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진통일을 주장하고 있는 대통령 이승만. 그에게 있어 북진통일론은 정치적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정치적으로 항상 외치던 구호가 있다그 구호는 바로 북진통일론(北進統一論)’이다북진통일론은 간단히 말해서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한반도의 통일을 달성한다.”는 주장이다즉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었으니대한민국이 북한을 정복해서 통일을 이루자는 것이 이승만 북진통일론의 핵심이다북진통일론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난 이후 반공국가를 구성한 하나의 핵심적 요소였으며이는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의 제1공화국이 무너질 때까지 이승만의 독재정치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반공주의적 합리화의 수단이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해방정국 전후로 분단주의적 사고관을 소유한 인물이었다젊은 시절부터 미국에서 유학했던 그는 미국이라는 사회에 대한 하나의 맹신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1917년 레닌의 러시아 혁명으로 실현된 사회주의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감을 1920년대부터 가지고 있었다그에게 있어 공산주의자는 민족반역자였으며따라서 소련과 공산주의에 맞서기 위해서는 일본에 협력한 이들과의 협력이 필수적이라 생각했다이승만의 극단적인 반공주의관은 1945년 해방 정국에서 표출된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가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맞이하자국내에서는 미군정 개시를 전후로 여러 정치단체들이 탄생하기 시작했다당연히 가장 대중적인 조직을 확보한 세력은 여운형을 비롯한 진보세력들이었다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미군정이 설립된 이후 제약을 받게 됐다이런 과정 속에서 이승만은 미군정 사령관이 존 리드 하지와 일본 GHQ 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으며일본 도쿄를 거쳐 10월 16일에 귀국했다그는 1945년 10월 4일 미국 워싱턴을 떠나 10일 도쿄에서 4일간 체류하고 14일 일본을 떠나 16일에 하지가 직접 내준 C-47기를 타고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했다미군정의 지원을 받았던 이승만은 당연히 환국과정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이후 귀국 9일 만인 10월 25일에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구성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목적은 해방 후 우후죽순으로 확장된 정치단체들을 중핵을 바탕으로 단결시키는 것이었다이 과정에서 이승만의 인기는 상승했던 것으로 보이며한민당을 비롯한 친일파 중심의 세력들에게 지원을 받으며 세력을 형성한 것도 사실이다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박헌영의 조선 공산당이 친일파 청산 문제를 제기함에 따라 와해됐다이후 모스크바3상회의 이후 신탁통치 오보사건이 있자이승만은 임시정부의 김구와 더불어 반탁운동을 전개했고이 반탁운동에서 이승만이 결탁한 세력은 바로 친일파 민족반역자 세력과 그들의 지원을 받는 우익단체들이었다.

(군사 퍼레이드에서도 보이는 북진통일)

 

이승만의 분단론적 시각은 반탁운동을 거쳐 1946년 제1차 미소공동회의 결렬 이후 6월 3일 전라도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면서 극명해졌다정읍발언을 시작으로 이승만은 자신의 분단론적 시각을 아주 명확히 했다이 정읍 발언은 결과적으로 미군정의 반감을 가지게 됨에 따라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운동으로 이어졌지만, 1947년 3월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이 선언되면서이승만은 아시아의 반공지도자로 부각될 수 있었다좌우합작운동 실패와 여운형 암살 이후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게 되며결국은 남북한 분단정부 수립으로 이어졌고이승만은 5.10 총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을 전후로 해서 제주4.3항쟁과 여순민중항쟁이 발발했지만이는 이승만과 미군정이 벌인 잔혹한 학살극으로 종결됐다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은 분단주의적 사고관을 계승한 통일관을 제시했는데그것이 바로 북진통일론이었다.

 

북진통일론은 1949년 2월 이승만에 의해 공식적으로 제기됐다당시 이승만은 미국 육군성 장관 로얄과 주한미국대사 무초와의 대담에서 육근을 증편하고 무기와 장비로 무장시켜 짧은 시일 안에 북진을 실행하고 싶다고 언급했다또한 이승만은 “UN이 한국을 승인했기 때문에 한국이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합법적이며 기다려서만은 얻을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이승만에게 있어 북한도 같은 우리 민족이므로 평화적인 통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가치였다.

 

이승만이 북진통일을 주장하던 1949년은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특위의 활동 및 해산과 백범 김구의 암살 등으로 정치적으로 국내에 큰 사건들이 있었지만, 1950년 한국전쟁을 예고하는 불길한 징조가 나타난 해이기도 했다당시 북한에서는 “1949년 1월부터 9월까지 38선 전역에서 남한이 4만 9,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432회를 침범했고, 71회의 비행기 침습과 42회 함대 습격을 가했다.”고 발표했다반면 남한에서는 “1949년 1월 1일부터 10월 5일까지 38선 전역에서 북한이 총 7만 625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563회나 침범했다.”고 발표했다이러한 남북한 양측의 발표에서 보여주듯이남북한 모두 38선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이러한 근거는 브루스 커밍스가 주장한 내전론’ 그러니까 1950년 이전부터 한반도는 전쟁 상태였다는 주장에 합리적인 근거가 되기도 한다.

 

당시 미국은 이승만 정부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철저하게 제한했던 것으로 보인다한국군의 병력 규모를 10만 명으로 제한했고공군 창설에 반대했으며기갑 병력 지원은 거의 없었다. 1950년 6월 25일 이른바 한국전쟁이 시작되었을 때한국군이 북한 측 인민군에게 군사적으로 밀렸던 이유에는 미국의 미온적인 군사적 지원 때문이기도 하다박태균 교수에 따르면 당시 미국이 이승만 정부에 대한 군사지원이 제한된 정책이었던 이유는 이승만의 북진통일론 때문이라고 한다즉 미군의 군사적 무기 지원 없이는 이승만이 북진통일을 감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가 기본으로 깔려있는 미국 측의 계산된 행위였다. 1950년 1월 이른바 애치슨 라인에서 한국이 미국 반공 안보라인에서 제외됐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말 그대로 허구적인 정치적 수사에 불과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시작되자한국군은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겼고그것도 모자라 대통령 이승만은 거짓방송으로 국민들을 기만해놓고 몰래 도망쳤다심지어 미국의 즉각적 군사 개입에도 불구하고 한국군은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과 더불어 남한 영토 90%를 북한이 접수하도록 했다이것은 미국의 즉각적인 항공병력 투입과 지상병력 투입에도 불구하고 발생한 결과였다물론 이승만에게도 실제로 북진통일을 할 기회가 분명 있었다이것은 유엔군 총사령관이던 더글라스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 이후 한국군과 더불어 북진을 개시하면서 부터였다.

(한국전쟁 당시 남한 사회에서 발생했던 휴전회담 반대 시위, 이러한 집회는 이승만 세력이 동원한 어용집회에 가깝다.)

 

그러나 이 북진은 순망치한을 앞세운 중국이 전쟁에 참전하면서 물거품이 됐다중국 입장에서 미제국주의에 맞선 아시아 민중의 투쟁” 및 미제국주의 중국 침략 저지였던 한국전쟁은 1950년 12월을 시작으로 한국군과 유엔군이 후퇴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1951년 1월에는 수도 서울이 다시 공산측 수중에 떨어졌다. 1.4 후퇴 이후 전열을 재정비한 한국과 미국측은 다시 38도선 부근으로 중공군과 인민군을 몰아붙였고,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시작됨에 따라 북진통일은 실질적으로 더 이상 실행될 수 없었다이에 따라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말 그대로 정치적 수사가 됐다이승만은 전쟁 와중에 정치적 위기가 있을 때북진통일을 외치는 어용집회를 동원했다그러한 시도에는 진짜 북진통일을 이루고 싶어 하는 이승만 개인의 욕망도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대표적으로 휴전협정 성사 1달 전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했던 사건이 그랬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회담이 성사 된 이후에도 이승만은 북진통일론을 외쳤다놀랍게도 북진통일론은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만이 아니라 보수야당과 언론 등에 의해서도 공유되고 있었던 명실상부하고 확고한 1950년대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였다이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1950년대 한국사회 전체를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승만의 자유당 독재가 심화됨에 따라이러한 북진통일론에 상반되는 통일론이 자리잡기도 했는데진보당 후보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이 그러했다그러나 이 평화통일론은 공산주의와 진보를 벌레 수준으로 생각하던 이승만식 반공사회에선 절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가치관이었다따라서 이승만은 평화통일론을 주장한 조봉암을 사법살인했다.

(근래에도 열리는 북진통일 집회,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현재 한국 사회에도 강력하게 남아 있다.)

 

결국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던 것은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면서 부터였다. 4.19 이후 한국사회에서는 북진통일론에 저항하는 자주적 평화통일론이 다시 학생들에 의해 제시되기도 했다. “오라 남으로가자 북으로!”로 대표되는 이런 평화통일론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승만 못지않게 반공주의적 가치관을 지향했던 장면 내각에 의해 탄압받았다그러다 1961년 5.16을 맞이했고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이승만식 반공주의를 고스란히 유지했으며더 체계화된 반공주의 사회를 형성했다이것이 바로 현재 우리 사회가 이승만식 북진통일론이라는 정복주의적 통일관의 영향을 아직까지도 청산하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이다마지막으로 김삼웅이 쓴 이승만 평전의 내용을 인용하겠다.

 

“6.25 전쟁 중에 중국 마오쩌둥의 장남이 참전했다가 유엔군 폭격으로 전사하고밴 플리트 유엔군 사령관의 아들도 한국전에서 전사했다이 밖에도 중국과 유엔 참전국 고위층 자제들이 전사부상자는 더 있었으나한국 정부의 고위층 자제의 전사자는 전혀 없었다이승만과 그 세력의 북진통일론이 얼마나 반국민적이고 허구적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일면이다.”

 

출처이승만 평전(개정판) p.299~300

 

참고문헌

 

김삼웅독부 이승만 평전책보세, 2012

 

박태균한국전쟁책과함께, 2005

 

이한우이승만역사공간, 2014

 

유영옥이승만 대통령의 반공과 통일정책에서의 상징성한국보훈학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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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식 2021-11-07 09: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직 권력욕에만 눈멀었던 민족적 수치의 인물이죠. 친일 그리고 부역자들, 기회주의자들과의 반민족적 합작을 통해 출현한 괴물 권력이었어요. 한반도 분단에 앞장섰던 반민족행위자가 북진을 내건것부터가 쇼의 범주를 넘어설 수 없었던 것이겠죠. 성심의 리뷰 감사히 읽고 갑니다.

NamGiKim 2021-11-07 10:03   좋아요 0 | URL
북진통일론은 허구에 기반한 정치적 수사. 이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미국 내에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최초의 징후 중 일부는 민권운동으로부터 나왔다. 아마도 흑인들은 정부로부터 겪은 경험 때문에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정부의 주장 전부를 불신하게 됐을 것이다. 19648월 초에 린든 존슨이 통킹만 사건에 관해 국민들에게 말하면서 북베트남을 폭격한다고 발표하던 바로 그 날, 미시시피 주 필라델피아 인근에서는 흑인과 백인 활동가들이 그해 여름에 살해된 민권운동가 3명의 장례식을 치르고 있었다. 연사 한 명은 존슨이 아시아에서 무력을 사용한다고 따끔하게 지적하면서 이를 미시시피의 흑인들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비교했다.

 

1965년 중반 미시시피 주 매콤(McComb)에서는 이제 막 베트남에서 자기 학우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흑인 젊은이들이 전단을 배포했다.

 

미시시피 주에서 모든 흑인이 자유롭게 되기 전에는 이곳 흑인들 중 누구도 백인들의 자유를 위해 베트남에 가서 싸워서는 안 된다.

 

이곳 미시시피의 흑인 소년들은 징병을 감사히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어머니들은 자기 아들이 전쟁에 나가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워 주어야 한다. 미국의 백인을 부자로 만들기 위해 산토도밍고(Santo Domingo)와 베트남에서 우리의 목숨을 걸고 다른 유색인을 죽이라고 요구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가 미시시피 주를 방문 유명한 인종차별주의자인 상원의원 존 스테니스(John Stennis)진정으로 위대한 인물이라고 치켜세우자, 백인과 흑인 학생들은 베트남에서 불타 죽은 어린이들을 기억하라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행진을 벌였다.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는 1966년 초에 미국은 국제법을 위반하면서 침략정책을 추구하고 있다고 선언하면서 베트남에서 철수하라고 요구했다. 그해 여름,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의 성원 6명이 애틀란타의 병무청에 침입한 죄로 체포됐다. 그들은 유죄를 평결받고 몇 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같은 무렵,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 활동가로 이제 갓 조지아 주 하원의원에 당선된 줄리언 본드(Julian Bond)는 전쟁과 징병에 공공연하게 반대하는 발언을 했고, 주 하원은 그의 발언이 선발징병법(Selective Service Act)을 위반하는 것이며 주 하원에 대한 불신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그의 의원직을 박탈했다. 대법원은 헌법 수정조항 1조에 의거해 본드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의 의원직을 되찾아 줬다.

 

흑인 권투선수이자 헤비급 챔피언으로 미국의 위대한 운동선수 가운데 하나인 무하마드 알리는 이 전쟁이 백인의 전쟁이라면서 군 복무를 거부했다. 권투협회는 그의 챔피언 타이틀을 박탈했다. 마틴 루터 킹 2세는 1967년에 뉴욕의 리버사이드 교회(Riverside Church)에서 소리높이 외쳤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미친 짓거리를 끝내야 합니다. 지금 당장 그만둬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자녀이자 고통받는 베트남 빈민들의 형제로서 말합니다. 국토가 불모지 상태가 되고 집들이 부서지고 문화가 파괴되고 있는 저 사람들을 대신해 저는 말합니다. 국내에서는 희망이 산산조각나고 베트남에서는 죽거나 타락해야 하는 이중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미국의 빈민들을 대신해 저는 말합니다. 우리가 취해 온 행로에 대해 아연실색해버린 세계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저는 말합니다. 한 사람의 미국인으로서 저는 이 나라의 지도자들에게 말합니다. 이 전쟁의 주도권은 우리에게 있다고.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한 주도권은 분명코 우리에게 있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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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초가 되자 전쟁의 잔학성이 많은 미국인들의 양심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문제는 이 때쯤이면 미군 병사 4만 명이 사망하고 25만 명이 부상당했음에도 도무지 끝도 보이지 않는 이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베트남인 사상자는 이보다 몇 배나 많은 수였다.)

 

린든 존슨은 야만적인 전쟁을 확대시켰지만 승리하는 데는 실패했다. 존슨의 인기도는 사상 최악이었다. 존슨이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간에 그 자신과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LBJ(린든 B. 존슨의 머리말을 딴 별칭), LBJ, 오늘은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죽였나?”라는 연호가 전국 곳곳의 시위에서 울려 퍼졌다. 1968년 봄, 존슨은 자신이 대통령 선거에 재출마하지 않을 것이며 베트남 측과 파리에서 평화협상을 시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1968년 가을, 리처드 닉슨이 베트남에서 손을 떼겠다고 약속하면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닉슨은 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19722월에 이르면 15만 명도 안 되는 병력만이 남게 됐다. 그러나 폭격은 계속됐다. 닉슨의 정책은 베트남화(Vietnamization)-사이공 정부가 미국의 자금과 공군력을 이용해서 베트남 지상병력으로 전쟁을 계속 이어간다는 정책-’였다. 닉슨은 전쟁을 끝낸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가장 평판이 나쁜 측면, 즉 이국만리의 땅에서 미군 병사들이 교전을 벌이는 상황만을 종식시켰던 것이다.

 

대중에게 결코 공개하지 않은 캄보디아에 대한 오랜 폭격이 울어진 뒤인 1970년 봄, 닉슨과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이 나라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캄보디아 침공은 미국 내에서 강력한 항의를 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실패작이었으며, 하원은 닉슨이 의회의 승인 없이 전쟁을 확대하는데 미군 병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결의했다. 이듬해 미국은 미군을 참전시키지 않는 가운데 베트남의 라오스 침공을 지원했다. 이것 또한 실패작이었다. 1971년에 미국은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에 80만 톤의 폭탄을 떨어뜨렸다. 한편 오랫동안 이어온 사이공 국가수반의 마지막 계승자인 응웬반티우(Nguyen Van Thieu)가 이끄는 사이공의 군사정권은 수천 명의 반대파를 감옥에 가둬 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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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기자의 글입니다. 나무위키에 있는 송림 제철소 학살 문서가 완벽히 조작된 거짓말이었군요.)


오늘은 북한의 대표적인 인민항쟁이라고까지 추앙받는 황해제철소 폭동사건의 진실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도 과거 여러 글을 보면서 황해북도 송림시에 위치한 황해제철소에서 노동자들이 북한 당국에 항의하다 탱크에 수십 명이 깔려죽은 사건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사건은 부끄럽지만 탈북자 사회가 만들어낸 대표적 거짓말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는 사실을 다루는 기자이기 때문에 거짓말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제일 싫어합니다. 물론 북한을 100% 정확하게 안다는 것이 불가능하고 저부터도 오보가 있을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수와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지어내는 것은 하늘땅 차이죠. 이건 양심과 정직을, 결과적으로 인격을 돈에 팔아먹었느냐 아니냐의 차이이죠.

 

탈북자 사회에 이런 말이 돕니다. 처음엔 중국에서 하나님 믿었다고 하니 교회에 와서 간증을 시켰는데, 조금 있다 보니 중국에서 자다가 하나님을 영접해 계시 정도 받아야 간증 불러주고, 그런데 좀 더 지나고 보니 북한 지하교회 신자 정도 했다고 해야 간증 불러주고, 나아가 지하교회 전도사 정도 해야 간증 불러준다는 말이 있죠.

 

아직 북한 지하교회 목사는 안나온 것 같은데, 좀 있으면 나올 것 같기도 합니다. 교회 간증비 얼마를 받겠다고 그러는 것도 문제지만, 같은 탈북자가 들으면 거짓말이 뻔한데도 신자들을 위한 서비스로 사기 치는 사람 불러 시키는 교회도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게 교회만 해당됩니까.

 

그동안 탈북자들의 과장된 증언으로 한국사회에 얼마나 많은 논란 만들어냈습니까. 오늘 말씀드릴 황해제철소 폭동도 2001년 모 월간지에 기고한 탈북민의 증언이 계속 확대 해석되면서 커진 것입니다. 이제부터 일명 송림사건의 진실에 대해 말씀 드릴텐데, 주성하TV는 구독, 좋아요도 좋지만 끝까지 들어주시면 더욱 힘을 얻습니다.

 

황해제철소가 송림시에 있기 때문에 이 사건은 황해제철소 폭동사건, 송림사건 등으로 불립니다. 이 사건이 어떻게 소개됐나면 19988월 배고파서 제철소 압연철판을 간부들이 옥수수로 바꾸어 노동자들에게 배급을 주었는데, 보위사령부가 탱크를 몰고 들이닥쳐 간부들을 무리로 처형하고,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제철소 정문 앞에 모여 항의하자 탱크로 깔아 죽였다고 알려졌습니다.

 

간부들 처형하는 자리에서 김일성 간호사 하던 여성이 마이크를 쥐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하니 당장 그 자리에서 처형시켰다느니, 처형된 사람들을 평토장했는데 다음날 그 자리에 거대한 봉분들 생겨났고 그 위에 수백 개의 헌화가 놓여있었다느니 하는 그럴 듯한 자세한 상황까지 소개됩니다.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시면 위키백과에 송림제철소 학살 사건이라고도 나오니 찾아보십시오.

 

저는 아직 유튜브에서 황해제철소 사건을 다루지 않았는데, 바로 저 김일성 간호사와 헌화의 증언이 도저히 상식과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공개처형장에서 판결문 읽는 사람의 마이크를 빼앗아 판결이 부당하다고 소리를 친다는 것은 제 상식엔 북한에선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사형수를 평토장했는데 그걸 다시 몰래 봉분으로 만들어 수백 개의 헌화를 한다는 것도 더 말이 되지 않는 얘기죠. 그랬다면 본인 뿐만 아니라 온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행이 이제는 한국에 온 탈북자들도 많고 송림에서 간부를 하다 온 분들도 있고 해서 저는 당시 사건의 비교적 정확한 실체에 대해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파악한 사건 개요에 대해 이제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고난의 행군이 3년째 이어지던 1998년이 되니 북한의 기강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먹고 살기 어려워 사람들이 공장 자재 빼서 팔아먹고, 전선줄 잘라 팔아먹고, 심지어 철도 레일까지 빼서 고철로 팔았습니다.

 

사정이 이렇게 되니 김정일은 보위사령부에 임무를 줍니다. 총소리를 울려 사회 기강을 바로 잡으라고 말입니다.

 

보위사령부는 먼저 신의주와 혜산 등 중국으로 나가는 주요 밀무역 통로들부터 가서 검열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신의주에 가보니 유색금속은 물론 멀쩡한 철강재들까지 고철로 팔려나가는 겁니다. 이것이 어디서 오는지 쭉 추적해보니 북한의 양대 제철소로 꼽히는 황해제철소까지 이어졌습니다.

 

황해제철소가 있는 송림의 상황은 고난의 행군 때 말이 아니었습니다. 송림은 당시 인구가 13만 도시였는데, 완전한 공업도시라 전국적으로도 아사자가 제일 많이 나오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제철소 당위원회에선 결국 직장 자체로 먹여 살리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각 직장에서 부업을 했는데 철제일용직장 이런 데선 석유곤로나 불고기판을 만들어 팔아먹고 살았습니다. 어떤 곳에선 모터를 팔기도 하고요.

 

그런데 제철소의 핵심인 강철직장은 그냥 철을 팔아먹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사실 전기가 없어 철도 생산 못했습니다. 그래서 강철직장은 직장 바닥에 깔린 밑바닥인 소위 깔판을 떼서 팔았습니다. 제철소 바닥은 시멘트로 할 수가 없어 철을 타일처럼 만들어 깔았는데 그걸 떼서 판 것입니다.

 

신의주에 나갔던 보위사령부에서 중좌 한 명이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송림사건 일어나기 몇 달 전에 건너왔습니다. 신분을 속이고 철을 구입하는 거간꾼으로 가장했습니다.

 

당시 황해제철소에서 팔아먹는 것들은 송림시장 앞에 있는 과거 공기총 쏘는 사격장이 있던 자리에 있는, 일명 해빛회사로 불리는 거간시장에서 거래가 이뤄졌습니다. 해빛회사는 공식 명칭이 아니고 거간꾼들이 낮에 모인다고 현지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입니다.

 

이 보위사 중좌가 이곳에서 활동하면서 자료를 모았습니다. 깔판 사겠다고 하니 걸려든 사람이 성길이라는 이름의 제철소 선전대 대장이었습니다. 이 사람 집에 도청기를 설치해 연관자들까지 다 색출했습니다.

 

그리고 공포감을 주기 위해 19988월 초 새벽 3시 인근 105탱크사단 소속 전차 20여대가 사리원에 진입했습니다. 탱크는 몇 대뿐이고 주로 장갑차들이었습니다. 그 다음 미리 조사해 찍어둔 사람들을 체포해 이중 11명을 처형했습니다.

 

처형자 중 가장 직책이 높은 사람은 송림시 안전부 부부장이었고, 이외 강철직장 보위지도원, 제철소 당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 선전대 대장 성길 등이 처형됐습니다.

 

또 도 씨 성을 가진 송림에서 유명한 해결사도 처형됐는데, 그는 친척형제 중 11명이나 개성시 당위원회, 안전부에 있는 나름 북한의 핵심 계층입니다. 송림에서 그는 돈 받아주는 일을 했는데 현지 사람들 속에서 임꺽정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의리는 있었던 가 봅니다. 그 역시 철을 팔아먹고 밀가루를 사오는데 많이 개입했는데 그 때문에 죽었습니다.

 

이들에게 들씌워진 죄명은 반당반혁명종파분자, 간첩 등이었습니다. 처형은 송림시에서 제일 큰 철산광장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진행했고, 사형수들은 철산광장에서 바라 볼 때 꽃핀동에서 사포동으로 넘어가는 길 위에 쭉 세워두고 처형했습니다.

 

김일성의 간호사가 마이크 빼앗고 이런 일도 없었고, 다음날 노동자들이 공장 출구에 수천 명이 모여 시위한 사실도 전혀 없습니다. 물론 그 끔찍한 장면을 보고 불평들은 했지만, 그런 공포 분위기에서 누가 감히 탱크에 대듭니까.

 

송림에 왔던 전차 부대는 10여일 더 있다가 철수했습니다. 사회를 정화시킨다며 송림에 장갑차를 몰고 가 11명을 처형한 것이 송림 사건의 진짜 진실입니다. 제철소 노동자 폭동이었고, 탱크로 수 십 명을 깔아 죽였다는 것은 제가 취재한 결과 허구였습니다.

 

송림에 탱크부대가 들어갔다는 소문은 북한에 빠르게 퍼졌습니다. 저도 당시 들었습니다. 여론이 안 좋게 돌아가자 김정일이 이후 총성이 너무 큽니다고 했다고 합니다.

 

여담이지만, 이후 송림에서 이런 소문이 퍼졌습니다. “원래 사형수는 12명인데 1명이 눈치를 채고 도망갔다. 나중에 잡혔지만 김정일이 총소리 그만 내라고 해서 이 사람은 총살되진 않았다. 결국 먼저 도망치고 볼 판이다라고 말입니다.

 

송림제철소 사건의 진실을 전하는 것은 탈북자 사회의 치부와 연관되기에 약간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저는 진실을 다루는 기자로써 가짜 정보가 유통되는 것은 보고 있을 수만 없어 오늘 주제로 다뤘습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https://nklogin.com/post/Postmng?ptype=v&contentkey=BFC1630572790&fbclid=IwAR0CbhUqbkw6eMdc0h-5LJinP5LUEZL3i8-1bj4H9c8TAGiMuS7jiFF2uV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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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베트남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인접국가로 미 중앙정보국이 심어놓은 우익 정부가 반란에 직면해 있던 라오스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역 가운데 한 곳인 단지평원이 폭격으로 파괴되고 있었다. 정부나 언론은 이런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지만, 라오스에 살고 있던 미국인인 프레드 브랜프먼(Fred Branfman)은 저서 단지평원의 목소리(Voices from the Plain of Jars)에서 이에 관해 이야기했다.

 

“19655월부터 19699월까지 단지평원에 대한 25,000회가 넘는 출격이 이루어져 75,000톤 이상의 폭탄이 투하됐다. 지상에서는 수천 명이 사망하고 부상당했으며 수만 명이 지하로 내몰렸고 결국 지상의 사회 전체가 철저하게 무너졌다.”

 

농촌 마을에서 라오스인 가족과 함께 살면서 라오스 말을 할 줄 알았던 브랜프먼은 폭격을 피해 수도 비엔티안(Vientiane)으로 몰려들어온 피난민 수백 명을 인터뷰했다. 브랜프먼은 그들의 말을 기록하고 그들이 직접 그린 그림을 보존해 뒀다. 시엥쿠앙(Xieng Khouang. 단지평원이 자리한 주) 출신인 26세의 간호사는 고향에서의 생활에 관해 말해줬다.

 

나는 우리 마을의 흙과 공기, 고지의 평야, 논과 못자리와 하나가 되어 살았지요. 달 밝은 밤이나 낮이나 나와 마을 친구들은 새들이 지저귀는 숲과 들판을 돌아다니면서 노래를 부르곤 했어요. 추수 때나 모내기철에는 땡볕이든 빗속이든 가리지 않고 함께 땀 흘려 일하면서 가난하고 비참한 환경에 맞서 싸우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농부의 삶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1964년과 1965년에 우리 마을 근처에서 터지는 폭탄으로 지축이 흔들리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늘을 선회하는 비행기 소리도 들리기 시작했어요. 그 중 한 대가 기수를 아래로 돌려 땅을 향해 곤두박질을 치면서 가슴을 찢는 듯한 굉음을 지르고 나면, 사방이 빛과 연기로 뒤덮여 도무지 분간을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웃 마을 사람들과 어제 있었던 폭격에 관한 소식을 주고받곤 했어요. 집이 몇 채나 부서졌는지, 다친 사람과 죽은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구덩이! 구덩이였어요! 그 때 우리가 목숨을 부지하는 데 가장 필요했던 건 구덩이였어요. 우리 젊은 사람들은 생계를 잇기 위해 논과 숲에서 곡식을 키우는 데 쏟아야할 땀과 힘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구덩이를 파는 데 다 써버렸습니다.”

 

한 젊은 여성은 자신을 비롯한 수많은 친구들이 왜 라오스의 혁명운동, 즉 라오스애국전선에 이끌리게 됐는지를 설명해 줬다.

 

어린 소녀였을 때 저는 과거의 역사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남자들이 약자인 여성을 학대하고 놀렸기 때문이죠. 그런데 라오스 애국전선이 지역을 통치하기 시작한 뒤부터 아주 달라졌어요. 라오스애국전선 아래서는 심리적인 변화가 있었는데, 그들은 여자도 남자만큼 용감하다고 가르쳤지요. 예를 들어볼게요. 전에도 학교에 다니긴 했는데, 오빠들은 다니지 말라고 했었어요. 졸업을 해도 고위직 관리가 된다는 건 꿈도 못 꾸니까, 그런 꿈은 엘리트 집안이나 부자 집안 아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거니까 학교를 다녀도 소용이 없을 거라는 말이었지요.

 

그런대 라오스애국전선은 여자들도 남자와 똑같은 교육을 받아야 된다고 말하면서 우리한테도 동등한 권리를 줬고, 누구도 우리를 놀림감으로 삼지 못하게 했지요.

 

그리고 낡은 관념도 새루은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가령 새로 교사와 의사로 양성된 사람들은 대부분 여성이었어요. 또 그들은 극빈층의 생활을 바꾸어 놓았지요. 많은 논을 가진 사람들의 땅을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줬거든요,”

 

17세의 소년은 혁명군대인 라오스의 땅(Pathet Lao(파테트 라오), 라오스애국전선의 군사조직) 병사들이 자기 마을에 온 일에 관해 말해 줬다.

 

몇몇 사람들은 두려워했는데, 대부분 돈 있는 사람들이 그랬죠. 이런 사람들이 라오스의 땅 병사들에게 먹으라고 소를 내줬는데, 병사들은 받지 않았어요. 받는 경우에는 적당한 값을 치렀죠. 실로 이 병사들은 사람들에게 아무 두려움도 주지 않았어요. 그리고 촌장과 군수 선거를 열어서 주민들이 직접 대표를 뽑게 했습니다.”

 

중앙정보국은 자포자기식으로 흐몽 족(Hmong, 라오스 고산지대에 사는 소수민족)을 군사작전에 편입시켜 흐몽 족 수천 명이 목숨을 잃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라오스에서 벌어진 일들 대부분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역시 비밀과 거짓말로 점철된 작전이었다. 19739, 라오스 주재 정부 관리를 지낸 바 있는 제롬 둘리틀(Jerome Doolittle)뉴욕타임스에 이런 글을 기고했다.

 

캄보디아 폭격에 관해 국방부가 최근에 한 거짓말을 들으면서 나는 라오스 비엔티안 주재 미국대사관의 공보담당관으로 있을 때 종종 생기곤 했던 의문을 다시 떠올렸다.

 

우리는 왜 거짓말을 했던가?

 

처음 라오스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 작은 나라에 우리가 대규모적이고 무자비한 폭격을 하는데 대한 모든 언론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도록 지시를 받았다. “미국은 라오스 왕국 정부의 요청으로 비무장 정찰 비행을 수행하고 있으며, 공격을 받을 경우 응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무장 호위 비행대가 정찰기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짓말이었다. 내 말을 들은 기자들도 모두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노이 역시 내 말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다. 국제통제위원회 역시 알고 있었다. 관심 있는 모든 하원의원과 신문 독자들도 알고 있었다.

 

결국 이런 거짓말은 어떤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숨기는 데 일익을 담당했으며, 그 어떤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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