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진통일을 주장하고 있는 대통령 이승만. 그에게 있어 북진통일론은 정치적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정치적으로 항상 외치던 구호가 있다그 구호는 바로 북진통일론(北進統一論)’이다북진통일론은 간단히 말해서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한반도의 통일을 달성한다.”는 주장이다즉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었으니대한민국이 북한을 정복해서 통일을 이루자는 것이 이승만 북진통일론의 핵심이다북진통일론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난 이후 반공국가를 구성한 하나의 핵심적 요소였으며이는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의 제1공화국이 무너질 때까지 이승만의 독재정치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반공주의적 합리화의 수단이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해방정국 전후로 분단주의적 사고관을 소유한 인물이었다젊은 시절부터 미국에서 유학했던 그는 미국이라는 사회에 대한 하나의 맹신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1917년 레닌의 러시아 혁명으로 실현된 사회주의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감을 1920년대부터 가지고 있었다그에게 있어 공산주의자는 민족반역자였으며따라서 소련과 공산주의에 맞서기 위해서는 일본에 협력한 이들과의 협력이 필수적이라 생각했다이승만의 극단적인 반공주의관은 1945년 해방 정국에서 표출된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가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맞이하자국내에서는 미군정 개시를 전후로 여러 정치단체들이 탄생하기 시작했다당연히 가장 대중적인 조직을 확보한 세력은 여운형을 비롯한 진보세력들이었다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미군정이 설립된 이후 제약을 받게 됐다이런 과정 속에서 이승만은 미군정 사령관이 존 리드 하지와 일본 GHQ 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으며일본 도쿄를 거쳐 10월 16일에 귀국했다그는 1945년 10월 4일 미국 워싱턴을 떠나 10일 도쿄에서 4일간 체류하고 14일 일본을 떠나 16일에 하지가 직접 내준 C-47기를 타고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했다미군정의 지원을 받았던 이승만은 당연히 환국과정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이후 귀국 9일 만인 10월 25일에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구성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목적은 해방 후 우후죽순으로 확장된 정치단체들을 중핵을 바탕으로 단결시키는 것이었다이 과정에서 이승만의 인기는 상승했던 것으로 보이며한민당을 비롯한 친일파 중심의 세력들에게 지원을 받으며 세력을 형성한 것도 사실이다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박헌영의 조선 공산당이 친일파 청산 문제를 제기함에 따라 와해됐다이후 모스크바3상회의 이후 신탁통치 오보사건이 있자이승만은 임시정부의 김구와 더불어 반탁운동을 전개했고이 반탁운동에서 이승만이 결탁한 세력은 바로 친일파 민족반역자 세력과 그들의 지원을 받는 우익단체들이었다.

(군사 퍼레이드에서도 보이는 북진통일)

 

이승만의 분단론적 시각은 반탁운동을 거쳐 1946년 제1차 미소공동회의 결렬 이후 6월 3일 전라도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면서 극명해졌다정읍발언을 시작으로 이승만은 자신의 분단론적 시각을 아주 명확히 했다이 정읍 발언은 결과적으로 미군정의 반감을 가지게 됨에 따라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운동으로 이어졌지만, 1947년 3월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이 선언되면서이승만은 아시아의 반공지도자로 부각될 수 있었다좌우합작운동 실패와 여운형 암살 이후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게 되며결국은 남북한 분단정부 수립으로 이어졌고이승만은 5.10 총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을 전후로 해서 제주4.3항쟁과 여순민중항쟁이 발발했지만이는 이승만과 미군정이 벌인 잔혹한 학살극으로 종결됐다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은 분단주의적 사고관을 계승한 통일관을 제시했는데그것이 바로 북진통일론이었다.

 

북진통일론은 1949년 2월 이승만에 의해 공식적으로 제기됐다당시 이승만은 미국 육군성 장관 로얄과 주한미국대사 무초와의 대담에서 육근을 증편하고 무기와 장비로 무장시켜 짧은 시일 안에 북진을 실행하고 싶다고 언급했다또한 이승만은 “UN이 한국을 승인했기 때문에 한국이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합법적이며 기다려서만은 얻을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이승만에게 있어 북한도 같은 우리 민족이므로 평화적인 통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가치였다.

 

이승만이 북진통일을 주장하던 1949년은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특위의 활동 및 해산과 백범 김구의 암살 등으로 정치적으로 국내에 큰 사건들이 있었지만, 1950년 한국전쟁을 예고하는 불길한 징조가 나타난 해이기도 했다당시 북한에서는 “1949년 1월부터 9월까지 38선 전역에서 남한이 4만 9,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432회를 침범했고, 71회의 비행기 침습과 42회 함대 습격을 가했다.”고 발표했다반면 남한에서는 “1949년 1월 1일부터 10월 5일까지 38선 전역에서 북한이 총 7만 625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563회나 침범했다.”고 발표했다이러한 남북한 양측의 발표에서 보여주듯이남북한 모두 38선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이러한 근거는 브루스 커밍스가 주장한 내전론’ 그러니까 1950년 이전부터 한반도는 전쟁 상태였다는 주장에 합리적인 근거가 되기도 한다.

 

당시 미국은 이승만 정부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철저하게 제한했던 것으로 보인다한국군의 병력 규모를 10만 명으로 제한했고공군 창설에 반대했으며기갑 병력 지원은 거의 없었다. 1950년 6월 25일 이른바 한국전쟁이 시작되었을 때한국군이 북한 측 인민군에게 군사적으로 밀렸던 이유에는 미국의 미온적인 군사적 지원 때문이기도 하다박태균 교수에 따르면 당시 미국이 이승만 정부에 대한 군사지원이 제한된 정책이었던 이유는 이승만의 북진통일론 때문이라고 한다즉 미군의 군사적 무기 지원 없이는 이승만이 북진통일을 감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가 기본으로 깔려있는 미국 측의 계산된 행위였다. 1950년 1월 이른바 애치슨 라인에서 한국이 미국 반공 안보라인에서 제외됐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말 그대로 허구적인 정치적 수사에 불과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시작되자한국군은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겼고그것도 모자라 대통령 이승만은 거짓방송으로 국민들을 기만해놓고 몰래 도망쳤다심지어 미국의 즉각적 군사 개입에도 불구하고 한국군은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과 더불어 남한 영토 90%를 북한이 접수하도록 했다이것은 미국의 즉각적인 항공병력 투입과 지상병력 투입에도 불구하고 발생한 결과였다물론 이승만에게도 실제로 북진통일을 할 기회가 분명 있었다이것은 유엔군 총사령관이던 더글라스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 이후 한국군과 더불어 북진을 개시하면서 부터였다.

(한국전쟁 당시 남한 사회에서 발생했던 휴전회담 반대 시위, 이러한 집회는 이승만 세력이 동원한 어용집회에 가깝다.)

 

그러나 이 북진은 순망치한을 앞세운 중국이 전쟁에 참전하면서 물거품이 됐다중국 입장에서 미제국주의에 맞선 아시아 민중의 투쟁” 및 미제국주의 중국 침략 저지였던 한국전쟁은 1950년 12월을 시작으로 한국군과 유엔군이 후퇴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1951년 1월에는 수도 서울이 다시 공산측 수중에 떨어졌다. 1.4 후퇴 이후 전열을 재정비한 한국과 미국측은 다시 38도선 부근으로 중공군과 인민군을 몰아붙였고,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시작됨에 따라 북진통일은 실질적으로 더 이상 실행될 수 없었다이에 따라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말 그대로 정치적 수사가 됐다이승만은 전쟁 와중에 정치적 위기가 있을 때북진통일을 외치는 어용집회를 동원했다그러한 시도에는 진짜 북진통일을 이루고 싶어 하는 이승만 개인의 욕망도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대표적으로 휴전협정 성사 1달 전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했던 사건이 그랬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회담이 성사 된 이후에도 이승만은 북진통일론을 외쳤다놀랍게도 북진통일론은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만이 아니라 보수야당과 언론 등에 의해서도 공유되고 있었던 명실상부하고 확고한 1950년대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였다이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1950년대 한국사회 전체를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승만의 자유당 독재가 심화됨에 따라이러한 북진통일론에 상반되는 통일론이 자리잡기도 했는데진보당 후보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이 그러했다그러나 이 평화통일론은 공산주의와 진보를 벌레 수준으로 생각하던 이승만식 반공사회에선 절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가치관이었다따라서 이승만은 평화통일론을 주장한 조봉암을 사법살인했다.

(근래에도 열리는 북진통일 집회,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현재 한국 사회에도 강력하게 남아 있다.)

 

결국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던 것은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면서 부터였다. 4.19 이후 한국사회에서는 북진통일론에 저항하는 자주적 평화통일론이 다시 학생들에 의해 제시되기도 했다. “오라 남으로가자 북으로!”로 대표되는 이런 평화통일론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승만 못지않게 반공주의적 가치관을 지향했던 장면 내각에 의해 탄압받았다그러다 1961년 5.16을 맞이했고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이승만식 반공주의를 고스란히 유지했으며더 체계화된 반공주의 사회를 형성했다이것이 바로 현재 우리 사회가 이승만식 북진통일론이라는 정복주의적 통일관의 영향을 아직까지도 청산하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이다마지막으로 김삼웅이 쓴 이승만 평전의 내용을 인용하겠다.

 

“6.25 전쟁 중에 중국 마오쩌둥의 장남이 참전했다가 유엔군 폭격으로 전사하고밴 플리트 유엔군 사령관의 아들도 한국전에서 전사했다이 밖에도 중국과 유엔 참전국 고위층 자제들이 전사부상자는 더 있었으나한국 정부의 고위층 자제의 전사자는 전혀 없었다이승만과 그 세력의 북진통일론이 얼마나 반국민적이고 허구적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일면이다.”

 

출처이승만 평전(개정판) p.299~300

 

참고문헌

 

김삼웅독부 이승만 평전책보세, 2012

 

박태균한국전쟁책과함께, 2005

 

이한우이승만역사공간, 2014

 

유영옥이승만 대통령의 반공과 통일정책에서의 상징성한국보훈학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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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2021-11-07 09: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직 권력욕에만 눈멀었던 민족적 수치의 인물이죠. 친일 그리고 부역자들, 기회주의자들과의 반민족적 합작을 통해 출현한 괴물 권력이었어요. 한반도 분단에 앞장섰던 반민족행위자가 북진을 내건것부터가 쇼의 범주를 넘어설 수 없었던 것이겠죠. 성심의 리뷰 감사히 읽고 갑니다.

NamGiKim 2021-11-07 10:03   좋아요 0 | URL
북진통일론은 허구에 기반한 정치적 수사. 이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