훗날 북한 정권은 박헌영이 경성콤그룹 명단을 일제에 제공해 모두 체포하게 만든 대가로 자기만 살아남아 광주로 달아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성콤그룹이 붕괴한 것은 1년에 걸친 끊임없는 체포의 결과였지 하루아침의 일이 아니었다. 일제하 국내의 공산주의 조직들이 끝내는 모두 대규모 체포로 와해되고 마는 것은 어느 한 사람의 밀고가 아니라 일경의 집요한 추적 때문이었다.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공산당 재건의 최고 책임을 지고 들어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활동한 박헌영이 일제의 간첩으로 돌변해 산하 조직원 명단을 몽땅 넘겨주었다는 비방은 지나치게 악의적이다.

 

더구나 밀고의 대가라는 것이 광주에 내려가 3년 가까이 방직공장에서 인분을 져 나르고 벽돌공장에서 벽돌을 찍는 일이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 당시 전향자들은 반공 강연이나 학도병 모집 강연을 다니고 있었고, 그 대가로 편안히 살 수가 있었다. 가장 유명한 공산주의자의 한명인 박헌영이 전향했다면 다른 운동가들을 좌절시킬 수 있는 최고의 선전물로 이용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북한의 또 다른 주장대로라면 이 시기 박헌영은 이미 선교사 언더우드를 통해 미국의 간첩이 되어 있을 때였다. 아무런 금전적 대가도 명예도 없이 순수한 숭미 사상으로 미국을 위해 봉사했다는 그가 어느 순간 미국과 전쟁 중이던 일본의 간첩으로 돌변해 동료들을 몽땅 갖다 바쳤다는 주장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억지라고 볼 수밖에 없다.

 

출처: 박헌영 평전 p.218~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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