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nger Close: The Battle of Long Tan, Now a Major Motion Picture (Paperback)
Bob Grandin / Allen & Unwin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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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침 보고싶었던 영화 한편을 감상했다. 그 영화는 베트남 전쟁 당시 호주군을 주연으로 한 영화로 전투에서 승리한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그 영화가 바로 <댄저 클로즈: 롱탄 대전투>다.

사실 영화에서 등장하는 호주와 뉴질랜드는 베트남 전쟁 당시 전투 병력을 파병했던 국가 중 하나다. 호주 또한 미국이 만들어낸 도미노 이론을 철썩같이 믿었고, 그런 반공적 믿음은 베트남 전쟁 파병으로 이어졌다. 호주는 미국과 한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했다. 그들은 주로 남베트남의 남부에서 작전을 전개했었고, 영화에서 나오는 롱탄 대전투 또한 수도 사이공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영화에 대해 얘기하자면, 영화를 제작한 측에서 전투 재현 및 고증에 충실하고자한 모습이 많이 보였다. 등장하는 인물들 거의다 실존인물이고, 항공기, 대포, 네이팜 폭탄, APC 장갑차등 등장시킬 수 있는 장비는 최대한 등장시켰다. 비록 12세 이상 관람이다 보니 잔혹한 장면은 없었지만, 위워 솔져스 그 이상으로 전투씬이 훌륭했다.

무엇보다 영화상에 있는 호주군들은 혼자서 몰려오는 적들을 죽이는 느낌이 아니라 병사 하나 하나가 서로 협력하며 공격을 차례 차례 방어하며 버티는 느낌이었다. 예를들면 탄약 확인해가며 조준사격으로 한발씩 쏜다든지, 베트콩들이 무조건 적으로만 죽지는 않는다는지 하는 것이 바로 그러했다. 이런점은 역사 고증은 무시하고 전투에 대한 과장 및 왜곡으로 얼룩진 봉오동이나 장사리하고는 질적으로 다른것이 느껴졌다.(물론 딱 한번 베트콩이 독일제 Stg 44를 사용하는게 포착되었지만, 대다수가 AK-47을 사용했으니 그냥 넘어갔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적 고증은 좋았지만 이 영화는 매우 치명적인 결점 및 비판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호주군의 베트남 전쟁 참전을 미화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배경이된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침략으로 일어난 제국주의적 전쟁 범죄였다. 그리고 침략국은 패배했다. 그런 패배한 전쟁과 명분조차 없던 전쟁을 단순히 애국주의로 포장하는 것은 영화 제작자들의 의도가 참으로 좋지 않았다 할 수 있다. 영화상에서 호주군 병사들이 베트콩으로 부터 포격을 받고 난 뒤 이런 대사를 한다.

호주군1: 적은 또 언제 공격해올까요?

호주군2: 어제 그 공격은 우리 간을 보기 위한 테스트였어! 즉 우리 기지를 점령하기 위해 그랬던 것지.

호주군2: 너 디엔비엔푸 전투 들어봤어?

호주군1: 아뇨 들어본적 없어요.

호주군2: 알지 않는게 좋을거야!

디엔비엔푸 전투에 대해 알지 않는 것이 좋다고 얘기하는 장면에서 이 영화가 베트남 전쟁의 본질적 문제는 아예 숨기려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그만큼 이 영화는 반공적 시각에서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영화상에서 병사들은 ˝역사가 우리를 기억하겠지?˝ 따위의 소리를 한다.

1966년 호주군과 뉴질랜드군이 싸웠던 이 전투에서 호주군 18명이 전사했고, 베트콩은 200명 이상이 전사했다. 그 이유는 호주군이 전투기 대포 APC 장갑차등 동원할 수 있는 화력은 최대한 퍼부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서 호주군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아니고, 남베트남 민중의 민심을 얻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 영화를 볼 때 생각해야할 부분은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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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광화문에서 열리는 이란 전쟁 반대 집회에 참가했다. 2020년 새해가 무섭게 중동 분쟁은 긴장감이 최고도까지 상승했는데, 이는 트럼프가 이란의 군사령관을 살해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이란과 미국사이의 긴장 및 중동지역의 긴장감은 급격히 상승했다.

과거에도 미국은 그러한 정치공작을 일삼았었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콘트라 반군을 지원했었고, 리비아의 국가 지도자 카다피를 암살하기 위해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으며, 베네수엘라에서 반동 쿠데타를 획책했었다. 그것도 모자라 미국의 트럼프 정권은 압도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이란을 위협하며 중동의 평화를 깨뜨렸다. 자칫하면 미국과 이란간의 전면전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단계까지 오게됐다.

현재 미국과 이란간의 긴장관계가 높기에, 자칫하면 중동에 피바람이 불지도 모른다. 거기다 한국또한 호르무즈 해협에 파병을 논의하고 있다.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현재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것에 맞서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및 반동행위를 규탄하고, 한국의 호르무즈 해협 파병을 반대하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기에 난 오늘 열린 이란과의 전쟁 반대 집회에 참가했다.

지난번 이석기 동지 석방 요구 집회때도 느꼈던 일이지만, 이번에도 우리의 전쟁 반대 집회를 방해하는 세력들은 압도적인 규모로 우리를 포위하여 온갖 추잡한 욕설들을 내뱉었다.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오로지 친미만 내세우는 그들은 지난 2003년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교훈을 전혀 배우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리석다고 욕할 수 밖에 없다.

미제국주의의 깡패짓으로 현재 중동이 위태롭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미제국주의의 이란 때리기 행위와 한국의 호르무즈 해협 파병에 반대해야 한다. No War With I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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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815일 일본 제국주의가 연합국에게 항복을 선언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었다.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국민당과 공산당은 제2차 국공합작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차례의 격렬한 경쟁이 전개되었는데, 양측 모두 먼저 일본군의 점령지역에 들어가 일본군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적이 가지고 있던 대량의 무기와 군사 장비를 접수하려 했기 때문이다. 중일전쟁 당시 해방구를 넓혀나갔던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전쟁이 끝났을 무렵 대략 100만 명의 정규군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1930년대 대장정 당시 병력이 2만 명 안팎이었던 공산당을 고려했을 때, 세력을 많이 확장한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중국으로 와서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며 공산당과 회담하는 정책을 펼쳤었다. 194511월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 군인인 조지 C. 마셜 장군(George C. Marshall)을 중국 주재 대통령 특사를 임명하여 장제스에게 공산당과의 화해 및 중재하도록 했다. 조지 마셜 장군은 194512월 중순 양당 대표 모두가 중재를 받아들이게 했는데, 이 세 가지 목표에는 내전 중지, 정치협상회의 개최 및 연합정부 수립 논의 그리고 국공 양당의 군대를 하나의 국가 군대로 편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양측 모두 서로를 불신했다. 장제스의 국민당은 1946년 초에 중국 공산당보다 5배나 많은 군사를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런 규모의 차이는 국민당으로 하여금 공산당군을 궤멸시킬 수 있을 것이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서로가 추구하는 정치적 방향이 너무나도 달랐다. 이러한 갈등 및 차이는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19464월 만주에서 소련군이 철군한 이후 중국 공산당이 만주지역을 접수하자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갈등이 깊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67월부터 국민당 정부가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중구 공산당의 거점지역을 대상으로 대규모의 군사적 공격을 감행하면서, 2차 국공내전이 일어났다.

 

1946년 중엽 중국 국민당군의 총병력은 대략 430만이었던 데에 비해 공산당군은 120만 안팎이었다. 수적으로 공산당보다 3.5배가 많았던 국민당군은 19467월부터 12월까지, 공산당이 수중하의 165개의 도시와 174000제곱킬로미터의 영토를 빼앗았다. 19473월에는 중국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의 중심지인 연안까지 점령했다. 하지만 인민대중의 민심을 잘 사로잡았던 중국 공산당은 19476월에 이르러 병력이 대략 195만 명까지 증가했고, 그 해 하반기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하여 허난과 허베이에서 국민당군에 맞서 승리를 거두었다.

 

국민당군이 점차 불리해진 데에는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민심을 얻지못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미국의 물자지원을 받고, 수적으로도 공산당보다 많았던 국민당군은 점령한 지역에서 민심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점령지역에서의 국민당군은 민중을 대사으로 약탈을 일삼았고, 관료들은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체우기 위해 부패를 일삼았다. 그에 반해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군은 민중 사이에서 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들을 설득하고, 존중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다. 따라서 국공내전에서 민중은 국민당이 아닌 공산당을 지지했던 것이었다.

  

1948년에 들어오면서 군사적인 정세는 확실히 내전의 초기단계와 비교했을 때 공산당측에게 유리하게 역전되었다. 비록 그때까지도 국민당군이 수적으로는 우세를 유지했지만, 19466월 기준으로 국민당의 총병력이 360만이었던 데에 반해, 공산당의 총병력이 280만 명이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공산당이 민중들의 지지를 받으며 성장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내전 시기 국민당군의 큰 손실은 만주에서 발생했다. 1947년 크리스마스 이후 3개월 동안 린뱌오의 중국 공산당 부대는 국민당의 정예부대에게 15만 명의 손실을 입혔다. 1948년 중반에 중국 공산당군은 국민당군을 겹겹이 포위했고, 10만 명의 국민당군을 섬멸한 이후 19481014일에 진저우를 점령하고, 18일에는 창춘을 빼앗았으며, 112일에는 선양을 점령했다. 만주에서 치러진 전투에서 장제스에게 47만 이상의 최정예부대에게 손실을 입게했고, 국민당군의 사기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만주에서 린뱌오가 이끄는 부대가 국민당군을 섬멸하는 것과 동시에 천이가 이끄는 또다른 중국 공산당군은 공세를 전개했다. 천이가 이끄는 공산당군은 1948926일 지냔 대전이 있은 후 산둥을 점령했다. 이에 장제스는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탱크와 주포, 장갑차를 갖춘 40만 명의 기계화 부대를 배치하여 난징으로 통하는 관문을 보위했지만, 194810월 회해 전투가 막 시작되었을 무렵 국민당군 2개 사단 전체가 반기를 들었고, 탱크와 장갑차는 폭우와 눈바람으로 무용지물이 되었으며, 1111일부터 22일까지 10만 명의 국민당군이 섬멸되었다. 그 결과 19481215일 쉬저우까지 함락되었다. 또한 1948117일 유백승과 덩샤오핑이 지휘하는 군대는 소위 화해전역을 개시하여 약 10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 그리고 쉬저우를 점령했다. 19481224일 중국 공산당의 군대는 장가구를 점령했고, 다음해 14일에는 천진을 131일에는 베이징을 각각 점령했다.

 

19489월부터 19491월까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대략 150만 명이나 되는 인력을 상실했다. 19491월 장제스는 국민당 정부 총톡직을 사임하고, 총통대리로 선임된 이종인은 화평교섭을 제안했다. 194941일부터 시작되었지만, 중국공산당은 국민당의 실질적인 항복을 요구하는 국공화평협정 8개조를 제시함으로써 화평교섭의 조속한 결렬을 유도했다. 당연히 국민당은 이를 거부했고, 이를 거부한 1949420일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역사적인 양자강 도하작전을 감행하여 국민당정부의 심장인 난징과 상하이로 진격했다. 1949424일 난징이 함락되고, 527일에는 상하이가 점령되었다.

 

이렇게 국공내전에서 승기를 잡은 마오쩌둥은 1949101일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고, 현재의 중국이 건국되었다. 19495월 이후에도 중국 공산당군은 남하를 계속하여 그해 12월에는 대만을 제외한 중국 전 지역을 해방했다. 장제스는 121050만의 국민당군을 이끌고 대만으로 도피하였고, 이로써 중국 혁명은 공산당의 승리로 끝이 났다.

 

참고문헌

 

중국혁명사, 서진영 저, 한울 아카데미, 1992

근현대중국사-, 이매뉴얼 C. Y. 쉬 저, 조윤수 서정희 역, 까치,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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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경제성장 찬양하는 것들은 분명히 자본가 마인드가 맞다. 박정희식 경제성장은 단순히 재벌과 부자들을 위한 성장이었다. 민중의 복지는 개좆만큼 생각한게 박정희였다. 1930년대 FDR의 뉴딜보다도 못했다. 아무리봐도 무슨 박정희가 경제 살렸네 이 소리 하는것들은 생각하는 수준이 개돼지 수준이다.

단순히 경제성장 도표만 보고, 재벌이 진출한 것만 보며 그것이 최고의 경제 성장인냥 찬양하는 종자들은 복지는 왜 필요한지, 교육, 주거, 의료, 공공시설 등이 국가가 제공해야하는 것이 인권이라는 사실은 전혀 생각치 못한다. 아니 부자들이 성장하면 우리도 덩달아 잘 살것이라는 심각한 착각 밑 뇌망상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근데 이것보다도 더 자본가 같은 생각을 가졌던 인물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이승만이었다. 그 이승만이라는 작자는 미국에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해!˝라고 해도, ㄴㄴ 그거는 사회주의에서나 하는거임 하며 안하던 인물이다. 정리하자면 이승만이나 박정희가 경제 살렸네 우리를 잘살게 만들었네와 같은 소리는 우리가 받아야 했던 권리를 알지도 못한채 파블로프의 개마냥 읊어대는 미친소리다.

또한 최근 보면 주 52시간도 부족하다 지껄이는 저 자유한국당 쓰레기들만 보더라도 한국인들 복지 의식 수준이 아직도 저급한 수준을 받어나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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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香 2020-01-13 2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정희 신화에 대해서도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박정희가 본격적인 경제성장은 1970년대인데, 1970년대에 지속적으로 고속성장을 한 나라는 단 네나라입니다. 일본, 한국, 대만, 이스라엘.
1960년대 남미로 몰리던 자본이, 남미의 사회주의화로 1970년대 위 네나라로 몰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경제성장은 냉전 경쟁체제의 산물로 보는게 더 합리적일 듯 합니다.

NamGiKim 2020-01-16 22:19   좋아요 1 | URL
한국은 지정학적 특수성이 있었다 봅니다. 한국 위에 북한과 중국 소련이 있으니 미국은 태평양 라인에서 반공국가를 만들어야 했고, 이는 상대적으로 한국에 대한 많은 지원으로 이어졌죠. 그리고 사실 한국의 복지는 민주화 투쟁과 노동운동의 성과죠.
 

1950년대 풍요와 흑인인권운동

(워싱턴 링컨 기념탑에서 연설한 마틴 루터 킹)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은 1940년대에서 1950년대 사이 대대적인 경제 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1945년에서 1960년 사이 미국의 국내총생산(GNP)는 2000억 달러에서 5000억 달러나 증가했고, 경제 대공황 시기 평균 25%였던 실업률은 1950년대에는 5%까지 하락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경제 대공황을 극복한 미국은 1950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그로 인한 경제 성장까지 이룩할 수 있었다. 이러한 미국의 경제 성장은 인구 증가에도 영향을 주었고, 1920년대의 번영보다도 훨씬 더 풍요로운 생활을 제공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이 있던 무렵 미국에서는 새 생명이 많이 태어나기 시작했다. 1950년에만 350만에 달하는 아기들이 태어났고, 1946년에서 1961년 사이 대략 6350만 명이 아기들이 태어났다. 쉽게 말해 1950년대는 베이비붐(baby boom)이 절정에 달했었다.

(1950년대 미국 뉴욕 타임즈 스퀘어의 모습)

 

(1950년대 미국의 일반적인 중산층 모습)


1950년대 중반쯤, 모든 산업의 공장 임금이 상당히 증가했는데 주당 평균 80달러가 되었다. 또한 과학 기술이 발달하여 항생제나 페니실린 등이 나왔고, 그러한 보건 영역의 물품들은 공장에서 대량생산 되었다. 그러한 번영속에서 당연히 미국은 소련과 경쟁했고, 그러한 경쟁은 군사 기술을 발달시켰다. 1952년에는 비키니 섬에서 히로시마 원자폭탄에 대략 1200배 이상의 위력을 가진 ‘수소폭탄(Hydrogen Bomb)’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로켓 개발에도 많은 투자를 하여 우주 프로그램을 위한 기술을 개발하는데도 정부가 많은 투자를 했다.

(당시 미국인들이 즐기던 쇼핑)

 

(영화 플레젼트 빌, 이 영화는 1950년대 미국 사회가 가지고 있던 모습을 아주 풍자적으로 보여준 영화다.)


1950년대 미국에서의 소비재에 대한 몰입이 증가했는데, 이것은 번영의 증대, 제품의 다양성과 이용 가능성 증가, 그리고 그러한 제품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던 광고업자들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이러한 소비재 수요의 증가로 신용카드(Credit Card)가 발달했다. 1920년대부터 미국 사회에서 기하급수적으로 생산이 증가하였던 자동차의 경우 미국 중산층 가정 하나당 소유하고 있었으며, TV의 보급도 증가하여 1957년에는 대략 4000만 대의 TV가 미국인들에게 보급되었다. 텔레비전의 증가로 인하여 “행복한 중산층 가정의 이미지”가 미국 사회에서 대대적으로 홍보되었다. 이러한 풍요로운 사회속에서 미국은 여러 문화가 탄생했다. 젊은이들이 즐기는 음악과 대중문화가 그러했는데,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로 대표되는 록큰롤에 대한 젊은이들의 사랑과 비트족의 탄생이 그 예시였다. 그 한편에선 핵전쟁에 대한 공포가 미국사회 전체를 지배하기도 했지만, 확실히 미국 사회는 자신들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풍요로움과 물질적 향락에 심취했었다.

(당시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엘비스 프레슬리, 그는 로큰롤의 전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풍요는 당연히 부유층과 중산층들을 대상으로 선전된 풍요였지, 자본주의적 빈부격차를 철폐하고 부의 독점을 철폐하기 위한 성장은 아니었다. 하워드 진이 집필한 미국 민중사에 따르면 “전체 가구 중 최하층 1/5이 총소득의 5%를, 최상층 1/5이 45%를 벌었고, 1953년 당시 전체 성인인구 가운데 1.6%가 80% 이상의 법인주식과 90%에 가까운 법인채권을 소유했으며 20만 개의 기업 가운데 약 200개의 대기업이 국가 전체 제조업 자산의 약 60%를 장악했다.”라고 한다. 또한 미국 노동통계국(Bureau of Labor Statistics)의 조사에 따르면 1962년에 전체 미국인의 거의 1/4에 해당하는 약 4200만 명이 빈민이었다. 빈민의 20%를 차지하는 비백인 인구 중에는 전체 흑인의 절반 정도가 속해 있었고, 아메리카 원주민의 경우 절반 이상이 빈민이었다. 따라서 전쟁 이후의 미국 경제 성장은 당연히 자본가들과 그들이 선전한 중산층 계급에 해당하는 것이었지, 빈민들의 삶은 당연히 어려웠다.

(버스안에 있는 로자 파크스, 그는 버스 내에서 흑인들이 느껴야 했던 불공평함에 도전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미국사회의 풍요와 번영에는 공개적인 억압과 차별이 존재했는데, 백인들의 억압 속에서 살아가던 흑인들이 주로 인종차별의 희생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시즘과의 전쟁속에서도 흑인들에 대한 차별과 멸시를 멈추지 않았던 미국정부는 냉전이 진행되는 와중에서 인종차별을 없애지 못했다.

(당시 로자 파크스가 탓던 버스)


물론 전쟁이 끝난 이후 미국사회의 극심한 인종차별은 미국의 엘리트 계층들에게 반성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했다. 그러한 반성의 표시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트루먼 행정부에선 군대 내에서의 인종차별을 없애는 정책을 도입했고, 1954년 미국 연방 대법원은 1890년대 이래 고수해 왔던 ‘분리되지만 평등하다’라는 말도안되는 원칙을 깨뜨렸다. 1954년에 있던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Brown v. Board of Education)’은 미국의 학교 내에서의 인종차별을 금지화한다는 선언이었다.

(인종 통합을 공산주의라며 궤변을 하는 한 백인 여성)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흑인들)


그러나 이 판결은 1960년대까지 미국 사회에서 큰 효과가 없었다. 1965년까지도 미국 남부에 있는 학교 75%가 인종분리를 실시하고 있었고, 그 지역에 사는 백인들은 흑인을 대상으로 인종차별을 멈추지 않았다. 또한 80년 전 제정되었던 ‘짐 크로우 법(Jim Crow Law)’는 여전히 존재했다. 1950년대 미국 사회는 버스 내에서 흑인과 백인을 분리해서 태웠는데, 이러한 차별은 1955년에 큰 쟁점이 되었다. 1955년 말 앨라배마 주의 몽고메리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당시 버스를 탔던 한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Rosa Parks)가 버스의 백인용 좌석에 앉았다가 경찰에게 체포당하여 유죄판경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건이 있자 미국 남부의 흑인들은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을 전개하여 버스 내에서의 차별 철폐를 요구했다.

(리틀 록 사건 당시 흑인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주둔했던 미군. 참고로 그 당시 투입된 미군은 2001년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로 유명한 101 공수사단이었다.)


이런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이 진행되자 흑인인권운동의 지도자 마틴 루서 킹(Martin Luther King Jr)의 집 현관이 산탄총 세례를 받고 집이 폭파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몽고메리의 흑인들은 승차 거부 운동을 계속했으며, 1956년 11월 대법원은 버스 노선의 인종 분리를 불법이라 판결하며 버스 내에서의 인종차별을 금지했다. 위에서 상술했듯이 1954년 브라운 대 판결이 나온 이후에도 학교에서의 인종차별은 계속됐다. 1957년의 리틀록 사건이 그러했다. 1957년 아칸소주 수도 리틀록의 어느 고등학교에 9명의 흑인 학생이 입학하는 것을 주지사가 군대를 동원해 막으면서 그 사건은 일어났는데, 결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연방 법원의 명령을 집행하기 위하여 연방군을 파견하여 학교운동장에 주둔하면서 연방군이 흑인 학생들을 교실까지 호위하는 사건도 있었다.

(말콤X와 마틴 루터 킹. 그들이 만난 것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1950년대부터 미국 사회에서의 흑인 문제는 다시 사회적으로 쟁점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흑인인권운동가로 성장했던 것이 마틴 루터 킹과 말콤X(Malcom X)였다. 당시 마틴 루터 킹은 인도의 독립운동가 간디의 영향을 받아 비폭력 투쟁 운동을 전개하며 흑백통합을 주장했던 데에 비해 말콤X는 직접적인 현장투쟁을 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조직 ‘네이션즈 오브 이슬람(Nations of Islam)’에서 활동하며 북부지역의 흑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흑백 분리 주의를 주장했었다. 물론 마틴 루터 킹과 말콤X는 서로 다른 방향에서 흑인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투쟁을 전개했다. 물론 말콤X나 마틴 루터 킹이 서로 비판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런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가 되어 서로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어쩌면 1963년 이후 중동지역으로 성지 순례를 갔다오고 난 뒤 말콤X의 생각이 바뀐 것도 영향이 있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마틴 루터 킹이나 말콤X의 투쟁은 미국에 존재하는 인종차별에 맞서 흑인들이 투쟁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다. 참고로 킹과 대립하며 말콤X가 고수했던 노선은 베트남 전쟁을 거치며 ‘흑표당(Black Panther Party)’와 같은 흑인급진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백인 전용 식당에 앉은 흑인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그린즈버러 사람들)


 

(그런 흑인을 곤봉으로 구타하는 백인 경찰)


그 시기 미국 흑인인권운동 투쟁에서 중심이 되었던 것은 마틴 루터 킹이었을 것이다. 1955년 몽고메리 버스 승차 거부 운동 이후 마틴 루터 킹은 여러 투쟁을 전개했다. 1960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그린즈버러(Greensboro)에서 대학 신입생 흑인 4명이 백인들만 식사를 하던 간이식당에 들어가 식당에서 비폭력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는 마틴 루터 킹의 노선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시위는 다른 남부 도시에도 확산되었고, 그 시위에 참여한 흑인 및 지식인들은 폭력에 시달렸지만, 100여 개의 도시에서 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러한 시위에 참여했다. 그 결과 1960년 말 여러 곳의 간이식당이 흑인들에게도 식사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었다.

(마틴 루터 킹의 유명한 연설 I have a dream의 한 구절)


그 외에도 마틴 루터 킹은 1960년대 워싱턴에서 행진을 하여 ‘민권 법안 통과’를 촉구 했고, 그 행진에서 “I Have A Dream(나는 꿈이 있습니다.)”로 대표되는 명연설을 하기도 했었다. 그 결과 1964년 민권법이 통과되었다. 마틴 루터 킹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몽고메리 주 셀마(Selma)에서 흑인 투표권 운동을 전개하여 그 지역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도록 만들었다. 셀마에서의 투표권 투쟁으로 미국 남부 사회는 흑인들에게 어떠한 조건 없이 백인들과 똑같이 투표권을 부여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마틴 루터 킹과 그의 인권운동가들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까지 전개하게 되었다.

(2015년에 개봉한 영화 셀마. 이 영화는 마틴 루터 킹과 흑인들의 투표권 투쟁을 다뤘다.)


현재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이 그만큼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은 말콤X나 마틴 루터 킹과 같은 운동가들 그리고 흑인인권을 위해 협력했던 양심적인 백인 지식인들이 투쟁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흑인인권투쟁은 미제국의 가장 큰 약점인 인종차별이 그 시대에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지를 보여주는 반면교사다. 우리가 흑인인권운동에서 배워야 할 것은 소수자와 약자를 위해 동정하고 그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투쟁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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