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서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서방 연합국이 독일군을 향해 제대로 된 반격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작전이 있었다. 이 작전은 이후 <지상 최대의 작전>이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 <마이웨이> 그리고 <밴드 오브 브라더스>등에서도 묘사되는데, 그 만큼 제2차 세계대전에 있어서 한 획을 긋는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그 작전이 바로 노르망디 상륙작전(Invasion of Normandy)이다.

 

1940년 히틀러의 나치독일은 전격전(Blitz Krieg)을 개시하여 벨기에와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그리고 프랑스를 단기간에 점령했다. 당시 독일군의 거침없는 진격을 막지 못한 연합국(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캐나다 등)은 프랑스의 덩케르크(Dunkirk)에서 대규모의 군대를 철수시켜야 했다. 이후 영국은 1940년부터 1943년까지 독일군의 공습에 맞서 싸웠다. 19416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자 1달 뒤 스탈린은 영국의 처칠에게 제2전선을 구축해 달라고 요청했었다. 194112월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미국도 전쟁에 참전하게 되자 제2 전선의 구축 문제는 영국과 미국이 해결해야 할 숙제가 됐다.

1942년과 1943년 사이 미국과 영국은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 작전을 수행했는데, 2 전선은 형성되지 않았고 스탈린이 요구했던 제2 전선의 구축은 자연스럽게 미뤄졌다. 19428월 영국과 캐나다군이 프랑스에 있는 디에프라는 해변을 급습했지만, 어디까지나 정식적인 상륙작전이 아니었기에, 대실패로 끝나고 말았고, 이에 분노한 스탈린은 루스벨트와 처칠에게 각각 불만을 드러내는 서신을 보냈다. 결국 194311월에 열린 이란의 테헤란 회담에서 처칠과 루스벨트 스탈린은 19445월에 서유럽 상륙작전을 진행하기로 하는 데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실제 상륙작전은 약속했던 것보다 1달 정도 지나서 개시되었다.

 

1944년에 들어서자 연합군은 상륙정과 보급품을 충분히 갖추게 되었다. 1월에는 사령부를 편성하고 최고사령관에 미국의 아이젠하워 장군을, 그리고 지상군 사령관에는 사막의 쥐라 불렸던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을 임명했다. 아이젠하워와 몽고메리는 독일군이 해안 일대를 요새화하고 있었으므로 해안을 침공하는 데는 독일군의 허점을 이용하고 기만하기 위한 고도의 책략이 필요하다 결론 내렸다. 상륙해안은 영국에서부터 전투기 사정거리 내에 있는 곳으로 대체로 네 군데가 고려되었다. 그 가운데 네덜란드 해안은 영국 항구에서 너무 떨어져 있고 브리타니 해안은 독일로부터 너무 떨어져 있었다. 해협에서 가장 가까운 파드칼레 해안은 독일군의 최대 방어가 예상되는 곳이었다. 따라서 연합군 사령부는 비록 정박시설이 없는 약점을 지닌 곳이기는 하지만 비교적 방비가 허술한 노르망디 해안을 상륙지점으로 선정했다.

당시 독일군은 60개의 사단을 가지고 프랑스 지역을 수비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10개 사단은 전차와 장갑차를 위주로한 기갑사단이었다. 영미연합군은 노르망디에 상륙하기 위해 독일 측에게 역정보를 흘려보내고, 기만책을 사용했는데, 당시 노르망디를 방어하고 있던 상당수의 독일군은 도버 해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로써 노르망디 상륙을 위한 서방 연합국의 준비는 끝이 났다.

194466일 새벽, 연합군은 사상 최대 규모의 육해공군 합동작전을 개시했다. 연합국은 6,500척의 선박과 12,000대의 항공기를 가동시켜 첫날 17만 명의 병력을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시켰다. 101 공수사단을 비롯한 미군 공수부대가 새벽에 노르망디 지역으로 침투하여 독일군의 후방을 교란했고, 상륙부대는 오마하 해변과 유타 해변, 골드 해변, 주노 해변 그리고 푸앙트 뒤 오크 지역에도 상륙하여 작전을 개시했다. 이 중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치러졌던 곳은 오마하 해변이었는데, 상륙 당일난 미군은 최소 3000명에서 5000명이나 되는 사상자를 내고 상륙에 성공했다. 특히 오마하 해변에 상륙한 미군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속출했던 것은 수십 대의 탱크가 썰물로 인하여 수장당했고, 상륙한 보병들은 각종 장애물과 철망에 1700개의 대인지뢰가 깔린 곳에서 MG-42의 집중 사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194466일 서방 연합군은 노르망디에 상륙하는 데 성공했고, 대략 43일 동안 노르망디 인근 지역에서 독일군에 맞서 전투를 치렀다. 1944725일부터 미국과 영국군이 독일군을 공격하면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프랑스 쟁탈전으로 바뀌었다. 연합군은 한 달에 걸쳐 브르타뉴 반도의 일부 항구를 제외한 프랑스 서북부 전체를 점령했다. 그리고 825일 프랑스의 수도 파리까지 입성하게 됐고, 독일 국경을 향해 진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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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9-05 14: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의 바그라티온 작전
개시로 서부전선에 대한 압박이 상대적
으로 줄어 들지 않았을까요.

캉 전투와 빌라 보카주를 필두로 해서
SS부대들이 미영 연합군을 상대로 지연
작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NamGiKim 2019-09-05 14:26   좋아요 0 | URL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 소련군의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군은 더 이상 힘을 잃었고, 1944년에는 레닌그라드까지 잃었습니다. 글랜츠의 독소전쟁사를 읽어보면, 서방 연합군보다 소련군의 역할이 더 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