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과 미국의 참전(WW1 and United States)

('국민 의무에 대한 호소'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군 입대를 강요하던 대표적인 포스터다.)

 

19세기에 시작된 산업혁명을 통하여 기술의 발달과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유럽의 열강들은 시장확보라는 명분하에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와 같은 나라에 식민지들을 건설했다. 이 당시 세계 열강으로 거듭났던 국가는 당연히 영국과 프랑스 같은 나라였고, 이들은 수많은 국가들을 식민지화했다. 따라서 나중에서야 식민지 경쟁에 뛰어든 독일과 같은 나라들은 이에 적잖은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1870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가 독일을 통일하면서, 독일 제국도 서구 열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같은 나라들이 점차 세력을 확대하면서 20세기 초 유럽은 상호 경쟁하는 두 개의 거대한 동맹으로 조직되었다. 하나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맺은 삼국협상(Triple Entente)고 다른 하나는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그리고 이탈리아가 맺은 삼국동맹(Triple Alliance)다. 이런 체제는 사실상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 있는 위협을 시초부터 가지고 있었다.

(사라예보 사건, 1914년 6월 28일에 일어난 이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Franz Ferdinand)이 한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자 청년에게 암살당했는데, 이 암살사건을 계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자 세르비아의 동맹국 러시아 제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인 독일이 러시아와 영국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감행했으며, 심지어 오스만 제국과 아시아의 일본까지 상대편에게 선전포고를 감행하게 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지도)

(독일의 슐리펜 계획)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시기 독일은 이른바 ‘슐리펜 계획(Schlieffen-Plan)’을 세워 영국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 연합국을 단기간에 굴복시키고자 하였다. 독일 제국이 벨기에를 침공하여 프랑스로 진군을 하긴 하였으나, 생각보다 준비를 철저히 했던 프랑스군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 사이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 제국군이 독일군을 압박했고, 영국이 프랑스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은 참호전으로 변모해갔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널리 사용된 기관총)

(탱크, 탱크는 제1차 세계대전때 최초로 등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그전까지 존재했던 그 어떤 전쟁보다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전쟁이었다. 4년간의 전쟁 기간 동안 대략 1000만 명 이상이 죽었고, 2000만 명이 부상당했다. 위에서 상술한 산업혁명은 비단 경제적 발전과 자본주의의 발달만 두고 왔던 것이 아니었다. 산업혁명으로 발달된 자본주의 시스템은 대량살상을 위한 무기 또한 마찬가지로 대량생산했다. 특히나 전투를 대학살극으로 만든 무기는 바로 기관총(Machine Gun)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분당 몇백 발을 발사하는 기관총은 참호에 배치되어 돌격해오는 보병들을 향해 발사되었고, 기존의 구식전술에 머물러 있던 전략가들은 상대편 진영을 접수하기 위해 기관총이 배치된 전선에 돌격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독일, 영국, 프랑스 할 거 없이 재앙에 가까운 전사자들이 수많은 전투에서 발생했다. 대표적으로 1916년 7월에서 11월까지 전개되어 양측 모두 수십만의 병사를 죽게 만든 ‘솜 전투(Battle of the Somme)’가 그러했다. 그런 참호화된 전선을 뚫기 위해 만들어진 무기가 바로 장갑으로 덮인 탱크(Tank)였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양측 모두 사용되었던 독가스도 대량의 인명 살상의 원인이었다. 그 외에도 비행기, 잠수함, 기계화된 대형 군함 등과 같은 무기들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되었다.

(솜 전투, 1916년에 있던 솜 전투는 양측 모두 극심한 사상자를 만들어 냈다.)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을 묘사한 그림)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당시 미국은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은 표면적으로 중립을 내세웠다. 당시 미국은 표면적으로는 중립을 내세웠지만,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상당한 경제적 이득을 보고 있었다. 중립국 미국은 영국 프랑스와 같은 연합국 측에 많은 물자를 팔았다. 이런 행동은 독일 제국 입장에선 당연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고, 독일은 잠수함 작전을 개시하여 적국과 교역하는 배들을 침몰시켰다. 그 결과 1915년 5월 7일 독일의 유보트(U-Boat)가 1200명의 승객을 수장시킨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Sinking of the RMS Lusitania)’이 일어나기도 했다. 루시타니아호가 침몰되어 128명의 미국인이 사망하자, 미국내에선 참전여론이 형성되기도 했었다. 어쨌든 중립을 표방하던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독일에게 그런 불법 행위를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했다. 그러나 전쟁을 지속하던 독일의 잠수함 부대는 지속적으로 미국의 상선을 공격했고, 미국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치머만 전보, 제1차 세계대전에 미국을 참전시키도록 결정적인 이유를 제공했다.)

 

1917년 4월 6일 마침내 미국은 독일 제국에게 선전포고를 감행했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 표면적으로 중립주의를 내세우던 미국이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된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독일이 비밀리에 멕시코에 보냈던 ‘치머만 전보(Zimmermann Telegram)’에 있었다. 그 치머만 전보는 독일이 멕시코의 참전을 유도하기 위해 보낸 전보였다. 그 전보를 영국이 해독하여 미국에게 알렸는데, 거기에는 미국이 도저히 용납하지 못할 내용이 있었다. 그 전보를 보면 “미국에 대항하여 멕시코와 독일이 손을 잡자는 제안과 19세기 당시 멕시코가 미국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게 해준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거기다 그 시기부터 미국은 멕시코와 국경분쟁을 치르고 있었기에 그 전보는 자국의 팽창을 원하는 미국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 참전하게 된 본질적인 이유는 유보트의 상선 침몰보다 치머만 전보에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 해병대 포스터)

미국이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하던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환점이 될 일이 일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 편에 서서 독일과 전쟁을 치르던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터졌고, 8개월 뒤 사회주의 혁명가 레닌이 주도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다. 볼셰비키 혁명으로 탄생한 사회주의 러시아는 제국주의 전쟁인 제1차 세계대전에서 빠지고자 했고, 1918년 3월 독일과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Treaty of Brest-Litovsk)’을 맺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빠졌다. 이 과정에서 독일군은 영국과 프랑스 연합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동부전선에 있던 군대를 서부전선에 투입시켜 전세를 역전시키고자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퍼레이드)

 

1917년의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를 지원해줄만큼의 병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징병법을 통해 대략 200만에 달하는 병력을 확보했지만, 1918년 봄까지 미군 상당수는 전투에 투입되지 않았다. 그래도 적잖은 미군이 1918년에 유럽전선에 투입되었고, 1918년 6월 초 부터는 프랑스군을 도와 파리 근처의 샤토 티에리에서 독일군의 격렬한 공격을 격퇴시키기도 했다. 그 외에도 미군은 프랑스의 랭스 지역에서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냈고, 1918년 9월 26일 아르곤 숲 전투에선 100만 명이 넘는 미군이 독일군에 맞서 싸웠다. 아무튼 1918년 중순부터 미군의 지원으로 영국 프랑스 측 연합국은 독일군을 몰아낼 수 있었고, 1918년 11월 11일 결국 독일은 연합국에게 항복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귀국한 병사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은 독일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자국민에 대한 탄압도 같이 했다. 이는 특히 전쟁에 반대했던 사회주의자들이나 아나키스트들 그리고 독일계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1917년 6월 미국의 윌슨 정부는 ‘방첩법(Espionage Act)’ 통과시켜 “미국이 전쟁을 수행하는 와중에 의도적인 불복종에 항명, 미국 육군이나 해군에서 복무 거부를 야기 또는 시도하거나 미국의 신병모집이나 입대를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자”는 누구든지 최고 20년 징역형에 처하도록 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 방첩법 조항에는 “이 절의 어떤 내용도 정부의 행위나 정책에 대한 논의, 논평, 비판을 제한하거나 한정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조항까지 있었다.

 

이 법이 통과되고 나서 필라델피아에서 찰스 셴크(Charles Schenck)라는 사회주의자가 징병볍과 전쟁에 반대하는 전단을 배포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고, 미국 사회주의자의 아버지 유진 뎁스(Eugene Debs)도 방첩법 위반 죄로 체포됐다. 그 시기 미국에선 “반정부적인 길거리 연설을 막는다”는 목적을 가지고 미국자경순찰대(American Vigilante Patrol)이 생겨 소위 간첩과 정치범들을 만들어 내고, 신고했다.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간첩 혹은 폭도들로 간주받아야할 각오를 해야 했다. 그렇다면 당시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했던 사람들의 의견은 옳지 않은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이 그 전쟁에 반대한 것은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당시 혁명가 레닌이 그 전쟁을 ‘제국주의자들 간의 전쟁’으로 간주했듯이 미국의 사회주의자들도 그리 인식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참전을 반대했던 혁명가들도 그러한 관점을 가지고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했다. 따라서 그들이 반대했던 것은 사회주의자로서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저항의 목소리였다.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 그는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운 것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그는 엄청난 인종차별주의자였고 백인우월주의자였으며 제국주의자였다. 또한 친미제국주의자 이승만의 지도교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미국과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당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미국의 참전이 “전쟁을 끝내기 위한 것 혹은 민주주의를 위해 세계를 안전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며 터무니없는 말들을 했다. 다음과 같은 윌슨이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유럽에 국한된 것이었고, 아시아나 아프리카와 같은 나라들과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의 식민지에는 해당사항이 전혀 없는 얘기였다. 거기다 미국은 1918년 혁명 러시아에서 백군 반혁명 세력들이 전쟁을 일으키자 사회주의 러시아를 없애기 위해 침략을 자행했고, 기존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을 식민지배하는 제국주의 국가의 모습을 보였다. 따라서 제1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는 얘기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제1차 세계대전은 미국으로 하여금 제국주의 국가로 부상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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