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본격적으로 일으킨 일본 제국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소련과의 무력 충돌이었다. 만약 국공합작에 성공한 중국이 소련과 손을 잡고 만주를 공격한다면 이는 일본에게 매우 불리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만주와 중국에서 화려한 승리에 심취해 있던 일본 관동군은 소련을 과소평가하며 무모한 도발을 거듭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과 소련군과의 대규모 무력 충돌이 일어났는데, 그게 바로 하산호 전투(Battle of Lake Khasan).

  

하산호 전투는 1938729일부터 911일까지 대략 2주에 걸쳐 벌어졌던 전투였다. 당시 소련의 바실리 블류헤르 원수가 지휘하는 소련 극동군의 규모는 20개 저격사단, 5개 기병사단 전차 1500, 항공기 1560대 그리고 37만 명에 달하는 대군이었다. 반면 일본 관동군의 전력은 조선군과 만주국 괴뢰군까지 합쳐도 그 절반에 불과했다. 당시 일본의 참모본부 작전과장이던 이나다 마사즈미 대좌는 상부에서 내린 결정안과는 상관없이 하산 호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나다는 일본군이 소련군보다 훨씬 정예군이기 때문에 소련군의 화력과 숫자와는 상관없이 극복할 수 있다는 헛된 믿음이 있었다.

  

715일 하산 호 동남쪽에서 순찰 중이던 일본군 헌병대가 소련군의 총격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군이 소련 영내 30m까지 들어오면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일어나면서 소련군과 일본군간의 긴장상태가 높아졌고, 720일에는 다시한번 소련군과 대치하는 상황이 놓였으며, 729일 오전 9시 일본군 순찰대는 소련군 1개 소대가 진지를 구축하는 모습을 포착했다. 결국 일본은 729일 오후 1시 소련군의 진지를 공격하며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소련군이 전차까지 투입하자 일본군은 열세에 몰렸다. 다음날인 730일 밤 1030350명 규모의 일본군 1개 대대가 서남쪽에 있는 하산 호에 진격했고, 다음날인 731일 새벽 2시쯤해서 소련군과 다시한번 교전을 벌인다. 이번에는 소련군이 후퇴했다. 81일 소련군은 전차 부대와 3천 명의 병력을 앞세워 하산 호를 공격했고, 항공기 130대까지 동원했다. 그러나 소련군이 자신들이 목표했던 것을 점령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렇게 하산 호 전투가 확대되자 양측은 84일부터 정전 교섭을 시작했고, 일본은 소련의 요구를 받아들여 811일 모스크바에서 정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 분쟁은 1905년 러일전쟁 이래 일본이 처음으로 강대국과 싸운 대규모 전투였다. 일본군은 대략 526명이 전사하고, 914명이 부상당했던 반면 소련군은 236명이 전사하고 611명이 부상당했다고 알려졌지만, 일본 측 통계에 따르면 소련군 전사자가 일본군 전사자 보다 200명 더 많은 것으로 나온다. 정확히는 잘 모르겠으나, 확실한건 소련군의 전사자도 절대로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군이 소련군을 완벽히 꺾은 것은 아니었다. 일본 관동군은 여전히 소련군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하산호 전투 이후에도 버리지 않았다. 그 결과 1939년 노몬한에서 일본군은 소련군에게 참패를 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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