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공 정부가 점점 신망을 잃음에 따라 이를 상쇄하기 위한 군사적 노력은 점점 더 필사적으로 변해 갔다. 점점 신망을 잃음에 따라 이를 상쇄하기 위한 군사적 노력은 점점 더 필사적으로 변해 갔다. 1967년 말 하원의 한 비밀 보고서는 베트콩이 남베트남 정부보다 다섯 배가량 많은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고 있는데 반해, 베트남 정부의 토지분배 프로그램은 사실상 답보상태에 이르렀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이렇게 말했다. “베트콩은 지주의 지배를 없애 버리고 부재지주와 G.V.N(베트남 정부) 소유의 토지를 땅 없는 사람들과 베트콩 당국에 협조하는 사람들에게 재분배했다.”

 

사이공 정부가 지지를 잃었다는 점은 1968년 초에 민족해방전선이 사이공을 비롯한 정부가 장악한 도시를 대대적으로 침투하는데도 현지 주민들이 정부에 경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이로써 민족해방전선은 기습공격(당시는 베트남의 신년 연휴인 구정(Tet)’이었다)에 착수, 사이공 심장부로 진입하고 탄손누트(Tan Son Nhut) 공항을 마비시켰으며 심지어 잠시 동안이지만 미국 대사관까지 점령했다. 비록 격퇴당하기는 했지만, 이 공격은 미국이 베트남에 퍼부은 그 모든 거대한 화력으로도 민족해방전선 자체와 그들의 사기, 그들에 대한 대중의지지, 싸우려는 의지를 파괴하지 못했음을 보여줬다. 구정 공세는 미국 정부 내에 베트남 전쟁에 대한 재평가를 야기했고 미국인들 사이에 더 큰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1개 중대의 일반 병사들이 저지른 미라이 학살은 베트남 민간인들에 대해 대규모 파괴를 가하려는 고위급 군 및 민간 지도자들의 계획과 비교하면 작은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1966년 초, 국방부 차관보 존 맥노턴(John McNaughton)은 북베트남 촌락에 대한 대규모 폭격이 기대한 만큼의 효과를 낳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른 전략을 제안했다. 맥노턴은 촌락에 대한 공습은 해외와 국내에서 반발의 물결이 높아지는 역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대신 이렇게 제안했다.

 

그러나 제대로 처리하기만 한다면 수문과 댐을 파괴하는 전략은 유망한 효과를 발휘할지도 모릅니다. 이를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 곳을 파괴한다고 사람을 죽이거나 익사시키지는 않습니다. 논에 관개되는 수량을 줄이고 식량을 제공하지 않으면 얼마 뒤에 기아(100만 명 이상이겠지요?)가 널리 확산될 테지요. 그 때 식량을 제공하겠다고 회담 테이블에서 말하면 된는 겁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의 인구 밀집지역에 대한 폭격과 마찬가지로, 대규모 폭격은 베트남의 평범한 국민들의 저항의지를 파괴하려는 목적 아래 이루어진 일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군사 목표물만을 폭격하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주장하긴 했지만, 정부는 폭격을 묘사하기 위해 나사를 한 번 더 돌려라같은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펜타곤 페이퍼에 따르면, 1966년 중 어느 때인가 중앙정보국에서 더 강력한 폭격 계획을 권고했는데, 중앙정보국의 표현대로 하면 정권의 의지 자체를 목표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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