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에 시작된 산업혁명은 유럽의 열강들을 이른바 제국주의 국가로 발전시켰다영국프랑스독일미국벨기에네덜란드이탈리아러시아 등이 이러한 반열에 있었으며이들의 식민 지배는 전 세계로 확장됐다또한 동양에서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에도막부를 거쳤던 일본이 탈아입구를 외치며 서구 열강 대열에 오르고자 했다이러한 열강들의 식민지 및 시장경쟁이 결국 전쟁으로 일어났는데그것이 바로 1914년에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World War I)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서구 열강들의 팽창은 필연적으로 각국의 분쟁과 갈등을 불러일으켰다특히나 1871년 제2제국을 선포한 독일이 빌헬름 2세 시대에 들면서 식민지 팽창에 나섰는데이것은 기존의 제국주의 세력이던 영국과 프랑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영토만 거대했던 사실상 후진 국가였던 러시아 제국도 점차 자본주의화를 거치기 시작했다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경계했는데, 1904년 러일전쟁에서 아시아 일본을 도운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그러나 이런 상황속에서 독일 세력이 확장하고 특히나 발칸반도 지역에서 각국의 대립이 1900년대 들어서 극심해졌다이것은 결국 1910년대 발칸 반도에서 민족주의 의식을 자극했으며, 1914년 사라예보 사건으로 이어졌다.

(사라예보 사건, 이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의 불씨를 터뜨렸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와 황태자비 소피(Sophie)가 현재 세르비아의 사라예보를 방문했다가 세르비아의 민족주의 청년인 가브릴로 프린치프(Garvrilo Princip)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이것이 사라예보 사건이었다사라예보 사건 이후 영국과 프랑스독일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야심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났고이들의 야심이 전쟁으로 폭발했다당시 독일은 프랑스와의 영토분쟁이 있던 알사스 로렌 지역을 차지하고 싶어했고영국은 독일을 견제하여 대영제국의 패권을 지키고 싶어 했으며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발칸반도를 차지하고 싶어 했다.

 

이에 따라 1914년 7월 23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내고 세르비아 측으로부터 양보를 의미하는 응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28일에는 선전포고했다이어서 슬라브계 민족의 후원자인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에 대항해 군을 동원하고그 후 독일 · 영국 · 프랑스 · 터키 등이 각국의 동맹조약에 따라 차례로 전쟁에 뛰어들었으며타이완과 조선을 합병한 일본도 영일동맹에 따라 전쟁에 참전했다이렇게 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차 세계대전은 영국프랑스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과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오스만 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의 격돌이었다통일된 독일은 군사력 증강에 힘을 많이 썼었다특히나 군함과 잠수함 생산을 늘렸으며병력도 확장했다당시 독일은 슐리펜 계획이라 하여 단기간에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러시아를 무찌를 군사작전을 계획했다물론 이들의 전략은 프랑스를 무찌르고 러시아의 군대를 무찌른 뒤 영국을 굴복시킨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참호를 나와 돌격하는 병사들)

 

그러나 전쟁은 예상외로 길어졌다특히나 19세기 산업발전을 통해 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군사기술도 발달했기 때문이다거기다 1870년 보불전쟁 당시 굴욕의 패배를 당했던 프랑스는 예상외로 독일군의 공세를 잘 막았고동부전선에서의 독일군은 러시아군의 물량공세를 견뎌야 했다거기다 대영제국이라 불리던 영국은 프랑스와 러시아를 지원하여 독일을 압박했다이렇게 되면서 전쟁은 참호전을 중심으로 하는 공방전이 됐다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전쟁은 학살극으로 변모했다특히나 기관총의 등장과 폭격탱크 그리고 가스전은 수많은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대표적으로 솜 전투만 하더라도 사상자 단위가 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을 초과했을 정도였다과거에 후퇴하는 병사들을 추격하는 용도로 사용된 기병들은 기관총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투입된 항공기, 전투기가 첫 등장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였다.)

 

거기다 지뢰의 발달과 장갑으로 둘러싸인 탱크의 등장 그리고 공중에서 적군을 공격하는 항공기의 등장도 인명피해를 늘리는 원인 중 하나였다특히나 가스전은 치명적이었다1차 세계대전 당시 양측은 독가스를 사용했는데가스를 사용할 때마다 병사들은 방독면을 써야했으며방독면을 쓰지 않는 병사들은 그 자리에서 질식해서 죽거나 부상당했다이처럼 제1차 세계대전은 현대전의 잔혹함을 제대로 보여줬고과학기술의 파괴력을 인류에게 알려줬다1차 세계대전에서 양측의 사상자가 극심하게 속출한 이유에는 전략전술에도 있었다당시 병사들은 적국의 기지를 점령하기 위해 소총을 들고 돌격하는 전략을 사용했는데방어하는 측에선 참호를 파놓고기관총을 난사했다따라서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것이다.

 

슐리펜 작전이 실패한 이후 전쟁은 장기전으로 가면서 양측 공방전의 반복이었다그러나 1917년 영국 프랑스 연합국 측에서 문제가 생겼다그것은 바로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914년 전쟁에 참전한 러시아 제국은 전쟁을 수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위기에 직면했었고구식전술에 의존했기에 사상자가 급증했었다이에 따라 민중들은 러시아 제국에 불만을 품게 됐고혁명을 주도하여 300년간 지속되던 차르 체제를 전복시켰다여기서 더 나아가 스위스에서 망명 중이던 사회주의자 레닌이 페트로그라드에 귀국하여 10월 혁명을 일으켰고궁극적으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다그러고 난 이후 레닌은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함으로써1차 세계대전에서 빠졌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탱크, 탱크가 전쟁에 처음 등장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였다.)

 

1917년부터 러시아가 힘을 못 쓰게 됨에 따라 독일은 서부전선에서의 공세를 강화했다특히나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가 전선에서 이탈하고 난 이후에는 대부분의 전력을 서부전선에 투입하여 영국과 프랑스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뒀다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에게는 또 다른 보험이 있었다그것은 바로 미국이었다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과의 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보던 미국은 중립주의를 표방했었다그러나 1915년 독일 잠수함이 미국의 상선을 공격하는 사례가 발생했고독일 잠수함 공격으로 인한 미국 상선의 침몰 횟수는 1917년이 돼서 더 증가했다.

(기관총, 제1차 세계대전에서 극심한 병력 손실을 야기시킨 무기다.)

 

당시 미국은 멕시코와 영토분쟁 중이었는데여기서 독일은 멕시코에게 달콤한 조건을 내걸었다그 내용은 멕시코가 독일을 도울시 19세기 당시 미국이 침략으로 빼앗은 멕시코 땅을 돌려주겠다는 내용이었다근데 이 전보를 영국 측에서 가로채서 미국에게 알렸고이에 분노한 미국은 1917년 독일에게 선전포고하며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물론 미국은 병력이 부족해서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모집하는 기간이 필요했다이에 따라 실질적인 대규모 병력 투입은 1918년에 이루어졌다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이후 서부전선에 총 공세를 가하던 독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부전선에 도착한 대규모의 미군을 상대하게 됐다전쟁을 오랜 기간 치른 독일은 미국을 상대할 힘이 부족했고결국 1918년 11월 11일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했다이로써 4년간 유럽에서 전개됐던 제1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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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1-09-21 14: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때 페르디난트와 소피가 참 안타까웠어요. 이 사건이 없었으면 소피는 인정받을 수 있었을텐데요. 끔찍한 사건들은 많은 이들의 슬픔과 절망 속에서 또 다른 이들의 욕망을 채우면서 생기는 것 같아요ㅠㅠ

NamGiKim 2021-09-21 14:25   좋아요 1 | URL
일개인으로 보면 안타까운 사건은 분명하죠.
 

중일전쟁이 발발하던 1937년 마오쩌둥(Mao ZeDong)은 중국 연안에 있으면서 실천론 모순론이라는 철학 서적을 집필한 적이 있었다마오쩌둥의 이런 철학적 해석 및 시도는 엄밀히 따졌을 때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상황에서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결성과 그 과정에서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의 중국화에 대한 시도이기도 했다실제로 마오쩌둥은 중일전쟁 전후로 해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중국화를 강조하기도 했는데, 1940년 그가 쓴 신민주주의론은 그러한 중국화의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오쩌둥은 신민주주의론에서 기본적으로 구민주주의혁명단계와 신민주주의혁명단계로 중국혁명을 구분했는데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단계에서 장기간의 신민주주의혁명단계를 설정해놓고이에 따를 사회개혁 정책과 사회문화의 개조 등 신중국의 새로운 발전 및 비전을 제시했다여기에는 제2차 국공합작이라는 현실정치의 영역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물론 마오쩌둥은 기본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보편적 이론으로 인정했다다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이론을 기계적으로 중국에 적용하지 말고중국의 현실 상황에 맞게 적용하자는 것이 마오쩌둥이 철학적으로 강조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마오쩌둥은 1941년 연안 간부회의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중국화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3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었다.

 

첫째중국의 객관적인 현실조건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철저하고 체계적으로 진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조사와 연구를 소홀히 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정신과 위배되는 것이다.

 

둘째중국의 역사에 대한 학습을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많은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입만 열면 고대 희랍의 역사를 운위하면서도 자신들의 조상과 자신들의 역사를 망각하는 경우가 많다.

 

셋째마르크스-레닌주의의 입장관점방법에 의거하여 중국의 현실조건중국의 역사그리고 중국혁명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해결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이것이 소련과 코민테른 노선에 반대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엄밀히 따졌을 때마오쩌둥이 얘기한 중국화의 방침은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의 노선에 입각한 것이었다즉 아시아를 포함한 식민지 지역의 공산주의 운동의 민족적 특수성을 반영하고 민족적 이익을 대변하는 민족적 공산주의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결의에 입각하고 있었다또한 당시 마오쩌둥이 소련의 최고 지도자인 이오시프 스탈린과 입장을 대립한 것도 아니었다마오쩌둥과 스탈린 사이의 심각한 견해차이도 없었다.

 

1940년대 초 제2차 세계대전이 격해지면서 중국의 상황이 바뀌었다. 1937년 제2차 국공합작을 맺은 국민당과 공산당은 1941년 신사군 사건으로 중국 국민당군이 공산당 휘하의 신사군 9,000명을 몰살시키면서다시 대립적인 분위기로 갔다또한 일본군은 중국 공산당 휘하의 팔로군과 신사군을 상대로 아주 잔혹하기 짝이 없는 삼광작전(모든 것을 불태우고죽이고약탈한다는 의미)’을 전개했다중일전쟁 과정에서 해방구를 넓혀나갔던 마오쩌둥은 위기국면에 봉착했다따라서 마오쩌둥은 당내의 분열과 동요 그리고 이에 맞선 정치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는데그것이 바로 1942년에 전개된 정풍운동이다.

 

정풍운동은 1942년 2월 1일 연안의 당교 개교식에서 1,000여 명의 당 간부가 모인 가운데마오쩌둥이 당의 작풍을 정돈하자라는 연설을 하면서 공식적으로 전개됐다정풍운동은 학풍당풍문풍이라는 3풍 정돈을 목표로 추진되었다마오쩌둥에 의하면 학풍의 정돈이란 중국의 현실을 무시하는 주관주의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중국화를 추진한다는 것이었다당풍의 정돈은 종파주의와 관료주의에 대한 투쟁을 의미한다즉 이런 관료주의에 대한 투쟁을 통해 당내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통일과 기율을 수립하는 것이다마지막으로 문풍의 정돈은 무의미하고 무책임하며 공허한 표현을 일삼는 형식주의적 경향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전체 당원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정풍운동이 전개됐다. 1942년에서 1943년 사이에 당의 고급 및 중급단위의 실무책임자들약 3만 명 이상의 당간부들을 대상으로 하여 학풍당풍문풍에 대한 마오쩌둥의 저작물을 비롯하여 당중앙이 선정한 문건을 중심으로 학습과 훈련을 실시했다당원과 당간부를 소조별로 나누어 자신의 사상적정치적 관점과 입장에 대하여 비판과 자아비판을 반복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따라서 정풍은동은 당내에 존재하는 잘못된 사상과 행동을 바로잡고당원들로 하여금 올바른 사상과 행동양식을 가지게 하는 사상혁명적 성격이 강했다때문에 공개적인 숙청이나 또는 폭력적인 방식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이는 1930년 AB단 사건(Anti-Bolshevik의 약자로 푸난사변으로도 불린다.) 때의 적잖은 유혈이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정치적 투쟁을 통해 중국 공산당에서는 이른바 모택동 사상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모택동 사상이 당의 지도이념으로 부상했고이에 따라 중국 공산당의 역사를 마오쩌둥과 모택동 사상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방향으로 전개됐다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1945년 4월에 개최된 제6기 6중전회에서 역사문제에 대한 결의를 채택했다이것은 천두슈와 이립삼과 구추백 그리고 강서시대의 소련유학파 노선을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모택동 노선을 강조했다역사문제에 대한 결의는 1945년 4월 개최된 중국 공산당 제7차 당대회에서 통과됐으며이로써 중국 공산당의 지도이념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더불어 모택동 사상으로 재정립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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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12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남경)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피바다와 지옥도가 나타났다수도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대는 이곳에서 소름끼치는 학살극을 전개했고이 학살극은 2달간 전개되었다이 사건이 바로 난징 대학살(Nanjing Massacre)이다난징 대학살은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해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주제다.

(아이리스 장의 저서 <난징의 강간>, 서구사회에서 꽤나 이슈가 되었던 책이다.)

 

1997년 중국계 미국인이던 아이리스 장(Iris Chang)은 <난징의 강간2차 세계대전의 잊혀진 홀로코스트(The Rape of Nanking: The Forgotten Holocaust of World War II)>라는 저서를 집필하여미국 사회에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범죄를 널리 알리기도 했었다. 3년 전 미국 워싱턴 DC에서 홀로코스트 박물관(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을 들렸던 필자 또한 서점에서 이 책을 우연히 본적이 있을 정도다이처럼 난징 대학살은 일본의 전쟁범죄로 빼놓을 수 없는 주제다이번에는 난징 대학살의 배경과 전개 그리고 결과와 이 학살극에서 한명의 생명을 더 살리고자 고군분투했던 아시아판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와 같은 휴머니즘 스토리에 대해 얘기해볼까 한다.

 

1937년 7월 28일에는 베이핑과 천진 그리고 탕구 전역에 걸쳐 중국군에 대한 총공격을 게시했던 일본군은 8월 25일에 중국 만리장성을 돌파했고그 여세를 몰아 차하얼 성을 침입한 뒤차하얼 성의 성도인 장자커우를 점령했다그리고 다시 상하이에서도 전투를 시작하여 3개월간의 전투 끝에 승리했다중일전쟁의 베르됭 전투라 불렸던 제2차 상하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4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반면중국군은 20만 명을 초과했다당시 일본군이 최소 300대 이상의 전차를 포함한 상당수의 군함 그리고 항공기를 이 전투에 투입했을 정도로 제2차 상하이 전투는 대규모 전투였다.

(난징에 진입한 일본군 탱크)

 

상하이 전투가 일본군의 승리로 끝난 뒤 일본군은 여세를 몰아 푸산쑤저우우장 그리고 중국의 여러 도시들을 접수했다이렇게 되자 장제스는 1937년 11월 19일 수도를 난징에서 충칭으로 옮겼다이후 일본군은 1937년 12월 6일 난징 성 교외에 도달했고, 4일 뒤인 10일에는 탱크와 중포를 앞세워 난징 성의 각 성문으로 돌격했다그리고 2일 뒤 일본군은 난징 성내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으며일본군은 국민당군의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이 소식은 한 일본인 종군 기자에 의해 난징 공략에 성공하다!”라는 보도로 일본 본국에 전해졌다.

(수도 난징에서 승전 퍼레이드를 하고 있는 일본군)

 

여기서부터 비극이 시작됐다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한 이후 난징에 있던 일부 중국군 병사들은 탈출하지 못했었다뿐만 아니라 도시를 탈출하려는 이들은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들도 있었다일본군은 중국군을 추격 및 토벌하는 작전을 펼쳤고이 과정에서 양쯔강에 있던 군인 및 민간인을 기관총으로 몰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이렇게 해서 난징 대학살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이후 1937년 12월 17일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난징에서 승전 퍼레이드를 벌였다이 승전 퍼레이드 이후 일본군은 난징 곳곳에서 학살극을 벌이기 시작했다.

(중국인을 생매장하는 일본군)

 

당시 일본군은 난징 교외에 거대한 구덩이를 파고 그 앞에 포로들을 줄지어 세워 놓은 채 기관총을 난사했으며일본도로 한 사람씩 차례로 참수한 다음 목을 모아놓고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그리고 부녀자들을 강간한 후 참수하거나 불구덩이에 집어던지거나 소총 총검으로 찔러죽이거나 총으로 쏴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으며그 밖에 입 밖으로 꺼내기조차 힘든 잔혹행위들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사람의 목을 베놓고 웃고있는 일본군 병사)

 

중국인 100인 목 베기 시합을 벌였던 이들 중에는 노다 쓰요시 소위와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와 300명 목 베기에 성공한 다나카 군키치 대위도 있었다고 한다놀랍게도 이런 잔혹행위는 일본 신문과 잡지에 대서특필되었으며기념사진까지 있다이처럼 일본군은 포로나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죽였다수없이 많은 중국인이 일본군의 총검술 훈련용 표적이나 목 베기 내기의 희생물이 되었다산 채로 파묻히거나 칼부림에 난도질당하기도 했다난징의 한 광장에서는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해 천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세워 놓고 몸에 석유를 부은 다음 기관총을 난사하기도 했으며총탄이 사람들의 몸을 꿰뚫을 때 석유에 불이 붙어 시체더미가 산을 이루었다고 한다.

(난징에서 집단 학살당한 민간인들)

 

일본군의 인간 사냥'은 여성들에게 더욱 혹심했다집단윤간', '선간후살(先姦後殺강간한 뒤에 죽임)'은 채 열 살도 안 된 어린이부터 60, 70대 노파까지 대상을 가리지 않았으며일본군은 수녀와 비구니를 포함한 난징의 여성들을 보이는 대로 능욕했다난징대학살에 참가한 한 일본군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일로 무료함을 달랜다산 채로 묻어버리거나 장작불로 태워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죽이기도 했다.”

 

난징이 점령된 지 수일 만에 시내 곳곳에는 사지가 절단되거나 다리를 벌린 채 죽은 여자들의 시체가 쌓였다일본군은 살해한 여성의 성기를 도리거나 그 위에 막대기를 쑤셔놓았다이런 광기어린 학살은 1938년 2월까지 대략 6주 동안 전개됐다이런 광란의 학살극으로 최소 20만 명에서 30만 명이 대량 학살당했다그리고 이런 학살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여성과 남성군인과 노인아이를 가리지 않고 행해졌으며말 그대로 난징은 피바다가 됐다현재 중국 정부가 일본 정부에게 난징 대학살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하며 사과를 요구하는 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1938년 1히로다 고키 일본 외무대신이 주미 일본대사관에 비밀 전문을 보냈었다그 비밀 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 신문기사에 보도된 중국인 목베기 대회)

 

일본군이 저지른 모든 행위와 폭력 수단은 아틸라 왕과 흉노족을 연상시킨다최소 30만 명의 민간인이 살육됐고많은 수는 극히 잔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방식으로 살해됐다전투가 끝난 지 수주가 지난 지역에서도 약탈과 아동 강간 등 잔혹 행위가 계속되고 있다.”

(난징 대학살에 실질적인 책임이 있는 아사카 왕자,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맥아더 정부에서 전범으로 처벌받지 않았다.)

 

난징을 점령했던 일본군은 난징에 있던 외국 조계도 포위하여 중국군을 일일이 색출해 처형했는데사실 점령 이전단계부터 일본의 항공기가 조계지를 오폭하기도 했었다일본군의 난징 점령 이후 학살극이 심해지자이를 막고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노력한 서양인이 있었다아이러니 하게도 독일 나치당원 출신의 기업가 존 라베(John Rabe)였다존 라베는 대략 27년간 중국에서 머물렀던 독일 지멘스(Siemens AG)사의 중국지부 사장이었다당시 일본군의 학살극을 보게 된 라베는 중국에 있던 조계지의 서양인들을 모아 난징 안전지대 국제위원회를 구성했다이 위원회는 존 라베와 미국인 출신의 로버트 윌슨 박사가 주도했으며 총 19명으로 구성됐다.

(국내에 개봉했던 영화 <존 라베 난징대학살>, 나치당원으로 중국인 25만 명을 살렸던 독일인 사업가 존 라베의 난징 이야기를 담고 있다.)

 

존 라베의 노력으로 이들은 일본군과 협정을 맺어 조계에 안전 구역을 만들어 중국인 피난민들을 수용하였으며여기서 이들이 구출한 중국인은 무려 25만 명에 달했다물론 일각에서는 그가 일본군과 결탁하여 적잖은 중국인들을 희생시켰다는 주장을 피기도 한다물론 일본군은 안전 구역에 마음대로 출입하여 행패를 부려도 국제위원회는 속수무책이었고그 지역 밖에서의 일본군의 학살이 중단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치독일 깃발로 일본군의 폭격으로부터 중국인들을 구했던 존 라베, 영화에서 묘사되는 장면이다. 영화상에서 독일 건물인 것을 확인한 일본군 전투기들이 폭격을 멈춘다.)

 

그러나 위험을 무릅쓰고 중국인 25만 명을 구한 것은 유대인을 구한 나치당 인사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나 일본 외교관 신분으로 수천 명의 유대인을 나치독일 치하에서 구출했던 스기하라 지우네(Chiune Sugihara, 杉原 千畝)와 같이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수많은 사람들을 구출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만하다이후 존 라베는 1938년에 나치 독일로 돌아갔고자신이 본 이야기를 독일에서 알리려다가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그 이유는 당시 나치독일과 일본의 관계가 우호적인 관계였기 때문이었다이후 라베는 독일에서 근무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나치당원이라는 신분 때문에 재산을 빼앗게 비참하게 살다가 1950년 베를린에서 사망했다물론 중국 정부에서 라베에게 지원금을 보냈지만 당시는 제2차 국공내전으로 중국 정부도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았다존 라베의 휴머니즘적 이야기는 2009년 영화로 독일에서 제작되어 개봉했었고, 2013년과 2014년에는 국내에서도 잠시 개봉했었다.

 

난징에서 30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주인공 중 한 사람은 일본 히로히토 천황(Hirohito Emperor)의 숙부 아사카 야스히코 왕자(Prince Yasuhiko Asaka)였다아사카 왕자는 난징을 점령했을 당시 모든 포로를 죽여라라고 비밀 명령을 각 부대에 전달하였다즉 이러한 명령이 내려졌기에 일본군은 난징에서 닥치는대로 민간인을 학살했던 것이다앞에서 언급한 중국인 목 베기 대회에서 100명을 참수한 노다 쓰요시 소위와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 그리고 300명을 참수한 다나카 군키치 대위는 그 부대 사단장이던다니 히사오 중장과 함께 일본이 패망한 후 중국 정부의 요구에 따라 중국으로 송환되어 난징 대학살의 전범으로서 1948년 1월 28일에 난징에서 처형당했다물론 이 학살극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던 아사카 왕자는 맥아더 사령부의 천황의 일족은 기소하지 않는다.”는 방침에 따라 전혀 처벌받지 않았다.

(1937년 12월 일본 항공기의 오폭으로 격침된 파나이호)

 

난징 전투 당시 일본군의 항공기들은 무차별 폭격을 감행하기도 했었다당시 난징의 상공에서는 수십 대의 전투기들이 공중전을 벌였고 중국의 포함 몇 척이 일본 함대와 맞서 싸우기도 했었다그 와중에 일본 96식 중폭격기의 오폭으로 미국 국적의 석유운반선을 호위하던 미 해군의 포함 파나이호가 격침되어 2명이 사망하고 48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이들을 구조하려던 영국 경비정 레이디버드 호 역시 공격을 받아 반파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과 국제연맹 탈퇴 그리고 중일전쟁 발발로 일본과 미국의 관계는 점차 나빠지기 시작했다그런 상황에서 일본군의 오폭으로 미국 군함까지 폭침했다물론 당시 뉴딜정책을 추진하던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를 방관했다그 이유는 당시 루스벨트가 중립주의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미국과의 대립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했다그리고 이런 불가피한 대립은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본격화 됐다일본군은 1937년 난징 점령 과정에서 수많은 여성들을 강간하고 살해했다이후 일본군은 군대의 사기 진작과 성욕 해소라는 이유를 들어 수많은 여성들에게 강제로 성행위를 시켰다그것이 바로 일본군 위안부라고 불리는 일본군 성노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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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드로 윌슨)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서구의 강대국들은 파리강화회의와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자신들의 경제적 그리고 식민지적 이권을 챙겼다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은 이른바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했고이는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의 나라에서 독립운동가들에게 독립의 희망을 주었다물론 이것은 허상이었고이 허상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19년 3월 1일 식민지 조선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났던 3.1운동도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나면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얼마나 서구 제국주의 중심적인지를 깨닫게 됐다당시 북경대 사서로 근무했던 마오쩌둥은 민족자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족자결은 이제 됐다 그래정말 후안무치한 놈들이야!”

 

1900년대 초중반에 미국에 정착한 이승만은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를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얻은 인물이었다당시 그는 독립운동가의 타이틀을 달고 있었지만, 1907년 독립운동가 장인환 전명운의 거사에 대한 변호직책을 살인재판이라며 단번에 거절했던 인물이었고독립운동을 사적인 권력욕을 위해 했다는 현재 학계의 비판이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아이러니 하게도 그는 미국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의 제자이기도 했다.

(미국에 거주할 당시 이승만)

 

1차 세계대전 이후 파리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리자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1919년 1월 6일 하와이 호놀룰루를 출발하여 1월 22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인 도산 안창호를 만났다그 뒤 뉴욕을 거쳐 2월 3일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을 만났다이승만은 서재필정한경장택상 등과 회동하고 필라델피아를 떠나 수도 워싱턴 D.C로 달려가 파리행 여권을 준비했다그는 여권 취득을 위해 윌슨 대통령을 면담하고자 했지만윌슨은 자신의 제자인 이승만을 만나주지 않았다결국 이승만과 그 일행은 파리 강화회의 참석이 불가능하게 됐다.

(위임통치론의 본질적인 내용)

 

여기서 이승만이 생각한 한 가지 아이디어가 있었는데그것이 바로 위임통치론이었다이승만과 정한경은 1919년 2월 25일 작성한 <위임통치 청원서>를 우편으로 미국 대통령과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했는데그 내용은 정말 기가 막힌 것이었다.

 

저희들은 자유를 사랑하는 1500만 한국인의 이름으로 각하께서 여기에 동봉한 청원서를 평화회의에 제출하여 주시옵소연합국 열강이 장래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하에 일본의 현 통치로부터 한국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두는 조처를 취할 수 있도록 지지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청원하는 바입니다.”

(이승만에 대한 신채호의 평가)

 

국내에서 3.1운동이 한참 진행 중이던 1919년 3월 14일 이승만과 그의 측근 정한경은 미국 신문과의 회견에서 한인들이 원하는 것은 국제연맹 회의에서 한국을 관할하되민주정치를 쓰는 미국이 한국정치를 고문하여 차츰 한국의 기초를 굳건히 하고자 하는 데 있다라고 설명했었다즉 이승만이 주장한 위임통치론은 말 그대로 미국이 대신 조선을 일본 대신 통치해주자는 발언이었고이것은 이승만의 친미사대주의적인 발언이었다이승만을 연구한 이화여대 교수 정병준은 이승만의 노골적인 반일운동은 3.1운동 이전까지 한 차례도 없었다고 지적한다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외적으로 이승만은 미국 정세와 하와이 내 자신의 입지에 따라 대일관에서 유화적인 자세와 반일을 오고 갔지만한인 사회 내부에 대해서는 언제나 반일 구호를 내세웠다이승만은 자신의 종교 활동과 교육활동이 모두 독립과 반일을 위한 것이라고 한인들에게 설명했다그러나 1915년의 국민회 쿠데타와 1918년 이즈모호 사건 등은 이승만의 대내적 반일구호가 실제로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 강화를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적어도 1919년 이전까지 이승만은 단 한 차례도 노골적인 반일운동을 벌인 적이 없었다.”

(더글라스 맥아더와 이승만)

 

이승만은 이 위임통치론을 1919년 4월에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총령(자신의 표현으로는 대통령자리에 있으면서도 끝까지 주장했다이승만의 이러한 입장과 태도는 그가 근본적으로 제국주의 국가 미국을 신봉한 친미 사대주의자였다는 사실과 친미 제국주의자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독립운동 시절 그가 일본에 대해 다소 강경하지 않은 입장을 보이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반일투사의 모습을 보인 이유에는 미국의 대일정책과 관련이 있다또한 해방 이후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1948년 단독정부를 수립한 것도 어쩌면 1919년 그가 주장한 위임통치론 논리와 맥락적으로 크게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따라서 위임통치론은 그가 이후 친미 제국주의자가 되는데 근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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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 출판후원 보고와 2차 후원을 요청드립니다

 

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김남기 저 어깨걸고 전국노동자정치협회 발행출판 후원을 해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성심성의껏 추천사를 써주신 분들께도 존경의 마음을 담아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까지 총 38분이 후원하고미주양심수후원회해방세상 두 단체에서도 출판 후원을 해주셨습니다.

그 동안 1474천 원의 출판 후원금이 걷혔습니다.

현재 출판 등록을 한 상태이며막바지 편집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공식 출판은 9월 27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공식 출간 전까지 2차 후원을 요청드립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제국주의 패배에서 보듯미제국주의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습니다미제의 쇠퇴는 역사적 필연입니다그러나 인간사는 종국적으로는 격돌하는 인간들 상호 간의 투쟁 속에서 그 법칙이 실현됩니다.

미제국주의가 쇠퇴하는 국면이 다가오면 올수록 미제는 그 퇴장을 늦추기 위해 격렬하게 저항하고그럼으로써 더 추악하고 반동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곳에서도 미제의 역사적 퇴장을 앞당기기 위해 투쟁해야 할 것입니다.

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이 그 역사적 과업을 수행하는데 도구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 후원은 1만 원부터입니다.

 

◎ 1, 2차 출판 사전 후원을 해주신 전체 후원자들께는 한국사회와 변혁의 길을 출판한 책과 같이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1, 2차 후원자들 중 2만원 이상 후원자들께는 [맑스레닌주의 총서2] 맑스주의와 무정부주의를 같이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출판 사전 후원자들 중 출간된 책 여러 권이 필요하신 분들은 따로 요청해 주기 바랍니다.

 

◎ 책을 보내드릴 주소와 이름연락처와 필요한 권수를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 문의

010 2533 3083

 

◎ 후원 계좌

229301-04-187600

국민은행김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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