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3번째로 큰 영토와 세계 최강의 군사력 그리고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 미국은 말 그대로 여러 민족과 인종들이 살고 있는 사회다. 33천만 미국 인구 중 사회의 주류를 차지하는 것은 16~17세기에 건너간 유럽계 백인들 특히 앵글로 색슨 족이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상당히 많은 인종과 민족들이 미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현재 미국에는 소위 재미교포라고 불리는 이들이 살고 있으며, 대략 240만 명 이상으로 상당히 그 규모가 크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해 보았을 때, 재미교포의 숫자는 결코 적지 않다. 오늘은 한국계 미국인의 역사와 이들의 독립운동사에 대해 얘기해볼까 한다.

 

한국인의 미국 이주 혹은 방문이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역사적인 기록에서 찾아보면, 1883년 보빙사 자격으로 미국에 건너갔던 근대사상주의자인 유길준이나, 갑신정변 이후 미국으로 건너갔던 서재필 등이 있었다. 서재필의 경우 1894년 미국 시민권을 얻어 자신의 이름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으로 개명했는데, 그 이후의 행적에서 이승만 못지 않게 상당히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유길준이나 서재필 등과 같은 사례는 집단 이주는 아니었다.

 

미주지역으로의 한인 이주는 을사조약 체결 3년 전인 1902년에 시작됐다. 즉 대한제국 시절의 일이었다. 19021222일 한인 121명이 인천의 제물포항을 떠나 당시 미국의 식민지이던 하와이로 이주하면서 시작됐다.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19057월 미국 정부에 의해 한인의 미주 이민이 금지될 때까지 65회에 걸쳐 7,226명이 이주했는데, 이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는 이승만 또한 이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이승만은 초기 개화운동 시기 한성감옥에서 의형제를 맺었던 박용만의 도움을 받아서 하와이에 정착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박용만은 이후 이승만에게 제대로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참으로 씁슬한 일이다.

 

미주지역의 이주가 시작되면서 1903년 하와이 홀놀룰루에서 홍승하 등에 의해 신민회라는 최초의 독립운동 단체가 설립됐다. 이에 따라 혈성단, 자강화, 공진회, 의성회, 부흥회 등 20여 개의 단체들이 조직되기도 했다. 4년 뒤인 19079월 하와이 한인들은 한인합성협회를 창립했으며, 한인합성신보를 발행했다. 1904년 러일전쟁 이후 미주 한인들은 한인 자치기구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안창호 송석준 등과 같은 49인은 190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이른바 공립협회를 창립하기도 했다. 을사조약 전후로 해서 미주지역 한인들은 하와이에서 미국 본토로도 많이 넘어갔고, 그 이후에는 당시 미국 식민지나 다름없던 쿠바에 정착하는 사람도 있었다.

 

안창호를 중심으로 설립된 공립협회는 미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조직의 범위를 만주와 연해주 지역으로까지 확장하고자 했다. 이들 중에는 1907년 당시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치를거라 생각하고, “이를 기회로 삼아 독립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도 있었지만, 미국과 일본의 전쟁은 그로부터 34년 뒤인 1941년에 발생했다. 그런 가운데 19083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과 전명운 열사가 친일파이자 친미제국주의자인 스티븐스를 처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결국 재판을 받았다. 스티븐스 처단 사건 이후 공립협회는 합성협회와 통합을 추진하여 19092월 회원 4천 명을 거느린 국민회를 창립했다. 이 국민회는 19102월 대동보국회를 통합하여 19105대한인국민회로 개칭하면서 스스로 해외 한인의 최고기관임을 선포했다.

 

1910829일 일본은 드디어 조선을 합병함으로써 식민지 지배를 본격화 했다.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이후 신한민보는 논설에서 “2천만 국민은 결단코 왜황, 왜노, 왜종에 굴복하는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밝히면서 독립의 의지를 밝혔다. 그리고 여기엔 박용만이라는 인물이 1911년에 주필로 부임했는데, 그는 무장투쟁을 위한 병력 양성에 힘을 썼다. 무장투쟁론자였던 박용만은 1909년 미국 네브래스카주에 한인 소년병학교를 세워 군인을 양성하고자 했으며, 이 소년병학교는 191213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것을 시작으로 1914년까지 1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박용만은 19146월 하와이 오아후에서 대조선국민군단과 사관학교를 창설하여 일본과의 무장투쟁을 준비했었다. 최대 300명이 여기에 참가했다. 하지만 재정 문제와 미일관계 문제로 인해 1917년 박용만의 군단은 문을 닫았다.

 

미국에 정착하여 프린스턴 대학교와 하버드 대학교에서 학위를 수여한 이승만 또한 독립운동을 했다. 그러나 이 독립운동이 이승만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 많은 이들의 불만을 가지기도 했다. 일단 이승만을 좋아하는 측의 얘기에 따르면 당시 이승만은 교육 사업을 전개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상당히 문제가 많았으며, 자세한 내막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한 두 얼굴의 이승만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후 여운형을 중심으로 세워진 신한청년당은 강대국들의 회의에 맞춰 김규식을 파리에 파견했는데, 이는 3.1 운동의 불씨를 제공했다. 이후 19194월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졌는데, 임시정부의 초대 총령으로 이승만이 선출됐다.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총령까지 오른 이승만은 그해 8월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구미위원부를 설립했다. 이 구미위원부는 북미주와 하와이, 멕시코 그리고 쿠바 등지의 교민 사회에도 지부가 생겼다. 당시 이승만의 구미위원부는 대한제국 시기 한국과 외교관계를 맺었더 나라들에게 서한을 보내 한국에 새 임시정부가 탄생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중국에 있던 임시정부 인사들은 이승만에게 상당히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이승만이 독립운동 자금을 횡령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1921년 이승만이 상해에 왔을 때도 결국 갈등만 심해진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1925년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탄핵당했다.

 

1917년 레닌의 러시아 혁명은 전 세계 식민지 해방 운동에 영향을 줬는데, 미주지역 또한 이런 영향을 받았다.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김영옥의 경우, 친누나 김월나가 사회주의 사상에 상당히 호감과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이 내용은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이라는 책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192111월에는 워싱턴D.C에서 태평양회의가 열렸는데 상해 임시정부는 그해 8월 이 회의에 한국의 독립문제를 상정시키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를 조직했었다. 이승만, 서재필, 김규식 등을 대표로 파견해 청원서를 전달하고 회의에 직접 참석해 발언하려 했으나, 이 회의는 강대국들의 이권 재조정이 목적이었기에 무시당했다. 1920년대에는 미주 지역 내에서 도산 안창호 세력과 이승만 세력의 갈등이 존재했다. 독립운동 세력 내부에서의 피튀기는 싸움이 있었고, 당연히 여기엔 이승만의 책임이 크다.

 

1930년대 만주사변일 일어나고 유럽에서 파시즘이 급부상하면서 전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을 예고하는 것 같았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미주 한인들은 다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보였다. 여기에는 1932년 이봉창이나 윤봉길이 거둔 독립운동적 성과도 한 몫 했다. 하와이에 있던 국민회와 동지화는 194010연합한인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조직이 1941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로 바뀐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이승만을 대표로 선출했는데, 당시 그는 적극적인 반일주의자적인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일본 내막기라는 책까지 집필했는데, 이런 사실을 보면 정세를 읽는 눈이 띄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1941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미국이 일본과 전면적인 전쟁을 치르게 되자, 미주지역 내의 독립운동 세력들은 여러 활동을 했다. 우선 친미주의 성향의 이승만과 그 세력들은 미국의 소리라는 단파 방송을 통해 해외 독립운동 세력에게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을 알렸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로스엔젤레스에서 이른바 맹호대라는 민병대를 설립했고, 병력 규모는 800명 정도였다. 이후 미주지역 독립세력들은 중경 임시정부와 협력하여 미국 OSS 휘하에서 대략 50명 정도를 훈련시켰고, 이들은 캘리포니아 산타 카탈리나 섬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미주지역 독립운동을 이런 활동을 하다가 1945815일 해방을 맞이했다.

 

추가적으로 더 첨언하자면, 미국의 식민지였던 쿠바에도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임천택이 그러했다. 임천택은 쿠바의 3개 지방에 흩어진 한인지방회를 규합해 수도 아바나에 재쿠바 한족단을 만들었고, 1934년부터는 상해 임시정부와도 직접 연락을 주고받으며 독립자금 모금 등 광복운동 후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의 독립자금 송금기록은 김구의 백범일지에도 기록돼 있을 정도로 열혈 독립운동가였다. 이후 그는 쿠바에 계속 남았고, 1950년대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가 주도한 쿠바 혁명에도 참가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