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은 20세기 역사에 있어 1차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 그리고 한국전쟁과 더불어 미국이라는 나라가 많은 병력과 물자를 투입했던 전쟁이다. 280만 명의 미군이 참전했고, 800만 톤의 폭탄을 베트남에 투하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 전쟁에서 베트남에게 패배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은 건국 이래 최대의 반전운동이 일어났고, 당시 애국심을 가지고 참전했던 참전용사들 마저 이 전쟁을 규탄했다. 당연히 이 전쟁은 냉전시기 미국과 대립했던 소련이나 중국을 비롯한 구공산권뿐만 아니라, 2차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동맹국이었던 영국이나 프랑스 그리고 캐나다도 이 전쟁을 비판적으로 봤다. 이 전쟁을 부정적으로 보는 미국인들의 시각은 헐리우드에서 만든 풀 메탈 자켓이나 지옥의 묵시록그리고 ‘74일 생과 같은 작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국제적으로 그리고 미국 내에서도 비판받는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전쟁을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전쟁으로 미화했던 나라가 있다. 그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1965년 베트남에 군대를 파견했던 박정희 정권은 1973년 미국이 철수함에 따라 이 전쟁에서 발을 뺐다. 그리고 1975년 전쟁이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났을 때, 그 악명 높은 긴급조치 9를 발동하여, 민주주의를 탄압하고, 유신독재를 강화했다. 이와 동시에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 전쟁이 북베트남 측의 승리로 끝나자 이를 악용하여 반공주의를 강화해나갔다.

(1975년 4월 30일 베트남 전쟁 관련한 박정희의 특별 담화)

 

박정희 정권에게 있어 베트남 전쟁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고, 북베트남과 해방전선이 이룬 승리는 민족해방전쟁에서의 승리가 아닌 자유월남의 패망이었다. 이런 반공주의적인 시각은 지금도 사회 깊숙이 남아있다. 작년 3월 문재인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하여 그 나라의 독립 영웅 호치민을 칭찬했을 때, “자국민을 공산치하에서 수도 없이 학살한 호치민을 찬양하는 빨갱이 라며이에 대해 간질발작을 보이며 잎에 개거 품을 물었던 일각의 모습이 그 반증이다. 그렇다면 그들 말대로 베트남 전쟁은 정말로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었고, 호치민은 단순한 빨갱이었을까? 이는 베트남 전쟁의 전개 양상만 제대로 안다면 해답을 찾을 수 있다.

 

1. 베트남의 독립선언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을 집필한 저자 마이클 매클리어는 자신의 책에서 베트남 전쟁의 시작점을 1945년 미국이 당시 베트남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던 베트민을 지원하던 시점으로 봤다.

  

(2차세계대전 당시 베트민을 훈련시키는 미국 OSS 요원들.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은 일본에 맞서기 위해 베트민을 지원했다.)  

 

2차세계대전 당시 호치민의 베트민은 베트남을 점령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일본이 항복하던 시점인 19458월 호치민의 베트민은 전국적으로 총 봉기를 일으켜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켰고, 194592일 호치민은 전함 미주리호에서 있을 일본의 공식 항복 날짜에 맞춰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독립을 선언한다.

 

그러나 연합국은 베트남의 독립 선언을 인정하지 않았고, 북위 16도선을 기점으로 북에는 중국군이 남에는 영국군이 입성한다. 그러나 영국군은 당시 베트남을 식민지화 하려는 프랑스를 끌어들였고, 이는 베트남과의 마찰로 이어졌다. 베트남과 프랑스의 갈등은 격해졌고, 이는 결국 프랑스가 하이퐁을 공격하면서 전쟁이 일어났다. 그게 바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다.  

(1945년 9월 2일 호치민의 독립선언. 호치민은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선언문은 미국의 독립 혁명 당시 토마스 제퍼슨이 작성한 것과 비슷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초반에는 프랑스가 유리했지만, 1949년 중국의 지원을 받은 베트민은 프랑스군에게 반격을 가했고,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지 1년이 지난 시점인 1954년 라오스 국경지대에 있는 디엔비엔푸에서 베트민이 대승을 거두면서 프랑스의 참패로 끝이 난다.

 

그러나 미소 냉전이라는 대립 속에서 미국은 이 전쟁을 반공적인 시각으로 보았고, 프랑스를 지원해줬다. 그런 상황에서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대패한 것이다.

 

2. 분단과 남베트남의 혼란  

(1954년 5월 7일 프랑스군이 참패한 디엔비엔푸 전투. 디엔비엔푸 전투는 56일간의 포위 끝에 베트남의 승리로 끝났다. 프랑스군 1만 명 이상이 항복했다. 제국주의자들을 무찌른 영광스러운 승리였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베트남은 제네바 협약에 따라 북위 17도선을 기점으로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당시 이 분단은 2년 이내에 총 선거를 실시한다는 전제하에서 실시되었다. 북베트남의 호치민 정권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 제국주의를 무찌른 세력이었지만, 남베트남에 들어선 응오딘지엠 정권은 프랑스 식민지 시기 프랑스에 빌붙어 나라를 팔아먹던 민족반역자들의 집합체였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가 앞세웠던 꼭두각시 바오다이 황제는 자신의 신복 응오딘지엠을 총리로 내세웠고, 응오딘지엠은 국민투표를 통해 바오다이를 축출한 뒤, 권좌에 올랐다. 정권을 잡은 응오딘지엠은 통일을 위한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해 버린다. 제네바 협약에 따라 총선을 치러야 했지만, 도미노 이론을 믿고 있던 미국은 총선을 실시해야 했지만, 민중의 80%가 호치민을 지지한 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남베트남의 지도자가 되어 부정부패를 일삼은 응오딘지엠. 가족 정치 부정부패 독재등 온 갖 악행을 저질렀다. 미국은 단지 그가 반공주의자이자 가톨릭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지원했다.) 

 

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된 응오딘지엠은 자신들의 친인척들을 남베트남 내각에 대거 편입시켰다. 당시 남베트남은 농업국가로서 농민들의 민심을 잡으려면 토지개혁이 필수였지만, 응오딘지엠은 토지를 베트남의 소수 권력이라 할 수 있는, 가톨릭 신자들에게만 우선적으로 할당했다. 그와 동시에 민중의 90%이상이 믿는 불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그리고 반공주의를 표방하며 자신의 정권에 조금만이라도 반대하는 세력들을 짓밟았다. 당시 베트남의 종교인 카오다이나 호아하오교도 응오딘지엠 정권으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남베트남 고위관료들에 의한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응오딘지엠 정권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에 맞서 대불항전을 전개하던 베트민 잔존세력들까지 탄압했다. 응오딘지엠은 남베트남에서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그의 동생인 응오딘뉴는 남베트남의 비밀경찰을 동원하여 인민들의 사상을 탄압했고, 그 과정에서 수 만 명이 체포되고 처형됐다.  

(1963년 6월 11일 독재정권의 불교 탄압에 맞서 소신공양한 틱광둑 스님. 그러나 응오딘지엠의 제수인 마담 누는 이를 두고 바베큐라며 인간이하의 발언을 했다.)

  

그들의 탄압은 무자비했고, 결국 남베트남은 각종 시위와 혼란으로 휩싸인다. 19636월에는 응오딘지엠의 독재정권과 불교도 탄압에 반대하여 고승 틱광둑이 소신공양하는 일이 일어났고, 그 이후 여러 곳에서 각종 반대 시위와 불교도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분노한 케네디 정권은 CIA를 동원하여 응오딘지엠 정권을 축출했지만, 그 이후 남베트남은 군벌들의 내부 쿠데타에 휩싸이게 된다. 즉 혼란은 더 가중되었다.

 

3. 미국의 군사고문단 파견 그리고 통킹만 사건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깃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이른바 베트콩이라고 불리는 이 단체는 1960년 남베트남 안에서 자생적으로 창설됐다. 이들은 민중의 지지를 받았고, 민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미국에 맞서 싸웠다.)

  

이와 같은 응오딘지엠 정권의 가족 정치와 친 가톨릭 정치는 당연히 인민들의 불만을 불러왔고, 남베트남의 인민들은 응오딘지엠 정권에 맞서 게릴라 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1960년 남베트남 안에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른바 베트콩이 자생적으로 창설되었다.

 

베트콩이라는 단체는 응오딘지엠 정권을 축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북베트남은 이를 지원하는 형태였다. 베트콩은 남베트남에 맞서 무장투쟁 및 각종 투쟁을 이어나갔고, 프랑스군 출신의 남베트남 군 관료들은 베트콩과의 전투에 있어서,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처럼 프랑스에 협력했던 민족반역자들로 구성된 군대는 전투에서도 무능력 했다.

 

도미노 이론을 믿던 미국은 남베트남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보고, 조금씩 군사고문단을 남베트남에 파견했다. 1961년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 된 존F케네디는 남베트남에 있는 군사고문단의 숫자를 점차 늘렸고, 1963년에는 남베트남 주둔 군사고문단 숫자가 3만 명이 넘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군은 베트콩과의 전투에서 허접한 모습을 보인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압박 전투라 할 수 있는데, 1500명의 남베트남군이 300명의 베트콩에게 대패했을 정도로 무능력했다. 

(USS 매덕스 호. 통킹만 사건 당시 북베트남 해역에서 염탐행위를 하던 미국의 배.)

  

응오딘지엠이 미국 CIA의 지원을 받은 내부 쿠데타로 축출되었지만, 이후 남베트남은 지속되는 쿠데타에 시달렸다. 그럴수록 남베트남의 민중은 베트콩을 더 지지하게 되었고, 이대로 있으면 남베트남은 내부총질로 무너질 상황이었다. 미국에게 있어서 이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19648월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는 자작극을 벌였고, 이를 빌미로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은 북베트남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로써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4. 베트남 전쟁의 시작   

(롤링 썬더 작전.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은 롤링 썬더 작전을 통하여 베트남을 초토화시켰다.)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게 된 미국은 19652월 베트남의 중부고원지대인 플레이쿠 기지가 기습 공격을 받자, 롤링썬더 작전(Operation Rolling Thunder)에 나선다. 이른바 북폭을 시작한 것이다. 북폭을 감행한 미국은 북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와 항구도시 하이퐁을 비롯한 대도시들과 북베트남 전역을 초토화 시켰다. 그리고 미국은 베트콩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남베트남 정글에 무분별한 고엽제를 살포하여 산림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많은 민간인들을 죽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군이 전투에서 무능력함을 보이자 미국은 19653월 다낭에 첫 지상병력을 파견한다. 이에 따라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과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그리고 태국도 군대를 파병한다. 그리고 그해 이후 남베트남의 젊은 장교 응우옌 반 티에우가 정권을 잡으면서 쿠데타는 종결된다  

(응우옌 반 티에우. (맨)왠쪽이 린든 존슨, 두번째가 윌리엄 웨스트 모어랜드 그리고 세번째가 응우옌 반 티에우다. 네번째에 있는 양복입은 베트남인은 남베트남 공군 사령관이던 응우옌 까오 끼다. 응우옌 반 티에우는 응오딘지엠 암살 이후 지속되던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남베트남 정권의 본질적인 문제인 부정부패를 해결하지 못했고, 그 또한 온갖 비리를 통해 돈을 모았다.)

  

하지만 남베트남군은 베트콩과의 전투에서 여전히 무능력했다. 19655월 말 소규모의 베트콩 부대가 꽝응아이 근처에 있던 남베트남군 여단을 매복 공격하여, 며칠 동안의 전투 끝에 남베트남군 2개 대대를 완전히 괴멸시키기도 했다. 이에 맞서 미국은 더 많은 지상 병력을 파견했고, 고엽제를 살포하며 인근 마을과 숲을 무차별 폭격했다.  

(이아드랑 전투. 1965년 이아드랑이라는 지역에서 미국은 대규모의 헬기 부대를 작전에 투입했다. 당시 전투에 투입된 미국의 제1 기병사단은 한국전쟁 당시 노근리에서 민간인 250명을 학살한 군대이기도 하다.)

  

미국의 막강한 화력으로 인하여 베트콩들 또한 사상자가 급증했다. 196511월 미국의 제1 기병사단은 이아드랑에서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의 공세를 막강한 공군력과 헬기 부대들을 투입했었다. 그 결과 며칠간의 전투에서 미군은 300명이 전사했던 데에 비해, 북베트남측은 1700명 이상이 전사했다.

 

이아드랑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다른 전투에서도 미군의 항상 압승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은 과거 미국이 치렀던 제2차세계대전이나 한국전쟁과는 다른 전쟁이었다. 베트남 전쟁은 남베트남 내에서의 전쟁이었다. 즉 미군이 남베트남에서 상대하는 적은 남베트남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창설된 베트콩이었고, 이를 지원하러 호치민 루트를 통해 내려온 북베트남군의 소수 지원 병력이었다  

(닥토 전투. 1967년 베트남의 콘툼성 근처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처참함 그 자체였다.)

  

즉 일정한 전선이 없는 전쟁이었기에, 전투가 어디에서 벌어질지 모르는 전쟁이었다. 미군은 수색과 섬멸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작전을 이어나갔고, 이와 같은 게릴라전으로 인하여 미군 사상자 또한 적잖게 속출했다. 그리고 미군 사상자가 속출함에 따라 베트남 주둔 미군의 숫자는 늘어만 갔다. 미국의 특수부대인 그린베레가 베트콩에 맞서기위해 자포자기식으로 라오스쪽의 몽족과 중부고원지대 소수민족을 비롯한 일부 소수민족들을 기반으로 만든 특수부대가 활동했지만, 규모가 그리 크지 못했기에 큰 효과를 보진 못했다. 196711월 베트남 콘툼성 지역에 있는 닥토에서 대격전이 벌어졌지만, 미군은 이 전투에서 베트콩 1600명 이상을 사살하며 우위를 점하지만, 그 과정에서 40대 이상의 헬기와 350명 이상의 미군 전사자가 속출했다.

 

5. 구정 공세와 호치민의 사망

 

1967년에서 1968년 사이 남베트남에 주둔하는 미군 숫자는 총 50만을 넘겼다. 1967년까지 총 2만 명 이상의 미군이 전사했지만, 정글을 B-52 폭격기로 무차별 폭격하고, 대규모의 헬기를 동원하여 수색 섬멸 작전을 이어나갔기에 미국은 베트남 전에서 이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건 전쟁을 일으킨 미국의 착각이었다. 1967년까지 미국이 이기고 있다 생각한 미국인들은 1968년부터 미국이 자신들에게 한 거짓말에 환멸을 느끼고 반전운동에 뛰어든다. 미국 내의 반전 운동을 촉발시킨 사건은 바로 구정 공세(Tet Offensive)’.  

(구정 공세. 1968년 1월 31일 베트남 구정에 감행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공세는 미국과 서방세계를 뒤집어 놓았다. 이 공세는 미국 뿐만 아니라 서독,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일본과 같은 나라의 학생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그 영향으로 일어난 것이 68혁명이다.)

  

1968131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남베트남 전역에서 공격을 가했다.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비롯하여 여러 도시들이 베트콩의 공격을 받았다. 베트남의 옛 수도 후에는 베트콩이 1달 간 점령했고, 케산은 제2의 디엔비엔푸 전투를 연상시켰으며, 수도 사이공은 잠깐이기는 하지만 베트콩 공격부대가 미대사관1층을 점령했다. 첫 번째 구정 공세 1달 동안 베트콩은 미군의 막강한 화력에 의하여 대부분 소탕되었다. 미군 2천 명이 사망했지만, 베트콩은 3만 명 이상 사망했다. 즉 전사자 측면에서 볼 땐 미국의 압승이었다.

 

그러나 구정 공세 당시 남베트남 전역이 공격당하는 모습이 대중매체를 통해 미국 전역에 보도가 되었고, 이는 미국인들로 하여금 환멸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는 결국 미국 내에서 반전운동을 격화시키게 되었다. 결국 린든 존슨 대통령은 재선하지 못했고, 196811월 잠깐 동안 북폭을 중지해야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의 문제는 린든 존슨에서 리처드 닉슨으로 넘어가게 된다  

(1969년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이 사망했다. 미국과의 전쟁 도중 사망한 그는 20대 청년 시절 부터 80 노인까지 오로지 민족해방과 독립을 위해 살아왔다. 부패하지 않았고, 남을 잘 설득했으며, 특히나 아이들을 사랑했다.)

  

구정 공세로 인하여 수많은 베트콩들이 전사했지만, 그들은 미국에 맞서 투쟁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1969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단계적인 철수를 이행했다. 196992일 북베트남의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 호치민이 사망했다. 한평생을 베트남 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해 바쳐온 위대한 지도자의 사망으로 북베트남 인민들은 애도와 슬픔을 표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더 단결하게 되었다.

 

6. 반전운동과 미군 철수 그리고 베트남의 승리

 

1968년 구정 공세 이후 미국은 사상 최대의 반전운동에 직면하게 된다. 사실 베트남 전쟁은 전쟁 초기부터 미국 자본주의의 빈부의 계급적 불평들을 보여주었다. 1960년대 미국은 징병제도였다. 미국의 징병제도로 인하여 가난한 백인의 자식들과 노동계급의 자식들 그리고 흑인의 자식들은 지옥의 베트남으로 가게 됐지만 대학을 다니는 부유한 집안의 자식들 엘리트 계층들은 학업을 핑계로 징병을 언제든지 피할 수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또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은 베트남으로간 흑인군인들이 상당히 많았다는 사실이다.

 

베트남 주둔 미군의 총 병력 13%를 흑인이 차지했고 이는 미국 인구에서 흑인이 차지하는 비율과 비슷한 수치였다. 즉 베트남 전쟁 당시의 미국 징병제도는 계급과 빈부 그리고 인종간의 불평등이라는 모순점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반전운동이 일어나는데 있어서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시위대가 반전운동을 하면 거리에 있는 미국의 경찰들은 곤봉을 돌고 시위대를 서슴없이 후려치기까지 했고 반전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소화기와 물대포가 동원되기까지 했으며 심지어는 주방위군을 동원하기 까지 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이런 진압 방식을 보고 히틀러의 게슈타포에 비유하기도 했다.  

(베트남 전 반전운동. 미국내에서의 반전운동은 1965년 부터 있었다. 1968년 구정 공세 이후 그 규모가 훨씬 커졌고, 미국내에서의 반전운동은 미국으로 하여금 베트남에서 철수하도록 만들었다. 미국 인민들 또한 이 전쟁의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지배계급에 맞서 투쟁했고, 전쟁을 끝냈다.)

  

시위대를 진압하는 미국 정부의 방식이 무자비했다는 사실은 1970년 오하이오 켄트 주립 대학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다. 1970년 당시 닉슨 정부의 캄보디아 침공에 반대하여 오하이오 켄트 주립 대학교 학생들은 반전시위를 벌였다. 미국의 주방위군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발포했고, 그 과정에서 4명이 죽고 9명이 다쳤다. 이처럼 반전운동을 대하는 미국정부의 태도는 무자비했다.

 

그리고 1970년엔 1968316일 미군이 벌인 최악의 조직적인 민간인 학살 사건인 미라이 학살(Massacre of MyLai)의 진상이 규명됐고, 이로 인하여 베트남 전에서의 미국의 이미지는 최악이 됐다. 1971년 열린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 오즈번이라는 사람의 자백을 통하여, 1968년부터 1971년 까지 미국의 피닉스 작전(Operation Phoenix)으로 인하여 총 27000명 이상이 어떠한 근거나 물증 없이 베트콩으로 몰려 학살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부활절 공세. 1972년 하노이는 다시 한번 대규모의 공세를 감행했다. 이번엔 전차와 장갑차 수백대를 동원했지만, 막강한 미군의 공군력 앞에서 많은 손실을 입는다.)

  

무튼 단계적인 철수를 실행한 닉슨 정부는 완전한 철수를 꺼려했고, 베트남 전 참전 군인들까지 반전운동 대열에 합류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과 1971년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침공한다. 1972년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대규모 공세인 부활절 공세(Easter Offensive)’를 막강한 공군력을 동원하여 무마시킨 뒤,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마지막의 대규모 폭격을 북베트남에게 감행한다.

 

미국의 마지막 협박에도 북베트남은 굴하지 않았고, 19731월 미국은 파리에서 평화조약을 맺고 베트남에서 완벽히 철수한다. 이후 미국은 베트남에서 완벽히 철수했지만, 군수물자를 남베트남에 지원했다. 남베트남은 1800대 이상이나 되는 미국 항공기를 소유했기에, 군사력이 과장되어 선전됐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미국이 주고 간 것이지 남베트남은 그걸 굴릴 돈이 없었고,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제대로 싸울 수 있는 군대가 아니었다.

 

197412월 북베트남 정부는 남베트남을 통일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19751월 북베트남군은 실험삼아 남베트남군이 있는 푹롱 성을 공격했고 3주 만에 점령했다. 1975310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남베트남군의 주요거점지인 부온마투옷을 점령함으로써,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으로 가는 길을 확보했고, 1975326일 중부에 고립된 최대의 기지이자 도시인 다낭이 함락되고, 남베트남군은 궤멸된다. 197547일에는 사이공 동쪽 64 Km 부근에 있는 쑤언록에서 남북베트남군은 전투를 치렀고, 420일 남베트남 지휘부는 쑤언록을 방어하던 군대에게 수도 사이공으로 후퇴를 명한다.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군의 59식 전차가 대통령궁의 문을 부수고 진입했다. 이로써 베트남 전쟁은 제국주의자들의 패배로 끝났다.)

  

당시 대통령이던 티우는 부정축재로 모은 금괴 2톤을 몇 대의 비행기에 실은 뒤, 베트남을 탈출했고, 1975430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군대가 사이공으로 진군하고, 대통령궁에 59식 전차를 진격시킴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로써 베트남 전쟁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승리고 끝난다.

 

7. 결론  

(전환시대의 논리. 대한민국의 양심적인 지식인이자 민주화운동가인 리영희 선생이 쓴 책이다. 반공주의가 극에 달하던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시기 베트남 전쟁의 본질을 파악한 책이기도 하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에게 있어 가장 많은 비판을 받은 전쟁이자, 최초로 패배한 전쟁이다.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고, 미라이촌에서 504명이나 되는 민간인들을 무차별 학살했고, 피니스 작전을 통해 일정한 물증과 근거가 없는 민간인 2만 명 이상을 재판 없이 학살했으며, 이 나라를 무차별 폭격하고 고엽제를 살포하여 2백만 이상이나 되는 민간인을 도륙했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약에 따라 통일을 위한 선거를 치러야 했지만, 이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응오딘지엠 괴뢰 정부를 수립하여 반민중적인 반공독재정권을 지원했다. 따라서 베트남 전쟁은 미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이다.

 

대한민국의 수구세력들은 당시 미국이 지원한 남베트남 정권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라 주장한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남베트남 정권은 프랑스 식민지 시기 프랑스에 빌붙어 호의호식하던 친프랑스 민족반역자들이 합쳐진 정권이었다. 당시 150만 이상이던 남베트남군 지휘관들 중에 프랑스 식민지 시기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은 육군 중령 1사람 밖에 없었던 데에 비해, 호치민을 비롯한 북베트남과 베트콩측의 지도급 인사 31명 모두가 베트남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항불 항일 독립운동가들이었다.

 

이 사실만 보더라도, 베트남 민중이 어디를 지지할지는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베트남의 민족반역자들을 지원했고, 결국 이 독립운동가들이 이끄는 군대에게 패배했다. 물론 베트남 전쟁 전사자 측면에서 보면 미국은 58천명이 전사했던 데에 비해, 북베트남이나 베트콩은 100만 이상이 사망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 또한 막강한 전력을 잃었다. 항공기 3700대와 헬기 5000대 그리고 장갑차 및 탱크 800대 이상이 베트남 전쟁에서 파괴됐다. 즉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치른 손실 또한 만만치 않았다는 얘기다. 

(캐나다 종군기자 마이클 매클리어가 쓴 책이다. 이 책은 1980년대 13부작 짜리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정리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인터뷰와 기자의 경험담을 이 책에 담고 있고, 베트남 전쟁의 전개 양상을 아주 잘 정리했다. 베트남 전쟁을 아는데 있어 꼭 읽어봐야할 명저다.)

  

이야기를 다시 원점으로 돌리자면 베트남 전쟁은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이 미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싸운 민족해방전쟁이고,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은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싸운 위대한 혁명가이다. 수구세력들이 어떻게 해서든 이를 부정하려 하지만,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마이클 매클리어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 나온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한 세기에 걸친 외국인의 지배가 그들을 연옥으로 몰아넣었고, 또 다른 한 세기의 전쟁이 그들을 질곡으로 이끌었지만, 그들은 의연하게 부활했다. 인류 역사는 베트남 민족의 용기와 불굴의 정신을 높이 평가할 것이다. 아시아의 작은 국가가 스스로의 힘으로 민족 재통일을 이룩한 것보다 더 위대한 본보기는 이전에 없었기 때문이다.”

 

출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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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수꼴들은 북조선 3대세습은 잘못됐기에 망하게 해야한다 주장하지만, 정작 북조선 세습보다 더 심각하고 더 여성 억압적이고 더 종교의 자유가 없는 미국의 후원국 사우디 아라비아에 대해선 별말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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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유사역사학을 비판하는가?

내가 환단고기를 처음알게 된 것은 대학교 1학년때였다. 당시 고구려사를 전공한 모 교수는, ˝한국에도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는 극단적 집단이 있고, 환단고기와 같은 이상한 서적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모종의 집단이 있다.˝고 학생에게 얘기해줬다.

그때는 ˝아 뭐 그런게 있구나?˝라는 생각만 들었지 관심이 생기지 않았었다. 뭐 그냥 나와는 상관없는 얘기라 생각했었다. 2016년쯤이었다. 당시 아는 학교 선배와 만났을때 그 선배는 이덕일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듣게됐고, 적어도 유사역사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냥 일각에서의 주장으로만 치부했었다.

그러던 2017년이었다. 2017년 도종환 장관 문제가 터졌고, 다시한번 환빠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런상황에서 youtube를 통해 증산도 방송을 잠시나마 봤고, 그 영상에서 상당히 병맛스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페북에서 환단고기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쓴 글들을 페이스북으로 봤고, 가입되어있던 모 밴드에서 환단고기 찬양글을 보게됐다. 상당히 충격적이고, 이이가 없었다. 그들의 실체를 알게 된 나는, 간혹 환빠들을 까는 글을 올리게 됐고, 지금까지 그들을 부정적으로 보게 됐다.

사실 환단고기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주장들이 많다. 그 책주장에 따르면 한민족의 역사는 9천년이나 됐고, 모든 문명의 근원은 환국이고, 환국이라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전세계로 퍼져나간 것이기에 한국인들은 이에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먼 훗날에는 한국인들이 전세계로 퍼져나가 많은 영토를 차지해야한다는 논리로 나선다.

이런 주장은 과거 히틀러가 주창했던, 게르만 민족주의와 유사하다. 그런 논리를 가지고,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뒤, 세계를 전쟁속으로 몰아넣은 것이 히틀러의 게르만 우월주의다. 거기다 상식적으로 지금으로부터 9천년 전에 국가가 존재하고, 19세기 제국주의의 산물인 민족이라는 개념을 고대에 적용하는 것 부터가 모순이다.

따라서 환단고기에 담긴 내용은 진실도 없고, 시사하는 바도 파시즘적이다. 이런 파시즘적인 그들의 논리는 영토우월주의에서 표출된다. 고조선 영토와 고구려 영토에 대한 광기어린 자부심과 정복전쟁을 많이한 정복자에 대한 그들의 추종이 바로 그렇다.

환단고기 추종세력들은 이를 비판하는 세력을 식민사학이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영토를 부풀려 민족적 자부심을 강조하고, 정복을 미화하는 그들이야말로 식민사학에 경도된 것이고, 제2의 대동아공영권론자다.

유사역사학! 이것은 인민을 현옥시키고, 파시즘으로 타락시키는 한국판 레벤스라움 혹은 대동아공영권이다. 인민대중은 유사역사학의 실체를 알고 이와 같은 파시즘적 논리에 맞설수 있는 민중주의적 역사관으로 무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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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인재들 - 왜 미국 최고의 브레인들이 베트남전이라는 최악의 오류를 범했는가 걸작 논픽션 7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송정은.황지현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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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정말 두꺼운 책 한권을 끝까지 다 읽었다. 1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필자가 읽은 책은 한국전쟁을 다룬 책 콜디스트 윈터(The Coldest Winter)’의 저자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이 쓴 최고의 인재들(The Best And The Brightest)’라는 책이다. 최고의 인재들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는 과정과 인물들의 심리 상황 그리고 개인사를 정리한 책으로서 당시 미국 최고의 엘리트라 불리던 사람들이 어떻게 베트남 전쟁이라는 최악의 오류를 범했는지를 철저하게 분석했다. 1104페이지나 되는 이 압도적인 분량의 책을 읽다보면 소위 미국에서 최고의 엘리트라 불릴만한 인물들의 이름이 나온다.

 

하버드 대학교의 전설적인 교수 맥조지 번디, 미국의 포드 자동차 회사에서 일하며 사장자리까지 올랐던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하버드에서 엘리트 코스를 거친 뒤 대통령 자리까지 오른 존F케네디, 록펠러 재단의 회장자리를 지냈던 딘 러스크와 같이 미국에서 엘리트 코스를 거친 인물들 말이다. 이들은 베트남 전쟁이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전쟁에 개입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도 어떻게 하면 사상자를 줄인 채 더 많은 이득을 볼 수 있을지를 생각했으나, 자신들이 원하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들은 도미노 이론에 따라 베트남 전에 개입했고, 그 결과는 처참했다.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시작으로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한 미국은 1973년 파리평화조약을 맺고 철수하기 까지 총 58명의 병사를 잃었고, 미국 자존심에 크나큰 타격을 받았으며, 궁극적으로 전쟁에서 패배했다. 이 대부분의 결과를 최고의 인재들은 알고 있었지만,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1. .소 냉전시대

 

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은 서로 경쟁하는 체제에 돌입했다. 미국과 소련은 자신들의 체제 우월성을 입증하고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많은 곳에서 경쟁했고, 이는 한 나라의 좌우갈등이라는 형태로 표출되기도 했다. 해방 이후 한반도가 그랬고, 그리스가 그랬으며, 중국이 그랬다.

 

1949101일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은 장개석의 중국 국민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승리한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은 194910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다. 당시 중국의 국공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자 미국은 크나큰 충격에 빠졌다. 당시 미국의 공화당은 우린 중국을 잃었다.”라는 논리를 앞세워 민주당과 대통령 트루먼을 맹비난 했다. 중국 공산당의 통일 이후 미국은 매카시즘이라는 반공주의에 빠졌다.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49년 소련은 자력으로 수소폭탄을 개발했고, 19506월에는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때 미국의 동맹국이었던 한국은 북한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전쟁 초반에는 낙동강 전선 까지 밀리는 신세가 됐었다. 따라서 미국은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따라 반공주의에 빠져들었다.

 

2차세계대전 이후 베트남은 주체적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과거 베트남을 식민지배 했던 프랑스는 다시 식민지화하기 위해 베트남에 들어왔고, 이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가던 무렵인 1945년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은 일본에 맞서기 위해 미국과 협력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의 도움을 원했으나, 냉전이 격화되면서 미국은 프랑스편을 들었다. 냉전이라는 흐름에 따라 미국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식민세력 대 독립운동 세력으로 보지 않고,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라는 관점에서 해석했다. 따라서 미국은 한국전쟁이 격화됐을 무렵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의 프랑스 전쟁 비용 80%를 지원했다. 예상과 달리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1954년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며 프랑스가 물러났다.

 

1950년대 매카시즘이라는 광풍이 어느 정도 사그라지기 시작했었지만, 국제정세는 여전이 미국과 소련의 대립 연속이었다. 1958년에는 금문도를 놓고 중국과 대만간의 충돌이 벌어져 미국의 제7 함대가 투입되기도 했고, 1959년에는 쿠바에서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가 쿠바혁명을 완수했으며, 1961년에는 쿠바 미사일 사태가 터지고 독일에 베를린 장벽이 설치됐다. 즉 냉전 초기 미국과 소련간의 대립은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

 

베트남의 경우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약에 따라 2년 이내에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해야했지만, 호치민이 승리할 것이라 예상한 응오딘지엠은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가족정치와 부정부패 그리고 불교도 탄압으로 얼룩진 응오딘지엠의 독재 정치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1960년에는 응오딘지엠 정권에 맞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이 창설됐고, 남베트남의 농민들은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지하지 않았다. 전 세계적인 냉전이라는 대립 속에서 베트콩과 남베트남 국민들의 저항은 미국에게 있어서 단순한 좌우이념대립으로 보였다. 남베트남 정권의 내부적인 붕괴는 미국에게 있어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미국은 남베트남에 군사고문단의 숫자를 점차 늘렸다. 즉 미국에게 있어서 남베트남의 문제는 도미노 이론에 따라 미국이 개입해야 하는 대상이었고, 미국은 베트남 문제에 깊이 개입했다. 그러다 1964년 통킹만 사건이 터졌고, 미국은 대규모의 전투부대를 보내며 전쟁에 개입했다.

 

2. 남베트남 정권의 부패와 혼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이 지원한 남베트남 정권은 정통성을 비롯한 그 모든 면에서 호치민의 북베트남에게 밀렸다. 호치민이나 보 응우옌 잡, 팜반동, 레주언을 비롯한 북베트남의 지도자들이 프랑스 식민지 시절과 태평양 전쟁 그리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제국주의에 맞서 독립투쟁을 전개했던 혁명가 혹은 독립투사들이었던 데에 반해 남베트남의 대부분의 고위관료나 군 장성들은 프랑스 식민지 시기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에 빌붙어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운 민족반역자들이었다. 따라서 베트남인들이 어디를 더 지지할 지는 안봐도 비디오였던 것이다.

 

대표적으로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인 응오딘지엠을 예로 들자면, 그 또한 민족반역자였다. 1930년 그는 식민지 관료로 있으면서 공산당의 반프랑스 봉기를 진압했다.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이 들어오자 그는 독립운동이랍시고 일본에 빌붙었지만, 실패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그는 미국으로 망명하였다가, 전쟁 막바지에 베트남으로 돌아와 반공주의만을 외쳤고,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프랑스에 맞서 싸우지 않았다. 이렇듯 남베트남의 고위관료들은 프랑스에 빌붙었던 민족반역자들이었다.

 

1954년 제네바 협약에 따라 베트남이 남북으로 갈라진 뒤, 응오딘지엠은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남베트남의 초대 내각을 가톨릭으로만 구성했고, 가족정치를 일삼았다. 토지는 가톨릭 신자들에게만 할당이 됐고, 자신에게 반대되는 세력을 반공이라는 이름아래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숙청했다. 무엇보다 그는 베트남인 대다수가 믿는 불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심지어 1963년 수도 사이공에서 틱광둑이라는 고승이 소신공양하여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사건이 일어날 정도였다. 따라서 남베트남의 민중은 응오딘지엠을 반대했고, 베트콩이 민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남베트남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남베트남 고위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무능은 베트콩과의 전투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19631월에 일어난 압박 전투는 남베트남군의 무능력함을 여실히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였다. 압박 전투 당시 남베트남군 1500명이 300명의 베트콩을 상대했다. 결과는 베트콩의 대승이었다. 남베트남측은 86(83명 남베트남군 3명 미군사고문단)이 전사하고 미군 헬기 5대가 파괴되었던 데에 비해, 베트콩측은 총 18명이 전사했다. 이처럼 남베트남군은 전투에서도 무능력함 그 자체였다. 따라서 미국은 남베트남을 지키고 베트콩을 격퇴시키기 위해선 더 많은 군대를 파병해야 한다 생각했다.

 

3. 통킹만 사건: 이것은 미국의 침략전쟁이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하게 된 계기는 바로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accident)’였다. 196482일은 일요일이었다. 이날, 미국 언론들은 베트남 통킹(Tonkin) 만 해상에서 정찰 중이던 미국의 구축함 매덕스(USS Maddox)가 북베트남의 어뢰정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이것이 제1차 교전이었다. 1차 교전 당시 미 해군은 매덕스와 함께 작전하고 있던 동급의 구축함 USS 터너 조이(Turner Joy)가 반격을 가해 북베트남 함정 1척을 격침하고 2척을 파손시켰다. 북베트남군에서는 10여 명의 사상자도 나왔던 데해 바해 선제공격을 당했다는 미군은 한 명의 부상자도 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83일 제2차 교전이 있었다.

 

84, 미국의 존슨(Lyndon B. Johnson) 행정부는 매덕스와 터너조이 구축함이 또 한 차례 공격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두 번째 공격에 관한 전문을 받은 존슨 대통령은 즉각 전면적인 보복 공격을 지시했다. 존슨 대통령은 그날 저녁 존슨은 다음과 같은 대국민 선언문을 발표했다.

 

미국의 함정들은 공해상에 있었다. 미국의 함정들은 방어적 태세만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전쟁을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북베트남의 이러한 불법행위로 인하여 우리의 남베트남 국민과 정부에 대한 총체적인 지원은 더욱 배가될 것이다.”

 

이는 사실상 선전포고였고, 1965년 미국은 북베트남에 대한 북폭에 나섰다. 미국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최신식 무기인 B-52 폭격기를 비롯한 최신식 항공기들을 동원하여 북베트남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통킹만 사건은 이에 대한 명분을 싫어줬다. 따라서 전쟁 초기 미국인들은 이 사건에 대해 그리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1968년 구정 공세가 일어난 뒤 반전운동이 격화됐고, 1971년 미국의 양심적인 지식인 대니얼 엘스버그(Daniel Ellsberg)가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를 세상에 공개하면서 미국정부의 조작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통킹만 사건을 조작했다는 얘기다. 일각에서는 베트남 전쟁이 북베트남의 호치민이 일으킨 전쟁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호치민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일각의 주장에 따르면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에 간첩을 침투시켰고, 북베트남의 꼭두각시라 할 수 있는 베트콩이 미국이 전면개입하기 전 까지 남베트남군과 교전했기 때문에 북베트남의 침략전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베트콩은 어디까지나 남베트남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창설된 조직이었고, 남파됐던 세력들도 대부분의 경우 어디까지나 남쪽 출신이었다. 북베트남은 베트콩을 지원했을 뿐이지 이를 노골적인 북베트남의 침략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리고 일각에서는 미국이 북베트남을 침략한 적이 없다 하는데, 전쟁 시기 미국 또한 그린베레를 비롯한 특수부대를 북베트남에 침투시켰고, 대규모 폭격을 감행했다. 즉 나치독일의 영국 대공습을 침략전쟁이 아니라 할 수 없듯이, 북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대규모 폭격도 미국의 침략전쟁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미국 스스로 베트남 전쟁을 자신들의 침략전쟁으로 인정했고, 전쟁에 개입하기 위해 무리하게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였기에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침략전쟁이 맞다.

 

4. 미국의 패배

 

1964년 통킹만 사건 이후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한 미국은 북폭과 동시에 지상군을 파병했다. 19653월 미국의 지상부대가 베트남의 다낭에 상륙했다. 다낭을 시작으로 미국의 지상군 파병은 계속됐다. 이와 동시에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과 호주 필리핀에서도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했다. 미국과 북베트남군의 첫 교전은 캄보디아 국경지대인 이아드랑에서 일어났다. 이아드랑 전투에서 미군은 막강한 화력과 헬기를 동원한 신속한 기동력으로 북베트남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아드랑 전투만 보더라도 미군과 북베트남군 전사자 비율이 1:6이었다. 미군은 북베트남군과의 교전에서 항상 적은 전사자 비율을 냈다.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 미군은 베트콩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듭했다. 1967년 베트남에서의 미군 전사자는 총 2만 명이 넘었지만, 일반인들은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1968년에 반전되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베트남의 대명절 구정을 틈타 기습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구정 공세 시기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남베트남 전역에서 공격을 가했다. 베트남의 옛 수도 후에가 점령됐고,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은 전쟁터로 돌변했다. 구정 공세 초기 베트콩은 미국대사관 1층을 점령했고, 이는 미국인 기자들의 전파를 통해 미국 전역에 생중계됐다. 구정 공세는 사상자 비율로만 따졌을 때 미국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구정 공세 1달 기간 동안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3만 명 이상이 전사했던 데에 비해, 미군 전사자는 2천명 안팎이었고, 남베트남군과 나머지 연합국 군대의 전사자를 합쳐도 6천명 안팎이었다.

 

그러나 구정 공세로 인하여 우린 베트남 전에서 이기고 있습니다.”라고 선전을 했던 린든 존슨이 말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미국 내에서는 반전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 결과 그해 린든 존슨은 재선에 성공하지 못했고, 베트남 문제는 고스란히 대통령으로 당선된 리처드 닉슨에게로 넘어갔다. 리처드 닉슨은 1969년부터 단계적으로 철수하기 시작했으나, 결고 쉽게 철수하지는 않았다. 그는 베트남화 정책이라고 하여 점진적으로 철수했지만, 1970년에는 캄보디아를 침공하고, 1971년에는 라오스를 침공했다. 1972년에는 마지막 수단으로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대규모 폭격을 북베트남에 감행한 뒤 19731월 북베트남과 파리평화조약을 맺고 철수했다. 따라서 남베트남을 지키겠다는 미국의 계획은 실패했고, 미국은 베트남에서 완벽히 패배했다. 그리고 2년 뒤 북베트남과 베트콩은 남베트남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여 사이공을 함락시킴으로써 통일을 이룩한다.

 

5. 결론: 역사는 반복된다.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최고의 인재들이라는 책에서 미국의 엘리트라 할 수 있는 그들이 엘리트인 것과는 상관없이, 자신들만의 오만에 빠져 최악의 실수를 저지르는 과정을 낱낱이 보여준다. 미국 최고의 인재들은 2차세계대전 당시 자신들의 조국이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것과 과거 추축국이던 나치독일과 일본 제국을 자신들 조국이 채택한 이념을 선택하게 한 것에 자부심을 느꼈지만, 한계에 대해 생각지 않았다. 한국전쟁 시기 중공군 개입으로 인한 자신들의 실책에 대해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최고의 인재들은 베트남에 개입할 때 자국우월주의와 인종주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베트남 전이라는 실수를 저질렀고, 오판했다. 거기에는 전쟁이라는 행위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무지함이 반영됐다. 그리고 그 결과는 미국의 베트남전 패배였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사람은 실수를 한다. 그 실수를 통해서 또 다른 실수나 실책을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 가장 큰 교훈이다. 그러나 미국은 베트남 전쟁이라는 최악의 오류를 저질렀음에도 같은 실수를 반복했고, 그 실수는 현재진행형이다. 대표적인 예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예로 들 수 있다. 미국의 네오콘들과 자칭 보수주의자들은 이라크 민주화와 대량살상무기 해체를 핑계로 이라크를 침공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이유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그 나라의 민주화와 같은 것이 아니었다. 바로 이라크에 매장되어있는 어마무시한 양의 석유를 빼앗기 위함이었다. 거기다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은 1980년대 미국이 지원하던 세력이었다. 이라크 전쟁에 개입했던 미국은 결국 이라크에서 발을 뺐다.

 

20019.11테러 이후 미국이 개입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2019년인 현재도 진행 중이다. 현재 미국에 맞서 싸우고 있는 탈레반은 1980년대 미국이 지원했던 무자헤딘 세력들이다. 즉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이렇듯 미국은 베트남 전 이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하여 제2 3의 베트남을 치렀고, 현재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제2의 베트남 전을 치르고 있다. 앞으로의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어떻게 나갈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건 현재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제2의 베트남 전쟁을 치르고 있고, 이는 일방적인 제국주의 침략전쟁이라는 사실이다. 더 나은 세상과 평화를 위해선 미국 정치인들이 인식이 바뀌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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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미좌파가 아이언맨보고 스타벅스 커피 먹는 것은 잘못됐다?

최근 어떤 자유한국당 수구주의자가 올린 동영상을 봤다. 그 영상에선 다음과 같은 얘기가 나왔다.

˝야 자본주의가 얼마나 좋아?˝
˝왜 이런 자본주의를 싫어하는거야?˝
˝반미 외치는 새끼들 그렇게 미국이 싫고 자본주의 싫으면 사회주의 북한 가서 살아!˝
˝미제가 어떻고 하는 ㅅㄲ들 스타벅스는 좋다고 커피 빨고 있지.˝
˝ㅅㅂ미국 싫다면 아이언맨은 왜 영화표까지 사가며 줄서서 보냐?
이런 등신같은 것들!!˝
˝미국 싫으면 중국판 짝퉁 손오공 나오는 거나 보라고˝

어쩌다가 보게된 영상이지만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우리가 미국을 비판하는 것은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정책과 정치적인 영역이다. 즉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문화를 구가하는 행위는 별개의 영역이다. 그리고 그렇게 보자면 수구 꼴통들은 현중국을 극혐하니, 중국에서 만든 중국산 옷 팬티 티셔츠도 입지 말아야 하고 중국산 가구도 쓰지 말아야 하며 중국 음식 짜장면도 먹지 말고 갖다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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