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초상화)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한국은 매우 가난한 나라였다.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미군정 시절의 남조선 경제는 피폐했다. 19469월 부산철도노동자의 파업을 시작으로 이른바 9월 총파업이 일어났고, 이것은 결국 대구 10.1 항쟁으로 확산되었는데, 그 이유는 당시 미군정 하에서의 열악한 경제상황을 보면 알 수 있다. 해방 이후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쌀값이 폭등했고, 물가도 폭등했다. 물가는 1944년에 비해 1946년에는 92배나 증가했고, 임금은 물가상승을 따라가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19455월 물가지수가 233일 때 노동자임금지수가 233이었는데, 19465월 물가지수 77,393일 때 노동자 임금지수는 6,015였다. 19461월 소매로 16kg180원 하던 쌀값이 9월에는 1,200원으로 상승하는 초 인플레이션 현상이 미군정 하의 한반도에서 벌어졌다.

 

결국 노동자 농민이 미군정에 맞서는 시위를 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거기다 미군정은 이 땅에 상륙한 시점부터 친일 인사들을 자신들의 정권 하에 대거 등용했고, 최소 80% 이상이나 되는 경찰과 공무원이 친일인사들이었다. 경찰의 경우 그냥 10명 중 9명 이상은 친일경찰들이었다. 이런 모순점들이 격해지면서, 결국 민중항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항쟁은 미군정이 잔혹하게 진압하면서 비극적으로 끝났다. 제주 4,3 항쟁과 여순항쟁 등 1945년부터 1950년까지 미군정 하에서 최소 10(20만 명이라는 수치도 존재한다.) 이상의 민간인이 무차별 학살당했고, 비슷한 규모의 정치범이 국가보안법으로 감옥에 수감됐다. 1950년 북한의 공격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남북한 모두 국토가 초토화 됐다. 국토 초토화의 원인은 당연하게도 미군의 무차별 폭격 때문이었다.

(전쟁 이후 서울의 모습)

 

1948년 유엔과 미국의 지원을 받아 탄생한 이승만 정부의 경제체제는 한국전쟁 시기부터 미군과 유엔군의 구호물자에 의존하는 체제였다. 물론 이승만 정부는 민생문제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심지어 자국군인 10만 명이 방산비리로 아사하는 국민방위군 사건과 같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나던 사회가 바로 이승만 정부였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은 극심했다. 1950년에 대한민국 국민총생산(GNP)15.1%나 감소했고, 1951년에는 6.1%나 감소했다. 물론 1952년과 1953년부터 차츰 회복세를 보여 성장률 25.7%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이른바 자유당 독재가 강화되던 1954년부터는 5.2% 감소 1955년에는 4% 그리고 1956년에는 0.3%가 감소했다.

 

인플레이션은 정말 놀라울 수준의 규모였다. 전쟁시기에는 물가상승률이 213.5%를 찍었는데, 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이후에도 최소 4년 동안 평균 40%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1950년대 한국의 경제는 이른바 원조경제의 시기라고 부를 만큼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재정에서 미국 및 외국의 경제원조가 차지하는 비중은 195430%, 195544.3%, 195752.9%, 195851.5%에 달했을 정도다. 쉽게 말해 미국 없이는 나라 자체가 유지되는 것이 불가능한 너무나도 가난한 나라였다. 반면 3년간 미군의 무차별 폭격을 받았던 북한은 비록 중국과 소련 그리고 동유럽의 원조를 받았다고 하지만, 사실장 자체적으로 전후복구와 경제성장에 이룩했고, 자신들의 힘으로 1960년에는 세계 49위의 경제규모에 달하는 국가로 발전했다. 이는 당시 한국 사회와 너무나도 비교가 됐다. 즉 이승만 정부의 시장경제는 사회주의 북한 경제하고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열악했다.

 

미국의 원조액은 1958년부터 감소했는데, 이에 따라 대한민국 경제성장률도 하락했다. 19578.7%에서 19595.2%, 19602.3%로 떨어졌으며, 물가지수는 1958143%, 1959년에는 146.7%, 1960162.5%수준까지 상승했다. 실업률은 8.2%였다. 1인당 국민소득은 1956년에 80.5달러, 1957년에는 84.3달러, 1958년에는 85달러였다가 1959년에 84.3달러로 떨어졌다. 한국 경제는 말 그대로 처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독재 정권은 폭정과 무능 그리고 부패만 일삼았다. 이승만과 친일파 민족반역자 세력들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고, 이러한 배경은 결국 1960년 한국의 4.19 혁명의 원인이기도 했다. 1961년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감행하여 집권하게 될 당시 한국의 경제 규모는 101위였던 반면, 북한은 49위였다.

(1950년대 판자촌의 모습)

 

이러한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승만 정부의 무능한 자유주의 시장 경제는 모든 면에서 실패한 나라였다. 사실상 주한미군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망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법한 나라다. 당시 국민들은 미군들이 먹다남은 음식인 이른바 꿀꿀이 죽을 먹었고, 소위 보릿고개를 경험했다. 현재 우리가 먹는 부대찌개는 사실상 이 시대때 만들어진 대한민국 가난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음식이다. 당시 한국의 거리에는 굶은 아이들과 노숙자가 넘쳐났고, 잘먹고 잘사는 이들은 대다수 미국과 이승만 정부에 빌붙어 먹던 이들과 친일파들이었다. 이승만의 2인자인 이기붕 일가가 집단자살(혹은 타살)로 생을 마감하자, 민중들은 그들이 살던 집에 쳐들어갔고,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 귀하던 설탕이 집안 곳곳에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이승만 시대의 경제는 말 그대로 처참한 수준이었다.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부나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부 수준이었으며, 잘해봐야 1973년 신자유주의를 극대화 시킨 피노체트 정부 보다도 훨씬 더 못한 수준이었다고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한국 사회가 경제 성장의 동력을 받은건 사실상 불법적인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이른바 자본주의식 국가주도 경제성장 정책을 하게 되면서였다. 따라서 현재 뉴라이트들이 침마르게 칭찬하는 이승만식 자유주의 경제는 최빈국 수준의 것이었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박근혜 정권이 한참이던 2015년 국내에 있는 오월의 봄 출판사에서는 좌파계열 미국 역사학자인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책 <한국의 민중봉기>를 번역했다. 조지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부터 이명박 정부 초기까지의 한국 근현대사의 민중봉기를 재조명했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한국전쟁 연구로 저명한 역사학자인 브루스 커밍스의 자료와 분석을 적절히 비판 및 분석하면서 이를 받아들인다. 책을 읽어본 이는 알겠지만,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1950625일에 일어난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War of National Liberation)이라는 입장에서 바라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전쟁을 북한과 김일성의 민족해방전쟁적 성격을 인정하는 역사관은 단순히 조지 카치아피카스만의 관점은 아닐 것이다. <한국전쟁의 기원(Origin of the Korean War)>를 쓴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또한 한국전쟁이라는 한 사건이 민족해방전쟁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했으며, 이러한 관점은 이후 박명림 교수를 중심으로한 학자들에 의해 공격받기도 했지만,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민족해방전쟁적 성격을 부정한 적이 없다. 나 또한 과거 커밍스가 쓴 저서를 읽으면서, “한국전쟁이라는 한 사건이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선상에서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지만, 최근에 보게 된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저서 <한국의 민중봉기>는 커밍스보다 훨씬 더 과감한 관점에서 한국전쟁을 바라본다. 아니 오히려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관점을 좌파적 입장에서 여러 근거를 밝혀가며 비판한다.

 

<한국의 민중봉기> 저자 조지 카치아피카스는 1968년 당시 이른바 68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을 주도적으로 조직했다가 미국 FBI에게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던 인물이다. 또한 1980년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이 저지른 광주학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여러 사회운동과 역사학적인 연구를 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한때 전남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보내기도 했었다. 브루스 커밍스가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에 비판적인 자유주의적 성향의 훌륭한 학자라면, 조지 카치아피카스는 신좌파적 성향을 가진 좌파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한국전쟁을 누가 먼저 일으켰는가에 대한 질문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한국전쟁이 625일에 일어나고 난 뒤,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의 첫 라디오 연설은 바로 한국과 미국이 포기한 지역에서 즉각 인민위원회를 재건할 것을 호소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627일부터 민중들은 연백에서 15인 인민위원회를 세웠고, 한달 안에 수백 개 마을에서 비슷한 선거가 이루어졌으며, 선출된 대의원들은 읍·, ·, 도 단위 정부 당국의 대표자들을 뽑았다고 한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한국전쟁 초기 일본에 주둔한 미군 항공병력의 출격이 없었다면, 조선 인민군이 해방자들을 환영하는 대중적지지 속에서 전체를 장악했을 것이라고, 책에서 주장한다. 한국전쟁 초기 미군의 공군 개입이 즉각적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면, 이러한 카치아피카스 교수의 생각은 틀리다고만 할 수 없을 것이다. 거기다 초기에 개입한 미군 공군 병력은 북한의 원산과 평양 등에 전략폭격을 감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인민군은 915일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전까지 남한 땅 90%를 접수했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남한의 보수 논객들은 대부분 전쟁이 공산주의의 침략으로 일어났다고 묘사하지만, “어떻게 한국인들이 그들 자신을 침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한국전쟁이 1950625일에 일어났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 날 누가 누구를 공격했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문이 남는다고 한다. 우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항상 한반도 전체의 통제를 약속했고, 그 밑의 장군들은 계속해서 38선 너머로 북한군에 대한 습격을 명령했다. 1949년 한 해에만 북한군 병사 수백 명이 살해된 2,617건의 공격이 있었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이미 전쟁이 1950625일 이전에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은 커밍스가 가진 관점과 유사한 점이 있다. 1945년 한반도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미군정 하에서 5년간 무려 1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이른바 작은전쟁을 통해 학살당했다. 심지어 홀거 하이데라는 인물은 이것보다 두 배 이상의 수치인 20만 명이 미군정 하에서 학살당한 것으로 해석했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한국전쟁 초기 미군이 육해공에서 체계적으로 민간인을 공격한 것과는 달리, 북한군 병사들은 대부분 규율이 잡혀 있었고 잔인한 공격을 자제했다고 한다. 커밍스의 주장대로 조선인민군 장교의 80% 이상이 중국에서 활동했고, 10만 명 이상의 병사들이 전투 경험을 했다고 추정했다. 거기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국공내전에서 10만 이상의 조선인 병사들이 중국 혁명에 동참한 이후 북한에 파견되어 조선인민군이 되었음을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강조한다. 더 나아가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한국전쟁을 내전으로 한정하는 커밍스 교수의 주장에 반대한다. 마지막으로 그의 주장을 길게 인용하겠다.

 

전쟁의 기원에 집착하는 것만으로는 전쟁을 제대로 평가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김동춘이 그의 주목할만한 저작에서 지적하듯이,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실행하기 위해서 전통적 학파와 수정주의 학파 모두가 여전히 갇혀 있는 전쟁의 시작에 대한 집착을 깨뜨려야 할 때가 됐다.” 그의 견해로는 전쟁의 종식이후 반세기 이상 동북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 영향을 끝낼 방법을 찾기 위해 전쟁의 성격을 평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미국은 그 이후로 오랫동안 베트남이나 북한의 동맹인 중국과 평화를 유지했지만, 평양과는 전쟁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 계속되는 전쟁의 뿌리를 밝히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전쟁의 성격과 관련된 것이다. 이 전쟁은 내전인가, 아니면 제국주의 개입에 맞선 민족해방 전쟁인가?

 

만약 내전이라면, 리와 그랜트, 스톤월 잭슨과 윌리엄 테쿰세 셔먼(각각 미국 남북전쟁 때 남군과 북군의 장군)에 해당되는 인물은 누구인가? 남한이나 미국의 역사, 영화, 공공 기념물에서 답을 찾더라도 우리는 불가피하게 한국이 아니라 미국 장군들, 맥아더, 리지웨이, 월튼 해리스 워커(그의 이름을 딴 쉐라톤 워커힐 호텔과 카지노가 서울에 남아 있다) 등과 마주치게 된다. 한국의 내전에서 미국 장군들이 두각을 드러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승만이 1950년 대전협정을 통해 한국군에 대한 완전한 작전통제권을 미국에 넘겨줬기 때문이다.(오늘날까지 참모본부가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도 과연 독립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승만이 전쟁에 도움이 되도록 맥아더를 한국에 데려온 것이 아니다. 맥아더가 이승만을 개인용 미군기에 태워 한국으로 데려왔다. ‘북한의 기습 공격이후 3개월도 안 돼 맥아더는 디데이 노르망디 침략군보다 더 많은 함대를 모아서 915일 인천에 상륙했다. 그리고 그는 북한 군대가 여전히 남한에서 토지개혁을 시행하느라 바쁜 와중에 서울을 손쉽게 재탈환했다. 그런 다음 이승만을 두 번째 서울로 데려와 그에게 통치권을 줬고 이승만은 기뻐 눈물을 흘렸다.

 

저명한 미국 학자들은 한국전쟁을 그리스의 펠로포네소스 전쟁에 비유하는데, 남북한을 이해하기 위해 자치 도시국가인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끌어들여 비유한 것이다. 만약 고대 그리스 역사에서 전례를 찾으려면, 크기만 고려해보더라도 미국을 페르시아에 비교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것 같다. 지금처럼 그 당시에도 제국적 외세의 이해는 일부 토착 투사들을 침략자 편으로 끌어당겼다. 크세르크세스가 침략한 동안 일부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 편에서 싸웠다(한 세대 후에 알렉산더가 아시아에 전쟁을 일으켰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만약 내전으로 성격을 규정하는 논리를 따른다고 할 때,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정복했다면 현존 역사는 테르모필레를 장악한 군사주의적 스파르타인들에게 맞서 궐기할 평화 애호적 그리스인들을 페르시아가 지원한 것으로 규정할 것이다. 아니면 만약 영국인들이 1789(미국 헌법이 승인된 해) 이후 미국의 절반을 통제했다고 가정해보자. 오늘날 역사가들은 최초의 미국 내전177674(미국의 첫 독립기념일)에 시작됐다고 언급하지 않겠는가?

 

조선을 휩쓴 재앙을 내전으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민족 독립전쟁으로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 역시, 반세기 넘게 미국이 왜 북한에 대한 경제적 금수조치를 지속했는가를 조사하면 답할 수 있다. 만약 그 충돌이 정말로 내전이었다면 미국은 이미 오래전에 개입을 중단했어야 한다. 그렇다면 수십 년간 미국의 북한 포위와 고립, 반세기 이상 한국에 남아 있는 수만 명의 미군 부대, 한국군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인 작전 통제를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1953년 정전 이후 몇 년 동안 EC-121 첩보기를 포함한 최소한 10대의 미군기가 북한 측에 의해 격추되었다. 1976년에서 1993년까지 지속된 미국의 팀스피리트 작전(대개 1년에 1회씩 실시한 한국과 미국의 합동 군사훈련)은 침략과 핵전쟁의 위협을 가했다. 북한에 따르면 수십 년간 날마다 핵무기를 투하할 수 있는 미군 폭격기가 38도선에 접근했다가 마지막 순간에 선회했고, 따라서 미국의 핵 공격 가능성을 매일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1968년 미국 군함 푸에블로호의 억류 이후 미국 협상가들은 북한 영해 침법에 대해 사과했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서면으로 약속했지만, 북한은 그 이후에도 미 해군의 영해 침범 사례를 수백 건이나 보고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북한은 해마다 7,900건 이사의 도발 행위를 집계했고, 미국은 날마다 이루어진 북한에 대한 고도 감시 비행을 인정했다.”

 

출처: 한국의 민중봉기 p.204~20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부터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까지
김남기 지음 / 어깨걸고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이 책의 원고를 쓰기 시작한 것은 2019년 외할머니가 고인이 되실 때쯤이었다. 2018년 군복무를 마친 나는 전역 이후 미국여행을 갔었고, 여행을 하면서 미국의 이면을 보게 됐다. 사실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의 저서<만화로 보는 미국사><미국 민중사(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를 읽으면서였다. 이 책을 통해 미국의 또 다른 민낯을 보다 자세히 알게 됐고, 이는 내 미국여행에서도 큰 영향을 줬다.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내가 하고 있는 페이스북 상에서라도 미국의 추악한 역사를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을 비난하든 칭찬하든 간에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역사를 잘 아는 경우는 찾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미국의 추악한 이면을 모르거나 잘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미제국주의 역사라는 타이틀을 단 글을 페이스북과 블로그에 연재했다. 연재를 하다 보니, 책 한권 정도의 분량이 나왔다. 따라서 이 글을 책 한권으로 내고 싶었다.

 

책을 내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연재는 2019년 여름부터 20203월까지 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러나 출판을 하기 까지는 연재를 시작하고 나서 2년이 걸렸다. 출판은 결국 내가 속해있는 단체에서 하게 됐고, 아프가니스탄 전쟁 종결과 맞추어 출판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새로 알게 된 미국 역사 관련 내용들과 기존에 추가하고 싶은 내용들을 원고에 추가하는 작업을 거쳤다.

 

책은 하워드 진이 쓴 <미국 민중사>의 구조를 다소 따른 감이 있다. 책의 시작은 콜럼버스의 침략부터 작년에 종결된 미국 아프가니스탄 전쟁까지를 다뤘다. 물론 미국의 침략사 및 개입사를 주로 다뤘지만, 인종차별 문제와 인권 문제도 책에서 같이 다뤘다. 미국이 경제 강국 및 군사강국으로 부상하게 되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제법 깊숙이 다뤘고, 미소냉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도 책에서 다른 주제들 보다 깊숙이 다룬 측면이 있다. 마지막 챕터인 아프가니스탄 전쟁도 그렇다.

 

이 책은 미국의 역사가 침략과 약탈 그리고 학살과 인권유린으로 얼룩진 역사임을 주장한다.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미소냉전이 사실은 미국의 신제국주의적 정책에 입각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미국의 여러 개입들을 근거로 강조한다. 1950625일 북한이 시작한 한국전쟁도 사실은 대량 민간인 학살의 주체가 미국과 한국이었으며, 그에 반해 인민군과 좌익의 학살은 훨씬 적었음을 저자는 역설한다.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책은 베트남 전쟁이 미국이 추악하고 잔혹한 침략전쟁이며, 호치민과 베트남 민중이 민족해방전쟁이었음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미국은 무수히 많은 폭탄과 화학무기를 베트남에 살포하여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전쟁범죄를 저질렀음을 저자는 강조한다.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냉전이 종결되자 미국은 오히려 더 강대국으로써의 위치를 고수했고, 소말리아 내전과 유고슬라비아 내전 등에 개입했으며, 2001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했다.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한 저자의 태도는 분명하다. 이것은 결국 미국이 자초한, 비극이었으며,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침략 몇 개월간 9.11 테러로 죽은 미국 민간인 3,000명보다 훨씬 더 많은 2만 명을 죽였다고 말이다. 미국이 일으킨 이라크 전쟁으로 65만 명의 이라크인이 죽었고, 아프가니스탄은 20년 동안이나 전쟁을 치렀다. 이러한 비극의 결정적인 원인은 미국 제국주의 그 자체에 있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 책의 출판은 분명 개인적으로나 사회 운동적으로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책 자체는 저자인 내가 보기에도 몇몇 놓친 점이나 오류들도 있다. 책을 다시 훑어보면서 느꼈지만, 철자 오류들이 종종 보였다. 이 점은 저자로써 다소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미국 침략사에서 중요한 먼로 독트린에 대한 내용이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이란 내정간섭 등의 내용도 빠져있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나중에 개정판을 내게 된다면 꼭 정정하고 싶다.

 

책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이 책은 전문서적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운동하는 이들을 각성시키기 위한 목적도 분명 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 책은 친미주의가 널리 퍼진 한국 사회에서 다른 시각으로 미국을 보고자 한 도전이었다고 말이다. 나중에 많은 자료들과 사회적 경험을 더 쌓으면, 이 책의 개정판을 언젠가는 낼 것이며, 사회운동에 보다 기여를 하고 싶다. 조금이라도 미국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면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한국사회에서 누군가는 이러한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출판하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의 후원을 받았다.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 베트남 등 해외에 사는 이들이 나에게 후원금을 보냈었고, 후원을 해준 이들에게 해외 및 국내배송으로 책을 붙였다. 후원해준 분들 덕분에 출판을 할 수 있었다.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지만, 이 책 출판을 위해 후원해주신 수많은 분들에게 깊은 감사함을 느낀다. 요즘 들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질 않고 있다. 전쟁 자체는 러시아의 부당한 침략으로 시작됐지만,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는 여전히 살인적인 경제제재를 당연하다는 듯이 감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살인적인 경제제재를 비판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쿠바와 북한 이란, 베네수엘라 등이 겪은 경제제재가 얼마나 반인권적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때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내가 쓴 책 <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은 미국을 보는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해 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 우크라이나 반전집회 참가했습니다. 러시아의 침략에 반대하면서 그와 동시에 미제와 나토 그리고 우크라이나 네오나치에 반대합니다. 저는 이것을 다 반대하는 바이며, 이것에 대한 종합적인 비판없는 반전운동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투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0. 우끄라이나 기근의 원인들

 

19321933년에 우크라이나에는 기근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주의와 농업 집산화에 반대하는, 우끄라이나 극우파가 이끄는 비참한 종말에 이른 투쟁에 의해 주요하게 유발된 것이었다.

 

1930년대 동안 히틀러주의자들과 연계된 극우파는 우끄라이나 인민들을 전멸시키기 위해 고의적으로 야기된 기근이라는 흑색선전의 주제를 이미 십분 활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이러한 흑색선전은 독일과 우끄라이나 나찌가 자행한 야만적인 범죄를 은폐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여 보정되었는데, 이것은 파시즘을 보호하고 공산주의에 맞서 서방 세력의 힘을 동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 1950년대 초 이래로 600만 유대인이 전멸했다는 사실 자체가 전 세계적인 자각을 불러 일으켰다. 세계의 우익 세력은 공산주의 테러에 의해 야기된더 많은 수의 사망자 숫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맥카시즘이 활개친 해인 1953, 20년 전 의 우끄라이나에서의 사망자 숫자가 극적으로 증가하는 일이 발생했다. 유대인들이 과학적, 계획적 그리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살해당했기 때문에, 우끄라이나 인민의 몰살또한 냉혹하게 자행된 대학살의 형태를 띠어야 했다. 그리고 유대인 대학살에 대해 격렬하게 부인하는 극우파는 우끄라이나 대학살을 조작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농업 집산화에 반대한 꿀락들과 짜리즘을 그리워하던 반동 분자들에 의해 야기된 내전으로 촉발되었다.

 

프레드릭 슈만(Frederick Shuman)은 기근 동안 여행객으로서 우끄라이나를 여행했다. 그는 윌리엄 대학의 교수가 되자, 1957년에 쏘련에 관한 책을 출판하였다. 그는 기근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19321933년의 우끄라이나 기근은 네 가지 원인이 있었다.

 

그들의 반대파(꿀락)는 그들의 소와 말들을 집단소유로 하기보다는 차라리 도살하는 방식을 초기에 취했다. 그 결과 쏘비에뜨 농업은 통탄할 만한 타격을 받았는데, 왜냐하면 대다수의 소와 말들을 꿀락들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28년과 1933년 사이에, 쏘련에서 말의 수가 거의 3,000만 두에서 1,500만 두 이하로, 뿔 달린 소의 숫자는 7,000만 두(젖소 3,100만 두 포함)에서 3,800만 두(젖소 2,000만 두 포함); 양과 염소는 14,700만 두에서 5,000만 두로, 돼지는 2,000만 두에서 1,200만 두로 감소했다. 쏘비에트의 농촌 경제는 1941년 무렵까지 이러한 치명적인 손실에서 회복되지 못했다.’

 

‘... 몇몇은[꿀락들은] 관리를 살해했고, 집단농장의 재산에 불을 질렀으며, 심지어 그들 자신의 수확물과 종자까지 불태웠다. 보다 많은 이들이 파종과 수확을 거부했는데, 이들은 아마도 당국이 양보를 하거나 어차피 그들을 먹여 살릴 것이라는 가정 아래 이런 행동을 하였다.’

그 여파로 1932-1933년에 우끄라이나 기근이 닥쳤다.... 독일에서는 나찌 출판물에 그리고 미국에서는 허스트 출판물에 등장한, 대부분 허구인 무시무시한 서술에는, 1921년 볼가 지방에서 촬영된 것으로 밝혀진 사진이 종종 예시된다. .... 일본에서의 전쟁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명백하게 야기된, 1932년 봄의 특별 징발로 인해 종자와 수확물의 급격한 감소에도 불구하고, “기근은 그 후반기에는 식량 부족으로 인한 결과가 아니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자신들의 농장에 파종을 거부하거나 자신들의 수확물을 불태운 꿀락들이었다.’39)

 

이러한 목격자의 진술이, 우끄라이나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이자, 1918년 뻬뜨리우라(Petliura) 하에서 수상을 지냈던 이삭 마제파(Issac Mazepa)가 쓴 1934년 기사에서 증명되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는 우끄라이나에서 우익이 1930-1932년 동안 농업 분야에서 광범위한 파괴행위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떠벌렸다.

 

처음에는, 꼴호즈들에 대한 방해공작이 자행되었고 공산당 관리들이나 그들의 대리자들이 살해당했으나, 나중에는 볼셰비끼의 파종과 수확 계획을 조직적으로 좌절시키는 데 목표를 두는 소극적인 저항 방식이 선호되었다.... 1932년의 대재앙은 쏘비에뜨 우끄라이나가 1921-1922년의 기근 이래로 직면해야 했던 가장 혹독한 재난이었다. 가을과 봄의 파종 운동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전체 농지에 파종이 안 되었고, 게다가 농작물을 수확할 때, ... 많은 지역에서 특히 남부지방에서 20%, 40%, 심지어 50%가 토지에 그대로 방치되었고, 그리고 전혀 수집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탈곡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40)

 

두 번째 기근의 이유는, 1930, 1931, 1932년에 우끄라이나 특정 지방에 닥친 가뭄 때문이었다. 하버드에서 우끄라이나의 우익 노선을 옹호하는 제임스 E. 메이스 교수에게는 그것은 쏘련 정권이 꾸며낸 이야기였다. 그러나 민족주의자들 스스로가 우끄라이나의 선구적인 역사가로서 묘사한 미하일로 흐루셰프스키(Mykhailo Hrushevsky), 그의 책 우크라이나의 역사에서 1932년 상황을 서술하면서, ‘혼란스러운 농업 상황에 또 다시 가뭄까지 겹쳤다.’라고 말했다.41) 하버드의 러시아 연구소에서 강의를 했던 니콜라스 리아스노프스키(Nicholas Riasnovsky) 교수는 1931년과 1932년에 가뭄이 있었다고 썼다. 내전기간 동안 볼셰비끼에 대항해 싸웠던 미카엘 플로린스키(Michael Florinsky) 교수는 이렇게 적었다. ‘19301931년의, 특히 우끄라이나에서 심각한 가뭄은 농업상태를 악화시켰고 기근에 가까운 환경을 만들었다.’42)

 

기근의 세 번째 요인은, 우끄라이나와 북 코카서스를 황폐화시킨 장티푸스 전염병이었다. 세계적 명성의 도시 계획가이자 캐나다 훈장을 받은 한스 블루멘펠드 박사(Dr. Hans Blumenfeld)는 기근 시기에 우끄라이나 마카예프카(Makayevka)에서 건축가로 일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기근으로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나에게는 그들의 숫자를 추정할 방법은 없다.... 아마도 1933년의 대부분의 죽음은 발진티푸스, 장티푸스, 이질 등의 전염병 때문이었다. 마카예프카에서 수인성 질병은 흔한 것이었다: 나는 티푸스 열병에 걸려 간신히 살아남았다.’43)

 

기근 동안 1500만 명의 말도 안 되는 수치 19322,500만 명의 우끄라이나인구 중 60% 를 제시했던 인물인 호슬리 그랜트(Horsley Grant)는 그와 동시에 이렇게 적었다. ‘발진티푸스 전염병의 절정은 기근과 일치했다....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죽음을 야기하는 더 큰 원인이 되었는지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44)

 

네 번째 기근의 원인은, 농업의 재편성 과정과, 경제적 및 사회적 관계에서의 근본적인 대격변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무질서였다: 빈곤한 농민들과 일부 관리들의 경험부족, 즉흥적이고 혼란스러운 지시들, 준비부족, 좌익 급진주의.

 

기근으로 인한 100만에서 200만의 사망자 수치는 확실히 중요하다. 이러한 인간의 죽음은 주로, 사회주의 기초 위에서 농업의 재조직과 현대화에 대한, 착취계급의 지독한 저항 때문이다. 그러나 부르주아계급은 이러한 죽음에 대한 책임을 스딸린과 사회주의에 지우려고 한다. 100만에서 200만이라는 수치는, 여덟 제국주의 국가들의 군사적 간섭과, 그들이 반동 무장 단체에 제공한 지원 때문에 본질적으로 초래된, 19211922년 기근에서 발생한 900만의 죽음과 또한 비교해 보아야 한다.

 

기근은 1933년 수확 이전 시기를 넘어서까지 지속되지는 않았다. 그 해 수확의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서 쏘비에뜨 정부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봄에 3,500백만 푸드(pood 러시아 무게 단위)의 종자, 식량 그리고 사료가 우끄라이나로 운송되었다. 꼴호즈의 조직화와 경영은 향상되었고 수 천 대의 추가적 트랙터, 복식수확기, 트럭이 수송되었다.

한스 블루멘펠드(Hans Blumenfeld), 그의 자서전에 우끄라이나 기근 동안의 그의 경험을 요약해서 적었다: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기근은 일어났다). 먼저, 내가 북 비야트카(Vyatka)에서 이전에 경험한 적이 있던, 덥고 건조한 1932년의 여름으로 인해 남쪽에 있는 반()건조 기후지역에서 수확이 실패했다. 둘째로, 집산화를 향한 투쟁이 농업을 혼란케 했다. 집산화는 관료의 지배를 따르는 질서정연한 과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빈농의 활동으로 이루지고 당에 의해 고무되었다. 빈농들은 꿀락들재산의 몰수는 열망했으나, 협동적인 경제조직을 구성하는 데에는 열의가 덜 했다. 1930년 무렵에 당은 이미 과도함을 저지하고 교정하기 위해 당 간부들을 파견했다.... 1930년 한 번 저항을 경험한 후 당은 1932년에 다시 돌진을 시작했다. 그 결과로서, 그 해에 쿨락 경제는 생산을 멈췄지만, 새로운 집단 경제는 아직 완전한 생산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불충분한 생산품은 가장 먼저 도시 공업과 군대로 보내졌다; 왜냐하면 농민들을 포함해서 연방 전체의 미래가 그들에게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은 거의 불가능했다....’

 

‘1933년에는 강수량이 적절했다. 당은 가장 우수한 간부들을 파견하여 협동농장의 조직화 업무를 도왔다. 그들은 성공했다; 1933년의 수확 이후, 상황은 철저하게, 그리고 놀라운 속도로 호전되었다. 나는 성공할지 여부가 불확실한, 무거운 수레를 언덕 위로 밀어 올리고 있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1933년 가을에, 우리는 정상에 올랐고 그때부터 우리는 가속을 붙여 전진할 수 있었다.’45)

 

한스 블루멘펠드는 기근이 또한 러시아의 볼가 하류지역과 북 코카서스 지방에 피해를 줬다고 강조하였다.

 

이것은 반우끄라이나 대학살이 히틀러의 반유대주의 대학살과 같은 종류라는 사실의 그릇됨을 증명한다. 그 당시 쏘련의 절망적인 인적자원 부족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누구든지, 쏘련의 지도부가 의도적으로 그러한 부족한 자원을 감소시키려 했다는 개념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할 것이다....’4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