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그스만 침공과 쿠바 미사일 위기

(쿠바 미사일 위기를 만화화한 작품. 흐루쇼프와 케네디가 팔씨름을 하고 있다.)

 

경제 호황이 한참이던 1950년대 미국은 냉전이라는 구도에서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과의 경쟁을 이어나갔었다. 이러한 경쟁은 우주와 세계 정치 그리고 문화를 놓고도 이루어졌지만, 군사력 경쟁이 가장 위협적이고, 민중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미국과 소련 간의 군사력 경쟁에서 양측은 상당히 많은 재정을 군비를 확장하는데 지출했는데, 핵무기 개발은 더더욱 그러했다. 이런 긴장 및 불안감이 존재하던 1957년 미국에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바로 소련이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호(Sputnik)를 우주에 쏘아 올렸다는 소식이었다. 스푸트니크호 발사를 시작으로 양측은 우주 경쟁을 끊임없이 했는데,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과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 발렌티나 테레시코바가 소련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에서 적어도 1960년대 중반까지 이 분야에 있어선 소련이 미국보다 앞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우주경쟁이 있던 1961년 동과 서로 분단되었던 독일의 베를린에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는 일이 있자, 양측의 긴장감은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전 세계는 자칫하면 핵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위기에 봉착했는데, 그게 바로 1962년에 있었던 ‘쿠바 미사일 위기(Cuban missile crisis)’다.

 

제3차 세계대전의 위기가 시작될 뻔했던 나라 쿠바는 식민지 지배라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소위 신대륙을 발견했다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쿠바를 찾은 이후부터 쿠바는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었다. 그러던 19세기 중후반 쿠바인들은 스페인을 상대로 독립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었는데, 이러한 과정은 결과적으로 1898년에 미국과 스페인 간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미서전쟁에서 스페인이 물러간 이후 미국은 쿠바에다 형식적으로 독립국가를 세웠다. 그러나 이것은 쿠바의 독립을 보장하지는 못했던 것은 당연했고, 결과적으로 미제국의 경제적 지배로 이어졌다.

(쿠바 혁명 당시 시에라마에스트라를 중심으로 혁명 투쟁을 했던 혁명 게릴라들)

 

이렇게 해서 쿠바는 제국주의 앞잡이 풀헨시오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 정권에 이르기까지 50년 동안 미제국의 간섭과 통제를 받았었다. 쿠바 경제의 중심인 사탕수수에서 나오는 자본은 당연히 미제국의 자본가들을 배불리는데 사용되었고, 쿠바의 노동자들은 제국주의자들의 착취하에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던 1956년 대략 82명의 혁명가들을 태운 보트 그란마 호가 쿠바에 상륙했다. 그 상륙작전을 이끌었던 인물이 바로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다. 상륙했을 당시 바티스타군의 기관총 세례를 받았던 그들중 살아남은 일부는 쿠바의 밀림속으로 들어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을 중심으로 혁명기지를 건설했고, 1958년 여름에 대략 200명 이상의 게릴라군을 확보했다. 그렇게 하여 쿠바에서 혁명투쟁을 하던 그들은 1959년 1월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입성하여 800명의 게릴라로 바티스타 괴뢰군을 격퇴하고 쿠바를 장악했다.

(수도 아바나에서 연설하는 피델 카스트로)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

(체게바라)

바티스타 정권 타도 이후 등장한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의 혁명정부는 외세의 지배를 거부하고 자주적인 독립국가를 세우려 했다. 당시 그들은 미국에게 빼앗긴 경제 주권을 되찾고자 국가의 주요산업을 국유화했고, 극심한 빈부 격차를 줄이고 소외된 민중의 삶을 개선시키고자 했다. 즉 그들은 쿠바의 부를 학교와 병원, 복지를 늘리는 데 활용하고자 했었다. 그러나 피델 카스트로가 사회주의적 개혁 및 정책들을 실행에 옮기자 미국의 아이젠 하워 정부는 쿠바에게 경제적 제제 및 방해공작을 일삼았다. 1959년 10월 쿠바에 대한 불법 공습을 개시했던 미국의 아이젠 하워 정부는 1960년 3월부터 쿠바 침공을 위한 반공 게릴라를 양성했다.

(콜오브듀티 블랙옵스에서 나온 피그스만 침공 당시 미군의 비행장 폭격)

(피그스만 침공 당시 포로로 붙잡힌 CIA 군대)

이렇게 하여 미국과 쿠바의 긴장관계는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다. 1961년 3월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존F케네디는 그해 4월 17일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쿠바 망명자들로 구성된 1400명의 병사를 쿠바의 피그스 만 해안에 상륙시켰다. 그들을 상륙시킴과 동시에 미국은 쿠바 비행장을 폭격했다. 그러나 미국의 침공을 대비했던 피델 카스트로 정권은 침략을 무찔렀다.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군은 망명자로 구성된 CIA 부대의 병사 114명을 사살하고 1189명을 포로로 붙잡았다. 그러나 케네디는 쿠바를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침공작전 실패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 공산주의와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1961년 11월 케네디는 소위 ‘몽구스 작전(Operation Mongoose)’를 실행하여 쿠바를 겁박하는 작전을 전개했었다. 1962년 4월에는 미군 4만 명이 “카리브해의 한 섬에 대한 상륙작전”을 목표로 2주간 군사훈련을 실시했었다. 그해 5월에도 규모는 작지만 비슷한 훈련이 두 차례나 있었고, 케네디 정부는 그해 여름과 가을에 걸쳐 쿠바 침공을 위한 비상 계획을 강화했다. 1962년 10월에는 카리브해의 한 섬에 해병 7500명을 상륙시켜 현지 정부를 전복시키는 가상 침공훈련을 전개했다.

(쿠바 지도)

(쿠바 미사일 기지 사진.)

미국의 쿠바 침공을 격퇴하고 난 이후 피델 카스트로는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과의 관계를 확장했다. 다음해인 1962년 10월 소련의 수상 니키다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는 쿠바에다 핵폭탄이 정착된 ICBM을 설치했다. 1962년 10월 14일 일요일 미국의 U2 정찰기가 쿠바에서 충격적인 사진들을 찍어 보내왔는데, 분석 결과 사진에 포착된 것은 소련의 SS4 중거리탄도미사일이었다. 이렇게 되자 미국과 소련이 제3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가게 되었다. 10월 22일 미국은 데프콘 3를 발령했고, 10월 24일에는 사상 처음으로 데프콘 2까지 발령했으며 소련 지역 목표물들에 대한 타격 준비를 마치기 까지 했다. 또한 케네디는 소련에 대한 자신의 최후통첩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쿠바 ‘고립책’의 일환으로 해상 봉쇄 명령을 내렸고, 쿠바 침공을 위한 총공격 태세에 돌입했다. 심지어 핵무기를 탑재한 B-52 폭격기까지 발신시켰었다.

(쿠바 미사일 위험도를 보여주는 관련 지도)

(미국의 쿠바 봉쇄를 나타낸 그림)

(쿠바를 봉쇄했던 미국 군함들)

 

그러자 소련의 니키다 흐루쇼프는 “미국이 우선 쿠바를 다시 침공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다음으로 터키에 있는 미국의 미사일을 철수한다면 소련도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시키겠다.”라고 응답했다. 비록 존F케네디가 “터키에 있는 미국의 미사일을 철수한다는 제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케네디가 첫 번째 요구안을 받아들이자 1962년 10월 26일 소련의 니키다 흐루쇼프는 쿠바의 주권을 존중하겠다는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쿠바에 있는 소련의 미사일 기지를 철수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이로써 13일간 지속되었던 쿠바 미사일 위기는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지 않고 끝이 났다.

(케네디와 흐루쇼프)


미국의 역사 교과서나 소위 자유주의 역사 교과서에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마치 소련과 쿠바가 전쟁을 일으키려 하며 위협했던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실제로 더 많은 위협을 가하고, 협박을 표출했던 주체는 소련이 아닌 미국이었다. 왜냐하면 미국이 소련보다 군사력에서 압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 초 소련이 4기의 ICBM을 가지고 있었을 때, 미국은 대략 45기의 ICBM을 가지고 있었다. 그 시기 소련이 192대의 중폭격기를 가지고 있었을 때, 미국은 1500대 이상이나 된는 중폭격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미국이 약 2만 5000개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을 때, 소련은 그것에 1/10 정도 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13일 간의 핵전쟁 위기가 끝난 이후에도 미국은 데프콘 2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소련의 흐루쇼프를 향해 “미국이 소련보다 우위에 있다는 경고”를 지속적으로 보냈다. 그렇게 해서 위기는 1962년 11월 20일에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

(0시 1분 전. 이 책은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책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미국은 자신들이 군사적으로 소련을 압도한다는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즉 ‘힘의 논리’라는 것에 심취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미국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소련과 쿠바를 위협했고, 그 과정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미국은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에도 쿠바를 상대로 각종 경제 제재를 가해왔다. 이것또한 제국주의적 힘의 논리로 맞서는 미제국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쿠바 미사일 위기가 있던 같은 시기 지구 반대편에선 패배를 향한 질주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게 바로 베트남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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