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210일 당시 일리노이 주 출신 민주당 연방 상원의원이었던 한 사람은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에 있는 구 주의회 의사당 앞에서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전에 뛰어든다는 출사표를 던졌다. 그는 이라크 전쟁의 신속한 종결, 에너지 자립 수준 확대, 국민건강 보험제 마련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20088월 말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결정됨에 따라 대선에 도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가 바로 미국 최초의 흑인 출신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사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이렇게 빨리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랬기에 그의 당선은 전 세계적으로도 쟁점이 되었다. 미국 최초로 흑인 대통령이 된 버락 오바마는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현재 미국의 제46대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2011NBC와의 인터뷰에서 케냐에 있는 오바마의 할머니가 오바마는 케냐에서 태어났고 자기가 직접 봤다고 한다.”라는 말을 했던 적이 있다. 이런 트럼프의 막말의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오바마는 케냐 출신의 흑인 아버지와 미국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하와이 주 호놀룰루에서 196184일 출생하였다. 오바마가 2살이던 1964년 그의 부모는 이혼했고, 어머니 던햄은 하와이에서 대학에 다니는 인도네시아인 유학생 롤로 수토로와 재혼하여 아들 오바마를 데리고 인도네시아로 이사를 갔다. 버락 오바마는 6살 때부터 10살 때까지 자카르타의 기독교계열 학교에 다녔다. 그가 10살이 되던 1971년 다시 하와이 홀놀루루로 돌아왔고, 1979년에는 하와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의 10대 시절은 순탄치 않았다. 오바마는 10대 시절 알콜, 마리화나, 코카인을 복용했던 적이 있었고, 그의 어머니는 1977년에 인류학 현지 조사차 다시 인도네시아로 떠났다. 물론 고등학생 시절 마약에 손댄 일에 대해 최대 도덕적 과오였다고 2008년 대통령 후보 공개 토론에서 말하긴 했지만 말이다. 하와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오바마는 1979년 로스엔젤레스의 옥시덴탈대학교에 입학했고, 2년 뒤인 1981년에는 뉴욕시의 콜롬비아대학교에 편입하여 국제관계를 주 전공으로 정치과학을 전공하고 1983년에 학사학위를 수여받았다.

 

뉴욕에서 4년을 보낸 뒤 오바마는 시카고로 가서 지역사회 개발 프로젝트에 감독으로 고용되었고, 19856월부터 19885월까지 대략 3년간 지역사회 조직가로 일했다. 1988년 말 오바마는 하버드 법학대학원에 입학했다. 1991년 하버드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법학박사 학위를 따고 졸업한 뒤 그는 시카고로 돌아갔다. 19924월부터 10월까지 오바마는 일리노이 주의 투표 프로젝트를 감독하여 크레인스 시카고 비즈니스에서는 오바마를 1993년 지도자가 될 “40세 이하 40가운데 한 사람으로 등재하였다. 12년 동안 오바마는 시카고 법학대학원에서 강사로 일했다. 또한 그는 1996년부터 2004년까지 대략 8년간 일리노이주 의원으로 활동했다. 1996년 일리노이 제13구에서 주 상원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윤리 및 의료 입법에서 민주 공화 양당의 지지를 받기도 하였다. 1998년 총선과 2002년 총선에서 일리노이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20031월 오바마는 일리노이 주 상원의 의료 및 인간서비스 위원회 의장의 되었다. 200411월에 오바마는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직에서 사임하고 미국 상원선거에 도전했으며 200514일 상원의원 취임선서를 하게되었다. 미국의 내셔널 저널지는 2007년의 선별된 득표를 평가한 자료를 근거로 그를 가장 자유주의적인상원의원으로 등재하였으며 2005년에 162006년에는 10위에 등재되었다. 아무튼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까지 명성을 쌓아가던 오바마는 2007210일 미국 대통령 선거출마를 발표하였고, 200811월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 출신인 공화당의 존 매케인을 누르고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2009120일 버락 오바마는 미국의 제44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으로 취임하자마자 전임 부시 대통령이 남겨놓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일에 골몰해야 했다. 건강 보험 개혁안 통과와 이라크 전쟁에서의 철수 그리고 멕시코 만 원유 유출 사고 등이 그러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워낙 보수적인 가치관을 고수한 나라다 보니 건강 보험 개혁안은 통과는 되었으나 실질적인 국민의료보험 같은 보편적인 의료보험제를 동원하지 못했다. 이것은 소위 자유주의 국가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자유주의적 모순일 것이다. 즉 이런 보편적 복지 부분에서만큼은 미국은 그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버리지 못했다. 2003년 미국의 일방적인 침략으로 시작된 이라크 전쟁은 2011년 말까지 철수하긴 했지만, 수렁에 빠진 상태에서의 철수였다. 결과적으로 그 이후 이라크에선 이라크 내전이 일어났다. 그리고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그는 공화당 보다 더 강경적인 대북강경정책으로 나갔고, 북조선을 국제적으로 고립시켰다.

 

그의 집권기 미국 사람들이 가장 잊지 못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파키스탄에서 전개되었던 넵튠 스피어 작전(Operation Netune Spear)일 것이다. 그 작전을 통하여 9.11 테러의 주범 오사마 빈라덴을 사살했다. 대통령 오바마는 빈라덴 사살 소식을 알리는 연설을 했고, 이는 미국사람들로 하여금 큰 결집력과 호소력을 가지게 했던 것 같다. 특히나 오사마 빈라덴이 죽었을 당시 미국 사람들은 아주 열정적으로 이를 환영했다. 아무튼 2012년 대선에도 출마를 하게된 오바마는 흑인과 히스패닉계 세력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다시 한번 재선할 수 있었다. 재선에 성공한 오바마는 4년간 더 미국의 대통령 자리를 보냈다. 2차 집권 시기 그는 2016년 한 때 미국과 전쟁을 치렀던 베트남을 방문하여 쌀국수를 먹어서 인증하기도 했었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트럼프에게 넘겨주면서, 버락 오바마는 정치 인생을 마쳤다.

 

미국의 반트럼프 측 사람들에게 있어서 버락 오바마는 한국으로 치자면 대략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현재 문재인 대통령 스텐스일 것이다. 소위 미국사회에서 보수라고 여겨지는 공화당하고 대척점에 선 인물이라는 점에서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현재 문재인 대통령이 가지고 있던 위치와 대략 비슷하다. 그리고 의료문제와 인종 문제를 공화당 측 인물들보다 더 신경을 썼다는 점에서 반공화당 성향을 지닌 미국인들에게는 그것이 매력 포인트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를 진보주의자로 묘사하는 건 올바른 평가라고 할 수 없다. 특히나 그의 외교정책을 보면 어떤 면에서는 미국 공화당 인사들보다 더 반북적인 스텐스를 취했고, 북조선을 더 고립시키는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강화했다. 대북경제제를 더욱 강화하여 북을 경제적으로 고립시켰다는 것이다. 즉 오바마라는 인물은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남한의 친일지배계급과 뜻을 같이했다. 그리고 위에서 상술한 넵튠 스피어 작전도 사실 따지고 보면 파키스탄이라는 나라의 주권을 무참히 짓밟았던 제국주의적인 처사였다. 또한 그들이 일방적으로 무력침공하여 일으켰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오바마는 2014년까지 미군 철수를 하기로 했으면서 궁극적으로 철수하지도 않았다. 그 결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정리하자면,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비록 성공시키진 못했으나 미국의 의료제도를 개혁하고자 했던 진보적인 스텐스를 가진 인물이다. 반면 공화당 입장에선 사회주의적 가치를 좀 우호적으로 보는 인물이었다. 그랬기에 그가 의료보험 제도를 얘기했을 때, 복지라는 개념을 부정하는 공화당 극우파 세력들은 그 정책을 강력히 부정했던 것이다. 필자 입장에서 본 그는 비록 미국 내에서 의료 보험을 생각했던 사람일지는 몰라도 국제적인 문제에 있어서 굉장히 제국주의적이고 대북강경주의적인 사람이다. 그랬기에 북한을 이명박 정부와 같이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면서 그들의 붕괴를 꽤하기도 했었다. 따라서 필자는 그를 진보주의자가 아닌 아들 부시나 트럼프와 다를 게 없는 제국주의자로 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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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0-11-07 2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바마가 젠틀하게 나가서 그렇지, 지금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국 강경 노선의 시작도 오바마 때부터였죠. 부드러운 이미지 속에 가려졌지만, 말씀하신대로 미국 패권주의자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NamGiKim 2020-11-07 22:43   좋아요 0 | URL
올리버 스톤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보면 어떤 네오콘 성향의 교수는 우익칼럼에 오바마시대에도 우리 미국의 정책은 변함이 없다 주장했다죠.
 
인천상륙작전 : 익스텐디드 에디션 일반판 (2disc)
이재한 감독, 리암 니슨 외 출연 / 아이브엔터테인먼트 / 2017년 8월
평점 :
품절


(이 영화리뷰는 유튜버 거의없다님의 영상 리뷰를 많이 참고했습니다. 또한 영화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어차피 영화가 SSibal 등급이라 스포당해도 상관없겠지만, 안본사람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미리 밝힙니다.)


1.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인기도


박근혜 정권 시기 소위 보수라 불리는 사람들에게 많은 호감을 받은 영화나 대중매체들이 등장했다. 한국 역사 최초로 가장 많은 관람객(무려 1,761만 명)을 기록했던 명량이나 국제시장 등은 대한민국 인구 최소 1/5은 관람했다. 그리고 2015년엔 남북한의 해상교전을 다룬 영화 연평해전이 개봉하여 새누리당(현재 국민의힘) 인사들이 단체관람을 하며 이른바 좌파 비난에 열을 올렸고, 총 604만 명이 관람했다.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던 2016년 미남 배우 송중기와 송혜교가 등장한 드라마 태양의 후예는 대통령 박근혜의 칭찬을 받아가며 최고 시청률 38.8%를 기록했다. 물론 이 영화는 지나치게 제국주의를 미화했다는 점에서 “과거 베트남을 침략하여 민간인 학살을 했던 군대를 미화했다”는 베트남 언론의 비판을 받기도 했었다. 

(인천상륙작전 포스터)


드라마 태양의 후예가 종영되고 나서 3개월 뒤, 굉장한 인기를 끌게 될 영화가 개봉했다. 그 영화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전세를 역전시켰던 작전인 인천상륙작전(Operation Chromite)를 배경으로 했고,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힘썼던 사람들을 잊지 말자는 차원에서 만들어졌다. 바로 이재한 감독의 영화 인천상륙작전((Film)Operation Chromite 2016)이다. 


인천상륙작전은 나오기 전부터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홍보됐다. 이정재와 진세연, 박철민 등과 같이 한국에서 잘나가는 배우들을 모조리 끌어모았고, 쉰들러리스트의 오스카 쉰들러와 나니아연대기에서 아슬란 목소리를 연기했던 배우 리암니슨을 맥아더로 얼굴 간판을 내세웠다. 공중파 방송을 통해 홍보된 인천상륙작전은 어버이 연합, 엄마부대와 같은 극우단체들의 단체관람이 이어졌고, 새누리당 의원들의 단체관람 그리고 영화 감상문 쓰기 대회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여름철 휴가를 타고 개봉한 이 영화는 대략 705만 명 이상의 관객수를 돌파했고, 8월 20일에 영화를 본 대통령 박근혜도 극찬에 나섰다.

(영화에 등장하는 맥아더)


그러나 공중파 방송을 통한 대대적인 홍보와 대통령의 칭찬, 그리고 일베와 디시인사이드 극우파들의 대대적인 홍보와 댓글 칭찬, 영화 호평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많은 평론가들에게 시대역행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현재도 일베와 극우들의 10점 테러가 이어지고 있는 네이버 영화 평에 있는 기자·평론가 평점은 10점 만점에 3.41점을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영화는 보편적인 영화 전문가들이 보기에도 문제가 매우 많은 작품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 것일까? 2016년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봤던 나는 영화를 보다 자세히 분석하기 위해 코로나 바이러스가 한참인 요즘 무삭제 판으로 이 영화를 끝까지 관람했다. 2016년에 대대적인 인기를 끌었던 이 영화가 무엇이 문제인지 한 번 얘기해보고자 한다.


2. 영화 연출의 엉성함


위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가 총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을 주제로 했다. 물론 이 영화는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는 것을 중심적으로 다루지 않고,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기 전까지의 첩보전을 소재로 했다. 따라서 인민군 치하의 인천에 침투한 스파이들이 긴장감 있는 첩보전을 치러 맥아더가 인천상륙에 성공할 수 있게 만드는 과정의 영화 내용의 핵심이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집단은 크게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유엔사령부의 명령을 받고 인천에 침투한 장학수(이정재)를 포함한 스파이들, 인천지구 방어병력을 책임지고 있는 림계진(이범수 역)과 인민군, 인천에서 몰래 유엔군과 한국군을 돕는 켈로(KLO)부대, 그리고 더글라스 맥아더와 유엔군 사령부다. 영화는 인민군이 인천 해안에 깔아놓은 기뢰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스파이들의 첩보전에 절반의 상영시간을 할애한다. 즉 기뢰를 찾으려는 장학수와 그가 스파이라는 의심을 버리지 못한 림계진의 심리전이 계속되고, 결국 정체가 탄로 나면서 총격전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총격전 부분에서 정말 말 그대로 너무 대충 만들었다. 좋은 영화 기술을 가지고 1인칭 FPS 게임이나 메탈슬러그를 만들었다. 주인공 장학수가 긴장감 있는 대치 끝에 림계진과 총격전에 돌입하는데 PPSH-41 기관단총을 들고 인민군들을 거의 몰살시키는 수준으로 사살한다. 마치 내가 콜오브듀티 캠페인 모드에서 대량으로 몰려오는 적군들을 기관단총으로 몰살시키듯이 말이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건 1%의 과장이 없는 주장이다. 조금 과장해서 비유하자면 플래시 게임 메탈슬러그(Metal Slug)에서 권총이나 기관총들고 모덴군을 살해하는 수준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영화상에선 권총이나 기관단총으로 탱크나 장갑차 그리고 항공기를 파괴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대치하고 있는 장학수와 림계진)


쉽게 말해 여기 등장하는 이른바 빨갱이들은 엄청 잘 죽는다. 유튜버 거의없다의 말처럼 총에 맞기도 전에 알아서 죽기도 하고, 허리 몇 번 돌리다 죽기도 하며, 권총으로 무장까지한 사랑이 아빠(추성훈)는 굳이 칼로 죽이려다 도리어 장학수에게 맞짱뜨다 발려서 죽기까지 한다. 사후경직으로 죽어가는 주인공이 방아쇠를 당겨 쏘면 한 2~3명 정도는 죽기가지 한다. 심지어 주인공들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마치 콜오브듀티를 하듯이 장갑차에 올라타 맥아더가 지휘하는 유엔군 군함도 파괴하지 못한 함포들을 모조리 파괴한다. 이처럼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주인공 혼자서 인천을 점령하는 수준으로 연출과 전개라는 점에서 매우 비판받아 마땅한 지점들을 셀 수 없을 만큼 가지고 있다.


3. 반공주의와 역사왜곡


인천상륙작전에서 필수적으로 비판할 지점이라면 역사왜곡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영화는 “빨갱이는 패륜아다!”, “빨갱이는 이념만 알아서 부모 형제도 모른다.”, “이들은 침략을 일으킨 사악한 무리다”와 같은 어버이 연합류의 반공 도그마에 사로잡혀 있다. 반공주의에 너무나 심취한 나머지 영화는 사실관계마저도 지키지 않는다. 즉 역사왜곡까지 저지른 것이다. 영화는 스파이로 위장하기 위해 장학수는 인천방어지구를 감시하러 가는 한 인민군 장교롤 살해하면시작한다. 거기서 장학수가 살해하게 되는 한 인민군 장교는 러시아어로 된 책을 읽고 있다. 그 책은 바로 ‘그들은 조국을 위하여 싸웠다’다. 


이 작품은 과거 소련시절 영화로도 만들었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소설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즉 소련의 대조국전쟁 시절 당시 전쟁이 인간과 전 인류 사회에 어떤 고통을 가져다주는지 잘 묘사했다. 그러나 영화는 이른바 “빨갱이는 죽이는 것도 죽는 것도 영웅적으로 왜곡한다”라는 이상한 사상을 주입시키기 위해서 그 작품이 시사하는 부분과 맥락은 전혀 얘기하지 않고, “그 책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로만 묘사한다. 즉 영화는 어떻게든 빨갱이는 나쁘다는 걸 얘기하기 위해서 온갖 무리수를 다 던진다. 

(기관단총을 쏘기전의 장학수)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 항상 잘죽는 빨갱이를 많이 언급했으니, 빨갱이 대장인 림계진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영화상에서 나오는 림계진은 말 그대로 악의화신이다. 그는 그 어떤 면에서도 무자비하고 잔인해야할 대상이다. 똘이장군에 나오는 붉은돼지와 조커의 DNA를 추가한 빨갱이 대장 림계진은 악당으로서 갖추어야할 모든 조건들을 다 가지고 있다. 유튜버 거의없다가 정리한 그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1. 악당처럼 웃기

2. 악당처럼 분노하기

3. 악당처럼 자기편 죽이기

4. 악당스럽게 죄없는 사람 방패로 이용하기

5. 주인공 놓치고 악당처럼 째려보기

6. 악당느낌나게 주인공과 서로 총겨누기

7. 악당스러운 안면부상

8. 악당답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하기


영화에 등장하는 악당 빨갱이 대장 림계진은 정말 이런 인물로 묘사된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이른바 빨갱이들은 천하의 악당이고 쌍놈들이어서 죄없는 사람들 막 죽인다. 진세연처럼 예쁜여자도 반동의 조카라고 막 주먹으로 때리며, 얼굴에 걸쭉한 침을 뱉어 모욕을 주기도 한다. 영화에 나오는 빨갱이들은 이러한 존재들이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영화에 나오는 빨갱이들은 말 그대로 패륜아들이다. 부모나 가족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이념을 위해선 죽이는 놈들 말이다. 

(인민재판 장면)


영화의 주인공인 장학수도 설정상 한때 공산주의자였다. 그러나 해방 후 자신의 아버지가 부르주아 반동으로 몰려 체포되었는데, 본인이 쏘지 못하고 자신의 친구가 쏘아 죽였다. 거기에 열받은 장학수는 아버지를 죽인 빨갱이들을 다 몰살시키고 혼자 월남했다는 게 영화의 설정이다.(근데 재밌는 건 장학수 엄마는 인천에서 국수집을 한다????) 즉 영화는 빨갱이들을 욕하기 위해 박정희 시절 반공영화에 등장하는 레파토리를 그대로 이용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인민재판도 정말 수준낮은 반공영화의 모습 그대로다. 사실 이런 레파토리에 더 가까운 대상은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이었다. 대통령 이승만은 빨갱이라면 부모 형제든 할거 없이 무조건 죽여야 한다 얘기한 적이 있고, 실제로 국민보도연맹의 희생자만 보더라도 대다수가 죄없는 민간인이었으며, 오히려 한국전쟁 초기 조선인민군은 민중들로부터 환영받았다. 또한 인민재판도 지주와 자본가, 친일파 그리고 한국정부의 군경과 그의 가족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영화 상에선 일반적인 민간인들이 인민군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반동으로 몰려 처형된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로 그런 행위를 한 것은 인민군이 아닌 국군과 우익 청년단이었다. 쉽게 말해 인천상륙작전은 이런 사실관계도 맥락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드라마 서울 1945나 영화 태백산맥을 보면 인민재판의 경우 어쨌든 인민의 직접 재판에 참여해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재판인 반면,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선 림계진이 자기가 화가나면 죽이고 싶은 놈 죽일 수 있는 장치가 바로 인민재판이다. 형식적인 재판절차가 전혀 없는 것은 물론, 죄목을 붙이는 것도 너무 단순해서 영화가 대중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훤히 보이는 정도다. 영화의 수준낮은 반공주의는 주인공 장학수가 이끄는 부대 대장 중 한사람인 남기성(박철민이 연기했고, 영화 설정상 대원들의 이름을 죽고난 뒤에 밝혀서 알기 힘든 수준이다. 근데 이거 고인드립 아닌가?)의 농담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는 인민군들의 군기를 잡을 때, “우리의 거X기는 우쪽에 있으면 안 되고, 무조건 좌쪽에 있어야 한다. 안 그러면 남조선 반동이다.”는 드립을 치기도 한다. 누군가는 그냥 웃으면서 넘어갈지도 모르지만, 이것도 반공의식 고취라는 차원에서 만들어진 장면이기에 당연히 비판할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 나온 트럭 추격씬)


영화는 제목을 인천상륙작전으로 다뤘지만 인천상륙작전 장면은 아주 잠깐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약간 오마쥬한 장면으로 대체해준다. 영화상에선 미군의 B-29 폭격기가 인천 앞바다 월미도를 포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월미도 포격은 인천상륙작전에 있어 엄청난 흑역사다. 왜냐하면 당시 미군이 월미도를 폭격했을 때, 그 폭격으로 죽은 이들 대다수가 민간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상에선 단순히 군사적인 시설만 폭격하는 것으로 나온다.


영화상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보이는 미화는 아마도 제국주의자 더글라스 맥아더에 대한 미화일 것이다. 작중에 나오는 더글라스 맥아더는 만주에 핵공격을 주장했던 인물이다. 그는 공산주의를 극도로 혐오하는 인물이었고, 말 그대로 한반도 이북과 만주에 핵공격이라는 전쟁범죄를 범하려고 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등장하는 맥아더는 이성주의와 휴머니즘 그리고 낭만적 감수성이 넘쳐흐르는 꼰대로 묘사된다. 하지만 맥아더는 절대로 그렇게 이상화할 인물이 아니다. 그는 미군정을 실시하여 한반도 분단에 책임이 있는 인물이고, 무엇보다 731부대의 대장 이시이 시로를 살려준 장본인이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공산주의 소탕을 위해선 핵무기까지 사용하려 했던 전쟁광이다. 또한 그의 아버지는 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당시 필리핀에서 무차별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던 범죄자다. 쉽게 말해 그는 미화할 만한 인물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의 투철한 반공의식을 보여주며 한국을 구한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다.

(인천상륙작전을 관람하러 온 박근혜)


마지막으로 이 파트에서 참으로 기가막힌 사실을 얘기하고자 한다. 영화상에서 악마로 묘사되는 림계진은 무삭제판에 따르면 엄청난 이력을 소유한 인물이다. 그는 소련 프룬제 대학에서 군사훈련 및 사상교육을 받았고,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이 있었던 88특별여단에서 복무한 인물이다. 즉 이말을 돌려말하면 그는 일제시대 당시 독립운동을 했던 독립운동가가 된다. 그러나 영화는 그가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이런 설정을 상세히 언급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극중에서의 설정이지만, 만약 이걸 상세히 들어다보면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독립운동가를 악마로 묘사한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4. 범죄조직 서북청년단 미화


지금까지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반공주의와 역사왜곡을 생각보다 길게 설명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단순히 역사왜곡을 저지른 것을 넘어서 일반적인 왜곡보다 더 심각한 역사왜곡을 저지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서북청년단을 아주 심각하게 미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에는 켈로(KLO)부대가 등장한다. 영화에서 애국자로 등장하는 켈로부대는 사실 해방 후 월남하여 온갖 테러와 범죄를 저지르고 다닌 서북청년단이 모여 만든 부대다. 또한 영화에서 등장하는 팔미도 등대 점령 장면도 실제 있었던 작전으로 서북청년단 출신인 부대원들이 했던 작전이다.

(서북청년회)


우선 서북청년단에 대해 간략히 얘기하겠다. 서북청년단은 해방 이후 북한에 인민민주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처벌받게 된 친일파들이나 친일지주들의 자식들이 월남하여 만든 단체다. 이들은 반소 반공이라는 기치아래 이승만의 비호를 받으며 온갖 테러와 범죄행위를 일삼았고, 특히나 이들은 제주도에서 빨갱이 소탕이라는 명분아래 광란의 학살극을 벌였다. 서북청년단들이 벌인 학살로 수만 명의 제주도민이 학살당했고, 이들은 한국전쟁 당시 군과 경찰에 편입되어 빨갱이 소탕이라는 이름하에 민간인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했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이 서북청년단을 미화하는 작품이라는 사실은 미국사를 전공한 뉴라이트 교수 이주영이 쓴 서북청년회라는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1945년 해방으로 한반도가 38도선으로 갈라질 당시 도쿄의 미극동사령부 정보담당 G-2는 서울에서 북한의 소련군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월남한 서북청년들을 활용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미극동사령부 주한연락사무소(Korea Liasion Office, KLO)가 설치되었는데, 겉으로는 정체를 위장하기 위해 정의사로 불렀다.”


출처 : 서북청년회 p.138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반격작전으로 1950년 9월 15일에 대규모 병력을 인천에 상륙시키려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상륙군의 진로를 유도하기 위해 인천 앞바다 팔미도 등대에 불을 켜는 일이 중요하게 떠올랐다. 그 중요한 임무를 서북청년들이 맡게 되었다. 미극동사령부는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하고, 도쿄 미극동사령부 G-2에 근무하던 정보통인 계인주 육군대령과 연정 해군 소령을 끌어들였다. 작전에는 미군장교 3명도 가담했다. KLO 부대에 속한 서북청년회 출신 특수임무대원들은 인천 앞바다의 영흥도를 전진기지로 삼아 덕적도, 팔미도 등지를 샅샅이 탐색했다. 계인주는 평북 선천 출신으로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주재 만주국 대사관의 무관으로 있었다. 해방이 되자 그는 서울에 와서 미군정 경찰에 들어가 동대문경찰서장 등을 지냈다. 대한민국이 건국되자 그는 다시 군대로 돌아왔다. 6.25전쟁이 일어난 뒤 그는 도쿄 미극동사령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육군본부 정보국 HID대장을 지낸 전력 때문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는 9월 15일 전날 밤, 팔미도 등대에 불을 켜기 위해 계인주 대령, 연정 해군소령, 최규봉 대위와 3명의 미군장교가 팔미도에 올랐다. 1950년 9월 15일 0시 등대에 불이 켜지는 것을 신호로 먼 바다에서 대기 중인 261척의 대선단이 인천 항구로 들어가 함포사격을 시작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계인주는 미국의 최고 훈장을 받았다.”


출처 : 서북청년회 p.139~140


팔미도 등대 점령은 극중에서 인천에 침투했던 장학수 부대원들과 KLO부대가 같이 하는 걸로 나온다. 즉 이주영의 책에 나온 것처럼,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범죄조직 서북청년단을 이른바 애국자로 묘사한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인천상륙작전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알 수 있다. 이런 영화를 공중파 방송에서 홍보했다는 것이 참으로 기가막힐 지경이다.


5. 인천상륙작전은 범죄집단을 미화한 영화다!

(역사왜곡 규탄집회)


지금까지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내가 이 영화를 체계적으로 비판하고자 한 이유는 이 영화가 너무나 심각한 수준으로 역사왜곡을 저지르고 있고, 절대로 미화해선 안 될 범죄조직을 영웅으로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영화가 서북청년단을 미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문제가 매우 많다. 나는 특히 이 부분이 영화의 가장 큰 오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서북청년단을 미화한 것을 더 강력히 지적하는 이유는 영화가 흥행했을 당시 반공주의와 시대역행적이라는 비판은 있었지만, 정작 서북청년단을 미화했다는 비판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점을 더 강력히 비판하고 싶다.


서북청년단을 미화한 영화 인천상륙작전이 관객수 700만을 만들었다는 건 한국 영화역사에서 엄청난 흑역사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악한 반공영화의 실체를 알고 비판의식을 기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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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독립기념관장으로 한국근현대사 인물 평전을 꾸준히 집필하고 계신 김삼웅 선생께서 이승만 평전을 출간했습니다. 많이들 사서 읽으시길 바랍니다.)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한때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정치가이자 선각자로 촉망받았던 이승만(1875~1965) 전 대통령. 그는 만민공동회 연사와 '제국신문' 주필을 지내고,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등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독립운동가이자 임시정부의 주요 인물이었던 심산 김창숙은 그를 '독부(獨夫)'라고 부르며 비판했다. 독부란 '민심을 잃어서 남의 도움을 받을 곳이 없게 된 외로운 남자'를 뜻한다.

단재 신채호도 이승만을 이완용과 송병준보다 더 큰 역적이라고 질타했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었기 때문이란다.

독립운동사와 친일반민족사 연구가인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저서 '이승만 평전: 권력의 화신, 두 얼굴의 기회주의자'에서 "이승만의 수많은 과오, 반민족·비민주적 행적은 그의 업적을 덮고도 남는다"고 비판한다.

독립운동단체를 분열시키고,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테러 행위라고 비난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에서 두 차례나 쫓겨나는 불명예를 얻었다는 것이다.

더불어 발췌 개헌과 사사오입 개헌 등으로 헌법과 민주주의를 짓밟고, 영구집권을 획책하며 3·15 부정선거를 자행하고, 이에 저항하는 시민과 학생들을 폭력으로 진압하면서 독재자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고 주장한다.

그뿐 아니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남침하자 혼자 도망친 뒤 한강 다리를 폭파해 서울시민을 인민군 치하에 남겨뒀고, 원조물자는 소수의 권력자와 기업인들에게만 넘겨줘 국가 경제와 국민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르게 했다고 덧붙인다.

1875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난 그는 1960년 4·19 혁명을 계기로 권좌에서 물러난 뒤 하와이로 출국해 5년 뒤인 1965년 7월 90세를 일기로 그곳 요양원에서 숨졌으며, 유해는 현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이번 책은 2012년 발간된 '독부 이승만 평전: 권력의 화신, 두 얼굴의 기회주의자'의 개정판으로, 그가 건국의 아버지·독립운동가로 추앙받지 못하고 독재자, 권력을 좇는 두 얼굴의 기회주의자라고 비판받는 이유를 일생의 발자취를 통해 밝힌다.

두레. 440쪽.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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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교양인에서 문제적 인간 시리즈 13번째 인물로 출간한 필립 쇼트의 마오쩌둥 평전 개정한 후기로 달린 글입니다. 필립 쇼트는 현재 마오쩌둥에 대한 서방학계의 평가를 분석했고, 주로 디쾨터를 비판이 주제로 삼은 듯 합니다. 디쾨터가 새로운 정보를 많이 참고한 건 사실이지만, 객관적인 학자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보기에, 균형있는 독서와 지식추구를 위해선 이 글을 읽어볼 가치가 높습니다.)


프랭크 디쾨터는 지난 10년간 마오쩌둥과 중국 혁명에 관한 저술로 이 분야에 큰 영향을 끼친 연구자이다. 그는 수정주의 패러다임이 제시하는 두 논지, 즉 장제스는 괜찮은 지도자였으나 부당하게 비방을 당했다는 것, 그리고 마오와 그가 세운 전제정은 근본적으로 끔찍한 것이었다는 논지를 옹호한다. 디쾨터는 처음부터 자신의 색깔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첫 번째 책은 《마오 이전의 중국: 개방의 시대》였고, 두 번째는 《해방의 비국: 중국 혁명의 역사》, 세 번째는 《마오의 대기근: 중국 참극의 역사》였다. 이 시리즈의 마지막 책, 《문화 대혁명: 중국 인민의 역사》는 2016년에 출판되었다. 디쾨터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장제스가 통치하던 시기의 중국은 ‘세계와 교류라는 측면에서 황금시대’였으며, 장제스가 마오의 군대에 패배한 것은 미국의 배신과 중국공산당에 대한 소련의 엄청난 원조가 주된 원인이었고 장제스 정부의 부정부패는 단지 미미한 원인이었다. 그리고 장제스 패배 이후 들어선 공산주의 체제 기반은 오직 “치밀하게 계산된 공포정치와 체계적인 폭력”뿐이었다. 마오가 집권한 후 첫 10년은 “20세기 역사에서 최악의 폭정의 하나였으며, 최소한 5백만 명 이상의 민간인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두 번째 10년은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 시기였는데, 이 시기는 이전 시기보다 훨씬 더 비참했으며 결국 대학살로 정점을 찍었다. 디쾨터가 묘사했듯이, 마오는 “생의 끝자락에서 사적인 원한을 갚으려는 노인”처럼 중국을 지옥불로 밀어 넣었다.


디쾨터는 《마오》의 두 저자가 빠졌던 함정에 빠지지는 않았으나, 기본적인 생각은 그들과 같았다. 디쾨터의 책 《해방의 비극》은 1948년 린뱌오가 지휘하는 부대가 창춘을 5개월 동안 포위 공격했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시작된다. 여기서 16만 명의 민간인이 아사한 것으로 디쾨터는 추정한다. 이 전투는 국공내전 중에 벌어진 가장 끔찍한 사건 가운데 하나였으며, 인민해방군 중령 장정룽이 쓴 《설백혈홍》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설백혈홍》은 이 작전에 대한 공식 역사 기록에 의문을 제기하는 책 중 하나인데, 1980년대 후반 중국에서 짧게 나타났던 개방의 시기에 출판되었다. 그 당시 린뱌오는 포위 작전 중에 굶주림에 시달리던 창춘 주민들의 도시 탈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도시를 지키는 국민당 군대의 식량 공급에 추가로 압력을 가하려는 조치였다. 장제스는 국민당 수비대의 항복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그 부대에 어떤 일이 닥쳐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내전은 가장 끔찍한 전쟁이다. 정의상 거의 민간인과 군인의 구분을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창춘에서 벌어진 참상 덕분에 베이징을 비롯한 다른 도시들은 저항하지 않고 공산당 군대에 항복했다. 항복한 다른 도시의 주민들이 생존했다는 사실이 과연 창춘에서 희생된 주민들의 고통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이와 비슷한 질문들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드레스덴이나 도쿄에 가해진 연합군의 소이탄 폭격, 그리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과 관련해 종종 제기된다. 이런 공격 덕분에 전쟁이 일찍 종결된 것이 아닐까? 아니면, 이런 공격은 불필요했던가?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마찬가지로, 창춘의 민간인 사망에 가장 책임이 큰 사람은 누구인가? 국민당 군대의 사병들을 먹이려고 민간인들을 굶긴 국민당 장군들인가? 항복을 금지한 장제스인가? 아니면, 민간인들이 도시를 떠나지 못하도록 한 공산당 군대인가? 양편 모두에게 어느 정도 책임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디쾨터는 이런 문제도, 맥락도 언급하지 않는다. 1920년대부터 중국은 계속해서 전쟁을 치렀다. 1930년대에 장제스는 일본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황하의 거대한 제방을 일부러 파괴했다. 그때 죽은 사람 수가 50만 명이 넘었으며 또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일본과 전쟁 기간 중에 사망한 중국인은 최대 2천만 명으로 추산된다. 일본군은 융단폭격을 퍼부었으며, 공산당 유격대가 시골에서 아무런 지원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모두 죽이고, 모두 불태우고, 모두 약탈한다”는 정책을 실시했다. 창춘에서 벌어진 잔학 행위는 단순히, 또는 주로, 인간 생명에 대한 마오의 무자비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여준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한 세기 전 아편전쟁과 함께 시작된 일련의 유혈 사태 가운데 한 차례의 참사였다. 더 긴 관점에서 본다면, 이 사건은 중국 역사를 통틀어 자주 일어난 내전, 왕조 간 전쟁, 반란들 가운데 한 차례의 참사였다고 할 수 있다.


이전에 닫혀 있던 중구 각 지방의 문서보관소들을 활용했다는 점에서 디쾨터의 연구 작업은 특히 가치가 있다. 그런 문서보관소에는 지방 관리들이 중앙에서 내려보낸 지령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중앙에서 내려온 지령문의 복사본도 보관되어 있는데, 해당 문건의 원본은 베이징 중앙 문서보관소에서 여전히 비공개 상태로 있다. 하지만 디쾨터가 발췌해 인용한 글은 대부분 길이가 매우 짧다. 따라서 《해방의 비극》과 《마오의 대기근》 내용 가운데 일부는 세심하게 읽어야 하며,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문장 하나하나를 자세히 분석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문건은 대부분 지방 관리들이 저지른 월권행위를 자세히 다루는데, 나중에 당이 조사하고 처벌한 것들이다. 하지만 이 점이 항상 불분명하게 서술되어 있다. 예를 들면, 《해방의 비극》에서 디쾨터는 안후이성 서부 지역에서 진행된 토지 개혁에 관해 덩샤오핑이 보고한 내용을 인용하는데, 지방의 당 지도부가 농민들이 고발한 지주와 그의 친척들을 사형시키는 경우가 끝도 없이 늘어나는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덩샤오핑이 이런 무차별적 사형 조치를 찬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난했다는 사실은 마지막 문장에 가서야 분명해진다.


당혹스러운 실수들도 보인다. 디쾨터는 1950년대 초 ‘진압 반혁명’ 운동 중에 마오쩌둥이 할당량을 지정하는 상황을 그리면서 “사형에 따른 사망률이 1천 명당 두 명에 도달하면, 그 다음에는 사람들에게 종신형을 선고해야 한다.”라는 마오의 말을 인용한다. 한편 중국인 역사가 양쿠이쑹은 동일한 문건을 이렇게 번역해 인용했다. “1천 명당 한 명의 비율을 초과해도 되지만 너무 많이 초과해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1천 명당 두 명이라는 비율이 새로운 목표로 채택되어서는 안 된다. 이 범죄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종신형에 처할 수 있다.” 이런 것을 괜한 트집 잡기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아무리 훌륭한 책이라도 사실 관계 서술에서 실수는 나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디쾨터가 저지른 실수들을 살펴보면 희한하게도 일관성이 있다. 그 실수들은 모두 마오와 동료 지도자들을 비난하는 디쾨터 자신의 논거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마오쩌둥과 그가 세운 체제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 형성되는 데 《마오의 대기근》보다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장룽과 핼리데이의 《마오》뿐이다. 《마오의 대기근》은 대규모 기아 사태의 참상, 농민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지방 관리들의 잔인함, 재난 소식이 외부로 나가지 못하게 막은 강력한 통제, 그리고 마오쩌둥과 류사오치, 저우언라이등 당 지도부가 이런 재난이 불러온 고통에 적절히 대처할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던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대기근 시기의 일상화된 참담함을 디쾨터는 훌륭하게 그려냈다. 이전 저술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도 인용문의 길이가 보통 대단히 짧았다. 이 결점은 그의 주요한 협력자인 저우쉰이 2012년에 펴낸 《중국의 대기근 1958~1962:문헌을 통해 본 역사》에서 일부 보충되었다. 여기서 저우쉰은 디쾨터가 지칭한 문건 가운데 상당수를 선택하여 긴 발췌문을 제공했다.


《마오의 대기근》의 가장 큰 문제점은 마오와 그의 동료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제대로 된 설명을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왜 그들은 대중 동원이 풍요의 시대를 이끌 것이라고 믿었을까? 그들은 실제로 그렇게 믿었다. 마오는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을 정도로 많은 곡물이 생산될 것이라고 믿었으며 그러고 나서도 엄청난 양의 곡물이 남을 것이라고 믿었다. 기근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처음 전해졌을 때, 그들은 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왜 저우언라이는 기근의 심각성이 확실해진 뒤에도 피해를 줄이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을까? 공산당 지도자들의 정책을 그저 “말도 안 되는 헛소리 망상에서 비롯된 변덕”이라고 일축하는 것은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찾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디쾨터는 공산당 지도자들이 “폭력을 찬미”했으며 “인간 생명에 대해 냉혹한 무관심”을 보였고, “사상자 수에 개의치 않고” 전쟁의 논리를 택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어느 정도 의심할 필요도 없이 옳다. 그러나 그가 이 책에서 제시한 사례 하나는 조금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 공산당 정치국의 원로 지도자였던 리셴넨은 온갖 고초를 겪은 강인한 인물이었다. 그는 대장정의 마지막 시기에 회족 기병대의 공격을 받아 자신이 이끌던 부대가 궤멸당하는 고초도 겪었다. 하지만 백만 명 이상이 굶어 죽은 허난성의 어느 현을 방문했을 때, 그는 슬픔이 북받쳐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내가 이끌던 서로군의 패배는 지극히 잔혹한 일이었지만 그때도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런 나도 광산현에서 일어난 참상을 보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디쾨터는 “이러한 죽음들이, 부실하게 집행된 어설픈 경제 계획의 의도치 않은 결과라는 견해가 널리 퍼져 있다.”라고 소개하면서 이 견해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디쾨터 자신이 인용한 문서 보관소의 문건들 대부분이 바로 이 견해가 정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그는 “사실상 농촌 지역은 마치 문둥병자들이 사는 곳처럼 외부와 격리되었다.” “마오 주석에게 전달되는 정보는 모든 단계에서 왜곡되었다.”라고 서술하였다. 이 두 가지 진술 모두 당시 기록으로 확인된다. 시간이 지나 결국 농촌의 실상이 밖으로 알려졌고, 당 중앙은 조사조를 파견했으며, 정책은 바뀌었다.


《마오의 대기근》에 따르면 이 비극의 책임은 모두 “공포와 폭력이 기반”인 공산주의 체제에 있다. 하지만 이 책에 기록된 것과 같은 참상과 관료들이 자행한 고문은, 19세기 중국에 왔던 서양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 중국의 봉건 왕조 시대에 작성된 형벌에 관한 문헌들, 국민당이 통치하던 시기의 기록에서도 발견된다. 시어도어 화이트(Theodore White)는 1941년부터 1943년 사이에 발생한 허난성 기근에 관해 썼다. 이때 농민이 약 3백만 명 정도 사망한 것으로 추정 되는데, 이것은 대약진 운동 시기에 허난성에서 발생한 사망자 수와 어느 정도 비슷하다. 이곳을 마오가 방문했을 때, 지역 국민당 간부들이 연회를 열어 대접해주었는데, “닭고기, 소고기, 남방개, 설당을 입힌 세 종류의 떡”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농촌 지역에 나가 보니 전혀 다른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고 한다.


“우리가 보는 앞에서 농민들이 죽어 가고 있었다. 길가에서, 산속에서, 기차역 옆에서, 자신의 진흙집에서 그리고 논밭에서 죽어 갔다. 그런 와중에 정부는 마지막까지 한 푼이라도 더 세금을 뜯어내려 했다. 어떤 항변도 통하지 않았다. 먹을 것이 없어 느릅나무 껍질을 벗겨 먹던 농민도 종자로 쓰려고 마지막까지 남겨놓았던 곡물을 세금징수원 사무실에 갖다 바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허난성 기근 소식을 충칭의 어느 신문사가 보도했을 때, 장제스 정부가 생각해낸 유일한 대응책은 해당 신문사에 3일간 업무 정지 명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2년 뒤 일본이 일명 ‘일호 작전’을 개시할 즈음에는 허난성 주민들이 장제스 정권을 그야말로 맹렬히 증오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외국 침략군에 맞서 중국인을 보호한다는 국민당 군대를 공격해 병사들의 무기와 식량을 탈취하고 장교들을 살해했다. 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수억 명에 이르는 중국인들이 디쾨터가 ‘해방의 비극’이라고 부르는 상황을 환영했던 것이다. 이전에 경험한 것에 비하면, 공산당 통치는 그리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중국인 소설가 류전윈은 전쟁 중 허난성에서 발생한 기근을 다룬 소설을 썼는데, 그 작품을 원작으로 삼아 에이드리언 브로디와 팀 로빈스가 출연한 영화가 만들어졌다. 류전윈은 기근을 겪고 살아남은 자신의 할머니에게 그 시절과 관련해 무엇을 기억하는지 물었다. 할머니는 자세한 답을 주지 않았다. “그해에 뭐 특별한 게 있었나? 사람들은 언제나 굶어 죽었는걸.” 공산당이 집권하기 전, 장제스가 중국을 통치하던 시기를 ‘황금기’라 부르기도 하는데 ‘황금기’에 관해서는 이쯤에서 그만 살펴보기로 한다.


대약진 운동 기간 중 공산당 간부들은 주민들에게 야만적인 처벌을 가했다. 하지만 그들이 새롭게 무엇인가를 발명해낸 것은 아니다. 시체 먹기, 인육을 먹는 풍습, 여자와 어린아이를 내다 파는 행위, 이 모든 것이 다 예전부터 있었다. 물론 그런 일들이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 지속되었다는 사실은 마오 정권의 엄청난 수치다. 그러나 마치 공산당이 그런 행위들을 창조한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더없이 어리석은 일이다.


디쾨터가 보기에 마오쩌둥은 겉으로 “국민의 복지를 걱정하는 자애로운 지도자”인 척하는 폭군이었으며 그러는 동안 “중국은 지옥으로 떨어졌다.” 디쾨터는 1959년 3월 25일 상하이에서 마오가 최고위급 지도자들과 회의하는 도중에 한 발언이 명백한 증거라고 보았다. 회의에서 마오는 먼저 곡물 생산량이 지난 1년 동안 “엄청나게 증가했음”을 확인한 다음. 동료들에게 이 풍성한 수확량의 1/3을 징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전까지 1/4을 징발하던 것보다 늘린 것이다. 그러고 나서 마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굶어 죽는다. 인민 절반이 배를 채울 수 있도록 나머지 절반은 죽도록 놔두는 것이 낫다.” 디쾨터는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마오가 대약진운동이 확실히 완수될 수 있도록 중국 인구의 절반을 굶어 죽게 내버려둘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당시에 마오의 발언을 모두 정확히 기록한 문건을 보지 않더라도, 디쾨터의 주장을 의심할 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먼저, 만일 모든 지도자들이 풍성한 수확을 확신했다면 왜 마오나 다른 누군가가 광범위한 기근이 발생할지 모른다고 예상했던 것일까? 다음으로, 마오의 발언이 포함된 원래 문건의 일부를 저우쉰이 자신의 책에 실었는데, 그것을 보면 디쾨터의 주장과 달리 마오의 발언은 농업에 관한 연설이 아니라 공업 관련 토론 도중에 갑자기 나온 것이었다. 저우쉰이 인용한 바에 따르면, 마오는 공업 투자는 반드시 목표를 정해야 하고 정밀해야 한다면서 그 이유는 “자원을 고루 배분하면 대약진운동을 그르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에 마오는 비교 삼아 예를 들었는데, 그 예가 바로 기근 때 다른 사람들이 살아남으려면 “절반의 사람들이 죽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오의 정신은 종종 옆길로 샜다. 불합리한 추론을 낳을 수도 있는 문제의 발언을 논리적으로 설명해보면, 마오는 공업 프로젝트 가운데 어떤 것들은 지원을 끊어야 다른 사업이 진행될 수 있다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이전에 있었던 곡물 수확에 관한 토론에서 이런 비유적 표현을 끌어온 것이었다. 지금 우리는 바로 이것이 실제로 마오가 뜻한 바였음을 알고 있다.


디쾨터의 책이 나온 이후 당시의 토론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정확한 중국어 기록 전문이 입수되었고, 그 기록을 보면 마오는 위의 발언에 앞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계획을 완수하기를 바란다면 프로젝트의 수를 크게 줄여야 한다. 주요 프로젝트가 1,078개가 있는데 이를 500개로 단호히 줄여야 한다.” 흥미롭게도 이 구절은 디쾨터와 저우쉰의 서술에서 누락되어 있다. 더 면밀히 살펴보면, 마오가 당시 곡물 징발량을 대폭 늘리라고 지시했다는 디쾨터의 주장 역시 근거가 없다. 당시 겨울에서 초봄까지 다른 모든 기록된 마오의 발언들을 살펴보면, 농민에게 가하는 압력을 ‘덜고’ 불필요한 고통을 ‘피하는’것이 중요하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전년도 11월에 마오는 대중 동원이 절제되지 않으면 “반드시 중국 인구의 절반이 죽을 것”이라면서 위의 발언과 놀랍도록 비슷한 표현을 써서 경고했다. 이 경고를 했던 연설에서 마오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망자가 안 생기도록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라”


상하이에서 마오가 한 말이 곧바로 유출되면서 그 내용을 알게 된 일부 성 지도자들과 기층 간부들이 어떤 투쟁에서든 사망자가 생기게 마련이며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마오의 발언 내용은 원래 ‘극비’로 지정되어 30여 명의 회의 참석자에게 문건의 형태로 배포되었는데 해당 문건에는 “회의가 끝난 뒤 반환할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한편 당시에 마오가 어처구니없는 자기기만에 빠져 있었으며, 마오 자신이 ‘우경 기회주의’를 통렬히 비판한 것이 뒤이어 발생한 도를 넘는 행위들과 무관하다고 착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오가 대규모 기아 사태의 가능성을 용인하거나 환영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아로 가장 큰 고통을 겪은 지역에서 나온 증거를 포함해 입수 가능한 모든 증거들은 이와 정반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제까지 나는 장룽 핼리데이의 《마오》와 프랑크 디쾨터의 저술들, 특히 《마오의 대기근》에 대해 상당히 길게 서술했다. 그 이유는 이 책들이 이례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어쩌면 두 저술을 하나로 묶어서 다루는 것은 부당할지 모르겠다. 디쾨터의 저술에는 새로운 정보가 많이 담겼으나, 《마오》는 근본적으로 반론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책은 공통점이 있다. 두 책 모두 서술 대상으로 삼은 시대에 대한 균형 잡힌 해설을 제공하기보다, 그 시대를 기소하는 데 필요한 논지를 제공하기 위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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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빅터 피게로아가 쓴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아옌데의 생애를 정리한 인물 평전으로 소위 민주적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살바도르 아옌데의 혁명적 삶을 총체적으로 다루는 책이었다. 3번의 대통령 선거 도전 끝에 1970년 칠레의 대통령이 된 아옌데는 세계최초로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당선된 사회주의자 대통령이었다.


그는 과거 쿠바의 카스트로와 미래의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가 그랬듯이 억압받고 착취받던 인민들을 위해 미제가 독점하고 있던 여러 생산수단들을 국유화하고, 무상의료, 무상교육, 무상복지라는 인류가 추구해야할 도덕적 보편 가치들을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아옌데가 당선되기가 무섭게 미제는 사회주의 국가가 새롭게 탄생하기가 무섭게 그 나라를 망치기 위해 CIA를 통해 정치공작과 흑색선전을 일삼았다.


칠레의 슈나이더 장군을 암살하고, 반동세력들에게 자금을 갖다 바치고, 칠레 곳곳에서 상점 방화, 주유소 파괴 등의 온갖 테러행위를 일삼았다. 이것은 베트남 전쟁에서 지고 있던 미제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계획하고 저지른 테러 행위였다. 경제제재는 기본이고, 분유가 없어 고통받던 칠레의 유아와 어린이들에게 더 고통을 주기 위해 미국은 분유 수입을 끊어버리고, 어용노조를 만들어 반혁명 시위를 주도했다.


그래도 1972년 아옌데의 지지율이 오르자, 미국은 사회주의 정권 전복을 위한 쿠데타를 계획한다. 그렇게 해서 1973년 9월 11일 미제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 반혁명 반동 세력들은 수도 산티아고에 있는 아옌데의 대통령궁을 탱크로 포위하고 전투기로 폭격한 뒤, 교전에 돌입하여 AK-47를 들고 저항하던 아옌데를 사살했다. 아옌데가 죽은 뒤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의 수장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칠레의 대통령이 됐다. 대통령이 된 피노체트는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으로 당일 3200명을 경기장에서 학살했고, 그 이후 빨갱이 색출하에 수만 명을 학살했다. 칠레의 산과 바다는 사회주의자들과 죄없는 시민들의 피로 물들었다.


더 나아가 피노체트는 세계 최초로 시도해보지 않은 이데올로기를 실행했다. 바로 신자유주의다. 그는 신자유주의를 칠레에 적용하여 부익부 빈익빈이 극대화된 사회를 만들었다. 일각에서 말하는 것 처럼 지표적으로야 경제는 성장했다. 대신 일반적인 인민대중의 삶은 더 나락으로 떨어졌고, 소수의 자본가들이 독점했다. 피노체트가 집권하며 과거 사회주의에 대한 기억과 역사는 지워져야할 대상이었다. 그러나 민중가요 <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와 <벤세레모스(우리는 승리하리다!)>처럼 칠레 민중은 파시즘 정권에 맞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투쟁했고, 2019년에도 대대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세계를 강타하는 중이던 2020년 10월 피노체트 헌법을 궁극적으로 폐지했다. 아옌데가 죽기전 했던 연설에서 처럼 그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이 올해 '피노체트 헌법 폐지'를 통해 증명되었다.


최근에 코로나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칠레 뿐만 아니라 볼리비아, 콜롬비아 등과 같은 중남미 국가에서 진보세력들이 지지를 받고 있다. 사회주의에 대한 꿈과 희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포악한 군사독재정권 자본주의 체제 그리고 미제국주의에 맞서 싸우고 있는 중남미 인민들이 꿈꾸는 사회처럼 말이다 사회주의와 단결한 민중은 승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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