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풍요와 흑인인권운동

(워싱턴 링컨 기념탑에서 연설한 마틴 루터 킹)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은 1940년대에서 1950년대 사이 대대적인 경제 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1945년에서 1960년 사이 미국의 국내총생산(GNP)는 2000억 달러에서 5000억 달러나 증가했고, 경제 대공황 시기 평균 25%였던 실업률은 1950년대에는 5%까지 하락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경제 대공황을 극복한 미국은 1950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그로 인한 경제 성장까지 이룩할 수 있었다. 이러한 미국의 경제 성장은 인구 증가에도 영향을 주었고, 1920년대의 번영보다도 훨씬 더 풍요로운 생활을 제공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이 있던 무렵 미국에서는 새 생명이 많이 태어나기 시작했다. 1950년에만 350만에 달하는 아기들이 태어났고, 1946년에서 1961년 사이 대략 6350만 명이 아기들이 태어났다. 쉽게 말해 1950년대는 베이비붐(baby boom)이 절정에 달했었다.

(1950년대 미국 뉴욕 타임즈 스퀘어의 모습)

 

(1950년대 미국의 일반적인 중산층 모습)


1950년대 중반쯤, 모든 산업의 공장 임금이 상당히 증가했는데 주당 평균 80달러가 되었다. 또한 과학 기술이 발달하여 항생제나 페니실린 등이 나왔고, 그러한 보건 영역의 물품들은 공장에서 대량생산 되었다. 그러한 번영속에서 당연히 미국은 소련과 경쟁했고, 그러한 경쟁은 군사 기술을 발달시켰다. 1952년에는 비키니 섬에서 히로시마 원자폭탄에 대략 1200배 이상의 위력을 가진 ‘수소폭탄(Hydrogen Bomb)’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로켓 개발에도 많은 투자를 하여 우주 프로그램을 위한 기술을 개발하는데도 정부가 많은 투자를 했다.

(당시 미국인들이 즐기던 쇼핑)

 

(영화 플레젼트 빌, 이 영화는 1950년대 미국 사회가 가지고 있던 모습을 아주 풍자적으로 보여준 영화다.)


1950년대 미국에서의 소비재에 대한 몰입이 증가했는데, 이것은 번영의 증대, 제품의 다양성과 이용 가능성 증가, 그리고 그러한 제품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던 광고업자들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이러한 소비재 수요의 증가로 신용카드(Credit Card)가 발달했다. 1920년대부터 미국 사회에서 기하급수적으로 생산이 증가하였던 자동차의 경우 미국 중산층 가정 하나당 소유하고 있었으며, TV의 보급도 증가하여 1957년에는 대략 4000만 대의 TV가 미국인들에게 보급되었다. 텔레비전의 증가로 인하여 “행복한 중산층 가정의 이미지”가 미국 사회에서 대대적으로 홍보되었다. 이러한 풍요로운 사회속에서 미국은 여러 문화가 탄생했다. 젊은이들이 즐기는 음악과 대중문화가 그러했는데,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로 대표되는 록큰롤에 대한 젊은이들의 사랑과 비트족의 탄생이 그 예시였다. 그 한편에선 핵전쟁에 대한 공포가 미국사회 전체를 지배하기도 했지만, 확실히 미국 사회는 자신들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풍요로움과 물질적 향락에 심취했었다.

(당시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엘비스 프레슬리, 그는 로큰롤의 전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풍요는 당연히 부유층과 중산층들을 대상으로 선전된 풍요였지, 자본주의적 빈부격차를 철폐하고 부의 독점을 철폐하기 위한 성장은 아니었다. 하워드 진이 집필한 미국 민중사에 따르면 “전체 가구 중 최하층 1/5이 총소득의 5%를, 최상층 1/5이 45%를 벌었고, 1953년 당시 전체 성인인구 가운데 1.6%가 80% 이상의 법인주식과 90%에 가까운 법인채권을 소유했으며 20만 개의 기업 가운데 약 200개의 대기업이 국가 전체 제조업 자산의 약 60%를 장악했다.”라고 한다. 또한 미국 노동통계국(Bureau of Labor Statistics)의 조사에 따르면 1962년에 전체 미국인의 거의 1/4에 해당하는 약 4200만 명이 빈민이었다. 빈민의 20%를 차지하는 비백인 인구 중에는 전체 흑인의 절반 정도가 속해 있었고, 아메리카 원주민의 경우 절반 이상이 빈민이었다. 따라서 전쟁 이후의 미국 경제 성장은 당연히 자본가들과 그들이 선전한 중산층 계급에 해당하는 것이었지, 빈민들의 삶은 당연히 어려웠다.

(버스안에 있는 로자 파크스, 그는 버스 내에서 흑인들이 느껴야 했던 불공평함에 도전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미국사회의 풍요와 번영에는 공개적인 억압과 차별이 존재했는데, 백인들의 억압 속에서 살아가던 흑인들이 주로 인종차별의 희생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시즘과의 전쟁속에서도 흑인들에 대한 차별과 멸시를 멈추지 않았던 미국정부는 냉전이 진행되는 와중에서 인종차별을 없애지 못했다.

(당시 로자 파크스가 탓던 버스)


물론 전쟁이 끝난 이후 미국사회의 극심한 인종차별은 미국의 엘리트 계층들에게 반성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했다. 그러한 반성의 표시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트루먼 행정부에선 군대 내에서의 인종차별을 없애는 정책을 도입했고, 1954년 미국 연방 대법원은 1890년대 이래 고수해 왔던 ‘분리되지만 평등하다’라는 말도안되는 원칙을 깨뜨렸다. 1954년에 있던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Brown v. Board of Education)’은 미국의 학교 내에서의 인종차별을 금지화한다는 선언이었다.

(인종 통합을 공산주의라며 궤변을 하는 한 백인 여성)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흑인들)


그러나 이 판결은 1960년대까지 미국 사회에서 큰 효과가 없었다. 1965년까지도 미국 남부에 있는 학교 75%가 인종분리를 실시하고 있었고, 그 지역에 사는 백인들은 흑인을 대상으로 인종차별을 멈추지 않았다. 또한 80년 전 제정되었던 ‘짐 크로우 법(Jim Crow Law)’는 여전히 존재했다. 1950년대 미국 사회는 버스 내에서 흑인과 백인을 분리해서 태웠는데, 이러한 차별은 1955년에 큰 쟁점이 되었다. 1955년 말 앨라배마 주의 몽고메리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당시 버스를 탔던 한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Rosa Parks)가 버스의 백인용 좌석에 앉았다가 경찰에게 체포당하여 유죄판경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건이 있자 미국 남부의 흑인들은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을 전개하여 버스 내에서의 차별 철폐를 요구했다.

(리틀 록 사건 당시 흑인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주둔했던 미군. 참고로 그 당시 투입된 미군은 2001년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로 유명한 101 공수사단이었다.)


이런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이 진행되자 흑인인권운동의 지도자 마틴 루서 킹(Martin Luther King Jr)의 집 현관이 산탄총 세례를 받고 집이 폭파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몽고메리의 흑인들은 승차 거부 운동을 계속했으며, 1956년 11월 대법원은 버스 노선의 인종 분리를 불법이라 판결하며 버스 내에서의 인종차별을 금지했다. 위에서 상술했듯이 1954년 브라운 대 판결이 나온 이후에도 학교에서의 인종차별은 계속됐다. 1957년의 리틀록 사건이 그러했다. 1957년 아칸소주 수도 리틀록의 어느 고등학교에 9명의 흑인 학생이 입학하는 것을 주지사가 군대를 동원해 막으면서 그 사건은 일어났는데, 결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연방 법원의 명령을 집행하기 위하여 연방군을 파견하여 학교운동장에 주둔하면서 연방군이 흑인 학생들을 교실까지 호위하는 사건도 있었다.

(말콤X와 마틴 루터 킹. 그들이 만난 것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1950년대부터 미국 사회에서의 흑인 문제는 다시 사회적으로 쟁점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흑인인권운동가로 성장했던 것이 마틴 루터 킹과 말콤X(Malcom X)였다. 당시 마틴 루터 킹은 인도의 독립운동가 간디의 영향을 받아 비폭력 투쟁 운동을 전개하며 흑백통합을 주장했던 데에 비해 말콤X는 직접적인 현장투쟁을 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조직 ‘네이션즈 오브 이슬람(Nations of Islam)’에서 활동하며 북부지역의 흑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흑백 분리 주의를 주장했었다. 물론 마틴 루터 킹과 말콤X는 서로 다른 방향에서 흑인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투쟁을 전개했다. 물론 말콤X나 마틴 루터 킹이 서로 비판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런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가 되어 서로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어쩌면 1963년 이후 중동지역으로 성지 순례를 갔다오고 난 뒤 말콤X의 생각이 바뀐 것도 영향이 있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마틴 루터 킹이나 말콤X의 투쟁은 미국에 존재하는 인종차별에 맞서 흑인들이 투쟁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다. 참고로 킹과 대립하며 말콤X가 고수했던 노선은 베트남 전쟁을 거치며 ‘흑표당(Black Panther Party)’와 같은 흑인급진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백인 전용 식당에 앉은 흑인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그린즈버러 사람들)


 

(그런 흑인을 곤봉으로 구타하는 백인 경찰)


그 시기 미국 흑인인권운동 투쟁에서 중심이 되었던 것은 마틴 루터 킹이었을 것이다. 1955년 몽고메리 버스 승차 거부 운동 이후 마틴 루터 킹은 여러 투쟁을 전개했다. 1960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그린즈버러(Greensboro)에서 대학 신입생 흑인 4명이 백인들만 식사를 하던 간이식당에 들어가 식당에서 비폭력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는 마틴 루터 킹의 노선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시위는 다른 남부 도시에도 확산되었고, 그 시위에 참여한 흑인 및 지식인들은 폭력에 시달렸지만, 100여 개의 도시에서 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러한 시위에 참여했다. 그 결과 1960년 말 여러 곳의 간이식당이 흑인들에게도 식사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었다.

(마틴 루터 킹의 유명한 연설 I have a dream의 한 구절)


그 외에도 마틴 루터 킹은 1960년대 워싱턴에서 행진을 하여 ‘민권 법안 통과’를 촉구 했고, 그 행진에서 “I Have A Dream(나는 꿈이 있습니다.)”로 대표되는 명연설을 하기도 했었다. 그 결과 1964년 민권법이 통과되었다. 마틴 루터 킹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몽고메리 주 셀마(Selma)에서 흑인 투표권 운동을 전개하여 그 지역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도록 만들었다. 셀마에서의 투표권 투쟁으로 미국 남부 사회는 흑인들에게 어떠한 조건 없이 백인들과 똑같이 투표권을 부여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마틴 루터 킹과 그의 인권운동가들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까지 전개하게 되었다.

(2015년에 개봉한 영화 셀마. 이 영화는 마틴 루터 킹과 흑인들의 투표권 투쟁을 다뤘다.)


현재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이 그만큼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은 말콤X나 마틴 루터 킹과 같은 운동가들 그리고 흑인인권을 위해 협력했던 양심적인 백인 지식인들이 투쟁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흑인인권투쟁은 미제국의 가장 큰 약점인 인종차별이 그 시대에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지를 보여주는 반면교사다. 우리가 흑인인권운동에서 배워야 할 것은 소수자와 약자를 위해 동정하고 그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투쟁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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