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폭풍 - 1945년 8월 9-16일, 소련의 만주전역 전략 공세
데이비드 M. 글랜츠 지음, 유승현 옮김 / 길찾기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히틀러의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시작된 독소전쟁은 1941622일부터 나치독일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 하는 194558일까지 대략 4년간 전개되었던 참혹한 전쟁이었다. 대략 4년간의 전쟁에서 소련의 붉은 군대는 대략 1000만 명 이상의 군인을 잃었고, 1600만 명 이상이나 되는 민간인이 나치에게 학살당했으며, 대략 2600만 명의 사망자를 냈다. 이 책과 <독소전쟁사: When Titan Clashed How the Red Army Stopped Hitler>의 저자인 데이비드 글랜츠(David M Glantz)가 항상 지적해왔듯이, 서방세계에 알려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의 이미지는 만슈타인이나 하인츠 구데리안과 같이 나치 독일 측 장군들이 가지고 있던 이미지다. 따라서 서방세계가 인식하던 소련군은 군사적으로 체계적이지도 못하고 오직 인해전술식 작전을 고수하며 돌격밖에 모르는 군대였다. 여기에는 독일 장군들이 소련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오리엔탈리즘적 사고관도 반영되었다.

 

이와 같은 편견은 서방에서 만든 대중매체에도 잘 드러난다. 2001년 미국에서 제작한 영화인 에너미 엣더 게이트(Enemy at the Gate)2011년 태극기 휘날리며의 감독으로 유명한 강재규 감독의 마이웨이(My Way)를 보면 소련군들은 아예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돌격하는 장면이 나오고, 전술적으로 굉장히 비효율적인 군대로 묘사된다. 미국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FPS 게임인 콜오브듀티(Call of Duty)에 나오는 소련군 또한 언급한 영화들과 다를 게 없는 모습이다. 2003년에 제작된 콜오브듀티1에서의 첫 소련군 미션은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배를 타고 전선에 도착한 알렉세이 이병(게임 주인공)은 소련군 정치장교로부터 고작 5발의 총알을 받은 채 돌격하고, 모신나강 소총이나 탄약을 나눠주는 정치장교는 총이 없는 사람은 총을 든 사람을 따라가라. 그리고 그자가 죽으면 총을 주워서 적에게 사격하라라는 막장스러운 연설을 한다. 그리고 진격하다 보면 후퇴하는 병사를 정치장교가 기관단총이나 기관총으로 총살한다.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 참전자들이 이와 같은 서방 매체를 접했을 때, 그들은 서방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매우 분노했고, “자신들은 그 정도로 열악하지 않았고, 굴라그에서 석방시켜 만든 형벌부대도 후퇴한다는 이유로 즉시 처분하는 일은 없었다라고 하며 이에 항의했다.

 

이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서방세계가 만들어낸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소련군의 이미지는 반공주의와 러시아에 대한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기독교주의가 결합된 편견 그 자체다. 미군에서 복무하며 소련군에 대해 연구해온 군사학자 데이비드 글랜츠는 이와 같은 서방의 역사 왜곡에 항상 반대했고, 비판해왔다. 이번에 필자가 매우 흥미롭게 읽은 책인 8월의 폭풍<August Storm>은 서방의 학자들과 매체가 만들어낸 신화적 허구를 소련 측 문서를 기반으로 하여 이를 반박한다. 데이비드 글랜츠의 독소전쟁사를 읽어본 독자라면 아는 사실이겠지만, 1941년부터 1942년까지의 소련군은 절망과 후퇴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1943년 대규모 전차전인 쿠르스크 전투의 승리를 기점으로 소련군은 군의 개편과 전략 전술의 개편 전차를 중심으로 한 제병협동 전술의 발전을 이루어냈고, 그 이후의 전투와 작전에서 체계적인 전략 전술을 통하여 독일군 종심 방어선을 돌파함으로써 붕괴시켰다. 19454월부터 있던 베를린 공방전(Battle of Berlin 1945)에서 50만 명의 붉은 군대가 76만 명의 독일군을 손쉽게 격파했던 역사적 사실에서 우리는 소련군 또한 굉장히 체계적인 전략 전술을 구사하는 훌륭한 군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4558일 나치독일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한 이후 소련군은 또 다른 전쟁을 준비했다. 그 전쟁은 추축국 중에 마지막까지 저항하고 있던 일본을 상대하는 것이었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부터 태평양 전역에서 일본과의 전투를 치러오던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대일전의 참전을 여러 차례 요구했었다. 마치 스탈린이 루스벨트와 처칠에게 제2 전선을 형성할 것을 요구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1945년 오키나와 전투(Battle of Okinawa)를 치르던 미군은 예상보다 많은 미군 전사자가 속출한 것에 당황했고, 소련군의 참전도 두려워하게 됐는데, “소련이 조기에 참전하면 태평양에서의 미국 패권에 큰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걱정 때문이었다.

 

1939년 노몬한 전투에서 게오르기 주코프(Georgy Zhukov)가 이끄는 소련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적이 있었다. 그 바람에 일본은 극동지역을 팽창하는 것에서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지대로의 영토 팽창으로 나가게 되었고, 일본은 19414월 소련과 일소 중립조약을 체결했으며 그 이후에는 만주에서 방어선을 만들었다. 하지만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이 보다 격해지면서 일본의 대본영은 만주에 있던 상당수의 관동군을 중국 지역과 동남아시아 그리고 태평양 지역으로 배치하게 되었는데, 이는 만주지역에서 전략상의 공백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만주지역 관동군은 1945년 소련군의 공격이 있기까지 대략 70만 대군을 갖춘 대규모의 군대였고, 명실상부 만주지역의 주력부대였다.

 

히틀러의 제3제국을 멸망시킨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은 19456월부터 유럽에 있던 소련군을 시베리아 열차를 통해 극동에 배치했다.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Aleksandr Vasilevsky)가 후에 있을 만주 진공 작전을 지휘하게 되었다. 소련군은 크게 3군데에서 만주 전역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따라서 배치되는 군대도 크게 3개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소만 국경지대와 몽골 만주 국경지대에 배치된 자바이칼전선군이었고, 그다음은 연해주 지역과 블라디보스토크 쪽에 배치된 제1극동전선군이었으며, 마지막은 만주 샤오싱안링 산맥을 향해 공격하게 될 제2극동전선군이었다. 소련이 계획한 이 작전에는 150만 이상의 병력과 5500대 이상의 전차와 자주포, 27000문 이상의 야포와 박격포 및 3700대 이상의 항공기가 동원되었다.

 

194589일 소련군이 만주전역에서 공격을 가하자 일본군은 소련군의 예상과는 달리 손쉽게 전선이 무너지고, 방어선이 붕괴되었다. 크게 3군데에서 진격한 소련군은 사막 지역과 늪지대 그리고 산맥을 손쉽게 돌파하며, 거침없는 진격을 계속했다. 그들 중 일부는 만리장성까지 가기도 했고, 치스차코프 휘하의 소련군은 대략 35년간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반도로 진군했다. 그리고 제2극동전선군 중 일부는 1905년 러일전쟁 때 일본에게 빼앗겼던 사할린 이남에 입성했다. 일본 천황이 항복선언을 하기 3일 전 대본영은 일본군에게 저항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지만, 만주의 일부 일본군 부대는 815일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 이후에도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822일까지 소련군의 진격에 저항했던 후터우 요새의 일본군들이 그러했다.

 

일본군의 저항은 8월 말까지 계속되었지만, 소련군의 진격작전은 1주일만인 816일에 끝났다. 즉 단 1주일 만에 소련군은 만주전역으로 진군했고,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쟁취했다. 굉장히 신속한 승리였고, 소련군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마지막 테스트를 멋지게 성공시켰다. 저자 데이비드 글랜츠는 만주 진공 작전 당시 소련군의 승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리고 있다.

 

만주 전역의 소련군 지휘관들은 모든 방면, 모든 단위부대에 걸쳐 큰 위험을 감수하며 대담한 작전을 실시하고, 자유롭게 계획을 수행했다. 소련군이 작전 초기에 실증했던 엄청난 유연성은 작전 전구의 특정한 요구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소련군 지휘관들의 전반적 지휘력 상승과도 연관되어 있다. 전쟁은 새루운 세대의 야전군, 군단, 사단, 여단, 연대 지휘관을 잉태했으며, 그들의 전문성은 최대 4년에 걸친 전투의 산물이었다. 이 세대의 지휘관들은 만주 전역이 기나긴 전쟁의 마지막 단계임을 깨달았고, 따라서 전역을 단기간 내에, 성공적으로 종결지으려 했다. 평화를 되찾으려는 의지는 전쟁에서 마지막으로 격렬하게 싸울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소련군은 외과수술처럼 정밀하게 전투를 수행했고, 11일에 걸친 싸움 끝에 치열한 전쟁을 종결지었다.”

 

출처: 8월의 폭풍 p.147

 

이처럼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소련군은 체계적인 전략 전술을 바탕으로 상대방을 궤멸시키는 군대였고, 특히나 만주 지역에서 이를 아주 훌륭히 해냈다. 따라서 서방측이 만들어낸 소련군에 대한 이미지는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소련군이 멋지게 성공시킨 만주 지역에서의 진격작전은 왜 서방세계에서 잊혀진 것일까? 그 이유는 같은 시기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는 핵무기 경쟁시대를 알리는 냉전의 신호탄이자 일본의 항복과 바로 연결되다 보니 소련의 만주 공세는 잊혀지기 십상이었다. 거기다 냉전시기 소련과 경쟁했던 미국이 이를 홍보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따라서 그동안 잊혀졌던 소련군의 만주 공세를 재조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책 저자인 데이비드 글랜츠에 대해 소개하자면 그는 1942년에 태어나 1963년 미군 포병 장교로 입대했고,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베테랑이었다. 그는 서방 군대의 상징 NATO에서 정보장교로 근무했었고,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 등에서 소련군과 소련 군사사에 대해 연구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소련군에 대한 서방의 편향된 시각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며, 이를 입증하기 위해 소련군과 소련 군사사를 소련의 입장에서 연구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 중 하나가 ‘8월의 폭풍이다. 사실 이 책은 1980년대 데이비드 글랜츠가 쓴 논문이기도 하다. 그가 이 논문을 완성하던 시기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이 반공주의를 강화하던 시기였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그의 행동은 참으로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소련의 만주 진공 작전은 우리 역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이 책에서도 언급되는 내용이지만, 1극동전선군에 있던 치스차코프 휘하의 제25군은 작전 당시 한반도 이북을 해방했던 군대이기 때문이다. 당시 한반도에 입성한 소련군은 한반도 이북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고,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이런 중요한 사실을 깊이 가르쳐오지 않았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이 이를 막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런 역사를 알아야 하고, 공정한 평가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 말을 좀 더 일반화하자면, 기존에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이 강요해오던 일방적인 반공주의적 시각과 관점에서 벗어나 역사를 좀 더 폭넓게 보고, 공정하게 평가를 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런 공정한 역사적 평가를 해야 할 한국 근현대사 사건 중 하나는 소련의 만주 진공 작전도 포함된다. 필자는 소련군 만주 진공 작전 일인 89일에 맞춰 이 책을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반공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이런 훌륭한 연구 서적을 집필해준 저자 데이비드 글랜츠 교수님과 이 책을 번역하느라 고생해주신 유승현 역자님 그리고 이 책의 출판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신 대한민국의 주은식 장군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승현 2019-09-03 15: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늦게 서평을 확인해서 죄송합니다. 서평 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ㅠㅠ

NamGiKim 2019-09-03 15:08   좋아요 0 | URL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