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미국 사회와 보수주의의 등장

(1975년 베트남의 통일을 이룩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전차)


1970년대의 미국 사회는 1950년대나 1960년대의 미국 사회하고는 분위기가 달랐다. 1950년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의 영향을 받아 막대한 경제적 이득과 대호황을 누렸다면, 1960년대의 미국은 베트남 전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흑인인권운동과 반전운동 그 외의 여러 사회운동이 전개되면서 ‘히피(Hippe)’라고 불리던 젊은이들이 기존의 체제에 반대하여 여러 사회혁명을 추구하며 세상을 변혁하고자 하는 움직임들이 많이 일어났었다. 1970년대 미국은 닉슨의 베트남화 정책에 따라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철수하게 되면서 1960년대에 있던 사회 혁명적 분위기는 조금씩 잠들기 시작하며, 사람들이 정치적인 부분보단 개인적인 문제나 개성에 관심을 두게 된 시대였다.

(1970년대 미국의 청바지 광고, 당시 미국인들은 이러한 것들에 보다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되었다.)


특히나 미국은 오랫동안 베트남 전쟁을 치르면서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다. 대략 800만 톤이나 되는 폭탄을 베트남 전쟁에서 사용했던 미국은 1500억 달러나 되는 비용을 베트남 전쟁에서 사용했다. 간접비용으로는 그보다 더 많은 액수가 사용되었다. 1973년에 파리 평화 조약을 맺고 남베트남에서 철수한 미국은 1975년 동맹국이었던 남베트남 공화국이 멸망하면서 궁극적으로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배를 반성하지 않았다. 미국의 CIA는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를 비롯한 외국 지도자들의 암살계획을 세우는 작업을 진행했다. CIA는 쿠바에 가축의 질병을 퍼뜨려서 쿠바 국민이 키우던 돼지 50만 마리를 폐사시켰다. 칠레에서는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진 대통령 아옌데를 암살해버렸다. 이처럼 미국은 1970년대 중남미에서 적잖은 만행을 저질렀다.

(오일쇼크, 1970년대를 강타한 오일쇼크는 전 세계에 경제적으로 영향을 주었고 이는 미국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베트남 전쟁 말기 미국에서 터졌던 ‘웨터게이트 사건(Watergate scandal)’은 미국인들에게 정부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1974년 중동에서 ‘오일 쇼크(Oil Shock)’가 터져 미국은 그로 인한 경제적 타격을 받았다. 오일 쇼크로 인한 석유 가격 급등은 미국 경제의 전 영역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인플레이션은 1972년 3.3%에서 1974년에 11%로 급증했다. 디트로이트의 제너럴 모터스의 경우 무려 3만 8000명의 노동자를 무기한 일시 해고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1970년대 초 미국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또한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베트남 전쟁의 패배와 더불어 히피로 대표되던 소위 ‘신좌파(New Left)’ 운동은 점차 힘을 잃었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인 타격과 전쟁에서 졌다는 패배의식이 소위 좌파운동에 대한 반감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1970년대 미국인들은 자기 개성에 더욱 더 관심을 두게 되었다. 1970년대 미국에선 조깅이나 다이어트 그리고 건강한 식단과 같은 것들이 국민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종교적인 선교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으며, 침술과 같은 동양 의학도 많은 인기를 끌었다.

(낙태가 권리라고 주장하는 한 미국인 여성)


(로데 웨이드 판결에 반대하는 미국의 보수주의자들)


이렇게 개인적인 사생활이나 개성에 관심을 두었던 1970년대 미국에서 점차 세력을 확장해 나가던 집단과 세력들이 형성되었는데, 그들이 일으킨 것이 바로 ‘신보수주의 운동(New Right Movement)’이었다. 이들이 앞장서서 활동했던 문제는 1970년대 시작된 낙태 논쟁이었다. 이들은 낙태를 무조건적으로 반대하며 진보세력들의 입장과 상반되는 견해를 피력했고, 1973년 미국 연방 정부가 임신 3개월까지는 낙태를 허용하도록 판결을 내렸던 ‘로데 웨이드 사건(Roe v. Wade)’이 있자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낙태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1970년대 당시 보수주의자들은 라디오와 TV등을 통해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인 보수주의를 설파했고, 대중매체를 통한 그들의 선전은 미국인들에게 적잖은 인기를 끌 수 있었다. 낙태 반대 운동 뿐만 아니라 그들은 가정지키기 운동, 미국 전통지키기 운동등을 하며 일반인들로 하여금 1960년대를 비판하게 만들고 애국주의와 반공주의를 강조했다. 즉 1960년대 소위 히피들일 외쳤던 사회변혁이나 프리 섹스, 여성 해방, 성소수자 해방 등과 같은 가치하고는 매우 상반된 견해를 가진 이들이 1970년대에는 인기를 끌었다. 특히나 그들은 대중매체의 이용과 선전을 통해 미국의 중산층 계급의 지지를 끌어냈다.

(지미 카터 대통령, 그는 인권 대통령이라는 말을 앞세웠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많은 국제적 개입과 간섭을 했다.)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자진해서 사퇴하자 그 대통령 자리는 제럴드 포드가 이어받았는데, 1976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지미 카터가 당선되었다.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취임 당시 인권을 증진시키겠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인권이라는 소재를 적대세력인 소련을 공격하는 도구로 사용함으로써 양국 관계를 냉각시키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지미 카터 대통령을 소위 인권 대통령이라고 하지만 그는 재임 기간 중 적잖은 실수를 저질렀다.

(1979년 이란에서 일어난 호메이니 혁명, 이 혁명으로 팔레비 왕조가 무너졌다.)


(이란 인질극 당시 타임즈 기사)


1979년 이란에서 호메이니가 이끄는 혁명으로 정권을 잡자 그해 10월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선 분노한 이란인들이 미대사관에 침입해 63명의 미국인을 인질로 잡고, 암 치료를 위해 미국에 입국한 팔레비의 귀환을 요구했었다.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이란에 대한 경제제제를 가하면서 풀려나지 않은 인질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그래도 석방되지 않자 카터는 인질 구출을 위한 군사 작전을 승인했는데, 그 작전은 헬리콥터 사고로 8명의 사망자만 내고 실패했다. 또한 지미 카터 정부는 캄보디아에서 광적인 대학살을 벌이던 폴포트가 1978년에서 1979년 사이 베트남 하노이 정부에 의해 군사적으로 전복당하자 베트남 전쟁에서의 굴욕을 되갚아주기 위해 미국의 카터 정부는 베트남에 맞서 폴포트의 ‘크메르루주(Khmer Rouge)’ 정권을 지원하는 파렴치한 일을 저질렀다.

(로널드 레이건, 1950년대 유명한 헐리우드 배우였던 그는 1980년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미국을 부강하게 만든다는 목적을 가지고 반공주의를 추구했다.)


카터가 집권하던 시기 미국은 경제적으로 큰 난관이 있었고, 빈부격차도 극심했다. 1978년에는 제2차 오일쇼크까지 발생했다. 1979년 미국에는 아파도 병원에 가거나 약을 살 수 없는 아이들이 100만 명이나 되었다. 1800만 명이나 되는 17세 이하의 아이들은 치과에 가본적도 없었을 정도다. 미국의 젊은이들 중 특히 흑인 젊은이들 가운데 20~30%가 실직 상태였다. 1970년대 중후반에 등장한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인기를 끌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1980년 미국에서 공화당 출신 후보 한명이 대통령으로 당선 되었다. 그는 1950년대 미국의 헐리우드에서 명성을 떨쳤던 배우였고, 제법 인기도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반공주의자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이었다.


로널드 레이건이 집권하면서 미국사회는 다시 1940,50년대와 같은 반공주의 시대로 귀환했다. 물론 1950년대 미국이 보였던 반공주의 국가보다는 자국민에 대한 사상 탄압의 강도는 약했지만, 확실히 그 시기 미국에서는 전통주의와 보수주의, 애국주의 그리고 반공주의가 강조되었다. 이러한 로널드 레이건의 집권은 베트남 전쟁으로 패배의식에 빠져있던 미국인들에게 다시 한번 미국이 부강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고, 실제로 미국은 그 기간 동안 국방비에 많은 지출을 했다. 그 과정에서 반공주의자 레이건은 국제적으로 제국주의적 침략행위와 간섭행위를 일삼았다. 대표적으로 1983년에 있었던 그레나다 침공과 콘트라 반군 지원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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