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
노명식 지음 / 책과함께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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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에는 왕과 신권이 있었고 이쪽에는 인민과 인권이 있었다.”

 

출처: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1789~1871 p.139

 

1789714일 파리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인류 역사를 바꿔놓은 하나의 시작점이었다.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나온 이른바 <인권선언>은 개인의 절대성과 자유의 존엄성 및 만인의 평등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것이었다. 이러한 선언은 19세기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주창한 사회주의의 이론적 근거의 근간이 되었으며, 온갖 영역의 모든 인간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었다. 따라서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인류의 역사를 바꿔놓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저자의 설명대로 프랑스 혁명은 단순히 프랑스만을 근대국가로 전환시킨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프랑스 혁명은 낡은 전제주의 유럽 여러 나라에 자유와 평등, 국민주의와 자유주의,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의 새 씨앗을 뿌렸으며, 19세기 여러 유럽 국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은 세계사적인 의미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 자체로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입헌 군주주의의 시도나 민주 공화주의의 시험 심지어 보나파르티즘으로 대표되는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도 궁극적으로 실패로 끝났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혁명과 반혁명을 거듭했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틀어 책의 저자는 프랑스 혁명이 시작된 1789년부터 파리코뮌이 진압되는 1871년까지의 과정을 프랑스의 혁명과 반혁명의 역사로 묶어 설명했다. 사실 나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 잘 알지 못했었다. 단순히 프랑스 혁명이 현재 민주주의 국가에서 중시하는 인권과 기본적인 권리들의 시작점이었다는 사실 정도만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번에 노명식 교수의 개설서를 읽으면서 프랑스 혁명에 대해 아주 흥미롭게 잘 알 수 있었다. 책의 부제목은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이지만, 초반 부분에는 1789년 이전의 근대 프랑스 역사도 짧게나마 설명하고 있다.

 

미국사를 공부해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프랑스는 1775년 북미대륙에서 시작된 독립전쟁에 참전하여 영국에 맞서 싸웠다. 프랑스가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하게 된 시점은 워싱턴 휘하의 독립군이 영국군에게 점차 반격에 나서던 1778년이었는데, 프랑스의 참전은 지배계급들 입장에선 사실은 어리석은 조치였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는 20억 리브르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프랑스가 만성적인 재정 적자를 일으키게 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거기다 1789년 기준으로 프랑스에 있는 143명의 주교 연수입이 약 24,000만 리브르였는데, 당시 프랑스 정부의 예산액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거기다 1776년부터 1789년까지 13년 동안의 프랑스 평균 물가 상승률은 65%였다. 쉽게 말해 프랑스가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한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왜 이러한 재정적자를 내면서 이후 본인들의 시민 혁명을 앞당기게 될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했던 것일까? 그 이유는 생각해보면 많이 유치하다. 순전히 영국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오랜 세월 유럽에서의 라이벌 관계였는데, 18세기 북미 대륙에서도 그 라이벌 구도가 작용했다. 프렌치-인디언 전쟁이라고 불리는 7년 전쟁에서 프랑스가 영국에게 대패했었는데, 이 전쟁에서의 패배 굴욕을 잊지 못한 프랑스는 항상 복수하고 싶어했고, 결국 미국 독립전쟁에서 지원하여 영국에게 복수하고자 했던 것이다. 저자는 프랑스의 미국 독립전쟁 참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프랑스가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한 사건이야말로, 복수심 같은 원시적인 감정에서 나온 정책이 국가이익에 얼마나 어리석은 결과를 가져오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모델이다.”

 

출처: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1789~1871 p.57

 

사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폴레옹에 대해 잘 몰랐다. 무엇보다 나폴레옹이 어떠한 것을 추구했고, 어떠한 과정을 통해 프랑스의 종진 통령에서 황제까지 등극했는지 즉 그러한 과정들을 모르고 있었다. 단편적으로 나폴레옹이 유럽 정복전쟁에서 패배하여 결국 대서양 아프리카 대륙에서 멀리 떨어진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됐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처음부터 황제가 되었던 것은 아니고 1799년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를 통해 임시 통령정부를 구성하면서 프랑스의 실질적인 권력자가 되었다. 무엇보다 1798년 이집트 정복에서의 군사적 활약과 왕당파가 일으킨 방데미에르 13일 반란을 효율적으로 진압한 것을 통해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브뤼메르 18일을 통해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은 시에예스와 뒤코스랑 통령 자리에 올랐는데, 이후 이들을 축출하고 1804년 황제 자리에 등극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폴레옹은 신성 동맹 세력이 시작했다 종결된 혁명전쟁에서 프랑스의 정복전쟁으로 나섰다. 프랑스의 정복전쟁을 통해 프랑스의 영토가 확장되었지만, 가장 큰 한계를 드러냈는데 그것이 바로 러시아와의 전쟁이었다. 1812년에 시작한 러시아 침략 전쟁에서 나폴레옹은 수도 모스크바에 들어갔다가 참패했고, 오히려 러시아와 프로이센 측에게 반격을 당했으며,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참패를 당했다.

 

모스크바 침략에 나섰던 60만 대군은 쓰라린 패배를 경험했다. 이후 나폴레옹은 1815년 벨기에의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며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당해 1821년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나폴레옹의 정복주의적 침략전쟁은 다른 한편으로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 프랑스 혁명의 기본적 성질인 자유, 평등, 우애정신을 전파하기도 했다. 이러한 점들은 나폴레옹을 평가할 때, 같이 봐야할 것이다. 거기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을 지지했었고, 집권 이후 프랑스 사회에 있던 신분제적인 법적 제약을 철폐하여 능력위주의 인재들을 양성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따라서 이러한 점도 같이 봐야 한다든 것이다.

 

부제목에 나온 것과 같이 책의 마지막 단락은 1871년 파리 코뮌에 대한 것인데, 나는 이 책을 통해 파리코뮌이라는 사건이 “20세기 사회혁명의 모델로 보느냐 하는 논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애국적 운동으로 보느냐 사회주의 혁명으로 보느냐하는 해석도 마찬가지였다. 이 파리코뮌 같은 경우 마르크스나 엥겔스 또한 지지했던 움직임이었고, 20세기에 등장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상당히 많이 언급되고 기억되던 사건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1960년대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 파리코뮌을 기억하며 그 정신을 연상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즉 중국 공산당에서 파리코뮌을 상징적으로 국민들에게 상기시켰다는 얘기다. 또한 파리코뮌이 경우 한국 사회에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하고도 많이 오버랩 되기도 한다. 진보적인 사상가이자 언론인인 리영희 선생 또한 파리코뮌과 광주민주화 운동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하기도 했다. 이러한 점에서 파리코뮌은 앞으로도 연구가 더 되어야하고, 진보진영에 있는 운동가들에게도 여러 가지로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고 할 수 있다.

 

역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대목은 바로 프랑스 혁명 이후 등장한 혁명 진보의 아이콘 로베스피에르와 그 동지들이다. 자유주의 학계에선 로베스피에르에 대해 독재, 권위주의, 학살과 같은 수식어를 많이 붙였었는데, 사실 로베스피에르는 진정으로 가난한 인민들을 사랑했던 참된 혁명가의 모습을 가진 인물이었다. 물론 단두대 정치라는 공포정치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가 적폐청산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들은 바로 부를 독점하는 지배계층과 반동적인 자산가들이었고, 한 없이 가난한 민중의 편에 서고자 했다. 로베스피에르가 속해 있던 산악파와 그 동료들은 실제로 방토즈 법이라 하여 반혁명 혐의자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가난한 애국자들에게 분배하고자 했다. 사실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혁명적 동지들을 처형했던 이들은 사실 어딘가 구린 구석이 있는 부패한 정치인들이기도 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나의 유권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외쳤는데, 여기에는 민중에 대한 로베스피에르의 진심이 들어가 있다.

 

왕정은 폐지되었다. 성직자도 귀족도 사라지고 평등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자기들만을 위한 공화국을 세워 부자와 관리의 이익을 위해 통치하려는 사이비 애국자와 평등과 국민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공화국을 건설하려고 애쓰는 진짜 애국자를 구별하라.

 

소란과 도둑이라는 관념을 민중과 빈곤이라는 관념에 결부시키려는 구태의연한 태도를 주시하라.”

 

출처: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1789~1871 p.134

 

이번에 내가 흥미롭게 읽은 이 책은 1980년 노명식 교수가 집필했던 저서의 2011년 개정판이다. 프랑스 혁명에 대해 지식이 별로 없는 한국 대학생들과 일반 독자들이 슨대 시민혁명의 전형인 프랑스 혁명과 그 이후에 전개된 19세기 프랑스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기 쉽도록 하고자하는 목적에서 기획된 작품이다. 책을 읽으면서 특히 가난한 민중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로베스피에르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 이유는 로베스피에르가 항상 약자의 편에 서고자 했기 때문이다. 또한 나폴레옹의 정복전쟁 이전 프랑스 혁명 이후 시작된 전쟁이 사실은 혁명 프랑스를 지키기 위한 혁명전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조금은 다른 사건이지만 1917년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 이후 볼셰비키들이 치러야 했던 적백내전처럼 말이다. 프랑스 혁명을 좀 더 쉽게 접근하고 싶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마지막으로 프랑스 혁명이 왜 혁명으로 인정받을 수밖에 없는지 이야기 하겠다. 프랑스 혁명 또한 수많은 유혈과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까지도 혁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것은 프랑스 혁명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적인 권리를 천명하고 실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랑스 혁명 초기에 발표한 <인권선언>의 전문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국민의회를 구성하는 프랑스 인민의 대표자들은, 인권에 대한 무지와 망각 또는 경시가 공공의 불행과 정부의 부패의 원인임을 유의하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타고난, 양도할 수 없는 신성한 권리들을 엄숙한 선언을 통해 명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선언이 의도하는 바는, 사회체의 모든 구성원이 항상 이 선언에 준하여 부단히 그들의 권리와 의무를 상기하게 하고, 또 입법권과 행정권의 행사가 모든 정치제도의 목적과 부합하도록 비교할 근거를 마련함으로써 권력의 행사가 한층 더 존중받을 수 있도록 하며, 향후 시민의 요구가 단순하고도 이론의 여지가 없는 원칙에서만 제기되도록 함으로써 헌법의 유지와 만민의 행복에 이바지할 수 있게 함이다. 따라서 국민의회는 최고 존재 앞에서 그 가호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인권과 시민권을 승인하고 선언한다.

 

1: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서 생활할 권리를 가진다. 사회적 차별은 오로지 공동 이익을 위해서만 가능하다.

 

2: 모든 정치적 결사의 목적은 시효에 의해 소멸될 수 없는, 인간의 자연적인 권리를 유지하는 데 있다. 이 권리는 자유, 재산, 안전 및 압제에 대한 저항권이다.

 

3: 모든 주권의 근원은 본질적으로 국민에게 있다. 어떤 단체나 어떤 개인도 명백히 국민에게서 유래하지 않는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

 

4: 자유는 타인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이다. 그러므로 저마다의 자연권 행사는 사회의 다른 구성원에게도 같은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할 경우 외에는 제약을 받지 아니한다. 이 제약은 법률에 의해서만 규정된다.

 

5: 법은 사회에 해로운 행위가 아니면 금지할 권리를 갖지 아니한다. 또 법에 의하여 금지되지 않은 것은 어떤 일이라도 방해받지 않으며, 또 법이 명하지 않은 것은 누구에게도 강효할 수 없다.

 

6: 법은 일반의지의 표현이다. 모든 시민은 개인적으로 또는 대표자를 통하여 입법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보호하는 경우든 처벌하는 경우든, 법은 만인에게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모든 시민은 법앞에서 평등하므로 그 능력에 따라서 그리고 덕성과 재능에 의한 차별 이외에는 아무런 차별 없이, 모든 영예와 공공 지위와 직무에 평등하게 취임할 수 있다.

 

7: 누구도 법에 의하여 규정된 경우이거니와 법이 정하는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고소, 체포, 구금되지 아니한다. 누구든 어떠한 독재적인 명령이라도 간청하거나, 전파하거나, 실행하거나, 실행되도록 원인을 제공하는 자는 처벌받아야 한다. 다만 법에 의하여 소환되거나 체포되는 시민은 누구나 즉각 법에 순응해야 한다. 이에 저항하는 것은 죄가 된다.

 

8: 법은 엄격히 그리고 명백히 필요한 형벌만을 요구해야 하고, 누구도 범죄 이전에 제정되어 공포될 법률이나 또는 정당하게 적용된 법률에 의하지 안니하고는 처벌받아서는 안 된다.

 

9: 유죄로 선고되기까지는 누구나 무죄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체포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도 신병을 확보하는 데 필요하지 않은 강제 조처는 법에 의하여 엄중히 제지되어야 된다.

 

10: 누구도 자신의 발언이 법률에 의하여 확립된 공공질서를 교란하지 않는 한, 종교적 견해를 포함한 자신의 의견으로 인해 신변의 불안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

 

11: 사상과 의견의 자유로운 전달은 인간의 가장 귀중한 권리 중 하나이다. 따라서 모든 시민은 자유로이 말하고 쓰고 출판할 수 있다. 다만 법률에 의하여 규정될 경우에는 자유의 남용에 대하여 책임을 저야 한다.

 

12: 인권과 시민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공권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공권력은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마련된 것이고, 그것은 위임받은 사람들의 개인적 이익을 위하여 마련된 것이 아니다.

 

13: 공권력의 유지와 행정 비용을 조달하기 위하여 공동의 조세는 반드시 필요하다. 세금은 시민 각자의 재산 규모에 맞게 평등하게 부과되어야 한다.

 

14: 모든 시민은 스스로 또는 대표자를 통하여 공공 조세의 필요를 검토하고, 그것에 자유로이 동의하고, 조세의 용도를 추구하고, 또 세액과 과세의 기준과 징수의 방법 및 기간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

 

15: 사회는 모든 공직자에게 행정에 관하여 보고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16조 권리의 보장이 확보되어 있지 않고 또 권력의 분립이 제정되어 있지 않은 사회는 헌법이 없는 사회이다.

 

17: 소유권은 신성불가침한 권리이므로 합법적으로 확인된 공공의 필요가 명백히 요구하고 또 정당한 사전 배상의 조건하에서가 아니면 결코 침탈될 수 없다.”

 

출처: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1789~1871 p.8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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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1-04-18 17: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보기엔 NamgiKim 님께서 지금까지 모든 리뷰에 말씀하신 비극은 거의 프랑스 혁명에서 기초했다고 보입니다. ㅠㅠ

NamGiKim 2021-04-18 17:31   좋아요 1 | URL
그래서 프랑스 혁명에 대한 해석이 중요하다 봅니다. 전 자유주의 학계가 부정하는 로베스피에르의 존재 재평가가 중요하다구 생각해요.

NamGiKim 2021-04-18 17:32   좋아요 1 | URL
복학한 4학년이라 많이 바빠 책 리뷰 오랜만에 올립니다.

북다이제스터 2021-04-18 17:34   좋아요 1 | URL
네, 제가 보기에도 잘못된 혁명의 대명사가 바로 ‘프랑스 혁명’ 아닌가 생각됩니다. ㅠㅠ

그레이스 2021-04-26 15: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탁월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프랑스의 근대사 정리를 너무 잘해놓아서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프랑스혁명을 1789년 이후에 연속된 혁명과 공화와 왕정이 반복되는 역사의 연속선상에서 보아야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파리콤뮨까지...
함께 본 책으로 칼 마르크스의 <프랑스혁명>이 있습니다.

NamGiKim 2021-04-26 19:23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확실히 개설서로의 의미가 큰 작품이죠. 마르크스 선생이 쓴 <프랑스 혁명사>도 읽고 싶습니다.
 

유럽에서 서쪽 끝에 있는 나라 스페인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터지기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여행을 떠나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관광하러 들리는 곳이었다. 프랑스, 이탈리아와 더불어 사랑받던 여행지가 바로 스페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의 스페인은 관광지로서 사랑받는 곳이지만, 스페인 또한 가슴 아픈 20세기 역사가 있다. 그 역사가 바로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전개되었던 스페인 내전(Spanish Civil War)이다. 스페인 내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유럽에서 발생한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끔찍한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는데, 그것이 바로 게르니카 폭격(Bombing of Guernica)이다.

 

1930년대 스페인에선 이른바 좌파연합이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았었다. 이를 계기로 1936년 사회당 계통의 노동자총동맹(UGT)과 무정부주의자 그룹인 노동자국민동맹(CNT)이 서로 손을 잡아 이른바 인민전선을 구성했고, 2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과반수의 지지를 얻음으로써 승리했다.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은 좌파들은 국민들에게 좋은 정치인민을 위한 정치’, ‘진보적인 정치를 약속했다. 이들은 정치범 석방, 농민의 조세와 지대 경감, 노동자의 임금 인상과 실업 대책, 중소기업 보호, 교육 개혁 등 개혁적이고 민주적인 정책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계획을 반대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스페인의 군인인 프란시스코 프랑코( Francisco Franco)였다.

 

좌파 정부에 불만을 품은 프랑코는 파시스트 세력들을 결함하여 인민전선 지지자들에게 테러행위를 가했고, 더 나아가 보수 기득권 세력을 등에 업고 19367월에 군부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스페인 내전의 시작이었다. 이렇게 발발한 스페인 내전은 좌파 혹은 개혁을 지지하는 공화파와 쿠데타를 일으킨 파시스트 세력 즉 국민파(라고 쓰고 파시스트라고 읽어야 한다.)의 대결로 이어졌다. 여기서 공화파와 국민파의 대결은 제2차 세계대전을 예고하는 구도로 나타났다. 프랑스(당시는 레옹 블룸이 이끄는 좌파 정부였다.)와 소련이 공화파를 군사적으로 지원했고, 미국이나 영국 그외의 다른 나라에서 좌파나 이론가들을 중심으로 지원부대가 결성되었다. 어네스트 해밍웨이 또한 이 전쟁에 자원병으로 참전했다.

 

반대로 파시즘 국가인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국민파를 지원했다. 특히 이들은 프랑코에게 전투기를 포함한 항공 전력을 지원했다. 당시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또한 적잖은 병력과 무기를 공화파에게 지원했고, 적잖은 전차 부대를 스페인에 보냈다. 해외에서 모인 국제여단의 규모는 4만 명에 달했으며, 이 전쟁에선 아나키스트와 맑스-레닌주의자, 생디칼리스트 그리고 트로츠키지지파까지 각종 좌파 이데올로기적 성향을 막론하고 웬만한 좌파 세력들은 공화파의 깃발 아래 집결했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스페인 내전에서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항공 병력을 국민파에게 지원했다.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의 항공 지원을 받은 프랑코 세력은 전황을 유리하게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나치독일의 공군은 무차별 폭격을 가했고, 그것이 바로 민간인 학살인 게르니카 폭격이었다.

 

1937426일 오후 4시경 나치 독일의 하인켈 111형 폭격기와 융커스 52형 폭격기 그리고 하인켈 51형 전투기 등으로 구성된 공군 부대는 게르니카 지역을 폭격했다. 당시 나치 독일은 스페인 내전에서 각종 신병기를 실험하고자 했고, 게르니카 폭격은 그러한 목적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독일공군은 무차별 폭격과 기총소사를 게르니카에서 행했고, 게르니카는 순식간화 불에 타버렸다. 도시 전체가 불바다가 되었으며, 집과 건물이 무너지고 생존자들은 불에 탄 시체들을 도로에서 치워냈다. 당시 게르니카 마을의 인구는 7,000명이었다. 그러나 이 무차별 폭격으로 1,600명 이상이 사망했다. 말 그대로 히틀러의 공군은 그 마을 인구의 최소 1/4을 무차별 학살한 것이다.

 

이후 이 마을엔 프랑코를 지지하는 국민파 병사들이 나타나서 그 시체를 모두 모아 소각해버렸다. 독일 공군의 만행이 저질러진 뒤 게르니카의 끔찍한 참상이 전 세계에 전해졌지만 프랑코 측은 그런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몇 주일 뒤 영국의 조사단이라는 사람들이 들어왔으나 시체는 이미 소각되고 없었다. 조사단은 무너져 내린 게르니카 시가지를 간단히 둘러본 뒤, 다음과 같은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게르니카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계획적으로 방화되었다.”

 

물론 이 발표는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1939년 스페인 내전은 파시스트의 승리로 끝이났고, 스페인은 파시스트 독재자 프랑코의 40년 철권통치에 시달렸다. 진보 성향의 화가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인 피카소는 가로 7.8미터, 세로 3.5미터의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진 게르니카라는 작품을 내놓았다. 게르니카는 유럽의 여러 도시들에서 전시된 후 뉴욕 근대미술관에 전시되어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렸다. 1973년 피카소는 스페인에 민주 정치가 부활되는 날에 게르니카를 스페인 땅으로 보내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게르니카197511월에 프랑코가 사망한 뒤에야 비로소 조국 스페인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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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사회주의 지도자 중에 대표적인 인물을 떠올리면 아마도 호치민과 마오쩌둥이 인지도가 가장 높을 것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들이 무장투쟁을 통해 혁명을 성공시켰다는 점, 그리고 게릴라전을 통해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필립 쇼트가 쓴 <마오쩌둥 평전> 개정판에 따르면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이 한 참일때, 베트콩의 게릴라전과 마오쩌둥 홍군의 게릴라전을 비교한 서방의 연구들이 많이 나오기도 했었다. 이런점에서 마오쩌둥과 호치민의 공통점이 부각되는건 당연할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 호치민은 혁명과정에서 마오쩌둥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마오쩌둥은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이후 프랑스에 맞서 싸우고 있던 호치민과 공산당 군대에게 적잖은 물자를 지원했다. 심지어 군사고문단도 보내어 베트민을 훈련시켰으며, 트럭과 의약품, 대포, 소총화기 등은 중국에서 온 것이 많았다.

 

이는 베트남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이후 사회주의 형제 국가인 중국과 소련은 수정주의 논쟁에서 대립하였지만, 1960년대 미제국주의에 맞서 북베트남에 막대한 물자지원을 해주었다. 이때도 중국제 트럭과 무기 그리고 식량은 북베트남군에게 있어 필수적인 것이었다. 특히 존슨 정부가 롤링썬더 작전을 감행하면서 북베트남은 식량 부족 현상에 시달렸는데, 이때 중국이 쌀을 지원하지 않았다면 많은 베트남인들이 굶어죽었을 것이다.

 

아무튼 20세기 역사에서 사회주의 중국과 베트남은 적어도 미국과 맞서 싸우는 과정까지는 동맹관계였다. 이런점도 호치민과 마오쩌둥이 같이 비교되기도 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거기다 둘다 총한번 안들고 동지들이 총을 들고 싸웠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호치민과 마오쩌둥은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그 차이점은 무엇일까?

 

그 차이점은 바로 그들의 젊은시절 경험이다. 마오쩌둥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고 나서 스탈린을 만나러 소련을 방문할 때까지, 단 한번도 해외를 나간적이 없다. 무정부주의자였던 젊은 시절의 마오는 프랑스 유학을 꿈꾸기도 했지만, 본인은 다른 동지들의 초기 유학비용을 대느라 중국에 남았다. 거기다 그는 1930, 40년대 중국 연안의 홍군 기지에서 대부분을 보냈다. 쉽게 말해 외국을 깊게 알지 못했고, 그러기에는 경험상 부족했다.

 

반면 호치민의 경우는 달랐다. 호치민은 21살이 되던 1911년에 프랑스 기선인 아미랄 라투셰 트레빌호를 타고 베트남을 떠나 거의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는 5대양 6대륙을 다 다녔고, 특히나 세네갈이나 콩고와 같은 아프리카 국가에서 제국주의의 잔혹함을 두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1969년 당시 베트남을 방문한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를 스페인어로 환영할 정도로 스페인어도 나름 할줄 알았고, 이러한 내공은 젊은 시절 아르헨티나를 포함한 중남미 국가에서 쌓은 경험에서 나왔다.

 

그외에도 호치민은 1941년 중월 국경지대 팍 보에 기지를 세우기 전까지 베트남 독립운동을 해외에서 전개했다. 1930년에 창당된 인도차이나 공산당도 홍콩에서 창당됐다. 거기다 최근에는 젊은 시절 프랑스 파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인사들과 교류한 것이 문서로 밝혀졌다.


이처럼 호치민은 마오쩌둥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매우 국제적인 인물이었다. 따라서 두 사회주의 지도자에 대해 평가할 때, 항상 이러한 차이점을 염두해두며 평가해야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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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4월 12일인 오늘은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이 인류 최초로 우주탐험을 하게 된 날입니다. 그는 보스토크호를 타고 지구 한바퀴를 돌았고, 무사히 귀국하여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가 되었습니다.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라는 타이틀은 그 상징성이 매우 높습니다.


1961년 4월 12일 유리 가가린은 소련의 영웅이자 전 세계 노동인민의 영웅입니다. 그가 우주탐험을 하게 된 지 60년이 흘렀습니다. 비록 소련은 30년 전에 해체되었지만, 러시아인들을 위대한 영웅 유리 가가린을 결코 잊지 못합니다. 저 또한 그를 좋아합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하며 마치겠습니다.
“소련은 우주 분야의 성취를 통해 적지 않은 정치적 효과도 보았다. 피그만 침공 5일 전인 1961년 4월 12일, 소련 우주인 유리 가가린이 인류 최초로 지구궤도 우주 비행에 성공했다. 아프리카 대륙 상공을 자나면서 가가린은 식민주의와 싸우고 있는 아프리카인들에게 격려 메시지를 보냈다. 3주 후 미국인 앨런 셰퍼드가 우주 비행에 성공했지만 궤도 비행에는 못 미쳐 빛이 바랬다. 이후 서유럽인의 40%가 소련이 전체 군사력 및 전반적인 과학적 성취 면에서 미국을 앞선다고 생각했다. 미국의 우위가 위태로워지는 것에 불안을 느낀 케네디는 이례적으로 상하 양원합동회의를 요청하고 그 자리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가 자유냐 압제냐 하는 전쟁에서 이기려면 우리나라는 1960년대가 끝나기 전에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고 다시 안전하게 지구로 귀환시키는 목표를 달성해야 합니다.” 이 연설이 있고 나서 1년 가까이 지난 시점인 1962년 2월 존 글렌은 미국인으로는 최초로 지구궤도 비행에 성공했다. 지구궤도를 세 바퀴 돌고 아슬아슬하게 귀환했지만 미국인의 사기를 드높이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나 62년 8월, 소련은 다시 지구궤도를 17바퀴 도는 우주비행선 보스토크 3호를 발사하고, 그다음 날에는 보스토크 4호까지 쏘아 올렸다. 이듬해인 63년 6월에는 일주일간 궤도 비행을 함으로써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우주선에는 최초의 여성 우주인 발렌티나 테레시코바도 타고 있었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524~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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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4-12 0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놀라워서 찾아보니 이분이 세계최초 우주비행사네요!

NamGiKim 2021-04-13 12:51   좋아요 1 | URL
세계 최초죠!
 

(이 글은 지옥의 묵시록에서 주인공으로 출연한 배우이자 감독인 마틴 쉰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Vietnam American Holocaust’의 리뷰입니다.)

 

베트남 전쟁은 건국 이래 미국이 최초로 패배한 전쟁이다. 1960년대부터 1975년까지 대략 15년 동안 이 참혹하고도 잔인한 전쟁에 참전했던 미국은 핵폭탄을 제외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이 전쟁을 수행했다. 물론 대니얼 엘스버그가 폭로한 펜타곤 페이퍼에 따르면 미국의 베트남 문제 개입은 대략 30년이나 된다. 베트남 전쟁은 참으로 참혹한 전쟁이자, 추악한 미국의 침략전쟁이었다. 미국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할 거 없이 대량의 폭탄을 투하했고, 이로 인한 베트남인들의 사망자는 급증했으며, 사실상 수백만이 죽었다.

 

F. 케네디 행정부에서 근무하며 이 전쟁을 계획했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베트남과 미국이 수교를 맺은 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340만 명의 베트남인을 죽였다고 고백했다. 한 마디로 이 전쟁 자체가 미국의 일방적인 베트남인 학살극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전쟁을 일으키고 행한 주체가 바로 미국이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의 교훈을 얻지 못한 채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 이 다큐멘터리 내용의 핵심이다.

 

다큐멘터리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게 된 역사에 대해 설명한다. 베트남의 역사는 2천 년 동안 중국의 침략에 맞서 저항해온 역사다. 이들은 939년에 중국의 지배에 맞서 자주적인 국가를 세웠으며, 그 이후에도 중국의 침략에 저항해왔다. 그러던 19세기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화했고, 베트남은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포함하여 프랑스의 식민지가 됐다.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면서 베트남의 자원을 갈취해가고, 베트남인들을 차별했으며 폭압적인 식민통치를 자행했다.

 

그러던 1940년 프랑스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하자, 일본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접수했고, 일본은 기존에 있던 프랑스 식민통치 기반을 유지해나가며 인도차이나 반도를 식민 지배했다. 이 기간에 베트남인들은 프랑스와 일본에 맞서 독립운동을 벌였는데, 그 조직이 바로 베트민이었고, 그 베트민의 지도자가 바로 호치민이었다. 호치민은 젊은 시절 전 세계를 돌아다녔던 인물로 미국의 흑인인권운동가 마커스 가비에게 감명 받았었고, 미국의 자유주의 사상에도 나름의 호감을 가졌던 인물이다. 이후 1920년대 모스크바로가 코민테른 요원으로서 활동하기도 했지만, 이후 그는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후 호치민은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했다. 놀랍게도 그의 독립선언은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비슷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동맹국 프랑스의 식민정책에 반대 했었다. 그러나 루스벨트를 이어 대통령이 된 해리 트루먼은 반공주의적인 인물로써, 베트남의 문제를 냉전의 논리로 접근했다. 그 결과 트루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지 정책을 옹호했다.

 

베트남 독립을 선포했던 호치민은 1946년 항구도시 하이퐁이 프랑스군의 포격을 받자, 독립전쟁 즉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치르게 되었고,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프랑스를 몰아냈다. 당시 프랑스는 자신들의 치르고 있던 식민지 전쟁을 냉전의 흐름에 빚대어 자유주의 대 공산주의의 구도로 포장했고, 꼭두각시 황제 바오다이를 베트남 남부의 지도자로 내세웠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트루먼은 프랑스를 지원했다.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회담이 개최되었고,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으로 남북 분단됐다. 물론 이 분단에는 2년 이내에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전제조건이 붙었다.

 

여기서 미국은 바오다이가 통치하던 남베트남에 자신들의 꼭두각시인 응오딘지엠을 내세워 남베트남 공화국을 수립했고, 80%가 호치민을 지지할 것이라 판단하여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렸다. 그 결과 남베트남에는 응오딘지엠이 통치하는 무자비한 체제가 들어섰고, 민중들은 이에 저항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이렇게 해서 남베트남에 창설된 것이 바로 베트콩이었던 것이다. 베트남 문제에 개입하던 미국은 존 F. 케네디 대통령때 미군사고문단을 보냈다. 이 숫자는 196316,000명으로 증가했다. 다큐멘터리에선 이를 프랑스 특수부대에서 미국의 그린베레로 바뀐 것이라 표현한다.

 

불교도와 학생 그리고 민중의 시위로 혼란스럽던 남베트남은 무너지고 있었다. 이걸 우려한 미국의 CIA는 응오딘지엠을 제거하고 새로운 정권을 남베트남에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이 무너질 거라 걱정한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전면적인 침략을 게시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 전개과정이었으며, 명백히 미국의 침략전쟁이었다.

 

사실 1964년 통킹만 사건은 미국의 자작극이었다. 이들은 전쟁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북베트남 영해에 구축함을 포함한 함정들을 배치했고, 사건을 조작하여 북베트남 침공을 정당화했다. 19653월에는 미지상군이 상륙했고, 그 숫자는 해가 지날수록 더 늘어났다. 미 지상군이 참전하면서 베트남 전쟁의 전개양상은 참으로 추악해지고 잔혹해졌다. 특히나 수색과 섬멸 작전이라는 이름하에 수많은 민간인들이 베트콩으로 몰려 학살당했다. 당시 전쟁에 참전했던 참전용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른바 자유 사격 지대에선 보이는 생명체는 모든 죽여도 됐다고 한다. 또한 베트콩이라는 의심만 가지고 증거 없이 죽일 수 있었다.

 

사살당한 민간인은 적군으로 바디 카운트가 되었으며, 그러한 위조와 조작은 수도 없이 많았다. 다큐멘터리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사살한 100~150만 명 이상의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의 수치에 민간인들도 적잖게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얘기해준다.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 미라이 학살도 사실은 그런 날조된 바디 카운트로 군에 보고되었으며, 진상이 규명되기 전까지는 그저 베트콩 사살로 군 기록에 남아있었다. 이 과정에서의 부녀자 강간이나 아동사살이 빈번히 일어났고, 주민들이 살던 마을은 죄다 불에 태워졌다. 문제는 이러고 나면 민간인들이 거주할 곳이 사라졌고, 식량과 집 그리고 가족을 잃은 주민들이 당연히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베트콩을 지지한 이유도 그러했다. 미국이 전개한 피닉스 작전의 경우도 민간인을 베트콩으로 몰아 학살한 행위였다.

 

베트남 전쟁에선 미국은 대규모의 헬리콥터 작전을 전개했다. 수많은 헬리콥터가 베트남에 배치되었고, 이것은 미국이 화력 면에서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을 압도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줬다. 그러나 이 헬리콥터가 수행한 작전에서도 적잖은 민간인들이 죽었다고 다큐멘터리는 얘기한다. 헬리콥터가 발사한 기관총과 건쉽 그리고 미사일 등은 베트콩뿐만 아니라 민간인들을 베트콩으로 간주하고 사살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물론 이것도 적군 사살로 얼마든지 군 자료에는 표기됐다.

 

베트남 전쟁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를 야기한건 당연하게도 융단폭격이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대략 750만 톤에서 800만 톤에 달하는 폭탄을 투하했다. 남북베트남 할 거 없이 국토가 초토화되었다. 이 폭격을 계획했던 인물은 바로 로버트 맥나마라와 커티스 르메이 같은 미국의 관료들이었다. 특히나 닉슨 정부의 캄보디아 침공에선 이런 융단 폭격으로 캄보디아인 80만 명이 폴포트의 킬링필드 이전에 학살당했다고 다큐멘터리는 얘기한다. 한마디로 미국도 캄보디아에서 킬링필드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이 베트남에 투하한 폭탄 800만 톤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 640개와 맞먹는다고 한다. 커티스 르메이가 자주 표현하던 대로 미국은 베트남을 석기시대로 만들려고 있다. 다큐멘터리 또한 이러한 폭격에는 네이팜 폭탄을 비롯한 각종 폭탄이 투하되었으며, 미 공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시설들 대다수는 민간 시설이었음을 지적한다. 미국의 이러한 민간인 학살 행위는 베트남인들이 미국에 저항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다큐멘터리는 미국의 이러한 맹목적인 무차별 폭격은 명백히 국제법을 위반한 행위였다고 설명한다. 특히나 그 피해자 대다수가 민간인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 전쟁에서 화확무기를 사용했는데, 그것이 바로 에이전트 오렌지로 대표되는 고엽제였다. 이 고엽제는 라오스와 캄보디아 그리고 베트남에 살포되었고, 400만 명의 베트남인이 고엽제에 노출되어 피해를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고엽제로 최소 수십만 명이 사망했으며, 베트남 전쟁 이후에도 2008년 기준으로 최소 40만 명 이상의 고엽제 피해자들이 존재했다. 특히나 고엽제에 노출되었던 베트남인들 사이에선 기형아가 무수히 많이 태어났으며, 베트남의 국토 또한 이 고엽제로 고통을 받았다. 이 고엽제 투하 또한 미국의 융단 폭격과 더불어 전쟁범죄였다.

 

마틴 쉰 감독이 제작한 이 다큐멘터리는 이러한 사례를 들어 미국이 참전한 베트남 전쟁이 미국이 저지른 홀로코스트 행위였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또한 이 전쟁에서 미국이 300만에서 500만을 학살한 책임이 막중하다고도 설명한다. 다큐멘터리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호치민과 베트남인들은 그저 자신들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침략자들과 압제자들에 맞서 싸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미국이었다. 그리고 미국은 부도덕한 침략전쟁을 베트남에게 자행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수백만의 베트남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야수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다큐멘터리에선 미국 대통령들의 연설도 보여준다.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에 침략을 자행한 미국의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연설이 다큐멘터리에서 나온다.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이 계속 독립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본인들 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해라!”라고 지껄인다. 나는 이러한 존슨 대통령의 연설에 분노를 참기가 매우 힘들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제국주의자들이 본인들의 침략 행위를 정당화 하는 구실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본인들이 그 나라의 독립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아주 뻔뻔스럽게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화가 치밀어 오른다. 제국주의자들의 잔혹함과 파렴치함은 이처럼 침략전쟁을 말도 안되는 논리로 정당화한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다큐멘터리는 이라크 전쟁이 일어난 지 5년 뒤인 2008년에 만들어졌다. 따라서 미국의 또 다른 침략전쟁이 이라크 전쟁이 베트남 전쟁과 같은 선상에서 많이 오버랩 시키는 측면이 있다. 물론 이 두 전쟁은 미국의 침략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유사하고, 수많은 사망자가 미국에 의해 나왔다는 점도 일치한다. 거기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 개입한 것 또한 1964년 통킹만 사건 조작과 매우 비슷하다. 다큐멘터리는 미국이 베트남에서 3~5백만을 죽게 만들었지만, 2003년 이라크 침공으로 또 다른 백만 명의 이라크인을 학살했다고 규탄한다. 정말 훌륭한 다큐멘터리를 감상할 수 있었다.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미국의 추악하고 부도덕한 제국주의다. 베트남 전쟁이 어떻게 해서 미국의 학살극인지를 알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감상하길 매우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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