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전쟁 1954-1962 - 생각하는 사람들의 식민지 항쟁 스투디움 총서 8
노서경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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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 전쟁 1954-1962 서평: 20세기에 일어난 반프랑스 민족해방전쟁을 생각하며

지난 2023년 10월 7일 팔레스타인의 무장저항조직인 하마스(Hamas)가 이스라엘을 상대로 반격을 가했다. 하마스가 로켓 미사일까지 발사하여 이스라엘에 반격을 가하자, 세계 언론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으로 관심을 돌리게 됐다. 2023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면서, 양측의 테러와 학살에 관한 기사들이 지속적으로 올라왔다.

물론 서구와 국내 언론들은 팔레스타인의 잔혹성만 부각시키기 바쁜 상황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10월 초 언론들은 하마스의 잔혹성을 얘기하며, “닭장 속에 아이를 가뒀다”는 뉴스나 “영유아를 집단 살해했다.”는 이른바 가짜뉴스들이 끊임없이 생산했다. 이러한 언론의 주장들을 찾아보면 실질적으로 신뢰할만한 증거는 없었다. 즉, 하마스가 아녀자 강간이나 영유아 참수 그리고 아이들을 오븐에 넣어 죽였다는 주장들은 허위사실이었다.

이와같이 이스라엘쪽에서 퍼뜨린 가짜뉴스들이 넘쳐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마스라는 조직이 테러를 아예 저지르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 중에는 테러와 학살이 양측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실이 있다. 이 테러와 학살 문제에서 극단의 정점을 찍고 있는 주체가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이다.

현재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라파를 포함하여 팔레스타인 전역을 공동묘지로 만들고 있다. 사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래로 이스라엘의 학살과 테러는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왔다.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시기 미국이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위선적 주장들에 따라 우크라이나를 동정했지만, 팔레스타인의 참상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그것과는 비교불가 수준이었다.

하마스를 포함하여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의 학살과 폭력에 맞서 저항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스라엘로부터 빼앗긴 자신들의 주권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다. 현재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과 비슷한 역사가 20세기에도 있었다. 그게 바로 알제리다. 알제리는 1830년부터 1962년까지 대략 132년 동안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를 경험했다.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는 너무나도 가혹했다. 1954년 기준 알제리의 남성 85% 여성의 95%가 제대로된 교육혜택도 못받았다.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수많은 알제리인을 프랑스군에 편입시켰지만, 이들이 원했던 독립을 절대로 허용해주지 않았다. 이들이 독립을 요구하자 최신식 군사력을 동원하여 학살을 벌이기까지 했다.

알제리가 독립전쟁을 전개하게 된 것은 1954년에 이르러서였다. 1954년 프랑스는 베트남의 디엔비엔푸에서 혁명적 농민 군대에게 패전했고, 100년간의 식민지 지배를 포기하게 됐다. 즉, 알제리의 독립운동 세력은 디엔비엔푸 전투와 프랑스의 패전을 보면서 이에 깊은 영감을 얻었고, 1954년 11월 독립전쟁을 게시하게 된 것이다.

알제리의 독립전쟁은 단순히 군사적 측면에서의 전투만 전개된 전쟁은 아니었다. 알제리의 독립운동가들은 대중적인 시위도 조직했다. 파업과 봉기가 알제나 오랑 콘스탄틴 등 알제리의 주요도시에서 일어났다. 뿐만아니라 이들의 독립운동은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는 프랑스의 영토 내에서도 일어났으며, 좌우연합과 더불어 국제적 지지확보에도 충실했다. 아마 이와 같은 지점이 알제리 독립전쟁만이 가진 고유한 특정일지도 모르겠다.

알제리 독립전쟁에서 프랑스가 보인 모습은 너무나도 잔혹하고 추악했다. 전쟁 시기 독립운동을 주도한 세력들도 반대파나 친불파 그리고 프랑스인 거주지를 대상으로 학살과 테러를 저질렀고, 멜루자 학살이나 오랑 학살 등 다수의 사례가 존재하지만, 프랑스가 저지른 학살과 테러가 훨씬 더 많았다. 알제리 독립전쟁에서 프랑스군 수만 명이 전사하고, 알제리인이 30~100만 명이 사망했는데, 대다수의 알제리인 사망자는 프랑스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아도 알제리 독립전쟁은 현재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과 분명한 유사점이 있다.

이번에 읽은 노서경의 <알제리 전쟁 1954-1962 - 생각하는 사람들의 식민지 항쟁>은 국내에 출판된 유일한 알제리 독립전쟁 관련 책일 것이다. 책의 저자는 알제리인들의 저항과 정치활동, 프랑스의 지배 방식, 알제리 독립운동가 지식인들의 활동과 프랑스 지식인들의 활동, 그리고 이들의 출판과 프랑스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다루며 분석했다. 책 제목에 ‘전쟁‘이라는 단어가 붙다보니 일부 독자들은 전쟁사적인 측면에 기대할 수 있겠으나, 사실 이 책은 전쟁사를 다루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 얘기하자면, 당연히 알제리 항쟁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알제리에 주둔했던 프랑스군의 규모는 40만 명이 넘었고,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 또한 이들에 맞서 사막과 마을에서 게릴라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프랑스는 이들과의 전쟁에서 탱크, 장갑차, 전투기, 군함 그리고 전투 헬기도 투입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군사적 측면의 연구가 필요한 것도 분명하다.

이 책은 이런 부분을 다루지 않지만, 읽을 가치가 매우 높은 책이다. 특히나 현재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서 벌어지는 일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1966년에 개봉한 영화 ‘알제리 전투‘도 꼭 보길 추천하는 명작이다. 이 영화보다 알제리 전쟁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공부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적극 권한다.

마지막으로 프랑스가 알제리인들에게 자행한 최악의 학살인 세티프 겔마 학살에 관해 언급하고자 한다.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연합국에게 항복하던 시점에 알제리인들은 프랑스에게 자치와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프랑스는 이를 탱크와 전투기 그리고 군함을 동원하여 진압했다. 프랑스는 1달간의 진압과정 동안 세티프와 겔마에서 무려 2~3만 명의 알제리 민간인을 학살했다.

학살의 규모로 보았을 때, 1956년 헝가리 봉기나 1968년 프라하의 봄 그리고 1989년 천안문 시위 진압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자를 합친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인명이 프랑스의 알제리 무혈진압으로 생명을 잃었다. 그러나 이런 학살은 세계사 교과서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글쓴이른 이런 점에서 한국과 서방의 역사 기억과 세계사 교육이 과연 공정한지 의문을 가지고 있다.

결국 이런 점에서도 우리의 역사교육은 지극히 서구 제국주의 중심적으로 사고하고 또 가르치는 것이 아닐까? 앞으로 세계가 준비해야할 다극화 체제에선 이런 서구 중심주의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며, 이런 문제의식을 남긴채 서평을 마무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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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동유럽 사회주의권이 몰락하자, 동유럽과 러시아 등에서는 파시스트 세력들이 힘을 얻기도 했다. 통일독일의 동부지역에서는 네오나치 세력들이 등장했고, 헝가리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협력한 호르티 미클라시 옹호론자들이 등장했다. 해체된 유고슬라비아 연방 국가들에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로 악명을 떨쳤던 우스타샤 옹호론자들이 등장했고, 러시아에서는 나치에 협력한 변절자 블라소프를 옹호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또한, 우크라이나에서도 나치에 협력한 스테판 반데라를 옹호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사실 동유럽 및 소련 사회주의권 붕괴는 각국의 자본주의화만 촉진시킨 것이 아니었다. 민주주의라는 이름 하에 파시스트들을 옹호하는 움직임과 정치적 폭력화 및 테러도 가속화했다. 마찬가지로 1989년 차우셰스쿠가 군부 쿠데타로 축출된 이후 루마니아도 자본주의화 됐다. 그 과정에서 루마니아 또한 파시즘 운동이 다시 나타났다. 루마니아의 파시스트들이 극도로 미화한 한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이온 안토네스쿠(Ion Antonescu)다.


이온 안토네스쿠는 1882년 루마니아 피테슈티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랑스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던 그는 이후 장교가 되었고 1907년에 루마니아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를 진압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며, 전후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에 대한 군사적 간섭에도 참가하여 수도 부다페스트를 함락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후 안토네스쿠는 승승장구하여 1933년 루마니아의 육군참모총장 자리까지 오르게 됐으며, 1937년에는 루마니아의 국방장관 자리까지 올랐다. 당시 루마니아는 카를 2세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안토네스쿠는 그들과 갈등하다 국가전복 혐의로 투옥되었다.


안토네스쿠는 이후 석방됐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중이던 1940년 9월 군사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사실 안토네스쿠는 1930년대부터 친히틀러·친파시즘 성향을 보였다. 안토네스쿠는 1938년도 헌법을 폐지하고 입법권과 행정권을 자신의 손에 넣고 히틀러를 따라 자신을 총통이라 칭했다. 안토네스쿠는 1940 9월에서 10월 사이 독일군의 루마니아 주둔을 승인했으며, 1941년 2월에는 독일·이탈리아·일본이 중심축이 된 추축국 동맹에 가입했다. 1941년 6월 22일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자, 안토네스쿠는 그 다음날 소련에 대한 침략전쟁에 동참했다.


물론 루마니아의 군대는 소련군에게 상대가 안됐다. 1942년부터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은 압도적인 전력으로 루마니아군을 격파했다. 루마니아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10~20만 명이나 되는 병력을 잃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에도 루마니아는 지속적으로 독일군 편에 섰다. 1944년 6월 15일 기준으로 보아도 최소 6만 명 이상의 독일군이 루마니아에 있었다. 안토네스쿠는 1944년 8월 15일 히틀러와의 회담에서 독일군과 운명을 같이 할 것을 맹세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치 독일이 패할 것을 안 미하이 1세는 진영을 바꿔 8월 23일 궁정쿠데타를 일으켜 친추축국 세력을 숙청하고 나치 독일에 대한 단교를 선언했다. 비슷한 시기 지하로 숨었던 루마니아 내의 공산주의자들도 봉기를 일으켰고, 결과적으로 이들을 지원하는 소련군은 루마니아를 해방했다. 이로써 루마니아의 파시즘 체제는 무너졌다. 안토네스쿠는 총리직에서 해임됐으며, 그는 소련에 의해 체포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안토네스쿠는 소련으로 보내졌으며, 유대인 학살과 독일 협력에 대한 죄를 물어 1946년 6월 1일 총살됐다. 


안토네스쿠가 통치하던 시절 루마니아에서도 홀로코스트가 자행됐다. 28만 명에서 4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고, 베사라비아와 부코비나 그리고 트란스니스트리아 등에서 학살이 자행됐다. 물론 홀로코스트의 경우 폴란드(300만 명)나, 우크라이나(85~160만 명), 벨라루스(55~80만 명), 헝가리(56만 명) 등이 희생자 숫자가 더 높은 수치이기는 하나, 그 당시 루마니아에 살던 유대인 인구가 75만 명 정도였던 것을 생각한다면 안토네스쿠의 홀로코스트 행위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루마니아 내에서 일어난 유대인 학살은 우크라이나와 마찬가지로 독일군마저도 충격 받았을 정도의 잔혹성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1941년 10월 23일 지뢰받에서 루마니아군 본부 중대가 몰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것이 유대인 학살의 신호탄이었다. 루마니아군 본부 중대가 몰살당한 다음날 루마니아군은 네 개의 커다란 창고에 유대인들을 쑤셔넣은 다음 기름을 끼얹고 불을 질러 2만 명 이상의 유대인을 불태워 학살했다. 이렇게 해서 나치 독일은 안토네스쿠가 이끄는 루마니아 군대에게 베사라비아 지역을 맡겨서 홀로코스트를 자행하게 했다. 심지어 이 루마니아 군대는 구타와 고문 강간도 일삼았으며, 유대인 소녀들을 뽑아다가 그들의 성기를 잘라낸 다음 난교 파티를 벌였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안토네스쿠 치하에서 일어난 루마니아의 홀로코스트는 스테판 반데라의 OUN이 저지른 것과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즉, 그런 극악무도한 통치자이자 학살자인 이온 안토네스쿠가 냉전 이후 루마니아에서 찬양하는 이들이 나타난 것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봐야할까? 우크라이나에서 스테판 반데라가 찬양받고 있는 현상은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벌어지는 파시즘의 흐름을 너무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온 안토네스쿠에 대해 쓰며 이와 같은 생각을 많이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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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민주화 운동 시기 NL계열 운동권 사이에서 북한을 알기 위해 읽었던 책이 있다. 그 책이 바로 독일인 작가 루이제 린저(Luise Rinser)가 쓴 또 하나의 祖國 - 루이제 린저의 북한방문기라는 책이다. 실제로 루이제 린저는 박정희 정권 시절 서독에서 민주화 운동을 진행하던 윤이상이라는 음악가와 두터운 친분이 있었고, 민전이 전개한 민주화 운동에 관여하기도 했었다. 1980년대 전두환 군사정권 시기에도 린저는 남한의 민주화 운동에 깊은 관심과 지지를 보였다. 그와 더불어 린저는 1980년부터 무려 10여 차례나 북한을 방문했고, 당시 북한의 지도자이던 김일성과도 두터운 친분관계를 유지했다.

 

나 또한 이 책을 어렵게 인터넷을 통해 구매했고, 완독은 아니어도 몇몇 부분을 조금씩 읽어봤다. 가장 흥미롭게 다가왔던 내용은 북한의 교화소 관련 내용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의 인권유린으로 드는 소재 중 하나가 이른바 정치범 수용소 관련한 내용이다. 이른바 미국이나 한국의 극우들이 생각하고 묘사하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의 모습은 과거 솔제니친이 묘사한 스탈린 시절 소련의 굴라그나 빅터 프랭클이 묘사한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 같은 곳이다. 이러한 내러티브는 이른바 서방 진영에서 영향력이 워낙 강해서 그런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박연미에 의해서 증언되고 있다.

 

, 서구에서 그런 내러티브를 가지고 보는 북한의 수용소에 대해 창 살 없는 교화소라고 책에 대놓고 묘사했으니 나로서는 상당히 신선했다. 물론 앞서 언급한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묘사는 미국이나 제1세계의 프로파간다라 보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나 인권유린을 묘사하는 내러티브가 과거 냉전시기 미국이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나 산디니스타가 통치하는 니카라과의 모습을 악마화할 때 사용하는 내러티브와 너무나도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 이면에 친미국가들이 자행된 인권 유린들, 예를 들어 피노체트 하의 칠레의 강제 수용소 등은 항상 외면하게 만든다는 문제점도 분명히 있다. 그런 점에서 글쓴이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를 운운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본다.

 

주제를 다시 루이제 린저로 돌리자면, 그녀가 남긴 북한 관련 기록은 여러모로 흥미롭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교화소 문제도 그렇고, 그녀가 남긴 기록은 엄밀히 말해 그녀가 북한에서 직접 보고 겪은 것을 얘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긴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린저의 기록이 중요한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북한을 무려 10차례나 방문하여 자신이 본 것을 기록으로 상세하게 남겼기 때문이다. 루이제 린저가 본 북한의 이미지는 이른바 밝은이라는 수식어가 들어간 독재국가다. 아래의 린저의 발언을 통해 보도록 하자.

 

저는 북한이 어두운 독재국가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밝은 독재라고 생각합니다. 나에게는 김일성 주석이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또 모든 것을 감독하는, 그래서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하며 모든 생활양식을 규정하는 가장이자 어버이로 여겨집니다.”

 

, 린저가 보기에 북한 사회는 분명 한 지도자가 영구적으로 통치하는 독재 국가이지만, 그녀가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소련의 스탈린 체제나 그런 체제를 이식받은 동유럽 사회가 아니었던 것이다. 린저가 보기에 북한은 서구 보다 가난하더라도 인민들이 어둡지 않고 밝고 행복하게 사는 사회였다. 그리고 그녀는 북한에서 맛본 과일과 아채를 순수한 그대로의 맛, 기름지고 무해한 북한의 토양에서 우러나온 맛이라 표현했다. 그리고 북한의 공기게 맑다고 얘기했다. 린저는 북한을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는 도시들은 녹지대로 채워지고, 화학공장들은 주거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현대적인 정화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 린저는 북한 사회가 수질오염이나 대기오염이 서구보다 훨씬 덜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린저가 이와 같은 관점을 가진 것은 그녀가 서독의 진보정당인 녹색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던 그녀의 경험에 기초한 것이다. 아무래도 1960년대 68운동의 흐름 속에서 린저는 친환경주의에 상당히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린저가 주목한 밝은 독재라는 개념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린저가 북한에 대해 독재라고 분석한 두 가지 개념은 다음과 같이 있다. 하나는 개인숭배를 포함해서 북한의 모든 권위적이고 통제적인 면모를 유교적 전통 때문이라고 봤다. , ‘어버이 김일성 수령이라는 식으로 지도자를 어버이처럼 존경하는 것을 전통적인 유교의 산물이라 본 것이다.

 

두 번째는 북한이 평화를 원하지만 외부로부터의 위협, , 미국 제국주의의 군사적 무력으로 위협을 받고 있다고 린저는 분석했다. 미국은 핵무력을 포함한 온갖 군사적 무력으로 북한을 압박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사적인 자유가 제한받는 측면이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두 가지 지점을 통해 린저는 북한체제가 개성이 용인되지 않은 독재국가라 봤다. 그러나 린저가 보기에 북한 사회는 비록 전체주의적 면모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강요, 구금, 추방이 보이지 않는 사회였다. 또한, 린저는 권력자에 대한 국민의 불안과 국민에 대한 권력자의 불안이 만연하는 현상도 북한에서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걸 확인하기 위핸 린저는 북한의 교화소를 직접 방문했고, 거기서 담장, 감시탑, 가시철조망, 쇠창살 같은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린저는 이에 대해 유스호스텔 같은 곳이었다고 묘사하기까지 했다.

 

사실 북한의 수용소는 교화소가 있고, 정치범 관리소가 따로 있다. 교화소는 주로 재교육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북한 측의 폭력이 전혀 없다고 하면 빈말이겠으나, 북한의 방침 자체가 주로 교화 및 갱생에 맞춰진 것은 사실이다. 물론 시설의 열악함이나 그 내부에서의 폭력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제1세계가 묘사하는 이른바 아우슈비츠와 같은 정치범 수용소식 묘사는 거짓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글쓴이의 경우 실제로 교화소에 갔다 온 한 탈북자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1990년대 교화소의 경우 구타와 같은 폭력이 난무했다고 한다. 그 사람의 경우 1~2개월 교화소 생활을 하다가 탈북을 했는데, 글쓴이는 이 부분이 아주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마져도 일각에서 떠드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어쩌구는 허구라고 말했으니, 글쓴이는 신동혁이가 묘사한 정치범 수용소 어쩌구는 거짓이라고 본다.

 

물론 이와 같은 증언과는 상충되는 또 다른 근거도 있다. 미국 시민 매튜 토드 밀러라는 사람은 20144월에 그 나라에 적대적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6년의 노동형이 선고되어, 북한 교화소에서 212일간 감옥살이를 했다. 석방된 이후 밀러는 뜻밖의 좋은 대우에 자신도 놀랐다고 얘기했으며, 감옥에서 자신의 아이패드와 아이폰으로 음악을 듣도록 허용했다고 증언하기 까지 했다. 또한 밀러는 북한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한 자신의 공개 사과가 강요된 것이었다는 서방의 보도들에 나타나는 광범위한 추정을 부인하고 자신은 전적으로 진실했다고 말했다. 석방 전후 이뤄진 인터뷰에서 밀러는 노동교화소에서의 상황이 어떠냐는 질문에 대부분 땅을 파고, 돌을 옮기고, 잡초를 제거하는 등 농사일을 한다.”라면서, 구타나 폭행 같은 것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물론 김일성 시대와 김정은 시대의 교화소 시설은 분명 다를 테지만, 중요한 것은 기존의 반북 내러티브만으로 북한의 처벌과 교화를 볼 수만은 없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교화소에 들어가 교화가 되어 나오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1세계가 퍼뜨린 북한의 수용소 내러티브는 신중한 검증이 필요한 주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교화소의 실상이 어떻든 간에 루이제 린저가 본 북한의 모습은 독재국가이지만 법과 물리력에 의한 강제로 통제 및 검열하는 국가는 아니었다. , 개개인에게 내면화된 자기통제와 자기검열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루이제 린저가 북한을 한편으로는 부정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긍정적으로 또는 자본주의 보다 나은 점이 있는 사회로 본 데에는 당시 68혁명의 영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구에서 시작된 68운동은 신세대들로 하여금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다시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서구 좌파들은 소련이나 동유럽 체제는 부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당시 체게바라나 호찌민 그리고 마오쩌둥 등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린저 또한 그러한 인식 하에서 북한과 김일성을 바라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즉 그런 점에서 북한에 대한 린저의 인식과 사유는 긍정과 오류를 떠나 서구 지성사의 흐름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김성보, 루이제 린저의 동양 호기심과 밝은 독재국가 북한, 그리고 윤이상, 동방학지202,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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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에서 파시즘을 무찌르는 데 가장 큰 공로를 세운 나라는 어디일까? 바로 소련이었다. 소련은 이 전쟁에서 무려 2,700만 명이나 사망했고, 2,500만 명에 달하는 소련 사람들이 집을 잃었으며, 1,700여개의 도시와 소읍, 7만 이상의 촌락, 3만 2,000개 이상의 공장, 65,000km의 철도, 약 10만의 콜호즈와 소호즈가 파괴 또는 소실됐다. 즉, 히틀러와 나치가 일으킨 파멸적인 전쟁으로 소련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살육과 인명살상 그리고 파괴와 초토화를 경험했다. 사망한 소련 사람 2,700만 명 중 1,000만 명은 군인이었고, 1,700만 명은 민간인이었다. 이와 같은 민간인 사망자 수치는 나치가 소련에서 저지른 학살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알 수 있는 역사적 수치다. 실제로 홀로코스트 사망자 대다수는 소련과 폴란드 측 유대인이었다. 그런 점에서 나치가 소련에서 벌인 전쟁은 파괴와 대량학살 그 자체였다.


나치는 이와 같은 학살과 파괴를 벌였지만,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나치의 주력부대를 전면적으로 상대했던 나라가 소련이었기 때문이다. 1941년에서 1942년 기준으로 보자면, 당시 동부전선에 투입된 독일군 사단이 200~300개 사단이 넘었지만,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군이 상대한 독일군은 4~5개 사단 정도였다. 영미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통하여 제2전선을 연 것이 1944년 6월 5일이었음을 생각해보자면, 사실상 소련 혼자서 독일을 상대하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스크바 공방전부터 베를린 공방전까지 스탈린이 지휘한 소련군은 600개 이상의 적군 사단(독일군은 물론이고, 이탈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핀란드, 크로아티아군을 포함해)을 괴멸시켰다. 특히 독일의 경우 동부전선에서 300만 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1,000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독일 총 전쟁 사상자의 75%), 히틀러의 추축 동맹국들은 100만 명을 잃었다. 붉은 군대는 전쟁 기간 동안 4만 8,000대의 적군 탱크, 16만 7,000문의 대포, 7만 7,000대의 항공기를 파괴했다. 또한, 제3제국의 심장에 승리의 깃발을 나부끼게 한 것도 소련이었다. 오늘은 대조국전쟁 승전 기념일을 맞이하여 베를린 공방전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소련의 붉은 군대가 베를린으로 진격을 재개한 것은 1945년 1월에 이르러서였다. 소련군의 이 대공세는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의 아르덴 대공세가 실패로 마무리될 시점에 개시됐다. 이 작전이 바로 비스와-오데르 작전이었는데, 소련의 붉은 군대는 폴란드를 휩쓸고 동프로이센과 동부 독일로 진격했다. 1945년 2월 공세가 소강상태에 이르렀을 때 붉은 군대의 선발 부대들은 독일 수도에서 80km 지점까지 도달했다. 당시 작전에 참가한 소련군은 220만 명의 병력에, 4,500대의 탱크, 5,000대의 항공기를 동원했다. 붉은 군대는 하루에 25~30km 속도로 진격하면서 총 14만 7,000명의 독일군을 포로로 붙잡았으며, 50개 이상의 독일군 사단을 파괴하거나 거의 파괴할 수 있었다. 비스와-오데르 작전은 2월 말에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크림반도에서는 얄타 회담이 진행됐다.


그해 3월 소련의 붉은 군대가 독일군을 분쇄하면서 동프로이센과 포메른으로 진격했는데, 소련군의 본격적인 독일 본토 진격은 4월 16일에 개시됐다. 1945년 4월 16일 게오르기 주코프가 지휘하는 제1벨라루스 전선군은 베를린 동쪽에 있는 젤로 고지 공격을 시도했다. 압도적인 수로 밀어붙였던 소련군은 독일군의 기갑부대에 의해 큰 피해를 보긴했지만, 그 다음날인 17일 제1벨라루스 전선군은 젤로 고지를 우회하여 다른 전선에서 돌파에 성공했다. 1945년 4월 20일 히틀러의 56번째 생일을 맞이하던 날, 소련군의 전방 부대가 베를린의 동쪽 교외에 이르렀으며, 소규모 공격 집단을 이용해서 방어자들을 한 구역 한 구역 뒤로 밀어 붙였다. 이때부터 소련군은 베를린을 대상으로 포격과 폭격을 가할 수 있게 됐다. 


베를린 공방전을 통틀어 공세에 가담한 소련군은 총 250만 명이나 됐다. 이중 206만 명이 전투병력이었고, 15만 5,900명이 소련과 함께 진격하는 폴란드군이었다. 소련은 탱크와 자주포 6,250대, 화포와 박격포 41,600문, 항공기 7,500대를 공방전에 투입했다. 반면에 소련에 맞서는 독일군은 1,519대의 탱크와 돌격포, 9,303문의 화포와 박격포로 무장했으며, 병력은 최소 75만 명에서 100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4월 19~20일 사이 소련의 붉은 군대는 95km를 진격했고, 다음 날 초센 지역에 있던 독일 총사령부를 점령하여 독일군에게 남아 있던 작전 수행 능력을 제거해버렸으며, 베를린 남쪽 교외에서 돌파에 성공했다.


4월 22일 해가 질 무렵, 중부 지구에서는 소련군 선견대가 독일 수도의 남부에서 슈프레 강에 도당해, 교두보를 확보했다. 24일에는 추이코프가 지휘하는 소련군이 리발코가 이끄는 병력과 함께 베를린 남동부에서 결합하여 베를린 남동쪽 베스코프 부근의 독일군을 포위했다. 25일 소련군은 미군과 연결하여 만나게 되었고, 이 만남은 역사적인 만남이 됐다. 소련군과 미군의 만남이 있는 동안 로코솝스키의 제2벨라루스 전순군은 오데르 서쪽 강을 건너 서안의 독일군 방어진을 돌파했고, 베를린 포위를 더욱 좁혔다. 히틀러는 슈타이너군집단이 베를린을 구하러 올 것이라는 망상에 있었지만, 결국 완전한 패배임을 인정하게 됐다.


주코프가 지휘하는 붉은 군대는 4월 26일 공식적으로 베를린 돌격을 개시했고, 베를린 시가지에서 소련군과 독일군 사이의 교전이 벌어졌다. 과거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그랬던 것처럼 민간인들이 엉켜있는 곳에서 양측의 총격전과 포 사격이 벌어졌다. 1945년 4월 30일에는 소련의 붉은 군대가 독일군 수비대를 4개로 나누어 고립시켜 버렸고, 각개 격파에 들어갔다. 또한 소련군은 제국의 심장의 상징과도 같은 국회의사당을 점거하여 그곳에 낫과 망치가 들어간 붉은 깃발을 게양했다. 같은 날 히틀러는 부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권총자살을 했다. 그러나 베를린 공방전은 종결되기 까지 며칠이 더 걸렸다. 베를린 공방전은 결국 1945년 5월 8~9일 나치 독일이 연합군에게 항복을 하면서 소련의 승리로 마무리 됐다.


베를린 공방전 기간 동안 소련군은 독일군 잔존 병력을 박살냈고, 10만 명 이상이 독일군이 전사했으며, 소련군은 48만 명이나 되는 독일군을 포로로 붙잡았다. 소련 측의 피해도 컸는데, 소련군은 전사자 8만 명을 포함하여 36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속출했기 때문이다. 탱크도 거의 2,000대나 파괴됐고, 항공기도 900대나 격추됐다. 폴란드군의 경우 2,800명 정도 전사했다고 한다. 민간인 피해도 제법 컸다. 최소 2만 명에서 12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베를린 공방전 과정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가장 희생이 컸던 전투는 도시보다는 베를린으로 가는 진입로에서 벌어졌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시가전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때 보다 훨씬 짧게 진행됐다.


베를린 공방전 당시 소련군은 분명히 파시즘을 무찔렀으며,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런 점에서 소련의 공로가 매우 크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민간인 피해가 발생한 것도 사실이었다. 특히 소련군에 의한 전시 강간은 전쟁 이후 냉전을 통틀어 서방 진영이 가장 많은 공격과 비판을 가한 주제이기도 하다. 서구의 학자들은 이 시기 소련군이 강간한 독일 여성이 200만 명이라 추산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수치가 과장되었다는 반박도 있다. 사실 글쓴이도 이 부분에 대한 체계적인 반론을 글로 쓴 적이 있다. 


자세한 것은 아래 링크를 참조하면 좋다.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pfbid02e2rspvSVoWpLw9oFtwKWYWrkeDqD2xGb7sgFieGY54vzJ4TYPEqkWALBwFmUSQwfl&id=100001070470657


앞서 공유한 글을 토대로 얘기하자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의 전시강간 문제는 숫자가 심각하게 과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베를린 공방전에서 승리한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 부상하게 됐다. 그러나 히틀러 정권의 붕괴가 제2차 세계대전의 끝은 아니었다. 소련군이 서방 연합국과 독일 본토에서 만나고, 제국의 심장에 붉은 깃발을 꽂으며 승리를 쟁취하고 있을 때, 지구 반대편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일본의 오키나와 섬을 두고 미국과 일본 사이의 전투가 벌어졌고, 6월이 되어서야 미군의 승리로 전투가 끝났다. 미 공군은 일본을 지속적으로 폭격했지만,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다. 


히틀러가 몰락한 이후 소련 또한 과거 루스벨트 대통령이 원했던 소련의 대일참전을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사망했고, 그의 후임자 해리 트루먼이 미국의 대통령이었다. 트루먼은 극성 반공주의자였고 소련을 경계했다. 사실 트루먼이 일본이 저항의지가 없음을 알았음에도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은 소련을 위협하기 위해서였다.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미국은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미국이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던 그 날 소련은 만주에서도 진격을 게시했고, 불과 열흘 남짓한 사이에 만주와 남사할린 그리고 한반도에서 일본군을 항복시켰으며, 70만 병력을 자랑하던 관동군을 섬멸했다. 수만 명의 일본군이 전사하고 60만 명 이상이 포로로 붙잡혔다고 한다. 


따라서 소련은 히틀러를 몰아낸 공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본 제국주의를 패망시킨 공로도 분명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진행되면서 서방 진영에 의해 부정당했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참고문헌


데이비드 M. 글랜츠·조너선 M. 하우스, 권도승 외 옮김, 『독소전쟁사 1941~1945 - 붉은군대는 어떻게 히틀러를 막았는가』, 열린책들, 2007.

로버트 서비스, 윤길순 옮김, 『스탈린, 강철 권력』, 교양인, 2007.

리처드 오버리, 류한수 옮김,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지식의풍경, 2003.

오키 다케시, 『독소전쟁 - 모든 것을 파멸시킨 2차 세계대전 최대의 전투』, 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2021.

제프리 로버츠, 김남섭 옮김, 『스탈린의 전쟁 - 제2차 세계대전에서 냉전까지, 스탈린은 소련을 어떻게 이끌었나』, 열린책들, 2022.


https://blog.naver.com/seed_0815/223441519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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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24-05-09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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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4-05-11 2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헤밍웨이의 ˝자유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소련 붉은 군대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라는 말에서 보듯, 나치독일과 일제를 몰아내어 파시즘과 군국주의에 맞서 인류를 지켜낸 소련 붉은 군대의 희생은 세계의 많은 이들에게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인도차이나전쟁과 프랑스 식민주의 이념
이재원 지음 / 홍문각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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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유지하려 했던 나라들이 있었다. 바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이 그러했다. 이들은 19세기 서구 제국주의 열강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중동과 태평양 일대를 식민지 지배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이후 미국과 소련이라는 강대국이 등장했고, 과거 서구 제국주의 열강은 탈식민화라는 흐름 속에서 점차 힘을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 나라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였는데, 프랑스의 경우 이 과정에서 대규모의 전쟁을 치렀다.

 

대표적으로 프랑스는 1954년부터 1962년까지 알제리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며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유지하고자 했다. 프랑스와 알제리의 역사 문제는 현재까지도 양국의 국제적 이슈이기도 하다. 그에 반해 대규모 전쟁을 치렀음에도 프랑스 사람들이 관심을 크게 가지지 못한 전쟁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1946년부터 1954년까지 대략 8년간 베트남과 라오스 그리고 캄보디아에서 프랑스가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해 벌인 전쟁이었다. 19세기 중반부터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베트남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호찌민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전개됐다. 이들은 인도차이나를 점령한 프랑스와 일본에 맞서 싸웠으며, 19458월 베트남 전역을 혁명을 통해 장악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서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유지하고자 했고,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194611월 프랑스가 하이퐁을 공습하면서 베트민과 프랑스 사이의 전면적인 무력충돌이 발상했는데, 이것이 바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서막이었다.

 

프랑스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수십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고, 최신식 탱크와 전투기, 군함, 대포 등을 투입했다. 누가 봐도 프랑스의 군대가 베트민보다 훨씬 더 강해보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전쟁의 승자는 프랑스가 아니었다. 바로 베트남이었다. 호찌민이 지휘하는 베트민은 베트남인들의 대중적인지지 속에서 해방구 및 세력을 확장했고, 1950년부터는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아 군대의 정규군화에도 성공했으며, 베트남 최고의 명장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의 군대는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를 통해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는 세계사적으로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었다. 비록 프랑스의 군대가 베트민보다 숫자가 적었지만, 프랑스의 최정예 부대가 투입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군대 대다수가 베트민의 포로로 붙잡혔다. 프랑스는 이 전투에서 2,000명 이상이 전사하고, 6,000명 이상이 부상당했으며, 11,000명 이상이 베트민의 포로가 됐다. 베트남은 이 전투의 승리를 통해 100년간의 프랑스 식민지 지배를 종결시켰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었다. 프랑스에게 있어 이 전쟁은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유지하기 위해 식민지 지배를 지속하기 위한 전쟁이었지만, 베트남에게 있어 이 전쟁은 자신들의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호찌민이 지휘하는 베트민은 프랑스 제국주의의 최신식 군대와 무기를 궁극적으로 격퇴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전쟁은 세계사적으로 그리고 군사사적인 측면에서도 엄청난 쾌거이며 업적이다. 이와 같은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다룬 서적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한국의 경우 더더욱 그러하다. 미국의 경우 주로 자신들이 치른 베트남 전쟁에 집중을 하다 보니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해선 전자보다 연구를 덜 하는 편인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이재원 교수가 최근에 출간한 저서 인도차이나 전쟁과 프랑스 식민주의 이념을 완독한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었다.

 

이 책의 시작은 베트남 독립운동에 대한 설명과 19453월 일본이 일으킨 쿠데타부터다. 책은 프랑스의 식민주의에 대해 차분하게 분석하며, 이후 냉전의 열강이 되는 미국과 소련의 정책을 다룬다. 책이 가장 중심적으로 보는 것은 당시 프랑스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어떻게 인식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책은 전쟁 시기 여론의 변화를 살피기도 하며, 수많은 프랑스 측 사료를 통해 이를 보여주고자 한다. 책은 프랑스 식민주의 이념에 대한 찬성과 더불어 이에 맞서는 목소리도 보여준다. 프랑스 식민주의 이념에 반대한 세력으로 주로 언급되는 세력 중 하나가 프랑스 공산당이다.

 

글쓴이는 책에서 프랑스 공산당의 존재에 대해 많이 주목해서 읽었던 것 같다. 물론 프랑스 공산당이 처음부터 프랑스 식민주의에 전면적인 반대 목소리를 냈던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제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시점에는 프랑스 공산당의 경우 프랑스 연합이라는 틀 안에서 베트남의 주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46년 전쟁이 발발한 이후부터는 전면적으로 프랑스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에 전면적으로 반대하는 노선으로 전환했다. 사실 프랑스 공산당이 초기에 중립적인 노선을 보인 것은 어디까지나 인민전선 노선에 따른 것이었다. , 인민전선 틀 안에서 이들과의 연합 내지는 연대를 통해 베트남의 주권을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프랑스는 당시 이탈리아와 더불어 공산당의 지지가 가장 강력했던 서유럽 국가였다. 그러나 냉전이 격화되면서 이들 또한 정치 내에서 축출되기에 이르렀고, 프랑스 공산당을 포함한 좌파들은 제국주의에 맞서 저항하는 노선을 선택하게 된 것이었다.

 

프랑스 공산당은 전쟁 기간을 통틀어 반전운동을 주도했다. 특히나 부두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은 파병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고, 시위를 벌인 노조나 주체들을 보면 프랑스 공산당과 연관이 있는 이들이 제법 많았다. 프랑스 공산당이 가장 광범위하게 반전운동을 주도한 사례는 아마 앙리 마르탱 석방운동일 것이다. 앙리 마르탱은 프랑스 공산당원 출신 군인이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반대하여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고, 이후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해 인도차이나로 갔다. 그러나 인도차이나에 가서 프랑스 제국주의의 실체를 깨닫고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단순히 전쟁에 반대하는 전단지를 뿌렸다는 이유로 재판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는데, 그에 대한 석방운동이 프랑스 공산당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놀랍게도 프랑스 공산당은 이 사건을 통해 대중적이고 광범위한 반전운동 반식민주의 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고, 공산주의자라고 보기에는 약간 애매모호한 장 폴 사르트르 같은 프랑스 지식인들의 참여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으며, 사람들에게 거부감 없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시, 음악, 만화, 연극 등과 같은 매개체를 통해 프랑스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자신들의 입장과 논지를 전파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보자면, 프랑스 공산당은 이 전쟁에 반대하는 대중적인 목소리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도 프랑스가 저지른 짓은 매우 잔혹하고도 추악했다. 베트남 민중의 절대다수는 호찌민과 베트민을 압도적으로 지지했고, 프랑스는 베트남인들의 무장저항에 시달렸다. 프랑스 군대는 베트민이 은거한 마을로 의심되는 곳을 습격하여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했으며, 아녀자들을 강간하는 전쟁범죄를 적잖게 자행했다. 심지어 프랑스는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네이팜탄을 민가에 투하했다. 이들은 포로를 재판 없이 처형하기도 했으며, 자신들의 적을 인종주의적인 편견을 가지고 악마화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는 자신들의 동원한 외인부대에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프랑스군이 포로로 붙잡은 나치 독일군을 편입시키기도 했다. 이 중에는 유럽 전역에서 반인륜적인 전쟁범죄를 자행한 SS 출신들도 제법 많았다. 어찌 보면 프랑스 군대가 인도차이나에서 학살을 벌인 것도 이 부분과 전면적으로 분리해서 보기는 힘들 것이다. 프랑스가 보낸 군대는 지구 반대편에서 이런 학살과 만행을 자행했지만, 본국의 프랑스 사람들은 인도차이나 전쟁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542월에 시행된 여론조사를 보면, 당시 시사 문제에 일반인들보다는 좀 더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 중에, 32%가 인도차이나와 관련된 소식을 전혀 읽지 않았고, 45%아주 가끔씩”, 23%꾸준히읽는다고 응답했다. 그리고 같은 여론조사에, “인도차이나에 어떤 정책을 취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프랑스인들은 점점 더 호찌민과의 직접적인 대화를, 나아가서 인도차이나를 포기할 것(42%)”을 요구했다. 단지 7%가 무력 사용을 지지했고 단지 1%만이 미국의 개입을 원했으며, 29%나 되는 많은 인원이 어떤 정책을 취해야 할지 알지 못하면서 인도차이나 문제에 대한 무관심을 드러냈다. , 디엔비엔푸 전투가 발생하기 한달 전의 여론조사를 보아도 무관심의 비율이 결코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디엔비엔푸 전투는 호찌민과 보 응우옌 지압 그리고 베트민과 민중이 이룩한 위대한 승리였고, 프랑스에게 있어서 이는 참패였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전할 기미가 보이자 프랑스의 언론들은 통킹의 베르됭인 디엔비엔푸는 4만 명의 베트민의 총공세에 맞서 영웅적으로 임무를 완수했다.”는 식의 자기합리화 및 미화를 극대화한 기사들을 개제했다. 또한, 프랑스의 지도부는 이 전쟁에 미국을 끌어들이고자 했다. 프랑스 지도부는 미국의 지도부들과 함께, 이른바 미군 폭격기가 공습을 가하는 독수리 작전을 논의했고, 심지어 전술핵 투하도 논의했다. 이와 같은 미국의 개입은 실현되지 않았고, 결국 프랑스는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패배했다.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스위스 제네바에서 인도차이나 문제 해결을 위한 회담이 열렸고, 19547월에 성사됐다. 미국, 영국, 소련, 중국, 인도차이나 연합 국가의 대표들이 시작한 이 회담은 협정에 따라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국가의 독립과 통합을 인정하고 군대의 철수를 약속했으며, 국제적 통제하의 자유로운 총선거는 2년 이내로 계획했다. 당시 프랑스의 지도자가 된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의 경우 1950년부터 인도차이나에 관한 국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프랑스의 군사 교전 중단을 촉구한 인물이었다. 그는 1954년까지 베트남과의 접촉 재개를 위한 노력을 끈기있게 지속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정부 구성 직후 중국 외무부 장관 저우언라이와 베트남민주공화국 대표인 팜반동과의 대화를 주도했다. 궁극적으로 1954720~21일 밤에 협정이 체결되면서 8년간의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그는 반식민주의자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가 보기에 인도차이나 전쟁은 프랑스에 소모적인 시련의 위험을 가중시키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자칫하면 식민지 전체를 잃는 다는 것이 그가 가진 생각이었다. 쉽게 말해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의 본 목적은 반식민주의가 아닌 아시아를 포기하고 아프리카를 지키자!”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이 결과적으로 실패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았을 때, 허망한 망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전쟁은 베트남의 지속적인 평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대신 또 다른 강대국인 미국이 이 나라에 개입하도록 만들었다. 사실 미국은 1940년대 후반부터 인도차이나 문제에 개입했지만, 제네바 회담 이후 미국은 프랑스가 유지하고자 했던 베트남 남부에 친미정권을 세웠다. 가톨릭 신자 출신의 반공주의자인 응오딘지엠이라는 자신들의 꼭두각시를 내세워 미국은 베트남의 분단을 획책했고, 제네바 회담에서 약속한 총선거를 일방적으로 거부 및 파기했다. 이것이 바로 또 다른 인도차이나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프랑스의 군대는 1956년까지 베트남에서 일시적으로나마 주둔했다. 그러나 앞서 얘기한 것과 같이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응오딘지엠 정권이 들어서면서 수도 사이공에서 철수를 완료했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는 완벽히 인도차이나 문제에서 발을 빼게 됐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전쟁이 장기화 되고 냉전이 격화됨에 따라 프랑스가 이 제국주의 전쟁을 어떻게 포장했는가 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쟁 당시 프랑스 내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여기서 프랑스의 전쟁 노력을 찬성하는 쪽의 경우는 어떠했는지를 간략하게 언급할 필요가 있다. 쉽게 말하자면, 프랑스 내에서는 지지하는 정파가 좌익일수록 전쟁의 책임이 프랑스와 국제 자본주의에 있다고 생각한 반면, 지지하는 정파가 우익일수록 그 책임을 베트남과 공산주의자들에게로 돌렸다. , 프랑스는 식민지 전쟁을 공산주의에 맞서는 이념 전쟁으로 둔갑시켜 선전했다.

 

여기에는 프랑스가 자본주의 국가 미국의 지원을 받고자 했던 속셈이 있다. 1949년 소련의 핵개발과 중국 공산당의 내전 승리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은 미국이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제국주의 국가 프랑스를 돕게 만든 계기였다. 1952년에는 미국이 프랑스 전쟁 비용의 40% 1953년에는 50%를 부담했다. 이 수치는 더 상승하여 1954년에는 80%까지 상승했다. 이와 더불어 미국은 프랑스가 세운 꼭두각시 정권인 바오다이 정권의 군대를 지원하기도 했다. 프랑스는 미국의 지원이 지속된다는 전제 하에 베트남 국군을 창설하고 1952년까지 병력을 20만 명으로 증강하여 베트민과의 싸움에서 프랑스군을 대체하려 했다. , 이를 통해 인도차이나 전쟁의 내전화를 노리고자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 제국주의의 식민주의적 성격이 전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냉전이라는 흐름 속에서 프랑스가 자신들의 속성과 본질을 합리화하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놀랍게도 이러한 행위는 이후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도 벌어졌다. 1968년북베트남군이 감행한 구정 대공세로 미국과 서유럽 내에서는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이 격화되었는데, 1969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공화당의 닉슨은 이른바 베트남화 정책을 발표하여 미군을 단계적으로 철군하고자 했다. 닉슨의 구상은 남베트남 티우 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통해, 베트남인들의 내전화를 노리는 것이었다. , 20년 전 프랑스가 노린 것을 20년 후에 미국이 똑같이 반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미국의 베트남 전쟁도 너무나도 명백히 베트남인들의 독립전쟁이었고, 미국은 아무런 명분이 없는 전쟁을 전개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에 대해 명분 없는 전쟁이라고 한다. 특히 미국 내에서도 베트남 전쟁에 대한 시각은 매우 부정적이다. 그에 반해 한국은 베트남 전쟁에 대해 오랜 기간 동안 반성하지 못했다. 자유우방을 돕는다는 표면적 명분을 내세웠던 박정희 정부는 남베트남 정권이 아무런 정당성이 없는 정권이었음에도 미국을 따라 한국군을 파병했다. 이를 통해 한국은 경제성장의 발판을 마련했지만, 이는 베트남인들의 피와 한국의 가난한 노동계급과 그 자식들의 피를 통해 마련된 비극의 서사였다. 그러다 보니 아직까지도 베트남 전쟁에 대해 그 본질을 모르는 한국인들이 너무나도 많다.

 

과거 민주화 운동가 리영희 교수는 한국 내에서 최초로 베트남 전쟁을 호찌민의 독립전쟁 혹은 민족해방전쟁으로 분석했다. 그러나 이런 내러티브가 한국인들 인식 속에 광범위하게 자리 잡았는가를 생각하면 글쓴이는 회의적이다. 글쓴이의 경우 베트남 전쟁을 단순히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전쟁 혹은 한국의 경제성장에 도움이 된 전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경우 베트남 전쟁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가지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생각한다. , 베트남 전쟁은 리영희 교수가 주장한 바와 같이, 19세기와 20세기를 통틀어 베트남인들의 거대한 저항 속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알 필요가 있다.

 

, 그 전쟁이 일어나기 전 베트남은 이미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에 맞서 독립을 쟁취한 나라고, 미국이 식민지 국가 프랑스를 도왔다는 사실도 알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적어도 그 사실을 안다면 박정희 정권이 주장한 베트남 전쟁 내러티브의 허구성을 알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가 일으킨 제국주의 침략전쟁인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관련한 국내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이재원 교수의 박사학위논문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단행본으로 나온 것은 대단히 기쁜 일이다. 거기다 그 당시 프랑스 쪽 내부상황도 알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또한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도 날카롭기까지 하다. 그런 점에서 일독을 적극 권하는 책이다.

 

마지막으로 책에서 언급한 소련의 반식민주의 관련해서도 꼭 언급하고 싶다. 소련이 호찌민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1950년이 되어서지만, 책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소련은 여러 국가들에게 반식민주의 이데올로기적 측면에 많은 도움을 줬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을 통해 탄생한 소련은 레닌이 주장한 반식민주의 이데올로기를 지속적으로 전파했고, 호찌민을 비롯한 베트남의 혁명가들도 이 영향을 받았다. 이는 스탈린 시기도 마찬가지며, 소련은 반식민주의를 표방했다. 많은 사람들이 소련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와 같은 측면을 보자면 소련의 긍정적인 측면도 분명히 존재한다. 이제는 이와 같은 사실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할 때라고 글쓴이는 생각한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도 소련의 긍정성은 드러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며, 긴 서평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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