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차이나전쟁과 프랑스 식민주의 이념
이재원 지음 / 홍문각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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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유지하려 했던 나라들이 있었다. 바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이 그러했다. 이들은 19세기 서구 제국주의 열강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중동과 태평양 일대를 식민지 지배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이후 미국과 소련이라는 강대국이 등장했고, 과거 서구 제국주의 열강은 탈식민화라는 흐름 속에서 점차 힘을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 나라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였는데, 프랑스의 경우 이 과정에서 대규모의 전쟁을 치렀다.

 

대표적으로 프랑스는 1954년부터 1962년까지 알제리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며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유지하고자 했다. 프랑스와 알제리의 역사 문제는 현재까지도 양국의 국제적 이슈이기도 하다. 그에 반해 대규모 전쟁을 치렀음에도 프랑스 사람들이 관심을 크게 가지지 못한 전쟁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1946년부터 1954년까지 대략 8년간 베트남과 라오스 그리고 캄보디아에서 프랑스가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해 벌인 전쟁이었다. 19세기 중반부터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베트남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호찌민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전개됐다. 이들은 인도차이나를 점령한 프랑스와 일본에 맞서 싸웠으며, 19458월 베트남 전역을 혁명을 통해 장악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서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유지하고자 했고,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194611월 프랑스가 하이퐁을 공습하면서 베트민과 프랑스 사이의 전면적인 무력충돌이 발상했는데, 이것이 바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서막이었다.

 

프랑스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수십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고, 최신식 탱크와 전투기, 군함, 대포 등을 투입했다. 누가 봐도 프랑스의 군대가 베트민보다 훨씬 더 강해보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전쟁의 승자는 프랑스가 아니었다. 바로 베트남이었다. 호찌민이 지휘하는 베트민은 베트남인들의 대중적인지지 속에서 해방구 및 세력을 확장했고, 1950년부터는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아 군대의 정규군화에도 성공했으며, 베트남 최고의 명장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의 군대는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를 통해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는 세계사적으로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었다. 비록 프랑스의 군대가 베트민보다 숫자가 적었지만, 프랑스의 최정예 부대가 투입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군대 대다수가 베트민의 포로로 붙잡혔다. 프랑스는 이 전투에서 2,000명 이상이 전사하고, 6,000명 이상이 부상당했으며, 11,000명 이상이 베트민의 포로가 됐다. 베트남은 이 전투의 승리를 통해 100년간의 프랑스 식민지 지배를 종결시켰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었다. 프랑스에게 있어 이 전쟁은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유지하기 위해 식민지 지배를 지속하기 위한 전쟁이었지만, 베트남에게 있어 이 전쟁은 자신들의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호찌민이 지휘하는 베트민은 프랑스 제국주의의 최신식 군대와 무기를 궁극적으로 격퇴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전쟁은 세계사적으로 그리고 군사사적인 측면에서도 엄청난 쾌거이며 업적이다. 이와 같은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다룬 서적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한국의 경우 더더욱 그러하다. 미국의 경우 주로 자신들이 치른 베트남 전쟁에 집중을 하다 보니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해선 전자보다 연구를 덜 하는 편인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이재원 교수가 최근에 출간한 저서 인도차이나 전쟁과 프랑스 식민주의 이념을 완독한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었다.

 

이 책의 시작은 베트남 독립운동에 대한 설명과 19453월 일본이 일으킨 쿠데타부터다. 책은 프랑스의 식민주의에 대해 차분하게 분석하며, 이후 냉전의 열강이 되는 미국과 소련의 정책을 다룬다. 책이 가장 중심적으로 보는 것은 당시 프랑스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어떻게 인식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책은 전쟁 시기 여론의 변화를 살피기도 하며, 수많은 프랑스 측 사료를 통해 이를 보여주고자 한다. 책은 프랑스 식민주의 이념에 대한 찬성과 더불어 이에 맞서는 목소리도 보여준다. 프랑스 식민주의 이념에 반대한 세력으로 주로 언급되는 세력 중 하나가 프랑스 공산당이다.

 

글쓴이는 책에서 프랑스 공산당의 존재에 대해 많이 주목해서 읽었던 것 같다. 물론 프랑스 공산당이 처음부터 프랑스 식민주의에 전면적인 반대 목소리를 냈던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제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시점에는 프랑스 공산당의 경우 프랑스 연합이라는 틀 안에서 베트남의 주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46년 전쟁이 발발한 이후부터는 전면적으로 프랑스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에 전면적으로 반대하는 노선으로 전환했다. 사실 프랑스 공산당이 초기에 중립적인 노선을 보인 것은 어디까지나 인민전선 노선에 따른 것이었다. , 인민전선 틀 안에서 이들과의 연합 내지는 연대를 통해 베트남의 주권을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프랑스는 당시 이탈리아와 더불어 공산당의 지지가 가장 강력했던 서유럽 국가였다. 그러나 냉전이 격화되면서 이들 또한 정치 내에서 축출되기에 이르렀고, 프랑스 공산당을 포함한 좌파들은 제국주의에 맞서 저항하는 노선을 선택하게 된 것이었다.

 

프랑스 공산당은 전쟁 기간을 통틀어 반전운동을 주도했다. 특히나 부두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은 파병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고, 시위를 벌인 노조나 주체들을 보면 프랑스 공산당과 연관이 있는 이들이 제법 많았다. 프랑스 공산당이 가장 광범위하게 반전운동을 주도한 사례는 아마 앙리 마르탱 석방운동일 것이다. 앙리 마르탱은 프랑스 공산당원 출신 군인이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반대하여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고, 이후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해 인도차이나로 갔다. 그러나 인도차이나에 가서 프랑스 제국주의의 실체를 깨닫고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단순히 전쟁에 반대하는 전단지를 뿌렸다는 이유로 재판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는데, 그에 대한 석방운동이 프랑스 공산당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놀랍게도 프랑스 공산당은 이 사건을 통해 대중적이고 광범위한 반전운동 반식민주의 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고, 공산주의자라고 보기에는 약간 애매모호한 장 폴 사르트르 같은 프랑스 지식인들의 참여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으며, 사람들에게 거부감 없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시, 음악, 만화, 연극 등과 같은 매개체를 통해 프랑스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자신들의 입장과 논지를 전파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보자면, 프랑스 공산당은 이 전쟁에 반대하는 대중적인 목소리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도 프랑스가 저지른 짓은 매우 잔혹하고도 추악했다. 베트남 민중의 절대다수는 호찌민과 베트민을 압도적으로 지지했고, 프랑스는 베트남인들의 무장저항에 시달렸다. 프랑스 군대는 베트민이 은거한 마을로 의심되는 곳을 습격하여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했으며, 아녀자들을 강간하는 전쟁범죄를 적잖게 자행했다. 심지어 프랑스는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네이팜탄을 민가에 투하했다. 이들은 포로를 재판 없이 처형하기도 했으며, 자신들의 적을 인종주의적인 편견을 가지고 악마화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는 자신들의 동원한 외인부대에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프랑스군이 포로로 붙잡은 나치 독일군을 편입시키기도 했다. 이 중에는 유럽 전역에서 반인륜적인 전쟁범죄를 자행한 SS 출신들도 제법 많았다. 어찌 보면 프랑스 군대가 인도차이나에서 학살을 벌인 것도 이 부분과 전면적으로 분리해서 보기는 힘들 것이다. 프랑스가 보낸 군대는 지구 반대편에서 이런 학살과 만행을 자행했지만, 본국의 프랑스 사람들은 인도차이나 전쟁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542월에 시행된 여론조사를 보면, 당시 시사 문제에 일반인들보다는 좀 더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 중에, 32%가 인도차이나와 관련된 소식을 전혀 읽지 않았고, 45%아주 가끔씩”, 23%꾸준히읽는다고 응답했다. 그리고 같은 여론조사에, “인도차이나에 어떤 정책을 취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프랑스인들은 점점 더 호찌민과의 직접적인 대화를, 나아가서 인도차이나를 포기할 것(42%)”을 요구했다. 단지 7%가 무력 사용을 지지했고 단지 1%만이 미국의 개입을 원했으며, 29%나 되는 많은 인원이 어떤 정책을 취해야 할지 알지 못하면서 인도차이나 문제에 대한 무관심을 드러냈다. , 디엔비엔푸 전투가 발생하기 한달 전의 여론조사를 보아도 무관심의 비율이 결코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디엔비엔푸 전투는 호찌민과 보 응우옌 지압 그리고 베트민과 민중이 이룩한 위대한 승리였고, 프랑스에게 있어서 이는 참패였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전할 기미가 보이자 프랑스의 언론들은 통킹의 베르됭인 디엔비엔푸는 4만 명의 베트민의 총공세에 맞서 영웅적으로 임무를 완수했다.”는 식의 자기합리화 및 미화를 극대화한 기사들을 개제했다. 또한, 프랑스의 지도부는 이 전쟁에 미국을 끌어들이고자 했다. 프랑스 지도부는 미국의 지도부들과 함께, 이른바 미군 폭격기가 공습을 가하는 독수리 작전을 논의했고, 심지어 전술핵 투하도 논의했다. 이와 같은 미국의 개입은 실현되지 않았고, 결국 프랑스는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패배했다.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스위스 제네바에서 인도차이나 문제 해결을 위한 회담이 열렸고, 19547월에 성사됐다. 미국, 영국, 소련, 중국, 인도차이나 연합 국가의 대표들이 시작한 이 회담은 협정에 따라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국가의 독립과 통합을 인정하고 군대의 철수를 약속했으며, 국제적 통제하의 자유로운 총선거는 2년 이내로 계획했다. 당시 프랑스의 지도자가 된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의 경우 1950년부터 인도차이나에 관한 국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프랑스의 군사 교전 중단을 촉구한 인물이었다. 그는 1954년까지 베트남과의 접촉 재개를 위한 노력을 끈기있게 지속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정부 구성 직후 중국 외무부 장관 저우언라이와 베트남민주공화국 대표인 팜반동과의 대화를 주도했다. 궁극적으로 1954720~21일 밤에 협정이 체결되면서 8년간의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그는 반식민주의자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가 보기에 인도차이나 전쟁은 프랑스에 소모적인 시련의 위험을 가중시키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자칫하면 식민지 전체를 잃는 다는 것이 그가 가진 생각이었다. 쉽게 말해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의 본 목적은 반식민주의가 아닌 아시아를 포기하고 아프리카를 지키자!”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이 결과적으로 실패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았을 때, 허망한 망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전쟁은 베트남의 지속적인 평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대신 또 다른 강대국인 미국이 이 나라에 개입하도록 만들었다. 사실 미국은 1940년대 후반부터 인도차이나 문제에 개입했지만, 제네바 회담 이후 미국은 프랑스가 유지하고자 했던 베트남 남부에 친미정권을 세웠다. 가톨릭 신자 출신의 반공주의자인 응오딘지엠이라는 자신들의 꼭두각시를 내세워 미국은 베트남의 분단을 획책했고, 제네바 회담에서 약속한 총선거를 일방적으로 거부 및 파기했다. 이것이 바로 또 다른 인도차이나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프랑스의 군대는 1956년까지 베트남에서 일시적으로나마 주둔했다. 그러나 앞서 얘기한 것과 같이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응오딘지엠 정권이 들어서면서 수도 사이공에서 철수를 완료했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는 완벽히 인도차이나 문제에서 발을 빼게 됐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전쟁이 장기화 되고 냉전이 격화됨에 따라 프랑스가 이 제국주의 전쟁을 어떻게 포장했는가 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쟁 당시 프랑스 내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여기서 프랑스의 전쟁 노력을 찬성하는 쪽의 경우는 어떠했는지를 간략하게 언급할 필요가 있다. 쉽게 말하자면, 프랑스 내에서는 지지하는 정파가 좌익일수록 전쟁의 책임이 프랑스와 국제 자본주의에 있다고 생각한 반면, 지지하는 정파가 우익일수록 그 책임을 베트남과 공산주의자들에게로 돌렸다. , 프랑스는 식민지 전쟁을 공산주의에 맞서는 이념 전쟁으로 둔갑시켜 선전했다.

 

여기에는 프랑스가 자본주의 국가 미국의 지원을 받고자 했던 속셈이 있다. 1949년 소련의 핵개발과 중국 공산당의 내전 승리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은 미국이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제국주의 국가 프랑스를 돕게 만든 계기였다. 1952년에는 미국이 프랑스 전쟁 비용의 40% 1953년에는 50%를 부담했다. 이 수치는 더 상승하여 1954년에는 80%까지 상승했다. 이와 더불어 미국은 프랑스가 세운 꼭두각시 정권인 바오다이 정권의 군대를 지원하기도 했다. 프랑스는 미국의 지원이 지속된다는 전제 하에 베트남 국군을 창설하고 1952년까지 병력을 20만 명으로 증강하여 베트민과의 싸움에서 프랑스군을 대체하려 했다. , 이를 통해 인도차이나 전쟁의 내전화를 노리고자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 제국주의의 식민주의적 성격이 전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냉전이라는 흐름 속에서 프랑스가 자신들의 속성과 본질을 합리화하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놀랍게도 이러한 행위는 이후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도 벌어졌다. 1968년북베트남군이 감행한 구정 대공세로 미국과 서유럽 내에서는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이 격화되었는데, 1969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공화당의 닉슨은 이른바 베트남화 정책을 발표하여 미군을 단계적으로 철군하고자 했다. 닉슨의 구상은 남베트남 티우 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통해, 베트남인들의 내전화를 노리는 것이었다. , 20년 전 프랑스가 노린 것을 20년 후에 미국이 똑같이 반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미국의 베트남 전쟁도 너무나도 명백히 베트남인들의 독립전쟁이었고, 미국은 아무런 명분이 없는 전쟁을 전개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에 대해 명분 없는 전쟁이라고 한다. 특히 미국 내에서도 베트남 전쟁에 대한 시각은 매우 부정적이다. 그에 반해 한국은 베트남 전쟁에 대해 오랜 기간 동안 반성하지 못했다. 자유우방을 돕는다는 표면적 명분을 내세웠던 박정희 정부는 남베트남 정권이 아무런 정당성이 없는 정권이었음에도 미국을 따라 한국군을 파병했다. 이를 통해 한국은 경제성장의 발판을 마련했지만, 이는 베트남인들의 피와 한국의 가난한 노동계급과 그 자식들의 피를 통해 마련된 비극의 서사였다. 그러다 보니 아직까지도 베트남 전쟁에 대해 그 본질을 모르는 한국인들이 너무나도 많다.

 

과거 민주화 운동가 리영희 교수는 한국 내에서 최초로 베트남 전쟁을 호찌민의 독립전쟁 혹은 민족해방전쟁으로 분석했다. 그러나 이런 내러티브가 한국인들 인식 속에 광범위하게 자리 잡았는가를 생각하면 글쓴이는 회의적이다. 글쓴이의 경우 베트남 전쟁을 단순히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전쟁 혹은 한국의 경제성장에 도움이 된 전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경우 베트남 전쟁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가지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생각한다. , 베트남 전쟁은 리영희 교수가 주장한 바와 같이, 19세기와 20세기를 통틀어 베트남인들의 거대한 저항 속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알 필요가 있다.

 

, 그 전쟁이 일어나기 전 베트남은 이미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에 맞서 독립을 쟁취한 나라고, 미국이 식민지 국가 프랑스를 도왔다는 사실도 알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적어도 그 사실을 안다면 박정희 정권이 주장한 베트남 전쟁 내러티브의 허구성을 알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가 일으킨 제국주의 침략전쟁인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관련한 국내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이재원 교수의 박사학위논문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단행본으로 나온 것은 대단히 기쁜 일이다. 거기다 그 당시 프랑스 쪽 내부상황도 알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또한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도 날카롭기까지 하다. 그런 점에서 일독을 적극 권하는 책이다.

 

마지막으로 책에서 언급한 소련의 반식민주의 관련해서도 꼭 언급하고 싶다. 소련이 호찌민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1950년이 되어서지만, 책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소련은 여러 국가들에게 반식민주의 이데올로기적 측면에 많은 도움을 줬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을 통해 탄생한 소련은 레닌이 주장한 반식민주의 이데올로기를 지속적으로 전파했고, 호찌민을 비롯한 베트남의 혁명가들도 이 영향을 받았다. 이는 스탈린 시기도 마찬가지며, 소련은 반식민주의를 표방했다. 많은 사람들이 소련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와 같은 측면을 보자면 소련의 긍정적인 측면도 분명히 존재한다. 이제는 이와 같은 사실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할 때라고 글쓴이는 생각한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도 소련의 긍정성은 드러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며, 긴 서평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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