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미국의 조 바이든 정부는 쿠바 경제봉쇄 해제를 촉구하는 유엔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파와 미국의 경제제재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쿠바는 자체적으로 예방효과 92%’에 달하는 백신을 개발했다또한 쿠바의 의사들은 초기부터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투쟁을 전개하며바이러스 전파를 사력을 다해 막으려 하고 있다이러한 노력으로 옆 나라 미국에서의 창궐에도 불구하고 의료적으로 아주 잘 대처하고 있다이처럼 쿠바는 이 전대미문속의 질병창궐에도 불구하고바이러스 퇴치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도대체 이런 쿠바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 답은 바로 쿠바가 지금까지도 유지하고 있는 사회주의 체제에 있다쿠바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자칭 신대륙 발견 이후 쿠바는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었다. 1898년 미서전쟁(스페인-미국 전쟁이후 쿠바는 사실상 미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했고대략 60년 가까이 미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었다미제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압잡이 풀헨시오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를 내세워 정치적으로 지배했으며경제적으로는 착취를 일삼았다미국 마피아들이 운영하는 호텔과 매춘업소 그리고 술집과 주요 생산물 사탕수수를 독점한 자본들이 판을 쳤다한마디로 미제국주의의 식민지였다.

 

이렇게 지배받는 쿠바를 바꾸기 위해 일어난 인물이 있었는데그가 바로 쿠바의 붉은 별(The Red Star of Cuba)인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피델 카스트로는 1953년 7월 26일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다가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했던 인물로석방된 이후에는 혁명군을 조직하여 체게바라(Che Guevara)와 동생 라울 카스트로(Raul Castro) 그리고 카밀로 시엔푸에고스(Camilo Cienfuegos)와 함께 1956년 그란마호를 타고 쿠바에 상륙하여게릴라전을 전개했다이들의 혁명적인 전쟁은 1959년 수도 아바나를 접수하면서 승리로 끝났다.

(피델 카스트로 동지, 피델 카스트로 동지는 쿠바에서 혁명을 성공시켜 사회주의 쿠바를 건설하고 미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했던 영웅이다.)

 

혁명이 성공한 이후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에 사회주의 정부를 세우고미국의 자본과 각종 기업들의 이권을 몰수해버렸다토지개혁과 무상교육무상의료 그리고 그 외의 진보적인 정책들을 해나갔으며대중적으로 지지를 받게 되었다냉전이 한참이던 당시 미국은 쿠바에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시키고자 했으며아이젠하워부터 존 F. 케네디까지 사회주의 쿠바를 무너뜨리려는 추악하고도 사악한 정치공작과 방해공작을 저질렀다심지어 1962년에는 쿠바 미사일 위기를 조정하여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겠다는 협박을 소련과 쿠바에게 했다.

 

그 이후에도 쿠바를 대상으로 한 미제국주의자들의 경제제재는 끊임없이 지속됐다양심과 도덕도 없는 미국은 카스트로를 암살하려는 온갖 추잡하고 간신배스러운 짓들을 수없이 저질렀다경제제재에도 불구하고 쿠바는 소련의 지원을 받음으로서 버텼으며냉전이 종식된 이후에도 미제국주의자들의 탄압과 억압 속에서도 버텨왔다그리고 그런 고난은 지금도 계속되지만계속 견뎌내고 있다과테말라의 하코보 아르벤스 정권이나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 등은 미제국주의자들의 쿠데타로 무너졌지만쿠바는 지금까지도 버텨내며라틴아메리카에서 사회주의의 길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그렇다면 쿠바가 지금까지 사회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 성취한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타국을 도우러 나가는 쿠바의 사회주의 의사들, 단순히 돈만 밝히는 한국의 엘리트주의적 의사들하고는 의식과 생각하는 구조가 다르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쿠바는 혁명이 성공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사회주의적인 제도를 끝까지 유지하고 있다비록 미국의 경제제재로 인해 부유하지는 못하지만미국인들마저도 치료받으러 들릴 정도의 완비된 의료시스템과 전 교육과정을 돈 한번 내지 않고 받을 수 있는 무상교육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다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현재 북한 또한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쿠바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경제제재 속에서도 버티고 있다물론 의료부분에서 만큼은 쿠바가 북한보다 더 앞서긴 하지만북한이 이런 진보적인 가치들을 유지하고 또 수호하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히 사실대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 혁명 이전 쿠바의 문맹률은 30%가 넘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지만피델 카스트로 정권이 등장한 이후에는 문맹률이 거의 0%까지 하락했다무엇보다 쿠바 인구의 100%가 12년간 무상 의무교육을 받고 있으며또 무상 의료서비스 덕분에 혁명 전 60%를 넘어섰던 유아 사망률이 21세기 들어서는 5.5%로 현저하게 낮아졌다심지어 2001년 9.11 테러 이후 현장에서 부상당한 미국의 소방관들이 쿠바에 가서 무상으로 치료를 받았던 사례가 존재할 정도로 쿠바는 의료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선진적이다이러한 쿠바의 복지와 사회보장제도는 현재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에서는 일반 서민들이 꿈도 꾸지 못하는 것들이다.

(쿠바의 의사 숫자, 2018년 통계만 보더라도 쿠바에 있는 의사 숫자는 OECD 국가 평균을 압도적으로 우회한다.)

 

또한 쿠바는 반제국주의 투쟁의 기치를 높이 든 나라로서 국제주의적 혁명의 아이콘이기도 하다미국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침략전쟁과 중남미에서의 침략과 정치공작 행위 그리고 아프리카에서의 혁명 투쟁 등 항상 쿠바는 약자와 정의의 편에서 연대했다앙골라 내전의 경우만 하더라도 당연히 쿠바는 혁명세력을 도왔다그리고 베네수엘라에서 우고 차베스 선생이 사회주의를 세우고자 했을 때도 라틴 아메리카 사회주의 국가의 진정한 형제애를 보였고항상 연대의 대오를 내리지 않았다쿠바의 이런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현재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서의 좌파의 움직임에도 힘쓰고 있다.

 

이것이 바로 쿠바의 붉은 별 피델 카스트로 동지의 위대한 업적이다따라서 체게바라가 말했듯이위대한 사회주의 국가 쿠바는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 정의의 대오혁명의 대오진실의 대오 그리고 사회주의와 인류 보편의 가치의 대오 아래 전진해 나갈 것이다.

 

위대한 사회주의 국가 쿠바 만세!

위대한 쿠바의 붉은 별 피델 카스트로 동지 만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독일과 일본의 과거사 문제 태도, 한국사회에선 이렇게 많이 비교되기도 한다.)


(욱일기와 하켄크로이츠, 그리고 이런식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과거사 문제로 상당히 민감하다독도강제징용일본군 위안부 그리고 그 외의 여러 일본 제국주의가 저질렀던 전쟁범죄 문제 등은 한일관계를 냉각시키는 하나의 주요한 맥락으로 자리 잡고 있다물론 여기에는 과거 자신들이 저질렀던 전쟁 범죄에 대해 전혀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책임도 막중한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반성하지 않는 일본에 대한 얘기가 나오다 보면꼭 빠지지 않고 나오는 얘기가 있다그것은 바로 독일의 과거사 청산 문제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유대인들은 이런 절멸 수용소에서 집단 학살 당했다. 이런 학살로 인하여 총 600만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 9화에 나오는 장면, 이 수용소를 해방시키 미군들은 큰 충격에 빠진다.)

 

현재 한국이 생각하는 독일의 모습은 과거를 반성하는 독일일 것이다즉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와 나치즘이 저지른 전쟁범죄를 반성하고피해국들에게 배상을 했다는 관점이다필자 또한 몇 년 전 유럽 여행을 하면서 네덜란드의 안네 프랭크가 숨어살던 집(Anne Frank House)과 독일의 다하우 수용소(Dachau Prison Camp)를 들렸고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나치에 대한 청산이 있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물론 독일이 과거사 청산에 나섰고피해국들에게 배상을 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그러나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독일의 이미지즉 과거에 대해 반성하는 독일이 탄생한 것은 단순히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따라서 오늘은 독일 과거사 청산의 과정을 얘기해보고자 한다.

(히틀러의 죽음을 보도한 미군 언론사인 성조지)


(독일 영화 '몰락'에 나온 장면, 한 SS 친위대 장교가 항복했음을 알리고 있다.)

 

1945년 4월 30일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아내 에바 브라운(Eva Braun)과 자살했다며칠 후 나치 독일의 지도부는 연합군에게 항복을 선언했고, 1945년 5월 8일에서 9일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패전으로 끝났다1차 세계대전에 이어 두 번에 이은 패전이었다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영국과 미국은 태평양에서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치렀는데오키나와 전투 이후 미국의 원자탄 투하와 소련의 대일전 참전으로 1945년 8월 15일 일본 또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2차 세계대전은 완벽히 추축국의 패전으로 끝이 났다.

(독일 다하우 수용소 정문, 몇년 전 유럽여행 당시 직접찍은 사진이다.)


(구타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유대인 시체 소각로, 다하우 수용소에도 유대인 시체 소각로가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말기 서부에서 진격하던 영미 연합군과 동부에서 진격하던 소련군은 전쟁이 끝나갈 때 쯤 돼서아주 충격적인 것들을 목격했다그것은 바로 나치 독일이 계획적으로 저질렀던홀로코스트(Holocaust)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목격했기 때문이다일반인들에게도 제법 알려진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Auschwitz concentration camp)의 경우 사망률이 85% 정도였는데트레블링카 절멸 수용소(Treblinka extermination camp)를 포함한 몇몇 절멸 수용소는 사망률 99%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말 그대로 대량의 인종학살을 나치가 했던 것이다이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대략 600만에 달하는 유대인이 학살당했다.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 몇년 전 미국여행에서 직접 찍은 사진이다. 참고로 입장료는 없다. 무료다.)


(한국어 설명서, 미국에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에는 한국어 설명서도 준다. 그만큼 한국 사람들도 많이 방문한듯 하다.)

 

미국에서 만든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 2001(Band of Brothers 2001)>를 보면노르망디 상륙작전부터 온갖 전투를 치렀던 병사들이 유대인 수용소를 해방시키는 장면이 나온다거기서 나온 주인공 중 한 명은 한 독일측 장교 혹은 장군의 저택에 들려아주 떳떳하게 행동하는 부인을 만났지만유대인 학살의 참상을 알리고자 떳떳하게 행동하는 독일시민들에게 유대인 수용소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만들었다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가 묘사한 것과 같이 실제로 연합군은 독일인들에게 이 끔찍한 현장을 직접 목격하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었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앞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헤르만 괴링루돌프 헤스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빌헬름 카이텔이고뒷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카를 되니츠에리히 레더발두어 폰 시라흐프리츠 자우켈이다.)


(만화로 묘사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미국, 영국, 소련이 주도적으로 재판을 담당했다.)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후 연합국들은 전쟁범죄를 일으켰던 나치 독일의 인사들을 처벌하기 위한 재판을 열었다그것이 바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Nuremberg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이었다. 1945년 11월 20일부터 1946년 8월 31일까지 연합국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주도했다당시 뉘른베르크 재판에는 이른바 죄형법정주의 문제즉 어떤 죄를 법적으로 처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죄에 관한 법이 존재해야 한다.”는 식의 문제가 있기도 했는데우선 나치가 저지른 홀로코스트라는 것이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반인륜적인 전쟁범죄였기에당연히 재판이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뉘른베르크 재판은 대략 9개월에 걸쳐서 진행됐고2차 세계대전 승전국은 미국과 영국 그리고 소련이 나치전범 재판을 단행한 사례였다이 전범재판에서 총 24명을 재판했고, 12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그 이후에도 나치 독일측 인물들이 기소되기도 했지만사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은 역으로 독일 스스로 과거를 반성하게 하는 계기를 시간적으로 늦추게 된 원인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재판 자체가 승전국들이 진행한 재판이라는 점에서 독일인들에게 안 좋게 다가온 점이 있었다따라서 전후 독일 사회에서 이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전후 분단된 독일, 이 분단은 1949년 동독과 서독의 분단으로 이어진다.)

 

이후에도 연합군 점령 지역에서 이른바 탈나치화 정책이 추진됐다미군정 휘하의 독일에서는 법령 104호에 의거해 탈나치화를 실시했다. 18세 이상의 독일인에게 1,300만 부의 설문지를 작성하게 하여, 340만 정도를 입건했으며, 100만 정도를 구술 재판했다여기서 재판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수많은 이들이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이런 움직임의 문제점은 대규모 추방으로 행정 기능 마비와 더불어, 4개국 점령지역 마다 평가 및 처벌 기준이 상이했다이런 탈나치화 수사 결과로 총 5,205명이 구속됐고, 806명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으며, 486명에게 사형이 집행됐다.

(1914년 완공된 총길이 45.6킬로미터의 라인-헤른 운하가 지나고 있는 독일의 오버하우젠 지역

 

그러나 초기에 있었던 서방 연합군 지역의 탈나치화의 움직임은 이후 미소간의 냉전이 심해지면서 흐지부지 되어갔다애초에 미국측은 독일 과거사 문제를 철저하게 할 생각이 없었다따라서 전후 철저한 청산이 서독에서 이뤄지지 않았으며나치 경력이 있는 이들이 상당수 남게 되었다당시 탈나치화에 의한 점령지역별 구속자 수를 보면영국이 64,500미국 95,250프랑스 18,963소련 67,179명이었다석방자 수는 순서대로 영국 34,000명으로 전체 비율에서 53%, 미국 44,244명 전체비율에서 46%, 프랑스 8,040명 전체비율에서 42% 그리고 소련 8,214명으로 전체비율에서 12%였다따라서 나치경력 인적 청산 부분에서 만큼은 소련이나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가 보다 확실했다.

(라인강의 기적을 나타내는 GDP 자료, 이 시기 서독은 이른바 라인강의 기적을 통해 경제재건에 나섰다.)

 

냉전 초기인 1950년대 독일에서는 사회적으로 정치 안정과 경제재건에 주력했다이는 과거사 보단 냉전이라는 시대사적인 현실에 맞춘 흐름이었다이에 따라 과거사 청산이 독일에서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심지어 나치를 추종하는 극우정당이 부활하는 움직임도 있었다물론 이들이 대중적으로 크게 지지받지는 않았고홀로코스트 보상법이 제정되기도 했으나어디까지나 나치나 개인의 책임으로 축소하는 경향이 있었다이에 따라 집단 책임에 대한 부정과 피해자 의식이 확산되는 역효과도 있었다.

(모사드 관련 서적, 이스라엘이 만든 이 조직은 나치 잔당들을 추적했고, 실제로 재판에 세웠었다.)


(아돌프 아이히만, 유대인 학살의 책임자다. 1942년 유대인 절멸을 결정한 반제회의에서 그는 학살 대상자를 분류했다.)

 

물론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의 경우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개인을 재판에 세우는 일은 있었다그리고 1948년 제1차 중동전쟁으로 탄생한 이스라엘에서 모사드(Mossad)라는 단체가 유대인 학살 가담자를 추적하여 체포하고 처형하는 경우도 있었다대표적으로 1960년에 있던 유대인 학살자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의 재판이 그러했다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독일 사회 전체에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이끌고 오지는 못했다쉽게 말하자면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치부됐다.

(68혁명, 1968년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과 더불어 독일도 이 시대적 흐름에 휩싸였다. 서독의 젊은 이들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과 더불어, 베트남 전쟁 반대 그리고 과거사 청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사진에서처럼 젊은이들은 호치민이나 체게바라와 같은 사회주의 인물의 사진을 들고 거리로 나왔었다. 사진은 1968년 2월 서독 서베를린에서 있던 시위다.)


(빌리 브란트 스탬프)

 

그러나 서독일 사회가 전반적으로 나치 과거사 문제가 큰 화제가 되었는데이는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으로 인한 68혁명의 움직임에 의한 것이었다. 1960년대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대규모 군대를 보내면서미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서 반전운동이 확산되었는데이는 서독일 또한 마찬가지였다즉 이런 움직임에서 독일 과거사 문제가 다시 대두된 것이다당시 젊은 세대들이 자신들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관여한 나치 문제에 눈을 뜬 것이고이것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됐다이와 더불어 서독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총리가 이른바 동구정책을 피게 되면서서독 사회가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청산의 길로 나가기 시작했다.

(1970년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던 게토를 방문한 빌리 브란트, 그는 독일의 과거문제를 반성하는 모습을 동구권에도 각인시켰다. 아이러니 하게도 빌리 브란트 뒤에서 바른자세로 서있는 인물은 동독의 간첩이었다.)


(미국에서 만든 드라마 홀로코스트, 이 드라마 또한 독일인들을 반성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했다.)


(현재도 매스미디어를 통해 보도되는 독일 과거사 문제)

 

68혁명의 움직임과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구정책을 통해 독일 사회는 과거사 문제를 사회적으로 보다 크게 대면하게 되었다여기서 더 나아가 독일 사회가 홀로코스트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만들어졌는데아이러니 하게도 1979년 미국에서 만든 드라마 홀로코스트(Holocaust (miniseries) 1979)의 방영이었다이 드라마은 시청률이 각회당 1,000~1,500만에 달했을 정도였다독일 정치학자 피터 리치(peter reiche)는 이 드라마의 방영이 독일 대중이 나치과거와 진정한 대면을 시작한 계기라고 평가했을 정도다그리고 이 드라마를 통해 소위 홀로코스트라는 단어가 유대인 학살의 동의어가 됐다이에 따라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에 현재 우리 사회가 아는 소위 과거사를 반성하는 독일의 모습이 등장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뜨로츠끼주의란 무엇인가? - 뜨로츠끼의 주요 이론적 가정들에 대한 비판 노동자 교양문고 2
토니 클라크 지음, 문영찬 옮김 / 노사과연(노동사회과학연구소)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1917년 러시아 혁명사를 보다 보면, 최소 한번쯤은 절대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 러시아 혁명에 참가했고, 적백내전에 참전했다 레닌 사후 스탈린과의 경쟁에서 패배하여 멕시코로 망명하여 삶은 마감한 트로츠키는 사실상 맑스-레닌주의 진영에서 거센 비판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멕시코 망명 시절 별도의 좌파 조직을 만들어 활동했고, 그게 바로 제4인터내셔널(Fourth International)이었다. 현실 사회주의권에서 트로츠키의 사상은 당연히 규탄과 비판의 대상이었고, 이에 대해 트로츠키를 지지하는 측에선 스탈린주의라는 말로 비판했었다.

 

의외로 트로츠키주의(Trotskyism)로 알려진 세력들은 생각보다 많았는데, 아시아에서는 초기에 중국과 베트남(주로 코친차이나 지역)에 있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에서도 세력이 형성되었으며, 1960년대 급진적 좌익주의였던 적군파 또한 트로츠키주의의 영향을 받았었다. 트로츠키주의와 트로츠키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와 감정과는 별개로 트로츠키주의가 좌파 진영 내에서 영향력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극단적 반공주의 국가인 한국에서도 트로츠키의 사상은 그 영향력이 강한데, 이는 트로츠키주의를 변형적으로 받아들인 토니 클리프의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노동자 연대의 영향력이 크다. 이들은 더 나아가 트로츠키의 해석과는 달리 소련과 현실 사회주의 체제를 국가 자본주의라고 해석했다. 사실 국내에 나온 마르크스주의 관련 서적들을 보면 이들이 발행한 책들이 상당히 많고, 나 또한 사회주의를 그들의 책을 통해 접했었다.

 

그러나 트로츠키와 트로츠키 사상 그리고 트로츠키주의 집단에 대한 비판을 담을 서적들은 의외로 국내에 많지 않다. 우선 알라딘에 사회주의 관련 서적들을 검색하면, 국가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한 책들은 쉽게 찾을 수 있는 반면, 트로츠키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을 담은 서적들은 찾기가 매우 힘들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트로츠키는 패배자였고, 승리자는 현실 사회주의와 스탈린이었다. 트로츠키의 사상을 따르는 세력들은 그 패배를 마치 스탈린주의자들의 간신배적 행위로 둘러대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트로츠키 추종자들은 현실 사회주의에서의 마르크스-레닌주의주의자들 보다 조직을 광범위하게 끌어들이지 못했다. 이는 중국 혁명과 베트남 혁명에서 잘 드러났다.

 

트로츠키를 좋아하는 이들이 항상 착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레닌이 트로츠키의 사상과 우호적인 입장을 많이 취했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들이 얘기하는 레닌의 반스탈린적 입장은 일부분의 발언을 발췌한 것일 뿐이지, 레닌의 전반적인 스텐스는 아니었다. 레닌 또한 트로츠키와의 논쟁을 통해 트로츠키의 사상과 행동을 일목요연하게 비판했었다. 대표적으로 1921년 노동조합 논쟁에서 레닌은 트로츠키의 관료주의적인 방식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 외에도 레닌은 트로츠키와의 논쟁에서 트로츠키를 사상적으로 비판했었으며, 1917년 러시아 혁명 이전 시점으로 간다면 말할 것도 없을 정도로 비판했다. 거기다 그 시절 트로츠키는 멘셰비키였기에 사실상 레닌과 대립 점에 있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점들을 생각해 보았을 때, 레닌을 마치 트로츠키의 서포터 혹은 사상적 동지로 묘사하는 건 현실적이지 않다. 이번에 읽은 책 <뜨로츠끼주의란 무엇인가?>는 영국 공산당 동맹의 토니 클라크(Tony Clark)가 쓴 논문으로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이론적, 강령적 그리고 방법론적인 비판을 담고 있다. 트로츠키가 주장하는 영구혁명이나 스탈린이 추구한 일국사회주의에 대한 비난 등을 체계적으로 분석했으며, 트로츠키의 이런 일련의 주장들이 어떻게 해서 말이 안되는 접근법인지를 폭로하고 있다. 트로츠키주의와 레닌주의를 구분하는 분석은 간단하게 두 개의 사고방식인데, 저자에 따르면 트로츠키주의의 추상적추론과 대비되는 레닌주의의 구체적추론이라고 한다. 즉 레닌주의와 트로츠키주의의 대립물의 투쟁은 구체적 쟁점을 놓고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또한 20세기 사회주의의 수많은 혁명과 운동 그리고 여러 민족해방투쟁들이 트로츠키주의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맑스-레닌주의에 입각했다. 즉 이런 점에서도 트로츠키주의는 좌파 투쟁에서 크게 기여한 바가 없다. 심지어 토니 클리프의 경우 소련을 국가자본주의와 스탈린 관료라는 해석을 했다가, 반식민주의 진영의 지도자 호치민과 식민주의 진영의 압제자 바오다이 황제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는 선넘는 행위를 했었다. 즉 호치민과 바오다이를 같은 선상에서 관료주의 압제자 혹은 착취자로 비교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트로츠키주의의 전반적인 입장은 아니지만, 비상식 비과학적인 분석이었다.

 

200페이지가 좀 안되는 분량을 가진 이 책은 내용의 35%부록1’부록2’로 채웠다. ‘부록1’1970년대 알바니아 공산주의자가 분석한 현대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분석이고, ‘부록2’는 스페인 내전 관련한 트로츠키주의자와 아나키스트 그리고 우파들의 논리에 대한 반박 글이다. 전자의 경우 현실 사회주의권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유지하려 했던 나라의 분석이라 흥미로웠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스페인 내전 관련 글이 상당히 흥미진진하게 다가왔다. 예를 들면 영화감독 켄 로치(Ken Loach)가 제작한 랜드 앤 프리덤(Land And Freedom)’이 얼마나 편향된 시각을 가진 영화인지 알 수 있었다. 근래에 들어 스페인 내전에 관해 관심이 생기는데, 반공우익 역사학자 앤토니 비버(Antony Beevor)가 쓴 스페인 내전(The battle for Spain)’을 비교해가며 읽게 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정통적인 맑스-레닌주의 집단에서 트로츠키주의를 어떻게 비판하는지를 알고 싶은 이들과 트로츠키주의의 문제점을 알고 싶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Redman 2021-07-09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트로츠키주의가 무엇인가요? 제목과 달리 트로츠키주의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트로츠키주의 무엇이 잘못됐나 같네요

NamGiKim 2021-07-09 17:52   좋아요 0 | URL
‘사이비 좌익‘이라는 단어로 요약되죠.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영토와 세계 최강의 군사력 그리고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 미국은 말 그대로 여러 민족과 인종들이 살고 있는 사회다. 33천만 미국 인구 중 사회의 주류를 차지하는 것은 16~17세기에 건너간 유럽계 백인들 특히 앵글로 색슨 족이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상당히 많은 인종과 민족들이 미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현재 미국에는 소위 재미교포라고 불리는 이들이 살고 있으며, 대략 240만 명 이상으로 상당히 그 규모가 크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해 보았을 때, 재미교포의 숫자는 결코 적지 않다. 오늘은 한국계 미국인의 역사와 이들의 독립운동사에 대해 얘기해볼까 한다.

 

한국인의 미국 이주 혹은 방문이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역사적인 기록에서 찾아보면, 1883년 보빙사 자격으로 미국에 건너갔던 근대사상주의자인 유길준이나, 갑신정변 이후 미국으로 건너갔던 서재필 등이 있었다. 서재필의 경우 1894년 미국 시민권을 얻어 자신의 이름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으로 개명했는데, 그 이후의 행적에서 이승만 못지 않게 상당히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유길준이나 서재필 등과 같은 사례는 집단 이주는 아니었다.

 

미주지역으로의 한인 이주는 을사조약 체결 3년 전인 1902년에 시작됐다. 즉 대한제국 시절의 일이었다. 19021222일 한인 121명이 인천의 제물포항을 떠나 당시 미국의 식민지이던 하와이로 이주하면서 시작됐다.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19057월 미국 정부에 의해 한인의 미주 이민이 금지될 때까지 65회에 걸쳐 7,226명이 이주했는데, 이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는 이승만 또한 이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이승만은 초기 개화운동 시기 한성감옥에서 의형제를 맺었던 박용만의 도움을 받아서 하와이에 정착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박용만은 이후 이승만에게 제대로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참으로 씁슬한 일이다.

 

미주지역의 이주가 시작되면서 1903년 하와이 홀놀룰루에서 홍승하 등에 의해 신민회라는 최초의 독립운동 단체가 설립됐다. 이에 따라 혈성단, 자강화, 공진회, 의성회, 부흥회 등 20여 개의 단체들이 조직되기도 했다. 4년 뒤인 19079월 하와이 한인들은 한인합성협회를 창립했으며, 한인합성신보를 발행했다. 1904년 러일전쟁 이후 미주 한인들은 한인 자치기구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안창호 송석준 등과 같은 49인은 190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이른바 공립협회를 창립하기도 했다. 을사조약 전후로 해서 미주지역 한인들은 하와이에서 미국 본토로도 많이 넘어갔고, 그 이후에는 당시 미국 식민지나 다름없던 쿠바에 정착하는 사람도 있었다.

 

안창호를 중심으로 설립된 공립협회는 미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조직의 범위를 만주와 연해주 지역으로까지 확장하고자 했다. 이들 중에는 1907년 당시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치를거라 생각하고, “이를 기회로 삼아 독립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도 있었지만, 미국과 일본의 전쟁은 그로부터 34년 뒤인 1941년에 발생했다. 그런 가운데 19083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과 전명운 열사가 친일파이자 친미제국주의자인 스티븐스를 처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결국 재판을 받았다. 스티븐스 처단 사건 이후 공립협회는 합성협회와 통합을 추진하여 19092월 회원 4천 명을 거느린 국민회를 창립했다. 이 국민회는 19102월 대동보국회를 통합하여 19105대한인국민회로 개칭하면서 스스로 해외 한인의 최고기관임을 선포했다.

 

1910829일 일본은 드디어 조선을 합병함으로써 식민지 지배를 본격화 했다.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이후 신한민보는 논설에서 “2천만 국민은 결단코 왜황, 왜노, 왜종에 굴복하는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밝히면서 독립의 의지를 밝혔다. 그리고 여기엔 박용만이라는 인물이 1911년에 주필로 부임했는데, 그는 무장투쟁을 위한 병력 양성에 힘을 썼다. 무장투쟁론자였던 박용만은 1909년 미국 네브래스카주에 한인 소년병학교를 세워 군인을 양성하고자 했으며, 이 소년병학교는 191213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것을 시작으로 1914년까지 1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박용만은 19146월 하와이 오아후에서 대조선국민군단과 사관학교를 창설하여 일본과의 무장투쟁을 준비했었다. 최대 300명이 여기에 참가했다. 하지만 재정 문제와 미일관계 문제로 인해 1917년 박용만의 군단은 문을 닫았다.

 

미국에 정착하여 프린스턴 대학교와 하버드 대학교에서 학위를 수여한 이승만 또한 독립운동을 했다. 그러나 이 독립운동이 이승만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 많은 이들의 불만을 가지기도 했다. 일단 이승만을 좋아하는 측의 얘기에 따르면 당시 이승만은 교육 사업을 전개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상당히 문제가 많았으며, 자세한 내막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한 두 얼굴의 이승만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후 여운형을 중심으로 세워진 신한청년당은 강대국들의 회의에 맞춰 김규식을 파리에 파견했는데, 이는 3.1 운동의 불씨를 제공했다. 이후 19194월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졌는데, 임시정부의 초대 총령으로 이승만이 선출됐다.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총령까지 오른 이승만은 그해 8월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구미위원부를 설립했다. 이 구미위원부는 북미주와 하와이, 멕시코 그리고 쿠바 등지의 교민 사회에도 지부가 생겼다. 당시 이승만의 구미위원부는 대한제국 시기 한국과 외교관계를 맺었더 나라들에게 서한을 보내 한국에 새 임시정부가 탄생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중국에 있던 임시정부 인사들은 이승만에게 상당히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이승만이 독립운동 자금을 횡령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1921년 이승만이 상해에 왔을 때도 결국 갈등만 심해진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1925년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탄핵당했다.

 

1917년 레닌의 러시아 혁명은 전 세계 식민지 해방 운동에 영향을 줬는데, 미주지역 또한 이런 영향을 받았다.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김영옥의 경우, 친누나 김월나가 사회주의 사상에 상당히 호감과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이 내용은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이라는 책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192111월에는 워싱턴D.C에서 태평양회의가 열렸는데 상해 임시정부는 그해 8월 이 회의에 한국의 독립문제를 상정시키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를 조직했었다. 이승만, 서재필, 김규식 등을 대표로 파견해 청원서를 전달하고 회의에 직접 참석해 발언하려 했으나, 이 회의는 강대국들의 이권 재조정이 목적이었기에 무시당했다. 1920년대에는 미주 지역 내에서 도산 안창호 세력과 이승만 세력의 갈등이 존재했다. 독립운동 세력 내부에서의 피튀기는 싸움이 있었고, 당연히 여기엔 이승만의 책임이 크다.

 

1930년대 만주사변일 일어나고 유럽에서 파시즘이 급부상하면서 전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을 예고하는 것 같았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미주 한인들은 다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보였다. 여기에는 1932년 이봉창이나 윤봉길이 거둔 독립운동적 성과도 한 몫 했다. 하와이에 있던 국민회와 동지화는 194010연합한인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조직이 1941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로 바뀐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이승만을 대표로 선출했는데, 당시 그는 적극적인 반일주의자적인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일본 내막기라는 책까지 집필했는데, 이런 사실을 보면 정세를 읽는 눈이 띄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1941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미국이 일본과 전면적인 전쟁을 치르게 되자, 미주지역 내의 독립운동 세력들은 여러 활동을 했다. 우선 친미주의 성향의 이승만과 그 세력들은 미국의 소리라는 단파 방송을 통해 해외 독립운동 세력에게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을 알렸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로스엔젤레스에서 이른바 맹호대라는 민병대를 설립했고, 병력 규모는 800명 정도였다. 이후 미주지역 독립세력들은 중경 임시정부와 협력하여 미국 OSS 휘하에서 대략 50명 정도를 훈련시켰고, 이들은 캘리포니아 산타 카탈리나 섬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미주지역 독립운동을 이런 활동을 하다가 1945815일 해방을 맞이했다.

 

추가적으로 더 첨언하자면, 미국의 식민지였던 쿠바에도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임천택이 그러했다. 임천택은 쿠바의 3개 지방에 흩어진 한인지방회를 규합해 수도 아바나에 재쿠바 한족단을 만들었고, 1934년부터는 상해 임시정부와도 직접 연락을 주고받으며 독립자금 모금 등 광복운동 후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의 독립자금 송금기록은 김구의 백범일지에도 기록돼 있을 정도로 열혈 독립운동가였다. 이후 그는 쿠바에 계속 남았고, 1950년대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가 주도한 쿠바 혁명에도 참가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천안함은 좌초입니다! - 천안함 조사위원으로 참여한 선반 전문가 신상철의 비망기
신상철 지음 / 민진미디어 / 2016년 5월
평점 :
품절


2010 3 26일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초계함인 천안함이 침몰했다천안함이 침몰하면서 46명의 해군이 사망했고한국사회는 천안함 침몰에 대한 의구심과 더불어 이들에 대한 슬픔에 잠기게 되었다이것이 바로 천안함 사건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 등은 이 천안함 사건이 북한측 잠수함의 어뢰 공격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고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주장을 믿었으며지금까지도 믿고 있다최근 인터넷 사이트들을 보면 천안함 사건이 마치 북한의 어뢰공격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많이 묘사되고 있고이것을 빌미로 반북주의적인 정서를 강요하기도 한다.

 

천안함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주장은 널리 받아지고 있다. 2011년 미국에서 나온 FPS 게임이자북한이 미국을 점령한다는 게임 홈프론트(HomeFront)’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홈프론트 게임 시작 오프닝에서 천안함 사건으로 46명의 한국 해군 장병들이 북한 잠수함의 어뢰 공격으로 전사했다.”는 힐러리 클린턴의 발표가 나오면서 시작된다심지어 FPS 게임에서도 천안함은 북한 잠수함의 공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이러한 시각은 한국에도 정말 널리 퍼져 있으며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찾기 힘들다.

 

천안함 사건에 대해 생각할 때, ‘북한의 어뢰공격이라는 점에 의구심을 가지거나 토를 달면 종북 혹은 빨갱이와 같은 원색적인 단어를 들어가며 색깔몰이 당하기 쉽상이다즉 이러한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한국 사회는 천안함 사건에 대해 정부가 내린 결론과 다른 입장을 취하는 견해에 관용을 보이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천안함 사건은 그 자체로써 의문점도 많고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사실들이 많다최근들어 PD수첩에서 방영한 방송을 보면 당시 최원일 함장은 어뢰 공격을 상부에 보고했다고 하는데그런 증언과 방송에도 불구하고 천안함 사건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것 같다.

 

우선 필자의 생각을 밝히자면필자는 천안함 사건에 관해 자세히는 모르지만북한의 어뢰 공격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많은 사람들이 천안함 사건을 얘기할 때 놓치는 부분이 있는데그것은 바로 북한이 천안함 사건 이후 한국에 관련 조사단을 보내려고 했다는 사실이다북한 국방위원회는 물증확인 위해 검열단 파견하겠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확실히 밝혔다그러나 이명박 정부에서 이들의 주장을 철저히 외면했고한국과 미국은 천안함 사건이 북한 어뢰 공격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만 내릴 뿐이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천안함 사건을 통해 안보의식을 강화하고자 했던 이명박 정부는 자신들이 내린 결론과 다른 입장에 대해서는 관용적이지 않았다천안함 사건 이후 민주당 추천 조사위원으로 천안함 사건 진상조사를 위한 민군합동조사단에 참여하여 진실규명에 나섰던 신상철씨는 천안함은 좌초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만약 필자가 반북의식이 아주 강했던 고1~2때 이 책을 읽었다면 분명히 반감을 가졌겠으나최근들어 천안함 사건이 다시 화제가 되면서지금껏 크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천안함 사건에 관한 관심이 생겼다따라서 필자는 이번에 신상철씨가 집필한 책인 천안함은 좌초입니다!”를 읽게 됐다.

 

천안함은 좌초입니다!”는 신상철씨가 천안함 사건을 조사하며항해부분 전문가로써 분석한 자료를 정리한 책이다책에 따르면 천안함 사건 최초의 보도는 좌초라는 사실이었고실제로 자신이 여러 자료와 증거물을 통해 조사해본 결과 천안함은 좌초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한다예를 들면 어뢰 공격에 의한 것이라면그 주변 물고기들이 폭발로 죽어야 하며천안함에서 사망한 장병들의 시신도 폭발에 의한 피해가 극심해야 한다고 한다그러나 시신을 조사해본 결과 사망자 전원이 익사에 의한 것이었으며생존한 장병들 또한 어뢰 공격으로 인한 피해로 보이는 상처를 찾아볼 수 없었고공격을 받을 시에 깨져야 하는 형광등이 멀쩡했다또한 어뢰 공격으로 인한 물기둥을 본 사람도 없었고물고기 떼죽음 현상도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증거와 사실관계를 보았을 때천안함 사건은 어뢰 공격에 의한 것이 아닌 좌초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천안함 좌초설의 근거가 상당히 자세하고 거짓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는 명백한 사실관계들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필자는 알 수 있었다책에서는 저자가 주장한 좌초설을 트집 잡거나 처벌하기 위해 또는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일어났던 여러 사건들에 대한 내용도 나온다미군측에서도 끝까지 좌초설을 외면하고 무시했으며 완고히 부정했다이명박 정부 또한 그랬으며신상철씨의 좌초설을 강압적으로라도 막으려 했다정부가 신상철씨를 막으려고 했던 점과이후 좌초설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정에 그를 세웠던 일(물론 신상철씨는 무죄를 선고 받았다.)을 생각하면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사실들이 많다.

 

이처럼 천안함 사건은 여러 가지 풀리지 않은 의문점들이 많다그러나 필자 또한 책에서 주장하는 좌초설이 진실인지는 모르겠다우선 이 책의 초판은 2012년에 나왔고개정판은 2016년에 나왔다이 사이에 천안함 관련 여러 목소리와 증언 그리고 조사 자료 등이 나왔기 때문이다따라서 필자는 천안함 좌초설을 전적으로 믿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책 저자가 쓴 취지와 날조극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왜냐하면 저자의 주장대로 풀리지 않은 의문점과 더불어 은폐한 측면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필자는 천안함 사건이 북한의 어뢰공격이라는 주장을 믿지 않는다결정적으로 천안함 사건 당시 북한의 어뢰 공격이라는 사실을 만들어내기 위해유용원과 같은 자칭 군사 전문가들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의 인간어뢰를 생각하며, “북한에서 인간어뢰를 발사하여 천안함을 격침시켰다.”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주장들을 남발했었기 때문이다그리고 북한군의 어뢰 공격설을 밀었던 이들이이를 입증하기 위해 보인 방식도 상당히 편향적이었다앞서 말했듯이신상철씨와 같은 좌초설을 무조건적으로 없는 이야기 취급했다그것도 필요하다면 물리적인 방법을 동원하면서 말이다따라서 필자는 천안함 사건을 북한의 어뢰 공격설이라 주장하는 입장을 매우 반대한다.

 

2010년 천안함 사건을 보다보면 생각나는 사건이 있다그것은 바로 1964년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이다. 1964년 미국의 린든 B. 존슨 정부는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베트남 전쟁을 일으켜 침략전쟁을 게시했다통킹만 사건 이후 존슨 대통령은 북베트남 해군이 미국 구축함 매독스 호를 공격했다고 얘기했지만이는 완벽한 날조극이었고 사전에 미국이 계획한 일이었다물론 북베트남 해군이 1차로 공격한건 사실이었지만, 2차 공격은 완벽한 날조였다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은 통킹만 사건 몇일 전에 혼미와 혼니우 섬에 남베트남군 특수부대를 상륙시켜 기습 공격을 가했고이 계획에 따라 미국 구축함을 북베트남 영해에 배치했다한마디로 미국의 자작극이었다이 통킹만 사건의 진실은 1971년 펜타곤 페이퍼가 세상에 공개되면서 그 진실도 같이 드러났다.

 

과거 미국의 린든 B. 존슨 정부가 통킹만 사건을 조작했듯이천안함 사건도 이명박 정부가 조작한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게 만든다본문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이러한 의문점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아마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 대통령인 이명박은 천안함의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워낙 의문점이 많기에 의구심도 많이 드는 사건이기에 필자 또한 정확한 진실은 알 수 없다그러나 확실한 것은 북한군의 어뢰 공격은 상당히 믿기 힘든 주장이라는 사실이다천안함 사건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천안함 사건이 어떤 부분에서 날조가 있었는지왜 당시 정부의 발표만을 믿을 수 없는지를 알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