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은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게시됐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프랑스가 물러나자 미국은 베트남을 남북으로 분단시켰다. 베트남을 분단시킨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반도 남쪽에서 그랬듯이 베트남의 이승만인 응오딘지엠을 내세워 친미 꼭두각시 정권을 수립하고 제네바 협정에서 약속했던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렸다. 이후 응오딘지엠 정권의 부정부패와 독재정치에 분노한 민중들은 1960년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을 창설하여 무장투쟁에 나섰다.
즉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군과 한국군이 ‘베트콩! 베트콩!’라고 비하하고 폄하하던 병사들은 사실 남베트남의 부패하고 반민중적인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투쟁했던 그리고 그 혁명적 대의를 이루기 위해 정글 속에서 죽어가고 희생했던 혁명가들이었다. 이런 점에 있어서 베트남 전쟁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호치민과 공산당의 민족해방전쟁이었다. 따라서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국은 과거 프랑스가 했던 짓들의 연장선상이었고 더 추악하고 잔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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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케 해변에 상륙한 미 해병대 대원)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던 미국이 자신들의 꼭두각시 정권을 위해 선택한 전략은 바로 군사고문단을 파견하는 방식이었다. 1950년대 중후반부터 미국은 베트남에 군사고문단을 배치했고. 이 고문단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리스와 한반도에서 그랬듯이, 반혁명 군대를 지원하고, 이른바 ‘빨갱이 소탕’에 나섰다. 이들의 규모는 1961년 미국의 존 F. 케네디가 집권하면서 대폭 증가했다. 1961년 당시 900명이었던 미군사고문단은 1963년 불과 2년 만에 16,00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더 나아가 케네디 정부는 네이팜 폭탄과 에이전트 오렌지를 포함한 다수의 고엽제 살포를 공식적으로 허가했다. 이에 따라 전쟁의 양상은 더 잔혹해졌다.
이런 지원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의 상황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가족정치와 독재정치로 악명을 떨치던 응오딘지엠의 비인간성은 1963년 6월 11일 틱광둑이라는 한 승려가 소신공양을 하면서 극에 달했다. 응오딘지엠의 무자비한 불교도 탄압으로 목숨을 잃은 고승 틱광둑의 소식에도 불구하고, 디엠 정권의 막장성은 더 극명하게 표출되었다. 응오딘지엠의 제수인 마담 누(본명 쩐레수언)는 “그 중놈이 바비큐가 된 게 뭐가 문제냐?”라는 식의 발언을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했고, 이에 따라 남베트남 민중의 분노와 미국 내에서의 여론도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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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낭에 상륙한 대규모의 미 해병대)
결국 미국은 CIA를 동원하여 쿠데타를 계획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1963년 11월 1일 미국이 주도한 쿠데타로 응오딘지엠은 사살됐고, 남베트남에는 즈엉반민이 이끄는 새 정부가 들어섰다. 물론 이 정부 또한 무능해서 또 다른 군부 내부의 쿠데타가 발생했고, 이로 인한 정권 교체는 1965년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남베트남 정권은 이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1963년 당시 베트콩은 남베트남 지역의 75% 이상을 장악한 상황이었다. 민중은 베트콩 편이었고, 디엠 정권 시기 건설된 전략촌들은 베트콩에게 흡수당했다.
남베트남의 군대는 전투에서 너무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 응오딘지엠 정권 시기 일어났던 압박 전투에선 300명의 베트콩이 1,500~1,700명 이상의 남베트남군에게 처참한 패배를 안겨주었는데, 이런 비슷한 상황들이 응오딘지엠 정권 몰락 이전과 이후에도 계속 반복됐다. 결국 미국이 또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그것은 바로 전쟁 참전의 명분을 조작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1964년 8월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북베트남에 대한 전면적인 선전포고를 감행했다. 물론 통킹만 사건은 사전에 아주 치밀하게 계획된 자작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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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을 환영하러 나온 남베트남의 여학생들)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했지만, 남베트남은 무너지고 있었다. 같은 해 11월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 근처에 있는 비엔호아 공군기지가 베트콩에 기습 공격을 받아 수십대의 항공기와 헬기가 파괴되었다. 12월 빈지아 지역에선 남베트남군과 베트콩이 교전을 치렀는데, 이 전투는 호치민의 표현대로 ‘작은 디엔비엔푸’였으며, 압박 전투 때와 같이 남베트남군은 참패하고 패주했다.
1965년 2월 플레이쿠에 있는 미군 특수부대 기지가 베트콩에 의해 기습 공격을 받아 8명의 미군이 사망하고 1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그로부터 6일 뒤 미국은 북베트남에 대한 보복 공습 명령을 내렸고, 이른바 롤링썬더 작전을 개시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플레이쿠에서의 기습 공격은 당시 남베트남에서 일어났던 베트콩이 일반적인 기습 공격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이 사건을 과장하고 확대해석하여 북폭 명분을 합리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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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남베트남의 우정을 얘기하는 현수막)
미국의 린든 존슨 정부는 북폭 게시와 더불어 지상군 파병을 감행했다. 베트남의 첫 번째 파병 부대로는 미 해병대가 선택되었다. 대략 3,000명 정도의 미 해병대가 남베트남의 항구도시이자 휴양지인 다낭(Da Nang)에 상륙하는 걸로 결정됐다. 1965년 3월 8일 미국 정부는 극적인 효과를 보이기 위해 미 해병대 대원들로 하여금 상륙정에 태워 해안가에 상륙하도록 했다. 미케 해변에 상륙한 미군들은 상륙전까지만 해도 전투가 있을 것이라 긴장했었다. 뜻밖에도 그들을 맞이한 것은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기다리던 베트콩이 아니라, 미군을 환영하러 나온 남베트남의 여학생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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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케 해변에 상륙한 미군 탱크)
당시 남베트남의 여학생들의 환영식과 더불어 해변가에는 “당신은 꼭 여기 있어야 합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예상 밖의 환영식을 받은 미군은 긴장을 풀었고, 현장에 있던 카메라맨들은 이 광경을 카메라에 담아냈다. 당시 미 해병대 대원으로 다낭 해변에 상륙했던 병사 필립 카퓨토는 다큐멘터리 PBS 베트남 전쟁에서 당시 본인이 느낀 감정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제가 가장 놀란 건 베트남이 정말 아름답다는 거였어요. 논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대나무와 야자수 숲 안에 아름다운 마을이 있었죠. 멀리는 파란색의 산악 밀림이 펼쳐져서 마치 지상낙원 같았어요. 베트남 여인인지 여학생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들이 줄지어 있던 게 기억납니다. 마치 천사들이 내려온 것 같았어요. 꽤 놀랍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매혹적인 곳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니 말이죠.”
다낭항에 상륙한 미군들은 해변을 벗어나 남베트남 내륙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당시 다낭에 상륙했던 미 해병대는 군용트럭과 탱크도 함께 상륙했고 이들도 내륙으로 들어갔다. 이런 과정에서 미군들은 또 놀라운 광경을 보기도 했다. 초록 군복을 입고 M-14 소총으로 무장한 미군들이 지나가는 걸 본 한 베트남 노인은 다음과 같은 소리를 지르며 미군을 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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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상륙했던 젊은 미 혀병대 대원)
“Viva La Francais”
바로 “프랑스 만세”였다. 즉 그 노인은 미군을 보고 프랑스군으로 오해했던 것이다. 1965년 3월 8일에 있던 미 해병대의 다낭 해변 상륙작전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의 수렁으로 빠졌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이었다. 이들이 처음 상륙한 이후 총 280만 이상의 미군이 베트남을 거쳐 갔고, 1968년에는 이들의 숫자가 54만 9,000명에 육박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이 전쟁에서 이기지 못했으며 패배했다. 따라서 미 해병대의 성공적인 다낭 상륙작전은 역사적인 맥락에서 보았을 때, 패배를 향한 행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