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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여운형의 연설하는 모습)
몽양 여운형은 조선건국동맹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활동 그리고 좌우합작운동까지 해방 정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지도자였다. 또한 그는 전설적인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며, 좌와 우를 총망라할 수 있던 지도자일 것이다. 젊은 시절 독립운동에 뛰어든 여운형은 1922년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레닌과의 회담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고, 레닌과의 만남은 그가 사회주의를 포옹할 수 있는 역량을 길렀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은 여운형과 레닌의 만남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은 적백내전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식민지 해방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이른바 제3 인터내셔널을 창설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1921년 11월 미국에서 시작된 워싱턴회의에 맞대응하여,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주최하는 극동피압박민족대회(제1차 극동피압박인민대회)를 개최했다. 사실 수많은 독립운동 세력들이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실망했던 것처럼, 1921년 미국 워싱턴회의도 적잖은 독립운동가들을 실망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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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있던 몽양 여운형은 우사 김규식·김상덕·조봉암 등 도합 56명과 함께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했다. 극동피압박민족대회는 소비에트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개최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장소가 이르쿠츠크에서 수도 모스크바로 바뀌었다. 당시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이 대회에 각국의 대표자는 총 144명이었는데, 한국이 56명, 중국이 42명, 일본이 16명, 몽골이 14명, 부리아트 3명, 인도 2명이었다. 압도적으로 한국인이 가장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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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극동피압박민족대회 모습, 카를 마르크스 흉상이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당시 중국 상하이에 있었던 여운형은 김규식 등과 함께 소비에트 러시아의 이르쿠츠크로 향했고, 주최 측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뒤에 모스크바로 갔다. 당시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까지는 10일이 걸렸지만, 모스크바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이상적인 도시였다. 레닌의 볼셰비키 정권이 피압박민족해방과 반식민지 투쟁을 지원한다고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여운형은 우렁찬 연설을 듣게 됐다. 그 연설은 바로 레프 트로츠키의 연설이었다. 여운형은 대회가 열리기 며칠 전 트로츠키의 연설을 들었는데, 이후 그는 당시 받았던 감동에 대해 1936년 조선중앙일보에 실은 <나의 회상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그렇게 훌륭한 웅변을 처음 들었다. 대중들은 손벽을 치고 소리를 지르고 발을 구르면서 그야말로 사자처럼 포효하는 이 거인 앞에 미친 듯이 흥분하는 것이었다.”
이후 대회에서 조선의 대표자격으로 연단에 오른 여운형은 유창한 영어로 조선독립의 이유와 현재 조선인이 일제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을 소개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호소했다. 대회는 조선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맺으며 끝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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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 피압박민족대회 사진, 사진 안에는 여운형과 김규식도 있다.)
“조선혁명은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그 정부를 격려하고 수정함으로써 수행되어야 한다. 조선은 공산주의에 지식이 없는 농업국이기 때문에 민족주의를 강조해야하며, 제1차적 목표를 농민에게 두어야 한다.”
대회에 참석했던 여운형은 회장 안에 들어섰을 때, 맨 앞줄 단상 밑에 대머리를 한 인물이 머리를 숙인 채 왔다갔다 하는 것을 봤고, 그가 바로 블라디미르 레닌인 것을 알아봤다. 이후 여운형은 자신이 본 레닌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때, 저 쯤 되는 인물이면 회의 시작 직전 만장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맨 나중에 입장하는 것이 보통일 터인데 하는 생각을 해봤다.”
회의 기간 2주 동안 몽양 여운형은 레닌과 두 차례 회담했다. 레닌과의 첫 번째 회담은 일본인 가타야마를 동반했으며, 레닌은 조선의 독립은 일본의 혁명은 같은 과제로서 서로 배려와 양보 속에서 동반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씨가 쓴 『몽양 여운형 평전』에는 당시의 회담 내용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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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붉은광장)
“처음에는 일본인 대표 가타야마와 동반했고 두 번째는 중국인 대표 구추백과 함께 만났다. 이 자리에서 레닌은 먼저 가타야마를 향해 “동지는 조선독립을 위하여 생명을 바쳐 투쟁하겠는가?”라고 묻고, 여운형을 향해서는 “동지는 일본의 혁명을 위해 싸울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두 사람이 다같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대답하자 레닌은 말을 계속하여 “다 같은 공산당이면서도 소련 공산당과 핀란드 공산당은 불화가 생겼었다. 이것은 소련 사람의 우월감 때문이다. 물론 같은 혁명 동지라 하더라도 사람인 이상 완전히 감정을 초월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서로 이해와 양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조선인과 일본인이 서로 악수를 하면 양국의 혁명은 무난할 것이다.”라고 자신의 견해를 말했다. 다음날 구추백과 같이 가서 다시 레닌을 만났을 때 레닌은 손문의 혁명운동을 지지하고 자기가 손문에게 편지를 보냈는 데 그 사이 받아보았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손문을 적극 원조하겠다는 뜻을 말했다.”
출처: 몽양 여운형 평전 p.191~192
여운형은 이렇게 모스크바에서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났으며, 이후 그의 이러한 경험은 공산당에 대해서 다소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 계기였을 것이다. 여운형이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을 만났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별로 없다. 이후 여운형은 손문과 장제스, 마오쩌둥, 호치민 등의 인물하고도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