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삼류(B급) 영화들
1933년에 나찌가 시작한 ‘기근―대학살’이라는 흑색선전은, 반세기 뒤인 1983년에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 ≪절망의 추수(Harvest of Despair)≫로, 그리고 1986년에 지식계급을 대상으로 로버트 콘퀘스트가 쓴 ≪비탄의 추수(Harvest of Sorrow)≫라는 책으로 그 정점에 달했다.
우끄라이나 ‘집단 학살’에 대한 영화 ≪절망의 추수≫와 캄보디아인의 ‘대량 학살’에 관한 영화 ≪킬링 필드(Killing Fields)≫는, 공산주의는 대학살과 동의어라는 것을 인민들의 사고에 주입시키고자, 레이건 패거리들이 만든 가장 중요한 두 작품들이었다.
≪절망의 추수≫는 1985년 뉴욕에서 열린 “제28회 국제 영화 및 TV 페스티벌”에서 금메달과 최우수 트로피(Grand Trophy Award Bowl)를 수상하였다.
영화에 나오는 ‘집단학살’에 대한 가장 중요한 목격자로서의 증언을 독일 나찌와 그들의 이전 협력자들이 하였다.
스떼판 스끄리프닉(Stepan Skrypnyk)는 독일 점령 기간에 나찌 잡지 ≪볼린(Volyn)≫지의 수석 편집장이었다. 3주 후에, 그는 히틀러주의 당국의 은총으로 우끄라이나 정교회의 평신도에서 주교로 승진했으며, ‘기독교의 윤리’라는 이름으로 히틀러주의인 새 질서(Die Neue Ordnung)를 위한 사악한 선전 활동을 실행했다. 이후, 그는 적군에 쫓겨 달아나다, 미국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또 다른 목격자인, 독일인 한스 본 헤르와스(Hans von Herwath)는, 쏘련에서 블라소프(Vlasov) 대장의 러시아 나찌를 위한 용병으로 쓰기 위해, 쏘비에뜨 죄수 중에서 신병을 모집하는 일을 하였다.
또한 영화에서 등장하는 그의 동료 안도르 핸케(Andor Henke)는 나찌의 외교관이었다.
1932년에서 1933년의 ‘기근―대학살’에 대해 예증하기 위해서, 작가들은 1917년 이전 뉴스 화면이나, 영화 ≪Czar Hunger≫(1921-1922), ≪병기고(Arsenal≫(1929)의 일부 장면들이나, 세계 제2차 대전의 영화인 ≪레닌그라드 포위공격(Siege of Leningrad)≫의 장면을 사용하였다.
1986년에, 영화 제작자들이 토틀에 의해서 공개적으로 공격당할 때, 영화 막후에서 대부분의 연구를 수행한 마르코 카린닉(Marco Carinnik)이 공식적인 발표를 했는데, ≪Toronto Star≫에서 몇 문장 인용해 본다.
“카린닉은, (영화에 나오는 ― 역자) 기록 장면 중 어떤 것도 우끄라이나 기근과 관련이 없으며 ‘1932-1933년’에 찍은 극히 적은 수의 사진만이 믿을 만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영화의 광고 장면으로도 쓰였던, 여윈 소녀가 나오는 마지막 극적인 장면은, 1932에서 1933년 기근의 모습을 찍은 것이 아니다’라고 카리닉은 말했다.”
‘“나는 이런 종류의 부정확함이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회견에서 말했다. “나는 무시당했다.”’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