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역사는 2천년에 걸쳐 중국에 저항한 역사다. 베트남의 역사를 보면 쯩 자매의 저항부터 1979년 중월전쟁까지 아주 긴 세월에 걸쳐 중국의 침략을 받았는데, 놀랍게도 중국은 결과적으로 베트남을 완벽히 정복하지 못했었다. 이는 몽고 제국도 그러했고, 명나라도 그러했으며, 청나라 또한 그러했다. 몽고 제국의 침공이나 명나라의 지배는 수십년에 걸쳐 이루어 졌지만, 청나라의 침략은 제법 짧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건 베트남 민족이 청나라의 침공을 막아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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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우옌 후에 동상, 현재 베트남에서 청나라의 침략을 무찌른 명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청나라가 베트남과 전쟁을 치른 것은 프랑스에서 프랑스 혁명(French Revolution)이 일어나던 시점이었다. 당시 베트남에서는 떠이선(Tây Sơn)의 반란이 일어나서 내부에서의 세력 다툼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베트남 역사에 명성을 떨치는 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응우옌후에(Nguyễn Huệ)였다. 응우옌후에는 자신의 형제인 응우옌반냑과 응우옌반루와 함께 이 반란을 주도했었고, 베트남 내에서 세력을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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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이선 3형제)
1784년에는 300척의 함선을 동원한 태국군 3만 명이 캄보디아 땅을 거쳐 베트남 남서부 해안지대에 상륙했었는데, 소아이뭇 전투(Battle of Rạch Gầm-Xoài Mút)에서 태국군을 섬멸하는 활약을 펼쳤다. 1785년 1월 20일 태국군에게 휴전을 요청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던 태국군은 떠이산군을 섬멸하려 했으나, 도리어 자신들이 떠이선군에게 패전했다. 베트남측 기록에 따르면 여기서 태국으로 돌아간 병사는 3천 명도 안된다고 한다.
그 이후 기세를 몰아 응우옌후에는 응우옌쭈어을 멸하고 북진하여 1786년 7월에는 수도 탕롱(Thăng Long, 현재의 하노이)를 접수했다. 이로써 응우옌후에는 베트남의 왕이 되었다. 당시 베트남은 후레 왕조였는데, 그 후레 왕조의 마지막 왕은 청나라로 달아나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청나라의 양광, 즉 광동성과 광서성 총독이었던 손사의는 황제에게 “본래 안남은 우리의 옛 영토이니 레 왕조의 권위를 회복시켜 주고 나중에 병력을 보내 이를 지킨다면 안남을 또다시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상소문을 올렸고, 청나라는 29만 명이나 되는 대군을 손사의의 지휘 아래 베트남을 침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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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베트남 침공, 1788년 청나라는 베트남을 점령하기 위해 20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했다.)
베트남을 침공한 청나라군은 광서성과 운남성에서 두 갈래로 출발했고, 1788년 11월에 수도 탕롱에 입성했다. 청나라군이 탕롱에 입성할 때까지의 군사적 저항은 거의 없었다. 당시 탕롱을 지키던 떠이선군은 급히 철수해 타잉화(Thanh Hóa)에 진을 치고 퀴논에 상황을 알렸다. 이 소식을 들은 웅우옌후에는 청나라의 출병이 레 황제 복위가 아닌 베트남 지배에 있다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청나라와 일전을 벌이기 위해, 그해 11월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연호를 꽝쭝으로 정했으며, 직접 10만의 수륙 양군과 200마리의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북진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응우옌후에는 청나라군에 맞서 전격전을 시도했다. 1789년 1월 양국의 대명절인 구정을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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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우옌 후에가 지휘한 전격전을 표현한 인형)
1789년 1월 5일 새벽에 떠이선군이 기습을 가하자 청나라군은 대혼란에 빠졌고, 지휘관 손사의는 말을 타고 간신히 북쪽으로 도망쳤다. 응우옌후에는 먼저 탕롱으로부터 남쪽으로 90km 떨어진 닌빈에서 후레 왕조의 급조된 군대를 일거에 격파했고, 청의 주력군이 주둔 중이던 탕롱으로 신속히 이동했다. 그리고 1월 5일 밤에 탕롱의 외곽 방어거점이던 하호이와 응옥호이 요새를 점형하고, 다음날 정오 탕롱에 입성했다. 즉 여기서 청나라군이 대패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손사의가 도망을 치자 운남성 일대에서 주둔 중이던 청나라 군대는 이 소식을 듣고 본국으로 철수했다. 이렇게 해서 응우옌후에는 불과 12일 만에 청나라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렇게 끝난 것이 바로 베트남의 대청항쟁이었다. 이후 응우옌후에는 청나라에게 낮은 자세를 보였지만, 청나라는 패배했다는 사실에 굴욕을 느끼고 있었다. 청 조정은 “50만 대군을 동원해 베트남을 평정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막상 실현하지는 않았다.” 결국 청나라는 웅우옌후에를 안남국왕으로 책봉하고 더 이상의 침략을 단념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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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하노이에 있는 동다 공원)
이렇게 해서 응우옌후에의 대청항쟁은 베트남 저항의 역사에 자리매김했다. 1964년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던 시점에 보 응우옌 잡 장군은 디엔비엔푸 전투 승전 10주년 즈음하여 ‘디엔비엔푸 대첩과 동춘 승리의 궁극적 의의’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는다. 그 글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바익당
치랑(Chi Lang)
동다(Dong Da, Battle of Ngọc Hồi-Đống Đa)
디엔비엔푸(Dien Bien Phu)
우리는 이제 위대한 시대에 살고 있다네.
미래는 우리의 것일세.”
참고문헌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유인선, 이산, 2002
『천년전쟁』, 오정환, 종문화사, 2017
『베트남의 역사』, 유인선, 이산,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