 걸쳐 감행했던 전격전(Blitz Krieg)을 감행하여 휴식상태에 있던 미군들을 놀라게 했다.

(독일의 티거 전차, 티거2로 불리는 이 전차는 미군의 주력전차인 M4 셔먼전차를 매우 손쉽게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전차였다. 티거의 활용으로 미군 기갑사단은 물량에 의존하는 전술로 맞섰다.)


(벌지 전투 당시 진격하는 독일군, stg 44 소총을 들고 있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독일군의 기습공격에 저항하던 미군은 결국 거센 공격에 밀렸고아르덴 지역의 북부전선은 오마 브래들리 장군이 2개의 기갑사단을 지원부대로 급파하라고 지시했음에도 독일군에게 돌파 당했다북부전선이 돌파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기뻐 날뛰며 12월 18일 방송을 통해 국민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며, “독일 군대가 디시 진격하고 있다크리스마스까지는 지도자에게 다시 안트베르펜 시를 선물로 바칠 것이라고 말했다독일군의 진격이 벨기에의 도시 바스토뉴까지 진격할 것이라는 것을 히틀러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아르덴 공세의 소식은 프랑스 정부에게 다시 한 번의 공포를 각인시켰다왜냐하면 4년 전 경험했던 1940년의 경험을 절대로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벌지 전투가 격렬해지자미군 사령부는 자신들의 최정예 부대를 전투에 투입했는데그게 바로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 나온 101 공수사단이었다.

(드와이트 아이젠 하워 장군,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했던 아이젠 하위는 벌지 전투에서도 미군을 지휘했으며 전쟁영웅이라는 타이틀을 얻은 그는 1953년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하지만 독일군이 목표로 노리던 벨기에의 바스토뉴는 101 공수사단이 투입되었지만독일군의 격렬한 포위를 받고 있었다바스토뉴를 대상으로 한 포위전에서 독일군은 맹렬한 포격을 이 도시에 퍼부었다여기에 투입됐던 공수부대들도 독일군 포격에 몸을 숨기기 바빴다바스토뉴에서 포위전이 격렬해지자독일 측은 미군에게 항복요청을 보냈다독일측의 항복 요청에 대한 미국의 맥컬리프 준장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Nuts!’, 즉 우리말로 하자면, ‘미친놈!’, ‘또라이!’, ‘개념 상실!’을 뜻했다맥컬리프의 이런 반응은 항복 요구를 보냈던 만토이펠과 같은 독일군 장성들을 화나게 했지만미군 지휘관과 사병들의 사기를 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바스토뉴 포위전 당시 101 공수부대 대원들, 이는 2001년에 나온 영화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도 잘 묘사되고, 콜오브듀티 유나이티드 오펜시브와 콜오브듀티 WWII에서도 잘 묘사된다.)

 

독일측 항복 요구가 있던 다음날 날씨가 좋아지면서 미군의 C-47 수송기가 바스토뉴에 포위된 병사들에게 보급 물자를 대량으로 공급했다공급 물자를 받은 부대는 다시 반격에 나섰고어느 시점에서 전세는 다시 연합군에게 유리해져 있었다바스토뉴를 포위했을 때만토이펠의 전차부대는 그 지역을 점령하려 했는데사기를 회복하고 지원병력과 물자보급까지 받은 미군의 반격을 받은 만토이펠은 바스토뉴를 점령하지 못했다거기다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패튼 장군의 미군 기갑사단이 대량으로 진격하면서 만토이펠의 독일 전차부대들도 분쇄되었다.

(반격하는 미군 공수부대, 크리스마스 전후로 해서 미군은 독일군에 맞서 반격에 나선다.)


(전선을 사수하는 미군)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해서 벌어진 전투는 결국 미군의 승리였고 12월 26일은 벌지전투의 전세가 완벽히 연합군쪽으로 역전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2일 뒤인 12월 28일 벌지 전투는 다시 한번 전개되었지만그 다음해인 1945년 1월 17일 패튼 부대에게 완벽히 궤멸당했던 만토이펠 군대가 철수 하면서 벌지 전투는 연합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2개월간 지속된 벌지 전투는 양측이 붙었던 대규모의 군사작전이었고 양측 모두 수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미군 또한 꽤나 많이 전사하여 전사자가 대략 2만 명 가까이 됐다벌지 전투에서 독일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가했음에도 패배했던 이유는 미군의 보급력 때문이기도 했지만독일군을 지휘해야할 전투 장교들의 부재이기도 했다왜냐하면 독일군의 많은 장교들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전략전술의 문제도 들 수 있다. 1939년부터 1942년까지 독일군 진격의 대명사였던 전격전은 이미 연합군이 전략상 간파한 상태였다즉 벌지 전투는 독일군의 이런 모순들이 겹치고히틀러가 승리하겠다는 개인적 욕심이 겹치며 패배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결국 벌지 전투 패배 이후 독일군은 서부 전선에서 더 이상 반격하지 못했고이것은 제3제국의 몰락이 머지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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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혁명 1917-1938
쉴라 피츠패트릭 지음, 고광열 옮김 / 사계절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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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20세기 역사에 있어서 러시아 혁명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 1917년 인류최초의 성공한 사회주의 혁명은 1789년 자유, 평등, 우애라는 가치아래 전개되었던 프랑스 혁명이 현재 21세기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가지는 의미만큼 그 못지않게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 사건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프랑스 혁명이 소위 민주주의라는 국가에 큰 영향을 주었다면, 러시아 혁명은 세계 혁명과 사회주의 국가들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혁명과 쿠바 혁명, 베트남 혁명 그리고 그 외의 제3세계에서 일어난 각종 민족해방투쟁들은 20세기 러시아 혁명의 영향아래 일어난 것이다.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사에서도 러시아 혁명은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혁명가 레닌이 식민지 민중에게 주장했던 가치들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수많은 사회주의 혁명가들을 탄생시킨 계기였기 때문이다.

 

긍정과 부정의 시각을 떠나서 러시아 혁명이 프랑스 혁명 못지않게 전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1924년 레닌 사후 소련을 지도하게 된 이오시프 스탈린과 그가 단행했던 공업화와 대숙청까지를 혁명의 일환으로 판단하는 것에는 의견을 달리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서방학계에서 스탈린의 대숙청과 러시아 혁명을 연결해서 보려하지 않았던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서구에서 독자적인 좌파조직을 만들어 좌파운동을 해왔던 토니 클리프류의 트로츠키주의 조직은 레닌의 사후를 끝으로 스탈린 집권 시기를 아예 반혁명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서방 학계에서는 1980년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소련의 문서고가 개방되면서 1990년대 수정주의 학파들이 많은 연구 성과물을 냈다. 개방된 소련의 문서를 통해서 서방세계에 과장되서 알려진 대숙청(The Great Purges)이 매우 과장되어 알려졌다는 사실을 밝혀낸 아치 게티(Arch Getty)가 바로 그러했다. 아치 게티 외에도 소련 역사를 수정주의적으로 접근을 시도한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쉴라 피츠패트릭(Sheila Fitzpatrick)이다. 그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수정주의 역사학의 대표로서 목소리를 냈고, 그가 쓴 개설서 러시아 혁명 1917~1938(The Russian Revolution)’은 러시아 2월 혁명부터 1936~1938년에 일어난 스탈린의 대숙청까지를 수정주의적 접근으로 해석한 대표적인 책이다. 그가 쓴 러시아 혁명사는 어떠한 점에서 다른지를 얘기해볼 필요가 있다.

 

2. 근대 러시아의 상황과 러시아 혁명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러시아 혁명은 20세기 역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이유는 분명했다. 대다수 민중의 삶이 매우 가난하고 어려웠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지고 있는 러시아는 강대국인 동시에 매우 낙후된 나라였다. 러시아의 낙후성은 1931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했던 연설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그 연설중 발췌한 일부는 다음과 같다.

 

러시아는 몽골의 칸에게 패배했습니다. 러시아는 투르크의 베이에게 패배했습니다. 러시아는 스웨덴의 봉건 통치자들에게 패배했습니다. 러시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에게 패배했습니다. 러시아는 영국과 프랑스 자본가들에게 패배했습니다. 러시아는 일본 귀족에게 패배했습니다. 이 모든 패배가 러시아의 후진성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스탈린의 주장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인구 대다수가 농민을 차지하던 러시아가 산업혁명의 바람을 맞은 것은 19세기 후반이었고, 도시 노동자 계급의 탄생도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등의 서구 열강에 비해 매우 늦었다. 대다수의 자본주의 국가들이 그랬듯이 19세기 러시아 또한 자본주의적 모순이 극단적으로 드러났고, 전제정 또한 유지됐으며 황실과 귀족들의 부정부패와 사치는 말도 못하는 수준이었다. 이러던 1905년 아시아의 신흥강국 일본에게 쓰라린 패배를 맛본 러시아에선 이른바 피의 일요일이라고 불리는 ‘1905년 혁명이 일어났다. 물론 이 혁명은 차르와 그 지지자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당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1905년 혁명 이후 차르 또한 일정부분 굴복했는데, 전국적으로 선출된 의회 두마를 설립함과 동시에 정당과 노동조합을 합법화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노동자와 혁명가들에 대한 탄압을 중지한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었기에 비밀경찰의 활동으로 탄압당하기 일쑤였다. 1905년 혁명은 차르 정권의 무자비한 진압과 일정부분 두마 허용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러시아 제국은 또 다른 소용돌이 속에 빠져 들며 혁명을 막지 못하는 상황으로 가게 됐다. 1914년 제국주의 열강들끼리 벌이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9148월 유럽에서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프랑스·영국 사이의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는 현대화된 전쟁에서 싸우게 됐다. 1차 세계대전의 학살을 동반한 무기의 현대화는 구식에 머물러 있던 러시아 제국군의 극심한 사상자를 만들어 냈다. 독일군은 제국의 서부 영토를 깊숙이 뚫고 들어왔고 1914년에서 1917년까지 러시아 제국은 총 5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거기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경제적 궁핍함과 그 과정에서 라스푸틴과 황후의 추문 및 부정부패는 민중을 분노하게 했고, 2월 혁명을 성공시킴으로써 케렌스키를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 내각을 구성했다.

 

민중이 혁명을 했던 이유에는 경제적 궁핍함과 차르 정권에 대한 불만이 있었지만, 전쟁에서 빠져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2월 혁명으로 세워진 정부는 독일과의 전쟁을 멈추지 않았고, 19176월에서 7월 초에 케렌스키가 감행한 러시아의 갈리시아 공세는 20만 명으로 추산되는 사상자를 내고 실패했다. 이러는 과정에서 스위스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혁명가 레닌이 그해 4월 페트로그라드 핀란드역에 도착하여 크세신스카야 저택으로 가서 4월 테제를 주장하고 선언한다. 볼셰비키 레닌이 주장한 4월 테제의 핵심은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였고, 또 다른 구호 , 토지, 평화또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책에선 레닌의 4월 테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레닌은 소비에트가 새 혁명 지도부하에서 활력을 되찾아야만 부르주아지에게서 프롤레타리아트로 권력을 이양하는 핵심 기관이 될 수 있다고 예측했다. 레닌이 4월 테제에서 제시한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는 사실상 계급 전쟁을 요구하는 구호였다. 레닌이 4월에 제시한 다른 구호인 , 토지, 평화에 담긴 혁명적 함의도 비슷했다. 레닌의 용법에서 평화는 제국주의 전쟁에서 철수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철수가 자본의 전복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토지는 지주의 재산을 몰수하여 농민들 스스로 재분배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농민이 자발적으로 토지를 장악하는 형식과 매우 가까웠다. 한 비판자가 혁명적 민주주의 도중에 내전의 깃발을 꽂는다고 레닌을 비난한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출처 : 러시아 혁명 1917-1938 p.104

 

19177월 갈리시아 공세가 처참한 패배로 끝난 후 페트로그라드에서 다시 한 번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것이 7월 봉기다. 최대 50만 명에 이르렀던 군중은 크론슈타트 수병·병사·페트로그라드 공장의 노동자 조직으로 구성됐고, 볼셰비키의 지도를 받았다. 이들은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깃발을 들었지만, 실패로 끝났다. 7월 봉기 이후 임시정부는 이들을 검거하기 시작했고, 결국 레닌은 다시 망명길에 올라 핀란드로 도피했다. 다음해 8월에는 전제주의자 코르닐로프가 반혁명적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실패로 끝났고, 이후 러시아로 돌아온 레닌과 그의 볼셰비키 동료들은 10월 혁명을 주도하여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했다.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는 제헌의회 선거에 도전하여 25%의 득표를 얻었지만 40%를 얻은 사회혁명당쪽에 선거에서의 패배를 맛보았다. 물론 볼셰비키는 선거에서 완벽히 이기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퇴하지 않았고, 통치의 위임이라는 면에서 볼셰비키는 자신들이 대표한다고 자임하는 집단은 주민 전체가 아니라고 반박할 수 있었다. 궁극적으로 볼셰비키는 의회를 해산하게 된다. 분명한건 볼셰비키는 노동계급의 이름으로 권력을 잡았다. 제헌의회 선거를 통해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은 다른 어떤 정당보다 노동자계급의 표를 더 많이 얻어냈다는 사실이었다.

 

3. 적백내전과 신경제정책

 

세계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볼셰비키는 실제로 진보적인 정책들을 해나갔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정권을 잡자마자 곧바로 전쟁에서 빠져나오지는 못했다. 독일과의 전쟁은 1918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면서 빠져나왔지만,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 혁명 정권이 치러야 했던 전쟁처럼 혁명을 수호하기 위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게 바로 적백내전이다. 1918년에 시작된 적백내전은 러시아 전역에서 벌어졌고, 볼셰비키는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의 간섭과 방해 그리고 차르주의자들에 맞서 싸워야 했다.

 

적백내전으로 인해 러시아의 경제는 더 나락으로 떨어졌다. 19세기부터도 낙후되었고, 1차 세계대전에서도 타격을 받았던 러시아의 경제는 내전을 통해 말 그대로 초토화됐다. 1921년엔 기근이 일어나 수백만이 아사했으며, 비슷한 시기 크론슈타트에선 수병들의 반란이 일어나 진압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었다. 적백내전을 통해 볼셰비키가 얻은 또 다른 결론이 있었다. 군의 현대화와 공업화 중심의 경제 발전 모델의 추진이었다. 또한 적백내전을 거치며 많은 이들이 볼셰비키에 가입했다. 1927년 기준으로 볼셰비키 총 당원 중 33%1917~1920년에 가입한 반면, 1917년 이전에 가입한 당원은 1%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적백내전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볼셰비키를 지지했다는 반증이다.

 

트로츠키와 스탈린 그리고 그 외의 당시 볼셰비키들이 지휘했던 붉은 군대는 내전을 통해 그 규모가 늘어났다. 내전 중에 50만 명이 넘는 공산주의자가 한때라도 붉은 군대에 복무했다. 내전 기간에 노동자와 공산주의자가 처음으로 징집됐고 내전 기간 내내 이들은 전투부대에서 높은 비율을 차지했으며, 내전이 끝날 무렵에 붉은 군대는 주로 농민 징집병으로 이루어진 500만 명이 넘는 병력의 거대 기구가 됐다. 비록 1/10만이 전투부대였고(붉은 군대든 백군이든 전선에 배치된 부대가 10만 명을 초과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나머지는 보급, 수송, 행정 일을 맡았지만, 군대의 성장은 놀라운 성과였다.

 

크론슈타트 반란 진압 이후 볼셰비키는 기존의 전시 공산주의적 방식을 버리고 신경제정책 이른바 네프(NEP)를 추진했다. 물론 네프라는 것은 공산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네프는 후퇴였다. 네프를 통해 소련 사회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다시 복귀했기 때문이다. 네프에서도 문제점이 없진 않았지만, 분명한건 1926년에서 1927년 당시에는 상당한 부분의 경제 회복을 거쳤다. 최소 1926년에서 1927년 기준으로 소련의 경제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경제력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프가 진행되는 동안 볼셰비키의 지지층도 늘었다. 1927년에 이르면 공산당은 100만 명이 넘는 정규 당원과 후보 당원을 거느리게 되는데, 그중 39%는 현재 노동자였으며 56%는 당에 가입했을 때의 직업도 노동자였다는 점에서 볼셰비키가 민중에게 지지를 받았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4. 스탈린의 공업화와 대숙청

 

그러나 볼셰비키에게 있어 네프가 영구적인 대안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사회주의를 위한 하나의 후퇴였을 뿐이다. 즉 일보전진을 위한 이보후퇴였다고 볼 수 있다. 레닌과 스탈린 그리고 트로츠키를 포함한 볼셰비키들은 낙후된 러시아가 공업화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스탈린만 공업화를 추구한 것처럼 얘기하지만, 당시의 공업화는 소련을 매우 낙후된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볼셰비키들이 추구한 대안이었다. 책에 따르면 옛 트로츠키주의자였던 유리 퍄타코프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개별 농업의 틀 안에서는 농업의 틀 안에서는 농업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농업집단화를 극단적인 비율로 채택해야만 한다. 우리는 내전 수준의 방법을 채택해야 한다. 물론 나는 우리가 내전의 방식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는계급의 적과 무장 투쟁을 하며 일했던 시기에 우리가 지녔던 것과 똑같은 긴장을 지니고 일해야 한다. 사회주의 건설의 영웅다운 시기가 도래했다.”

 

출처 : 러시아 혁명 1917-1938 p.247

 

1924년 레닌이 죽고 나서 볼셰비키는 스탈린과 트로츠키 그리고 카메네프, 지노비예프를 중심으로 권력투쟁이 있었는데, 여기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인물이 바로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즉 스탈린이 단행한 공업화는 볼셰비키들이 추구했던 1차적 과제를 수행함을 의미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기존에 실행하던 네프를 포기하고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29년에 추진했다. 공업화와 농업집산화가 이 과정에서 이루어졌고, 거기에 대한 쿨락이라 불리는 부농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1929년 말에 이르면 당은 농업을 집단화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해 12월에 스탈린이 선언했듯이, 쿨라크의 착취 경향은 더 이상 용납되지 않았다. 쿨라크는 계급으로서 박멸돼야만 했던 것이다.

 

그들의 저항 및 일탈로 1932년과 1933년 사이에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 북부 카프카스 그리고 볼가강 중류 지역에서 기근이 발생하여 최소 300~400만이 아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기근은 엄청나게 혹독한 유산을 남겼고, 볼셰비키 또한 이들을 막는데 여념이 없었지만, 그렇다 해서 그 기근 자체가 어느 한 집단이나 민족을 의도적으로 학살하겠다는 차원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었으며, 스탈린이 기근을 명령했다는 자료는 전혀 없다. 비록 공업화 과정에서 기근과 같은 혹독한 사태가 있었고, 공업화 자체도 여러 문제점들이 있긴 했자만 공업화의 성과물은 고무적인 것이었으며 최종적으로 성공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일부 반대가 있었지만, 그것이 대다수 민중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수만 명의 공산주의자와 도시 노동자들(주로 모크스바, 레닌그라드, 우크라이나의 대공장에서 모집된 그 유명한 이만오천인을 포함)이 콜호즈 조직자나 의장직을 맡기 위해 농촌에 긴급히 동원됐고, 1932년에 농가의 62%가 집단화됐으며, 그 수치는 1937년에 이르러 93%까지 상승했다. 집단화를 거치며 콜호즈 생산량에서 조달량은 곡물의 40%에 이르거나 예전에 농민들이 시장에 팔았던 비율의 두 배에서 세배에 달할 정도로 증가했다.

 

소련의 지도부는 공업화와 집단화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자화자찬이 포함된 주장을 했다. 적 계급은 박멸됐고, 실업은 사라졌다. 초등교육은 보편적으로 의무가 됐고, 성인 문해율은 90%까지 올랐다고 주장했다. 15개년 계획 동안 도시는 맹렬하게 성장했다. 옛 산업 중심지는 광대하게 확장됐고, 조용하던 지방 도시에 거대한 공장이 출현했으며, 새로운 공업·광업 지대가 소련 전체에서 출몰했다. 대규모 금속 공장과 기계 제작 공장이 건설 중이거나 이미 운영을 시작했다. 투르크시브 철도와 거대한 드니프로 수력발전 댐도 지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스탈린은 이른바 문화혁명을 추진했다. 물론 이 문화혁명은 1960년대 마오쩌둥이 주도한 문화혁명과는 비교적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책 저자의 주장이다. 문화혁명 기간 동안 대한 수의 노동자들이 산업 경영진으로 발탁됐고, 소비에트난 당의 관리가 되거나 중앙정부 및 노동조합 관료제에서 숙청당한 계급의 적자리에 임명됐으며, 1933년 말에 소련에서 지도 간부직이나 전문직으로 분류된 861,000명 중에서 1/6이 넘는 14만 명 이상이 5년 전만 하더라도 생산직 노동자였다. 15개년 계획 동안 사무직으로 옮겨간 총 노동자 수는 최소한 150만 명으로 변화가 있었다.

 

스탈린은 젊은 노동자와 공산주의자를 상위 교육기관에 보내는 집중적인 운동도 개시했다. 이는 대학과 기술학교에서 엄청난 격변을 일으켰으며, ‘부르주아교수들은 분개하게 했고, 15개년 계획이 지속되는 동안 사무직 종사자 가정 출신의 고등학교 졸업생은 고등교육을 받기 어렵게 됐다. 15개년 계획 동안 약 15만 명의 노동자와 공산주의자들이 상위 교육기관에 진학했고, 니키타 흐루쇼프,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알렉세이 코시긴과 같이 미래의 소련 지도부로 등극하게 되는 인물들이 바로 이 문화혁명의 수혜자였다. 즉 문화혁명은 교육혁명이라는 부분에서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문화 혁명 기간 소련의 도시 인구는 1929년 초의 2,900만 명에서 1933년 초에는 거의 4,000만 명으로 4년 간 38%나 급상승했으며, 모스크바의 인구는 1926년 말 200만 명을 넘었는데 1933년 초에는 370만 명으로 뛰어 올랐다

 

이러한 변화를 겪으며 소련은 1936년 새 헌법을 만들어 내어 헌법상 동등한 권리를 1918년보다 일정부분 더 많이 부여했다. 이로써 모든 소련 시민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고 사회주의에 어울리는 자유를 보장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물론 여기서 얘기하는 자유란 일반적인 자유민주주의적 개념하고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마치고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행하던 1936년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오시프 스탈린은 마지막 분기인 세 번째 혁명을 진행하는 데, 그게 바로 대숙청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 스탈린이 단행한 대숙청이 일방적인 무차별 학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대중 테러와도 차이점이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그는 프랑스 혁명 시기 로베스피에르가 단행했던 프랑스 혁명의 자코뱅 테러처럼, 이는 왕년의 혁명 지도자들을 주로 겨냥한 국가 테러였다고 주장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로베스피에르는 테르미도르로 본인 또한 테러의 희생자가 되었다면, 이오시프 스탈린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라고 저자는 얘기하고 있다. 또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스탈린이 예조프를 희생시켰다고 하지만, 그가 숙청이 통제를 벗어났다고 느꼈다든지 스스로가 위험에 처했다고 느꼈다든지 아니면 예조프를 단지 마키아벨리식 신중함 때문에 없애버렸다는 증거는 없다고 한다. 대숙청의 또다른 사실은 1980년대 소련의 문서고가 개방되면서 드러났다. 바로 일각에서 알려진 숙청의 희생자는 분명 억울한 사례도 있지만, 그 수치가 과장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저자의 책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그의 책을 인용하자면 실제 대숙청과 굴라그의 수치는 다음과 같다.

 

고위직에 있던 공산주의자만 숙청에 희생된 것은 아니다. 인텔리겐치아(부르주아인텔리겐치아와 1920년대 공산주의 인텔리겐치아, 특히 문화혁명 활동가 모두)도 크게 당했다. 모든 러시아의 혁명적 테러의 유력한 용의자였고, 1937년처럼 명확하게 용의자를 명시하지 않았을 때조차 유력한 용의자였던 계급의 적출신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유로든 공식 살생부에 이름을 한 번이라도 올린 사람은 결국 희생자가 됐다. 해외에 친척이 있거나 외국에 연줄이 있는 사람들이 특히 위험했다. 스탈린은 상습범, 말 도둑, 종교적 분파주의자를 포함한 수만 명의 쿨라크 출신과 범죄자를 체포해서 총살하거나 굴라그로 배내라는 특별 비밀 지령까지 내렸다. 게다가 현재 굴라그에 수감 중인 상습범 1만 명도 총살당했다. 서양 학자들은 소련 문서보관소가 개방된 후 그동안 어림짐작해온 대숙청의 전체 규모를 확인하게 됐다. NKVD 문서보관소에 따르면 굴라그 교정노동수용소의 수감사 수는 19371180만 명에서 193911일에는 130만 명으로, 2년간 50만명이나 증가했다. 굴라그 죄수의 40%반혁명범죄로 기소됐고, 22%사회적으로 해롭거나 위험한 분자로 분류됐으며, 나머지 대부분은 일반 범죄자였다. 그러나 그보다 많은 대숙청 희생자가 감옥에서 처형되어 굴라그까지 가지도 않았다. NKVD1937~1938년에 감옥에서 처형된 사람이 68만 명이 넘는다고 보고했다.”

 

출처 : 러시아 혁명 1917-1938 p.295

 

물론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숙청에는 분명 억울한 사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 서방에서 주장했던 수치는 반공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결합되면서 과장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 또한 스탈린의 대숙청도 프랑스 혁명에서 로베스피에르의 혁명적 테러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이해할 만한 부분이 있다. 어쨌든 이오시프 스탈린은 마지막 혁명인 대숙청을 1938년에 마무리 했고, 이로써 저자 쉴라 피츠패트릭이 주장한 러시아 혁명의 마지막 단계는 마무리 됐다.

 

5. 무엇이 서방의 다른 책들과 다른가?(장점과 한계)

 

서방의 대표적인 수정주의 학자 쉴라 피츠패트릭의 러시아 혁명은 기존에 나온 러시아 혁명 자료들과는 다른 접근법을 시도하여 러시아 혁명을 해석한 책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과 1938년 종결된 대숙청의 연결점을 여러 자료들을 통해 접근하여, 대숙청 또한 러시아 혁명의 일부분으로 생각하는 저자의 주장은 나름 신선했다. 한국 사람들이 스탈린의 대숙청을 접근하년 방식은 1차원적인 해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대숙청이 일어난 시대사적 맥락이나 환경 그리고 배경을 판단하기 보단 학살, 범죄, 스탈린 개인 독재의 강화라는 맥락으로만 판단하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단행한 대숙청을 학살, 범죄, 스탈린 개인 독재로만 해석하는 것은 비단 극우파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국내 시중에 많이 출판된 토니 클리프류의 국가자본주의론에 입각한 좌파들의 서적들 또한, 이런 기본적인 맥락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아마도 그것은 소련에서 도망 나온 사람들과의 인터뷰나 일부 출판되어 있는 자료만을 가지고 연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다보니 이런 토니클리프류 좌파들 또한 미국 주류학계의 핵심 주장에서 비슷한 견해를 보인 것이다.

 

물론 이 책의 저자 또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아닌 서방의 학자이기에, 레닌이나 스탈린에 대해 강력한 권위주의 혹은 공산당 사람으로만 대체하는 프롤레타리아트 관료 독재라는 점으로 해석한 다는 점에서 필자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리고 소련 자체가 국제 혁명을 신경쓰지 않았다는 식의 주장이나, 코민테른이 입장이 기존 러시아 제국의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주장에도 분명히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자의 진일보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저자는 오히려 스탈린에 대한 서방의 전체주의론적 접근을 일정부분 거부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대숙청의 과장된 기존의 반공 학설을 따르지 않았고, 그것을 혁명의 일부로 보았다는 점에서 필자는 쉴라 피츠패트릭의 진일보한 견해를 높게 평가해주고 싶다.

 

당연히 필자가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스탈린의 공업화와 문화혁명 그리고 대숙청 파트였다. 스탈린의 대숙청을 1794년 테르미도르 이전 로베스피에르의 혁명적 테러라는 맥락과 동일선상에서 본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저자의 주장에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스탈린의 대숙청을 프랑스 혁명의 자코뱅 테러와 같은 맥락에서 보는건 필자의 견해와 상당부분 일치한다. 그리고 문화혁명 관련한 것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이 자료는 소련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는데 책을 번역한 역자가 밝혔듯이, 일반 독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혁명에 관한 내용은 쉴라 피츠패트릭 책의 또 다른 장점이다.

 

6. 결론

 

필자가 읽은 이 책은 사회주의자가 쓴 책이 아니다. 호주인 역사학자가 쓴 러시아 혁명 개설서다. 비록 서방의 학자가 쓴 책이라는 일부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그 나름의 진일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읽어볼 가치가 높은 책이다. 저자가 말한 러시아 혁명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붙이자면 당시 볼셰비키가 추구했듯이, 공업화는 1차적으로 완수해야할 과제였다. 위에서 스탈린의 연설문을 인용했듯이, 1931년 스탈린은 10년 안에 그 격차를 따라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연설을 바탕으로 일각에서는 스탈린이 착취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지만, 전쟁의 위협은 그만큼 공업화의 필요성을 증명해 준다.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계기로 극동의 소련 안보를 위협했고, 1933년 독일에서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노골적으로 반볼셰비즘을 표방하며 사회주의에 대한 적대감을 거리낌 없이 발산했다. 스탈린의 연설은 예언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불과 2년 뒤인 19416월 히틀러의 군대는 소련을 침공했다. 이것은 스탈린의 예언적인 연설이 있은 지 10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따라서 1941년 히틀러의 소련 침공을 생각해봤을 때, 공업화를 통한 군사력 증강과 군대개편 밑 현대화는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 조치였던 것이다.

 

레닌 사후 소련에 등장한 스탈린 체제는 전쟁의 위협이라는 맥락에서도 볼 필요가 있다. 또한 1918년에 일어났던 적백내전에서의 경험은 전시의 위협과 그것이 가져올 파괴력과 경제적 타격이 무엇인지를 입증했다. 거기다 러시아는 그런 경제적 타격을 받고, 공업화라는 달성해야만할 과제까지 가지고 있었기에 이들이 쥐고 있던 부담과 그 어려움은 상당했다. 저자 또한 스탈린이 러시아를 그 후진성에서 끌어낸다는 목표가 얼마나 성취하기 어려웠는지를 책에서 밝히고 있다. 따라서 소련사를 볼 때, 그 맥락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책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자면, 몇몇 부분에서는 동의할 수 없는 관점들이 있었고, 사회주의자가 쓴 책이 아니라는 부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진일보한 성과물이다. 서방학계의 수정주의 학파가 어떤 성과를 학술적으로 만들어 냈는지를 알고 싶다면 읽어볼 가치가 매우 높다. 시대사적 내지는 환경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스탈린 혁명이 어떻게 해서 러시아 혁명이 일부분이었는지 알고 싶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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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자누스 2020-09-25 1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읽고 있는데 두 권을 비교해보면 흥미롭겠어요

제1권력 2 - 자본, 그들은 어떻게 혁명을 삼켜버렸는가 | 제1권력 2
히로세 다카시 (지은이),김소연 (옮긴이)프로메테우스 2011-11-04
원제 : ロマノフ家の黃金 ― ロシア大財閥の復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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