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자 김근태 평전 - 희망을 남기고 간 한 아름다운 투사의 생애
김삼웅 지음 / 현암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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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1,2년 전)까지만 해도 김근태라는 사람이 누군지 몰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떠한 일을 했는지 잘 몰랐던 것이다. 그러던 중 알라딘에서 김삼웅 선생의 서적들을 검색하다 내 눈에 가장 인상적으로 들어온 책 제목이 있었다. 바로 ‘민주주의자 김근태 평전’이다. 민주주의자라는 그 단어가 가장 끌렸다. 그리고 이 책을 사서 최근에야 읽게 됐다.


우선 김근태의 행적을 소개해볼까 한다. 김근태 그는 1947년 부산 소사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학교 교장선생님이었고 그 살기 힘든 시절 그의 집안 형편은 살만했다고 한다. 집안 형편은 먹고살 만 했지만 아버지의 직업이 교장선생이었기에 자주 이사를 하여 학교에 제대로 정착할 수 없었다. 그래도 성적은 우수했기에 1965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1965년은 박정희 정권이 한일회담을 단순히 경제적 이익을 위해 졸속으로 끝내려 했던 시기이다. 청년김근태는 박정희 정권이 졸속 협상에 반대하여 다른 대학생들처럼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였다.

한일협정 반대 학생운동에 참여하면서부터 김근태는 학생운동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1967년 서울대 상대 대의원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해 9월 대통령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벌이다 연행됐고 학교에서 제적당한 뒤 군대로 끌려갔다. 1970년 병장으로 만기 전역한 김근태는 다시 학교에 복학했다. 그가 복학하기 무섭게 박정희는 장기집권을 위한 절차를 밟았고 김근태는 이에 반대하여 박정희 독재에 저항하였다. 1971년 그는 서울대 내란음모 사건으로 수배당했다. 그때부터 기나긴 수배 생활을 하였다. 수배 생활 도중 위장 취업하여 돈도 벌었고 후에 부인이될 민주화 동지인 인재근을 만나 결혼하였다. 1979년 박정희가 자신의 부하 김재규에게 총에 맞고 사망하였다. 18년간 지속되던 유신독재는 막을 내렸고 김근태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밑에서 세력을 키워나간 전두환을 비롯한 군부들은 12,12 쿠테타를 감행하고 1980년 광주를 피로 물들였다. 전두환 독재에 반대한 김근태는 1982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하고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김근태는 조직적으로 민주화운동을 전개해 나갔고 83년 기관지 <민주화의 길>을 창간하였다. 그러던 1985년 8월 서울대 민주화추진위 배후 조종 혐의로 체포되어 전기고문, 물고문, 통닭구이, 구타를 비롯한 인간으로서 버티기 힘든 아주 잔혹한 고문을 22일간 당한다. 그 잔인한 고문을 가장 악랄하게 한 이가 바로 이근안이다. 그 고문 사실은 후에 면회를 왔던 그의 아내 인재근 씨를 면회한 다음날 폭로되었다. 그러나 잔악한 전두환 정권은 그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5년형을 선고한다. 수감 중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일어나고 1987년 6.10민중항쟁으로 전두환 독재는 막을 내린다.

1988년 그는 2년 만에 석방되었고 옥중수기 [남영동]을 출간한다. 1989년 그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을 창설에 참여하여 정책실장을 맡는다. 그러던 1990년 민자당 반대시위를 하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2년형을 받고 1992년 석방된다. 그 뒤 여러 활동을 하다 1996년 제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1997년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그리고 1999년 김근태는 국민정치연구회를 창립하여 지도위원을 맡고 2000년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으로 당선된다. 2002년 당시 대선에선 대통령 후보로 나왔다 노무현 후보에게 힘을 보태었고 노무현 대통령 당선 뒤 그는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2004년 김근태는 보건복지부장관에 취임하여 약 2년간 가난한 사람들과 빈민들 노숙자들의 편의와 권리를 위해 헌신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했던 김근태지만 한미FTA협상당시 빈부적 양극화를 우려하여 노무현의 한미FTA협상에 반대 했고 국민들과 함께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2008년 이명박 집권당시 한양대에서 한국정치학을 초빙교수로 강의 하였지만 이명박의 미국산 쇠고기 파동에 반대하여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에도 아주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그 외에도 많은 집회에 참가하여 힘없는 약자들 시민들을 위해 항상 투쟁하였다. 그러던 2011년 민주화 운동 당시 고문으로 생긴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2012년을 점령하라”라는 말을 남긴 채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근태 그는 박정희 전두환 시절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고 민주화 이후에는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해 서민들이 보다 더 잘사는 세상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다. 군사독재 하에서 그는 잔혹한 고문을 버텨냈고 그 이후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없는 이들을 위해 투쟁하였다. 2000년대 당시 그는 정치권에서 여러 직책을 지냈지만 절대로 사치를 즐긴 적이 없다. 부자들의 인기 스포츠 골프를 하지 않았고 매주 주말마다 동네 사람들과 축구를 즐겼다. 2004년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던 그는 노숙자 체험을 직접하며 그들의 고생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80년대 자기를 아주 잔인한 수법으로 고문했던 이근안을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주고자 했다. 만일 내가 김근태였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용서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김근태는 용서했다. 이것이야 말로 김근태가 가장 대단한 이유라고 본다.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 시기에는 정치적인 민주주의를 위해 2000년대에는 못사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이가 바로 김근태다. 막심한 고문을 당했던 그의 과거와는 다르게 그는 항상 밟게 웃었다. 그리고 불의에는 항상 저항했다. 2008년 광우병 사태때 2009년 용산 참사때 그리고 그 외의 수많은 불의한 일이 벌어질 때 그는 투쟁을 지속했다. 김근태 평전을 집필하신 김삼웅 선생님의 목격담에 의하면 그는 시위도중에도 항상 젊은이들을 시민들을 챙겼고 추운 겨울에 집회할 때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따뜻한 커피와 음료를 옆 사람에게 다정다감하게 나눠줬다 한다. 그만큼 그는 친 서민적이었고 탈권위주의적이었다. 김근태가 죽기 전 그는 박근혜의 당선에 대한 예상을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았고 “2012년을 점령하라”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염원과는 다르게 박근혜는 집권했고 대한민국을 박정희 시대로 몰고 갔다. 2016년 이대총장 사퇴시위로 시작된 박근혜 퇴진 집회로 국민들은 박근혜 정권을 몰아냈고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김근태는 2012년을 점령하라 했지만 우리는 2017년을 점령함으로써 그의 바람을 성공시켰다. 적어도 난 그렇게 믿고 싶다. 무튼 김근태 평전을 집필해주시고 일일이 자료를 김삼웅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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