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쟁 - 오늘의 유럽을 낳은 최초의 영토 전쟁 1618~1648
C. V. 웨지우드 지음, 남경태 옮김 / 휴머니스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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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교 때 세계사를 배울 때 꼭 외우게 시켰던 조약 가운데 하나가 "베스트팔렌 조약"이다. 왜 베스트팔렌 조약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외웠다. "베스트팔렌 조약" 독일에서 신교와 구교의 전쟁을 그치고 화해한 조약이라는 공식을 외워야 한다. 그런데 역사란 것은 수학 공식이 아니다. 수학만 해도 공식이 어떻게 도출되었는지를 알아야 외울 수 있었던 것처럼, 역사적인 사건도 그 배경과 맥락, 진행 과정과 결과를 공부해야 외울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적인 사건을 성적으로 등치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약 이름과 중요한 의미는 알아도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모른다.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는지, 얼마나 큰 피해를 주었는지는 논외가 된다. 마치 삼국지 게임을 하는 것과 같다.(내가 삼국지를 좋아하기 때문에 삼국지로 특정하지만,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 전부 그렇다.) 능력이 수치화한 장수들이 등장한다. 그 장수들에게 수치화된 병력을 딸려준다. 한턴이 지날 때마다 그 병력의 숫자는 줄어들지만 최후에 내가 살아남으면 이기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얼마만큼의 병력이 줄어도 상관없다. 그런데 만약 이 병력이 수치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어떨까? 수치화의 위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역사적인 사건을 그저 몇 가지 사건을 외우는데에 그치는 것은 수치화의 위험으로 직결되는 일이다.


  30년 전쟁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전쟁 자체만 놓고 보자면 이보다 더 긴 전쟁, 그리고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 전쟁이 중요한 이유, 베스트팔렌 조약이라는 한 단어로 퉁치고 지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이 전쟁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의 영토가 어느 정도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은 합스부르크 왕국이라는 강자가 다스리던 국가였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에스파냐와 오스트리아를 지배했던 강자이다. 에스파냐가 자신들의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30년 전쟁에 끼어든 이유는 순전히 종교적인 이유만은 아니다. 오히려 정치적인 이유가 더 크다고 하겠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카를 5세 사후 그의 동생 프리드리히 1세가 다스리는 오스트리아계와 그의 아들 페펠리프 2세가 다스리는 에스파냐계로 분리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왕위를 가진 오스트리아계와 식민지 경영을 통하여 강자가 떠오른 에스파냐계의 연합을 막을 수 있는 유럽의 국가는 없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결정에 따라 유럽은 큰 변화를 겪는 것이 유럽의 상황이었며, 아무리 몰락했다고 해도 30년 전쟁 당시에도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향력은 막대했다. 이러한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하는 프랑스, 이런 프랑스에 경쟁 의식을 가진 영국, 전쟁을 통하여 독립하려는 네덜란드, 호시탐탐 유럽의 중심지로 넘어가려는 스웨덴. 30년 전쟁은 이렇게 복잡한 정치적인 상황들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일어나고 커진 것이다. 


  30년 동안 전 유럽의 국가들이 끼어들어 벌인 전쟁의 주되된 무대는 독일과 보헤미야였다. 더구나 이 전쟁은 겨울의 휴전도 없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니, 그 땅이 황폐화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결과는 통하여 독일과 보헤미야 국민들이 얻은 것은 없다. 종교적인 신념으로 시작한 전쟁이 정치적인 전쟁으로 변질되어 가는 동안 처음 전쟁을 시작할 때의 열정과 생각은 사라지고, 어느 쪽이라도 좋으니 빨리 전쟁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것이 당시 독일과 보헤미야의 국민들의 생각이 아닐까?


  30년 전쟁이 끝나고 신성로마 제국은 사실상 와해되었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향력도 줄어들었으며, 본격적으로 프랑스와 영국의 대결 시기로 넘어가게 된다. 신성로마제국에서 독립한 네덜란드는 향후 전 세계의 바다를 누비고 다니며, 독일은 상당히 오랫동안 통일되지 못하고 여러 제후들에 의하여 통치된다. 종교적인 신념에서 정치적인 신념으로, 봉건제에서 영토 국가로 유럽이 전환하는 그 시점에 30년 전쟁이 있다. 30년 전쟁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재미는 없다. 딱히 매력적인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 스웨덴의 왕 아돌프2세와 그의 재상 옥센셰르나 외에는 딱히 뛰어난 인물도 매력적인 사람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읽는 재미가 없다. 게다가 전쟁의 범위가 거의 독일과 보헤미야, 특히 독일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지명도 그렇게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고 이름도 거의 비슷한 사람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정신차리고 계보도를 그려가면서 읽지 않으면 읽고도 무슨 내용인지 모르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래서 읽기가 쉽지 않다. 본인도 스웨덴 왕이 등장하는 부분은 꽤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 외에 부분은, 특히 초기 전쟁 부분은 정말 인내심을 시험당하면서 읽었다. 저자와 번역자의 내공과는 상관없이 등장하는 인물들이 고만고만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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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8-02-08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책은 재미를 느끼기 어렵거나 오래 걸리는 것 같네요. 사서 쟁여놓고 아직 못 읽은 책인데 흥미를 느낄 당시에 이렇게 사들인 책이 꽤 있습니다. 30년의 전쟁이면 한 세대의 기간동안의 전란이었으니 독일 땅의 근대화가 늦어질 수 밖에 없었겠어요. 막연히 종교전쟁으로만 배운 걸 기억합니다.
다른 이야기지만 한국도 전투만 없었지 지난 68년간 전쟁 중이죠, 아니 남북대결은 없었지만 남과 북에서 각각 ‘전쟁‘때문에 1950년 이후에도 죽거나 다친 사람은 계속 나왔죠. 그렇게 보면 겉과는 달리 한국인의 멘탈엔 꽤 크고 깊은 상처가 내재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다 털어내려면 통일과 별개로 시간이 많이 걸리겠어요.

saint236 2018-02-08 23: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걸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없어져야 하는데 지금 상황으로 보면 지난한 일입니다
 
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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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쟁이 김훈의 오랫만의 소설이다.

 

  아직 읽어야할 책들이 많고, 소설을 즐기는 편이 아닌지라 굳이 사지 않았던 책이다. 그런데 책을 빌려줬던 녀석이 고맙다는 편지와 함께 선물해 준 책이다. 그래서 읽기 시작했는데 단숨에 읽었다. 김훈의 소설이 그렇듯이 읽히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다른 소설보다 쉽게 읽히는 편이다. 그렇지만 중간중간 멈춰서는 부분이 있다. 연대기를 따라서 가는 일반적인 소설과 김훈의 소설이 다른 점이 이 부분이다. 정신차리지 않고 읽다보면 시간과 공간이 꼬여 있다. 갑자기 이 사람의 삶에서 저 사람의 삶으로 넘어가 있기도 한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마차세의 삶에서, 마장세의 삶으로, 마동수의 삶으로, 이도순의 삶으로, 박상희의 삶으로 넘어간다. 어느 하나 가볍지 않은 삶인데 그들의 삶이 섞여 있으니 막힐 수밖에 없다.

 

  소설의 시대배경이 그렇듯이 주인공들의 삶은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이다. 돈, 사랑, 직장, 자녀 등등 모든 가치관들의 이면에는 살아남는 것, 이 난리를 이겨내고 살아남는 것에 가 있다. 어떤 사람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데 같이 산다. 어떤 사람은 군수물자를 삥땅치고, 어떤 사람은 한국에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고 외국으로 떠돈다. 그러면서도 그곳에서 그는 그렇게도 싫어하던 한국사람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간다. 얼마의 돈을 보내면서 자신이 감당하지 못하는 장남으로서의 역할을 동생에게 떠넘긴 미안함을 달랜다. 물론 그에게 미안함이라는 말이 존재하는지도 의문이긴 하지만.

 

  각자가 여러가지 모습으로 열심히 살아가지만 그들의 삶에서 무엇이 남았는가? 시간이 흐르면서 모질게 연명해온 목숨이 끊어지기도 하고, 쓸쓸이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잘나간던 사업도 어느날 파산하고, 함께 살던 부인도 부하 직원과 떠난다. 형과 동업하던 마차세도 좋은 시절을 보내고 택배 배달기사로 서울 남부 순환 도로에서 동부 순환 도로로, 외고가 순환 도로에서 내부 순환 도로로 하루종일 달린다. 꿈도 젊음도 사라지고, 소시민의 모습만 남아 있다. 김훈이 말한 것처럼 그들은 전혀 영웅적이지 않다. 그렇게 아등바등했는데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막막한 세상 속에서 몸 비빌 수 있는 작은 거점하나 없이 부평초처럼 떠돈다. 박상희는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도 편지를 보냈던가? 그 편지를 과연 장세의 부인은 받았을까? 받았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 것이며, 받았더라도 읽을 수는 있었을까? 등장인물들의 삶에서 한가지를 생각해 본다. 무엇을 위해서 살아왔는가? 무엇을 위해서 그들의 젊음을 소비했는가? 인생이 무상하다.

 

  다만 이 책에서 발견한 한 가지 희망은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은 살아가고, 아이들은 성장한다는 것이다. 박상희가 옷가게를 차렸다. 누니가 혼자서 화장실에 가게 되었다. 그나마 마차세의 삶이 다행이다 싶은 것은 모두가 공터에 서 있는 것 같은 세상 속에서 상희와 누니라는 몸을 기댈 수 있는 작은 거점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다만 이 책이 몇 페이지가 더 연장된다면 어떤 모습들이 그려질까? 상희의 옷가게는 마트에 쫓겨서 매출이 급감하여 폐업하게 되는 단계로 나아갈 것이고, 누니는 세상에 귀신은 없지만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는 것을 때닫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차세는 취업통보를 기다리면서 결코 임시직일 수 없는 임시직을 계속 이어가고 있지 않을까? 너무 멀리 나갔는지도 모르겟다. 그렇지만 자기 주인공들의 삶을 그리면서 남루한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는 작가의 말을 떠올린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가 아닐까?

 

  열심히 살고 있는 이들의 삶을 보면서 마음이 따뜻하고 뿌듯해야 하는데 허허롭다. 마치 내가 공터에 서 있는 것 같다. 이또한 글쟁이 김훈의 능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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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정전
루쉰 지음, 전형준 옮김 / 창비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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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한 소설이다.

  

  중국에 대해서 약간이나마 썰을 풀 수 있는 사람이라면 루쉰을 이야기할 것이고, 그의 소설 아Q정전은 당연히 따라나오는 것이니 유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보면 이 책도 고전의 반열에 올라야 마땅한 소설이다. 고전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제목은 알고, 내용도 아는데 실제로 읽어보지는 못한 것들! 이것이 고전이 아니겠는가? 나에게도 이 소설은 고전의 영역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날 팟캐스트를 듣게 되었고, 아Q정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루쉰 단편소설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 책에서는 놀랍게도 아Q정전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광인일기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다루었기 때문에 흥미가 생겼고, 생일을 맞이하여 스스로에게 선물로 사주었던 책이다. 오래전에 읽었던 책을 이제야 리뷰를 하게 되니, 아무리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하는 일이라고 해도 내 게으름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아Q정전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광인일기와 아Q정전이다. 혁명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근대를 중국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갔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다른 분위기로 그리고 있다. 광인일기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지식인의 삶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저자는 피해망상증에 걸린 친구의 일기를 입수하여 그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고 하면서 서사를 풀어가기 시작한다. 물론 광인의 일기는 루신의 생각이겠지만. 광인은 지금까지 지탱된 사회는 사람을 잡아먹는 사회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이 사회라는 것은 중국의 유교 체제와 왕조라는 통치 시스템을 말하는 것이다. 권력자들은 이런 시스템을 통하여 백성들을 쥐어짜고, 그것을 기반으로 살아왔다는 점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통찰은 지식인 내지는는, 권력층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통찰이기에 나는 광인일기가 근대를 살아간 지식인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는 소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사람을 잡아먹는 사회 체제 속에서 본인도 사람을 잡아먹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기도 사람을 잡아먹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는 사회를 비판하지만, 그 식견과 교육을 가능하게 한 것이 본인들이 비판했던 사회 체제의 서포트가 없었다면 불가능하다는 당시 중국 지식이의 절망을 잘 표현하는 것이다.


  반면 아Q정전은 당시 지식인이 아니라 일반 대중의 삶을 다루고 있다. 아Q는 원래 별볼일 없는 사람이었다. 여기서 얻어터지고, 저기서 얻어터지고는 강자 앞에서는 정신승리를 외치는 사람이다. 실제적으로는 얻어터지면서도 정신적으로는 내가 이겼다는 자기 만족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그 자기 만족이라는 것도 얼마나 기만적인가? 자기보다 약하거나 만만해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어느샌가 그 사람에게 모든 것을 쏟아내니 말이다. 이러한 아Q가 시대의 흐름 속에 휩쓸려 들어간다. 뚜렷한 이념도 없이, 상황에 따라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린다. 마치 아Q는 가만히 있는데 그의 주변 사람들이 그를 휘두르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결국 아무 생각이 없던 아Q는 혁명이다, 반혁명이다라면서 자기도 의도하지 않게 정치적인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고, 죽어도 마땅한 사람으로 마지막을 장식하게 된다. 


  광인과 아Q 모두 혁명의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두 사람 모두 바람직한 인간상은 아니다. 이 두 사람 모두 시대에서 새롭게 사람을 잡아먹는 권력자들에게 이용당하다가 도태되었다. 중국만 그런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루신의 이 소설이, 단편 길어야 중편인 이 소설이  왜 중국의 근현대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는지 잘 알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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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는 어떻게 문명을 구했나 - 세상을 바꾼 의학의 10대 발견
존 퀘이조 지음, 황상익 외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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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때 누구나 한번은 해봤을 것이다. 모기에 물리면 어떻게 하는가? 배운대로 모기 물린 곳에 침을 바른다. 혹은 손톱으로 +를 그린다. 한번으로 안되면 여러번을 했다. 그러다가 모기 물린 곳의 붓기가 가라앉으면 침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날 방송을 통하여 이것이 얼마나 나쁜 습관인지 알게 되었다. 침을 바르고, 손톱으로 상처에 +를 그리는 것은 세균 감염이 되기 좋은 여건을 만드는 것이라 상처가 덧날 수 있다고 했다. 이 방송을 본 후에 내가 얼마나 무식한 일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의학 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발견 10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오늘날로 보면 당연한 것인데 당시에 이 당연한 것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얼마나 애를 쓰고, 어려움을 겪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같이 소개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모기에 물렸을 때 행동하는 것처럼, 당시 발견된 의학적인 내용과는 상충되는 일들이, 혹은 잘못된 오해들이 당시 사회의 일반적인 생각들이었다.


  "콜레라는 어떻게 인류를 구했는가?"라는 책의 제목은 10대 발견 가운데 공중위생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사건에서 따온 것이다. 저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2장의 제목을 책 제목으로 그대로 가져오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볼 때에는 책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 소개된 10가지 의학의 발견은 오늘의 시각으로 보면 너무 당연해서 사소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효과가 지대했던 , 그래서 한 획을 그은 사건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의 가장 대표가 2장의 내용이다. 영국에서 콜레라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다가, 한 사람이 콜레라가 오염된 같은 물을 쓰기 때문에 전염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지만 그것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도시가 정비되고, 상수와 하수를 정비하는 사업을 진행하면서 콜레락라가 자연스럽게 사그라들게 된 내용에 대해서 기록하면서, 여기에서부터 공중위생이라는 개념이 출현하게 되었다고 소개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들은 이러한 의학적인 발견들이 인간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다가 생각지도 못한 사건들이 발생하고, 거기에서 의학적인 발견을 이루어냈다는 점이다. 만약 그들의 연구에 불행한 사고(?)가 없었다면 그 일들을 이루어 내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지 모른다는 것을 보면서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을 품어본다.


  한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마지막 10번째로 거론되고 있는 대체의학이다. 대체의학이라는 것도 발견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지. 대체의학에 눈을 돌리는 것이 의학적인 발견이라고 한다면 왜 그런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밝혀야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다른 장에 비해서 깊이가 없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대체의학을 의학의 발견이라고 하기보다는, 요즘은 이런 추세로 나가고 있다는 차원으로 에필로그에서 이야기를 하던던지, 아니면 맥락 상 아예 빼 버리는 것이 흐름상 무난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의학에 대해서 깊이보다는 얕고, 사건 중심으로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혹은 청소년들에게는 한번쯤은 읽어보라고 권할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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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 평전 - 사람을 얻어 난세를 평정한 용인술의 대가 중국 역대 제왕 전기 시리즈
장쭤야오 지음, 남종진 옮김 / 민음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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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治世之能臣 亂世之奸雄!


  조조를 표현하는데 이보다 더 정확한 말이 있겠는가? 삼국지의 인물 가운데 가장 저평가된 인물을 꼽아보라면 조조를 꼽을 수 있다. "난세의 간웅"이라는 말 때문에 조조를 꺼림직하게 생각하는 것이 삼국지 독자들의 기본 자세이다. 쓸만한 사람이긴 하지만 선뜻 감정이입이 안되는 인물! 그 사람이 조조이다. 그래서인지 삼국지 모든 게임을 즐겨했던 나이지만 조조를 택하여 플레이를 했던 적이 거의 없다. 가끔 하다하다 심심하면 한번씩 해보는 인물이 조조이다. 


  그런데 한번 곱씹어 본다. 그렇게 간웅이라는 말로 저평가되고, 왠지 음험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는 조조 및에 그만큼 대단한 인물들이 부하로 그렇게나 많이 몰려 있을 수 있을까? 강대한 원소를 물리치고 중원의 강자로 우뚝 설 수 있었을까? 이 책은 우리가 알고 있는 조조의 시각에서 벗어나 조조를 재평가 해보려고 한 책이다. 물론 곳곳에 조조에 대해서 전통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면들이 있기를 하지만, 그래도 비교적 조조에 대해서 새롭게 해석해 보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점이 이 책이 내게 흥미로운 이유이다.


  난세의 간웅이라는 말은 조조의 역할에 대해서 한 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조조의 출현은 시대적인 요청이었다는 것이다. 조조가 활동했던 시대는 평화로운 시대가 아니라 난세라고 말할 수 있는 전시이다. 이런 시대를 과거 한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이데올로기로 헤쳐나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유비가 그렇고, 원소가 그렇고, 그 시대를 살다가 사라져 버린 많은 인물들이 그렇다. 그 인물들 가운데 조조와 비교하여 나은 인물이 한둘이던가? 조조가 아무리 문장가라고 해도 당시 조조보다 뛰어난 문장가들이 한 둘이겠으며, 정치력으로 따져도 조조보다 나은 사람이 한 둘이겠는가? 지력은 어떠하며, 역사적인 식견은 어떠한가? 조조보다 나은 사람들이 한 둘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조가 중원을 차지하고 한나라 영토의 2/3를 차지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에게는 남들이 갖지 못한 유연한 사고 방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출신 성분으로부터의 자유로움, 사람을 사귐에 있어서의 파격적인 모습, 현실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고집마저도 꺾을 수 있는 유연함이 그의 강점이 아니겠는가? 그는 이러한 모습을 가지고 자기 휘하에 있던 사람들을 100% 활용하여 대업을 이루었다. 


  물론 이러한 그의 모습도 그가 적벽대전을 겪기까지의 모습이지만 말이다. 적벽대전이 삼국지의 분수령이 되는 이유는 이 일을 통하여 삼국이 정립되었고, 유비가 촉한을 차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난세의 간웅이라는 평가 앞에서도 파안대소할 수 있었던 조조의 유연함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적벽대전 이후 조조는 난세를 버리고 치세로 돌아섰다. 그렇지만 그의 시대는 아직 난세이다. 난세 속에서 그가 가지고 있던 강점을 잃어버렸으니 몰락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사고의 틀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섭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조조평전을 읽으면서 문득 한국의 현 상황을 생각해본다. 오늘날 한국의 모습이 난세와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 국민들은 문제인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여전히 보수적인 사람들은 문제인에 대해서 빨갱이라는 공격을 서슴지 않는다. 그런 상황 속에서 문제인 대통령이, 그리고 그의 각료들이 선택해야할 것이 무엇인가? 보수로부터의 인정? 국민 모두로부터의 애정? 그런 것은 일단 추후로 미루어 두자. 아직 난세이다. 이 시대가 문제인을 택했다. 그런데 가끔은 이 정부가 자신들을 치세의 능신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두렵다. 적벽대전 이후의 조조처럼 정권 창출한 것에 머물러 있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난세의 간웅이지, 치세의 능신은 아니다. 유연한 사고 방식으로 과거의 적폐와 사람을 옭죄는 이데올로기로부터 이 사회를 이끌어 가는 것이 이 시대가 요청하는 지도자이다. 민주당, 자한당, 국민의 당, 바른 정당, 정의당이라는 다당제 형국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내딛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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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8-02-01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조에 대한 治世之能臣 亂世之奸雄!란 표현은 아무래도 소설 삼국지에서 연유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정사 삼국지의 경우 아무래도 위를 정통성있는 정부로 보아 조조에 대한 평가가 훨씬 후하다고 하는군요^^

saint236 2018-02-03 11:20   좋아요 0 | URL
정사 삼국지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옵니다. 조조는 이것을 개의치 않았을 것이고요, 진수는 역사적인 기록을 남긴다는 명분으로, 그리고 나관중은 조조의 간사한 측면을 부각시킬 생각으로 기록을 했겠지요. 아래는 정사 삼국지 위서 무제기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일찍이 허자장(許子將)에게 “나는 어떤 사람이오?”라고 물었으나 자장이 대답하지 않았다. (태조가) 계속 묻자 자장이 말했다,

“그대는 치세(治世)의 능신(能臣)이고 난세(亂世)의 간웅(姦雄)이오”

태조가 크게 웃었다.