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미국의 세균전 문제는 전쟁 2년째인 1952년 초 불거졌다. 그해 2월 22일 북의 박헌영 외무상은 미군이 세균무기를 사용하고 있다고 유엔에 항의했다. 박 외무상은 세균을 지닌 다량의 곤충이 1월 28일부터 북측 지역 상공에서 미군기로 살포되었다면서 ‘전 세계 인민에게 간섭주의자들의 불법행윌르 조사할 것’을 호소했다. 이틀 뒤인 2월 24일엔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가 미국에게 세균전 중단을 촉구했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또 미군 비행기가 2월 29일 이래 중국의 화북과 동북부에서 세균전을 벌이고 있다고 3월 8일 거듭 비난성명을 발표했다.
그러자 당시 소련의 야코프 말리크 대표가 유엔 총회에서 북과 중국의 입장을 지지한 반면 미국의 대표인 벤자민 코헨(Benjamin Cohen) 대사는 ‘그들의 주장은 진실성이 없다’고 일축하면서 미국정부는 이런 ‘불성실하고 경우 없는 비난을 예상하고 있었다’고 부인했다.
(스티븐 엔디콧의 저서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
이렇게 불븥은 미국의 세균전 논란은 파문을 일으켰다. 세균(생물할)무기는 1925년 6월 체결된 제네바의정서(Geneva Protocol)에서 화학무기와 함께 이미 전쟁 때 사용이 금지됐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731부대가 만주지역에서 생체실험을 벌이고 세균전을 자행한 사실이 드러나 큰 충격을 주었다. 결국 전쟁범죄로 규정되고 관련자들이 처벌받은 터인데 다시 불거진 미국의 세균전 문제는 국제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논란이 식지 않자 미국은 유엔을 통해 세계보건기구(WHO)가 국제적십자사의 현지 방문조사 등을 제안했지만 북과 중국은 이를 거부했다. 세계보건기구는 당시 북·중국과 교전 중인 유엔의 기구였고 또 국제적십자사의 경우 유력 회원인 스위스 국제적십자위원회(ICRC)가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의 가스 수용소의 존재를 은폐한 전력이 있었다. 더욱이 당시 ICRC위원장은 바로 문제가 된 2차 대전 당시의 적십자위원이었다.
(2010년 아랍 언론계 알 자지라에서 방영했던 한국전쟁 세균전 관련 내용 보도)
대신 북과 중국은 1952년 3월 29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세계평화의회에 중립적인 과학자들이 참여하는 국제조사단 구성과 그를 통한 현지조사를 제안했다. 세계평화의회 집행위원회는 이를 받아들여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소련 등 6개 국적의 지명 과학자 7명으로 된 국제과학위원회(위원장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를 파견했다. 국제과학위는 그해 7월부터 두 달 가까이 중국과 북에서 현지조사를 벌이고 피해자와 목격자, 그리고 미 공군 포로들을 직접 인터뷰했으며 중국과 북측 보건의료 관계자들도 만났다. 국제과학위는 현장 방문 결과와 수집 자료 등을 토대로 670쪽(요약문 64쪽과 부록 605쪽)에 이르는 ‘한국과 중국에서의 세균전에 관한 국제과학위원회 사실 조사보고서(Report of the International Scientific Commission for the Investigation for the Facts Concerning Bacterial Warfare in Korea and China, 약칭 ‘니덤 보고서’라 불린다)’를 작성해 중국에서 발간했다. 일부 내용을 소개한다.
“조사단(국제과학위원회)은 결론적으로, 미 공군은 일본군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질병을 널리 퍼뜨리기 위하여 사용했던 그것과 정확히 같은 것은 아니더라도 거의 유사한 방법을 한국에서 사용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조사단의 의견으로는 괴질병에 걸려있는 많은 곤충들이 1952년 4월 4일부터 5일에 걸쳐 야밤을 통해 비행기로 강남지방으로 운반되었음이 분명하다. 이 비행기는 미국의 F-82 쌍발 야간 전투기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상기의 사실로 보아 조사단은 탄저열균을 가진 곤충과 거미는 3월 12일에 요동지방의 이 작은 도시 가까이에 적어도 1대의 미국 항공기에서 적어도 1개의 특수한 용기를 통해 투하되었다고 결론 내리지 않을 수 없다.”
“북조선과 중국의 인민은 실제로 세균병기의 목표가 되었다. 이들 병기는 목적에 따라 대단히 다종다양한 방법을 구사하는 미군 부대에 의해 사용되었다. 이들 방법에는 일본군(저자 주:731부대)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사용했던 것을 개발한 것도 있을 것이다. 조사단은 일보일보 전진하여 이런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것은 마지못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왜냐면 조사단원들은 이런 비인도적인 기술이 세계 인류의 비난을 무시하고 실시되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즉각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라고 반발했다. 메튜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미국동군 사령관은 “(공산주의자들의)온갖 악의에 찬 거짓선전 중에서도 세균전 주장은 미국인들과 자유세계에 대한 가장 터무니없는 경고”라고 반박했다.
반면 북은 미군이 이미 1950년 겨울부터 세균전을 벌였다고 주장한다.
“놈들은 쫓겨 가면서 일시적으로 강점하였던 공화국 북반부지역(평양시, 평안남북도, 함경남도, 강원도, 황해도)에 천연두 병균을 살포하였다. 그리하여 당시까지 천연두가 전혀 발생한 일이 없었던 이 지역들에서 천연두 환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1951년 4월에 이르러 천연두 환자는 3,500여 명에 이르렀으며 그중 10%가 사망하였다.”
북은 또 미군 비행사 포로들에 대한 심문 등을 근거로 세균전이 실험단계와 작전단계로 나뉘어 진행됐다는 분석을 내놨다. “첫 단계(실험단계)에서는 주로 효과적인 세균탄 투하의 목표를 선정하며 투하방법 및 세균전 전술을 련마하는데 목적을 두었다면 둘째 단계(작전단계)에서는 오염지대를 설정하고 집중적인 투하를 일층 강화할 것을 계획”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험단계가 1951년 10월 시작됐다고 하는데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해외보도가 지난 2010년에 나왔다. 그해 3월 17일 아랍권 위성채널 <알 자지라>가 한 다큐멘터리에서 미군이 한국전쟁 당시 북에서 세균전 실험을 명령한 문서를 발견했다며 “작전 상황에서 특정 병원체의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대규모 현장실험을 시작할 것”을 명령한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1951년 9월 21일자 문서를 공개한 것이다. 이 문서는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았다고 한다. 미군의 세균전 실험단계가 1951년 10월 시작됐다고 밝힌 <조선전사> 27권이 출간된 시점이 1981년이다. 세균전에 관한 그 기록의 신빙성을 입증하는 미군의 비밀문서가 30년 만에 한 아랍계 언론의 탐사보도로 세상에 공개된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 살포된 것으로 추정되는 벼룩들)
작전단계는 1952년 5월 하순부터였다고 한다. 특히 이때엔 “조산빈더 중부를 횡단하는 한 개의 ‘감염지대’를 설정하고 이 지대에 일상적으로 세균탄을 투하함으로써 전염병을 만연케 하여 우리의 후방공급이 이 감염지대에서 차단되여 전선에 도달되지 못하게 하려는 악랄한 목적을 추구하였다”고 주장한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세균전 실행 지도)
북은 세균 공격이 1953년에도 계속됐다고 한다. 북은 “1953년 1월 9일 함경남도 혜산군 장락리에는 1평방메타당 1만 마리의 파리, 거미, 개미, 딱장벌레들이 투하되였으며 3월 10일에는 북청군내 19개 리와 신창군의 8개 리, 함흥시 주변 3개 리에 파리, 벼룩, 거미, 개미 등 12종의 새균독충들이 산포”됐고, “2월 14일부터 4월 24일까지 2개월 동안에 평안북도 곽산군, 태전군, 녕변구느 정주구느 박천구느 황해도 안악군, 황주군, 옹진군, 금천군, 토산군, 재령군 등지에 20여 회에 걸쳐 거미, 파리, 모기, 딱장벌레 등 9종의 세균 독충이 산포되였다”고 주장했다.
북은 이런 미군의 세균전이 “오랜 세균전의 ‘경험’을 가진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적극적인 협력 밑에 감행”됐다고 본다. 즉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조선 침략전쟁에서 미제 침략자들에게 야만적인 세균전 계획 작성을 적극 도와주었으며 일본 령토를 세균전의 공격기지, 공급기지로 내맡기였을 뿐 아니라 세균무기 연구와 세균탄 제작, 그리고 세균전 감행방법 등의 ‘경험’과 그에 대한 새로운 연구성과들을 제공해주었다”고 단정했다.
(한국전쟁 당시 세균전을 규탄하는 중국 측 선전물)
북은 미군이 화학전도 벌였다고 주장했다. 주로는 “전선과 그 린접 지대들에서 화학무기”를 사용했다는데 시작은 “1951년 5월 6일 평안남도 남포시에(미공군기가)일반 폭탄과 함께 독가스탄을 투하한 것”이라는데 이로 인해 1,370여 명의 주민이 사망했다고 한다. 같은해 7월 6일과 9월 1일엔 “원산시 풍포리와 황해도 여러 개 지구에 최루성 및 질식성 가스탄이 투하되여 수십 명의 중독자와 희생자가 발생”했고 이듬해인 1952년 1월 9일 강원도 문천군 울림면 학성리의 수십 호 농가들에 “5발의 질식성 가스탄을 투하하여 평화적 주민을 즉사시키고 83명을 중독”시켰다고 했다. 또 그해 2월 27일부터 4월 26일까지 2개월 동안엔 미군 보병부대들이 “질식성 및 최루성 가스탄을 41차에 걸쳐 아군 진지에 발사”하는 등 화학공격은 1953년에도 계속됐다고 강조했다.
미국 세균전의 ‘숨은 그림’찾기
한국전쟁 당시 세균전의 ‘숨은 그림’을 찾기 위한 국내외 언론과 학자들의 분투는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선구적 역할을 한 이는 공교롭게도 미국 언론인 존 윌리엄 파월(John W. Powell)이다. 그는 1947년부터 1953년까지 중국 상하이에서 영문 <월간 중국 리뷰(China Monthly Review)>를 발행했는데 자신이 직접 목격한 미국의 세균전 문제를 집중보도했다. 그러자 미국 정부는 잡지의 국내 반입을 금지하고, 1956년엔 그와 2명의 편집 실무자를 반역죄와 선동죄 등 13가지 범죄 혐의로 기소했다. 파월은 미국 정부에게 비밀문서 공개를 요구하는 등 완강히 대응해 기소는 철홰됐고, 미국 정부는 1961년 소송 자체를 취하했다. 이런 사실은 2000년 7월 2일 방영된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15회 ‘일급비밀! 미국의 세균전’편에서 소개됐는데 파월은 제작진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일급비밀! 미국의 세균전’편은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파월은 세균전 문제 추적을 계속해 1980년엔 2차 대전 직후 미국 정부가 일본 세균전 전범과 거래한 증거가 담긴 맥아더 사령관 관련 비망록을 입수해 <참여 아시아 학자 회보(Bulletin of Concerned Asian Scholars)>에 폭로하기도 했다. 여기엔 세계에서 처음 실시된 주요 생물학전 프로그램에 대한 기록이 들어있었다. 맥아더와 비망록을 주고받은 이들은 정보 보좌관인 찰스 월러비 소장, 법률 고문 알바 가핀터 등이었다.
미국과 일본의 세균전 ‘커넥션’의 절정은, 미국이 1947년 ‘마루타’로 악명 높은 이시이 시로 등 731부대 출신자들에게 생체실험 자료를 얻기 위해 그들과 직접 거래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는 2005년 8월 14일 당시 일본 가나가와대학의 스나이시 게이이찌 교수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서에서 발견한 2건의 기밀해제 문서를 언론에 공개해 알려졌다. 당시 일본을 점령한 미군정은 731부대원들에게 생체실험 자료와 교환 조건으로 15만~20만 엔을 주고 전범재판 기소를 면제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금액은 현재 2000만~4000만 엔(약 2억~4억원)에 이른다. 731부대장이었던 이시이 시로는 미국에게 협조하는 대가로 “전쟁범죄에 대한 사면을 서면으로 약속해 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미국의 세균전 문제를 심층 분석한 대표적 연구물은 캐나다 역사학자인 스티븐 엔디콧(Stephen Endicott) 교수와 에드워드 해거먼(Edward Hagerman) 교수가 1998년에 쓴 <The United State and Biological Warfare(미국과 생물학전)>이다. 국내에선 2003년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 (도서출판 중심)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됐는데 미국 생물학전의 기원에서부터 일본과의 커넥션, 세균전 프로그램 연구개발 및 작전계획 과정, 한국전쟁에서 세균전 문제 등을 비밀 해제된 미국 정부 문서자료 등을 근거로 치밀하게 추적 분석했다. 두 저자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진과도 인터뷰를 했다.
국내 연구물로는 강정구 전 동국대 교수가 1996년 단행본으로 출간한 <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 (역사비평사)에서 10번째 주제로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을 다뤄 주목받은 바 있다.
출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p.84~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