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포트 사진) 


어제저녁 미국 히스토리 채널(History Channel)에서 만든 다큐멘터리를 봤다그 다큐멘터리는 캄보디아의 킬링필드(Killing Field)의 대명사로 알려진 폴포트(Pol Pot)의 인생사를 다뤘다캄보디아 여행을 가본사람이라면 킬링필드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세간에 알려진 킬링필드라는 대학살은 인구 800만인 캄보디아에서 300만이 죽었다거나 인구 1/4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물론 이와 같은 학살 수치의 경우 일각에서는 과장된 수치라고 비판을 하기도 한다.

(영화 킬링필드, 1984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킬링필드를 취재했던 미국인 기자 시드니 쉴버그와 캄보디아인 디스 프란의 감동적인 스토리를 담았다. 물론 반공적 성향 때문인지 전두환 시절 대대적으로 단체관람을 국가적으로 실행하기도 했다.)

 

어찌됐든 킬링필드로 인한 무고한 사상자와 피해자가 많았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고사회주의 진영에서도 폴포트 개인과 그의 크메르 루주 정권에 대한 비판도 꽤나 거세다웬만해선 폴포트에 대해 옹호하는 사회주의자들도 거의 없을 정도로 비판을 많이 받기도 한다따라서 오늘은 다큐멘터리를 보고 필자가 생각하는 폴포트는 어떤 인물인지그는 어떠한 인생을 살았는지킬링필드는 어떠한 것인지과연 학살이 있었던 것인지서방의 과장이 있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19세기 인도차이나를 강제로 식민지화한 프랑스는 베트남과 더불어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통치했다.)

 

킬링필드의 대명사로 유명한 폴포트는 1925년 5월 19일 캄보디아의 프렉스바우브 마을에서 태어났다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폴포트의 이름은 살롯사(Saloth Sar)라는 이름을 가졌고, 8남매와 더불어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폴포트가 10살이 되던 해 그의 부모님은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으로 유학을 보냈다프놈펜으로 간 폴포트는 궁중부에서 일하는 사촌누부를 만나 왕궁의 생활상을 목격했다당시 폴포트가 프놈펜에 있던 시절의 캄보디아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속해 있었고프랑스가 내세운 꼭두각시 황제가 다스렸다즉 여기서 폴포트는 부패한 왕족의 생활상을 목격한 것이다.

(젊은 시절 노로돔 시아누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와 일본은 노로돔 시아누크를 꼭두각시 황제로 내세웠다.)

 

이후 폴포트는 캄보디아의 대중종교인 불교를 연구하며 지냈고서구식 학교에 다니며 카톨릭 수녀들에게 쓰기와 읽기를 배웠다폴포트가 16살이 되던 1941년 나치독일에게 점령당한 프랑스는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라는 19살짜리 청년을 허수아비 왕으로 내세웠다그 무렵 폴포트는 시아누크의 이름을 딴 제1의 고등학교에 입학했고여기서 똑똑한 엘리트들과 어울렸으며젊은 공산주의자 이앙 사리와 친구가 된다그리고 미소냉전이 시작되던 1949년 폴포트는 그의 절친 이앙 사리와 함께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고, 24살의 청년 폴포트는 거기서 공산주의 사상을 공부했다당시 그의 친구였던 이앙사리의 증언에 따르면 공산주의 이론 사상보단 민족해방에 더 초점을 두었다고 한다.

(프랑스 파리, 1949년 폴포트는 절친인 이앙 사리와 함께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프랑스는 사회주의가 인기를 끌고 있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군, 1946년에 시작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베트남 뿐만 아니라 라오스 캄보디아로도 확산됐다. 1953년 폴포트 또한 이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그가 공산주의자를 자처하던 1952년 그는 학생잡지에 프랑스가 내세운 꼭두각시 왕과 캄보디아 군주제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다당시 그가 쓴 글의 일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국민은 왕과 왕족을 먹여 살리는 노예인가군주제는 없애야할 악습이다.” 폴포트가 공산주의와 민족해방이라는 주제에 빠져있을 당시 인도차이나에선 전쟁이 벌어졌다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은 프랑스에 맞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프랑스는 인도차이나라는 전쟁의 수렁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1953년 캄보디아로 귀국한 폴포트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하여 베트민의 지원을 받는 캄보디아 혁명조직에 가담한다.

(제네바 회담,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열린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과 라오스 그리고 캄보디아의 독립이 되었다. 그러나 형식적인 독립이었고, 여기서 폴포트는 베트남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스위스 제네바에서 강대국들은 베트남 문제를 합의를 보았고이에 따라 베트남뿐만 아니라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같이 독립하게 되었다제네바 협정에 따라 캄보디아는 형식적인 독립을 얻었지만베트남은 프랑스와의 협상에서 캄보디아 문제를 일정부분 양보한 상황이었다이 시점부터 폴포트는 베트남에 대해 불신을 가지게 되었다프랑스로부터 독립을 한 캄보디아는 여전히 부패한 군주인 노로돔 시아누크가 통치하고 있었다즉 프랑스 식민지 시절 꼭두각시였던 시아누크가 이제는 이른바 건국의 아버지로 캄보디아에서 추앙을 받았던 것이다그리고 이제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시아누크는 반공을 내세웠다.

(당시 노로돔 시아누크, 프랑스가 내세웠던 꼭두각시인 그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엔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았다. 이것은 캄보디아의 공산주의자들에게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1956년 폴포트는 혁명의지를 포기하지 않은 채 캄보디아의 명문 고등학교에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당시 학교를 다녔던 학생들의 말에 따르면 그는 역사 선생으로 유명했고학생들이 많이 따랐다고 한다또한 폴포트는 낮에는 교사 밤에는 선생으로 활동하며 옹카르라는 조직에서 활동했고, 1962년 캄보디아의 옹카르 조직은 폴포트를 지도자로 결정했다당시 캄보디아의 왕 시아누크는 군주제를 유지하며 반공주의를 내세웠다다른 한편으론 일종에 중립 외교 노선을 택하기도 했다.

(동남아시아 일대에 사는 고산족들, 몽타냐드라고 불리는 이들은 베트남과 라오스 그리고 캄보디아 고산지대와 밀림속에서 원시적인 삶을 살아가는 소수민족이다. 노로돔 시아누크를 피해 도망쳤던 폴포트는 이들과 함께 살며 이들을 포섭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폴포트의 지지층이 되기도 했다.)

 

시아누크의 반공주의적 정책으로 폴포트와 캄보디아 공산주의자들이 힘을 잃고 탄압을 받았다그 때문에 폴포트는 캄보디아와 베트남 국경지대에 있는 산악지대로 숨었고그 지역 소수민족인 몽타냐드(Montagnard)라 불리는 고산족들과 함께 살며 공산주의의 꿈을 키웠다히스토리 채널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이때의 삶이 그의 공산주의적 비전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거기서 폴포트는 자신의 혁명관에 따를 수 있는 열정적인 지지자들을 형성할 수 있었다그리고 다시 한 번 국제정세는 폴포트에게 유리하게 전개됐다.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호치민 루트, 호치민 루트는 1950년대 후반 만들어진 북베트남의 남파통로다.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서 베트콩 투쟁을 벌이는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호치민 루트를 통해 물적 인적 지원을 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1960년대 일어난 베트남 전쟁은 폴포트에게 있어 엄청난 기회가 되었다.)

 

제네바 협정에 따라 남북으로 갈라진 베트남에선 이른바 베트콩이라고 불리는 혁명조직이 활동했고이들은 북베트남의 호치민으로부터 물적 인적인 지원을 받았다이에 따라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사이에 호치민 루트(Ho Chi Minh Trail)가 자연스럽게 생겼는데호치민 루트는 시아누크가 다스리던 캄보디아까지 연결되었다제네바 협정을 위반하며 베트남 문제에 지속적으로 개입하던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고과거 프랑스가 그랬듯이 미국 또한 베트남이라는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마오의 문화혁명 포스터, 대약진 운동 이후 1960년대 마오쩌둥이 전개한 문혁은 폴포트에게 영향을 주었다. 물론 폴포트는 그 문혁의 광기를 훨씬 더 악용했다.)

 

1960년대 당시 노로돔 시아누크는 중립을 자처했고캄보디아 내의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군사기지를 암묵적으로 허용해줬다폴포트가 고산족들과 같이 숨어서 살던 곳도 호치민 루트가 연결된 곳이었고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폴포트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그 덕분에 폴포트는 하노이와 베이징에 초대를 받기도 했고, 1960년대 당시 폴포트는 중국 마오쩌둥이 전개한 문화대혁명(Cultural Revolution)을 직접 보게 되었다그리고 마오쩌둥이 전개한 문화대혁명은 폴포트에게 또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물론 안 좋은 방향으로 말이다고산족들과의 삶과 마오쩌둥의 문혁은 폴포트에게 있어서 통일 이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닉슨의 캄보디아 침공, 1970년 닉슨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을 소탕한다는 이유를 들어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캄보디아를 폭격하는 미군 B-52 폭격기, 캄보디아 침공과정에서 미군은 B-52 폭격기와 같은 최신식 무기를 동원해 수십만의 캄보디아인을 학살했다.)


(론 놀, 미국은 친미주의자인 론 놀을 통해 노로돔 시아누크를 축출하고 캄보디아에 친미정권을 세웠다. 그러나 이것은 역으로 캄보디아인이 폴포트를 지지하는 이유가 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패배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당시 대통령이던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은 1969년 이른바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을 발표하여 베트남에서의 철수를 목표로 했지만캄보디아 국경지대에 대한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다그리고 1970년 닉슨은 캄보디아에서 친미주의자 론 놀(Ron Nol)을 내세워 친미쿠데타를 획책하고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을 소탕한다는 목적 하에 이른바 캄보디아 침공을 감행했다이에 따라 미군의 무차별 폭격과 고엽제 투하는 캄보디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그리고 론 놀의 친미정권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1970년 당시 3만 5,000명이던 정부군이 불과 3년 만에 20만 명으로 증가했다.

(프놈펜에 입성한 크메르 루주군, 1975년 수도 프놈펜에 입성한 크메르 루주군은 시민들에게 해방군으로 환영받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농촌으로 강제이주되는 도시인들, 1975년 정권을 잡은 폴포트는 도시사람들을 거의 다 농촌으로 보냈다.)

 

그러나 미군의 폭격으로 반미감정이 생긴 캄보디아인들은 론 놀과 정부군을 지지하지 않았다이에 따라 폴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Khmer Rouge)가 대대적인 민중의 지원을 받게 된다. 1973년 미국이 북베트남과 파리평화협정을 맺고 베트남에서 완벽히 철군하게 되면서 미국의 지원을 받던 론 놀 정권은 점차 불리해지기 시작했다당시 캄보디아에선 론 놀의 정부군과 폴포트의 크메르 루주군이 전투를 치렀다이 전쟁은 크메르 루주군에게 점차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1975년 4월 16일엔 미해병대가 캄보디아 프놈펜에 있던 대사관에서 탈출했다그리고 1975년 4월 17일 크메르 루주가 프놈펜을 장악하며 론 놀 정권은 무너지고 말았다그리고 이것은 북베트남의 통일보다 2주나 더 빨랐다.

(S-21, 뚜옹슬랭이라고 불리는 이곳에선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과 학대 그리고 폭행이 있었다.)


(킬링필드 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유골, 과장되었다는 주장을 떠나서 킬링필드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다.)

 

크메르 루즈군이 수도 프놈펜에 입성하자 민중은 크메르 루주군을 환영했다그러나 이것도 잠시였다캄보디아에서 정권을 잡은 폴포트는 전대미문의 실험을 캄보디아에서 실행하기 시작했다도시에 살던 캄보디아인들이 강제로 농촌으로 이주 당했고학교가 폐쇄되었으며 서적의 80%가 혁명에 불필요하다는 이유로 폐기되었다크메르 루주 정권의 핵심 정책은 범국가적인 농업화였다그는 캄보디아의 300만 도시민에게 모두 농업에 종사하도록 명령했다.

 

1976년 1월 크메르 루주 정권은 헌법을 공포하고 폴포트가 지도자가 되었다. 1976년 중반 폴포트와 그의 동료들은 베트남에 대한 반감을 이용하여 베트남의 지원을 받거나 그렇게 의심받는 군인과 당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기 시작했다. S-21로 알려진 비밀 심문 시설인 뚜옹슬랭에서 고문과 조작이 있었고그 시설에서만 1만 4,000명이 거쳐 갔으며 이 중 절반이 사형 당했다뿐만 아니라 적잖은 사람들이 영양실조·과로·질병·처형 등으로 강제로 소개된 농촌과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1978년 프놈펜을 함락시킨 베트남군, 베트남 전쟁 이후 폴포트의 크메르 루주군은 베트남을 자극하는 일을 많이 했다. 베트남의 섬인 푸꾸욱올 바로 점령해 버린 것을 시작으로 캄보디아 베트남 국경지대에서 적잖은 민간인 학살을 일으켰다. 그 결과 분노한 베트남은 캄보디아에 주력부대를 보내 폴포트 정권을 전복시켰다.)

 

이러한 폴포트의 의심과 편집증세는 베트남에 대한 맹목적인 적대감 및 적대행동으로 이어졌다킬링필드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폴포트는 다시 한번 반베트남 감정을 드러냈다폴포트는 병사들에게 적들을 마음대로 죽여라하찮은 베트남 놈들을 정글 속 원숭이처럼 깩깩거리며 죽게 하라고 격려하며 베트남에 대한 선제공격을 준비했고, 1977년 4월 30일 베트남 남서부 안장(An Giang)성의 국경도시 쩌우독(Chau Doc)을 공격해 베트남 시민 수백 명을 죽였고그해 9월엔 베트남 국경지역을 포격하고 6개 마을을 점령한 데 이어 6개 사단으로 떠이닌(Tay Ninh)성을 공격해 10km 정도 진격했다그리고 그곳에서 천명 이상의 베트남 민간인들을 또 학살했다.

(캄보디아에 주둔하던 베트남군, 폴포트 정권을 몰아낸 베트남군은 캄보디아인들에게 해방군으로 환영받았다. 베트남군은 1989년까지 주둔하다가 철수했다. 그 과정에서 베트남은 캄보디아에 친베트남정권을 세웠었다.)

 

이렇게 되자 베트남은 분노했고분노한 하노이 당국은 주력부대를 긁어모아 1978년 12월 크메르 루주군을 공격했다여기서 베트남측은 35만 명 이상의 주력부대를 사용하여 캄보디아의 폴포트 정권을 전복시키고단기간에 수도 프놈펜에 진입했다사실 베트남과 캄보디아는 매우 사이가 안좋은 나라다그러나 베트남군이 프놈펜에 진입하자 아이러니하게도 캄보디아 민중은 베트남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했다그 이유는 킬링필드를 거치면서 캄보디아 민중이 폴포트를 증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베트남군이 입성한 이후 도시는 다시 정상화되었고이산가족들은 다시 만나게 되었으며도시이주정책으로 만들어진 강제수용소들은 베트남군에 의해 폐쇄했다물론 이 과정에서 캄보디아를 지원하던 중국의 덩샤오핑이 베트남을 침공하기도 했고미국이 폴포트 정권을 지원해주기도 했다즉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이러한 배경에서 일어난 것이다.

(훈센 총리, 1989년에 정권을 잡게 된 훈 센은 지금(2020년 기준)까지도 캄보디아를 통치하고 있다.)

 

폴포트 정권을 무너뜨린 베트남군은 1989년에 철수했다캄보디아에 입성한 베트남은 1979년 친베트남 정권인 이른바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을세운다여기서 도망친 폴포트는 다시 밀림으로 들어가 산발적인 게릴라 저항을 하게 된다즉 여기서 미국이 베트남을 막고자 크메르 루주라는 비이성적 집단을 지원한 것이다이것이 바로 미국이 국제 사회로부터 맹비난을 받았던 결정적인 이유였다. 1989년 베트남군이 철수하자 정글에 있던 폴포트는 새 정부 구성을 논의하고자 했지만베트남 정부군과 새로 등장한 훈센(Hun Sen)의 정부군과 충돌하면서 크메르 루주 사이에서도 내분이 일어났다베트남 철군 이후엔 1992년까지 UN이 캄보디아를 접수하여 관리하기도 했다.

(이앙사리, 어린시절부터 폴포트와 절친이자 혁명동지였던 그는 1990년대 결국 투항했다. 그 결과 폴포트의 크메르 루주는 무너져버렸다.)

 

폴포트가 이끌던 세력들의 내분은 더 심해졌고 1995년엔 부하들의 배신으로 폴포트가 암살당할 뻔하기도 했다그리고 냉전이 끝난 시기 쫓겨났던 노로돔 시아누크가 다시 캄보디아로 복귀하면서 캄보디아에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이렇게 되면서 크메르 루주는 종말의 시대를 맞았다. 1997년이 되었을 때크메르 루주군은 3,000명으로 줄어든 상태였다또한 중국 원조를 착복한 배신자로 규탄 받은 이앙사리는 1996년 숙청에 겁을 먹어서 병사 4,000 명을 이끌고 투항했는데이것은 폴포트에게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다이런 과정에서 폴포트는 자신과 가장 가까웠던 송 센을 처형했다이것은 크메르 루주군의 기준으로 봐도 잘못된 것이었고결국 폴포트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체포되어 서방기자들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이후 폴포트는 다른 죄들까지 물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산중턱에 있는 조잡한 헛간에 가택 연금됐다물론 그는 자신이 집권을 하면서 자신이 저지른 과오에 대해 후회나 반성 같은 건 없었다그러던 1998년 4월 15일 미국에서의 재판과 구금장소 이동이 예정되어 있던 폴포트는 심장마비로 급사해버렸다이렇게 해서 폴포트의 인생도 막을 내린다.

(인생 말년의 폴포트, 1990년대까지 밀림에서 지내던 폴포트는 결국 1998년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일각에서는 그가 저지른 과오에 비해 너무 편하게 죽은게 아니냐는 말을 하기도 한다.)

 

폴포트는 많은 진영에서 비판받는 인물이다초기에 그는 캄보디아를 독립시키고 싶어했고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하기도 했지만 1975년 통일을 이룩하고 나서 그가 보인 행동은 대학살 극이었다모든 도시민들을 농촌으로 옮기고 원시적인 삶을 강조한 것은 공산주의 사상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행위였다모든 사람들이 조직적인 학살로만 죽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이 폴포트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캄보디아에 현재 중년 남성들이 별로 없는 이유가 그 당시 학살로 많이 죽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적잖게 있다.

 

그러나 세간에 알려진 킬링필드의 학살 수치가 과장되었다는 주장도 있다즉 300만 학살설이나 250만 그리고 200만 학살설이 과장되었다는 것이다이것은 상당히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하다사실 캄보디아 인구가 800만이기 때문에 300만을 죽인다는 것은 좀 무리한 견해다물론 인구변동이 폴포트 집권시기 있던 걸 생각하면 많은 사람들이 죽은건 명백한 사실이다필자의 견해로는 폴포트의 킬링필드 희생자는 최소 80만에서 150만 사이로 보고 있다.

 

폴포트에 대해 논할 때 지적해야하는 한 가지가 더 있다필자 또한 폴포트를 매우 싫어하고 비판하는 입장이지만서방의 편향적 시각에 대해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왜냐하면 폴포트가 저지른 제2차 킬링필드는 많이 비판받지만, 1969년부터 1973년까지 미국이 저지른 제1차 킬링필드에 대해선 별다른 비판점이 이슈화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이것은 폴포트와 크메르 루주군이 정권을 잡게 되는 계기를 제공했고최소 40만에서 80만 명의 캄보디아인을 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많게는 100만까지도 잡는다즉 이처럼 정보의 편향성은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아무튼 폴포트는 사회주의하고는 전혀 연관이 없는 짓을 저질렀고사회주의자라고 하기도 부끄러운 악인이라고 생각한다따라서 좌우이념을 떠나서 폴포트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참고자료

 

동남아시아사소병국책과함께, 2020

 

미국의 베트남 전쟁조너선 닐책갈피, 2004

 

천년전쟁오정환종문화사 2017

 

히스토리 채녈 다큐폴포트 킬링필드의 학살자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20-12-07 2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18 0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