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인 올해는 민족사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엄청난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초래했던 이 전쟁은 사실상 휴전으로 끝난 전쟁으로, 한반도의 분단정부가 그대로 유지되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대중적인 인식이나 국가적인 인식은 상당히 보수적이고 반공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느낌이다. 한국사회에서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지원을 받아 무력남침을 개시한 전쟁이라는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더 나아가 자본주의적 경제원리가 가미된 논리로 바라보기도 한다. 2013년 한국전쟁 휴전협정 60주년을 맞아 워싱턴 한국전쟁 메모리얼(Korean War Memorial)에서 연설을 했던 버락 오바마는 한국전쟁은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승리라고 했는데, 이것은 비단 버락 오바마와 미국의 반공주의자들과 자칭 민주당 계열 인사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보수 진보 할 거 없이 공유하고 있는 인식이다.

 

이와 같은 버락 오바마의 발언은 대체로 민주주의 국가 남한은 세계 경제력 10위의 강대국에 올랐지만, 전체주의 국가 북한은 사회주의의 실패로 인하여 최빈국이자 최악의 독재국가로 전락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굉장히 반북반공적인 동시에 서구 오리엔탈리즘적인 요소도 가미되어 있다. 즉 냉전 시기 공산주의 러시아를 바라보던 미국의 편협한 시각과 인식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관점은 많은 부분에서 과오를 범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현재 미국과 한국이 공유하고 있는 이런 반공주의적 관점이 1990년대 미국을 향해 대화와 수교를 요구했던 김일성의 시도를 무시하여 한반도의 긴장관계를 초래했고, 1994년 전쟁 위기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미국의 네오콘 대통령 조지 부시는 이런 인식과 관점을 20019.11 테러 이후 이른바 악의 축(Axis of Evil)’이라는 발언을 통해 자본주의적 우월주의에 심취한 사상과 생각이 점철된 폭력성을 아주 극명하게 드러냈다. 비록 핵무기를 가지고 있던 북한을 공격하지 않았지만, 그 시기 미국이 침공했던 이라크를 생각해보면 이런 편협한 관점이 얼마나 위험하고 오만한 관점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다.

 

한국전쟁이라는 주제는 대체로 반공주의적인 시각에서 인식되어 왔다. 대중의 주류적 흐름 또한 대한민국 피해자론을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한국전쟁은 한국 사회에서 우파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는 주제중 하나고, 다른 한편에선 역사를 인식하는 관점에 차질이 생기는데 악영향을 미치기도 하는 주제다. 사실 한국전쟁 자체를 대한민국과 유엔의 승리 혹은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과 스탈린은 나쁜 놈과 같은 그들의 입장에서 기록하고 싶어 하는 인식과 관점은 역사적으로 그다지 정확한 관점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전쟁의 민중적 구도를 본다면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35년간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38선을 기점으로 남북 분단되었다. 일제 패망 이후 패망을 준비했던 여운형은 자신의 조직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족시켜 좌우연합과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이것을 강제로 해산시켜 점령군을 자칭했던 집단은 바로 스탈린의 소련이 아니라 트루먼의 미국이었다. 여기서부터 남북분단의 구도가 명확해졌다. 미국은 친일경찰을 등용했고, 그 친일경찰과 친일인사들은 친미주의자인 이승만을 등에 엎고 분단정부 수립에 나섰다. 이들의 입장을 대변이라도 한 듯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1947년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선언하여 그리스 내전에 개입하여 방화와 학살을 저질렀다. 따라서 트루먼 독트린은 제국주의 국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신들의 패권을 확대하기 위해 민주주의와 인권을 내세운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제국주의 합리화 수단이었다. 결국 이러한 움직임에 따라 한반도에선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과 김구의 남북협상 등이 실패로 끝났고, 대구와 제주 그리고 여순에서 미군정이 지휘하는 광란의 학살극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남북의 통일과 사회주의 그리고 항쟁들의 주체는 바로 남한 민중이었다. 그에 비해 반공을 내세우는 집단은 미제국주의와 이승만을 지원하는 지배계층이었다. 즉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가 주장하듯이 한국전쟁은 그 이전부터 이런 내전적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민족해방전쟁적 성격을 아주 명확하게 가지고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의 고위직을 차지했던 인물들 대다수를 보면 그 뿌리가 독립운동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친일에 있었다. 다부동 전투의 영웅인 백선엽부터 해서 채병덕, 정일권 등 이들 대다수는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시기 일본군 장교 출신들이었다. 결국 한국군은 미제국주의에 지원을 받은 구일본군 장교들이 지휘하는 군대였던 것이다.

 

한국전쟁 시기 한국군이 했던 일들을 보면 매우 끔찍하고 잔인한 일들이었다. 무엇보다 전쟁 초기 이승만 정권이 계획적으로 저지른 국민보도연맹 학살은 한국군과 경찰 그리고 우익 청년단이 저지른 것이었다. 이들의 학살로 최소 30만 이상의 민간인이 집단 학살당했다. 많게는 100만 이상도 잡는다. 또한 9.28 서울 수복 이후 한국군이 저지른 일 또한 부역자 색출이라는 명분아래 자행한 민간인 학살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학살은 38선 돌파 이후 북한지역에 들어가서도 계속됐다. 대표적으로 신천양민학살사건은 한국군과 우익 청년단들이 저지른 끔찍한 학살극이었다.

 

한국전쟁 초기 미국의 해리 트루먼이 즉각적으로 군사개입하며 끌어들인 유엔군은 말 그대로 제국주의 국가 미국이 소련과의 경쟁에서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끌어들인 제국주의 군대다. 이것은 마치 베트남 전쟁 때 미국이 끌어들인 한국군, 호주군, 태국군 등이 제국주의 국가의 이익에 부합하는 군대였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한 유엔군의 핵심인 미군도 무수히 많은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융단폭격이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이 일본을 폭격하기 위해 사용한 폭탄이 20만 톤 안팎이었는데, 한국전쟁 3년 동안 한반도에 투하한 폭탄의 량은 63만 톤이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네이팜 폭탄을 추가하면 665000톤이 된다. 이런 무차별 폭격으로 최소 100만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생각해보았을 때, 한국전쟁은 미제국주의와 이승만 세력들의 광적인 학살극이었고, 민중은 이에 맞서 싸우는 구도였다. 물론 한국전쟁을 먼저 시작한 것은 38선 전역에서 공격을 개시한 북한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전쟁의 성격을 판가름하는 핵심적인 문제가 아니라 부차적인 사실관계일 뿐이다. 마치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썸터 요새를 누가먼저 포격했느냐가 중요하지 않듯이 말이다. 한국전쟁은 그 자체만으로 미제국주의에 맞선 전민중적 항쟁이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가 주장하듯이 이와같은 역사적 맥락에서 보았을 때 한국전쟁은 미제국주의와 이승만 친일파 결집세력에 맞선 민족해방전쟁이었던 것이다.

 

1112일은 서방에서 베테랑 데이다. 미국이나 영국 캐나다 등에선 이날에 자국의 전쟁영웅들과 군인들을 추모하고 기억하고자 한다. 이러한 흐름에 입어 올해 한국에서도 한국전쟁 당시 참전했던 유엔군들을 기억하는 영상들을 만들어냈다. 이런 영상을 본 필자는 정말이지 불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런 행위 자체가 한국전쟁에 대한 총체적 무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주4.3을 항쟁으로 추모했던 대통령 문재인 또한 한국전쟁날이나 이런 베테랑 날이 되면 이승만과 우익 그리고 미제국주의 군대에 의해 학살당했던 이들은 금방 잊은 채, 반동적 군대를 추모하고 치켜세우기 바쁘다. 물론 대한민국 현실정치라는 맥락에선 이해가 가능한 일일지라도, 상당히 이율배반적 행위라고 본다. 왜냐하면 문재인 대통령이 추모한 보도연맹 희생자들은 한국군에 의해 생긴 것이었고, 그런 학살을 저지른 한국군을 다른날에 동시에 추모하기 때문이다. 즉 한국전쟁을 단순히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으로 볼 때 생기는 모순인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한국전쟁이라는 주제만 나오면 진보와 보수 할 거 없이 그저 반공주의자가 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보았을 때, 이러한 행위는 베트남 전쟁 시기 미제국주의의 꼭두각시였던 남베트남을 추모하는 일부 베트남계 미국인들의 행위와 크게 다를것이 없다. 이걸 그대로 베트남 전쟁에 대입하자면 우리는 베트남을 분단시킨 미국을 자유의 용사로 내세우는 것이고, 미국이 내세운 괴뢰 앞잡이 고딘디엠(응오딘지엠)이 최고사령관으로 있는 괴뢰군대를 자유와 민주라는 수식어로 합리화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한국전쟁에서 우리국군혹은 자유를 위해 희생한 유엔 참전용사따위의 소리는 이처럼 어이없고 몰역사적인 시각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항상 놓치거나 무시하는 불편한 진실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Redman 2020-11-29 0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전쟁에 민족해방적 성격과 미제와 이승만 정부에 맞서는 민중의 구도로만 보는 것 역시 한국전쟁을 지나치게 관념화하고 단순화한 이해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한국전쟁 당시 북한인민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있었으며, 그 수는 (물론 미군과 국군에 의한 수보다는 적지만) 결코 무시할만한 숫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좌익에 의한 민간인 학살도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저는 반공주의를 극도로 싫어하는 한 명이기에, 다시금 유치한 ‘그래도 미군과 국군이 더 낫지‘라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북한과 좌익 세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간과해서는 한국전쟁 기 민간인 학살과 한국전쟁의 성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을로 간 한국전쟁>(박찬승)을 읽으면, 마을과 마을 사이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민간인 상호 간의 학살이 일어난 원인과 유형은 뚜렷하게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했습니다. 전쟁을 계기로 이전부터 서로에 가졌던 분노가 폭발했다 정도만 얘기할 수 있죠.

또한 브루스 커밍스의 연구는 당연히 매우 중요하지만, 현재로서는 박명림과 장병준 등 여러 학자들에 의해 이미 논파당한지 오래된 견해들이 많습니다. 한국전쟁의 성격 같은 경우가 그렇죠. 장병준의 <한국전쟁>이나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기원과 발발> 등을 읽으면, 민족해방적 성격의 전쟁이라고는 평가할 수 없는 지점이 많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이미 알고 계시다면 죄송합니다)

* 저는 한국전쟁 당시 일어난 미군과 국군, 이승만 정부가 행한 그 모든 범죄를 미화할 마음 없습니다. 오히려 뼛속으로 증오합니다.

NamGiKim 2020-11-29 00:39   좋아요 1 | URL
저는 사회주의자입니다. 사회주의자이기에 한국전쟁이라는 구도를 당연히 민족해방전쟁이라는 맥락에서 봅니다. 베트남 전쟁도 마찬가지고요. 한국전쟁 시기 좌익에 의한 학살 분명히 있었죠. 그걸 전면부정하려고 쓴 글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힙니다.

김민우님께서 글에서 잘 밝히고 있기에 민우님이 그렇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좌익의 학살은 상대적으로 우익들과 한국전쟁을 논하는데 있어 국가적으로 많이 과장되어 왔고, 반공주의의 명분이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전쟁이라는게 특수한 상황이기에 일일이 학살의 주체를 따지는건 매우 힘든일입니다. 이건 한국전쟁 이후 일어난 베트남 전쟁도 그렇죠. 다만 한국전쟁도 베트남 전쟁도 좌익세력의 경우 우익에 비해 숫자가 적었던 것도 있고 최소한 사람을 가려가며 처형을 했었죠.

정병준 교수나 박명림 교수의 경우 냉전의 종식 이후 1990년대 학술적인 연구 성과를 만들어냈습니다. 브루스 커밍스에 대한 주장을 반박하기도 했죠. 그러나 다른 측면에선 제가 본문에서 얘기한 부차적인 측면을 더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갔습니다. 또한 그 자료들은 보리스 옐친시기에 공개된 자료들이라 자료 취사선택이라는 부분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봅니다. 그리고 그 두분의 주장이 수정주의적 학자 브루스 커밍스가 주장한 그 구도(친일파vs독립운동가와 같은 모순점) 자체에 대한 반박이라 보진 않습니다.

일단 전 분단 책임에 있어서 미국이 가장 크다고 보고, 사회주의적 견해를 지지하기 때문에 마르크스-레닌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고자 합니다.

주장과 생각은 다르지만 충분히 합리적인 댓글이라 생각해서 긴 답변 남깁니다. 이런식의 답변도 좋습니다.ㅎㅎ 소개해준 두권의 책은 안읽어봤습니다. 조만간 읽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dman 2020-11-29 09:37   좋아요 1 | URL
NamGiKim님의 견해 잘 정말 들었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저도 사회주의자의 관점에서 한국전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던 좋은 글이었습니다.

ps. 댓글에선 적는 걸 깜빡 했지만, 저도 전쟁 범죄에 대한 사죄와 인정 없는 추모는 이율배반적이라는 데에 적극 동감합니다.

NamGiKim 2020-11-29 09:40   좋아요 1 | URL
사회주의자가 다 이렇게 보는건 아니지만요. 저도 김민우님의 의견을 잘 들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뿐만 아니라 그 학살이 반복된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도 반성해야겠죠.^^
 

조선의 합병과 무단통치

(1910년 경복궁 근정전에 걸린 일장기)

 

19세기 근대화 성공 이후 일본의 산업은 발전했다일본의 산업화는 청일전쟁을 계기로 비약적 발전을 이룩했고전쟁으로 인한 대규모 군수 수요가 창출되었다또한 전쟁 승리의 대가로 청으로부터 받은 대규모 배상금을 산업자본으로 활용하기도 했다특히나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의 경제는 중공업 부문에 있어서 발전이 두드러졌다일본의 대표적인 제철소였던 야하타 제철소는 1906년 국내 철강 생산의 90%를 차지했다. 1907년엔 민간 제철소인 니혼 제철소도 건설되었다그 외에도 조선업과 공작기계 생산도 증가했다.

 

이와 동시에 일본은 다른 나라를 합병하고자 했다그 나라가 바로 고종황제가 다스리는 조선이었다사실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을 치렀던 일본이 이 강대국들과 전쟁을 벌인 이유는 명확했다바로 그들(청나라러시아일본사이에 있는 국가 조선을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독점하기 위해서였다러일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정치적 독점권을 틀어쥐었다그들은 먼저 외무·내무 그리고 재무에 고문정치를 시도했다그리고 1905년 고종황제에게 어떠한 조약을 체결하게 했다그 조약이 바로 을사조약(을사늑약이라고도 한다)이다.

(일본의 가츠라와 미국의 테프트, 당시 제국주의 국가였던 일본과 미국은 서로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에 따라 타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가속화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7월 당시 제국주의 국가였던 미국과 비밀협약을 맺었었다그 협약은 가츠라 테프트 밀약으로 미국이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일본의 한국 보호권 확립을 찬성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두 제국주의 국가끼리 양국의 식민지배에 대해 합의를 본 것이다이렇게 합의를 본 일본은 대한제국의 내부대신인 이완용과 이지용 등의 을사오적을 매수하여 고종황제를 협박했고반대하는 국민을 총칼로 제압하면서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했다이렇게 하여 일본은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권을 사실상 확보하게 된 것이다.

(헤이그 특사를 보도한 만국평화회의 담보)

 

을사조약에 따라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하는 통감부를 서울에 두었다이것은 대한제국의 외교사무를 관리한다는 구실이었지만실제로는 그 안에 경무부·농상공부·총무부 등을 둠으로써조선의 내정 전체를 관장한 것이나 다르지 않았다비록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지만이러한 일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조선의 황실은 미국 등지와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 등에 밀사를 보냈다그러나 이것은 별로 성과를 내지 못했다일단 미국부터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원조하는 처지였고평화화의 또한 이상설이준 등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원조하는 영국 등의 방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거기다 헤이그 밀사사건이 있자 일본은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신 병약한 순종을 즉위시켰으며조선으로 하여금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했다.

(1907년 당시 일본에 맞서 들고 일어난 조선의 의병들)


고종황제의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 등이 있자 한반도에서는 해산 군인을 중심으로 이른바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사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진압당한 이후에도 을미의병과 같은 의병전쟁이 강원도와 충청도전라도 그리고 경상도에서도 있었지만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했었다그러나 정미7조약 체결 이후엔 해산당한 관군 중심의 병사들이 의병에 가담하면서 의병전력이 한층 강화되었고여기에 유생이나 농민 중심의 의병군이 병사농민 중심의 의병으로 바뀌어가면서 의병전쟁은 독립전쟁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의병전쟁은 대략 2년 동안 격렬하게 일어났다. 1908년 3월 이인영과 허위가 지휘하는 10,000명의 전국 의병군은 서울 탈환작전을 시도하기도 했었다화승총으로 무장한 그들은 신식소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유격전으로 고전하게 만들기도 했지만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당연히 밀리게 되었다.

 

조선반도 내에서 의병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나자 1909년 일본은 이른바 남한 대토벌작전을 벌여 의병들을 섬멸하고자 했다이 작전에서 일본은 전남 전체를 육로와 해상으로 완전히 포위하여 의병을 몰살해나갔다그리고 모든 도민의 통행을 금지하여 이에 위반하는 자는 가차없이 사살했다약 2개월간에 걸쳐 감행된 일본군의 이 작전으로 심남일 등을 포함한 의병장이 사살당하고박도경 등의 의병장이 체포되어 처형되는 등 이 지역 의병은 거의 섬멸되다시피 했다결국 의병운동은 일본에 의해 진압당했다의병전쟁은 참으로 큰 저항이었다. 1908년 후반기에만도 의병과 일본군이 치른 전투횟수는 1900여회나 되었고전쟁에 참가했던 의병의 수도 83,000명이나 되었다나중에 이들 중 일부는 나라를 잃은 뒤 간도로 가서 망명정부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게 된다.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안중근 의거 기록화)

 

을사조약과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한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에 대한 식민지화를 추구했던 인물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그러나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일빈을 들렸던 이토 히로부미는 그날 독립운동가 안중근이 쏜 3발의 권총을 맞았다안중근이 쏜 총탄 3발은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을 통과했다이것이 제국주의자 이토 히로부미의 최후였다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은 거사 이후 5개월 만인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도산 안창호,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다. 그는 한일합방 이전 미주지역과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었고, 그 이후에도 독립운동가와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이처럼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이후 조선인들은 한반도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다그 외에도 1907년에 조직된 신민회같은 독립운동 단체들도 있었다도산 안창호의 경우 국내와 미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었다그러나 을사조약 이후 조선에 손을 뻣은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력은 점점 막강해졌다. 1910년 5월 대한제국 시기 조선의 신문사였던 대한매일신보는 강제 매각되어 일제의 수중으로 넘어가버렸고, 1910년 8월 29일 공식적으로 한일합병이 선언되면서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세운 나라 조선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한일합방의 소식을 들었던 조선의 지식인 매천 황현은 망국의 책임을 통감하며 자결을 선택하기도 했다자결하기 전 그가 남겼던 말이 있다그 구절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매천 황현, 그는 조선 후기 학자이자 독립운동가로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피탈이 되자 국치(國恥)를 통분하며 절명시(絶命詩) 4편을 남기고 음독 순국하였다)

 

무궁화 삼천리 강산이 궁지에 빠졌구나.

책을 덮고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글 아는 사람 구실하기 어렵다.

인을 이루었을 뿐 충을 이루지 못한데다 겨우 순절할 뿐이요,

의병을 일으키지 못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1910년 조선을 완벽히 식민지화한 일본은 이른바 무단통치를 실행했다무단통치란 지배자 일본이 조선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강점정책을 실행하던 통치였다그들은 조선총독부를 만들어 조선의 행정권입법권 그리고 군대사용권 등을 모두 가지고 있었고일본 헌병이 경찰력을 대신했다말 그대로 이시기 일본은 조선의 행정권·입법권·군대사용권 등을 모두 행사하는 전제군주와 같은 절대 권력자였던 것이다일제는 전국의 지방조직을 13도 12부 317군으로 편제하여도지사에 상당수 친일 조선인을 등용했다.

(일제가 토지조사를 위해 측량하는 모습. 일제는 근대적 토지소유 관계를 정립한다는 명분으로 토지조사 사업을 실시해 막대한 토지를 조선총독부 소유로 만들었다.)

 

조선의 식민지 지배기관인 조선총독부는 1910년 이른바 임시토지조사국을 설치하고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을 진행했다그러나 이것은 말이 좋아 토지조사사업이었지실제로는 한국농민들의 당을 강제로 빼앗기 위한 합법적인 절차일 뿐이었다총독부는 신고되지 않은 농민들의 땅을 모조리 총독부 소속의 국유지로 만들었고그 땅들을 저렴한 가격으로 일본인들에게 팔았다그리하여 일본인들은 조선농민들을 소작농으로 부리는 대지주가 될 수 있었다쉽게 말해 토지조사사업은 조선을 경제적으로 장악하고자 했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정책이었을 뿐이었다.

(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는 35년간 일제 식민지배의 상징과도 같은 기관이다. 이 건물은 1995년에 최종적으로 철거되며 사라졌다.)

 

1911년 1월 일제는 양기탁임치정주진수안태국 등 신민회의 주요 간부를 체포했다그리고 그해 9월 이른바 ‘105인 사건을 발생하여신민회 인사들을 대규모적으로 검거했다. 105인 사건의 공식 명칭은 데라우치 총독 모살미수사건이었다이 사건을 빌미로 일제는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애국지사 600~700여 명을 검거했다. 1912년 6월 28일 경성 지방법원에서 105인 사건의 공식 재판이 진행되었는데검거한 700명 중에 123명을 기소했다그런데 이 사건의 재판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왜냐하면 첫 번째 피의자였던 신효범의 경우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그는 신민회라는 단체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고경찰 앞에서 모든 혐의를 인정한 것은 가혹한 고문 때문이었다고 진술했다.

(105인 사건 관련한 다큐 영상 사진)

 

뒷날 105인 사건의 관련자들은 당시 경찰이 사용한 고문 방법이 70여 가지가 넘었고하나같이 삶과 죽음을 오갈 정도로 혹독했다고 증언했다결국 105인 사건의 재판은 사건을 구성하는 기초적인 사실 관계 어느 하나 제대로 맞아떨어지는 것이 없었다혐의를 입증할 제대로 된 물증도 없었다쉽게 말해 형편없는 조작사건이었다말 그대로 105인 사건은 3류 소설만도 못하는 형편없는 조작 사건이었다.

(욱일승천기를 들고 있는 일본 제국주의 군대)

 

1905년 일본은 조선에게 을사조약을 강요하며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작업들을 착수했다을사조약 이후 조선인들은 국내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특히나 1908년에 번진 의병전쟁은 수만 명이 참가하는 투쟁이었다그러나 조선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력은 막강했다그 결과 1910년 일본은 공식적으로 한일합방을 성사시켰다그리고 조선총독부를 세워 이른바 무단통치를 실시했으며토지조사사업이라는 명분으로 조선 농민들을 일본인 지주의 착취를 받도록 만들었다또한 1911년 이른바 105인 사건을 조작하기도 했다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지 4년 뒤 지구반대편에선 인류최초의 대학살극을 동반한 전쟁이 일어난다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어떤 길로 나갔던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중국혁명의 역사적 특성은 혁명이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두 절차로 구분되는 데 있다. 지금에 있어서 그 첫걸음은 벌써 일반적인 민주주의라는 것이 아니라 중국적인, 특수한 새 형태의 민주주의인 신민주주의다. 그렇다면 그 역사적 특성은 어떻게 형성되었고, 그것은 100년 전부터 있었던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후에 와서 생긴 것인가? 중국과 세계의 역사적 발전을 연구해본다면 이 역사적 특성은 결코 아편전쟁 때부터 있은 것이 아니라 그 후에 와서, 즉 제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 및 러시아 10월혁명 후에 와서야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제 그 형성과정을 연구해보기로 한다.


중국 현 사회의 성격이 식민지, 반식민지, 반봉건적 성격인 이상 그것이 중국혁명을 두 절차로 구분하지 않을 수 없도록 규정짓고 있다는 것은 아주 명백한 일이다. 첫걸음은 이 식민지, 반식민지, 반봉건적인 사회형태를 독립적인 민주주의 사회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두 번째 걸음은 혁명을 더 발전시켜 사회주의 사회를 창립하는 것이다. 목하 중국의 혁명은 그 첫걸음을 걷고 있는 중이다.


이 첫걸음의 준비단계는 벌써 1840년의 아편전쟁 때부터, 즉 중국사회가 봉건사회로부터 반식민지, 반봉건적 사회로 전환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태평천국운동, 중국-프랑스전쟁, 청일전쟁, 무술변법, 신해혁명, 5·4운동, 북벌전쟁, 토지혁명전쟁을 거쳐 오늘의 항일전쟁에 이르기까지 거의 100년이나 걸린 이 많은 개별적 단계들은 어떤 점에서 말한다면 모두가 이 첫걸음을 실천했던 것이며, 중국인민들이 각각의 이들 시기에서 봉건세력을 반대하고 독립적인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한 것이며 첫걸음의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투쟁했던 것이다. 그리고 신해혁명은 보다 더 완전한 의미에서 이 혁명을 개시한 것이다. 이 혁명은 그 사회적 성격으로 본다면 무산계급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이다. 지금 이 혁명은 아직 완수되지 못하고 있으므로 계속 더 많은 힘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이 혁명의 적이 아직도 매우 강대하기 때문이다. 손중산 선생이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하였으니 동지들은 계속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을 두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은 1914년에 제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이 폭발되고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에 의해 지구의 1/6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사회주의 국가가 창건된 후부터 변화가 일어났다. 그 이전까지 중국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었으며 낡은 세계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의 일부분이었다. 그 이후부터 중국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은 새로운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의 범주에 속하게 되었으며 혁명의 진영으로 말하면 세계 무산계급 사회주의 혁명의 일부분이 되었다. 왜 그런가? 그것은 제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과 맨 처음으로 승리한 사회주의 10월 혁명이 전반 세계의 역사적 방향을 개변시켰으며 전반 세계의 역사적 시대를 갈라놓았기 때문이다.


세계 자본주의 전선이 이미 지구의 한 모퉁이에서 (이 한 모퉁이는 전 세계의 1/6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붕괴되었고 그 나머지 모퉁이에서도 그 부패성이 충분히 발로되고 있는 시대에 있어서, 아직 남아 있는 이러한 자본주의 부분들도 식민지, 반식민지에 더한층 의존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게 된 시대에 있어서, 사회주의 국가가 이미 창건되었고 또 그가 모든 식민지, 반식민지의 해방운동을 원조하여 투쟁할 것을 선포한 시대에 있어서, 자본주의 국가의 무산계급이 나날이 사회제국주의적 사회민주당의 영향으로부터 해방되어 나오고 있는 동시에 그들이 식민지, 반식민지의 해방운동을 찬조할 것을 선포하고 있는 시대에 있어서 이러한 시대에 있어서 어떠한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에서든지 만일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즉 국제 자산계급을 반대하며 국제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혁명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더는 낡은 세계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범주에 속하며 더는 낡은 자산계급 및 자본주의적 세계혁명의 일부분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혁명의 일부분 즉 무산계급 사회주의 세계혁명의 일부분인 것이다. 이러한 혁명적인 식민지, 반식민지는 이미 세계 자본주의 반혁명전선의 동맹군으로 간주할 수 없으며, 그것은 벌써 세계 사회주의 혁명 전선의 동맹군으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식민지, 반식민지 혁명의 제1단계, 즉 첫걸음은 그 사회적 성격으로 볼 때는 기본상 여전히 자산계급 민주주의적인 것이며 그 객관적 요구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한 길을 닦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러한 혁명은 이미 낡은, 자산계급에 의하여 영도되는, 자본주의 사회 및 자산계급 독재 국가를 건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혁명이 아니라, 새로운 무산계급에 의하여 영도되는 혁명으로써, 제1단계에 있어서는 신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고 각 혁명적 계급들간의 연합독재의 국가를 창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혁명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혁명은 또한 사회주의의 발전을 위하여 더욱 광활한 길을 닦아주는 것이다. 이러한 혁명은 그 진행과정에 있어서 적정 및 동맹군의 변화로 인하여 또 약간의 단계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그 기본적 성격은 변화되지 않는다.


이러한 혁명은 제국주의를 철저히 타격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국주의는 이것을 용서하지 않고 반대한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그것을 용서하며 사회주의 국가와 사회주의적 국제 무산계급은 그것을 원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혁명은 무산계급 사회주의 세계 혁명의 일부분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중국혁명은 세계혁명의 일부분이다”라는 이 정확한 명제는 1924~1927년의 중국 제1차 대혁명 시기에 이미 제기된 것이다. 이 명제는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제기한 것으로서 당시 반제 반봉건적 투쟁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의 찬동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 이론의 의의가 아직 전개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문제를 애매모호하게 인식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러한 ‘세계혁명’은 이미 낡은 세계혁명(낡은 자산계급 세계혁명은 이미 끝났다)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혁명이며 사회주의적 세계혁명이다. 마찬가지로 이 ‘일부분’이라는 것은 이미 낡은 자산계급혁명의 일부분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주의 혁명의 일부분이다. 이것은 극히 큰 변화이며 세계적으로나 중국에서나 유사 이래 유례없는 큰 변화이다.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제기한 이 정확한 명제는 스탈린의 이론에 근거한 것이다. 스탈린은 일찍이 1918년 10월 혁명 1주년을 기념하여 쓴 자신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0월 혁명의 위대한 세계적 의의는 주로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첫째, 민족문제의 범위를 확장하여 이것을 유럽에서의 민족적 압박과의 투쟁이라는 부분적 문제로부터 피압박 민족과 식민지 및 반식민지를 제국주의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일반적 문제로 전환시켰다. 둘째, 서방과 동방의 피압박 민족을 제국주의와 승리적 투쟁의 공동궤도로 끌어들여 그들의 해방을 위한 광범한 가능성과 현실적인 길을 열어놓음으로써 그들의 해방위업을 대단히 쉽게 해주었다. 셋째,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주의적 서방과 예속된 동방 간에 다리를 놓았고, 서방의 무산자들로부터 러시아 혁명을 거쳐 동방의 피압박 민족들에 이르는 세계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새로운 혁명전선을 결성케 하였다.”


이 논문을 발표한 후에 스탈린은 또 식민지, 반식민지 혁명이 낡은 범주를 벗어나서 무산계급 사회주의 혁명의 일부분이 된 것에 관한 이론을 여러 차례 거듭 전개하였다. 그중에서도 해석이 가장 분명하고 명확한 것은 스탈린이 1925년 6월 30일에 발표한, 이 논문은 장중실이 번역한 《민족문제에 관한 스탈린의 논술》이라는 책에 수록되어 있으며 그 제목은 <다시 한번 민족문제에 대하여>이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쎄미치는 스탈린이 1912년 말에 쓴 소책자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 가운데서 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그 책에는 “대두하는 자본주의의 조건하에서의 민족적 투쟁은 자산계급들 상호간의 투쟁이다”라고 쓰여 있다. 그는 이문구로써 현 역사적 조건하에서의 민족운동의 사회적 의의를 규정한 자기의 공식이 옳다는 것을 암시하려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의 이 소책자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민족문제가 아직 전 세계적 의의를 가진 문제로 생각되지 않던, 또 자결권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기본 요구가 무산계급혁명의 일부분으로가 아니라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의 일부분으로 평가되던 대인 제국주의 전쟁 전에 쓴 것이다. 따라서 그 이후 국제정세가 근본적으로 변했다는 것. 또 한편으로는 전쟁과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에서의 10월 혁명이 민족문제를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의 일부분으로부터 무산계급 사회주의 혁명의 일부분으로 전환됐다는 것을 보지 않았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찍이 1916년 10월 레닌은 <자결에 관한 토론의 총결>이라는 자기 논문에서 말하기를, “자결권이라는 민족문제의 기본사항은 이제는 일반적 민주주의 운동의 일부분이 되어 있지 않고 그것은 이미 일반적인 무산계급 사회주의 혁명의 구성부분으로 변했다”고 하였다. 나는 레닌이나 또 러시아 공산주의의 기타 대표자들이 민족문제에 관한 그 후의 저서들에 대하여서는 더 이상 새삼스레 말하려 하지 않겠다. 모든 것이 그렇다면 러시아에서의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 시기에 쓴 스탈린의 소착재에서 주지하다시피 앞에서 소개한 것을 쎄미치가 인용했다는 것은 우리가 새로운 역사적 환경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 즉 무산계급혁명의 시대로 들어온 지금에 있어서 어떠한 의의를 가질 수 있는지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러한 인용이 가질 수 있는 의의라는 것은 다만 쎄미치가 공간과 시간을 떠나서 산 역사적 환경과는 관련없이 인용하고 있는 것이며, 그러함으로써 그는 변증법의 초보적인 요구도 지키기 않고 있는 것이며, 또한 역사적 환경에서의 옳았던 것이 다른 역사적 환경에 있어서는 옳지 못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고려치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로써 두 가지 종류의 세계혁명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첫째 종류는 자산계급 및 자본주의 범주에 속하는 세계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혁명의 시기는 이미 지나갔다. 그것은 벌써 1914년 제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이 폭발되었을 때, 특히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때 종결되었다. 그 후부터는 둘째 종류의 세계혁명, 즉 무산계급 사회주의 세계혁명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혁명은 자본주의 국가의 무산계급을 그 주력군으로 하며, 식민지, 반식민지의 피압박 민족을 그 동맹군으로 한다. 피압박 민족 내부에 있어서 혁명에 참가하는 그 계급, 정당 또는 개인들이 어떠한 계급, 정당 또는 개인이거나를 막론하고, 또 그들이 이 점을 의식하고 있거나 못하고 있거나를 막론하고, 오직 그들이 제국주의를 반대하기만 한다면 그들의 혁명은 무산계급 사회주의 세계혁명의 일부분이 되며 그들은 무산계급 사회주의 세계혁명의 동맹군이 된다.


오늘에 와서 중국혁명은 그 의의가 한층 더 커졌다. 오늘날은 자본주의 경제적 위기 및 정치적 위기로 말미암아 세계가 나날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끌려들어가고 있는 때이며, 사회주의를 거쳐 공산주의로 이행하게 될 소련이 전 세계 무산계급 및 피압박 민족을 영도하고 원조하여 제국주의 전쟁에 반항하며, 자본주의적 반동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때이며, 자본주의 국가들의 무산계급이 자본주의를 타도하여 사회주의를 실현시키려고 준비하고 있는 때이며, 중국의 무산계급, 농민계급, 지식인 및 기타의 소자산계급들이 중국 공산당의 영도하에 이미 위대한 독립적인 정치적 역량이 형성되고 있는 때이다. 오늘날 이러한 시기에 처해있는 우리로서는 중국혁명의 세계적 의의가 더한층 커졌다고 평가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당연히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중국혁명은 세계혁명의 위대한 일부분인 것이다.


중국혁명의 이 첫단계(그것은 또 많은 작은 단계로 구분된다)는 그 사회적 성격으로 말한다면 아직 무산계급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새 형태의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이지만 이미 무산계급 사회주의 세계혁명의 일부분이 되었고, 현재에 와서는 더욱 이러한 세계혁명의 위대한 일부분이 되었으며, 이러한 세계혁명의 위대한 동맹군이 되었다. 이 혁명의 첫걸음, 즉 제1단계는 결코 중국 자산계급 독재의 자본주의 사회를 건설하려는 것이 아니고 또 그럴 수도 없으며, 중국 무산계급을 그 영도자로 하는 중국의 각 혁명적 계급들의 연합독재의 신민주주의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이것으로 제1단계에 대한 설명을 마치려고 하며, 이를 다시 제2단계로 발전시켜 중국에다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시키고자 한다. 이것이 목하 진행되고 있는 중국혁명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이며, 20년 이래(1919년 5·4운동으로부터 계산해서)의 새로운 혁명과정이며, 목하 중국혁명의 생동하고도 구체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제인 폰다입니다. 저는 지난 두 주 동안 베트남민주공화국을 방문했습니다. 많은 곳을 보았고, 많은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노동자, 농민, 예술가, 학생, 무용가, 역사가, 저널리스트, 영화배우, 군인, 의용소녀, 여성동맹 단원 그리고 작가들을 만났습니다. 나는 누에고치가 길러지고 비단이 짜지는 협동농장, 그리고 하노이 방직공장과 유치원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문예궁전에서 베트남 전통무용을 감상했고, 저항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나는 거기서 남쪽 밀림의 게릴라들이 적군을 공격하기 위해 벌을 훈련시키는 것을 극화한, 잊을 수 없는 발레를 보았습니다. 벌들은 여자무희들이 춤을 추었는데 매우 아름답게 표현되었습니다.

 

나는 문예궁전에서 베트남 배우들이 아서 밀러의 나의 아들2막을 연기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미제국주의자들이 그들의 나라를 폭격하고 있는 와중에도 그들은 적국인 미국의 희곡을 번역하여 연출하고 있었다는 이 사실! 그것은 너무도 감동적이었습니다. 나는 공장의 지붕 꼭대기에서 수줍음을 타고 얼굴을 붉히는 의용소녀 하나가 베트남의 푸른 하늘을 찬양하는 힘찬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인상적인 모습을 기억합니다. 이들은 부드럽고 시적이며 목소리고 꾀꼬리 같았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폭격기가 그들의 도시를 쑥밭으로 만들어 버릴 때는 그들은 씩씩한 전사로 변모합니다.

 

나는 미국의 폭탄이 떨어질 때 적국의 여자인 나를 감싸안고 방공호로 뛰어들어갔던 한 농부의 따스한 손길을 소중하게 기억합니다. 우리들은 팔과 팔, 뺨과 뺨을 부비고 있었습니다. 나는 남 딘(Nam Dinh)의 길목에서 학교, 병원, , 공장, , 관개제방 등 모든 민간 시설이 모두 무참히 파괴되는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내가 두 주전에 미국을 떠날 때, 닉슨은 미국인들에게 베트남전을 종료시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남 딘의 어지러운 폐허에서 나는 그의 말은 살인자의 음험한 감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의 팔을 꼭 붙잡고 매달리는 어린 한 베트남 소녀의 뺨을 부비면서 나는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베트남과의 전쟁일지 모르지만, 이 모든 비극은 결국 미국의 것일 뿐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의심할 수 없는 자명한 진리로서 이 나라에 깨닫게 된 하나의 사실은 닉슨은 결코 이 땅의 사람들의 정신을 파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북베트남이든 남베트남이든 폭격과 침략 어떠한 방식의 공략으로도 미국의 식민지로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떨어진 폭탄 하나는 결국 이 땅의 사람들을 저항의 의지만 단호하게 만들 뿐입니다. 나는 녹둑의 농부들로부터 그런 의지를 확인했습니다.

 

내가 만난 농부들은 과거 그들의 삶은 지주에 소속된 노예일뿐이었으며, 교육과 의료의 혜택이 전혀 없었고, 그들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폭격에도 불구하고, 닉슨이 그들에게 저지르는 범죄 행위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국민은 자신의 토지와 학교를 갖고 있습니다. 문맹은 사라졌고 프랑스 식민지 시절 창녀 노릇했던 여성들이 용감한 전사로 변했습니다. 인민은 자신의 손에 스스로 권력을 쥐고 있으며,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었습니다.

 

베트남 인민은 4천년 동안 자연과 외국 침략자들을 상대로 줄기차게 싸워왔습니다. 프랑스와 식민투쟁에서도 이겼습니다. 베트남의 완전한 자주 독립을 스스로 쟁취해나갈 것입니다. 리차드 닉슨이 베트남 역사와 베트남의 시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호찌민이 쓴 시를 잘 읽어 음미했으면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15년을 기점으로 한국에선 이른바 페미니즘(Feminism)이라는 주제가 국가적 혹은 사회적으로 이슈가되었던 것 같다. 2016년에 나온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상당히 많은 인기를 끌었고, 그 이후 미투운동과 더불어 페미니즘이라는 담론이 우리 사회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앞에서 언급한 ‘82년생 김지영2019년 영화화 되어 개봉했었다. 나 또한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냥 싫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를 보는 게 좀 거리감이 생겼었다. 뭐 그래도 몇몇 영화평론가들이 상당히 과학적 분석을 한 영화평들을 내놓다보니 나 또한 이 영화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고, 영화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늦긴 했지만, 어제 저녁에 이 영화를 혼자서 보게 되었다.

 

영화의 주인공 김지영이 살고 있는 사회는 물질적으로 부족하지 않고, 매우 풍요롭다. 적어도 김지영의 삶은 좁지 않은 아파트와 적잖은 급여를 받는 공무원 남편 그리고 그의 가족과 일가친척들도 자신들 나름의 풍요로운 삶은 영위하고 있다. 그러나 물질적으로는 풍부하지만 주인공 김지영은 불편한 진실에 항상 마주치게 된다. 이것은 여자로서 가지게 되는 사회적인차별과 주변에서 느끼게 되는 차별적인 인식이다. 즉 능력이 되더라도 여성이기 때문에 사회에서의 신분상승이 제동이 걸리는 현실과 육아라는 부담 때문에 일을 망설이게 되는 현실 말이다. 일각에서는 남자들 또한 고생하는데 왜 여성이 겪는 것만 강조하냐 혹은 편향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 도 있지 모르겠다. 물론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남성들이 겪는 현실에서의 문제도 있지만, 여성들이 겪었던 이러한 사회적인 한계와 제도는 지금까지 등한시 되어온 측면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러한 문제제기는 사실상 의미가 없다고 본다.

 

영화상에서 김지영이 겪는 차별은 육아라는 측면에서도 많이 나타났던 것 같다. 육아 휴가를 쓰고자 했던 남편이 결국 김지영의 시어머니 때문에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는 상황은 결국 육아의 문제를 여성에게만 전가시켰던 사회의 문제라는 생각이 정말 많이 들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문제제기를 했던 문제가 여기서도 겹친다. 즉 러시아 혁명 당시 혁명가들이 주장했던 그런 문제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는 82년생 김지영도 92년생 김지영도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위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김지영의 삶은 절대로 물질적으로 부족하지 않다. 그의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김지영의 삶은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왜일까? 여성 차별 때문일까?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인가? 가부장주의에 찌들어있는 남성들 때문일까? 많은 지점을 생각해보게 된다. 누군가는 젠더의 관점에서 김지영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난 젠더 혹은 페미니즘적인 관점 보다는 자본주의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 즉 한 지배계급으로서 나타난 형태가 그러한 차별과 편견의 시선을 창조하고 재생산해냈다는 생각이 영화를 보면서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실제로도 그러하다. 과거 우리의 교육에선 가정에 대해 배울 때 남성은 직장을 다니며 돈을 벌어오고, 여성은 집에서 가정 일을 도맡아 하는 것을 일반적인 가정의 모습으로 배워왔다. 하지만 그 예외의 사례에 대해선 알지 못하게 예외의 시선으로 보는 것 같고, 또 사회가 그렇게 조장하는 것 같다. 즉 이런 것이 바로 사회가 만들어낸 편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영화 김지영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두 인물이 있다. 바로 김지영의 엄마와 김지영의 남동생이다. 김지영의 엄마는 전형적인 박정희 시대 산업화의 피해자다. 어린시절 공부도 잘해서 교사가 되겠다던 꿈이 있었지만, 그 꿈은 현실이라는 장벽 앞에 무너져 내렸다. 왜냐하면 오빠들을 우선적으로 대학에 보내야 했기 때문에 그 학비를 젊은 시절 김지영의 엄마가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김지영의 엄마는 산업화 시기 가장 많은 핍박과 착취를 받던 여공으로 일을 해야 했다. 나는 이 부분에서 산업화 시기 교육의 균등한 기회를 제공받지 못하여 그래야만 했던 사람들이 생각이나 너무나도 안타깝고 슬펐다. 결국 그 시기 좋은 교육을 받지 못한 건 돈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런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시절은 더 심했다.

 

김지영의 동생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 건 과거 혹은 현재의 내모습과 오버랩 되는 측면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할머니나 중년여성들에게 예쁨을 받는 모습이나, 엄마와 친누나가 하는 일을 도와주는 역할이 상당히 내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거기다 운전까지 해서 심부름으로 물건을 갖다 주기까지 하니 최근 들어 운전을 시작한 내 모습과 겹쳤다. 거기다 친누나한테 조금 대드는 장면도 뭔가 나를 보는 것 같아 조금 찔리기 까지 했다. 누군가는 이 장면을 놓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김지영의 동생으로부터도 자연스럽게 측은지심을 느꼈다. 아마도 이것은 나또한 그런 현실과 마주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 나오는 김지영의 남편은 정말이지 걷잡을 부분이 없는 아주 완벽한 남편이다. 물론 영화에서처럼 서로가 이해하려고 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즉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걱정해주고, 보듬는 일말이다. 그러나 많은 여성들이 안타까움을 느끼겠지만, 그런 남성은 이 세상에 많지 않다. 아니 찾기 매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남성 여성을 떠나서 서로가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의 감정과 심정을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과거엔 그러지 못한 가정이 많았다면 이제는 바꿔야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적잖게 슬펐다. 비단 김지영 뿐만 아니라 너나 할 것 없이 불편하고 편협한 틀 속에서 사회를 살아가는 것 같았다. 영화를 보는 것에 따라서 누구는 페미니즘에 입각한 관점으로 혹은 다른 관점으로도 볼 것이다. 난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 그리고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문제라는 측면에서 많이 다가왔다. 결국 김지영이라는 인물도 자본주의 사회의 피해자였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 자체를 내가 다 동의한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나 또한 남성이라는 생물학적 특성 및 한계를 못 벗어난 것일까?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떤 부분에선 조금의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큰틀에서 보았을 때 영화상에서 공감되는 부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아무튼 사회를 살아가며 고통을 받는 한 여성의 삶도, 남편의 삶도, 남편, 아내 그리고 남녀 회사원의 삶이 슬펐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불편한 진실이기 때문일까?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오랜만에 정말 의미 있는 영화를 보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han22598 2020-11-26 04: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 제가 님이 쓰신 글에 대해서 잘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하에 발생되는 계급에 대한 저항보다는, 한 사회에서 양산된 자본이 어떤 식으로 분배가 이루어지는 지에 대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을 발생시키는 노동이나 서비스 형태가 남녀간의 차이가 있고, 그리고 그것들의가치를 부여하고 댓가로 수여받는 자본의 분배가 젠더간의 차이가 발생되어 진다는것입니다. 따라서 자본의 크기에 따른 지배계급을 형성하는 자본주의의 자체의 문제라고 지적하기 보다는 자본의 형성과 분배과정중에 발생되는 불균형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

NamGiKim 2020-11-26 13:47   좋아요 1 | URL
뭐 그렇다고도 볼 수 있겠죠. 결론적으로 문제는 분배의 문제인데, 분배의 문제에서 생기는 젠더의 갈등이니까요. 근데 그것은 남녀평등적이지 못하게 조성해온 사회의 문제도 크겠지요.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