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미국사 - 만화로 배우는 미국의 모든 것
래리 고닉 지음, 노승영 옮김 / 궁리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하버드 대학과 예일 대학교에서 인정했다는 사실을 밝힌 래리 고닉의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만화 미국사를 읽었다. 하버드 대학의 수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학업성적이 우수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파이베타카파의 회원이기도 했던 만화가 래니 고닉은 자신의 전공인 수학뿐만 아니라 심리학, 물리학, 사회과학 등 다방면의 지적 분야에서도 여러 만화책들을 썼었다. 걸프전쟁이 일어나던 1991년 그는 미국사 관련한 만화책을 집필하기도 했는데, 그게 바로 2018년에 국내에 번역된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미국사(Cartoon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래리 고닉이 쓴 이 미국사 책은 아메리카 대륙이 아시아 대륙과 연결이 끊기는 시점부터 1991년 미국이 걸프전쟁에 개입하는 시점까지의 미국사를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책 제목이 만화를 뜻하는 카툰을 달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책의 내용은 상당히 수준이 높고, 웬만한 미국사와 세계사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일반인들에게는 조금은 어려울 수도 있는 책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배려가 책 안에서도 들어나는데 독자가 혹시 책을 읽는 도중에 까먹을 수 있는 사건이나 단어 혹은 역사 등을 각주를 달아 몇 페이지를 참고하라혹은 이런 사건, 이런 인물, 이런 용어등의 설명을 해주기도 한다.

 

사실 책의 내용을 보면 미국사를 다루면서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사회의 문제점들을 미국사를 통해서 일일이 다 다루고 있는데, 이것은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원주민 억압의 역사와 흑인 노예제와 인종차별, 마약문제와 페미니즘 문제 그리고 환경문제를 서술하는 부분에선 저자의 날카롭고 예리한 시각이 돋보인다. 특히나 자연과학쪽을 좋아해서 그런지 환경문제를 다루는 저자의 시각이 가장 많이 각인되었던 것 같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부분은 바로 미국의 제국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다. 저자 래니 고닉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에 대해 비판의 포문을 여는데 상당히 거리낌이 없다. 거기다 저자 특유의 관점과 만화적 풍자까지 더해진다. 책에서 나온 만평중에 기억에 남는 만평이야 워낙 많지만, 대표적으로 뽑자면 매카시즘 관련 만평이 기억에 남는다. 냉전 초기인 1949년 관련한 파트인데, 여기서 저자는 소련의 핵개발과 중국의 공산화로 인한 미국의 피해망상적 매카시즘을 너무나도 잘 표현하고 있다.

 

그 외에도 저자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구제국주의인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를 물려받아 신제국주의적인 체제로 갔으며, 그러한 신제국주의적 정책이 각국의 반미감정을 불러일으켰다고 비판한다. 한국전쟁 관련한 부분에선 이승만에 대해 무능하고 부패한 독재자라고 비판하고,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에 대해서도 부패한 독재자이자 미국의 꼭두각시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보았을 때 저자의 정치관도 꽤나 진보적임을 알 수 있다.

 

래리 고닉의 이 책 말고도 미국사를 비판적으로 접근한 만화 책이 있다. 그 책은 국내에도 번역된 역사학자 하워드 진이 쓴 만화로 보는 하워드 진의 미국사(A people’s history of American empire)’. 그러나 하워드 진의 만화책과 래리 고닉의 만화책에는 아주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물론 하워드 진의 책 또한 미국의 제국주의와 반노동 친자본적인 모습을 아주 날카롭게 비판한 명저이지만,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상당한 진지함과 감정적인 투쟁의식을 호소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래리 고닉의 미국사하고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래리 고닉의 책은 하워드 진 선생이 진지하게 혹은 비판적 의식을 감정적으로 고찰시키기 위해 접근한 역사적 사실들을 읽는이가 상당히 즐거움을 느끼게 승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래리 고닉의 미국사가 가지고 있는 결정적인 핵심이다. 그 덕분에 나또한 상당히 즐거운 독서를 할 수 있었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래리 고닉의 미국사 책은 미국사나 세계사에 대한 지식이 하나도 없는 이가 보기엔 조금은 어려울 수 있는 내용들이 적잖게 있다. 그러나 그런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래리 고닉의 책은 무엇보다 독자들로 하여금 많은 즐거움을 선사해줄 것이다. 또한 일반인들이 잘 알지 못했던 미국사를 총체적으로 알 수 있고, 현대사회에서 많은 이슈점들을 가진 문제들 또한 같이 알 수 있다. 역사를 좀 공부한 사람이라면 책을 어렵지 않게 읽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미국사를 공부해보지 않았다면 이 책이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많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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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테헤란 회담 당시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

 

2차 세계대전 당시 이데올로기적으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던 미국과 소련은 파시즘에 맞선 전쟁을 치르면서 서로 협력하는 동맹관계가 되었었다. 1930년대 당시 미국과 영국은 소련의 스탈린에 대해서 독재자 혹은 폭군이라는 강력한 비난을 일삼았었지만히틀러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소련에 대한 비판을 멈췄었다2차 세계대전은 미국과 소련간의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고실제로 이들은 전쟁 와중에 전후 세계질서에 대해 논의하고 합의하기도 했었다이처럼 제2차 세계대전은 적대관계에 있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국가를 하나의 협력자로 만든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6,500만에서 7,0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앉아간 제2차 세계대전은 일어나기 전부터 여러 가지 불안한 사태들을 예고하고 있었다.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계기로 만주를 침공했고괴뢰 황제 푸이를 내세워 괴뢰국을 건설하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평화적인 차원에서 만들어진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1933년 독일에서는 나치당의 아돌프 히틀러가 수상이 되었고히틀러의 선배인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1935년 에티오피아를 침공하며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1936년 선거를 통해 좌파가 정권을 잡은 스페인에선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는 프랑코가 전쟁을 일으켜 이른바 스페인 내전이 일어났고, 1937년엔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켜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을 함락시켰다그리고 나치독일은 1936년 라인란트 지역을 점령하고 1938년에는 오스트리아를 1939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했다.

 

이처럼 1930년대의 국제질서는 제2차 세계대전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그러던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의 화약이 유럽에서 터졌다나치 독일의 폴란드를 침공한 것이다2차 세계대전 초기 미국과 소련은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상태였다. 1929년 검은 화요일로 시작한 경제 대공황에 직격타를 맞은 미국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 정책을 추진하며 경제를 회복시켜나가는 과정에 있었고루스벨트 대통령은 제1차 세계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형식적인 중립국의 위치를 지켰다물론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미국은 영국에게 물자지원을 했고중국 국민당 정부를 지원했지만 말이다.

 

소련 또한 마찬가지로 전쟁 초기에 참전하지 않았었다레닌 사후 권력을 계승한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른바 공업화 노선을 통하여 낙후된 소련을 초강대국의 소련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생산력을 발전시킨 스탈린은 1939년 아돌프 히틀러와 협상하여 이른바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이것은 전 세계적으로 적잖은 충격을 주기도 했지만, 1938년 영국의 체임벌린과 히틀러가 합의본 뮌헨 협정에 대한 배신이 만든 결과이기도 했다그리고 이것이 적대관계에 있던 양국(나치독일과 소련)의 군사적 동맹을 뜻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어쨌든 소련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참전한 입장은 아니었다물론 그 과정에서 폴란드 분할이나 핀란드와의 전쟁이 있었지만이것은 러시아 혁명 이후 소련의 영토 관련 문제에서 비롯된 개별적인 전쟁이었을 뿐 제2차 세계대전의 참전을 뜻하지는 않았다.

(미국의 랜드리스, 1941년 부터 시작한 미국의 랜드리스는 영국, 중국, 소련 등의 연합국에게 엄청난 양의 물자지원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지원은 소련이 독일군에게 반격하는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양국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시킨 연도는 1941년이었고추축국의 공격에 의한 것이었다소련의 스탈린은 1941년 6월 히틀러가 대대적인 침공을 한 것이 주된 이유였고미국의 루스벨트는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 기습 공격을 감행한 것이 주된 이유였다따라서 자본주의 국가 미국과 사회주의 국가 소련은 1941년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것이다2차 세계대전 당시 양국의 참전은 늦었지만 1941년이라는 시점부터 서로가 협력하는 관계가 되었다.

 

모스크바 전투가 한참이던 1941년 12월 미국은 이른바 랜드리스라 하여 소련에게 상당한 량의 물자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1942년부터 1943년 당시 미국은 영국과 중국 그리고 소련에 물자를 지원했는데이는 상당한 양의 물자 지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미국은 3400만 벌의 군복과 1450만 켤레의 군화, 420만 톤의 식품 그리고 11800대의 기관차와 다수의 차량을 소련에게 제공했다무기 대여법에 의해 소련에게 제공된 트럭이나 지프는 독일과의 전쟁에 있어서 소련군의 기동력을 높였고미군 전차나 항공기도 소련에게 보내졌다앞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미국은 소련에게 상당한 양의 식품을 소련에게 지원하기도 했는데현재 우리가 즐겨먹는 스팸의 경우 소련군의 허기를 채워준 소중한 식량 역할을 해냈다이 때문에 당시 소련 참전용사들은 미국제 스팸을 회상하기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프로파간다, 미국과 영국 그리고 소련군이 하나가 된 포스터다. 즉 소련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영국을 동맹국으로써 양국의 협력을 강조했다.)

 

1941년 6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면서부터 소련과 스탈린을 대하는 미국과 영국의 태도는 현저하게 달라졌다. 1930년대 당시 스탈린을 독재자 혹은 폭군이라 비난하던 미국과 영국 언론은 스탈린을 이른바 엉클 조(Uncle Jo)라고 부를 정도로 호평했다그것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상당한 역할을 하는 스탈린과 소련군의 기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2년 5월 루스벨트 대통령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나로서는 그건 참 부인하기 어려운분명한 사실이오러시아군은 유엔 25개 회원국 전부를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이추축국 병력을 살상하고 그 물질적 토대를 파괴했소따라서 1942년에는 당연히 최대한 모든 무기와 탄약을 그들에게 공급해줌으로써 사투를 벌이고 있는 러시아를 지원해야 할 것이오.”

(골든 게이트 퀘텟, 1931년에 결성된 미국의 보컬 그룹인 골든 게이트 퀘텟은 1943년 Stalin wasn't Stallin이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가사 내용은 히틀러가 러시아를 침공하여 큰 실수를 저질렀고, 스탈린이 나치를 물리치고 영국과 미국에게 도움을 주는 이야기다.)

 

이러한 생각은 비단 루스벨트 대통령만의 생각은 아니었다반공주의 성향이 강한 맥아더도 이후 대통령이 되는 아이젠 하워도조지 마셜 장군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에 대한 찬양에 열을 올렸다진주만 기습 공격이 있은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소련의 외교관 막심 리트비노프가 미 국무부를 방문했을 당시 미국의 코델 헐 국무장관은 나치에 대한 소련의 영웅적 투쟁을 극찬하기도 했었다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의 영웅적 행동을 높이 평가하는 여론이 미국에서 보편화 됐다. 1942년 6소련이 독일군의 침공에 맞서 싸운 지 1주년이 되는 달을 맞아 미국의 <뉴욕 타임스서평 담당자인 오빌 프레스콧은 소련군이 전쟁 승리와 인류구원이라는 업적을 이룩하고 있다고 극찬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프로파간다, 연합국의 깃발이 있는 이 포스터에도 소련 깃발 또한 있다.)

 

이런 움직임에 따라 미국 헐리우드 영화사도 소련 홍보에 나섰다. 1942년 7월이 되면 MGM, 컬럼비아유나이티드 아티스츠(United Artists), 20세기 폭스파라마운트 같은 주요 영화사들이 제작 중이거나 제작을 검토 중인 소련 관련 영화는 9편 이상이나 됐는데결국 <모스크바 특명(Mission to Moscow)>, <북극성(North Stat)>, <러시아의 노래(Song of Russia)>, <러시아 소녀 삼총사(Three Russian Girls)>, <영광의 나날(Days of Glory)> 등 5편의 주요 작품이 나왔다당시 군인들 정훈교육 차원에서 만든 영상에서도 소련군의 업적을 매우 높이 평가하며 이들을 지원하자는 입장을 분명히 표시했었다뿐만 아니라 미국 내에선 이른바 2전선을 만들자는 국민적인 캠페인도 활발히 전개됐었다.

(1943년에 만들어진 미군 정훈교육 영상, Why We Fight라는 이름의 이 영상은 러시아인들이 침략자 나치 독일에 맞서 어떻게 저항하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소련을 지원하는 미국인들과 미국정부의 마음은 확실했지만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강력하게 호소했던 이른바 2전선의 형성은 많이 늦었다사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미국의 전쟁에 참전하기 3개월 전 영국의 윈스턴 처칠에게 25~30개 사단을 파견해달라고 요구했었다즉 이것이 제2전선(Second Front)을 형성해달라는 서방에 대한 스탈린의 첫번째 요구였다. 1942년 당시에도 스탈린은 미국과 영국에게 제2전선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이러한 스탈린의 부탁은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해 보았을 때 충분히 납득될 만했다왜냐하면 당시 미국의 정치인들이 생각하듯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에 맞서 무수히 많은 희생을 치르고 있던 주체는 바로 소련이었기 때문이다. 1943년에 열린 테헤란 회담에서도 스탈린이 미국과 영국에게 아주 강력하게 요구한 것은 당연하게도 제2전선 형성이었다.

 

스탈린이 강력히 요구했던 제2전선은 1944년 6월 영미 연합군이 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상륙하면서 형성되었다이 제2전선은 스탈린이 처음 요구한 시점부터 3년이 지난 상황이었다미국이 소련에 대해 아낌없는 칭찬을 했듯이소련 또한 나치 독일에 맞서 전쟁을 치르고 있던 미국과 영국에 대해 우호적이고 긍정적인 사설들을 내기도 했다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생각보다 사이가 좋았던 스탈린은 실제로 루스벨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미국 대사관한테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소련에서 만든 만화 또한 제2전선의 염원을 담기도 했었다독일과 전쟁을 치르던 소련 사람들도 영미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개시했을 때 낙관적인 생각을 가졌었다즉 소련 또한 1944년 영미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독일 본토를 향해 진격했을 때영미 연합군에 대해 확실히 긍정적인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1945년 4월 독일 엘베 강에서 만나게 된 미군과 소련군)

 

이러한 소련 사람들의 감정을 잘 보여주는 일이 있었다. 1944년 노르망디상륙작전 당일 공수부대 군의관으로 참전했던 어니스트 M. 그륀버그 대위는 독일군의 포로로 붙잡혔었다포로가 된 그는 당연히 독일군이 운영하는 연합군 포로수용소로 갔고거기서 다른 미군 장교 2명과 함께 탈출하여 소련군을 만났다이들을 발견한 소련군은 그들을 도왔고탈출한 지 14일 만에 그들은 수도 모스크바에 도착할 수 있었다그륀버그 대위는 이후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우리는 걸은 적이 거의 없었다늘 트럭이나 기차가 우리를 태워주었다돈을 달라거나 표를 보여달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우리는 미국인이었다그게 우리한테는 좋을 리 없는 일이었다하지만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우리를 재워주었다우리는 트럭과 화차를 타고 다녔고모스크바에 들어갈 때는 러시아군 장교들이 타는 차를 타고 거창하게 들어갔다당연히 자유롭게.”

(1945년 2월 얄타회담, 우크라이나 크림반도에 있는 얄타에서 강대국들은 전후 문제를 논의했다.)

 

뿐만 아니라 폴란드 사람들과 소련 사람들은 그륀버그와 2명의 미군 장교에게 얼마 되지 않는 배급 음식도 기꺼이 나눠주었으며그륀버그 또한 포로수용소에서 빠진 11kg의 살이 그 과정에서 불어났다고 주장했다이처럼 양국의 관계는 나치 독일과 맞서면서 꽤나 우호적인 부분들이 있었다. 1945년 3월 갤럽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인의 55%가 소련은 전쟁 이후에도 미국과 협력이 가능한 신뢰할 수 있는 나라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즉 이 여론조사만 보더라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1945년 당시 모스크바에서 퍼레이드를 지켜봤던 아이젠 하워 장군 또한 전후 소련과 미국이 좋은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었다.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 당시 미국과 소련은 동맹관계였지만 이 시점부터 미국과 소련은 서로가 의심하는 단계에 있었다.)

 

이처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소련의 관계는 파시즘이라는 큰 적에 맞서 싸우는 위치에 있었기에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나치 독일이 항복을 선언하고미국이 원자폭탄을 가지게 되면서 점차 낙관적인 전망에서 서로를 의심하는 관계 더 나아가 전쟁 이후에는 적대적인 관계로 변모했다고 할 수 있다비록 단기간이지만미국과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서로를 믿고 의지하던 관계였다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6년 윈스턴 처칠의 철의장벽(Iron Curtain)’ 발언과 1947년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선포하면서 미국과 소련은 완벽한 적대관계가 된다.

 

참고자료

 

독소전쟁사데이비드 글랜츠열랜책들, 2007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올리버 스톤들녘,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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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평전 - 권력의 화신, 두 얼굴의 기회주의자
김삼웅 지음 / 두레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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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현대사는 알면 알수록 참으로 역동적이다. 1945년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우리 역사에서는 여러모로 슬픈 일도 많았고, 황당한 일도 많았으며, 잔인한 역사도 많았다. 해방 이후 미소냉전에 의한 남북분단과 1950년 한국전쟁 그리고 자유당 독재와 박정희의 유신 독재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는 알면 알수록 비판적인 역사적 고찰을 요구하게 된다. 그것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역사가 학살과 독재 그리고 국가폭력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이러한 악순환의 어디서부터가 시작일까?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다보면 이와 같은 필연적인 질문들을 던지게 만든다. 한국 현대사의 이면을 비판적으로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시점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으로부터 찾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참으로 오랜 세월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그는 일본이 강화도를 침략하던 조선후기에 태어나 박정희 정권이 베트남 전쟁에 전투부대를 파병하던 1965년에 사망했다. 그는 904개월 동안의 삶을 살았다. 경력으로만 보자면 그는 남부럽지 않은 권위와 인생사를 가지고 있다.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던 조선 후기 그는 독립협회의 지도자인 서재필의 지원 및 도움을 받아 초기 개화운동에 나섰고, 이후 미국에 유학가서 지금 기준으로도 세계 최고수준의 대학인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를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1919년 상해에서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총령 즉 대통령으로 임명되었던 인물이었고, 대한인동지회와 구미위원부의 총 책임자였으며, 해방 이후 탄생한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또한 대통령에 있으면서 한국전쟁이라는 전쟁을 겪었고, 이후 10년 동안 대통령 자리에 있었다.

 

이렇게만 본다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상당히 훌륭한 인생을 살아온 인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를 사랑하는 이들에겐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적 이면에 숨겨진 이승만의 실체는 엄청난 비리와 만행 그리고 악행의 대명사였다. 그가 저지른 악행과 만행은 1907년 장인환 전명운 열사의 친일친미제국주의자 스티븐슨 처단에 대한 재판에서 변호를 거부한 것부터 시작해서 1960년 혁명 당시 시위대에 대한 발포로 수백 명을 죽이고 수천 명을 다치게 한 것으로 끝난다. 즉 이승만의 무수히 많은 악행은 무려 50년 동안 그가 저질러온 인생사이기도 하다.

 

전 독립기념관장인 김삼웅 선생은 이명박 정권이 끝나가던 2012년에 독부 이승만 평전을 집필했었다. 친일파 문제와 독립운동가 그리고 민주화운동가의 생애를 재조명하는데 한평생을 바친 민족주의자 김삼웅 선생이 평가한 이승만은 말 그대로 기회주의자이자 악의화신이었다. 그리고 이승만에 대한 건설적이고 체계적인 비판은 역사를 자기들 마음대로 왜곡하려는 친미 뉴라이트 세력들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기도 했다.

 

나는 김삼웅 선생이 쓴 독부 이승만 평전을 박근혜가 국정 교과서를 추진하던 2015년에 읽었었다. 당시 이 책을 완독했던 나는 왜곡된 독립운동가이자 독재자인 이승만이 저지른 악행들을 보면서 치를 떨었었다. 왜냐하면 책에 나온 내용들은 과거 내가 알고 있던 이승만하고는 전혀 다른 내용들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제국주의 국가 미국과 그 관료집단들의 이해관계 및 정세판단에 발맞추기 위해 지난 3년 사이에 한국은 전통이 지배하는 느림보 나라에서 활발하고 웅성대는 산업 경제의 한 중심으로 변했다는 망언을 했던 그의 모습에서 그가 정말 나라의 독립을 위한 사람인지를 진지하게 의심하도록 만들었다. 그 외에도 그가 독립운동을 한다는 과정에서 저지른 일들은 상식적인 판단을 가진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었다.

 

저자가 책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승만에 대해 광신적인 찬양을 일삼는 서적들은 이미 국내에 널려있다. 대게는 이승만을 참된 반일 독립운동가나 건국의 아버지 그리고 부국의 아버지로 미화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책들이 대다수다. 이러한 이승만 찬양 흐름은 이른바 박근혜 정권을 끝낸 촛불혁명으로 새 정권이 들어섰음에도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 COVID-19가 한참인 올해에도 엄마라는 단어를 빙자한 극우 반공 세력이 쓴 엄마가 들려주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 이야기같은 똘이장군식 논리를 보유한 책들이 적잖은 인기를 끌기까지 했었다. 나 또한 서점에 들렀다가 엄마의 이름을 모욕하고 빙자한 그 책을 보고 충격과 분노를 금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사실 이런류의 책들이 이승만을 미화하기 위해 주장하는 논리는 생각보다 심플하다. 즉 좌편향으로 물들어 있는 좌익 빨갱이 세력들이 역사를 왜곡하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부정하며, 북한을 옹호한다는 식의 수준 낮은 공격이다. 물론 이런 식의 주장들은 말 그대로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뉴라이트 비판이라는 책을 쓴 김기협은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자본주의의 우월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 때문에 북한의 성취를 원천적으로 부정할 필요가 생겨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한 역사의 대목 대목을 하나도 빠짐없이 성공의 역사로만 해석해야 하는 편향성이며, 공산주의를 택했다는 이유만으로 북한을 실패할 운명의 나라로, 자본주의를 택했다는 이유만으로 남한을 성공할 운명의 나라로 규정한다는 것은 역사학의 문법에 맞지 않는 쉽게 말해서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그래서 뉴라이트 역사관을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원리주의 성향의 유사종교가 떠오르는 것이다.”

 

출처 : 뉴라이트 비판 p.186

 

쉽게 말해 이들은 역사를 종교의 영역 즉 이승만교로 접근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영화 빅쇼트(The Big Short)’로 유명한 아담 맥케이 감독은 아들 부시 대통령 시기 부통령을 지낸 인물인 딕 체니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다. 그 영화가 바로 바이스(Vice)’. 영화 바이스는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 수십만의 이라크인을 죽이고, 명분없는 전쟁을 조작하고 국민을 기만했던 딕 체니의 일생사를 블랙 코미디 형식으로 전개한 명작이다. 영화에서 나오는 쿠키 영상은 영화를 본 일부 미국인들의 토론 및 소감을 보여준다. 거기서 트럼프를 지지하는 성향의 한 백인 남성은 영화를 보면서 깨달았어요. 모든 게 다 좌편향이에요. 다 좌익 편향된 시각에서 만들어진거잖아요라고 대답한다. 이 답변을 들은 한 젊은 남성은 전부 다 팩트 잖아요. 전문가들의 검증을 거쳤을 것이고요. 사실인데 진보 보수가 무슨 상관이에요!”라고 말하자, 트럼프를 지지하는 백인 남성의 답변은 이러했다. “빨갱이 새끼 지랄하네! 너는 힐러리나 지지하겠지!”

 

상당히 흥미로운 구절이다. 그러니까 이들에게는 팩트를 얘기해도 좌편향이고, 팩트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빨갱이인 것이다. 이것을 그대로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접근하는 이들에게 적용해볼 수 있다. 이들은 이승만을 말 그대로 성스러운 건국의 아버지로 생각하면서, 팩트에 입각하여 이승만에 대해 비판을 하면 영화 바이스에 나온 트럼프 지지자 아저씨처럼 그런식의 반응을 보인다. 물론 이런 반응은 말 그대로 개인적 감정에 기반을 두고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하기도 하지만, 학술적인 영역에서도 반공무쌍을 찍어가며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승만에 대해 좌편향, 종북, 빨갱이, 남로당 사관과 같은 용어를 사용해가며 이상한 비난을 하는 뉴라이트들의 이승만 옹호 및 찬양 논리는 그러한 논리를 기반에 두고 있는 것이다.

 

2020년 들어 COVID-19가 전 세계를 강타하여 우울하고 힘이 빠질 시기, 위에서 언급한 엄마를 빙자한 이승만 찬양물이 나온 것은 그 우울함과 분노를 자극시켜주는 것 같다. 그 외에도 기파랑 출판사나 뉴라이트 세력들이 낸 이승만 전기가 시중에서 도는 것은 그러한 감정을 더더욱 부채질 한다. 이런 과정에서 전 독립기념관장인 김삼웅 선생이 독부 이승만 평전의 개정판을 8년 만에 출간했다는 소식은 여러모로 기쁘고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 때문인지 이번에 개정판을 읽게 된 나는 상당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고, 다시 한 번 뉴라이트 세력들이 주장하는 천박한 친미 제국주의 논리 그리고 자본주의 논리에 대해 비판적으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이번에 나온 독부 이승만 평전개정판은 사실 내용면에선 8년 전에 나온 책하고 큰 차이는 없다. 또한 책의 성향도 저자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우파적 민족주의 성향과 백범 김구를 높이 평가하는 부분도 아주 강력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점들이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나 자신과는 분명히 안 맞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훌륭한 이승만 비판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국내에 출판된 이승만 평전중에 이만큼이라도 이승만에 대해 비판적으로 분석한 책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대게는 뉴라이트 성향의 미국사 교수 이주영이 쓴 건국 대통령 이승만 평전 정도의 수준에서 머물러 있다. 따라서 내가 이 개정판을 높이 평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승만에 대해 좀 더 얘기하겠다. 내가 생각하는 이승만 또한 책 저자가 생각하는 것 못지않게(혹은 그 이상으로) 매우 부정적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이승만은 미소냉전에서 반소 반공의 지도자로써 통일운동을 지향하지 않고, 오로지 분단정부만을 고집했던 그 사람의 행적은 사회주의나 적어도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사회를 원했던 70% 이상의 민중들의 염원과 바램을 무참히 짓밟았다. 그리고 대한민국이라는 정부수립 과정에서 제주도와 여수순천에서 대대적인 민간인 학살극을 벌여 수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고, 한국전쟁 시기에는 10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조직적으로 학살당했다. 한국전쟁 초기 2~3개월 동안 이승만이 학살한 보도연맹원만 해도 30만 명을 넘긴다. 말 그대로 이승만은 코리안 킬링필드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에서 대대적으로 강조한 바와 같이 이승만이 저지른 악행들과 만행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지만, 국민보도연맹 학살은 그중에서 가장 천인공노할 만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표현은 조금은 과격할지는 몰라도 도올 김용옥이 말한 바와 같이 몇 년 전 스페인 내전을 일으키고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으며 독재 권력을 행사한 파시스트 프랑코처럼 파묘를 당하는 수준으로 우리 또한 그를 역사의 심판대에 올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1975년 반제국주의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베트남인들은 남베트남의 권력자이자 독재자이기도 한 응오딘지엠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왜냐하면 독재자 응오딘지엠이 지향했던 길은 반민족 반민중 친외세 그리고 반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응오딘지엠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은 과거 프랑스와 미국에게 빌붙었다가 미국으로 도망친 해외 망명자 일부만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유난히 이승만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작업이 힘을 얻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한국이라는 나라가 친일과 친미제국주의를 청산하지 못한 반민중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 COVID-19가 전 세계적으로 돌고 있는 와중에 볼리비아나 베네수엘라 같은 중남미에서는 좌파와 사회주의가 다시 힘을 얻고 있다. 즉 이승만이 추구하던 자유주의와 천박한 자본주의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이승만이 가장 사랑했던 자본주의 국가 미국이 COVID-19 대처에서 가장 무능하다는 점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아옌데 정권 3년 동안 사회주의를 경험하다 17년간 피노체트 군사독재를 겪으며 신자유주의를 경험했던 칠레는 올해 10월 피노체트 헌법을 국민의 투쟁으로 폐지했다. 코로나 감염이 크게 번진 이탈리아나 프랑스 등에서도 사회주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처럼 이승만이 추구했던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아무튼 세계는 이승만이 원하는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칠레에선 민중의 힘으로 피노체트의 잔재를 무너뜨렸다. 우리 또한 이승만의 잔재들을 4.19 혁명 이후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 번 무너뜨려야 한다. 김삼웅 선생이 쓴 독부 이승만 평전개정판은 읽는 이에게 이승만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타락하고 무능했으며, 무수히 많은 악행을 저질렀는지를 알려줄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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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기 동지는 석방되야 한다! 그를 불법적이고 부당한 방법으로 감옥에 보낸건 박근혜 정권이었지만, 정작 그를 장기수로 만들고 있는 것은 문재인 정권이다. 민주당이든 국민의 힘이든 이석기 동지 문제에 있어선 정말이지 똑같은 놈들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석기 동지는 석방되야 한다! 반미반제 자주의 길로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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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20-12-06 1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옳소 !!!!!!! 이석기 동지는 석방되어야 합니다 !!!!!!

NamGiKim 2020-12-06 18:23   좋아요 0 | URL
반미자주! 아 민족해방하고싶다!
 

(폴포트 사진) 


어제저녁 미국 히스토리 채널(History Channel)에서 만든 다큐멘터리를 봤다그 다큐멘터리는 캄보디아의 킬링필드(Killing Field)의 대명사로 알려진 폴포트(Pol Pot)의 인생사를 다뤘다캄보디아 여행을 가본사람이라면 킬링필드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세간에 알려진 킬링필드라는 대학살은 인구 800만인 캄보디아에서 300만이 죽었다거나 인구 1/4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물론 이와 같은 학살 수치의 경우 일각에서는 과장된 수치라고 비판을 하기도 한다.

(영화 킬링필드, 1984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킬링필드를 취재했던 미국인 기자 시드니 쉴버그와 캄보디아인 디스 프란의 감동적인 스토리를 담았다. 물론 반공적 성향 때문인지 전두환 시절 대대적으로 단체관람을 국가적으로 실행하기도 했다.)

 

어찌됐든 킬링필드로 인한 무고한 사상자와 피해자가 많았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고사회주의 진영에서도 폴포트 개인과 그의 크메르 루주 정권에 대한 비판도 꽤나 거세다웬만해선 폴포트에 대해 옹호하는 사회주의자들도 거의 없을 정도로 비판을 많이 받기도 한다따라서 오늘은 다큐멘터리를 보고 필자가 생각하는 폴포트는 어떤 인물인지그는 어떠한 인생을 살았는지킬링필드는 어떠한 것인지과연 학살이 있었던 것인지서방의 과장이 있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19세기 인도차이나를 강제로 식민지화한 프랑스는 베트남과 더불어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통치했다.)

 

킬링필드의 대명사로 유명한 폴포트는 1925년 5월 19일 캄보디아의 프렉스바우브 마을에서 태어났다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폴포트의 이름은 살롯사(Saloth Sar)라는 이름을 가졌고, 8남매와 더불어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폴포트가 10살이 되던 해 그의 부모님은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으로 유학을 보냈다프놈펜으로 간 폴포트는 궁중부에서 일하는 사촌누부를 만나 왕궁의 생활상을 목격했다당시 폴포트가 프놈펜에 있던 시절의 캄보디아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속해 있었고프랑스가 내세운 꼭두각시 황제가 다스렸다즉 여기서 폴포트는 부패한 왕족의 생활상을 목격한 것이다.

(젊은 시절 노로돔 시아누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와 일본은 노로돔 시아누크를 꼭두각시 황제로 내세웠다.)

 

이후 폴포트는 캄보디아의 대중종교인 불교를 연구하며 지냈고서구식 학교에 다니며 카톨릭 수녀들에게 쓰기와 읽기를 배웠다폴포트가 16살이 되던 1941년 나치독일에게 점령당한 프랑스는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라는 19살짜리 청년을 허수아비 왕으로 내세웠다그 무렵 폴포트는 시아누크의 이름을 딴 제1의 고등학교에 입학했고여기서 똑똑한 엘리트들과 어울렸으며젊은 공산주의자 이앙 사리와 친구가 된다그리고 미소냉전이 시작되던 1949년 폴포트는 그의 절친 이앙 사리와 함께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고, 24살의 청년 폴포트는 거기서 공산주의 사상을 공부했다당시 그의 친구였던 이앙사리의 증언에 따르면 공산주의 이론 사상보단 민족해방에 더 초점을 두었다고 한다.

(프랑스 파리, 1949년 폴포트는 절친인 이앙 사리와 함께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프랑스는 사회주의가 인기를 끌고 있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군, 1946년에 시작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베트남 뿐만 아니라 라오스 캄보디아로도 확산됐다. 1953년 폴포트 또한 이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그가 공산주의자를 자처하던 1952년 그는 학생잡지에 프랑스가 내세운 꼭두각시 왕과 캄보디아 군주제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다당시 그가 쓴 글의 일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국민은 왕과 왕족을 먹여 살리는 노예인가군주제는 없애야할 악습이다.” 폴포트가 공산주의와 민족해방이라는 주제에 빠져있을 당시 인도차이나에선 전쟁이 벌어졌다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은 프랑스에 맞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프랑스는 인도차이나라는 전쟁의 수렁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1953년 캄보디아로 귀국한 폴포트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하여 베트민의 지원을 받는 캄보디아 혁명조직에 가담한다.

(제네바 회담,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열린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과 라오스 그리고 캄보디아의 독립이 되었다. 그러나 형식적인 독립이었고, 여기서 폴포트는 베트남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스위스 제네바에서 강대국들은 베트남 문제를 합의를 보았고이에 따라 베트남뿐만 아니라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같이 독립하게 되었다제네바 협정에 따라 캄보디아는 형식적인 독립을 얻었지만베트남은 프랑스와의 협상에서 캄보디아 문제를 일정부분 양보한 상황이었다이 시점부터 폴포트는 베트남에 대해 불신을 가지게 되었다프랑스로부터 독립을 한 캄보디아는 여전히 부패한 군주인 노로돔 시아누크가 통치하고 있었다즉 프랑스 식민지 시절 꼭두각시였던 시아누크가 이제는 이른바 건국의 아버지로 캄보디아에서 추앙을 받았던 것이다그리고 이제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시아누크는 반공을 내세웠다.

(당시 노로돔 시아누크, 프랑스가 내세웠던 꼭두각시인 그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엔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았다. 이것은 캄보디아의 공산주의자들에게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1956년 폴포트는 혁명의지를 포기하지 않은 채 캄보디아의 명문 고등학교에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당시 학교를 다녔던 학생들의 말에 따르면 그는 역사 선생으로 유명했고학생들이 많이 따랐다고 한다또한 폴포트는 낮에는 교사 밤에는 선생으로 활동하며 옹카르라는 조직에서 활동했고, 1962년 캄보디아의 옹카르 조직은 폴포트를 지도자로 결정했다당시 캄보디아의 왕 시아누크는 군주제를 유지하며 반공주의를 내세웠다다른 한편으론 일종에 중립 외교 노선을 택하기도 했다.

(동남아시아 일대에 사는 고산족들, 몽타냐드라고 불리는 이들은 베트남과 라오스 그리고 캄보디아 고산지대와 밀림속에서 원시적인 삶을 살아가는 소수민족이다. 노로돔 시아누크를 피해 도망쳤던 폴포트는 이들과 함께 살며 이들을 포섭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폴포트의 지지층이 되기도 했다.)

 

시아누크의 반공주의적 정책으로 폴포트와 캄보디아 공산주의자들이 힘을 잃고 탄압을 받았다그 때문에 폴포트는 캄보디아와 베트남 국경지대에 있는 산악지대로 숨었고그 지역 소수민족인 몽타냐드(Montagnard)라 불리는 고산족들과 함께 살며 공산주의의 꿈을 키웠다히스토리 채널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이때의 삶이 그의 공산주의적 비전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거기서 폴포트는 자신의 혁명관에 따를 수 있는 열정적인 지지자들을 형성할 수 있었다그리고 다시 한 번 국제정세는 폴포트에게 유리하게 전개됐다.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호치민 루트, 호치민 루트는 1950년대 후반 만들어진 북베트남의 남파통로다.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서 베트콩 투쟁을 벌이는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호치민 루트를 통해 물적 인적 지원을 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1960년대 일어난 베트남 전쟁은 폴포트에게 있어 엄청난 기회가 되었다.)

 

제네바 협정에 따라 남북으로 갈라진 베트남에선 이른바 베트콩이라고 불리는 혁명조직이 활동했고이들은 북베트남의 호치민으로부터 물적 인적인 지원을 받았다이에 따라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사이에 호치민 루트(Ho Chi Minh Trail)가 자연스럽게 생겼는데호치민 루트는 시아누크가 다스리던 캄보디아까지 연결되었다제네바 협정을 위반하며 베트남 문제에 지속적으로 개입하던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고과거 프랑스가 그랬듯이 미국 또한 베트남이라는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마오의 문화혁명 포스터, 대약진 운동 이후 1960년대 마오쩌둥이 전개한 문혁은 폴포트에게 영향을 주었다. 물론 폴포트는 그 문혁의 광기를 훨씬 더 악용했다.)

 

1960년대 당시 노로돔 시아누크는 중립을 자처했고캄보디아 내의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군사기지를 암묵적으로 허용해줬다폴포트가 고산족들과 같이 숨어서 살던 곳도 호치민 루트가 연결된 곳이었고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폴포트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그 덕분에 폴포트는 하노이와 베이징에 초대를 받기도 했고, 1960년대 당시 폴포트는 중국 마오쩌둥이 전개한 문화대혁명(Cultural Revolution)을 직접 보게 되었다그리고 마오쩌둥이 전개한 문화대혁명은 폴포트에게 또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물론 안 좋은 방향으로 말이다고산족들과의 삶과 마오쩌둥의 문혁은 폴포트에게 있어서 통일 이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닉슨의 캄보디아 침공, 1970년 닉슨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을 소탕한다는 이유를 들어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캄보디아를 폭격하는 미군 B-52 폭격기, 캄보디아 침공과정에서 미군은 B-52 폭격기와 같은 최신식 무기를 동원해 수십만의 캄보디아인을 학살했다.)


(론 놀, 미국은 친미주의자인 론 놀을 통해 노로돔 시아누크를 축출하고 캄보디아에 친미정권을 세웠다. 그러나 이것은 역으로 캄보디아인이 폴포트를 지지하는 이유가 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패배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당시 대통령이던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은 1969년 이른바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을 발표하여 베트남에서의 철수를 목표로 했지만캄보디아 국경지대에 대한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다그리고 1970년 닉슨은 캄보디아에서 친미주의자 론 놀(Ron Nol)을 내세워 친미쿠데타를 획책하고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을 소탕한다는 목적 하에 이른바 캄보디아 침공을 감행했다이에 따라 미군의 무차별 폭격과 고엽제 투하는 캄보디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그리고 론 놀의 친미정권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1970년 당시 3만 5,000명이던 정부군이 불과 3년 만에 20만 명으로 증가했다.

(프놈펜에 입성한 크메르 루주군, 1975년 수도 프놈펜에 입성한 크메르 루주군은 시민들에게 해방군으로 환영받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농촌으로 강제이주되는 도시인들, 1975년 정권을 잡은 폴포트는 도시사람들을 거의 다 농촌으로 보냈다.)

 

그러나 미군의 폭격으로 반미감정이 생긴 캄보디아인들은 론 놀과 정부군을 지지하지 않았다이에 따라 폴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Khmer Rouge)가 대대적인 민중의 지원을 받게 된다. 1973년 미국이 북베트남과 파리평화협정을 맺고 베트남에서 완벽히 철군하게 되면서 미국의 지원을 받던 론 놀 정권은 점차 불리해지기 시작했다당시 캄보디아에선 론 놀의 정부군과 폴포트의 크메르 루주군이 전투를 치렀다이 전쟁은 크메르 루주군에게 점차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1975년 4월 16일엔 미해병대가 캄보디아 프놈펜에 있던 대사관에서 탈출했다그리고 1975년 4월 17일 크메르 루주가 프놈펜을 장악하며 론 놀 정권은 무너지고 말았다그리고 이것은 북베트남의 통일보다 2주나 더 빨랐다.

(S-21, 뚜옹슬랭이라고 불리는 이곳에선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과 학대 그리고 폭행이 있었다.)


(킬링필드 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유골, 과장되었다는 주장을 떠나서 킬링필드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다.)

 

크메르 루즈군이 수도 프놈펜에 입성하자 민중은 크메르 루주군을 환영했다그러나 이것도 잠시였다캄보디아에서 정권을 잡은 폴포트는 전대미문의 실험을 캄보디아에서 실행하기 시작했다도시에 살던 캄보디아인들이 강제로 농촌으로 이주 당했고학교가 폐쇄되었으며 서적의 80%가 혁명에 불필요하다는 이유로 폐기되었다크메르 루주 정권의 핵심 정책은 범국가적인 농업화였다그는 캄보디아의 300만 도시민에게 모두 농업에 종사하도록 명령했다.

 

1976년 1월 크메르 루주 정권은 헌법을 공포하고 폴포트가 지도자가 되었다. 1976년 중반 폴포트와 그의 동료들은 베트남에 대한 반감을 이용하여 베트남의 지원을 받거나 그렇게 의심받는 군인과 당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기 시작했다. S-21로 알려진 비밀 심문 시설인 뚜옹슬랭에서 고문과 조작이 있었고그 시설에서만 1만 4,000명이 거쳐 갔으며 이 중 절반이 사형 당했다뿐만 아니라 적잖은 사람들이 영양실조·과로·질병·처형 등으로 강제로 소개된 농촌과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1978년 프놈펜을 함락시킨 베트남군, 베트남 전쟁 이후 폴포트의 크메르 루주군은 베트남을 자극하는 일을 많이 했다. 베트남의 섬인 푸꾸욱올 바로 점령해 버린 것을 시작으로 캄보디아 베트남 국경지대에서 적잖은 민간인 학살을 일으켰다. 그 결과 분노한 베트남은 캄보디아에 주력부대를 보내 폴포트 정권을 전복시켰다.)

 

이러한 폴포트의 의심과 편집증세는 베트남에 대한 맹목적인 적대감 및 적대행동으로 이어졌다킬링필드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폴포트는 다시 한번 반베트남 감정을 드러냈다폴포트는 병사들에게 적들을 마음대로 죽여라하찮은 베트남 놈들을 정글 속 원숭이처럼 깩깩거리며 죽게 하라고 격려하며 베트남에 대한 선제공격을 준비했고, 1977년 4월 30일 베트남 남서부 안장(An Giang)성의 국경도시 쩌우독(Chau Doc)을 공격해 베트남 시민 수백 명을 죽였고그해 9월엔 베트남 국경지역을 포격하고 6개 마을을 점령한 데 이어 6개 사단으로 떠이닌(Tay Ninh)성을 공격해 10km 정도 진격했다그리고 그곳에서 천명 이상의 베트남 민간인들을 또 학살했다.

(캄보디아에 주둔하던 베트남군, 폴포트 정권을 몰아낸 베트남군은 캄보디아인들에게 해방군으로 환영받았다. 베트남군은 1989년까지 주둔하다가 철수했다. 그 과정에서 베트남은 캄보디아에 친베트남정권을 세웠었다.)

 

이렇게 되자 베트남은 분노했고분노한 하노이 당국은 주력부대를 긁어모아 1978년 12월 크메르 루주군을 공격했다여기서 베트남측은 35만 명 이상의 주력부대를 사용하여 캄보디아의 폴포트 정권을 전복시키고단기간에 수도 프놈펜에 진입했다사실 베트남과 캄보디아는 매우 사이가 안좋은 나라다그러나 베트남군이 프놈펜에 진입하자 아이러니하게도 캄보디아 민중은 베트남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했다그 이유는 킬링필드를 거치면서 캄보디아 민중이 폴포트를 증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베트남군이 입성한 이후 도시는 다시 정상화되었고이산가족들은 다시 만나게 되었으며도시이주정책으로 만들어진 강제수용소들은 베트남군에 의해 폐쇄했다물론 이 과정에서 캄보디아를 지원하던 중국의 덩샤오핑이 베트남을 침공하기도 했고미국이 폴포트 정권을 지원해주기도 했다즉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이러한 배경에서 일어난 것이다.

(훈센 총리, 1989년에 정권을 잡게 된 훈 센은 지금(2020년 기준)까지도 캄보디아를 통치하고 있다.)

 

폴포트 정권을 무너뜨린 베트남군은 1989년에 철수했다캄보디아에 입성한 베트남은 1979년 친베트남 정권인 이른바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을세운다여기서 도망친 폴포트는 다시 밀림으로 들어가 산발적인 게릴라 저항을 하게 된다즉 여기서 미국이 베트남을 막고자 크메르 루주라는 비이성적 집단을 지원한 것이다이것이 바로 미국이 국제 사회로부터 맹비난을 받았던 결정적인 이유였다. 1989년 베트남군이 철수하자 정글에 있던 폴포트는 새 정부 구성을 논의하고자 했지만베트남 정부군과 새로 등장한 훈센(Hun Sen)의 정부군과 충돌하면서 크메르 루주 사이에서도 내분이 일어났다베트남 철군 이후엔 1992년까지 UN이 캄보디아를 접수하여 관리하기도 했다.

(이앙사리, 어린시절부터 폴포트와 절친이자 혁명동지였던 그는 1990년대 결국 투항했다. 그 결과 폴포트의 크메르 루주는 무너져버렸다.)

 

폴포트가 이끌던 세력들의 내분은 더 심해졌고 1995년엔 부하들의 배신으로 폴포트가 암살당할 뻔하기도 했다그리고 냉전이 끝난 시기 쫓겨났던 노로돔 시아누크가 다시 캄보디아로 복귀하면서 캄보디아에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이렇게 되면서 크메르 루주는 종말의 시대를 맞았다. 1997년이 되었을 때크메르 루주군은 3,000명으로 줄어든 상태였다또한 중국 원조를 착복한 배신자로 규탄 받은 이앙사리는 1996년 숙청에 겁을 먹어서 병사 4,000 명을 이끌고 투항했는데이것은 폴포트에게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다이런 과정에서 폴포트는 자신과 가장 가까웠던 송 센을 처형했다이것은 크메르 루주군의 기준으로 봐도 잘못된 것이었고결국 폴포트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체포되어 서방기자들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이후 폴포트는 다른 죄들까지 물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산중턱에 있는 조잡한 헛간에 가택 연금됐다물론 그는 자신이 집권을 하면서 자신이 저지른 과오에 대해 후회나 반성 같은 건 없었다그러던 1998년 4월 15일 미국에서의 재판과 구금장소 이동이 예정되어 있던 폴포트는 심장마비로 급사해버렸다이렇게 해서 폴포트의 인생도 막을 내린다.

(인생 말년의 폴포트, 1990년대까지 밀림에서 지내던 폴포트는 결국 1998년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일각에서는 그가 저지른 과오에 비해 너무 편하게 죽은게 아니냐는 말을 하기도 한다.)

 

폴포트는 많은 진영에서 비판받는 인물이다초기에 그는 캄보디아를 독립시키고 싶어했고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하기도 했지만 1975년 통일을 이룩하고 나서 그가 보인 행동은 대학살 극이었다모든 도시민들을 농촌으로 옮기고 원시적인 삶을 강조한 것은 공산주의 사상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행위였다모든 사람들이 조직적인 학살로만 죽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이 폴포트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캄보디아에 현재 중년 남성들이 별로 없는 이유가 그 당시 학살로 많이 죽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적잖게 있다.

 

그러나 세간에 알려진 킬링필드의 학살 수치가 과장되었다는 주장도 있다즉 300만 학살설이나 250만 그리고 200만 학살설이 과장되었다는 것이다이것은 상당히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하다사실 캄보디아 인구가 800만이기 때문에 300만을 죽인다는 것은 좀 무리한 견해다물론 인구변동이 폴포트 집권시기 있던 걸 생각하면 많은 사람들이 죽은건 명백한 사실이다필자의 견해로는 폴포트의 킬링필드 희생자는 최소 80만에서 150만 사이로 보고 있다.

 

폴포트에 대해 논할 때 지적해야하는 한 가지가 더 있다필자 또한 폴포트를 매우 싫어하고 비판하는 입장이지만서방의 편향적 시각에 대해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왜냐하면 폴포트가 저지른 제2차 킬링필드는 많이 비판받지만, 1969년부터 1973년까지 미국이 저지른 제1차 킬링필드에 대해선 별다른 비판점이 이슈화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이것은 폴포트와 크메르 루주군이 정권을 잡게 되는 계기를 제공했고최소 40만에서 80만 명의 캄보디아인을 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많게는 100만까지도 잡는다즉 이처럼 정보의 편향성은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아무튼 폴포트는 사회주의하고는 전혀 연관이 없는 짓을 저질렀고사회주의자라고 하기도 부끄러운 악인이라고 생각한다따라서 좌우이념을 떠나서 폴포트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참고자료

 

동남아시아사소병국책과함께, 2020

 

미국의 베트남 전쟁조너선 닐책갈피, 2004

 

천년전쟁오정환종문화사 2017

 

히스토리 채녈 다큐폴포트 킬링필드의 학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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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7 23: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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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8 01: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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